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4장2절(처소)170502b-이 근호 목사
자, 시작 합니다. 요한복음이 그냥 우리가 편한 대로, 그냥 우리 예수 믿는 거, 그거 믿음으로 인정 해주고 “기다려봐. 내가 곧 다시 올게! 내가 데리러 올게!” 이렇게 편하게 생각 하시든지 안 그러면 베드로를 그냥 데리고 가시든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왜 주님께서는 베드로 보고 처소를 새로 마련해야 되는가?
마련되어야 될 처소가 도대체 어떤 처소인가?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제 와서, 처음부터 그러면 몰라도 이제 와서 또 틀어져 가지고 안 된다고 하게 되면 이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제는 목숨까지 내놓아도 안 되는 입장에서는, 자기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끝났어요. 목숨 내놓아도 안 받겠다는데, 그러면 더 이상 뭘 내놓습니까?
그래서 제자들 쪽에서는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완전히 다 차단되어 있는 입장에 있어요. 그것은 처소, 이 처소가 예수님께서는 이 처소를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처소, 처소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흔히 집에 반려견 키우잖아요. 고양이나 개, 그 고양이, 개 왜 키웁니까? 그게 내가 나하고 소통 하는 거예요. 내가 개하고 소통 하는 게 아닙니다.
고양이랑 소통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하고 주고받고 대화 하는 거예요. 개와 고양이는 나의 변신이고 나의 하나의 모형이고 그런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럴 때 나는 내가 만든 환경 속에 내가 놓여 있는 셈이 돼버려요. 내가 만든 환경 속에. 내가 호명하면 "독구, 독구" 호명하면 늘 그 자리에 딱 앉아 가지고 사료 달라고 입 벌리고 있는 그 환경. 나를 위한 환경이죠.
예수님께서는 뭘 원하느냐 하면 바로 아들의 환경을 원합니다. 아들의 환경, 다른 말로 하면 아들다움의 환경. 아들다움의 환경은 아들답다, 아들답다, 답다, 다움의 환경. 아들 답다의 환경을 뒤에 뭐라고 하냐면 이걸 가지고 아버지다움의 환경이라고요(아들의 환경=아들다움의 환경=아버지다움의 환경). 아버지가 원했던 환경입니다.
아버지가 원했던 환경.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배치 식으로 이렇다, 이렇다고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들어오지를 못하게 만들고 이렇게 예수님 혼자 처소를 만들어 감으로 말미암아, 이 처소 만들기에는 일체의 인간들이 어떤 보탬이나 협조나 하청이나 이런 게 일체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결코 자기 처소, 자기가 생각한 처소, 자기가 염두에 둔 처소를 인간은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낼, 벗겨버릴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 하라 했지만 인간은 자기를 부인 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주인공인 것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주인공인 것을. 자기를 포함해서 자기 처소 안에 자기가 가두어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왜 나쁘냐 하면은, 여러분 요한복음 5장에 보세요.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심판주가 아니고 산자나 그 다음에 뭡니까? “산자나 죽은 자의 심판자다.” 산자나 죽은 자. 자,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책임을 물어서 책임 추궁해서 심판 할 수 있는데, 이미 죽어 버린 자를 심판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네가 살아 있을 때 껄렁껄렁해도 내가 보기에는 결국은 네가 죽을 거, 결국은 네가 나이 많아 죽을 것 같으면 살아 있을 때도 이미 죽은 거로 보는 거예요. 죽은 거로. 그 죽은 자에게 대한 심판은 뭐냐? 죽었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움직일게 없잖아요. 이미 죽어 버렸는데 뭘 책임을 지웁니까? 이 물을 누가 마셨어?
이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살아 있어서 “저 아닙니다!” 하는데 한 사람은 떡하니 죽어 있다면 “니가 마셨지?!” 죽은 사람보고 이 책임, 닦달 낼 수 있습니까? 책임 물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주님은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돼요. 빌립보서 2장에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란 말은 그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없다? 책임을 안 묻지요.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산자나 죽은 자나 다 누가 그 내용물을 채웠느냐 하면은, 주님이 자신의 아들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용을 다 채운 겁니다. 다 채운 거예요. 여러분들이 특별 할 때 먹는 음식 가운데 소고기, 돼지고기 이렇게 다져서 마늘 조금 넣고 다져서, 깻잎 있잖아요. 깻잎, 깻잎을 위로해서 안에 딱 싸서 기름에 튀겨 보세요.
그러면 맛있어요. 그것을 하든지 같은 종류인데, 고추를 가지고 고추 안을 파요. 씨는 다 파고 고기 다진 것을 집어넣어서 역시 기름에 이렇게 보글보글 튀겨 먹으면, 당면이 섞이면 더 맛있고, 맛있잖아요. 그러면 깻잎 사이에 넣는 고기 다져놓은 거, 그거 깻잎이 넣습니까? 깻잎 지가? 잎사귀가? 누가 넣어요?
그것은 요리 하는 사람이 셰프가 넣잖아요. 요리하는 과정 중에 넣잖아요. 고추도 마찬가지고. 누가 지옥가고 누가 천국 가는 그 내용은 지옥 갈 본인이 채우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채운다고요. 주님이 채워놓고 이건 지옥 보내야 되겠다고 보내버리고, 이건 천국 보내야 되겠다고 보내버리고. 이러한 불합리. 아니, 창조주면 다야? 창조주 아주 갑질을 단단히 하는 거예요. 갑질을.
