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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서사적 구조 1703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20. 19:07
2017-03-08 00:20:26조회 : 273         
서사적 구조 17030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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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8.127)17-03-19 22:10 
가락-요한복음13장20절(서사적 구조)170307a-이 근호 목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현대사회에서 도덕적인 개혁과 건강, 윤리 또는 교육의 확대, 특히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하는 것은 구빈법이라는 것, 18~19세기부터 서양에서 본격화 되었는데, 교육의 확대, 기본적으로 국민교육이죠.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의 확대를 통해서 도덕적으로 개혁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시민으로서 기본질서에 대해서 순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 

  



특히 구빈법, 빈민을 구하는 이런 것, 이게 현재 국가가 세금을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이걸 해줘야 다음 차기에 선거해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고요. 그리고 요새 TV에서 음식프로그램, 건강문제, 건강을 책임지죠. 이것에 온통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죽음을 이깁니까? 이것은 살아있는 것을 연장시킬 뿐이죠.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영생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구빈법, 교육의 확대, 도덕적 개혁, 건강문제)가위표를 쳐도 상관없다고 할 때 성도죠. 내가 가난한데 국가에서 기본적인 보조금도 안 주더라고 할지라도, 나라가 나를 실망시킬지라도 상관없다고 할 때 성도라 이 말이죠. 근데 실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뭐하시노?” 이렇게 하거든요. 

  

하나님이 살아계실 것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고 또는 교육을 못 받아서 어려울 때는 국민들에게 기본교육을 해줘야 하고 건강하지 못할 때는 국가에서 건강의료제도해서, 세금을 이렇게 부한 사람은 많이 거두고 가난한 사람은 적게 거두어서 국민의료보험체제를 하게 되면 얼마나 우리가 참, 하나님께 감사할 거냐? 이렇게 나오죠. 

  

이제 관심사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 요한 뒤에 복음이죠. 복음이 뭐냐 하면 이게 복음이라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맛이 안 나고요. 위에서 말한 이 딴 것 없어도 괜찮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얼마나 기쁜지, 이게 되지 않는 북한 같은 나라에 가도 괜찮아요. 이게 복음이라 말이죠. 

  

그래서 복음은 목숨보다 더 귀중하다. 근데 이 사실을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어요. 주님께서 한 말씀을 툭 던지면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러니까 내 말이, 니가 현재 관심 갖고 있고 추구하고 있고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내 목숨을 이어가는데 관심 있는 반면에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기다리고 있어요. “죽어도 상관없잖아?”라는 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기다리고 있으면 단선, 선이 하나같으면 우리는 여기에 있고 주님이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데, 주님과 만난다는 이 영생의 자리가 이 노선이 아니고 다른 노선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내 관심사의 노선에서 다른 노선으로 중간에 노선을 바꿔야 되겠죠. 바꿔야 된다 이 말이죠. 

  

바꿔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바꿀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가 사는데 급급해요. 가장 기본적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막상 내 목숨이 위태로우면, ‘그래 기본적인 것은 내 생명 붙잡는 거야.’라고, 그 순간만은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툭 튀어나와요. 뭐, 교회고 하나님이고 간에 살고보자가 툭 튀어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거는, 노선 바꾸는 것은 우리 식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살고보자보다 더 노골적인 것은 나만 살고보자. 단어하나 추가하면 나만 잘 살아보자. 강남에서 잘 사는 것하고, 저 못 사는 나라에서 잘 사는 것하고는 그게 수준이 달라요. 촌에서 잘 살면 그냥 이사 안 가도 되는데, 괜히 강남으로 이사 가서는 갑자기 자기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새로운 잘 살아보자가 또 새롭게 시작된다 이 말이죠. 

  

나만 잘 살아보자가 평소에는 안 그런 것처럼 생각돼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도 챙기고, 예수님도 챙기고, 말씀대로 이웃도 챙기고 어려운 이웃도 돌볼 줄 알고, 내 양심은 괜찮은 양심이다. 이렇게 있는데, 근원적인 것이 딱 왔을 때는 일단은 나부터 살아야 남을 돕든지, 교회 가던지 할 게 아니냐?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이걸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이라고 합니다. 육, 육신이라고 이렇게 하죠. 

  

그래서 육신을 연구하는 학문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육신을 연구하는 학문. 그리고 과학은 영생을 줍니까? 못 줍니까? 못 주죠. 아까 공부한 것을 복습해봅시다. 과학은 영생을 못 줄 뿐 아니라, 복음을 안다면 “과학 그까짓 것!” 이렇게 된다 말이죠.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벌써 잊어버렸습니까? 나는 복음을 원해요가 아니고 복음을 안다면 “이까짓 것!”라고 포기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또 할까요? 구빈법, 교육의 확대, 도덕적 개혁, 선진 조국, 건강의료보험, 한국일보나 조선일보에 이런 것이 나오게 되면 우리의 관심사가 여기에 있죠. 여기에. 그래서 우리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데 여기에 지혜를 모아보자는 식으로 데모도 하고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노선이 이 노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선이 이 노선이 아니고 지금 다른 노선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면 될 게 아니냐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아까 이걸 육으로 본다고 했죠. 육을 공부하는 것은 과학이고요. 과학을 주님은 오류로 봅니다. 오류라고 봐요. 그럼 오류면 바로 잡아서 바른 과학을 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하는데, 주님의 뜻은 오류를 통해서 영생을 이 지상에 흔적으로 남깁니다. 오류를 통해서 영생은 남기는 방식이에요. 

  

그럼 오류를 안 통하고 제대로 진리를 전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진리 전하는 방법 자체가 없어요. 아까 언급했던 것을 다시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있잖아요. 근데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뭘 주었느냐 하면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고 천사와 같이 된다고 했다 이 말이죠. 우리 성도를. 그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만들 때 천사 만들 듯이 그렇게 만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남성, 여성을 그렇게 주셨느냐? 과학으로서는 설명이 되지를 않아요. 

  

남자와 여자는 염색체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전달되고, 이것은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자식 생산에 있어서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세포 난자와 정자는 어떻게 결합해서 염색체는, 염색체는 단백질과 DNA로 되어 있어요. DNA에서 나오는 그것을 mRNA (메신저-전령알엔에이), DNA에서 이거 이거 만들어라! 한 명령을 전달해주는 알엔에이! tRNA (트랜스-운반 알엔에이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알엔에이), rRNA(리보솜알엔에이)을 통해서 거기서 아미노산과 결합하는 정보를 통해서 아미노산이 오게 되면 거기에 붙어있는 단백질이 형성이 돼서,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핵산, 이 네 가지가 모든 인간을 포함한 구성요소입니다. 단백질(프로틴), 지질, 탄수화물, 핵산.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고 연결되느냐, 그것을 따지는데, 그걸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육이라는 겁니다. 근데 과학에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육에서 뭘 내느냐 하면, 육에서 그냥 과학을 하는 목적이 뭐냐 하면, 여기서 행복을 얻고자하거든요. 이것을 과학의 유용성, 또는 공리주의 인식인데, 과학을 하는 이유가, 과학, 철학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왜 과학을 하느냐 하면 편리하기 위해서, 유용하기 위해서, 그럼 유용이 뭔데? 유용한 게 뭐냐 하면 행복한 거예요. 행복을 벤담의 공리주의에서는 유용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존 듀이, 라는 사람인데, 모든 학문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데 봉사하는 경우에만 이것이 계속해서 발전될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달에 왜 갑니까? 달에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달에 가서 지구에 문제가 있을 때 달에 이주해서, 그것도 돈이 되는 부자들만 가지만, 달에 이주할 수 있는 그 기술이 개발되면 그 다음에는 달뿐만 아니고 화성이나 목성이나 토성까지 이주할 수 있는 테크닉을 축적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축적하죠? 오늘날 왜 그 기술을 축적하죠? 번개가 쳤다, 신의 진노라고 동양과 서양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뭘 발견했습니까?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이 함께 피뢰침을 발견해서 이것은 음전기, 양전기, 구름 속에 있는 전기류의 충돌이라고 이래 보잖아요. 왜 그걸 이야기해요?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우박 치는 것, 뇌성 치는 것은 신의 진노다. 이게 왜 안 됩니까? 어느 쪽이 행복합니까? 아는 만큼 행복해진다는 그 생각이 주님보시기에 오류다. 이 말입니다. 오류. 그게 잘못이다. 이 말입니다. 잘못. 알겠다고 계속 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이게 모든 것이 오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과학, 기술이 오늘날 우리에게 뭘 주느냐? 돈을 가져다주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거예요. 기술이 발달되지 않으면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습니다. 기술발전이 바로 사업의 성공여부를 결정하거든요. 그럼 오류가 아닌 것이 뭐냐, 오류 아닌 것이 없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인 이상 “나 행복 안 할래.”라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뭘 모르느냐 하면 “니가 왜 행복해야 돼?”라는 이유는 없어요. “제가 왜 불행하면 안 되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내가 왜 지옥가면 안 됩니까? 내가 왜 지옥가면 안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정당한 이유를 대보세요. 지금껏 제가 공부한 어느 책에서도 거기에 대해서 정답을 말한 책은 어느 한 줄도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책 보세요. “이렇게 하시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 것은 나와요. 

