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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강의-악의 필요성 1704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29. 14:00
2017-04-25 21:46:48조회 : 198         
사무엘상 25강( 악의 필요성), 마태복음 87강( 봉쇄), 17042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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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3.206)17-04-29 00:10 
대전강의20170425 사무엘상 7장 9절(악의 필요성)-이 근호 목사 

  

현실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자기가 해결한다는 그것은 기존의 나를 내가 지키겠다는 겁니다. 주어진 상황이 오게 되고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본능적으로 지금 나라고 여기는 이것,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것, 이것은 망가지면 안 된다, 이거는 지켜내야 나답다는 그런 것들 때문에 사투를 벌이게 돼있거든요. 

  

근데 성경에서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도를 닦고 얼마나 훌륭하고 내 것 잘 지켰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이걸 ‘노상의 존재’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제시한 개념이기도 하건대, 성경에 보면 적당해요. 노상의 존재, 길 위에 가는 존재. 내 인생은 이렇게 짧지만 내가 속해 있는 길은 두 개의 길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두 개의 길. 길 위에 있는 존재잖아요. 

  

내가 지금 얼마나 도를 닦았고,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내 것 지키려고 애썼고,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기여를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이게 지금 어느 쪽으로 가는 길 위에서 지금 이 짓하고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보다 이 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길이 더 중요하냐?”라고. 

  

내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답다, 나는 이 정도다, 라는 그것 지키는 것보다도, 그렇게 해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내가 지금 정상이야? 혹시 뒤에 낭떠러지 가? 길이 두 종류 밖에 없어요. 세 개의 길도 아니에요. 길이 두 개밖에 없다는 말은, 내 쪽에서 저쪽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길이 열 개, 백 개 있는 것이 아니고. 저쪽에서 내가 보인다는 뜻은 그야말로 가위바위보해서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내가 어느 길에 있느냐 하는 말은, 저쪽은 안 되는데? 저리가면 안 되는데? 라는 그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말이죠. 아휴, 저리가면 안 되는데 저거는 멸망의 길인데? 저거는 지옥으로 직행하는 길인데? 왜 저러지? 라는 그 의식. 그 의식이 보일 때, 나는 저쪽과 다른 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일을 주시는데, 그 여러 가지 일이 뭐냐 하면 너는 얼마나 훌륭했느냐가 아니라 저쪽이 어떻게 보이느냐를 묻는 겁니다. 저쪽이 어떻게 보이느냐? 오늘 사무엘상7장을 하는데, 사무엘상 7장, 8장에 나오거든요. 보게 되면 여기에 나라가 둘 나와요. 하나는 이스라엘, 하나는 블레셋, 나라가 둘 나오죠. 둘이 있어야 전쟁이 붙으니까요. 

  

그런데 나라가 둘이 있다고 보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이스라엘과 그 외의 모든 나라.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 이스라엘다우냐 하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적용시키면 “어? 저쪽나라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네?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차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스스로 살려고 하네?” 이러면 그게 블레셋입니다. 

  

본인이 우선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은 약속이 없는 거고. 내가 살아봐야지, 내가 살아봐야지 보다 더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특수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럼 누가 붙여주겠습니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 주위에 온갖 것들이 달라붙도록, 마주치도록, 충돌하도록,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 이론을 적용시키면, 그래서 나는 지켰다, 이래 하지 말고, 저쪽과 마주침을 통해서, 충돌을 통해서 저쪽나라하고 내 쪽 나라하고 가는데 차이점이 뭐지? 차이점이 있기는 있는 거야? 다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겁니다. 성도는 나보다 길이 우선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까짓것 그 길은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미래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기 나름이라고. 내가 어떻게 내 인생을 잘 꾸리면 미래가 좋게 되고, 내가 지금 농땡이 부리면 내 미래는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죠. 천국은 여러분 하기 나름이라고 이야기들 하죠. “여러분이 노력하면 천국가고 여러분이 노력 안 하면 지옥 갑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약속위주가 아니고, 자기가 얼마나 착한지, 착함의 위주가 돼버려요. 얼마나 착한지, 착함에 대한 보상을 복으로 받고, 복이 누적이 되어서 천국에 골인. 이런 식으로 교인들에게 주입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착함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열심히 교회에 돈 바치는 것이죠. 교회 돈 바치고 충성 바치는 것. 그게 뽑아내려는 요점이에요. 그게. 내가 나를 지탱해야 마치 이게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블레셋 저쪽에서는. 이스라엘은 약속만 살아있으면 돼요. 나는 망가져도, 망가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구현되면 그게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어때요? 하나님께서 상당히 비정하죠? 열두 제자 고생 다 시켜놓고서 예수님은 살아계시잖아요. 이게 얼마나 비정합니까? 열두 제자 고생 다 시키고 예수님만 영광 받는 그 방법이나, 예수님 직사하게 고생 시키시고 아버지만 영광 받는 그 공식이나, 같은 동일선상에 있어요. 같은 연속선상에 있다 이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 없으면 예수님과 제자사이의 관계도 없어요. 그리고 그 제자들의 구원도 없어요. 구원의 원판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건 종교가 아니고 복음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설치는 것이지만 복음은 그 설치는 것 때문에 밉상 받은 게 복음이에요. 복음과 종교는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돼서 일곱 자식을 다 불렀다,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변호사가 유언장을 공개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자식들 집에 안 갑니다. 거기에 본론이, 유언장 공개가 남아 있어요. 좀 사는 집안입니다. 없는 집안 같으면 없죠. 사는 집안. 숨겨놓은 재산이 많다고 소문이 난 집안. 구두쇠인데 빌딩을 서너 채 갖고 있는 집안. 구두쇠인데. 자식한테 일체 안 줬는데 마지막에 빌딩 서너 개 갖고 있고 땅 좀 갖고 있는. 

  

그럴 때, 그 사람의 유언장을 공개할 때, 자식들이 사인sign같은 것이 안 들어있죠. 누구 사인만 들어있습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인하고 주소, 뭐 이런 것만 들어있겠죠. 변호사 입회하에 작성했으니까 서류에 하자가 없도록 그렇게 했겠죠.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재산 받는 거예요.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구원은 생각도 못할 그러한 상황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모든 율법과 말씀을 다 성취했습니다. 예수 님 자기 이름의 사인이 다 있어요. 그 사인에 의해서 만든 나라가 아들의 나라고,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아들의 사인이 있는 자만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유언이라고 해요. 히브리서에서는. 그 유언이라는 말을 같은 말인데, 언약이라고 했는데, 히브리서 한 번 찾아볼게요. 히브리서 9장 16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예, 그겁니다. 죽기 전에는 자식한테 돈 한 푼도 못 줘요. 유언은 죽고 난 분의 사인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그 재산을 받을 때 아버지 옆을 지켰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호의에 의해서, 유언장 공개할 때 큰아들은 뭘 주라, 둘째아들은 뭘 주고, 아버지의 호의에 의해서 그렇게 되지,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꿇어 앉아있는 사람한테 주라, 뭐 이런 것 없습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유산이 우리를 아들의 나라에, 천국에, 백성이 되게 만든 겁니다. 

  

우리는 제 갈 길로 가서 어느 구석에서,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상태에 있고. 진짜 지 멋대로, 마음대로 살았는데, 이혼 한 서너 번 하고 이렇게 엉망진창 살았는데 예수님의 효과로 인하여 구원받는 겁니다. 그렇게 받아 챙겨놓고 나온 결과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원인이 되는 믿음이 있고 결과로 주어진 믿음, 선물 받은 믿음이 있는데 그 두 내용이 서로 튕기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하는 믿음은 이거는 오기죠. 빡세게 버티는 것. 그 버티는 것 치매 걸리면 끝납니다. 치매 걸리면 끝나고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자기 기도응답이 안 되면 끝나는 겁니다. 감사헌금 드렸는데 돈 더 날릴 때 끝나는 거예요. 

