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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선자자와 사도 1703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24. 19:51
2017-03-22 00:16:55조회 : 56         
유튜브 (182강, 183강) 선지자와 사도 , 죄의 생산 17032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182강          음성                     동영상

 

183강          음성                     동영상

 

 공은주 (IP:119.♡.152.148)17-03-24 16:27 
182강-YouTube강의(선지자와 사도)170321-이 근호 목사 

182강, 제목은 ‘선지자와 사도’입니다. 선지자와 사도가 서로 관련성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더러 하십니다. 선지자와 사도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고요, 차라리 선지자와 성도와 관련성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보다 신약에 천국에 있는 소자가 선지자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선지자와 신약의 성도 자체와 우선 관련성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 자체가 오늘날 이 시대의 선지자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선지자입니다. 베드로전서2장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러면 사도는 뭐냐, 사도는 성경을 남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선택한 사람입니다. 사도가. 사도하고 성도하고의 차이점은 사도는 계시의 확정을 위해서 쓰여진 분들이고, 그리고 성도는 사도한 그 성경을 통해서 그 말씀 토대위에, 하나님의 말씀에 작용하는 결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이미 되어버린 그런 해당되는 사람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2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리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어요. 그리고 난 뒤에 그 모퉁이 대신 예수님 위에 등장해야 할 사람들이 선지자들이고 신약의 사도들이고. 그 터 위에 그 다음 차 순에 해당되는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의 벽돌처럼 개입이 돼서 21절에 보니까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듯이 성령 안에서 그들이 한 성전이 되어간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제목에 나온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선지자와 사도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 너는 어떤 의도로 그걸 묻느냐를 생각해봐야겠지요. 너는 왜 뭐가 궁금해서 선지자, 사도라는 것을 질문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선지자의 기능, 사도의 기능, 그리고 성도의 기능이 같을 수가 있느냐, 어떤 점에서 같은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게 아마 궁금했을 겁니다. 

오늘날 자신이 성도라면 성도가 해야 될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 일과 구약의 선지자의 일과 신약에 있는 사도들의 일과 이게 같은가, 다른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러면 다르면 어떻고, 같으면 어떻냐, 같게 된다면 이것은 성도 본인이 스스로 성도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토대가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고 선지자와 사도와 성도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러면 성도는 사도나 선지자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 되는지를 그게 궁금한 거죠.  이 전체를 한꺼번에 묶으면, “성도와 사도와 선지자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성격이 있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와 사도가 에베소서2장20절에 보면 전부 다 예수님의 터 위에서 그렇게 그들이 나타났거든요. 터 위에. 예수님의 터 위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 개인적인 인생을 따로 본인이 본인 인생을 꾸려나가는 처지는 아니다. 에요. 왜냐 하면, 예수님 위에 있으니까. 본인이 고립적으로 독단적으로 “나는 이런 인생을 살겠다.”라고 다짐하고 결심할 수 있는 입장들이 못 됩니다.  사도도 그렇고, 선지자도 그렇고,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만의 개성이 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성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됩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필요 없어요. 공통성을 드러내면 되지, 물론 개성이 있겠지만, 나는 이런 개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이런 점에서 같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같은 점이 뭐냐 하면, 선지자와 사도는 전부 다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치열하게.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순탄하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 삶을 살았고,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전부 다 이건 고난 받았고, 사자 입속에 까지 들어갔고, 그리고 어떤 스가랴 선지자는 돌아 맞아 죽었고, 아벨도 마찬가지고. 

선지자 자체를 그냥 고난이 일상화된 사람이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면 사도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본인의 행복이라든지 본인의 가치 있는 인생을 자기가 스스로 계획 잡아서 꾸려나갈 수 없어요. 요한복음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기를 니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고생, 고난으로 인도받았지요. 엘리야, 엘리사도 마찬가지고.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습니까? 사도는 본인이 원치 않는 인생의 길을 간다면 그러면 오늘날 성도도, 선지자와 사도와 같이 똑같이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가 뭐냐, 그렇게 살아야만 구원되기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성신이 또는 성령이 그들을 가만두지를 않았습니다. 자꾸 사도, 선지자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성도도 그러하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복을 언급하면서 제일 마지막 복이 뭐냐 하면, 내 의와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도 똑같은 길을 갔다 했습니다. 복이 있다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게 복이 있는 거예요. 