  

내가 왜 영생을 얻지 않고 지옥 불에 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한 책을 본적이 없고, 그걸 언급한 목사나 신학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신학도 오류라니까요. 진리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진리는 이야기 안 하고 진리와 나의 이익과 연관시켜서 자꾸 말을 내뱉는 거예요. 우리 좋은 게 좋죠? 좋은 게 좋으니까 이 성경에서 좋은 것 찾읍시다. 이런 쪽으로 나오더라는 말이죠. 출발 자체가 진리가 아니고, 나만 살고보자의 연장선이에요. 나만 살고보자의 연장선이라는 말이죠. 

  

그럼 이것이 오류인지 아닌지 당신은 어떻게 압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처음부터, 이미 시작부터가 너무나 우리 일방적이에요. 육을 싸고돌아요. 육을 보호하려고 한다 말이죠. 주님께서 육이라고 한다면 이거는 나쁜 의미라는 말이죠. 육으로서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해요? 육에서 영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육에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육을 싸고도니까 주님께서는 두 개의 다른 노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육이다.” 육으로 난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게 예수를 믿든 뭐를 믿는 끝까지 육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이 노선에서 못 벗어나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그 다음에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 난다는 말은 영에서 육이 나올 수가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육은 뭐로 되어있다고 했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천사로 만들면 될 텐데 뭐로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를 왜 만들었어요? 이거는 과학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여자 있습니까? 왜, 남자 있습니까? 왜, 그렇게 했는데요? 세상에! 그걸 왜 질문해요? 

  

남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저 여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렇게 나오지, 남자로 여자로 하는 이유가 뭐냐, 천사가 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천사로 만들지, 왜 남자, 여자가 있느냐, 주께서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오류, 남자, 여자를 거쳐서 우리를 천사로 만드는 겁니다. 남자, 여자 없이, 육 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천사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 여자를 거쳐서 천사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 여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남성과 여성의 이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에서 영으로 바꾸는 그 메커니즘, 그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남성과 여성 속에,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역할이 되는 거예요. 남자로서 역할, 여자로서의 역할이 둘이 만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는 그 원칙을 우리는 여기에 장착하는 겁니다. 남성, 여성의 관계 속에서 그 흔적이 같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 흔적이. 

  

남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여잔데 어떻게 합니까? 라는 말 자체가 이 성경 자체에서는 성립이 안 돼요.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저는 남잔데 여자가 되어서 구원받을래요.”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없다? 없거든요. 그러면 우리부터 어떻게 해야 해요? “주님! 왜 저를 남자로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부터 해야 해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왜 꼭 제가 남자이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뭐냐, 육은 육 자체가 오류지만, 영되신 주님께서 그 육의 오류를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걸 사용하셔서 이 육속에서 영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오류니까 저는 탈락이죠.”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오류 안 한 사람이 없고 잘난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죄가 있어야 거기서 의가 나오지, 죄가 없는데서 의가, 의가 되는 법은 없어요. 

  

의는 죄 안에서 핍박을 받는 방식으로, 거기서 의가 나오는 겁니다. 핍박 없는 의는 없어요. 아브라함이 여기서 오해한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할 때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고 했어요. 아브라함을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자기 보고 심판을 한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보고 심판하는 거예요. 이거는 마치 신약의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앞당겨서 이렇게 소돔 고모라에 가져다가 두는 겁니다. 두는데, 그 심판하는 방식이 특이해요. 

  

뭐냐 하면 한 사람만 있어도 죄인을 그냥 다 용서하는 거예요. 이 대목을 좀 설명을 해야 돼요. 진짜 어려운 대목인데, 제가 지금 감기 걸려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목소리가 안 좋은데 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질게요. 두 가지의 질문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좀 보세요. 1. 이거는 아브라함이 이야기 한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때 의인 열 명이 있다면, 의인 열 명이 죄인들과 함께 벌 받는 것, 이게 옳습니까?” 라고,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들었죠. 

  

어떻게 의인 같으면 심판 안 받아야 의인인데, 의인이라고 하면서 나머지기 사람들이 벌 받는데 의인을 거기에다가 끼어들게 하면 이거는 하나님의 정당성, 하나님의 공의성, 하나님다움에 위배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그래, 열 명 빼놓고 나머지기만 심판할게. 됐냐? 이게 니 마음에 드는 공의성이냐?”라고 이래 나오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두 번째가 2. 하나님이이에요. 뭐냐 하면 “한 사람이라도 의인이면 나머지기 죄인을 용서해줄게. 나머지기를 용서해줄게.” 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어느 것이 비합리적이고, 안 그러면 둘 다 비합리적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우리 인간이 보기에 의인 열 명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놀랍게도 의인 한명이 있다고 마땅히 지옥가야 될 구천구백만 모든 죄인을 의인 한명보고 깔끔하게 용서해줘서 의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합리성이 인간에게서 뽑혀 나올 수 있을까요? 있습니까? 이게 육에서 나올 이야기입니까? 

  

인간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요청하는데. 예수님이 나는 정당한데 쟤는 왜 나같이 천국에 갑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그렇게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한을 사용 안 했어요. 오히려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어요. 이게 하늘의 생각과 땅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오류가 된 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나 살기에 급급합니까? “나 예수 믿었다. 구원받았다.” 너무 이기적이고 정말 못 돼먹었어요. 만날 예수를 자기 구원용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것은 생각도 못하고, “헤헤! 나는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아야지, 이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신 것,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한 사람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죠. 예수님만 있어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이 원칙을, 영이거든요. 이 원칙을 어디다가 주느냐 하면 아브라함이라는 육, 아브라함 속에다가 이 원칙을 담아버립니다. 담아버리니까 나중에 아브라함이 그걸 알죠. 아! 여기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마땅히 심판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나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갖고 있는 이 두 번째 내용, 한 사람 때문에 산다는 그 내용을 위해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조카 롯을 소돔고모라에서 빼내줍니다. 빼내주고 나머지기 다 죽이잖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 중심으로써 새롭게 펼쳐지는 심판이 있게 돼요. 

  

이 심판은 인간이 나쁜 짓해서 받는 심판이 아니고, 언약을 몰랐다는 것 때문에 심판받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언약 때문에 필히 일어나야 될 그 심판의 상대자들이 있어요. 지옥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천국만 있어서는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옥 갈 사람도 있어야 돼요. 그리고 그 지옥 갈 사람들이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아주 친절한 안내자, 마귀를 붙여줘요. 

  

그래서 절대로 이 지옥 갈 사람이 천국으로 오지 못하도록, 오게 되면 천국의 행정상에 오류가 생겨요. 오지 말아야 될 사람이 거기에 가면 안 돼요. 그래서 마귀를 붙여준 거예요. 30년 예수 믿어도 결국은 가게 만듭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1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방금 읽으신 것을 잘 들으셨죠.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되어 있죠. 이게 육의 노선이 아니고 영의 노선, 예수님 노선입니다. 예수님 노선 같으면, 방금 아브라함 언약을 이야기한 것을 그걸 적용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취해야 될 새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한 겁니다. 가룟 유다를 선택했고, 선택한 그것은, 예수님의 작업은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사전협의가 된 상황이에요. 그걸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했듯이, 도덕적 개혁, 교육확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구빈법, 건강의료보험제도, 마음껏 하게 하는 거예요. 마음껏. 마음껏 거기에 관심 두고 정치고 경제고 다 관심 두게 되면, 자연적으로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을 소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참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교육도 잘 되고 건강보험 시스템도 잘 돌아가고, 어려운 사람까지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삽니다.”라고 육에 대한 자기사수, 자기보호, 지키려는 자기본능을 어떻게 합니까? 유감없이 드러내죠.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성경을 응하게 함인”거예요.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별나게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그냥 자연스럽게 주께서 성경이 응하도록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선택할 상황들이 와요.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몇 개 주고 알아서 선택하라고 하는 거예요. 천 만 개 중의 하나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요정도로 선택하게 만들어요. “그래 선택했어!” 이휘재가 만날 하는 것 있잖아요. “그래 결심했어!”라고 하는 것처럼. 이 내용 모르죠? 젊은 사람들은 모르죠. 그거 알면 진짜 오십대다. 