  

울산에 부도난 아파트 신청해놓고 사장이 나 몰라라하니까, 부산광안리의 어떤 아주머니는 전 재산을 거기다 다 바친 거예요. 아파트 광고가 이래 되어있어요. “이 아파트 사시면 월 250만원씩 따박따박 받습니다.” 이 광고에 속아가지고 모든 재산, 아들 퇴직금까지 다 해가지고, 지 세탁소해서 번 돈까지 다 집어넣었습니다. 홀라당 다 날아가 버렸어요. 분양심사도 안 받고, 분양 될 수도 없는데 분양 다 해가지고, 분양 받은 사람은 3차에, 1차,2차가 뭐냐 하면 그 아파트 짓는다고 전기공사 했던 사람들인데 1차,2차에 경매에 다 넘어가가지고 나오지도 않아요.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방송에 보니까 광안리에서 부산 앞바다를 보면서 꺼이꺼이 웁니다. 그냥 울어요. 흐흐응~흐흐흑~하고 그냥 울어요. 

  

자, 지금까지 강의했는데, 그 아주머니의 잘못은 뭡니까? 노상의 존재를 몰라요. 노상의 존재를. 내 미래는 내가 개척한다고 하는 거예요. 꺼이꺼이 울고 지옥가고. 이 땅에서 다 잃고 지옥 가서 벌 받고. 팔자 참 더러운 팔자다. 그 사람은 건설사 사장을 뭐 했습니까? 믿었죠. 믿은 거예요. “믿습니다.”하고 믿은 거예요. 30억 준 게.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 믿고. 예수 믿고 지옥 가는 거예요. 혹시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 넣어줄 줄 알고. 그 믿음 사인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는 거예요. 교회라는 곳이 진짜 사기단체입니다. 교회라는 곳이 사기 치는 곳이에요. 

  

그런데 오늘 강의하겠지만, 그런 곳에 다 갔다가 와야 해요. 미리 안 가지 말고 갔다 와야 해요. 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사기꾼이 없으면 내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인 만드는 작업에 이런 사기꾼들이 꼭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겁니다. 필요한 조건이 돼요. 

  

“2억 아파트 사시면 250만원 나옵니다.” 혹 하죠? 그게 진짜라면 괜찮은 거잖아요? 2억해봐야 은행이자가 20만원 나와요. 20만원도 안 나올지도 몰라요. 2퍼센트 아닙니까? 2억 곱하기 2%해가지고 세금15%떼면 얼마입니까? 15만원, 20만원. 15만원, 20만원인데 250만원 나온다고 하니까. 이런 정보소스만 줘도 감사헌금 할 대상이 되죠. 이런 소스만 줘도. “니만 알려 준 데이~”이래가지고 다 꼬셨어요. 심지어 그 사장이 얼마나 나쁜지 분양 한 아파트를 또 분양해버렸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이사야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8). 부자가 정보를 빼내가지고 법을 모르는 사람을 등쳐먹고. 계속 부자가 되는 거예요. 왜냐? 이사야 사회나 오늘 우리 사회는 부자만이, 성공한 사례로 뽑히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만이. 그리고 그게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세계에 우리를 푹 잠기게 했다가 빼내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해요. 

  

뭐, 독야청청 혼자 산 위에서 도 닦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산 위에서 기도하다가 “주여! 주여!”하다가 우연히 바람이 불어서 그 아파트 광고가 지리산 외로운 골짜기까지 날아갈 수가 있어요. 2억만 주면 월 250만원 준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아이고, 나 도 닦는 거 그만 두고 밑으로 내려가야 되겠다.” 그래서 사기당하고 또 올라가고. 있는 2억마저 다 날리고 또 올라가서 “주여! 주여!”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올라가다 또 광고지 날아와서 이번에는 대출 3억 받아준다고 하니까 또 내려가는 거예요. 사기대출. 

  

다 우리의 가정이 지리산 깊은 산골이 아니고, 대전 여기에 집을 짓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똑같은 입장이에요. 우리는 매일같이 괜찮은 정보를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잠언서 말씀이 하나도 틀린 말씀이 없죠. “악을 찾는 자는 악이 임하리라”(잠11:27). “원하는 것을 줄게요.” 이게 블레셋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만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이스라엘 외에 모든 나라에 뭐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죠. 자,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나라로 살아가는 방식을,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쪽 사고방식이 이미 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배설물로 꽉 들어있거든요. 변비로 꽉 들어있어요. 

  

그럼 저쪽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저쪽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살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철야하고, 헌금하고, 봉사한 거, 그냥 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봉사했는데 남이 잘 되고, 내가 기도했는데 남이 응답받고, 이거는 용납이 안 돼요. 용납이. 그게 뭐냐 하면 “너는 나를 모욕했어!” 하나님이 나를 모욕했다 이 말입니다. 놀렸다. 조롱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앵그리angry, 라는 말을 했죠. 세상은 항상 뭐한다? 분노한다. 화를 품고 교회가고, 화를 품고 교회 나오고, 예배드리면서 화내고 있고. 화내고 있다를 두자로 줄이면 네모☐다. 이거는 진짜 어려운 건데, 그 네모 안에 들어갈 말이 ‘기도’입니다. “나 지금 화났어요.” 이걸 두자로 줄이면? 기도. 기도에요. 

  

바로 이 두 가지 노선밖에 없어요. 블레셋 노선과, 아니 블레셋이라 하지 말고, 약속 없는 자들의 모든 것은 주도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나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준다. 그럼 지금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 믿는 결단, 예수 믿는 결심을 내가 하죠. 그 결심이 나의 미래를 열어준다. 이게 바로 블레셋입니다. 

  

근데 이게 참 어려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여기 이스라엘이 있다. 어? 블레셋이 있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있네, 라고 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은 모르지만 이미 블레셋을 하나님께서 마주치도록, 하나님께서 병행해서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만들어줬어요. 그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같이 동반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우리만 복음 받은 사람이다. 우리끼리 갑시다. 이래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복음 아는 사람을, 우리끼리가 아니라, 이 블레셋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사용해요. 그렇게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확정했던, 자신만만했던, 그 모든 것이 블레셋과 마주침을 통해서, 아, 이건 내가 가짜일 수가 있다는 생각, 내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상은 우선 내가 누구냐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믿으니까 나는 이스라엘이라고 우길 수가 있어요. 그럼 주도권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도권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나라고 주도권을 딱 쥐어버리면 블레셋과 부딪쳐봤자 차이점이 없어요. 

  

20년 교회 다녔다, 이 교육관 내가 지었다, 피아노 내가 기증했다, 전부다 ‘내가’가 다 붙어요. 내가 철야해서 이 교회 부흥됐다, 내가 설교해서, 내가 강의해서. “내가 전도해서 이만큼 개척교회를 크게 했습니다. 퇴직금 주세요.” 뭐 이러 식으로. 내 교회니까 내 아들 대신 집어넣고. 

  

어느 교회에서, 유명한 교회인데, 70이 돼서 은퇴해가지고 자기후계자 다 정해놓고 맡겨줬어요. 맡겨주고 난 뒤에 자기가 70이 넘어서 은퇴했잖아요. 보통 세상교회 목사 70이면 은퇴하잖아요. 70이 되어 은퇴해놓고, 은퇴 전에는 몰랐죠. 근데 ‘아, 이게 노는 것이 편한 것이 아니고 사람은 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첫째는 할 일이 없으면 내세울 게 없어요. 자기 자존심에 흠이 나는 것과 또 하나는 돈입니다. 돈 벌 때와 돈 안 벌 때와 집안에서 사람대우가 달라요. 뭐 젊을 때 고생해도 은퇴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뭘 하든지 밖에 나가야지 안에 있으면 궁둥이 차버립니다. “기원에 가든지! 공원에 가든지!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어디서 세끼를 쳐 먹어? 니가 밥해!” 발로 차버리죠. 그래서 일이 있어야 되고, 돈 벌어 와야 되고. 

  

그러니까 이 목사가 은퇴하고 나서 법을 지가 바꿔요. 나는 특별한 공로자이기 때문에 75세에 한다. 근데 후계자는 자기 스승이 바꿨기 때문에 양보를 해요. “예. 하시옵소서.”그래가지고 5년만 견디자 해서 5년이 끝났어요. 5년이 끝났으면 나가야 되잖아요? 고만하라고 했어요. 근데 못나간다고 이래가지고 같은 예배당에서 한쪽은 후계자가 예배드리고 있고, 바로 그 시간에 78세 된 설립자가 예배드리고. 실제에요. 강남교회 박용기 목사. 뭐 이 모임에서 박00이라고 그런 거 없어요. 어차피 이단인데.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에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니는?” 나보고. 그래서 저는 117세.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 넉넉하게 잡아야 해요. 괜히 70에 은퇴한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단 새로운 게 나올 때까지. 새로운 게 안 나오면 117이 아니고 오늘이라도 끝나버려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이용해먹을 게 있어야 돼요. 117세니까 지금 아주 많이 남았어요. 넉넉해. 

