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20절(서사적 구조)170307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뭐로 봤느냐, 현실화시킵니다. 자기 서사구조를 위해서. 말씀이 굉장히 추상적이에요. 말이니까 그냥 언어니까. 추상적인데, 이사야에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말씀으로 되어 있다 했거든요. 시편에도 그런 말씀이 나와요. 이사야도 나오고 시편에도 나오는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은 없어지겠으나 주는 영존하겠고,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이 말씀도 영원해지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이 물질, 탄소, 수소, 산소, 철, 몸의 70퍼센트가 물이니까 물로, 물속에 세포가 있어서 세포는 항상 물과 결합하는 수성결합으로 항상 세포가 유지되게 되어 있어요. 이거하고 말씀하고 무슨 관련성이 있어요? 관련성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관련성을 이번 겨울수련회 골로새서에서 사실은 했었어요. 관련성을 했는데, 그 관련성을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 관련성을 이야기하면 복잡할 텐데, 근데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든 유有 밑에다가 무無를 두는 거예요. 무를 바탕으로 유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유라고 하는 것은 뭐다? 이거는 실제 하는, 실제로 있는 우리의 몸, 머리카락, 그리고 탄소, 수소, 해와 별, 이것이 유, 있음 또는 나타남. 무는 나타남 때문에 안 보이게 된 것. 어려워요. 무가 있으면 있음이 되니까, 있음 식으로 있지 않는 그 무. 현재 있지 않는 식으로 있는 그 무.
이걸 가지고 히브리서에서는 유를 나타난 것이라고 하고, 무는 이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데, 히브리서 11장을 잠깐 한 번 볼까요?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이것은 이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유에서 유가 된 게 아니에요. 이거는 과학이에요.
과학은 계속 분석하고 환원하는 겁니다.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쿼크로, 계속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믿자. 이게 과학입니다. 그래서 과학은 이유가 없어요. 아까 남자, 여자 된 이유를 모른다고 했죠. 남자, 여자를 어디에 활용할 것이냐?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 어디에 이용합니까? 우리 행복을 위해서. 우리 목숨 유지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전체를 뭐라고 했습니까? 어떤 성질이다? 그게 바로 육이고 이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육이 죄가 아니죠. 당연한 것이죠.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졸지에 육이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타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일종의 무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에 속해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나타났으면 투명인간으로 나타나야지, 당신 말대로 한다면 투명인간으로 나타나야 되지 않느냐? 라고 언급할 거예요. 왜? 나타난 것에 포함이 안 됐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같이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서도 나타난 것이 나타난 것을 이해 못하게 만들어 버려요. 옆에 있어도, 심지어 같이 식사를 해도, 손을 잡아도,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분명히 언급을 해서 힌트를 그렇게 줬건만, 그게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같은 아람어 쓰는데 못 알아들을 것이 뭐가 있느냐 말이죠. “예수님 알아듣게 하세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알아듣게 해요. 그런데 알아듣게 하는 것이 더 어려워요.
“어떤 농부가 밭에다가 씨를 뿌리거든”하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제자들이 들어보니까 너무나 평이한 일상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저 농사짓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그 의미를 모르겠다. 그 의미가 왜 그러느냐, 아까 한 서사구조를 다시 한 번 봅시다. 서사구조에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서사구조, 이야기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결국, 또는 끝에, 종말에 뭐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서사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우리도 내 인생이야기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인생 있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전부 다 끝이 되기 전에 중간에 다 중단이 돼요. 이게 문제에요. 중단돼요. “그렇게 해서 공주하고 왕자하고 뽀뽀를 해했대.” “근데 어떻게 됐는데?” “그래가지고 나중에 행복하게 살았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죽었대.” 끝나버려요. 개인적인 이 서사구조는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겠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어떻게 됩니까? 부활되고 마는 거예요. 부활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왜? 예수님의 말씀이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 죽어야 될 자가 죽은 것으로 드러난 것뿐이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이 죽는 게. 내가 죽는 것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죽어야 될 인간이 죽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왜 죽느냐 하는 거예요. 왜?