자기가 기도한 대로, 자기가 희망한 대로, 자기가 고대한 대로, 기대한 대로, 기도한 대로, 자기가 맹세한 대로 안 살아지는 겁니다. 계획 잡은 대로 안 살아지는 것. 그러니까 아무리 성도가 잘 먹고 잘 살아도 자기가 부자 되고 싶어서 부자 된 게 아니고 그 부자 된다는 그 자체도 치열하게 사는 하나의 환경으로서의 부자가 된 거예요. 부자가 나쁜 게 아니고 그 부자 자체가 자기에게 사도와 선지자의 그 치열함을 자기에게 제공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과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모습이지요. 

부자가 핍박받는다 하니까 좀 이상하지요? 부자 안 돼봐서 잘 모르겠지요?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항상 성령께서 그렇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구원 받았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겁니다. 마태복음16장에 끝부분에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받은 그 구원 영생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실패라 하더라도 울 이유가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어떤 난관이 오고 절망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징징대거나 짜증내거나 불평할 수 없는 처지가 성도에요. 어떤 경우라도. 범사에 감사하라 했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왜냐 하면, 환란과 곤고와 핍박 어떤 것이 오더라도 이게 구원이 변동이 안 되니까. 

바로 성신 받은 선지자들과 오늘날 성도와 사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끄덕도 없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기에 자신의 자신됨에 대해서 주님의 구원됨에 의해서 이것은 하등의 요지부동, 달라질 게 없다는 그 넉넉함, 안정감, 특히 그 넉넉함. 그래서 이 세상의 각양 실패는 다 오라. 

그것이 나에게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니라. 그것마저 주께서 내려주신 적절한 복음이, 영생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를 오히려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한 주께서 설정해 주신 우리의 삶의 환경. 바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렇게 공통적으로 살았습니다.

 공은주 (IP:119.♡.152.148)17-03-24 16:34 
183강-YouTube강의(죄의 생산과 소비)170321-이 근호 목사 

제183강, 제목은 ‘죄의 생산과 소비’입니다. 생산과 소비라는 단어 자체가 경제에서 나온 단어지요. 물건의 상품의 생산과 소비. 경제에서 생산과 소비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없는데서 공장에서 요번에 신상, 새로운 상품이 생산되었습니다.’ 고 하는 겁니다. 

생산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생산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없었는데 생산되고 난 뒤에는 새로 생겼습니다.’ 라고 할 때 생산이란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죄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죄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은 마태복음6장에 나온 주님 가신 그 기도, 기도에 보면 그러한 경제적인 성향의 단어가 나옵니다. 

6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대목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에게 빚을 진 자들을 우리가 제가 탕감해주는 것처럼 성심을 베푸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저에게 주신 부채, 빚을 탕감해 달라는 내용이에요. 이건 경제용어지요. 경제용어로 빚을 다른 말로 하면 부채라 하잖아요. 누구한테 빚을 졌다 말이죠. 

그리고 로마서에 봐도 구원되는 걸 가지고 죄 값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죄의 값. 그리고 죄 값을 치러서 구원하는 걸 가지고 그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대신 값을 치룬 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값을 치룬 걸가지고 속죄라고 하고, 대신 값을 치룬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지요. 

그런 용어를 사용하니까 이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뭐를 언급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맨 얼굴로 만날 수 있는 입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모르는 게 들어있어요. 그게 박혀있는데 그게 뭐냐,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박혀있으면 죄를 빼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자,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돼요. 시편51편에 보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잖아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아주 알기 쉽게 이야기해서 어항이 큰데 수족관에 고기가 헤엄쳐서 놀지요. 그런데 고기의 세상은 뭐냐 하면, 어디까지나 수족관 안이에요. 수족관 안에서 지는 자기 딴아 헤엄치는 수영솜씨 자랑한다고 마음껏 퍼뜩 거리며 돌아다니지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너는 아무리 그래도 수족관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시편51편에서 다윗이 알게 된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죄라는 수족관 안에 갇혀있는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신을 받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럼 하나님의 성신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죄를 지으면 그 지은 만큼 생산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생산. 

생산이라 하는 것은 제가 아까 말한 없는데서 내가 잘못 행동하게 되면 죄가 새롭게 발생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발생되었으면 인간이 생각하는 원위치가 뭐냐 하면, 새 죄가 나오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면 그걸 원위치로 보는 거예요. 보통 인간들이. 그건 왜 그러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 아니면 악이고 아니면 선이다. 말이죠. 