  

죄인을 부르러 왔죠? 죄인을? 죄인을 주께서 부르러 왔을 때, 이 죄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내가 거기에서, 그 속에서 내가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요. 고개 숙여야 돼요. 굴복해야 돼요. 아무리 자존심 세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내용과 바깥에 있는 내용이 동일하다면, 이거는 삼투압작용에 의해서 같은 비율로 죄가 내 속에 항상 스며들게 되어 있습니다. 

  

뭐 10년, 20년 복음 알고, 그거하고 관계없습니다. 바깥에 있는 죄가 그게 그렇게 좋아 보여요. 계속 내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험, 또는 같은 말로 유혹이라고 해요. 그럼 성도로 하여금 깨끗하게 살도록 하지 않고,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시험과 유혹을 허락하는 공간속에 우리를 놓아두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해서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거예요. 계속해서.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뽑아낼 때, 그 뽑아내는 그 죄가 어떤 죄이기에 뽑혀 나오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 주변에 둘러있는 이 죄는 절대로 우리 노력과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죄에요. 근데 인간들은 어떻게 옹호하느냐 하면 죄는 줄이고 선은 강화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갈수록 죄가 없는 사람이 돼버려요. 점점 더 죄라는 것이 작아지는 셈이 된다고요. 노인들 되면 더 죄가 작아지던가요? 노인들? 연세 80이 넘으면 더 작아지던가요? 애보다 더 못해. 자기밖에 몰라. 아, 이거는 애는 때리면 되죠? 근데 이거는 어른 때린다고? 

  

어떤 사람은 자기 엄마를 효자손으로 때려가지고, 요양사가 목욕시키려고 하는데 멍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요양보호사는 대번에 그만뒀죠. 자기가 오해받을까봐서. 요양보호사가 학대했다는 소리를 듣잖아요. 그만뒀어요. 아들이 치매 걸린 자기 엄마를 얼마나 줘 팼으면 그랬겠어요. 아들이 팰 수밖에 없는 것은 엄마가 혼자 일 저지르면 안 때립니다. 일 저지른 것이 자기 것을 고수한, 자기의 소박한 행복을 박살내고 있기 때문에. 박살내고 있거든요. 

  

어떤 구십 넘은 할아버지가 치매 걸린 자기 부인을 죽여 버렸어요. 왜? 치매 간호하다보니까 본인이 치매현상에 걸려가지고, 늦게 치매 걸린 사람이 일찍 치매 걸린 사람을 죽여 버린 거예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받았습니다. 근데 놀라운 사실은 자식이 아홉 명이에요. “자식들 뭐 했노?” 뭐하기는, 자식들은 지 행복을 위해서 사는 거죠. 두 분 다 요양원에 보내면 될 건데. 그런 정보도 몰랐던 모양이라. 안 그러면 돈 내기 싫어서. “형이 내라!” “누나가 내라!” 다 안낸다고 하니까 다 삐져가지고. 그럴 경우도 많이 있을 거예요. 

  

왜 우리가 죄를 죽이고 의를 살린다는 것이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새로운 죄를 부딪치지 않으면 그 죄가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이 정도 하면 건전하겠지. 이 정도 하면 주님 앞에서도 내가 뭐 꿇릴 것이 없겠지.’ 하지만 그것은 블레셋을, 제2, 제3의 블레셋을 안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내 힘으로 블레셋을 이길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사무엘상 7장 9절에서 블레셋이 왔을 때에 뭘 드립니까? 온전한 번제를 드리죠. 이제 이스라엘에 제사가 투입되는 감을 읽을 거예요. 제사라고 하는 것은 모세율법입니다. 모세율법은 약속이에요. 다시 말해서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이번 블레셋과의 전쟁은 블레셋과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정말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소양이나 기질이나 재주나 지혜를 믿을 것이냐, 아니면 모든 걸 주님 앞에 포기하고 주의 약속대로 움직이는 그 상황에 맡길 것이냐를 묻는 겁니다. 여기 9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사무엘상 7장 9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응답하셨더라”고 되어 있죠. 이스라엘이 이 대목을 보면서 사무엘이 직접 받았다고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사무엘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주신 법과 상대하죠. 번제의 어린 양과 하나님은 상대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이 이겼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이스라엘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 누구냐? 누가 희생당했나? 희생당함에 주목하게 만드는 이 전쟁이 바로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의 올바른 취지입니다. 

  

다시 두 개의 길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인생에는 길이 몇 개 있다고 했습니까? 달랑 두 개의 길(═)밖에 없어요. 서로 접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로 벌어져있어요. 내가 어떤 길에 있는가는 상대를 보고 알아요. 상대를 보고. 혼자서 나는 천국 간다고 백날해도 안 알아줘요. 뭔가 나와 다른 쪽으로 가는 이쪽이 서로 공통점이 없는, 완전히 격리된 두 개의 길이 있음을 간파하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이쪽이 블레셋이고 또 이쪽이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게 합니다. 블레셋과 의도적으로 붙게 함으로 말미암아 블레셋이 안 왔으면 뭐가 없었습니까? 번제드릴 일도 없지요.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지옥 갈 사람들과 같이 살게 만들어요. 지리산에서 혼자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게 만들어요. 힘든 시부모 봉양하는 것, 뭐 자식들하고 온갖 일을 다 겪게 하는 겁니다. 

  

겪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선을 키우고 악을 줄이고 하는 그런 게 안 되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 가서 하는 착한 일,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일, 그런 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교회 가는 것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거기서 다른 노선을 발견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요. 다른 노선을 여기서 다 찾으면 돼요. “쭈여~! 쭈여~!”하고 부르짖잖아요. 뭣 때문에 저렇게 하느냐? “쭈여~! 쭈여~!”하는 거나, 광안리에서 부산 앞바다보고 꺼이꺼이 우는 거나 차이가 뭐가 있어요? 예? 기도는 뭐라고요? 지금 분노하는 중입니다. 분노하는 중이에요. “이러려고 내가 성도했습니까? 이러려고? 살아있다면 말씀 좀 해보시옵소서. 살아있다면?”하고 막 따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파트 분양사기당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장 집에 가서 시위하듯이. 그 시위문구도 아주 도발적이에요. “내 돈 내놔라!” “내 집 돌려도!” 그게 바로 죄의, 성도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도대체 내가 뭘 추구했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추구했느냐? 아니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이용해서 내 팔자를 고쳐보려고 했느냐? 이 말입니다. 

  

여기 사무엘상 7장 9절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잖아요? 사무엘은 진짜 이스라엘을 위해서 부르짖어요. 지금 이스라엘 말고. 주와 함께 동행 하는 이스라엘. 약속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 그리고 누구 덕분에, 누구 희생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이스라엘. 

  

아버지의 사인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한 자신에게도, 말썽쟁이자신에게도 유산이 오는 것처럼, 유언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그 사인에 의해서 천국 간다는 그 사실이, 지금 나에게 한 달에 딱박따박 오는 250만원보다 더 중요하냐? 이 말이죠. 

  

2억 아파트 사서 월 250만원 나오는 그거하고 십자가 피하고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머리로는 알아요. 정답을. 십자가 피. “그래? 한 번 맛을 보여줄게. 진짜 십자가 피가 소중하다고 니가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 십자가 피가 진짜 소중한 것을 보여줄게.”하시면서 다 날려버려요. 2억 다 날려버리게 하죠. 그게 바로 세상이 주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받았던 그 시험.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시험이 우리에게 늘 주어지기 때문에 따로 시험할 필요가 없어요. 야고보서에 나오죠. “세상과 벗된 여인들아 너희가 원수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약4:4). 원수인 것을.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럼 세상 등지고 우에 삽니까? 세상 등지고 어떻게 삽니까? 라고 하는데, 산다는 말은 우리 입에서 할 말이 아니에요. 