왜 사람은 늙어죽느냐? 이 말입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요한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안 하고, 왜냐하면 유대인과 제자들과 상대하기 때문에. 로마서 6장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아! 사람이 이렇게 목숨 끊어지는 것은 죄를 지어서 그렇구나.”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고, 반대쪽으로 이야기해요. 의가 있는 것은 생명이라고 했어요. 의가 있는 자는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 지어서 목숨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의로워도 목숨 끊어지는 이유가 목숨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는 아담에 속했으면 의당 늙으면 죽게 마련인데, 그거 더 연장하려고 내가 온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나 봐라. 나는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 심지어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이 뭡니까? 나사로죠, 나사로 보세요. 죽었지만 나흘 만에 살아났어요. 근데 그 시체가 어떻게 됐어요? 썩었거든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가산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정보에 의해서 물질로 되어 있단 말이죠. 사람은 죽으면 세포가 단백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백질은 박테리아 때문에 썩습니다. 썩으면 냄새가 나죠. 냄새라는 화학적 에너지가 발생돼가지고 우리 코까지 전달되어 이게 퍼진다 이 말이죠.
그렇게 과학적으로 따질 줄 알면, 그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러가지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살아나오는 것을 과학적으로 한 번 설명을 해보죠. 그럼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안 되면, 오늘 첫 강의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이 과학이 너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가 영생을 얻었으면 이 과학이 맞느냐, 안 맞느냐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드배치를 어떻게 하고, 뭐 롯데가 어떻게 압박을 받고,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한국기업을 중국이 안 받아주면 어떻게 되느냐? 안 받아주면 사업이 안 되죠. 사업이 안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망하죠. 죽죠.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원래 죽도록 되어 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것은 이론상 그렇죠?” 맞아요. 이게 가산적 사고방식에서는 그래요. 근데 제가 말하는 것은 이 가산적 사고방식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고 있지요? 라고 묻는 투로 제가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개그콘서트 어떤 코너에서 하는 것을 보면 회사가 있는데 신입사원을 선배가 놀리는 거예요. “내가 카메라 모델을 만들어오라고 했잖아?” 막 나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입이 “그럼 지금 저를 나무라는 겁니까?” “아니야. 잘 만들었다는 거야.”라고 또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잘 만들었다는 칭찬입니까?” “아니야. 잘 만들었으니까 이 회사 나가라는 이 말이야.”라고 이야기해요. “그럼 나갈까요?” “아니야. 너는 아인슈타인이야.”라고 또 이렇게 한다고요. “그럼 아인슈타인이면 똑똑하다는 말입니까?”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됐는데?” “아인슈타인은 훌륭한 사람이죠.” “죽었어!” 이렇게 하거든요. 항상 그 코너가 마지막에 칭찬해놓고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니도 죽어야 될 인간이다 이 말이거든요.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모든 인간은, 모든 있음 밑에 뭐가 있다? 없음, 무가 있는 거예요. 이제 무를 밝혀내는 거예요. 무를 밝혀내게 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이기 때문에 하나는 천국 속성이 있고, 하나는 지옥 속성이 있어요. 그럼 이것이 무의 세계고 유의 세계를 받친다면 예수님은 이 유의 세계에서 천국 보낼 자와 지옥 보낼 자를 임의로 선택하고 판결내릴 권한이 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하나는 선히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토기장이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토기들이 만드신 분을 만난 적이 없어. 만난들 알아먹겠어요? 만난들? 유의 세계에서는 유만 인정하니까,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화개장터에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이제 웃지도 않으시고... 조영남이 잡혀 들어가서...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 없고. 얼마나 복음적인지. 천국 갈 사람은 따로 있고, 지옥 갈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못된 상식은 뭐냐 하면 죄지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구약의 욥에서 욥이 자기 서사구조를 갖고 있어요. 착하니까 자식 열 명 잘됐고 나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부자 되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서사구조인데, 서사구조는 반드시 예수님의 서사구조에 비해서 중단된다고 했죠. 뚝 떨어지죠. 주님이 고난을 줘버렸어요. 그것도 마귀하고 내기를 하면서 마귀가 개입됩니다. 뚝 떨어졌어요. 뚝 떨어지니까 자기 서사구조가 앞에 있는 원리로, 원리로, 차곡차곡 살아온 거예요.