그래서 악은 뭐냐 선을 행하지 못한 게 악이고, 선은 뭐냐 악이 아닌 것이 선이고. 그리고 악은 선이 아닌 것이 악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선악체계로 보면 뭐냐 하면, 사람이 선하고 의롭게 악하게 되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바르게 행동하게 되면 이건 선이고, 그렇게 행동 안하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원천은 뭐냐, 중립적인 중성적인 요소가 있어요. 

내가 그냥 보통 상태에서 선을 행하면 선이 되고 악을 행하면 악이 되니까. 악을 행했을 때는 선을 가지고 악을 보상해주면 부채니까 죄가 하나의 빚을 진거니까 빚을 갚을 때는 어떻게 갚는다? 착한 일을 해서 그 빚을 갚아버리면 나는 원래 상태, 중성상태, 중립자리에 다시 온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없는데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마치 수족관에서 금붕어가 파닥일 때만 물방울 튀는 게 아니고 원래 물속에 있기 때문에 파닥일 때마다 그 때마다 ‘아! 나는 지금 죄 속에서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그 때 그 때마다 확인할 뿐이죠. 

이 다윗이 알게 된 것을 가지고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언약. 그리고 예수님은 어느 환경을 염두에 두고 오셨느냐 하면 다윗 언약을 염두에 두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의 수족관에 갇혀있다는 것을 완전히 밝혀주셨다는 겁니다. 밝혀주신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나름대로의 어떤 수능이나, IQ나 가진 재산, 비교, 부동산 이만큼 가졌다. 목사, 교인수 몇 명이다. 나는 기도를 오래한다. 헌금을 얼마 했다. 전도를 몇 명했다. 이런 모든 인간의 독자적인 가치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되겠어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왜? 모든 사람이 죽었으니 그것도 왜 죽지요? 죄로 인하여 죄안에서 헤엄쳐 죽었으니 지가 선교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찬양하고 예배 참석하고  다가 뭐다? 그게 죄라는 물방울을 튕겨내는 거예요. 피아노 반주로 봉사하는 것, 꽃꽂이 봉사하는 것, 교회 청소해주는 것, 때마다 고아원에 가서 예수님 이름으로 구제하는 것, 바자회 여는 것, 전부 다 죄의 다양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이야기할 때, 인간들이 익히 아는 기도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했어요. 내가 남에게 빚을 탕감해 주듯이 저의 죄도 탕감해 주세요. 라고 이렇게 하지요. 그러나 그 의식이 그러한 기도에 대해서 기도가 성립되려면 죄를 지은 게 있어야 하거든요. 죄를 지은 게. 

죄라는 게 규정이 된다 말이죠. ‘아! 내가 남한테 이런 빚을 졌구나! 이런 부채를 졌구나!’ 있어야 되는데 그 판정을 누가 하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본인이 해요. 본인들이.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이야기하고 그냥 하늘로 가셨습니까? “주기도문 잘 알고 있지?” “네.” “그럼 나는 간다. 주기도문 잘 지켜서 천국 오너라.” 이리 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로 갔습니까? 십자가로 갔을 때 뭘 들고 갔느냐? 주기도문 내용을 질질 끌고 가시는 거예요. 십자가에는 모든 예수님이 남긴 모든 말씀은 다 끌고 십자가에 가지고 가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은 그걸 지킬 위인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하는 말에서 너희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죄를 부채로 여길 때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부채, 행동을 잘못했을 때 부채 아니고 근원적인 부채가 있어요. 

그걸 제가 아까 수족관이라는 예를 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수족관에서 스스로 수족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고기가 아니에요. 어느 누구도 그런 고기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수족관 물 다 따라내야지요. 근원적인 죄를 우리가 어떻게 이것도 죄냐, 할 정도로 아직까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죄가 너무나 많으면서 바다 출렁이듯이 우리에게 차고 오는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십자가 피로 성도한테는 그 안에서 죄 값을 치른 그 자들이 뭐냐 하면 주기도문의 우리에 해당돼요. 우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그 우리. 새롭게 우리로 등장되는 거기에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내용은 바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해석해야 돼요. 복음으로 다시 해석이 되어야 됩니다. 죄의 생산과 소비. 이것은 바로 흔히 선악과 따먹은 우리 경제적 관점을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짐으로서 해결하고 난 뒤에 성도한테는 본격적으로 죄의 생산에 들어갑니다. 

니 대신 내가 치러야 될 죄에 대해서 성도는 평생을 통해서 새롭게 그 죄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주님에 대한 감사가 더욱 더 높아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