창조주가 창조 해놓고 “네가 알아서 해라!” 이게 아니라 끝까지 밟아버려요. 끝까지, 창조의 마지막 운명까지, 창조주 일방적인 자신의 무엇을 집어넣고 너는 인생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다 주님이 다 집어넣어 버려요. 주님이. 하나는 자비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는 좋은 고기로, 하나는 나쁜 고기로. 하나는 가라지로, 하나는 알곡으로. 고추에다가 다 집어넣듯이 그 내용은 너 지옥 갈 내용은 주님이 알아서 지옥 다 넣고 지옥 보내 버리고, 그것도 튀겨 가지고. 천국 갈 놈은 천국 다 해가지고 천국으로 올려 보내고. 인간은 그러나 들러리에 불과하고. 모든 인간뿐만 아니고 모든 피조물은 들러리에 불과해요.
제가 아까 10분짜리 동영상 촬영할 때 ‘밤과 낮’ 했지요. 그때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낮과 밤은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했잖아요. 이미 인간을 배제하고서도 이미 낮과 밤은 나름대로의 지식이 있잖아요. 있지요?
그러면 낮과 밤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주님의 그 창조했던 그 내용을 지금 전수하고 이동하고 낮과 밤 ,낮과 밤, 반복 하면서 이동하고 있는데 인간만 턱 등장해서 낮과 밤과 해와 달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자기는 마귀하고 한통속이 되어 가지고. 마귀하고 짝짜꿍이 되어 가지고 마귀의 똘마니가 됩니다. 마귀의 똘마니.
마귀의 똘마니가 되어 가지고 설친다 이 말이죠. 독자적인 자기 가치, 독자적인 자기 의미. 이걸 챙기는, 독자적인 자기 의미를 챙기는 겁니다. 또 의미 나왔으니까, 이것은 여러분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또 해봅시다.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 잘 표현한 사람이 있어요. 김춘추라는 사람의 시를 보면 나오잖아요.
그냥 있을 때는 그냥 꽃이었는데, 하나의 들풀이었는데 내가 들풀을 꺾어서 꽃병에 놓고 꽃이라 불러 줄 때, 그는 내게 다가와서 나에게 뭐가 됐다 했습니까? 하나의 의미가 되면서 하나의 몸짓이 되죠? 의미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냥 존재 한다고 의미가 아니에요. 나와 관련성이 맺어져야 돼요 나와. 나와 관련성.
“아! 보기에 꽃이 아름답다!” 하면 비로소 꽃은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누구한테? 꽃에게 의미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꽃이라고 불러주는 나에게 하나의 꽃이 대상으로 들어와서, 나에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의미는 누구 중심 입니까? 나 중심이에요. 나 중심. 나 중심이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 인생을 살게 할 때 뭐냐 하면은, 나 중심이 되면 이건 나의 처소가 된다고요. 아까 배웠으니까 써먹읍시다. 이게 나의 처소가 돼요. 처소는 뭐냐? 의미 없는 것을 내가 채택할 때 내 주변에 끌어 모으면서 뭐가 된다? 이게 나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대구에 있는 친구들아 얼굴 한번 보자!” 지가 뭔데? 지가 뭔데 전화해서 불러냅니까? 바쁜 사람을.
왜냐하면 자기는 그 여고시절 때의 그 꿈이 있잖아요. 그 의미를 찾음으로써, 찾고자 서울에서 내려 온 거예요. 일부러 내려 온 것도 아니고, 자기 집안일 있다고 왔다가 “한번 보자!” 이렇게 했겠죠. 하여튼 이기주의라, 이기주의라. 남 바쁜 건 생각 안하고. 사람이 인생 살면서 “망했다! 망했다!” 이게 의미잖아요. “나는 승리했다!” 이것도 의미잖아요.
지가 망하면 주님 나라 망합니까? 자기 암 걸리면 주님 나라 암 다 걸려야 돼요? 자기가 키 작으면 주님 나라 가는 사람 다 자기보다 키 작아야 돼요? 지가 못생기면 주님 나라 다 못생겨야 됩니까? 이미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자기 의미부터 먼저 챙기고 손톱만큼도 손해 안보고 네?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하네.
자기는 손톱만큼도 손해도 안보고 자기 의미 확장, 다시 말하면 자기 처소 확장의 의미로서 예수님을 구색 맞춰서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삼위일체 집어넣고 십자가, 언약 다 집어넣고 나중에 다 집어넣고 보면 뭡니까? 이게 그 의미가 예수, 삼위일체, 십자가, 언약, 의미가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위해 존재하잖아요.
이게 자기 처소잖아요.
베드로가 그렇다 이 말이죠. 우리는 안 그렇잖아? 세상에 베드로가 그러면 다 그런 거예요. 베드로가 그러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것을 실감해야 됩니다. 예수 백날 찾아봐야 전부 다 나한테 의미가 되니까, 나를 천당 보내준다 하니까 예수 믿었지, 너 지옥 가라고 하면 “예! 믿겠습니다!” 했어요? 너 지옥 가라고 한다면 우리 예수 믿습니까? 삐지지.
그게 무슨 예수 믿는 거예요? 그건 창조주 하고 지금 노닥거리는 거예요. 창조주 하고 지금 흥정하고, 거래하자는, 맞먹자는 이야기 밖에 안 되거든요. 창조주라면 창조주의 그 권리를 인정 해줘야 될 거 아닙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밟든 지옥 보내든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돼야 되지.