기도하니까 응답되고, 그 다음에 기도해야지. 또 응답되네. 또 기도해야지.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원리원칙을 계속 고수하고 왔는데 이게 스톱이 된 거예요. 왜 욥이 기도했느냐 하면 자식들이 생일잔치하고 난 뒤에 혹시 술김에 하나님 앞에 죄지을까 싶어서 아버지가 자식들 대신해서 기도를 해줬어요. 얼마나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합니까? 그들이 벌 안 받도록 하겠다는 그 취지는 욥 본인이 평소에 갖고 있던 행동지침이었죠. 나처럼 돼봐라 이렇게~ 나 봐! 부자 되었잖아. 너도 나처럼 되려면 나처럼 따라 해야 부자 된다.
이게 자기 서사구조를 지탱해온 자기 나름대로의 원리원칙인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식 열 명이 다 죽었어요. 기도해서 잘 키워놨더니만 한방에 훅 가버렸네. 얼마나 자식들을 자랑했습니까? 욥기에 보면 그런 뉘앙스가 있어요. 다른 친구들이 욥을 보고는 기가 안 죽고 자식들을 보고 기가 죽었어요. “세상에! 자식들을 가정교육을 우에 잘 시켰나?” 꼭 여러분 같죠? 너무 아부성 있는 발언인데...평생 부모 애 안 먹이고 착실하고...한방에 훅 갔다니까요. 한방에. 차라리 쳐도 나를 죽이지, 왜 자식들을 손댑니까? 비겁한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신앙힌트는 그거였어요. 너를 죽여서 너를 바쳐라가 아니라 니 아들을 죽여서 내게 니 아들을 바치라는 그겁니다. 사랑하는 자식이에요. 이스마엘을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잡아라. 니 사랑을 잡아라 이 말이죠. 사랑을 죽여 없애는 그것이 인간들의 육에서는 모르는 하나님만 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죽이는 거예요. 이 역설. 물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마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는 이것이 말이 돼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이런 일은 있겠죠. 가장이 부도내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아내가 고생할까 싶어서 약 먹여서 죽이고 지는 약 적게 먹어서 살아나고,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것이 인생이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말 저럴 것 같으면 자살할만하다 하는 그런 극단적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이 제시한 그 법에는 영 가벼워요. 아직까지도 가벼워요. 주님이 주시는 그 무거운 율법에 의하면 그거는 법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누구나 주의 법을 못 지킵니다. 왜? 사랑하는 자를 죽여야 하니까. 그거는 예수님만이 독생자 이름으로 모든 율법을 지키게 된 거예요. 십계명을 예수님이 지킬 때는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피로 다 지켜내는 겁니다. 그걸 어쭙잖게 지가 지켜낸다고요? 한 신앙 한다고 지가 십계명 지킨다고요?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어떤 제사였습니까? 상한심령이죠.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어놨잖아요. 주께서. 주께서 간통하게 만들었고 주께서 나를 살인자로 만들어놨잖아요. 이걸 얼마나 감사한다고요. 이게 미친것이지요.
모친에게서 그게 양성되어서, 엄마의 죄가 숙성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어떤 여인을 보고 간음하게 하였고, 심지어 거기서 자기 의를 감추는 용도로써 멀쩡한 남편을, 그 남편이 도박하는 남편이었습니까? 술 먹고 죽었어요? 을지문덕이에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장군이라니까요. 이순신 장군이에요. 나라 지키겠다고 노력한 그 사람을 비겁하게 결투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여자하나 놓고 총으로 싸운 것이 아니고, 갑질해가지고, 참 비겁해도 너무 비겁해요.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비겁하다고 하는 것이잖아요. “남자가 돼가지고 비겁하다.” 이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그걸 다윗이 했다니까요. 다윗이.
그럼 그게 우리한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비겁해도 구원받고, 간통해도 구원받고, 살인해도 구원받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살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상한심령이 돼야 돼요. 상한심령. 살인 안 해도 상한심령, 간음 안 해도 상한심령, 혼자 독신으로 살아도 상한심령, 강하게 살아도 상한심령. 왜? 주께서 그걸 원하시기 때문에.