  

몇 가지의 경우를 우리는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몇 가지의 경우. 어디를 보낼까? 저 점수 가지고 법대를 보낼까? 몇 가지지, 저 점수 가지고 북한으로 보낼까? 이러지는 않잖아요. 자기의 역량대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고정도로 이렇게 선택하는 겁니다. 근데 그것조차도 다 성경의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근데 이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이걸 자꾸 지키려고 해요. 이 지식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자 지금부터 제가 하는 것은 좀 난해합니다. 난해하니까, 지금까지는 전혀 난해한 것이 없어요. 다 쉬운 거예요. 난해하다고 하고서 해보면 아무것도 난해한 것이 없는데 미리 난해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서사적이라는 말이 있어요. 서사 narrative, 이야기적이다. 주님의 성경은 이야기로 짜여 있습니다. 이야기의 특징은 뭐냐 마지막 이야기 끝에 가면 결론은 딱 하나로 귀착돼요. 하나로 딱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케냐에 있는 어떤 학교에서 방학을 했다는 것 하고 에스키모 인이 이번에 백곰 한 마리를 잡았다는 것 하고 전혀 상관없죠? 상관없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스토리로, 이게 전부 다 재료가 되어 모아져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다시 합시다. 서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결국에 하나로 귀결된다는 말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누구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 하고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생이 죽을 때까지는 내 인생이 되죠. 나는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를 나왔고, 그렇게 되죠. 근데 죽었다. 끝나면 안 됩니다.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면 나를 위한 서사, 이야기가 되지, 최종적인 것은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도 있고, 또 목사님도 계시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서사가 두 개 되잖아요. 두 개 되면 최종적인 것이 아니죠. 이건호씨도 있고. 그럼 세 개 되잖아요. 반드시 최종적인 것은 몇 개? 하나죠. 하나. 

  

“성경은 창세기도 있고 출애굽기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이게 서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신학교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창세기에 두 개의 서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로힘 학파가 있고, 또 하나는 야훼 학파가 있는데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이 다릅니다.” 이거는 신학교마다 다 가르쳐요. 그게 가짜인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거는 서사적이라고 하지 않고 가산적이라고 합니다. 가산적. 셈하는 것. 셈하고 보태는 것. 이게 정보이론이에요. 

  

정보이론은 계속 정보를 끌어 모으는 거예요. 끌어 모으면 뭔가 알겠지. 지금 이 사실을 가지고 제 4차 혁명시대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정보시대에요. 정보. 정보의 특징은 서사적이지 않습니다. 서사적이지 않고 즉흥적이거든요. 즉흥적이기 때문에 의미라는 것이 없어요. 의미.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요. 즐기기만 하면. 가지면 되고, 즐기면 되고, 그때그때 때우면 되는 거예요. 

  

사사적인 것과 가산적인 것의 또 하나의 예를 들게요. 딸이 한 서른이 됐다. 집에서 서서히 닦달을 하죠. 명절 때 되게 되면 “니가 나이 서른인데 나이 더 많아지면 애도 놓기 힘든데 시집가거라.” 그러면 “엄마. 내가 대학졸업하고 여태까지 회사 다니면서 죽도록 야근하고 했는데, 이번 서른 살부터는 서유럽으로 배낭여행이나 가렵니다.” 그래서 서유럽에 그렇게 많이 오는 거예요. “아니다. 시집가야 한다. 선봐라.” “안 봅니다.” “왜 안 보려고 하느냐?” “결혼 안 할 거예요.” “왜 안 해?” “결혼생활 하는 것 보면 남편 때문에 애 먹는데, 내가 왜 애를 먹어야 하는데요? 안 할 거예요.” “근데 다 그런 것이 아니다. 100개중에 1개는 그렇고 나머지 99개는 괜찮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99개가 좋으면 뭐 합니까? 1개에 척하니 걸려버리면 99개 좋은 것이 다 날아가는데요? 내가 그걸 알면서도 그걸 왜 합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정보에요. 아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의미를 미리 알고 하겠다는 거예요. 미리 알고. 근데 옛날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20대 초반 되게 되면, “야야! 저쪽에 이야기 다 돼있다. 가서 형식이니까 다방에 앉아가지고 쌍화차 시키고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니가 마음에 크게 나쁘지 않거든 날 잡자.” 그러면 “예. 어머니.” 그냥 어른이 시키는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럼 이게 뭐냐 그 집안의 서사에요. 그 집안의 역사고 전통이라니까요. 여자가 20대 되면 군말하지 않고 그냥 가는 거예요. 부모가 이렇게 밀어주는 대로 그냥 가는 겁니다. 그걸 보고 젊은 사람들은 그때는 정보가 누적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요새 60대들한테 시집 우에 갔습니까? 물어보면 멋도 모르고 갔다고 하죠. 멋도 모르고. 그 말이 맞아요. 정보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요. SNS도 없어요.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인터넷이 어디에 있어요? 휴대폰도 없는데? 누구 말 들어야 돼요. 이미 굵은 서사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그 집안에 태어났어요. 이제는 그 집안의 어른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조건 시집을 가야 돼요. 물론 아주 이상한 사람 같으면 안 되지만, 약간 튕기겠지만, 그래도 부모가 20대 중반 돼서 밀어주게 되면 얼추 맞으면 그냥 가야 되는 거예요. 왜? 내 뜻 30퍼센트, 부모 뜻 70퍼센트니까. 

  

지금은 너무 정보가 범람했어요. 너무 많아졌어요. 이것저것 따지다가 서른다섯이에요. 아예 결혼 포기했다가 결혼하려고 하면 40대 후반. 나오는 것 재취자리나 이런 것. 그럼 남자는? 남자는 정보를 많이 알아서 혼자 살기는 편하다. 나이 한 40쯤 되어 심심해서 결혼할라치면 열다섯 살 연하. 그것도 돈 되는 사람만. 어떤 사람은 스물 몇 살도 있다마는. 

  

이게 정보 가산적입니다. 서사적인 것하고 가산적인 것 하고 어느 것이 노골적이에요? 어느 것이 나 중심으로 노골적입니까? 가산적이죠. 이 정보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정보시대가. 그리고 정보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지금 20대하고 지금 10대하고 세대차이가 나요. 그들의 정보가 더하기 때문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학교 2학년이 담배 피우고?” 그럼 중학교 2학년생이 뭐라고 합니까? “참, 세대차이 난다.” 요즘은 초등학생이 피우거든요. 

  

정보가 점점 누적이 되니까, 정보로 이야기하잖아요. 얼마나 많은 정보의 지식을 가졌느냐로 대화를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약어와 새로운 용어와 단어, 언어를 막 만들어내고.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따지죠. 부모가 “니 그러면 안 돼.” “왜 그러면 안 되는데요?” “옛날부터 그랬어.” 이 부모는 서사를 이야기해요. “우리의 전통은 그랬고 한국 사람은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근거를 대라고 하죠. “왜 한국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근거를 대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죠. 

  

어떤 아는 사람이 이슬람교, 파키스탄 사람하고 결혼을 했어요. 난리 났죠. 그것도 잘 사는 나라 미국사람하고 결혼을 하면 좀 좋아. 파키스탄이 뭐예요? 둘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용납이 안 됩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왜 용납이 안 됩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서사구조에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서사구조에. 정보가 아니고 서사구조에.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 나름대로의 서사가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 스토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와서 이 성경을 보면서 뭐 할라고 합니까? “뭘 하면 구원을 받지?” 자꾸 정보로, 지식으로 흡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지식으로 흡수해가지고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 믿으면 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가려는 사람을 붙들고 “예수 믿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봉사해야 돼요. 헌금도 좀 내고.” 그러면서 자꾸 잡는 거예요. 정보로 에헴! 하고 입 싹 닦으면서 구원 챙겨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정보로 또 잡는 거예요. “당신같이 그렇게 얌체처럼 믿다가는 나중에 다리 부러져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라고 이렇게 또 정보로 하는 거예요. 교회가 사업이니까 붙잡고 돈을 빼먹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성경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어떻게 육에 속한 가산적 사고방식이, 어떻게 주님만이 아는 서사적 사고방식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수용하는 방식을 언급했어요. 어떻게 가산에서 서사로 넘어갈 수 있습니까? 가산, 이거는 나 중심인데, 어떻게 홀로 예수님 중심인 서사로 갈 수가 있습니까? 그 방법은 뭐냐 하면, 아까 언급을 했었어요. 그게 뭐냐, 죄를 이용하는 겁니다. 죄를 짓게 만들어요. 뭐냐 하면 이 가산적인 것과, 가산적이라는 말은 나 구원이죠.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나 구원을 확대시킵니다. 이걸 점점 더 키우는 거예요. 

  

이걸 키우는데 동원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열두제자들입니다. 열두제자. 열두제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해서 전부 다 배신했어요. 심지어 그 중의 하나는, 가룟 유다잖아요. “배신해! 배신하라는 말이야!” 가룟 유다가 제자들의 대표입니까? 베드로가 대표입니까? 제가 이 질문을 하는 것은 누가 배반했을 때 와장창 제사구조가 다 무너졌습니까? 가룟 유다가 배반할 때 무너졌습니까? 베드로가 배반할 때 무너졌습니까?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의 그 중요성, 열두제자를 구축하는 그 힘의 중요성에서 어느 힘이 더 강하다? 가룟 유다가 가장 근본적인 거예요. 가룟 유다가. 