“저 지옥 보내면 곤란 한데요?” 어디서 그런 못된 흥정을 누가 가르쳐줬느냐 하면 마귀가 가르쳤어요. 그거 마귀가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마귀가. 내 의미 챙길 때 마귀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 의미 챙길 때. 그러면 우리는 성도는 의미로 살아가는 게 아니죠.
의미는 내 중심으로 가니까. 그러면 의미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뭐로 살아가느냐? 제가 분명히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이미지’로 살아요. 이미지. 이미지로 살아가요. 이미지라 하는 것은 이성으로 따지기 전에 ‘팍!’ 다가오는 거예요. “뭐지? 이 느낌은?!” 느낌으로 사는 거죠. 느낌으로.
믿음은 설명하지 마세요. 본인만 아는 느낌이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믿지 마라! 믿지 마라!” 해도 “너 예수 믿으면 죽인다. 믿지 마라!”하면 “예, 안 믿을게요!” 예수님 사진 깔아놓고 “지근지근 밟아라!” “예~ 지근지근 밟겠습니다! 또 사진, 또 밟을 사진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나와야 되죠. 그래야 사일런스 그 영화처럼 순교 안당하지.
일본의 17세기에 천주교 순교 당할 때, 일본 그 사무라이들이 그땐 사진이 없고 예수님 성화를 가지고 밟으라는 거예요. “주여! 죽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죠. 이걸 지금 꼭 하고 싶은데, 왜 “예수님의 성화를 밟아라!” 할 때 그냥 밟아야 될 이유가 뭐냐? 궁금해요? 500원. 궁금해요?
여러분,
대화는 사람하고 하는 법입니다. 나무하고 대화하는 법이 아닙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성령께서 ‘탁!’하게 되면, ‘탁!’ 움찔하면서 접촉하는 순간, 주의 복음적인 기능을 나타낼 때 성경에서 이것을 사람이라고 해요. 그 창조주의 사람. 그런데 복음을 이야기 했는데 “뭐지, 이거?” 아무것도 못 느낄 때는 이것을 물체라 해요. 물체!
그냥 숲속의 나무, 뻐덩뻐덩한 나무, 경직된 물체! 물체예요! 그 물체 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물체예요. 그 사람들은. 심상정, 그 뒤에 나온 열 명들. 하나 사퇴 했지만. 이 사람들은 그냥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거기에 하나의 조각품이에요. 딱딱한 조각품이에요.
복음적인 대화가 안 되면 그건 사람이 아니무니다 그게.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닌 것은 “성화를 밟아라!”해도 그 말에 호응할 필요 없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주면 돼요. 해주면 된다고. 말도 안 통하는 이야기하고 무슨 말을 해요. 목사의 설교는 뭐냐 하면은 이래야 돼요. “아니, 이래도 아직 붙어 있으려고 합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돼요.
“이래도 아직 붙어 있으려고 합니까? 여러분 나무 아니에요?” 이걸 묻는 식으로 설교해야 돼요. 묻는 식으로. 복음을 이야기 했으면 반응이 나타나야 되지요. 복음으로부터.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만 천국 갑니다!” 이 말 틀렸어요? 맞아요? 맞지요. 로마서 8장 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죠.
그러면 성령의, 복음을, 십자가 복음을 전해버리면 이 사람이 성령을 받은 거 같으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 거 아닙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고!” 뭐 이러든지 나타나지요. 그러면 그거는 “아! 주께서 보낸 사람이구나, 성령께서 보낸 사람이구나! 같은 처소이기 때문에!” 같은 처소는 뭐다? 처소는 중심 되는 인물이 간택하고 채택하는 거죠.
예수님이라는 분이 처소 중심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이름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뽑아 낸 겁니다. 이것을 전에 어떤 교재에서 요한계시록 교재 했을 때 이것을 무슨 게임이라 했느냐 이것을, 기억납니까? ‘얼음 땡 게임’이라 했지요. 가만히 있으면 ‘탁!’ 치면, ‘탁!’ 치면 그때 움직이기 시작하잖아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탁!’ 쳐야 하듯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싹~’ 돌아볼 때 움직이면 안돼요! 그것처럼 성령께서 치게 되면 그 순간 나는 이유도 없이 죄인인 것을 알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뭘 시켜도 군말 없이 하게 돼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경직된 나무 같으면 ‘탁!’이렇게 치면, 거기서 복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 나오는 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나와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 합니까?” 이렇게 나온다고. 다시 다른 말로 해서 “나도 내 나름대로 내 처소 있습니다. 이거 존중해주세요.” 이렇게 나온다고. “어떻게 당신 처소만 중요하고 내 처소는 완전히 개똥으로 만드십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내 나와바리, 일본말 써서 미안합니다,
“내 나와바리 영역이 있는 것처럼 당신도 나처럼 똑같이 있잖아! 그런데 당신 영역 가지고 당신 영역 챙겨야지, 왜 내 영역 침범 하느냐?” 이렇게 돼버린다 이 말이죠. 조폭이죠. 양쪽 다.둘 다 의미, 자기중심의 의미로 구성된 자기 각자, 각자의 처소를 소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그 이름들을, 각자 처소에 있는 그 이름들을 주께서는 ‘삐익-’ 안받아주죠.