그게 다윗이 아니고 사자성어로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이 언약이 다르다고 했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언약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대드는 거예요. 다윗은 다윗언약을 몰랐는데, 자기가 그런 짓 하고 난 뒤에, 죄짓게 하셔가지고 다윗언약을 알게 된 거예요. 아! 멀쩡한 나는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아요. 상한심령은 받는다? 받아요. 주께서 착한 일 했다? 아버지가 안 받아요. 주께서 저주받았다? 아버지가 받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참 어려운데요. 어려워요. 유, 있음을 무, 없음이 받쳐주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봤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난 것이에요. 그러면 없음이 나타났다 이 말이죠. 만약에 제가 “여러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라고 하면 뭐가 상상이 되겠습니까? 아,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지평이라고 합니다. 더 쉬운 말로 수평선.
자, 수평선(───)이 이래 있습니다. 수평선 이 뒤에 뭐가 있다는 것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지만 수평선 뒤에 뭐가 있다는 것은 알죠. 이걸 가지고 수평, 또는 지평이라고 합니다. 지평. 그래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뭘 넓히는 거예요. 지평을 넓히는 거예요. 초등학교 2학년 지평과 4학년 지평이 달라요. 고등학교 지평이 달라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모든 어른들은 다 착하고 유머가 많고 어질고, 모든 아줌마들은 천사인줄 알았어요. 근데 지평을 넓히다 보니까...역시 아줌마는 천사 맞아요. 말을 조심히 해야지.
사람이 지평을 넓힌다는 말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미리 땡겨서 아는 것이잖아요. 이걸 가지곤 상상이라고 하고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종교. 유대교입니다. 이건 복음 아니에요. 근데 교회는 이것 가지고 지금 밥 먹고 살아요. “여러분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거 가지고 밥 먹고 살거든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가는 천국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이야기한 적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감기가 걸려가지고 참.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부활이 몇 개냐 하면 두 개에요. 부활이.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죽음도 몇 가지?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 있어요. 이거는 죽고 난 뒤가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 죽어줘야 부활되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은 자가 돼야 해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래 되어야 되는 겁니다.
진도만 나갈 문제가 아니고 마태복음을 봐야 될 문제입니다. 이거는 진도만 나갈 문제가 아니라 확실히 이해되어야 해요. 마태복음 11장 2절에 보면 사도요한이 옥에 갇혔죠. 사도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자기는 옥에 갇혀있으니까 사람을 예수님한테 보냈습니다. 보내서 하는 질문이 뭐냐 하면, 3절에,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래 한 거예요.
사도요한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자기가 큰소리 친 게 있어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써 세례를 주는 거예요. 예수님은 불로써 세례를 주고, 그럼 본인은? 물로써 세례를 주겠죠. 그럼 물로써 세례 주는 방법은 뭡니까? 물속에 풍덩 잠기는 것이죠. 그럼 불로써 세례를 주는 방법은 뭡니까? 불 있는 곳에 세상이 잠기는 것이죠. 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심판 날이 가까이 왔으니까.
그럼 세례요한은 옥에 갇혀도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는 거예요. 어차피 이미 메시아가 왔기 때문에. 옥에 갇혀도 괜찮아요. 옥에 갇히나 안 갇히나 불로 심판 받기는 마찬가지니까. 옥에 갇혔다고 뜨겁고 더 뜨겁고 하는 것이 없으니까. 같이 죽자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해요. 아무 일이 없어요. 자기가 잡혔으면 이제, 자기가 같이 활동했는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잡혔잖아요.