  

가장 근본적인 가룟 유다를 누가 택했다? 주님께서 택해가지고 가룟 유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들었어요. 요한복음 13장 2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조각을 받을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떡 조각을 줬죠. 떡 조각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13장 18절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발꿈치를 들었다 하는 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이 여자의 후손, 예수님의 발꿈치를 무는 그것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죠. 

  

그러면 떡을 줄 때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예수님이 알고 있잖아요. 알고 있죠. 그러면 가룟 유다나 사탄도 어디에 봉사한 겁니까? 하나의 서사구조, 예수님 중심의 서사구조에 충실하죠. 아주 착하기 그지없어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해요. 근데 중요한 것은 그걸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어떻게 자기 의를 만들고 영생을 만드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죄를 한껏 이용하는 거예요. “물어! 물어!” 강아지 키워놓고 나를 물라는 거예요. “물어! 물어!” 

  

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게 되면, 그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머리를, 정수리를 쳐야 되잖아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서사구조의 초기입니다. 예수님의 서사구조의 초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응을 나타내야 해요. 

  

뭐냐 하면 속으로 “목사님. 우리가 할 게 없네요.” 이런 반응이 나타나면 참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하겠지만. 우리가 할 게 없어요. 우리가 할 게 없다고 하는 이것이 안 되면 우리는 마귀에 시험 듭니다. 우리는 적어도 열두제자보다 나아져야 해요. 이미 십자가 이후에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서사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과거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발달했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게 없어요. 할 게 없는데, 아까 제가 이 사회구조가 어떻게 돌아간다고 했죠? 도덕개혁, 교육의 확대, 내 몸이 있는 이 나라에, 육신이 살기 좋은 나라에 너무 관심을 두고, 거기다가 너무 신경을 쓰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기도응답과 주님의 도와주심과 연연하다보니까, 내 쪽에서 나쁜 짓 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이 차단되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해주게 되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그 생각. 그 생각을 너무하다보니까 점점 더 이 진리와 멀어지는 거예요. 

  

멀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주님이 주신 그 용서를 내가 앞장서서 가리게 되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게 기억이 나는데요. 점쟁이들이 점점 더 용하다고 하잖아요. 용한 이유가 있어요. 점 보러 온 고객들이 알아서 점쟁이한테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해버려요. “부적을 붙여놨더니만 신기하게 그렇게 됐습니다.” 점쟁이는 아무소리 안 했는데 알아서 이야기해요.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기도하라는 것도 그래요. “기도해보세요.” 많이 했는데 다 응답받았다고 알아서 고백을, 간증을 해대요. 

  

왜, 그런 고백을 하느냐 하면 그래야 자기가 목사님 앞에서 믿음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자랑질을 왜 하고 싶습니까? 바로 이런 사실, 이 서사구조를 모르고, 나름대로의 자기 신앙의 서사구조를 따로 소설을 쓰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됐다. 자기의 서사구조를 따로 만들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서사구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라고 규정해야 되겠죠. 그래서 복음으로 성경을 설명한다는 말은 니가 신앙 좋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그야말로 낱낱이 다 쳐버리는 겁니다. 겨울철 되면 “해삼~!”하고 골목에 오죠. 여러분 해삼을 한 번 사먹어 본 적이 있어요? 겨울철에 골목에 팔러 오는? 해삼 할 때 그냥 아무렇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짧은 칼을 가지고 물컹물컹한 해삼을 치잖아요. 초장 이래 있고. 해삼 안 드셔봤어요? 해삼을 친단 말이죠. 

  

이렇게 칠 때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가 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쳐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착해서 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는 우리 식대로 가요.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10년, 20년 성경공부해도 이거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공부한다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주께서 직접 쳐줘야 되는 거예요. 그럼 친 것인지 안 친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치게 되면 생각 안 한 말씀이 생각난다니까요. 

  

그럼 말씀만 생각납니까? 아니죠. 말씀 뒤에 뭐가 있죠? 하나밖에 없는 서사구조가 생각이 나죠. ‘아!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수동적으로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구나.’라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을 내야 한다면 뭡니까? 가룟 유다는 그냥 가룟 유다 자기 할 일을 해야 돼요. 그래서 가룟 유다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지옥 갔죠. 

  

그게 오늘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거잖아요. 내가 지옥 안 갈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왜 천국 가야 됩니까? “목사님. 천국 가고 싶습니다.” “집사님은 왜 지옥 가서는 안 되는데요? 그 이유를 저한테 납득이 되도록 설명해보세요.” 할 말이 있나! 이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할 말이. 그렇게 박사 받고, 신학박사라고 똑똑해도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죠.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고요. “구원받고 싶어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래 나오지. 

  

쉽게 말해서 “당신이 뭔데 구원받아야 돼요?” 구원받고 싶어서 나온 사람 중에 한 명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어요. 어떻게? 먼저 주님께서 찾아오셔가지고 내가 구원받고 싶은 그 충동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거예요. 가득 차있다는 것을.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이 가득 차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을 통해서 이 번지르르한 껍데기 말고, 말씀을 통해서 해삼을 쪼개면 이 안에 시커먼 것이 들어있어요. 시커먼 게.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죠. 말씀이 나쁜 것은 아닌데, 우리가 여기 있고 말씀이 들어왔다 나가면 이게 전부 다 죄가 된다고. 선하고 의로운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가면 전부 다 죄가 돼요.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것 말고, 직접 주님이 말씀가지고 들어왔다 나가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말씀이 들어왔다 나가면 우리는 벌거벗은 사람으로 드러나면서 나오는 것은 감사가 나와요.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감사가 나오는 것은 이미 서사구조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감사가 안 되고 나 오늘 하나 알았다가 돼버리면 정보가 하나 추가되었기 때문에 가산적 사고방식이 되는 거예요. “오늘도 하나 알았다.” 그럼 내일치 모르면 지옥 갑니까? 그럼 내일 모레치 모르고 내일 죽어버리면 탈락하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이 성경공부 할 때 그렇게 하잖아요. “이거 알아야 돼요. 몇 단계입니까? 12단계인데, 지금 5단계 왔습니다.” 그럼 내일 죽으면? 6단계, 7단계 모르면 지옥가야 되는 거예요. 그럼 12단계 끝날 때까지 살아있어야 돼요. 근데 12단계가 됐다고 칩시다. 12단계가 되면 목사는 이제 걱정이 되는 거예요. 왜? 12단계 돼서 스승님 이제 하산하겠습니다. 해가지고 하산해서 중국집에서 한바탕 붙어가지고 아버지 원수 갚을 수가 있거든요. 하산하면 안 돼요. 하산하면 교인들 뺏기고 교인들 뺏기면 돈이 안 들어온다고요. 헌금이 안 나오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제 두 번째 라운드, 12단계. 복음학교 아닙니까? 그거 복음학교 아니에요? 성경을 알면 뭐합니까? 기도 열심히 하고 실적을 나타내야지. 파키스탄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파키스탄 몇 명 더 해야지. 목사가 그거만 던지면 거기 있는 사람이 알아서 파키스탄에 전화해서 “이런 실적을 얻었습니다.” 점쟁이하고 똑같아요. 이거 부적붙이면 잘된다고 하니까 자기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억지응답을 만들어내요. 

  

이게 목사가 교인다루는 심리입니다.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안 되는데요?” “그거는 어린애 같은 믿음이 아니라서 그래요. 순수한 믿음이 아니고. 그냥 믿으면 되는데, 이거 따지고 저거 따지니까 그런 응답이 안 나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있는 신자들은 그거 하나 알아요. 기도하면 응답된다. 응답될 때 그냥 응답되면 안 되고 어린애처럼 해야 응답된다. 서사적이에요? 가산적이에요? 오늘 제목을 아예 서사적이라고 해야겠어요. 가산적이에요. 또 배워야 해요. 오늘 죽으면 안 돼요. 내일치가 또 있어야 돼요. 