받아주지를 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말은 “똑바로 안 해서 심판할게!”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네게 집어넣어준 그것을 끄집어냄으로 말미암아 지옥 가는 사람이나 천국 가는 사람이나 모두 다 예수님의 나와바리예요. 예수님의 처소가 되도록 그걸 확증 짓는 기능이 뭐냐?
바로 십자가 기능이고 그 십자가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천국 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부를만한 권한이 있어서 불러주는 거예요. “너는 처음부터, 너는 나를 위하여 천국 가는 일을 통해서 나의 주되심을 증거 하게 하느니라.” 너 천국 가라고 불러주는 게 아니고, 천국가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천국가게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그렇게 주께서는, 그런 기능을 십자가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제자들을 다 떨쳐두고 단독수행을 하러 가셨던 겁니다. 단독으로. “오지마라! 나 혼자 갈게.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그런데 여기 7절에 봅시다. 14장 7절에 아니 14장 8절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그 다음이 뭡니까?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뭐 어쩌려고? 보여주면 어쩌려고? 믿겠다는 말 아닙니까? 제 말이 맞아요. 왜냐, 그 뒤에 나온 말을 봐서 제 말이 맞습니다. 지금 그 뒤에 말이 뭡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함께 있는데 왜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이 말을 봐서 지금 빌립이 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은 “아버지 보여 주시면 아버지 믿겠나이다.” 라는 거예요.
지금 빌립하고 예수님하고 견해 차이가 났어요. 빌립의 의견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내가 믿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예요. 예수님을 왜 믿었습니까?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니까 믿었다는 거예요. 뭐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거예요. 이게 어디서 문제가 일어난 거예요? 지금 자기는 예수님을 안다고 보는 겁니다.
몰라요! 보고 있는데도 몰라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지요(29). 왜냐하면 보지 않음은 보고 있음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그 장애요소가 날아가 버렸으면 복된 거예요. 보고 있으니까 자기는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분.
내가 알고 있는 그분 같으면, 내가 아는 이야기가 그 뒤에 술술 따라 나와 줘야 돼요. 내가 아는 그분이니까. 내가 그분에 대해서 얼추 안다고 생각하니까 그분에게 나오는 모든 내용도 “응~ 납득돼” 이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구조인데, 아버지 이야기를 끄집어내니까 아버지를 보여주시면 제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이걸 유도함으로써 빌립으로 하여금 네가 예수를 안다고 하는데 실은 그게 아는 게 아님이, 완전히 탄로 난겁니다.
그러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길이 있어요? 없어요? 길은 없습니다.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14:4-5) 지금 예수님은 어디로 간다 했습니까?
그 뒤에 보면 6절에 보면 나오죠? 예수님은 지금 어디로 갑니까? 아버지께로 가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게 이게 쉽습니까? 지금 수원으로 가는 게 쉬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 했어요. 아버지께로.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로 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께로 가는 거예요.
이건 아들만 이야기 할 수 있는, 입을 뗄 수 있어요. 아들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아버지께로 가려면 제자들이 어느 자리에 와야 됩니까? 자기 자리로 가면 안돼요. 아들의 자리에 와서, 그래서 아버지께로 가야돼요. 예수님한테, 이 자리에 와서 가야 된다고요. 그냥 따로 가면 안돼요.
그래서 모든 성경 해석은 어떻게 해야 돼요? 반드시 뭘 경유해야 됩니까? 모든 성경 해석은 예수님을 경유를 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를 해서 가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께 오게 되면,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여기서 무슨 생각이 생기냐 하면 불신, 불신의 체험을 해야 돼요. 불신의 체험을 한다는 말은 아까 제가 이야기 한 것처럼 무슨 의미의 세계가 날아가야 돼요?
나를 위한, 나의 의미 체계가 여기서 붕괴가 돼야 됩니다. 그러면 나의 의미 체계 안에는 뭐가 들어 있겠어요?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 이건 누구 이야기입니까? 나 죽으면 니가 간다? 이거 아니잖아요, 내가 죽으면 누가 간다? 내가 간다잖아요. 내가 죽으면 내가 간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의미 체계는, 이건 깨어져야 되겠죠.
그러면 깨어지려면 깨어지려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바로 이 체계 자체를 한 자로 뭐라고 보냐? 이게 바로 ‘죄’로 보는 거예요. 죄. 지금 예수님은 누굴 상대로 하느냐면 의인을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 죄인을 상대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무엇을 모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기는 죄인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죄인 아닌 줄로.
아직 십자가를 안 지었으니까, 십자가 진적이 없으니까. 십자가 지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내팽개치는, 예수님의 의미에 들어가기는커녕 자기의 의미를 고수하기 위해서 내빼는.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어느 소녀 하나가 “당신도 예수와 한패지?” 하니까 “어데예~? 와이카노 이 야가~” 이래 가지고 강력한 거부 반응이 나타나죠.
이번 대선에 떨어지면 지금 바다에 빠진다는 사람이 있어요. 대선에 안 되면, 대통령 안 되면 바다에 빠지겠다는 거예요. 앞바다에 빠지겠다는 거예요. 그거는 나도 하겠다, 앞바다에 맨발로 발만 담그면 되겠다. 뭔가 맹세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나는 죄인이 아니란 뜻이거든요. 내가 죄인 같으면 맹세할 이유도 없어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사실은 맹세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의미’로 살아버리죠. 이미지라는 말은 뭐냐? 돌발적으로 주어지는 사태를 말합니다. 예상 못한 사태가 ‘팍!’오게 되면 이미지로, 느낌으로 오잖아요. 느낌은 오는데 돌아서면 그것이 뭐로 되느냐면 한 5분도 안 지나서 그 돌아서 느껴지는 그 체험이 나의 의미로 굳어져 버려요.