그러면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내가 큰소리 친 대로, 자기가 큰 소리 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알려준 대로 해야 되는데 아무 일이 없어요. 그래서 물은 겁니다. 왜 불 심판이 안 나타나죠? 이런 식으로 물었겠죠. 왜 조용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예수님 답변이 이래요.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래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니가 내 말을 알아들으려면 멀쩡한 인간이 뭐가 되는 경우냐 하면 소경이 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있음이 없음 같은 방식으로 있음 속에 섞여들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나는 건강하니까 죄가 적은 거예요. 근데 소경은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날 때부터이던지 커서든지 하여튼 소경이 된 거예요. 그러면 누가 지옥가고 천국 가는지, 이렇게 서열화 시키면 누가 천국의 확률이 높고, 누가 지옥의 확률이 높습니까? 소경된 자, 절름발이, 귀머거리, 앉은뱅이, 죽은 자, 이런 자들이 지옥 가겠죠.
그럼 천국은 다행스럽게도, 눈이 좌2.0, 우2.0 멀쩡하고, 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운서처럼 말을 매끈하게 잘하는 것, 다리는 백 미터를 10초나 20초에 정상으로 달릴 때, 여자는 20초까지 봐줍니다. 그렇게 달리는 사람. 그만큼 하나님께서 바이탈, 활성에너지를 줘가지고, 누구한테 주겠어요? 그 당시 믿음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신 활성에너지를 착하니까 준 거예요. 착하니까. 아까 구빈법 했죠.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것은 부자는 복 받았고 가난한 사람은 벌 받았으니까 부자가 도와주자. 이게 착한일이고 이웃사랑이다. 의료보험이나 전부 다 국가제도가 뭐냐 하면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잖아요.
근데 예수님께서 이래 답변했습니다. 왜 이런 답변을 했는가 하면, 주님께서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그리고 소경을 낫게 해줬다면, 소경을 낫게 해준 것을 잘 생각해보세요. 소경을 왜 낫게 해주었을까요? 보통 소경을 낫게 한다고 하면 보통 의사가 소경을 낫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낫게 하신 그 분이 소경이 되었다고 소문난 그 원인에 주님이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 당시 소경되고 문둥병이 된 이유가 뭡니까? 죄지어서 그런 거예요. 너희들이 죄지어서 문둥병이 되었다는 그 죄. 그 죄에 내가 들어갈게.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메시아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왜?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잘난 맛에. 욥이 아들, 딸 열 명이 자기기도 덕분으로 잘 됐다가, 자기 서사구조에서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중간에 끊어져버렸죠. 끊어졌죠.
주님께서 욥에게 찾아와가지고 욥의 서사구조를 끊어버리고 거기에다가 뭘 덮쳤습니까? 온 우주가 창조했던 서사구조를 거기다가 엎어버립니다. 니 북두칠성 만들 때 니는 어디에 있었느냐? 대답해봐라. 봐! 니 인생만 알고 내 인생은 모르지? 염소새끼 놓을 때 니가 어떻게 놓는지 알아? 봐, 답변 못하잖아. 니는 너밖에 몰랐지? 니 서사구조밖에 몰랐지? 니 이야기밖에 모르지? 나는 니 이야기 때문에 너를 고난 주었다. 황무지에 비 오는 것, 텃밭도 없는 황무지에 비는 왜 옵니까? 와? 내 맘 대로다. 내 서사구조에 비는 와야 돼.
그러면 욥은 어디에 들어갑니까? 욥은 자기서사구조를 포기하고 어느 서사구조에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서사구조에 들어갔다는 증거가 뭐냐, 욥이 친구 세 사람을 위해서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이번 주일에 설교 할 건데 미리 다 이야기해버렸어요. 이번 주일 설교 제목이 이거에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에요. 첫째 시간의 서사구조가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서사이야기가.
세례요한도 몰랐어요. 보이는 것에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어떤 증거를 확보하려고 해요. 근데 이미 증거는 없는데 있어요. 있는데 인간이 선택을 했어요. “이거는 증거 아니고, 이거는 그렇게 증거일수가 없어.” 쓰레기로 빼놓은 그 쓰레기에 주님의 증거가 거기에 들어가신 거예요. 이거 제키다보니까 누구마저 제켜버렸어요? 주님마저 쓸데없는 존재로 제켜버린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더 무서운 것은 진짜 주님의 복음은 쓸데없는 것으로 없애놓고, 더 나쁜 점은 가짜 예수를 교회에다 세워놓고 기도하면 복 받고, 감사하면 30배 더 줍니다.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 무화과나무가 잘 되고, 포도나무가 번성하고, 외양간의 소가 죽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그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해놓으니까 결국은,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 여러분 이해하시죠? 어렵다고 했는데 사실은 들어보니까 어렵지 않죠? 이게 뭐냐 하면 비-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설명해야 되고, 비-복음을 통해서 복음이 설명되어야 하지, 복음이 뭡니까? 하고 들이대면 안 돼요. 우리 자체가 비-사랑, 비-복음 같으면 출발점을 비-복음, 비-사랑,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해요. 또 하나 하면 비-언약이에요. 비-언약부터 언약을 설명해 들어가야 합니다.
