188강-YouTube강의(밤과 낮)170502-이 근호 목사
제188강, 제목은 ‘밤과 낮’입니다. 제목을 낮과 밤이라 하지 않고 밤과 낮이라 한 것은 밤이 먼저 있고 낮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1장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밤 또는 저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가 전부다 어두울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밝은 것은 피조세계에서는 그걸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먼저 있었고 그 어두움에서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피조세계가 하나님 뜻에 의해서 어두움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들 피조세계는 거기에 대해서 반항질하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낮이 있다는 것, 밝다는 것, 그걸 당연시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두운 것이 나으냐, 밝은 것이 나으냐, 역시 밝은 것이 좋지요. 환하니까. 어우둠에서는 기피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만드신 것은 우리 인간들 좋아라 만든 게 아니고 낮과 밤이라는 그 교차되는 가운데서, 교차되게 하는 그 원리 원칙 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그 의중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밤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그 반복성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마저 어느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반복되고 있습니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방향성은 바로 천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피조세계에 오시는 것을 마중 나오는 또는 반기는 고대하고 대기하고 있는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밤과 낮이. 이러한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시편19편에 보면 거기에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19편에 보면, “ 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밤과 낮이 뭔가 본래의 창조의 내용을 전달, 전달, 이동, 이동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온 피조세계가 밤과 낮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건 아니고 우리 주님께서 밤과 낮을 자기 쪽으로 몰리도록 그렇게 손길을 가지고 작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밤이 되면 어두움이 둘러싸고 낮이 되면 밝음이 둘러쌀 때 이게 단순이 밤과 낮이 둘러쌌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주님의 선한 손길이 우리를 밤과 낮이라는 모양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쌌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밤은 밤대로 예수님의 소식을 알려주고 낮은 낮대로 소식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러한 소식을 밤낮으로 부여받고 있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낮과 밤을 통해서 밤과 낮과 더불어서 예수님 소식을 마땅히 펼쳐내고 그걸 표현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밤과 낮만 이렇게 창조주를 드러내면 그만인가. 정말 범죄한 인간으로서 언제까지 밤과 낮이 해야 될 기능을 같이 참여하지 못하고 동떨어져서 자기가 신인 냥 이렇게 까불대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배신하는 그런 행동을 언제까지 나갈 것인가.
창조주를 보여주는 그런 새로운 인간형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낮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원칙대로 밤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밤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 창세기32장에 보면, 거기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지요.
야곱이라는 사람이 출생할 때부터 그 야곱에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창세기32장 24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밤과 더불어 나타난 사람인데 밤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야곱과 씨름하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밤에 천사가 나타났는데 야곱의 등장과 천사의 등장은 둘 다 어떤 공통적인 목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서로 만나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 공통적인 목적이 뭐냐 하면 바로 야곱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얍복강까지 왔어야 했고 그리고 밤에 나타난 천사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필히 야곱을 꼭 만나야 됐다 이 말이죠.
그것이 밤에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우리가 생각하기는 밤과 낮이 우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창조의 비밀을 그냥 막연하게 전달한다. 이렇게 되어있지만, 그걸 이 역사라는 바탕위에서 구체화 시키는 그러한 사건들이 성경에 보면 군데 군데 터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낮의 인물인 야곱과 밤에 나타나는 천사의 만남입니다.
결국 낮과 밤은 공통점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공통점이냐, 낮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야곱에게 다른 사람과는 달리 언약에 의해서 주도 당하고 있는 그러한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우선이 아니고 언약이 우선이에요. 이 말은 야곱은 야곱 자신의 잘남과 구원을 위해서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야곱에서 주어진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언약이 야곱을 찾아갔고, 찾아간 정도가 아니고 아예 태어나게 했고, 태어나서부터 줄곧 언약이 주도되어서 야곱으로 하여금 창조의 비밀까지 맞닥뜨리도록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그렇게 인도하신 겁니다.
그렇게 인도하셔서 결국은 진짜 창조주와 관련된 분을 밤에 만나는데 그 밤에 만남으로서 낮의 사람 야곱은 밤의 사람 천사한테 지도록 되어있어요. 지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이긴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야곱이 밤의 사람한테 패배당해서 축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갑과 을의 취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낮의 사람 야곱은 더 이상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가 계속 살아가는 것이 드디어 벽에 부딪쳤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의 존재의 의미는 뭐냐, 이 땅에서 낮의 모든 인간들은 밤에 나타나는 천사를 만나지 아니하면 자기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낮에 같이 활동하는 인간들이 그게 인간의 본래 본질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언약사람이기 때문에 언약에 이끌린 사람이기 때문에 비로소 아! 나는 내 자체로서 이것은 살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되지요. 인간이 죽는다고 인간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죽으면 안 됩니다.
밤의 사람. 언약을 완성시키는 분과 맞닥뜨릴 때 인간은 자기가 죽기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죽음을 알려주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 비로소 제공되는 진실, 죽음의 진실과 생명의 진실을 이렇게 천사를 만남으로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성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