  

계속 정보가 누적될 때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양적개념이에요. 질적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적개념이 되는 겁니다. 아까 우리 김중우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팔자다.” 이게 서사에요. 서사. 팔자에요. 팔자. 나, 이래 살아야 돼. 이렇게 살아야 돼요. 다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사는 것을 정당화하면 안 되고 말씀이 와서 해삼처럼 쪼개게 되면 죄인으로 알게 한 것을 감사해야 돼요.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8.127)17-03-19 22:11 
가락-요한복음13장20절(서사적 구조)170307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뭐로 봤느냐, 현실화시킵니다. 자기 서사구조를 위해서. 말씀이 굉장히 추상적이에요. 말이니까 그냥 언어니까. 추상적인데, 이사야에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말씀으로 되어 있다 했거든요. 시편에도 그런 말씀이 나와요. 이사야도 나오고 시편에도 나오는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은 없어지겠으나 주는 영존하겠고,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이 말씀도 영원해지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이 물질, 탄소, 수소, 산소, 철, 몸의 70퍼센트가 물이니까 물로, 물속에 세포가 있어서 세포는 항상 물과 결합하는 수성결합으로 항상 세포가 유지되게 되어 있어요. 이거하고 말씀하고 무슨 관련성이 있어요? 관련성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관련성을 이번 겨울수련회 골로새서에서 사실은 했었어요. 관련성을 했는데, 그 관련성을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 관련성을 이야기하면 복잡할 텐데, 근데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든 유有 밑에다가 무無를 두는 거예요. 무를 바탕으로 유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유라고 하는 것은 뭐다? 이거는 실제 하는, 실제로 있는 우리의 몸, 머리카락, 그리고 탄소, 수소, 해와 별, 이것이 유, 있음 또는 나타남. 무는 나타남 때문에 안 보이게 된 것. 어려워요. 무가 있으면 있음이 되니까, 있음 식으로 있지 않는 그 무. 현재 있지 않는 식으로 있는 그 무. 

  

이걸 가지고 히브리서에서는 유를 나타난 것이라고 하고, 무는 이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데, 히브리서 11장을 잠깐 한 번 볼까요?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이것은 이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유에서 유가 된 게 아니에요. 이거는 과학이에요. 

  

과학은 계속 분석하고 환원하는 겁니다.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쿼크로, 계속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믿자. 이게 과학입니다. 그래서 과학은 이유가 없어요. 아까 남자, 여자 된 이유를 모른다고 했죠. 남자, 여자를 어디에 활용할 것이냐?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 어디에 이용합니까? 우리 행복을 위해서. 우리 목숨 유지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전체를 뭐라고 했습니까? 어떤 성질이다? 그게 바로 육이고 이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육이 죄가 아니죠. 당연한 것이죠.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졸지에 육이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타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일종의 무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에 속해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나타났으면 투명인간으로 나타나야지, 당신 말대로 한다면 투명인간으로 나타나야 되지 않느냐? 라고 언급할 거예요. 왜? 나타난 것에 포함이 안 됐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같이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서도 나타난 것이 나타난 것을 이해 못하게 만들어 버려요. 옆에 있어도, 심지어 같이 식사를 해도, 손을 잡아도,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분명히 언급을 해서 힌트를 그렇게 줬건만, 그게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같은 아람어 쓰는데 못 알아들을 것이 뭐가 있느냐 말이죠. “예수님 알아듣게 하세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알아듣게 해요. 그런데 알아듣게 하는 것이 더 어려워요. 

  

“어떤 농부가 밭에다가 씨를 뿌리거든”하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제자들이 들어보니까 너무나 평이한 일상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저 농사짓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그 의미를 모르겠다. 그 의미가 왜 그러느냐, 아까 한 서사구조를 다시 한 번 봅시다. 서사구조에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서사구조, 이야기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결국, 또는 끝에, 종말에 뭐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서사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우리도 내 인생이야기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인생 있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전부 다 끝이 되기 전에 중간에 다 중단이 돼요. 이게 문제에요. 중단돼요. “그렇게 해서 공주하고 왕자하고 뽀뽀를 해했대.” “근데 어떻게 됐는데?” “그래가지고 나중에 행복하게 살았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죽었대.” 끝나버려요. 개인적인 이 서사구조는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겠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어떻게 됩니까? 부활되고 마는 거예요. 부활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왜? 예수님의 말씀이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 죽어야 될 자가 죽은 것으로 드러난 것뿐이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이 죽는 게. 내가 죽는 것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죽어야 될 인간이 죽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왜 죽느냐 하는 거예요. 왜? 

  

왜 사람은 늙어죽느냐? 이 말입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요한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안 하고, 왜냐하면 유대인과 제자들과 상대하기 때문에. 로마서 6장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아! 사람이 이렇게 목숨 끊어지는 것은 죄를 지어서 그렇구나.”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고, 반대쪽으로 이야기해요. 의가 있는 것은 생명이라고 했어요. 의가 있는 자는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 지어서 목숨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의로워도 목숨 끊어지는 이유가 목숨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는 아담에 속했으면 의당 늙으면 죽게 마련인데, 그거 더 연장하려고 내가 온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나 봐라. 나는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 심지어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이 뭡니까? 나사로죠, 나사로 보세요. 죽었지만 나흘 만에 살아났어요. 근데 그 시체가 어떻게 됐어요? 썩었거든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가산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정보에 의해서 물질로 되어 있단 말이죠. 사람은 죽으면 세포가 단백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백질은 박테리아 때문에 썩습니다. 썩으면 냄새가 나죠. 냄새라는 화학적 에너지가 발생돼가지고 우리 코까지 전달되어 이게 퍼진다 이 말이죠. 

  

그렇게 과학적으로 따질 줄 알면, 그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러가지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살아나오는 것을 과학적으로 한 번 설명을 해보죠. 그럼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안 되면, 오늘 첫 강의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이 과학이 너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가 영생을 얻었으면 이 과학이 맞느냐, 안 맞느냐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드배치를 어떻게 하고, 뭐 롯데가 어떻게 압박을 받고,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한국기업을 중국이 안 받아주면 어떻게 되느냐? 안 받아주면 사업이 안 되죠. 사업이 안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망하죠. 죽죠.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원래 죽도록 되어 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것은 이론상 그렇죠?” 맞아요. 이게 가산적 사고방식에서는 그래요. 근데 제가 말하는 것은 이 가산적 사고방식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고 있지요? 라고 묻는 투로 제가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개그콘서트 어떤 코너에서 하는 것을 보면 회사가 있는데 신입사원을 선배가 놀리는 거예요. “내가 카메라 모델을 만들어오라고 했잖아?” 막 나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입이 “그럼 지금 저를 나무라는 겁니까?” “아니야. 잘 만들었다는 거야.”라고 또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잘 만들었다는 칭찬입니까?” “아니야. 잘 만들었으니까 이 회사 나가라는 이 말이야.”라고 이야기해요. “그럼 나갈까요?” “아니야. 너는 아인슈타인이야.”라고 또 이렇게 한다고요. “그럼 아인슈타인이면 똑똑하다는 말입니까?”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됐는데?” “아인슈타인은 훌륭한 사람이죠.” “죽었어!” 이렇게 하거든요. 항상 그 코너가 마지막에 칭찬해놓고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니도 죽어야 될 인간이다 이 말이거든요.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모든 인간은, 모든 있음 밑에 뭐가 있다? 없음, 무가 있는 거예요. 이제 무를 밝혀내는 거예요. 무를 밝혀내게 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이기 때문에 하나는 천국 속성이 있고, 하나는 지옥 속성이 있어요. 그럼 이것이 무의 세계고 유의 세계를 받친다면 예수님은 이 유의 세계에서 천국 보낼 자와 지옥 보낼 자를 임의로 선택하고 판결내릴 권한이 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하나는 선히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토기장이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토기들이 만드신 분을 만난 적이 없어. 만난들 알아먹겠어요? 만난들? 유의 세계에서는 유만 인정하니까,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화개장터에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이제 웃지도 않으시고... 조영남이 잡혀 들어가서...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 없고. 얼마나 복음적인지. 천국 갈 사람은 따로 있고, 지옥 갈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못된 상식은 뭐냐 하면 죄지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구약의 욥에서 욥이 자기 서사구조를 갖고 있어요. 착하니까 자식 열 명 잘됐고 나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부자 되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서사구조인데, 서사구조는 반드시 예수님의 서사구조에 비해서 중단된다고 했죠. 뚝 떨어지죠. 주님이 고난을 줘버렸어요. 그것도 마귀하고 내기를 하면서 마귀가 개입됩니다. 뚝 떨어졌어요. 뚝 떨어지니까 자기 서사구조가 앞에 있는 원리로, 원리로, 차곡차곡 살아온 거예요. 

  

기도하니까 응답되고, 그 다음에 기도해야지. 또 응답되네. 또 기도해야지.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원리원칙을 계속 고수하고 왔는데 이게 스톱이 된 거예요. 왜 욥이 기도했느냐 하면 자식들이 생일잔치하고 난 뒤에 혹시 술김에 하나님 앞에 죄지을까 싶어서 아버지가 자식들 대신해서 기도를 해줬어요. 얼마나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합니까? 그들이 벌 안 받도록 하겠다는 그 취지는 욥 본인이 평소에 갖고 있던 행동지침이었죠. 나처럼 돼봐라 이렇게~ 나 봐! 부자 되었잖아. 너도 나처럼 되려면 나처럼 따라 해야 부자 된다. 