  

산다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이고, 생명이라는 정의가 뭐냐 하면, 외부자극에 스스로 변화를 보이는 개체를 생명이라고 합니다. 외부자극에 스스로 변화를 보일 수 있는. 생물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현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사는 성도가 외부자극, 지옥에서 오면 우리 스스로 우리 힘으로 변화가 됩니까? 새사람 돼요? 안 되죠. 이것을 가지고 죽은 자라고 해요. 

  

어떤 변화를 거스르지 못하고 스펀지에 물이 들어오듯이 그냥 수긍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홍상수 감독하고 김민희 하고 둘이 사귑니다. ‘나는 아내가 있는 남자야. 김민희가 아무리 사랑해도 나는 아내를 지켜야 돼. 지켜야 돼! 지켜야 돼!’라고 이렇게 한 열 두 번 하면 지켜집니까? 갑자기 사랑이 없어져요? 사랑이라는 외부자극이 왔을 때, 가정이 있는 남자라고 천 번을 외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사라집니까? 아니죠. 죽은 자잖아요. 외부자극에 의해서 내 스스로 변화를 보이지 못해요. 

  

외부자극조차도 주님이 약속대로 했고, 변화를 보이는 그것도 주님의 약속의 취지에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 외부자극에 대해서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불러일으킨 거예요. 마귀나 이단이나 접촉하도록 하신 것은, “니 안에 나 있다. 예수 있다.” 이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불러 세우신 겁니다. 

  

예수님 참 무정하죠? 참 비정하죠? 내가 어떻게 되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예수님 본인의 대속하신 사랑을, 은혜를 드높이기 위해서 우리를 함부로 다루고 있고 갖고 노는 겁니다. 범사에.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그러니 백부장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18년 동안 귀신 들린 여인(눅13:11)이 얼마나 근 믿음입니까? 다른 사람 같으면요, 따질 거예요. 

  

“내가 저 사람보다 내가 뭐가 잘못돼서 나는 이렇게 18년 동안 고질병, 귀신들려 삽니까?” 따질건대, 전혀 따지지 않고 “저 개 맞아요.” 자기 형편 남하고 비교하지 않고, 겨누지 않고, 대조하지 않아요. “예. 저는 이것보다 더 혹독한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그건 주께서 하신 일인데 내가 토 달 것 없어요.” 이게 바로 세상에!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못 봤다고 예수님이 칭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면서 우리 인생은 현재에서 미래를 내가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와서 나를 납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래가 와서 납치한다. 납치를 당할 때, 우리는 <미래소년 코난>입니다. 현재와 상관없는 미래의 사람들이죠. 제가 지난주일 낮 인터넷이 고장 나서 고생을 많이 했죠. 제 아내의 말에 의하면 막 들어왔다 나갔다 막 바빴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이신진 집사님이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생중계를 했어요. 그래서 주소를 새로 해야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생중계를 못 봤을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거기서 한 주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구원에는 우리의 구원과 달라서 예수님의 개체는 세상에 있는 모든 세력들이 거기에 다 응집된다고 이야기했죠. 기억이 날까말까 한 표정인데. 예수님의 구원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어요. 우리 보기에는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우리는 국가에 꼼짝 못하는데, 군에 가라고 하면 가야되잖아요. 근데 예수님에게 국가적으로 달라 든다는 것은 예수님이 특수한 존재라는 거예요. 구원은 거기서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댐 터지면 댐 터지는 효과로 구원받는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애들 로봇조립장난감을 주문하게 되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고 했죠. 조립할 부품들이 플라스틱판에 붙어있다고 했죠. 그래서 로봇 팔이나 다리 등등을 조립할 때는 옆에 붙어있는 플라스틱을 자르고 부품들을 떼 내어서 조립하잖아요. 이게 인간은 안 잘린다는 말이에요. 이 세상의 사람들이 되어서 인간들은 이걸 스스로 잘라낼 수가 없어요. 

  

제가 이걸 설명할 때 예수님은 이게 잘려서 드론처럼 뜬다고 설명을 했거든요. 이게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구원이 그렇게 적용되면 사도바울도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자체가 이게 이미 드론처럼 뜬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게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게 공중부양해서 공중에 붕 떠 있는 쪽이다 이 말입니다. 원래는 공중부양한 사람들은 못 나옵니다. 음주운전 차사고 나면 못 나와요. 

  

사도바울은 같은 사람인데도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붕 떴어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서로 대립되는 이중성이 자기 인생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았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계심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다루시는 거예요. 예수의 증인되라고. 

  

이걸 간단히 말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내가 증인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내 믿음의 증인되라고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걸 목사들에게 수 십 년 동안 이야기했는데, 목사들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내 믿음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예수를 믿어 본 적이 없어요. 믿어 본 적이 없고,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나같이 내 믿음을 짜내가지고 믿는 거예요. 

  

짜내봐야 그거 똥만 나오지, 뭐 새로운 게 나온다고요? 치약 짜내면 치약 나오지 뭐 나오겠어요? 아니 짜내면 죄 나오지 뭐 나오겠습니까? 죄에서 해석하고 죄로 믿으니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될 수가 있어요? 그게? 그게 말이 안 되죠. 만날 지만 망하면 되지, “믿습니까?” 해가지고 남까지 전도해서 이제 다 같이 완전히 교회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요. 

  

삼천 명 모이면 삼천 명의 쓰레기장이에요. 오천 명이면 오천 명 쓰레기장이고, 십만 명이 모이면 십만 명이 쓰레기장이에요. 그래서 이래야 돼요. 전도할 때, “오늘도 새로운 쓰레기 등장했습니다.” 이래야 된다니까요. “다 같이 축하합시다.” 쓰레기에다 쓰레기 하나 더 보태면 냄새만 더 나요. 냄새만 진동한다니까요. 냄새만. 

  

그래서 여기 사무엘상 7장 10절에,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여호와께서 블레셋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우레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치기 위해서 사전에 준비한 무기입니까? 무기가 아닙니까? 무슨 우레라는 무기가 있겠어요?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 하늘의 해가 멈췄죠. 그 정보를 사전에 여호수아에게 좀 미리 통보를 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여호수아도 그런 정보를 사전에 미리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절대로 여호수아의 승리로 가지 않게 만듭니다. 다윗도 이야기해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대화하고 그냥 “안녕하십니까? 떡 가져왔는데 떡 받으세요.” 하는 사소한 모든 일상이 전쟁이에요. 떡 주고받고 하면서 좀 보란 말이죠. 저 사람은 어떤 길로 가는지. 맛있다고, 고맙다고, 하는 것에만 멈추지 마시고. “떡 맛있네.” 이러지 마시고. ‘저 사람은 떡 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하고 생각을 해야 돼요. 생각을. 

  

저쪽이 가는 길이 뭔가? 저 사람이 인품은 좋은데, 저 인품 좋은 저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 한 번 물어보세요. 떡 주거든,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새로 이사 왔습니까? 지금 어디가십니까?” “장에 갑니다.” 이 소리도 안 하죠. “혹시 교회 갑니까? 저도 교회 가는데.” 이때부터 사단이 나기 시작합니다. 

  

진짜 옆집 사람이 왔는데, 예상 못했는데, 교회 가는데, “사실은 교회 가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교회는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라고 이런 말을 새로 이사 온 사람이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는 바울이 하는 소리하고 똑같거든요. 아, 참, 그런 사람 미쳤다고 하지 마시고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은 힘든 게 아니고 드물다는 말입니다. 힘든 거하고 드문 거 하고 달라요. 전쟁할 때 우레가 나오는 이거는 예상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기대해서는 안 돼요. 이쯤해서 우레가 한 번 터트려주시고, 어디 축제벌입니까? 이쪽 한 번 터트려주시고, 이게 사전에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무엘상 7장 12절에 봅시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참 기도원 이름도 많죠. 에벤에셀, 여기까지 도와줬다. 그러면 여기 도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도움이 있어야 돼.’라는 그 내용까지 주님께서 블레셋을 붙이지 아니하면 나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도움을 줬는지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모른다 이 말이죠. 

  

여러분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좋습니까? 아예 안 아픈 게 좋습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아예 안 아픈 것이 좋아요. 하지만 병 주고 약 준다는 것은 내가 병들어도 마땅하고, 그리고 낫게 하고 안 하고의 주도권은 주님한테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약속 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어요. 