이게 전환 돼버려요. “나는 이런 은혜 받았다?” 갑자기 ‘나’가 붙으면서 이게 나의 나와바리, 나의 영역이 되어버린다니까 이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는 건 간단한 겁니다. 아들만이 아버지께 갈수 있다. 이 말은 “너희들은 아들이 아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같이 갑시다!” 주님 하는 말이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지금은 처소가 없어. 안 돼! 네 자리 없어. 처소가 되면 내가 올게!”
베드로 하는 말이 “그 할 일이 뭡니까?” “네가 할 일이 뭡니까를 알기 전에, 네가 왜 나와 같이 갈 수 없는 것부터 알아야 된다.” “그게 뭡니까?” “그게 죄다.” “그 죄는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에 죽어서 대신 처리 해줄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처리하고 난 뒤에, 처리된 사람 되면 내가 또 올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네 안에 나의 용서가 들어있고 나의 대속이 들어 있으면, 그것은 너의 기능은 너의 기능이 아니고, 내가 너를 용서 했다는 기능이 남아있기 때문에 너는 너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 그런 스토리입니다. 지금 이야기가. 한 시간 반 지나니 납득 되지요? 지금 그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가.
장례식 때 “처소 있다.” 그런 장례식장에서 하는 그 내용 아닙니다. 지금. “맨션, 아파트 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맨션, 아파트 있어도 우리 집, 우리 맨션 아니에요. 주님의 맨션이라니까요. 맨션인지, 맨손인지, 하여튼 그러면 우리가 아들로 바뀌어야 돼요. 그러면 아들로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아들한테 심판 받으면 되지요. 어떻게?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분. 심판하면 구원 없습니다. 심판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받는 거예요. 지금 대구 이번 강의하고 제목을 뭐라 했던가요? ‘수시모집’이라 했습니다. 수시모집. 정시가 아니고 수시모집이에요. 이것은 미리 와서 우리를 심판해 버립니다.
심판해 버리면 특징이 뭐냐 하면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러면 이 인생 누가 살래?” “제가 하지요.” 죄인의 입장에서 이것 가리고, 저것 가리고 할 쨉이 못됩니다. 죄인이 뭡니까? 자기 의미 구조, 의미 체제가 무너진 게 죄인 아닙니까?
왜 죄인입니까? 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간직 했다는 것이 들통, 들켰기 때문에 죄인이거든요. 예수든, 삼위일체든, 나를 위해서, 교회도 다 나를 위해서, 이게 구축 되어있던 이것이 바로 죄를 구축하고 있었어요. 죄를. 그리고 이 죄라 하는 것은 우리 육의 본성상 죽을 때까지 구십 되고 백세 될 때까지 이게, 어떻게 살아지겠어요? 안 살아지겠어요? 이게 돌아서면 마찬가지예요.
좀 있다 끝나면 마찬가지라니까요. 강의 끝나고 마찬가지. 그래서 학자들이 참, 자기 딴에 고민하는 게 뭐냐 하면은 “왜 인간은 몸이 따로 되어 있는가?” 그걸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왜 인간은 몸이 따로 인가? 왜 집안에 식구가 네 식구면 왜 육체가 네 개냐? 이 말이죠. 강아지까지 합하면 다섯 개. 그러면 몇 개 되어야 되는데, 하나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건 괴물이죠. 머리는 네 개인데 머리 네 개, 얼굴 네 개인데 몸뚱어리는 하나다. 이건 샴, 뭐 쌍둥이도 아니고, 하나가 화장실 가려면 다 따라가야 돼요. 하나가 컴퓨터 하려면 다 붙어 있어야 돼요. 그렇게 하면 화목 할 수밖에 없죠. 정말 화목 할 거예요. 몸이 하나니까.
왜 아브라함과 이삭은 따로고, 이삭과 야곱은 따로고, 왜 모든 구원 받은 엘리야는 따로고, 모세 따로고, 왜 “구원 받았다.” “그리스도의 몸이 한 몸이다.” 해놓고 왜 다 따로 입니까? 놀라운 사실은 몸은 따로 인데 신기하게도 생각은 똑같다는 거예요. 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자기가 핍박한 자,
다시 말해서 “나는 주님을 핍박한 자” “나는 주님 앞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런 기적을 쏟아내는 거예요. 따라서 질문을 반대로 하세요. 절대로 같아서는 안 되죠. 같아서는 안돼요. 중국집에 같이 가더라도 한쪽은 짬뽕 먹으면 한쪽은 짜장 먹어야 돼요. “간짜장 네 개~” 이러면 안돼요. 하여튼 다 따로 해야 돼요.
어떤 분이 십자가 수련회를 하는데 십자가 수련회하고 난 뒤에 십자가 수련회에 늘 참석하는 사람 중에 깜짝 놀랄 때가 있었어요. 뭐냐 하면은 유니폼을 입고 온 사람도 있었어요. 한 열 명. 기억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깜놀’ 깜짝 놀랐어요. 아니 유니폼이 있었나? 기존에 교회 수련회 했던 것처럼. 달라야 됩니다. 같아서 같은 고백 나오면 이게 시시해요.