  

이게 자기 서사구조를 지탱해온 자기 나름대로의 원리원칙인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식 열 명이 다 죽었어요. 기도해서 잘 키워놨더니만 한방에 훅 가버렸네. 얼마나 자식들을 자랑했습니까? 욥기에 보면 그런 뉘앙스가 있어요. 다른 친구들이 욥을 보고는 기가 안 죽고 자식들을 보고 기가 죽었어요. “세상에! 자식들을 가정교육을 우에 잘 시켰나?” 꼭 여러분 같죠? 너무 아부성 있는 발언인데...평생 부모 애 안 먹이고 착실하고...한방에 훅 갔다니까요. 한방에. 차라리 쳐도 나를 죽이지, 왜 자식들을 손댑니까? 비겁한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신앙힌트는 그거였어요. 너를 죽여서 너를 바쳐라가 아니라 니 아들을 죽여서 내게 니 아들을 바치라는 그겁니다. 사랑하는 자식이에요. 이스마엘을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잡아라. 니 사랑을 잡아라 이 말이죠. 사랑을 죽여 없애는 그것이 인간들의 육에서는 모르는 하나님만 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죽이는 거예요. 이 역설. 물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마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는 이것이 말이 돼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이런 일은 있겠죠. 가장이 부도내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아내가 고생할까 싶어서 약 먹여서 죽이고 지는 약 적게 먹어서 살아나고,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것이 인생이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말 저럴 것 같으면 자살할만하다 하는 그런 극단적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이 제시한 그 법에는 영 가벼워요. 아직까지도 가벼워요. 주님이 주시는 그 무거운 율법에 의하면 그거는 법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누구나 주의 법을 못 지킵니다. 왜? 사랑하는 자를 죽여야 하니까. 그거는 예수님만이 독생자 이름으로 모든 율법을 지키게 된 거예요. 십계명을 예수님이 지킬 때는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피로 다 지켜내는 겁니다. 그걸 어쭙잖게 지가 지켜낸다고요? 한 신앙 한다고 지가 십계명 지킨다고요?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어떤 제사였습니까? 상한심령이죠.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어놨잖아요. 주께서. 주께서 간통하게 만들었고 주께서 나를 살인자로 만들어놨잖아요. 이걸 얼마나 감사한다고요. 이게 미친것이지요. 

  

모친에게서 그게 양성되어서, 엄마의 죄가 숙성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어떤 여인을 보고 간음하게 하였고, 심지어 거기서 자기 의를 감추는 용도로써 멀쩡한 남편을, 그 남편이 도박하는 남편이었습니까? 술 먹고 죽었어요? 을지문덕이에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장군이라니까요. 이순신 장군이에요. 나라 지키겠다고 노력한 그 사람을 비겁하게 결투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여자하나 놓고 총으로 싸운 것이 아니고, 갑질해가지고, 참 비겁해도 너무 비겁해요.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비겁하다고 하는 것이잖아요. “남자가 돼가지고 비겁하다.” 이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그걸 다윗이 했다니까요. 다윗이. 

  

그럼 그게 우리한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비겁해도 구원받고, 간통해도 구원받고, 살인해도 구원받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살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상한심령이 돼야 돼요. 상한심령. 살인 안 해도 상한심령, 간음 안 해도 상한심령, 혼자 독신으로 살아도 상한심령, 강하게 살아도 상한심령. 왜? 주께서 그걸 원하시기 때문에. 

  

그게 다윗이 아니고 사자성어로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이 언약이 다르다고 했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언약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대드는 거예요. 다윗은 다윗언약을 몰랐는데, 자기가 그런 짓 하고 난 뒤에, 죄짓게 하셔가지고 다윗언약을 알게 된 거예요. 아! 멀쩡한 나는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아요. 상한심령은 받는다? 받아요. 주께서 착한 일 했다? 아버지가 안 받아요. 주께서 저주받았다? 아버지가 받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참 어려운데요. 어려워요. 유, 있음을 무, 없음이 받쳐주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봤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난 것이에요. 그러면 없음이 나타났다 이 말이죠. 만약에 제가 “여러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라고 하면 뭐가 상상이 되겠습니까? 아,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지평이라고 합니다. 더 쉬운 말로 수평선. 

  

자, 수평선(───)이 이래 있습니다. 수평선 이 뒤에 뭐가 있다는 것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지만 수평선 뒤에 뭐가 있다는 것은 알죠. 이걸 가지고 수평, 또는 지평이라고 합니다. 지평. 그래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뭘 넓히는 거예요. 지평을 넓히는 거예요.
초등학교 2학년 지평과 4학년 지평이 달라요. 고등학교 지평이 달라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모든 어른들은 다 착하고 유머가 많고 어질고, 모든 아줌마들은 천사인줄 알았어요.
근데 지평을 넓히다 보니까...역시 아줌마는 천사 맞아요.
말을 조심히 해야지.
 


  

사람이 지평을 넓힌다는 말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미리 땡겨서 아는 것이잖아요. 이걸 가지곤 상상이라고 하고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종교. 유대교입니다. 이건 복음 아니에요. 근데 교회는 이것 가지고 지금 밥 먹고 살아요. “여러분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거 가지고 밥 먹고 살거든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가는 천국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이야기한 적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감기가 걸려가지고 참.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부활이 몇 개냐 하면 두 개에요. 부활이.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죽음도 몇 가지?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 있어요. 이거는 죽고 난 뒤가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 죽어줘야 부활되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은 자가 돼야 해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래 되어야 되는 겁니다. 

  

진도만 나갈 문제가 아니고 마태복음을 봐야 될 문제입니다. 이거는 진도만 나갈 문제가 아니라 확실히 이해되어야 해요. 마태복음 11장 2절에 보면 사도요한이 옥에 갇혔죠. 사도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자기는 옥에 갇혀있으니까 사람을 예수님한테 보냈습니다. 보내서 하는 질문이 뭐냐 하면, 3절에,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래 한 거예요. 

  

사도요한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자기가 큰소리 친 게 있어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써 세례를 주는 거예요. 예수님은 불로써 세례를 주고, 그럼 본인은? 물로써 세례를 주겠죠. 그럼 물로써 세례 주는 방법은 뭡니까? 물속에 풍덩 잠기는 것이죠. 그럼 불로써 세례를 주는 방법은 뭡니까? 불 있는 곳에 세상이 잠기는 것이죠. 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심판 날이 가까이 왔으니까. 

  

그럼 세례요한은 옥에 갇혀도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는 거예요. 어차피 이미 메시아가 왔기 때문에. 옥에 갇혀도 괜찮아요. 옥에 갇히나 안 갇히나 불로 심판 받기는 마찬가지니까. 옥에 갇혔다고 뜨겁고 더 뜨겁고 하는 것이 없으니까. 같이 죽자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해요. 아무 일이 없어요. 자기가 잡혔으면 이제, 자기가 같이 활동했는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잡혔잖아요. 

  

그러면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내가 큰소리 친 대로, 자기가 큰 소리 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알려준 대로 해야 되는데 아무 일이 없어요. 그래서 물은 겁니다. 왜 불 심판이 안 나타나죠? 이런 식으로 물었겠죠. 왜 조용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예수님 답변이 이래요.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래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니가 내 말을 알아들으려면 멀쩡한 인간이 뭐가 되는 경우냐 하면 소경이 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있음이 없음 같은 방식으로 있음 속에 섞여들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나는 건강하니까 죄가 적은 거예요. 근데 소경은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날 때부터이던지 커서든지 하여튼 소경이 된 거예요. 그러면 누가 지옥가고 천국 가는지, 이렇게 서열화 시키면 누가 천국의 확률이 높고, 누가 지옥의 확률이 높습니까? 소경된 자, 절름발이, 귀머거리, 앉은뱅이, 죽은 자, 이런 자들이 지옥 가겠죠. 

  

그럼 천국은 다행스럽게도, 눈이 좌2.0, 우2.0 멀쩡하고, 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운서처럼 말을 매끈하게 잘하는 것, 다리는 백 미터를 10초나 20초에 정상으로 달릴 때, 여자는 20초까지 봐줍니다. 그렇게 달리는 사람. 그만큼 하나님께서 바이탈, 활성에너지를 줘가지고, 누구한테 주겠어요? 그 당시 믿음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신 활성에너지를 착하니까 준 거예요. 착하니까. 아까 구빈법 했죠.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것은 부자는 복 받았고 가난한 사람은 벌 받았으니까 부자가 도와주자. 이게 착한일이고 이웃사랑이다. 의료보험이나 전부 다 국가제도가 뭐냐 하면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잖아요. 

