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강-YouTube강의(선지자와 사도)170321-이 근호 목사
182강, 제목은 ‘선지자와 사도’입니다. 선지자와 사도가 서로 관련성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더러 하십니다. 선지자와 사도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고요, 차라리 선지자와 성도와 관련성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보다 신약에 천국에 있는 소자가 선지자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선지자와 신약의 성도 자체와 우선 관련성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 자체가 오늘날 이 시대의 선지자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선지자입니다. 베드로전서2장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러면 사도는 뭐냐, 사도는 성경을 남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선택한 사람입니다. 사도가. 사도하고 성도하고의 차이점은 사도는 계시의 확정을 위해서 쓰여진 분들이고, 그리고 성도는 사도한 그 성경을 통해서 그 말씀 토대위에, 하나님의 말씀에 작용하는 결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이미 되어버린 그런 해당되는 사람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2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리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어요. 그리고 난 뒤에 그 모퉁이 대신 예수님 위에 등장해야 할 사람들이 선지자들이고 신약의 사도들이고. 그 터 위에 그 다음 차 순에 해당되는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의 벽돌처럼 개입이 돼서 21절에 보니까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듯이 성령 안에서 그들이 한 성전이 되어간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제목에 나온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선지자와 사도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 너는 어떤 의도로 그걸 묻느냐를 생각해봐야겠지요. 너는 왜 뭐가 궁금해서 선지자, 사도라는 것을 질문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선지자의 기능, 사도의 기능, 그리고 성도의 기능이 같을 수가 있느냐, 어떤 점에서 같은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게 아마 궁금했을 겁니다.
오늘날 자신이 성도라면 성도가 해야 될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 일과 구약의 선지자의 일과 신약에 있는 사도들의 일과 이게 같은가, 다른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러면 다르면 어떻고, 같으면 어떻냐, 같게 된다면 이것은 성도 본인이 스스로 성도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토대가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고 선지자와 사도와 성도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러면 성도는 사도나 선지자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 되는지를 그게 궁금한 거죠. 이 전체를 한꺼번에 묶으면, “성도와 사도와 선지자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성격이 있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와 사도가 에베소서2장20절에 보면 전부 다 예수님의 터 위에서 그렇게 그들이 나타났거든요. 터 위에. 예수님의 터 위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 개인적인 인생을 따로 본인이 본인 인생을 꾸려나가는 처지는 아니다. 에요. 왜냐 하면, 예수님 위에 있으니까. 본인이 고립적으로 독단적으로 “나는 이런 인생을 살겠다.”라고 다짐하고 결심할 수 있는 입장들이 못 됩니다. 사도도 그렇고, 선지자도 그렇고,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만의 개성이 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성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됩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필요 없어요. 공통성을 드러내면 되지, 물론 개성이 있겠지만, 나는 이런 개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이런 점에서 같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같은 점이 뭐냐 하면, 선지자와 사도는 전부 다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치열하게.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순탄하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 삶을 살았고,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전부 다 이건 고난 받았고, 사자 입속에 까지 들어갔고, 그리고 어떤 스가랴 선지자는 돌아 맞아 죽었고, 아벨도 마찬가지고.
선지자 자체를 그냥 고난이 일상화된 사람이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면 사도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본인의 행복이라든지 본인의 가치 있는 인생을 자기가 스스로 계획 잡아서 꾸려나갈 수 없어요. 요한복음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기를 니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고생, 고난으로 인도받았지요. 엘리야, 엘리사도 마찬가지고.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습니까? 사도는 본인이 원치 않는 인생의 길을 간다면 그러면 오늘날 성도도, 선지자와 사도와 같이 똑같이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가 뭐냐, 그렇게 살아야만 구원되기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성신이 또는 성령이 그들을 가만두지를 않았습니다. 자꾸 사도, 선지자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성도도 그러하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복을 언급하면서 제일 마지막 복이 뭐냐 하면, 내 의와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도 똑같은 길을 갔다 했습니다. 복이 있다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게 복이 있는 거예요.
자기가 기도한 대로, 자기가 희망한 대로, 자기가 고대한 대로, 기대한 대로, 기도한 대로, 자기가 맹세한 대로 안 살아지는 겁니다. 계획 잡은 대로 안 살아지는 것. 그러니까 아무리 성도가 잘 먹고 잘 살아도 자기가 부자 되고 싶어서 부자 된 게 아니고 그 부자 된다는 그 자체도 치열하게 사는 하나의 환경으로서의 부자가 된 거예요. 부자가 나쁜 게 아니고 그 부자 자체가 자기에게 사도와 선지자의 그 치열함을 자기에게 제공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과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모습이지요.
부자가 핍박받는다 하니까 좀 이상하지요? 부자 안 돼봐서 잘 모르겠지요?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항상 성령께서 그렇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구원 받았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겁니다. 마태복음16장에 끝부분에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받은 그 구원 영생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실패라 하더라도 울 이유가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어떤 난관이 오고 절망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징징대거나 짜증내거나 불평할 수 없는 처지가 성도에요. 어떤 경우라도. 범사에 감사하라 했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왜냐 하면, 환란과 곤고와 핍박 어떤 것이 오더라도 이게 구원이 변동이 안 되니까.
바로 성신 받은 선지자들과 오늘날 성도와 사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끄덕도 없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기에 자신의 자신됨에 대해서 주님의 구원됨에 의해서 이것은 하등의 요지부동, 달라질 게 없다는 그 넉넉함, 안정감, 특히 그 넉넉함. 그래서 이 세상의 각양 실패는 다 오라.
그것이 나에게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니라. 그것마저 주께서 내려주신 적절한 복음이, 영생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를 오히려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한 주께서 설정해 주신 우리의 삶의 환경. 바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렇게 공통적으로 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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