  

그러나 저쪽 블레셋은 이미 목적이 정해져있습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목적이에요. 내가 잘 되는 것이 목적인 것이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큰 소리 치는 이유를 이제 알겠죠? 저쪽은 그렇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틈만 나면 우리 자신이 벌써 그런 목적으로 그들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냥 쭉 가면 되는데 삐딱하게 가서 벌써 저쪽과 한통속이 되어가지고 있어요. 한통속이. 

  

“우리의 나라는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이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나라입니다.”라고 이렇게 하다가, 삐딱하게 가서 “이번에 누구 찍을래? 이번에 누구 찍어 줄 건데? 목사님은 누구 찍어 줄 겁니까?”라고 합니다. 우리 집은 한 사람이 표를 두 장 가지고 있어요. 제 아내가 결정할 문제인데....,10분 쉬겠습니다.

 이미아 (IP:122.♡.183.206)17-04-29 00:11 
대전강의20170425 마태복음 23장10절(봉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0절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화 있을 진저”가 반복해서 계속 나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누구한테 저주를 하는지, 그 사람들의 성향이 어떠냐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죠. 이 예수님께 저주받는 성향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아,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심판의 기준이 따로 있는, 이런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전체가요. 

  

여기 9절에 보면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절,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이래되어 있죠. 이걸 통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우주적 연쇄’를 생각합니다. 연쇄. 연결되어 있다.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죠. 여기 지도자, 그리스도인데, 지도자는 땅에 계시죠. 그리스도는 땅에 계시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러면 우주적 연쇄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고 땅이고 다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잖아요.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결된 방식이,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지도자라고 하지 마라. 

  

오직 누가 지도자다? 그리스도만 지도자라고 해서 하늘의 뜻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유일한 분은, 우주적 연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오시는 그 분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를 인간들이 알아보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이 그리스도가 왔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요인이, 그 이유가 인간 내부에 장착되어 있어요. 타고난 인간 내부 속에 이게 담겨있어요. 그리스도가 코앞에 있어도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게 되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 속에는. 

  

그게 뭐냐 하면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자기로부터 하는 거예요. 자기. 자기인데, 자기의 특징은 뭐냐 하면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리스도의 특징은 반대가 되어 낮아지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높아지려고 하는데 어디까지 높아지려고 하느냐 하며 바로 신의 영역까지 높아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을, 23장 2절에 한 번 봅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디 자리에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모세의 자리 앉았죠. 모세는 두 사람, 세 사람이 아니에요. 모세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고 난 뒤에,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오면서 모세는 그야말로 유일한 통로로 작용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모세한테 물어야 돼요. 하나님은 모세 이외의 다른 사람하고는 대화를 안 합니다. 

  

그걸 좀 설명해야 되는데, 방금 제가 한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줬잖아요. 십계명을 줬다는 말은 모세 빼놓고 십계명을 다 지키면 되게 되어 있는데, 그들이 십계명을 받을 자격도 안 돼요. 도중에 모세가 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언약을 깨버렸어요. 

  

모세가 알아요. 모세는 저런 마음가짐으로서는 법을 못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깨버려요. 깨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동행을 하는데, 율법이 없어졌다는 말은 이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세를 다시 하나님께서 부르죠. “너를 봐서 이스라엘과 동행할게.” 조건이 바뀌어요. “너를 봐서.” 조건도 그 조건이라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단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 가운데 모세가 있기 때문에,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의 복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행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진격이 가능하다. 그걸 가지고 모세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민수기 같은 데서 보면 그 모세가 갖고 있던 하나님의 성신이 조금씩 퍼지게 됩니다. 70인 장로들한테 준다든지, 여호수아한테 준다든지,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모세한테 아주 충성심이 많아가지고, “저 사람들도 모세처럼 성신으로 예언을 하더이다. 좀 말리소서.”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나중에는 모든 이스라엘이 저들처럼, 나처럼 예언을 할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합니다. 성신에 의해서 예언을 하게 된다. 그게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종교하고 복음하고 차이점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 상태로 계속 기다리는 것이지만 복음은 이미 완료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완료된 겁니다.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기다림,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소망을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복음은 이미 온 것에 의해서 교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해줘야 돼요. “나는 아니고 주님입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복음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하늘나라에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이 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움직이고 쌈밥 집에 가고 그런 거예요. 모든 게. 강아지 돌보고.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투표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나쁜 짓해서 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등장한 동시에 저쪽에는 저주스러울 수밖에 없다. 화가 있다. 그들 중에서 한 명도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이 하는 행세 자체가 저주받을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세는 그 뒤에 이어지는 우리에게도 계속 공통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 나쁜 사람! 왜 예수님을 힘들게 하냐?”라고 바리새인 욕하지 마세요.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마찬가지인데, 스스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13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취지로 일을 합니까? 안 합니까? 그런 취지로 일을 안 해요. “어서옵쇼!”하고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들이 인도해서, 그들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하면 천국 갑니다.”라고 친절에 친절을, 배려에 배려를, 희생에 희생을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이거는 예수님의 일방적 견해라니까요. 일방적 견해. 본인들 본심은 그게 아니에요. 한 사람이라도 건지려고 애를 쓴다고요.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건 뭐냐 하면 탈출구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없어요. 탈출 할 수가 없어요. 근데 바리새인들은 문이 있고 그 문을 통해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의 생각은 문이 없다는 거고. 바리새인들은 문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종교가 되고 예수님은 복음이 되는 겁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천국 보내주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그렇게 애를 써야 돈이 나오니까. 소개비 나오잖아요. 소개비. 커미션commission나오잖아요. 커미션. “천국 가놓고 돈 그것만 내나? 그만큼 더 내야지?” 뭐 이런 것. “염치도 없지. 생명을 줬는데 돈 그 정도 내서 되겠어?” 이런 것. 

  

돈을 내든, 전도를 하든, 무슨 짓을 해도 갇혀있는 겁니다. 탈출구가 없습니다. 그냥 해보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희망 없이는 못사니까. 가장 잔인한 사람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희망을 꺾는 사람이에요. 그 아파트 전기공사하는 사람이 그 사장과 전에도 일했는데 돈을 안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하면 전에 안 주던 돈까지 준다고 했어요. 이 사람을 두 번 배신해버렸어요. 전기공사 하는 사람한테. 

  

그래서 그 사람을 인터뷰하는데, “내가 어떤 경우에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바로 “화 있을진저”하는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떤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다들 갇혀 있고, 갇혀있으면서, 원래 솥뚜껑 덮고 콩이나 죽이나 뭘 끓이면 솥뚜껑 겉은 멀쩡한데 그 안은 난리가 났죠. 

  

그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솥뚜껑으로 꽉 닫아놨어요. 마귀보고 솥뚜껑 놀이하라고 마귀를 보내가지고 꽉 누르게 해놨어요. 그 안에서 인간들끼리, 마귀한테 눌린 상태에서 니가 죄인이니, 니가 의인이니,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처지인데. 

  

뭐, 니가 죄인이고 내가 의인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전부 다 주님 보시기에 다 뭐냐?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낮추고 있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근데 또 불교신자는 또 낮춘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누가 더 잘 낮추나, 시합하고 있어요. “그 정도로는 안 돼! 더 낮아야 돼!” 

  

어떤 드라마 연속극 주제가에 이런 게 있어요. 얼마나 아파야 되는가, 얼마나 더 아파야 이 사랑이 덜 고통스러운가, 라는 노래가 있어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천국이라는 것을 보상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프고, 아프고, 얼마나 고생을 해야 이 고생 끝이 나겠습니까? 앞을 보고 달린다고 이게 끝날 시합일까요? 