다 다른 교회 다녀야 돼요. 아니 교회 오지 말고 집에 있든지, 집구석에 있든지 해야 돼요. 하여튼 이상한 것은 십자가만 위하게 돼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다. 나를 죄인 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었지! 그 어떤 위인, 뭐 테레사 수녀? 그딴 소리 하지마라! 어떤 유명 목사 하지마라! 나는 십자가 앞에서만 죄인이다! 다시는 너한테는 기 안 죽는다!”
이게 있어야 돼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것은 누구 밖에 없다? 주님 밖에 없단 말이에요. 왜? 주님의 안에 있는 주님의 돼지고기로 다져 가지고 집어넣은, 그 요리가 무슨 요리입니까? 깻잎에다가 돼지고기 다져넣고, 고추에다가 다져 넣은 거 있잖아요. 그냥 튀김, 고추튀김 합시다.
고추튀김을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안에 내용이 자기는, 남들 보기에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시로 간섭 하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니”가 되는 겁니다. 이제 그 작업을 제자들이 이걸 십자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에 자기의 속내를,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완전히 다 까발려 내놓습니다.
이럴 때 아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아니, 제자들 참 무식하게도 그 언제 터져봐야 알지?” 이렇게 남 이야기 하지 말고, 우리가 매일 같이 요한복음 14장이 매일 같이 이 일이 지금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자, 그러면 14장 5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그래 놓으시고, 예수님께서 이제 베드로 제껴 놓으시고 “베드로, 너 오지 마!”
예수님 혼자서 가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하셨거든요.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리라.”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곧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길이죠. 이 길의 방향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버지께로 가죠. 예수님에게서 아버지까지요.
그런데 여기서 약간 골치 아픈 일이 있어요. 지금 분명히 그 뒤에 보면 예수님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냐?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갈 때가 없어요. 같은 집에 사는데 가기는 뭘 가? 그런데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이야기해요, 간다. 간다고 이야기 했단 말이죠. 아버지 땅이 있고 아들 땅이 있을 때는 간다는 게 되는데, 함께 있다면 간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질문) 온다. 아니에요?
여기 한번 봅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나는 여기에 “어디로 가십니까? 거기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길이요” 그것만 설명 할게요. 내가 곧 길이라 했지요? 그죠? 내가 곧 길이죠, 내가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은 13장 끝에 나오고, 14장 초반에 나오죠. 내가 아버지의 집에 간다. 13장 끝에.
(질문) 묻는 거는 도마고, 예수님이 말씀 한 거는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
13장 36절. 내가 아버지께로 가잖아요. 이게 16장도 나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데 너희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하는 게 나와요(요16:5). 네, 그렇게 넘어 갑시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했잖아요. 그 이야기입니다.
길이라는 것이 있다. 제 말은 길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지금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잖아요. 나 있는 곳에 누가 있다? 아버지가 있는데 길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그 길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길이 바로 제자들이 가야될 길을 지금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는 거예요.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 십자가 완성이 되고 난다면 주님께서 이 길 따라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요.
이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길을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수님 본인이 구원 받게 하는 길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길을 터주는 거예요. 제자들로 하여금. 길인데 여기 길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길이 진리고, 이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진리와 생명의 역사적 구체화는 주님께서 길을 만들어주는 이 작업이 진리와 곧 생명이라는 겁니다.
진리를 받고 생명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이 작업 자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구태여 제자들에게 한다는 이유는 뭐냐? 제자들이, 주님께서 너를 구원하거든 주께서 이 길을 터줬고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생명이라는 진리, 주님의 차원에서 길을 만들어 줬다는 것을, 이걸 인정하라 이 말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도마나, 베드로가 하는 말이 “길이 어딘지를 알면 우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이런단 말이죠. 지금 뭐냐 하면은 “길을 알려주시면 우리가 알아서 주님 가시는 길을 졸졸 따라서 뒤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하니까 “네가 갈수 있는 길이 아니고 내가 길을!” 예수님 자신이 길이 되어야 돼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일을 계속 하지 않으면 뭐가 없다? 길이 막혔다. 길이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께로 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길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에 의해서 제자들이 갈 수 있는 그 권한도 진리와 생명 차원에서 예수님만이 이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니까 제가 알아서 먼저 가시고 뒤에 따라 가겠습니다는 성립이 안 되고 예수님이 가는 길을 오게 하신 그 마저도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찾아와서 이끄셔야 되는 거예요. 어쨌든 여기서 길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너희들을 떼놓을 수밖에 없다는 취지를 강조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올 수 없는 곳에 간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길이요” 라는 말은 갈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하지 마시고, “우리는 갈 수 없다.”로 해석해야 옳다는 이야기를 제가 그런 취지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갈수 없다.” 예, 구원은 접으세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구원은 없습니다. 접으세요. 그래 놓고 주께서 나 찾아오시거든 “구원이 없는데 이렇게 납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완전히 납치 하듯이 그렇게 데려갑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 했잖아요. 놀이동산에 귀신 집 가는 이야기 했지요. 애들 죽 들어가는데 귀신이 발목을 하나 잡아가지고 빼내버리니까 하나가 없어졌는데 어디 갔나 보니까 귀신한테 납치 됐어요. 그렇듯이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한테 납치된 사람들이에요.