  

근데 예수님께서 이래 답변했습니다. 왜 이런 답변을 했는가 하면, 주님께서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그리고 소경을 낫게 해줬다면, 소경을 낫게 해준 것을 잘 생각해보세요. 소경을 왜 낫게 해주었을까요? 보통 소경을 낫게 한다고 하면 보통 의사가 소경을 낫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낫게 하신 그 분이 소경이 되었다고 소문난 그 원인에 주님이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 당시 소경되고 문둥병이 된 이유가 뭡니까? 죄지어서 그런 거예요. 너희들이 죄지어서 문둥병이 되었다는 그 죄. 그 죄에 내가 들어갈게.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메시아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왜?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잘난 맛에. 욥이 아들, 딸 열 명이 자기기도 덕분으로 잘 됐다가, 자기 서사구조에서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중간에 끊어져버렸죠. 끊어졌죠. 

  

주님께서 욥에게 찾아와가지고 욥의 서사구조를 끊어버리고 거기에다가 뭘 덮쳤습니까? 온 우주가 창조했던 서사구조를 거기다가 엎어버립니다. 니 북두칠성 만들 때 니는 어디에 있었느냐? 대답해봐라. 봐! 니 인생만 알고 내 인생은 모르지? 염소새끼 놓을 때 니가 어떻게 놓는지 알아? 봐, 답변 못하잖아. 니는 너밖에 몰랐지? 니 서사구조밖에 몰랐지? 니 이야기밖에 모르지? 나는 니 이야기 때문에 너를 고난 주었다. 황무지에 비 오는 것, 텃밭도 없는 황무지에 비는 왜 옵니까? 와? 내 맘 대로다. 내 서사구조에 비는 와야 돼. 

  

그러면 욥은 어디에 들어갑니까? 욥은 자기서사구조를 포기하고 어느 서사구조에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서사구조에 들어갔다는 증거가 뭐냐, 욥이 친구 세 사람을 위해서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이번 주일에 설교 할 건데 미리 다 이야기해버렸어요. 이번 주일 설교 제목이 이거에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에요. 첫째 시간의 서사구조가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서사이야기가. 

  

세례요한도 몰랐어요. 보이는 것에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어떤 증거를 확보하려고 해요. 근데 이미 증거는 없는데 있어요. 있는데 인간이 선택을 했어요. “이거는 증거 아니고, 이거는 그렇게 증거일수가 없어.” 쓰레기로 빼놓은 그 쓰레기에 주님의 증거가 거기에 들어가신 거예요. 이거 제키다보니까 누구마저 제켜버렸어요? 주님마저 쓸데없는 존재로 제켜버린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더 무서운 것은 진짜 주님의 복음은 쓸데없는 것으로 없애놓고, 더 나쁜 점은 가짜 예수를 교회에다 세워놓고 기도하면 복 받고, 감사하면 30배 더 줍니다.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 무화과나무가 잘 되고, 포도나무가 번성하고, 외양간의 소가 죽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그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해놓으니까 결국은,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 여러분 이해하시죠? 어렵다고 했는데 사실은 들어보니까 어렵지 않죠? 이게 뭐냐 하면 비-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설명해야 되고, 비-복음을 통해서 복음이 설명되어야 하지, 복음이 뭡니까? 하고 들이대면 안 돼요. 우리 자체가 비-사랑, 비-복음 같으면 출발점을 비-복음, 비-사랑,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해요. 또 하나 하면 비-언약이에요. 비-언약부터 언약을 설명해 들어가야 합니다. 

  

왜? 언약이 비-언약 속에 들어왔으니까. 사랑이 비-사랑 속에 들어왔으니까. 복음이 비-복음 속에 들어왔으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그렇죠? 우리는 그게 싫어버린 바 되었거든요. 싫어버린 바. 못돼먹은 인간을 싫어버린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를 싫어버린 바 되고 다른 예수를 좋아했단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된 것은 진짜 예수님하고 다른 예수님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좋아하는, 내가 원하는 예수 말고, 진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적하면서 찾아오신 그 예수님을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영이 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죽음이 없는 영이 아니고. 죽음이 없는 영은 성신이에요. 성신이 해봤자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는 것밖에 안 돼요. 

  

죽고 난 뒤에 오시기 때문에, 오게 되면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꾀더냐가 무슨 뜻이에요? 마귀가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가지고 지금 유혹들을 하고 있는 중에 내가 십자가로 희생을 했다는 이야기에요. 

  

근데 오늘 본문을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제자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제자들 범주 바깥에 누가 둘러싸여 있습니까? 그 당시 유대 정치권력이 둘러 싸여있죠. 그러면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아까 배웠으니까 가산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오늘도 주님한테 좋은 것 배웠습니다. 용기내야지!” 용기 내어본들, 가산정보를 확보한들, 그 옆에 포위되어 있는 그 권력을 자기 힘으로 뚫을 수가 있습니까? 못 뚫을 정도가 아니고 아예 배신해버리죠. 

  

배신자, 참... 갑가지 제가 영화평 한 것이 생각나네요. <사이런스>라는 영화 우리교회에, 십자가마을에 영화평 올려놓았는데 혹시 본 적이 있어요? 1640년 경 일본에서 천주교인 20만 명 작살낸 이야기. 그 중에서 배교한 신부들. 그 영화 보면서 그 천한 백성들은 “신부님. 기다렸어요. 이렇게 순교당하면 천국 가는 것 맞죠?” 그 소리를 듣고 누가 당황하느냐 하면 신부들이 당황해요. 왜? 자기들은 그런 믿음이 없거든요. 누가 갑이에요? 천민들이 갑인데, 근데 그 천민들을 누가 가르쳤어요? 신부들이 가르쳐놨는데, 근데 이건 배운 사람들이 가르친 자보다 믿음이 더 순수하니까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영화에 보면 “에..예..맞는 것 같기도 하고..”라고 나와요. 그래놓고 결국은 셋 다 다 배신한다고요. 

  

근데 제가 평을 한 이유는 그 천민들이 죽으면 천국 간다는 그 신앙이 과연 신앙인지를 문제 삼은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 갈 신앙은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배신으로 증명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배신으로. 모든 순교는 거짓입니다. 이 땅에서의 순교라는 것은 다 거짓이에요. 그건 정치적 폭력이지, 순교가 아닙니다. 

  

제가 평해놓은 것을 보세요. 이렇게 해놨습니다. 진짜 순교라면, 초등학교 애들이 봄에 소풍갈 때, 봄 들녘 소풍 갈 때, 얼마나 손꼽아 기다립니까? 그처럼 정말 일본 당국이, 그 당시 에도시대인데,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천주교인들 죽인다고 하면 “아저씨! 고마워요!”하고 뛰쳐나와야 해요. 근데 그 영화에 보면 “죽어도 천국 가죠?”라고 한 사람들이 뛰쳐나온 사람들이 아니고, 밤에 몰래 만나요. 몰래 미사 드린다고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아이고, 아저씨! 저를 천국 보내려고 죽이려고 했군요. 제가 알아서 십자가에 달릴게요.” 그 영화에 십자가 다 나와요. 십자가에 달려 죽이고 하는데. 이래 되는데, 숨긴다든지, 내 자식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거짓으로 나온다든지, 그래서 저는 그걸 평하기를 가족공동체를 사수하기 위한 인간의 육욕적인 본능이지, 이게 과연 순교냐? 

  

진짜 요즘 시대 순교는 바로 민주주의가 이게 비-복음인 것을 깨닫는 것이 순교에요. 그리고 깨달으면 뭐합니까? 못 벗어나죠. 내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나는 그것이,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우리 순교 한 번 해봅시다. 오늘 순교 한 번 해봅시다. 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이고, 자본주의 과학, 물리, 화학, 생물학, 기술, 전부 다 육을 채택하기 위한, 육을 더 살려내기 위한, 자연을 활용해서, 자연을 활용하는 것뿐이지, 자연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요. 

  

진화론, 창조론, 둘 다 비-복음이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고요? 그건 유대인들도 그런 소리 하거든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든 증거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이야기해놓으면 어렵고, 설명하면 “아! 그거!” 하죠. 피조세계가 전부라면, 사실은 전부가 아닌데 전부라면,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 이 전부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조세계의 일부로서 포함이 되어 있죠. 그래서 우리는 부분 되는 겁니다. 부분은 피조세계가 어떻다고 말할 자격이 안 돼요. 

  

우리가 피조세계가 과연 이렇다고 한다면 그건 어디에 포함됩니까? 피조세계의 범위 안에서 나올 피조세계의 견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피조세계 바깥에 있잖아요. 그럼 우리가 피조세계에서 따로 나와서 평가할 입장이 못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여기 있음을 없음에서 만드신 것 맞죠? 제가 그걸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것도 피조세계가 낳은 상상력이고, 아까 말한 지평 넓히기에요. 

  

지평이라고 해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저 지평선 너머에는 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 천국 세계에 내가 착함으로, 선함으로, 정성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이것이 종교 아닙니까? 세상 모든 종교가 그거거든요. 살아생전 착해서 죽어서는 복 받는 거잖아요. 인간은 어차피 죽음을 못 이기니까,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다 드러났으니까, 니 죽고 나 죽고 다 죽었으니까. 