  

탈출구가 없고 솥뚜껑에 갇힌 입장에서는, 어떤 목적을 향하여 앞서간다고 해서 과연 앞서갈까요? 먼저 코 박을 뿐입니다. 아니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해서 탈출이 가능할까요? 내일모레 곧 죽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모세가 없는 이상은 이스라엘이 죽어도 지옥 갑니다. 돌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단절되었다는 거예요.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처음부터 인간은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곳에서 천국이 저기 있다, 무지개 뜰 때 저 뒤편에 천국이 있고, 라고 아무리 백날 손가락질해도, 밤중에 달이 나와서 “날 가리켰나?” 하면 소용없어요. 해와 달과 별이, 그것들이 창공을 꽉 지키고 있는데, 어떤 누구도 이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말합니다. 천국은 없다고. 천국은 없다. 다만 하늘이라는 공간의 연속이고 공간과 공간의 무한한 연속이다. 결국 과학에서 말하는 이 말은, 무한에 갇힌 유한자. 이게 과학이라는 종교입니다. 다만 솥뚜껑 속에 갇혀있으면서 이용해먹을 거만 이용해먹으면 되죠. 물이 떨어진다, 거기다가 물레방아 돌려가지고 밤에도 환하게 할 수 있는 전기를 빼내면 되는데, 전기를 빼내는 목적으로 살았다고 해서 이 세상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 화로다 망하게 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전기세 내고, 밤에 tv이 많이 보고, 죽고, 그 다음 날에 지옥가고. 노인 되어 못 걸었는데 휠체어로 잘 걷고, 걷다가 죽으면 그날 지옥가고. 그런 거죠. 이미 이 세상은, 지옥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언약으로 인하여 저주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언약이 없으면 죽어서도 언약이 없는 거예요. 죽어서 저주받아야 돼요. 저 강아지만 비참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불쌍해요. 나 니보고 이야기 안 했다. 인간이 불쌍한 거예요. 인간이. 

  

개는 그냥 사물체에요. 사물체. 언약과 약속과 관계가 떨어져있으면 그거는 이미 죽은 자에요. 개는 뭐가 되느냐 하면 흙이 됩니다. 인간도 흙이 돼요.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인간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갈 뿐이에요. 개도 마찬가지고. 6일째 만든 것은 다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 창조가 다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형태가 뭉개지면 무형체로 되는 것하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설교 때 했잖아요. 코 성형하고 뭐 해도 뭉개지면 동일한 흙이라는 겁니다. 인물이 이쁜 건 좋지만, 다들 이쁘시지만, 흙이 약간 남과 다르다는 것뿐이죠. 

  

여기서 좀 더 설명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이런 일방적인 평가를 하시는데,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럼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전도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러면 천국 문이 어떻다고 소개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게 좀 더 23절까지 나와요. 

  

16절에 한 번 봅시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현대인 같으면 이게 무슨 말이지 잘 모를 거예요. 사람 자체가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잖아요. 이미 목적은 정해져있어요. 

  

솥뚜껑에 갇혀있는 이 캄캄한 세계에서 자기가 높아지려고 한다 말이죠. 높아지려고 이성으로 상상하겠죠. 솥뚜껑 바로 밑에다 뭘 그리겠어요? 하늘나라를 구상해가지고 환상으로 깔아놓겠죠. 그러면 거기서 뭐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다고 사람들이 상상하겠죠. 이게 오늘날 교회 있으면 저 하늘나라에 예수님의 나라가 있고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셔가지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지키면 된다는 것하고 똑같은 형태라는 말입니다. 종교니까. 

  

인간은 이 하나의 법을 따라가게 되면 천국 문에 이른다는 거예요. 천국 문에.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을 이야기하거든요. 천국 문에 이르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따라가면 되는데, 이 율법은 어디로 되어 있느냐 하면 성전중심으로 되어 있어요. 성전중심으로.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전부 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 시온 성, 거기서 하나님하고 인간의 만남이 성사된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 하나님께서 법을 앞장세워서 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습니다. 지금 복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이 아니고 뭘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죠. 이사야 9장 6절에 나오잖아요.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그랬죠. 

  

마태복음 17장에 “마지막 때 너희들은 아들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나타나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아들의 말을 들으라.” 그럼 엘리야와 모세가 법을 지키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해서 죽기를 원했습니까? 죽기를 원했죠. 아들은 이 땅에서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죽음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법이 법으로 살려면 내가 죽으면 안 돼요.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말은 인간은 이미 법을 요청하기 전에 인간 나름대로 이미 법 감정이, 법의식이 갖추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 속에 법이 있어요. 이 법을 내가 지켜야 돼요.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도중에 실패하면 안 돼요. 이 법 지키는데 성공을 해야 돼요. 그 법 중에는 전도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법 지키는 것을 가지고 맹세라고 하는 겁니다. 맹세. 어떻게? “예. 지키겠나이다.” 맹세. 자, 보통 일반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 어디를 두고 맹세합니까? “내 목을 내놓을게.” 뭐 이런 거요. 그렇게 하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이런 거. 이렇게 한다는 말은 현재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고 맹세하잖아요. 지난 오후설교 할 때, 담보물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고 전당잡히듯이 가장 귀한 것을 내놓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귀한 것을 내놓는다는 말은, 내가 성전을 위해서 맹세한다는 말은, 내가 만약에 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면 나는 어디에 들어갈 수 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 성전에. 성전에 골인하게 되면, 구약에 의하면 예루살렘성의 일원이 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천국 문에 이르게 되는 백성으로 확인이 되는 겁니다. 확인이. 인정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이렇게 한 번 설명해봅시다. “내 말이 틀리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근데 한 일주일 뒤에 보니까 손이 멀쩡해요. 그 말은 뭐냐, “손이 멀쩡한 거 보이지? 내 손 멀쩡한 거 눈에 보이지? 봐라! 내 약속대로 되잖아!”라고 자랑할 수 있는 증거물이 돼요. 손이 멀쩡한 게. 어떤 국회의원은 손 지진다고 해놓고 안 지졌는데. 청문회 할 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끓는 물에 손을 담근다는 말이에요. 내 말이 맞으면 끓는 물에 손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안 맞으면 진짜 손이 문드러져 상해를 입겠죠. 내가 성전으로 맹세한다는 말은, 나 괜찮다는 이 말이에요. 나.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정도로 믿음이 좋은데, 뭐 이야기를 해야 될 건데, 증거를 한 번 보여줘? 성전에게 맹세할게. 나 성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이런 뜻이에요. 

  

그 다음에 한 번 봅시다. 16절 하반 절에,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성전 중에서도 뭐가 있으니까? 금이 있으니까. 최고로 자기가 만만한 거예요. 그 다음에 18절,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귀한 제물에 대해서, 제물을 가지고 팽개치고 짓밟고 하는 이런 사람은 없을 거 아닙니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것, 가장 거룩한 것, 이런 리스트가 나오는 겁니다. 성전, 성전의 금, 제단, 제단의 예물, 제단보다 더 우열한 게 제단의 제물. 하여튼 하나님께서 고상하다고 여기는 그 리스트, 항목들을 가지고 쭉 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당신이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수 있어? 갈 수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어?” “나 성당 다녀. 나 성당 다닌다고!” “나 교회 다녀. 교회 다닌다고!” 이게 뭡니까? “에이 참, 내 말 안 믿어주네? 나 성당 다니고 교회 다녀. 나는 안 믿어줘도 성당이 얼마나 수천 년 동안 고상하고 교회가 얼마나 착한 일 많이 하는지 니 알지? 너도 똑같이 인정하는 그것에다 내가 걸게.” 이래 하는 거예요. 

  

결국 성전, 성전의 금, 제단, 제단 위의 예물, 이 모든 것은 갇혀있는 것들끼리 기껏 최고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의 항목들이에요. 주님은 말합니다. 그게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다는 겁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큰소리 많이 친다고 해서 믿음이 증강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없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나는 믿음이 좋아.” “니가 왜 믿음이 좋아?” “이근호 목사님이 나보고 믿음이 좋다고 했어.”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소경된 자여! 왜 본인의 믿음을 남들에게 설득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없고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냥 주님 주시하고 교제하면 되지, 꼭 남한테 그걸 과시해야 되는 겁니까? 

  

어떤 목사가 자기는 박사학위를 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왜 받아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석사로 말씀 전하는 것보다 박사로 말씀 전하는 것이 더 권위가 있어가지고 사람들을 천국 보내는데 더 쉽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박사권위니까 믿어주자는 그 교인이나 박사권위로 밀어붙이자는 그 목사나 둘 다 쓰레기에요. 둘 따 쓰레기라고요. 