본인이 알아서 한 사람이 아니고, 나머지는 뭐냐? 그냥 “아, 이거는 귀신집이다.” 통과한 사람입니다. 이거는 교회고, 이거는 주님이 주신 빈 무덤이고, 이렇게 그냥 관람하고 지나가지요. 기독교를 관람하고,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관람하는 거 하고 읽어보는 거 하고 심지어 성경의 힘에 의해서, 말씀의 힘에 의해서 납치된 거하고 이거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이에요. 말씀에 납치 되어야 되지, 말씀을 지키면 안돼요. 말씀을 지키게 되면 이게 나의 의미가 된다 이거에요. 나의 의미가. 흥정이 되어버린다니까 흥정이. “주 앞에 말씀 지켜서 순종하겠나이다. 그러면 좋은 게 좋다고 천국 보내줄 거죠?” 이렇게 거래가 된다니까요 거래가. 그렇게 거래 해버리면 교회 교인수 많이 늘어나요.
좋은 거는 놓치지 않고 싶거든요. 좋은 거는 갖고 싶다 이 말이죠. 보험 들듯이.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납치당해야지. 납치당한 사람 특징이 뭡니까? “주여! 왜 저를 이렇게 구원 했습니까?” 이런 고백이 나온다니까.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그냥 남들처럼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니 인생은 앞으로 니 인생 아니거든? 내 인생이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주고받는 대화가. 그런데 그게 싫어요? 여러분? 내 인생은 없고 주의 인생이 그게 싫습니까? 싫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하지요? 왜? 장래를 보장 못하니까, 장래가 보장이 안돼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우리가 모르는 게, 살아온 습관에 의하면 그게 불안 불안하거든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 끝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일 일은? ‘뚝!’ 내일 일은 ‘뚝!’이에요. 오늘 밤에 주무시거든 자는 길로, 주무시면 그 길로 빠이빠이 해도 뭐, 할 수 없지 뭐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할 수 없지요. 잠을 자다 가면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막 발악하다가 온 튜브 여기다 다 꽂고 간다고! 자다가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여튼 내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떤 권한이 없습니다. 내일에 대해서.
그 날, 오늘 저녁 잡수셨잖아요? 그럼 오늘 먹을 치 양식은 다 먹었어요. 아까 간짜장 먹었잖아요. 오늘 더 이상 없어요. 이제. 간짜장 외에는 없어요. 또 야식 시키지 말고, 또 치맥 시키지 말고. 다 먹었어요. 자식이요? 그 남의 자식을 왜 지가 걱정하고 있나? 주께서 키웠는데. 아까 누가한테 자식은 왜 낳는가? 주께서 타이밍 맞춰서 내놓게 했어요.
셋 낳고 수술하려고 하는데 그날 하필 비가 와서 수술 못해서, 그 다음날 그만 애가 생겼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전부 다 이건 타이밍이에요. 때가 되매, 그 타이밍 맞춰 때가 되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하게 하신 거예요. 이게 우리가 죄인 되게 되면, 죄인 되게 되면 소급해서 전부 다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다 은혜에요.
어디서 뭐, 본 문구가 있어서 다 은혜지요? 여기 오다가 봤잖아요? 다 은혜라고. 안 봤나? 참 오늘 안 왔구나! 오늘 짜장면 먹으러 안 갔구나! 여기 원불교에 붙여놨어요. 다 은혜라고. 다 은혜 해놓고 밑에다가 사드 반대 해놨습니다. 아, 모순되는, 서로 모순되는 걸 붙여, 사드 설치하는 것도 은혜인데.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뭐 고함질러봐야 이게 되는 게 아니고요. 13절 한번 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14:13)
이게 뭐냐 하면은, 기도하는 너희는 일체 주님의 영광에 포함이 된다? 안 된다? 포함이 안 되는, 빠지는 거예요. 기도는 우리가 해도 영광은 누구를 인하여? 아들로 인하여 받는 거예요. 왜? 고추에, 예수님의 돼지고기 다진 게 들어가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그래서 예수의 이름에 대해서 응답됐다 안 됐다를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기도하게 하시는 분이 어떻게 응답하든, 어떻게 응답하든 그것마저도 합당하게 영광되도록 응답이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번 기도는 응답됐고, 이번 기도는 응답 안 되고 판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은 이미지로, 느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의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자기 처소, 처소를 아직까지 미련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6절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다음에 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스톱! 스톱! 오늘 강의 한 내용을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이겁니다.
‘않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긍정적으로 발언하시는 게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부정적으로 발언합니다. 부정적으로. 왜 자기 제자들인데 긍정적으로 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말을 왜 집어넣어요? “세상 되어 가는, 모든 돌아가는 모든 일에 너는 배제 당했느니라.” 이런 뜻이에요. “너는 배제 당했다.”
따라서 길을 가든, 생명에 이르게 하든, 영생을 얻게 하든, 그거는 누구 소관이다? “너희들이, 네가 걱정할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지금은 네가 너의 의미 안에, 네가 주인공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걱정, 걱정 돼지? 하지만 내가 다시 너희에게 찾아오게 되면, 걱정 할 권한조차 이게 작살났다는 것을 네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베드로가 열두 제자가 성령 받은 거 장난 아닙니다. 오순절 날 성령 받은 게 장난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목숨 걸어서 성령 받은 게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걸 목숨도, 걸 목숨도 아예 처음부터 이미 저쪽, 주님 손으로 넘어 갔어요. “이제는 목숨 걸겠습니다!”할 그러한 여분의 말, 단어도 이제 남아 있지 않아요.