  

근데 주님께서 저쪽에서 살아서 넘어온 것이 아니에요. 죽기 위해서 온 거예요. 죽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이 세계를 하나님 세계로 접수하는 거예요. 접수해버리면 “니는 죽어도 죽음을 몰라.” 진짜 죽음은 예수님이 죽는 것이 죽음이에요. 예수님 죽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주일 낮 설교는 다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거죠. 죽고 난 뒤에는, 이제는 산다, 죽는다에 대해서 입 다물라는 것이죠. 

  

주께서 그 다음부터는 천국으로 살려 낼 사람과 저주받기 위해서 살려 낼 사람과, 선한부활, 악한 부활과, 그거는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임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이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 창조론 아무리 해봐도 이게 나옵니까? 안 나와요. 성경책을 과학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시건방진 이야기. 

  

노아의 홍수의 증거를 찾았다고요? 노아홍수의 증거, 그리고 방주쪼가리. 아라랏 산, 터키의 북쪽 아르메니아 근교 4000미터에서 방주쪼가리가 나왔다고 방사능동위원소로 해가지고, 그게 B.C. 4400년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그걸 누가 납득합니까? 그걸 누구 납득하라고 준 거예요? 누구 납득하라고 준 거예요? 죄인 납득하라고 준 거예요. 죄인이 납득하면 그게 진리겠습니까? 진리 아니겠습니까? 진리 아니죠. 

  

죄인에게 성령이 와서 납득이 되면 내 죄 때문에 납득시킨 유일한 증거가 과학적 증거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내가 아니고 남이잖아요. 옆집 아저씨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죄인 됩니까? 여기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옆집 아저씨가 죽었는데, 숨 거둔 시간이 새벽 2시 45분인데, 내가 그 시간에 잠을 깨가지고 “나는 죄인이야.”라고 이럴 수 있어요? 없어요? 옆집 아저씨 지가 뭔데? 마찬가지에요. 예수가 죽었는데 내가 죄인이다? 예수 지가 뭔데? 

  

그러니까 연결이 딱 있다고요. 그 연결이 뭡니까? 성령으로 연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죽은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살리기 위해 나 때문에 죽었고, 주님 의 때문에 살아났다. 로마서 4장.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나의 의를 위하여 부활했다. 그것이 성경 로마서 4장을 통해서 알려주니까 그게 믿어지더라 이 말입니다. 믿어지는데, 옆에 사람이 “그게 믿어지나?” “믿어져.” “왜?” “이건 결과니까.” 이렇게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어진다는 이 자체가 원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 원인을 던져가지고 내가 주님의 결과가 된 거예요. 자, 그 점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봅시다. 1절, “유월절 전에 아버지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함이 원인이 되는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사랑하심이. 

  

그 다음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래 되어 있죠. 주님의 속성 가운데서 가룟 유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미워할 것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안 했어요. “인간아. 니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런 이야기를 구태여 달 필요가 없어요. “이 못된 놈! 죽어라!” 이래 될 텐데. 그게 아니고 “아이고, 니는 왜 그런 역할을 다 맡았나?” 그런 식이라니까요. 역할을 그런 식으로.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긍휼이 여겨야 한다. 긍휼히. 불쌍히 여기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에서 나오죠. 팔복 속에 있잖아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나 목사들을 그런 점에서 불쌍히 여겨줘야 돼요. 그 사람들은 인간과 인간으로 승부를 걸자는 거예요. 구원은 당신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서사구조를 자기가 만드는 것이 돼요.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친절하신 마귀께서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지가 안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해야 돼요. 믿는 것은 없지, 천국 보내준다고 해야 장사는 되지, 당신 결심 따라 간다고 하니까 똑바로 결심하고 난 뒤에 앞에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9절에 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베드로의 사고방식은 서사적입니까? 가산적입니까? 가산적이죠. 왜? 발 더하기 손 더하기 머리, 가산적이잖아요. 면적이에요. 면적. 양적이에요. 양적. 머리어깨무릎발~♬ 가산적이에요. 이 베드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속마음을 앞당겨서 이렇게 시범적으로 잘 보여줘요. 가산적이에요. 이 베드로가 너무 순수해요. 발만 씻겨주니까 발 말고 딴 것도 다 씻겨주옵소서. 

  

결국 베드로의 이 주장은 누구만 살면 된다? 나만 살면 된다. 나만 살면 돼요. 따라서 이 베드로의 말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응해야 돼요? 안 응해야 돼요? 응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막살아야 되는 거예요. 평생 막살아야 돼요. 지금 우리가 배부를 때는 그렇게 안 돼요. 그런데 당장 집에 부도나고 갑자기 입찰 들어오게 되면 가산적 입니다. “주여, 이 TV만큼은 가져가지 말게 하옵소서.” 가산적이에요. “이거는 가져가되 이 금반지만큼은 내 추억이 담겨있는데...” 가산적이라. 

  

그 다음에 주님께서 이 가산적인 것을 듣고 서사적으로 이야기하시죠.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발을 씻긴 이유가 뭡니까? “니는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고 되어 있어요. 깨끗하여 진 이 꼬라지 좋다. 배신하고? 깨끗하여졌다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13장 1절에 근거해서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시간요소가 날아가버려요. 

  

왜? 모든 있음은, 있음이라는 시간의 역사는 없음이라는 정지된 시간에서 받쳐주니까. 지금 예수님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베드로는 시간 있음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야 언젠가는 이 말씀이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랑한 자는 지가 예수 믿거나 안 믿거나 관계없이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소급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받는 겁니다. 

  

여러분, 영생은 선물입니다. 영생은 선물이에요. 여러분, 영생은 선물인 것을 아시죠? 거기다가 보태겠습니다. 우리의 몸도 선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출생도 선물입니다. 툭 던져졌으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협의 없이 태어났으니까. 우리의 죄짓는 한평생도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끝나고 난 뒤에 그러면 주여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그게 오늘 본문 20절에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19절부터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주께서 혼자 일을 다 이루셔놓고, 그 이루심에 우리가 편입되어 있는 거예요. 

  

고등학교 떨어졌다고 갈 데 없으니까 PC방에 가서 게임하다가 늦게 들어오니까 이미 합격되어 있어요. “야야! 어디 갔다 이제오노?” “게임하고 왔습니다.” “야야, 내일부터 어느 고등학교에 가라. 내가 다 해놓았다.” 이미 다 편입시켜놓았어요. “그래요?” 이게 믿음이에요. “진짜요?”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안 해도 이미 되어진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서사구조 속에 이미 편입되어 있고 합류되어 있습니다. 

  

이제 내려가는 지평은 내가 아는 지평이 아니고 주님이 아는 지평이 나의 지평이 될 거예요. 주님의 아는 지평이라는 것은 주님의 용서가 나의 죄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 더 크다는 그 지평을 아는 거예요. 따라서 주께서 점점 더 말씀을, 아까 말한 해삼을 자르면, 이것마저 죄? 이것도 죄! 점점 더 우리로 하여금 이것도 이기주의? 이것도 이기주의! 점점 우리 속에 육적인 것을 발췌시키면서 그것마저 아울러서 이미 처리가 된 상태. 그것이 주님의 자비를 나타나게 한 죄.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상한심령 되기.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 20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전에 대칭성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관계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때, 이 일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고 그대로 예수님께서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떠나고 나시면 성령이 오시죠.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 받은 사도들, 성령 받은 성도들이 생깁니다. 사도 죽고 난 뒤에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서 전하게 되면 자기 죄와 더불어서 십자가 은혜를 같이 전하게 됩니다.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거는 말씀에서 나와요. “나는 이러한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전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는 방식이 아버지와 아들의 방식이라고 같은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동의하게 되어 있어요. 동의. 그걸 태블릿PC 카톡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유라고 하죠. 공유. 공유하니까 도깨비 생각이 나요. 공유. 공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했다고 갑이 되면 안 돼요. 전도 받았으면 이거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의 배후에서 하신 분은 주님이시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 진적도 없다.
내가 한 것은 복음이지, 성령의 나타남이지,
나의 말로, 지혜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주께서 당신을 사용했습니다.” 언제까지? 복음이 나올 때까지.
안 나온다? 입 싹 닦고 돌아서야 해요. 돌아설 수밖에 없어요.
돌아선 줄 알았는데 1년 뒤에 또 나오더라 또 돌아오면 되거든요.
항상 우리는 말씀으로, 복음으로 이미 완료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지, 사람 따라 가면 안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서사적인 그 이야기를 우리가 같이 보았습니다. 시작한 것, 마지막,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역할을 이렇게 맡겨 주셨사오니, 가벼운 마음으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이 소경된 자, 귀머거리 된 자, 역할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