  

인간들은 예수님이 와도, 그리스도가 와도 그리스도를 못 알아 봐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그 안목가지고, 그 시선가지고 뭘 만들어냈는가를 한번 쭉 보여주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것들을 걸고 서로서로 거기에 찬동하고, 생각들이 결집이 되어 있느냐는 말이죠. 딱 하나로 되어 있어요. 하나로 결집되는 거예요.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수님 죽일 때 한 사람이 죽였습니까? 모두가 죽였습니까? 모두가 죽였어요. 모두가. 누구하나 예외 없이, 제자들은 지금 다 도망갔어요. 만약에 도망간 베드로를 경찰이 와서 딱 잡아가지고, “예수님 풀어줄래? 바나바 풀어줄래?”하고 투표현장에 딱 집어넣어버리면 베드로가 표를 어디에 던지겠습니까?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동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바깥에 있는 죄는 우리에게 영향을 입혀가지고 내 스스로, 죽은 자는 내 스스로 자체의 변화를, 결과를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 밖에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왜 이 딸기를 먹었냐? 주께서 이 딸기를 먹게 하신 겁니다. 만약에 손 다 다쳐서 개처럼 입으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걸음, 두 걸음,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우주의 연쇄. 우주에서 돌아가는 모든 연쇄 고리, 고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증거 하기 위해서, 자기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어느 것 하나도. 하필 그때 미장원 갔다 오고, 하필 그때 목욕탕에 갔다 오고, 하필 그때 버스 놓치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딱딱 곽에 맞춰져 있어요.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딱딱 그 타이밍 맞춰서 우주적 연쇄에 의해서 주님이 다 관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살아있어서 일을 만드시는 분이에요. 우리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어느 것 하나. 따라서 우리는 감사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범사에 감사할 뿐이죠. 그럼 감사의 목적은 뭐냐, 우리는 목적이 있어요. 마음을 낮추게 하고 우리를 죄인 되게 해서, 죄인이 내세울 게 없잖아요. 마음이 자동적으로 낮춰지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목적이고 뭐고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의해서 가두어진 세계에서는 목적이라는 것이 다 무의미한 겁니다. 무의미한 거예요. 공무원 시험 3년을 쳤다. 또 떨어졌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 청년이 자살을 했죠.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자살을 했죠. 그 청년 목적이 뭡니까? 공무원 시험이에요. 

  

그럼 공무원 시험 떨어지면 인간 아닙니까? 자기는 인간 아니래. 왜? 자기는 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 자기 자신이래. 지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했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가 그렇게 하기 전에 다른 공무원이 있는 거예요. 한 번 물어봅시다. 교인 수 두 명 되면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교회죠. 

  

근데 두 명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적어도 200명 돼야 된다고 합니까? 이미 남들이 200명 쯤 돼야, 그리고 자기 고정 건물이 있어야 교회라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자기의 목적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 자아를 거기에다 맞추어서, 자기 자아를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안 되면 죽고 싶은 거예요. “나 목사 아니야.” 그런 인간은 죽어버려라. 

  

대전 역에서 택시타고 딱 나오면 네거리가 등장하거든요. 네거리에서 보이는 것이 있어요. 건물이 고딕으로 되어 있어가지고, 교회나 성당건물처럼 스탠드그라스 있고, 그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표시가 있어요. 만(卍). 그러니까 이 위에 있는 십자가(十)는 없애버리고 불교 만(卍)을 올려놨어요. 스탠드그라스는 못 고쳤어요. 이게 수리비가 많이 드는가 봐요. 고딕 스탠드그라스는. 대전 역에 나가거든 한 번 보세요. 거기에 있다고요. 못 봤죠? 교회 하나 있고 그 옆에 건물에 만(卍)표시가 딱 달려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十) 백날해도, 안에 내용은 세상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요. 십자가 믿어놓고, “이거 공무원 떨어지면 나 죽겠습니다.”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니, 자살은 왜 합니까? 지 목적이 있어서 그래요. 기대하는 그게 악이에요. 기대하는 게. 평생 인간은 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요. 이 목적과 은근히 기대하는 것. 목적이 이끄는 삶. 아침에 눈만 뜨면 기대해요. ‘오늘도 뭐 해야 되는데.’ 

  

기대를 한다는 것은 윗대가리 십자가를 날려 보낸 거예요. “주님. 오늘도 따로 놉시다.” 우주적 연쇄를 잊어버리고 소박하게 나만의, 현재 내 자아를 기어이 사수하고 지키려는 그 여건을 따로 꽉 쥐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란 평생 이렇게 살아가요. 우리 집사님 지금 기대가 졸린 눈이 떠지는 거예요. 잠 오게 하신 것이 우주적 연쇄라니까요. 모든 걸 감사해야 해요. 잠 오는 것도 감사해야 돼요. 잠 오는 것도. 그 정도로 나는 없는 거예요. 나는 없고, 고 순간, 순간 주께서 나를 새롭게 제작하는 겁니다. 주의 뜻에 합당하게. 화 낼 일이 없죠. 

  

눈 뜬 나도 있지만, 눈 뜬 나만 고집하지 마시고, 눈 감은 나는 내가 아니라고 왜 우깁니까? 소화 잘 되는 나만 생각하지 마시고 소화 안 되는 나도 있잖아요. 왜 내 걸 내가 쥐려고 합니까? 그것은 기존의 내 것을 기어이 쥐려고 하게 되면 거기에 기대가 있고 그 기대는 주님을 욕하고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도록 악마가 작용합니다. 

  

“내 뜻대로 안 해주고 씨!”이런 식이라 이 말이죠. “우이 씨!” 광주에 갔더니만 오목사님이 저한테 시비를 거는 게, 기도를 하면서 “에이 씨!” 했는데 이건 어디에 근거해서 나왔습니까? 그래서 근거를 보여줬죠. 우리 외손녀가 인형하고 놀다가 “에이 씨!” 했어요. 근데 그게 너무 빨리 지나가서 못 찾아내겠다는 거예요. 결론이 뭐냐 목사님이 일방적으로 예를 들었다고 결론이 났어요.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잠 깨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21절에 보면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절,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니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나 아나? 니가 하나님이 뭘 맹세했는지 알기나 알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맹세로 끝났어요. 사람의 맹세를 안 듣습니다. 사람하고 상대를 안 해요.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있잖아요. 하나님은 모세하고 상대해요. 백성들하고 상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과 백성들하고 부딪치게 하죠. 니가 얼마나 죄인이고 법을 못 지키는지, 하지만 모세를 보고 내가 너희들을 떠나지 않고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분명히 우리 안에 누구 계셔. 분명히 그 분이 계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기대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만 잠기어버리고 그게 날아가 버려요. 윗대가리 십자가(十)를 모가지 쳐버리고 만(卍)자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꾸준하게, 순간순간, 하루를 살면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십니다. 일하기 위해서 9시에 오라고 했는데 꼭 둘이 9시 넘어서 늦게 오고. 이런 것 있잖아요. 회의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꼭 엉뚱한 짓 해가지고 회의 분위기 다 망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회의 잘 되는 것은 내 뜻이었고 그 망치는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짊어진 나의 기대가, 십자가에 감사해야 될 감사를 내가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네 자로, 사자성어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거룩이고 신앙생활입니다. 내 마음을 낮추는 겁니다. 안 그러면 역시 내 맹세대로, 내 기대대로 응답이 돼서 까불락 돼서 그 꼴을 못 봐요. 뭔가 뜻대로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알아서 손드세요. 기도응답 받거든 알아서 손들고. “두 번 다시는 이런 기도 안 하겠습니다. 응답되는 기도 안 하겠습니다.”하고 손들고 있어야 돼요. 

  

방금 읽었던 21절, 22절 그것이 내용으로 주어지는데 그 내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3절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재미있는 것이 십일조도 하고 의와 인과 신도 갖추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십일조도 하면서 의와 인과 신을 병행해서 드릴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이미 인간의 마음은 낮춰진 게 아니고 높아져있기 때문에, 인간이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한 것을 본인이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버릴 수가 없어요. 포기가 안 돼요. 

  

주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십일조를 했다는 말은 이미 인과 의와 신은 날아가 버렸다는 뜻이에요. 십일조 한 행위가 뭘 가리느냐 의와 인과 신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럼 십일조를 안 하면 의와 인과 신이 되겠습니까? 해야 되는데 나는 복음 알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가 의와 인과 신을 가려버립니다. 해도 죄인이고 안 해도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머리를 잘 굴려야 돼요. 이왕 죄인 될 것 돈도 아끼고 교회도 안 나가고. 이왕 죄인 되는 것.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 귀한 것 누구한테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귀한 돈을 목사하고 교회한테 뺏기지 말라고. “하나님한테 뺏기라면서요?” 하나님한테 빼앗기라는 것은 마지막 죽으면 다 뺏기는 거예요. 죽을 때 다 빼앗기는 거예요. 어차피 재물은 우리의 구원을 대신하지 못하니까 다 빼앗기는 겁니다. 