니꺼라서 뭐 건다고 하는데, 니것도 아닌데 뭐 걸게 있어요? 몽땅 다 탈취 당했는데요. 몽땅 다, 다 탈취 당했는데, 그래서 열두 제자가, 열두 제자의 베드로 전서, 후서 계속해서 사도바울의 편지 한번 읽어 보세요. 이게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게 되면, 이것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이건, 완전히. “나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뭡니까?
“죽은 자 같으나 살았고, 나는 항상 우는 자 같으나, 근심 있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뭐 이중인격자에요 뭐에요? 아, 그게 사람입니까? 천사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천사 되고 싶어 됐어요? “나는 삼층천에 올라갔다.” 뭐, 뭐타고 올라갔어요? 뭐타고?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갔어요? 성경을 볼 때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아닌 거 같아요.
너무 이상한 인간이에요. 별종이에요 별종. 이상한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도 나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가 뭐냐 하면은요, 자꾸 믿으려고 하는 게 문제에요 믿으려고.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직도 자기 의미의 처소를, 자기 양보 안하는 “이거 닫히면 안 돼!” 완전 확고한 철벽성, 철옹성을 만들었어요.
자기를 위한 성을 쌓아놓고 “주님이여! 이거 좀 손상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자식하고 우리 남편 사는데, 제발~ 이것만큼은 지켜주옵소서! 이것만큼은 내가 양보 못합니다!” 뭐 버티는 게 있어요. 버티는 게! 이 버티는 게 있어서, 그 버티는 게 있다는 것이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기도할 때 보면 딱 알아요.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그거 왜 줘야 되는데? 누구 좋으라고 줍니까? “주시옵소서! 응답 주셔서 남들로 하여금 믿음이 있는 사람인 것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남들로 하여금 믿음 있는 사람 티내게 해 달라 하는 것은 결국은, 결과적으로 누구 의미입니까? 나 잘났다는 의미잖아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잖아요.
이게 매슬로우의 욕구설 가운데서 네 번째 욕구에요. 제일 위의 욕구 바로 밑에, 존중받는 욕구, 타인을 의식하는 거예요. 남에게 존중받는 욕구. 그 위에 맨 꼭대기에 있는 욕구는 뭐냐 하면은,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자아실현이에요.
제일 밑에 욕구가 뭐냐 하면은 “아이고, 밥이나 먹고 살면 뭐, 더는 낙이 없다. 더 바랄게 없다.”는 생존의 욕구, 그 바로 위의 욕구가 뭐냐 하면은 “제발! 나를 안전하게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욕구. 특히 이제 이번 토요일 날 또 주례 있는데, 특히 그 아가씨들의 결혼하는 욕구가 이겁니다. 안전의 욕구. 안전과 무사, 무사와 안전의 욕구. 그것을 이제 사자성어로 뭐라고 합니까?
보디가드. 왠 다이아, 왠 다이아. 제발! 나를 내가 어떤 존재라도 무조건 내 편 돼서, 내편으로 해서 나를 폭 감싸듯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그런 듬직한, 듬직하니까 일단 키는 커야 되겠지요? 어깨는 나와야 되겠고, 좀 주먹깨나 써야, 이 듬직한 처마가 있어서 처마 밑에 나는 포근함, 여기가 좋사오니 보금자리를 꾸며놔야 돼요. 시편 84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참새도 제 집을 짓고 보금자리도 얻어 놨다 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남자 품의 보금자리, 이거 안전의 욕구에요. 그러면 안전의 욕구가 끝났습니까? 천만의 말씀.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들어왔던 내부가 드디어 힘을 발휘하면서, 자기 안전까지 전부 다, 다 암 조직처럼 다 갉아먹었어요. 이제 남는 것은 남자는 껍데기만 달랑 남았어요. 이게 나이 60넘어. 온통 가정의 권세는 이미 여자 쪽으로 다 넘어가있어요.
자식과 여자 쪽으로 다 넘어가고, 돈 못 벌어오면 남자 아니에요. 60넘어서 무슨 돈을 벌어요. 돈 못 벌면 남자 아니에요. 끝났어요. 이 안에. 그때 남자가 “이럴 거 같으면 헤어져!” 졸혼. 이런 게, 이게 나와요. 사사기에 나와요. 삼키는 자에게 삼킴을 받고, 삼켰던 자에게 오히려 삼킴을 받는 그런 경험을 이제 하게 되지요.
결국은 이게, 오늘 본문의 이 내용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이라는, 자기 이름 중심의 새로운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 처소에는 더 이상 너의 의미로 처소에 들어올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작업을 내가 십자가에서 깔끔하게 내가, 해소해 주고 네가 이 십자가 믿을 때부터 구원받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너는 내 사람 되기 위해서 줄곧 나는 철저하게, 철저하게 작업을 너한테 걸어왔다는 거예요.
영화에 그런 영화 있어요. 반전에 반전을 다 하고 끝에 보니까, 분명히 적인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적인 채 해서, 오히려 후원자가 돼서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하나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게 바로 요한복음 14장에 주님께서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피조물답다 라는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하옵소서. 그동안 피조물이 피조물 위치를 망각하고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하나님의 영광 돌린다는 핑계 하에, 이것저것 내 마음에 드는 내 인생 꾸리기 위해서, 따로 살림 차리기 위해서 주 앞에 닦달했던 모든 것들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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