  

그러면 돈을 왜 주셨느냐? 더욱더 죄인 되라고 주신 거예요. 가지고 있으면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빼앗김의 아픔이 얼마나 독한 것인가를 알아라 이 말이죠. 아플 때 아프더라도 갖고 싶죠. 아프고 아프지 않고는 나중문제에요. 일단 엄청 갖고 있는 기쁨이라도 누리고 싶잖아요. 십자가(十)모가지 날아가든 말든.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 삽니다. 불안한 이유가, 뭔가 기대한 것이 있어요. 

  

지금 한 달 월급이 150만원이다. 십년 뒤에도 150만원이 아니라 기대한 것이 있잖아요. 기대한 것이 있는데 “아빠! 보증 좀 서줘.”라고 하면 이게 문제다 이 말이죠. “취직할 때인데 취직은 안 하고 왜?” “취직은 못하겠어. 사업하고 싶어.”라고 나오면 골치 아픈 거예요. 따박따박 한 달에 얼마 버는 것이 낫지, 딸이 와서 “아빠!” “왜?” “또 임신했어.” “애가 지금 둘인데 또?” 둘인데 또 하나 더 낳으면 나중을 누가 감당 할 건데? 한 명당 4억인데? 이거 누가 할 거예요? 

  

손자 데려 와가지고 “할아버지한테 인사해라. 이번에 사립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이거 뭐 돈 돌라는 소리 아니에요? “공납금 700만원이라고 이야기해라.” 이거 뭐에요? 그런 소리 하지마라고 고등학교 때 용돈 한 10만원씩 줬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할아버지가 10만원으로 입 싹 닦고 싶어도, 이번에 설날에 와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여보! 한 학기만 당신이 해줘야지.” 또 약한 게 여자의 마음이라. “많이 해줬잖아?” “그러지 말고 눈감고 해줘라.” 근데 시집가서 하고 친정에 가서 하고. 한 두 번만 하면 2학기는 보장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애 놓지 말라고 하니까. 지금 대학 들어가는 이것은 문제도 아니에요. 애가 학교에 들어갔는데 적응이 안 되가지고 미국 보낸대요. 미국. 그걸 왜 나발을 불어. 미국에 가든, 굶어죽든 니들이 알아서 하지. 더는 없다고 하고 싶은데, 유학 보낸대. 아이고, 참내, 온 관계된 사람들을 전부다 조져놓는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수술하라고 해가지고 둘로 끝나는. 지금 날짜 조절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게. 서로 벌벌 떨면서 니가 수술하라고 서로 미루고. 어떻게 여자보고 하라고 해요? 남자가? 겁난다고? 

  

오늘 제목을 뭐로 할지 모르겠어요. 세상의 기대 자체가 의와 인과 신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봉쇄라고 해야 되겠어요. 철저하게 복음을 봉쇄해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성령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 힘으로는 주께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봉쇄하는 그것은 바로 처음 우리가 구원받을 때 여전히 봉쇄되어 있거든요. 봉쇄의 연발성, 봉쇄의 반복.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하는데, 안 돼요. 끝까지 주의 성령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철저하게 우리의 야심과 교만과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 왜 바리새인들이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이렇게 해가면서 교인을 데려오려고 합니까? 그게 자기의 의와 인과 신의 합당한 열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봐! 전도했잖아. 그러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이 맞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1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봉쇄잖아요. 제목이 봉쇄 아닙니까? 십일조가 바로 봉쇄입니다. 십일조를 봉쇄라고 하는 교회를 제가 못 봤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이렇게 해요. 

  

그럼 교회가 왜 십일조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논리를 잠시 설명해보겠습니다. 구약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이 안 보이죠. 그럼 이 땅에서 안 보이는 하나님에게 보이는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는가? 보이는 단체가 있잖아요. 성당과 교회라는 단체를 통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갈 때는 등록을 해야 돼요. 그리고 성당에서는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립니다. 

  

미사 할 때 들어가는 것이 뭐냐 하면 성만찬 들어가죠. 개신교는 일 년에 두 번하죠. 교인들이 너무 귀찮아하니까, 아주 편리하게 고객들의 의사를 반영해서 두 번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안 그랬는데, 자주했는데, 점점 더 편리위주로 되어서 두 번 해요. 그러면 그 단체를 유지하려면, 여기가 구약이니까 누가 제사장 역할을 해야 돼요. 제사장 역할, 지도자 역할을 누가 해야 되잖아요. 

  

아까 지도자 나왔죠. 땅에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지도자라고 자청을 해야, 교인들이 원하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떤 보이는 세계의 구체화 되게 되면 마음에 평정을 갖고 안심을 하게 돼요. 근데 교회는 가야지, 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아까 물었잖아요. 두 세 사람만 있는 것도 교회입니까? 라고 물었잖아요. 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해요. 두 사람, 세 사람, 머리 숫자와 관계없어요. 두 사람이고 관계없어요. 

  

근데 교회는 가야지, 라는 그 모델이 뭐냐, 이미 이 정도 안정권에 든 교회를 교회로 보고, 개척교회 홀로 있는 교회는 교회 될라고 하는, 교회는 아니라고 본 거예요. 가봐야 돈만 내라고 하고, 우리도 교회건물 짓자고 돈 내라고 하니까 귀찮아서 안 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이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단체를 유지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하잖아요. 

  

눈에 보이는 단체는 예배당이 있어야 되고, 예배당하려면 터 사야 되죠. 설계비 줘야 되죠. 자재비 줘야 되죠. 인건비 줘야 되죠. 그걸 운영하려면 감독비 줘야 되죠. 그리고 예배당 세워지면 그걸 늘 관리하는 사찰집사 세워야 되죠. 그리고 그걸 총 의견을 종합할 목사가 있어야 되죠. 구색은 다 갖춰놓았잖아요. 

  

근데 이 교회마저 교단 만들어가지고 이 재산을 다 교단이름으로 해가지고, 법인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이 헌금한 것을 저쪽으로 다 가져간다니까요. 법인 만든 이유가 뭐냐, 자기 똘마니들 퇴직할 때 퇴직금 주고 월급주려고. 그래야 목사의 최저 생활비가 있어야 목사의 권위가 장로권위보다 교인권위보다 더 높아져야 교회를 전제주의, 독재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바로 천주교에요. 천주교는 교황독재입니다. 독재자가 둘이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어요. 인품에 대해서 시비하면 “나는 내 자리가 상징적 자리지 인품에 대해서 논하지 마라.” 내 교회라는 자리가 주님 주시는 자리라고 해야지, 내가 교황 될 인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왕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왕이 될 만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에요. 그 자리가 왕을 말해주잖아요. 교황도 상징이라는 자리가 교황을 만들지. 교황이 뭐 그런 식이라고 비난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도 목사가 이걸 그대로 따왔어요. “목사를 탓하지 마! 목사는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중요한 거야. 까불지 마!” 목에다가 너희들이 나한테 만약에 토 달면 출교 당한다는 것을 아예 한자로 쓰고 싶을 거예요. 인사권처럼. 말은 안 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목사한테 대들면 성만찬 못하게 만들어요. 지금 세상이 이 우주의 연쇄에요. 주께서 이렇게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니는 믿음 있는가를 우리보고 늘 묻기 위해서. 만약에 저걸 욕하면서도, 우리는 삼백 명 오백 명 모이는 교회라고 하면 얼마나 이걸 지키려고 부러워하겠습니까? 말씀 운동한다고 강남교회 만들어놨는데, 교회가 싸운다고 했죠. 

  

말씀운동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막상 현실은 뭡니까? 말씀은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예배당 사투벌이는 거예요. 이거는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이근호 목사 은퇴하고 난 뒤에 누가 차지할 것인가? 이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참내. 슬슬 70이 다 되가지는 않지만. 제가 117세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아시겠죠? 교회는 없는 거예요. 그때그때마다 생겨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의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서 비춰봤습니다. 매일같이 음흉하게 내 것 지킨다고 의와 인과 신을 봉쇄하는 이 죄인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깨닫게 해주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취지를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