왜? 언약이 비-언약 속에 들어왔으니까. 사랑이 비-사랑 속에 들어왔으니까. 복음이 비-복음 속에 들어왔으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그렇죠? 우리는 그게 싫어버린 바 되었거든요. 싫어버린 바. 못돼먹은 인간을 싫어버린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를 싫어버린 바 되고 다른 예수를 좋아했단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된 것은 진짜 예수님하고 다른 예수님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좋아하는, 내가 원하는 예수 말고, 진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적하면서 찾아오신 그 예수님을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영이 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죽음이 없는 영이 아니고. 죽음이 없는 영은 성신이에요. 성신이 해봤자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는 것밖에 안 돼요.
죽고 난 뒤에 오시기 때문에, 오게 되면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꾀더냐가 무슨 뜻이에요? 마귀가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가지고 지금 유혹들을 하고 있는 중에 내가 십자가로 희생을 했다는 이야기에요.
근데 오늘 본문을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제자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제자들 범주 바깥에 누가 둘러싸여 있습니까? 그 당시 유대 정치권력이 둘러 싸여있죠. 그러면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아까 배웠으니까 가산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오늘도 주님한테 좋은 것 배웠습니다. 용기내야지!” 용기 내어본들, 가산정보를 확보한들, 그 옆에 포위되어 있는 그 권력을 자기 힘으로 뚫을 수가 있습니까? 못 뚫을 정도가 아니고 아예 배신해버리죠.
배신자, 참... 갑가지 제가 영화평 한 것이 생각나네요. <사이런스>라는 영화 우리교회에, 십자가마을에 영화평 올려놓았는데 혹시 본 적이 있어요? 1640년 경 일본에서 천주교인 20만 명 작살낸 이야기. 그 중에서 배교한 신부들. 그 영화 보면서 그 천한 백성들은 “신부님. 기다렸어요. 이렇게 순교당하면 천국 가는 것 맞죠?” 그 소리를 듣고 누가 당황하느냐 하면 신부들이 당황해요. 왜? 자기들은 그런 믿음이 없거든요. 누가 갑이에요? 천민들이 갑인데, 근데 그 천민들을 누가 가르쳤어요? 신부들이 가르쳐놨는데, 근데 이건 배운 사람들이 가르친 자보다 믿음이 더 순수하니까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영화에 보면 “에..예..맞는 것 같기도 하고..”라고 나와요. 그래놓고 결국은 셋 다 다 배신한다고요.
근데 제가 평을 한 이유는 그 천민들이 죽으면 천국 간다는 그 신앙이 과연 신앙인지를 문제 삼은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 갈 신앙은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배신으로 증명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배신으로. 모든 순교는 거짓입니다. 이 땅에서의 순교라는 것은 다 거짓이에요. 그건 정치적 폭력이지, 순교가 아닙니다.
제가 평해놓은 것을 보세요. 이렇게 해놨습니다. 진짜 순교라면, 초등학교 애들이 봄에 소풍갈 때, 봄 들녘 소풍 갈 때, 얼마나 손꼽아 기다립니까? 그처럼 정말 일본 당국이, 그 당시 에도시대인데,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천주교인들 죽인다고 하면 “아저씨! 고마워요!”하고 뛰쳐나와야 해요. 근데 그 영화에 보면 “죽어도 천국 가죠?”라고 한 사람들이 뛰쳐나온 사람들이 아니고, 밤에 몰래 만나요. 몰래 미사 드린다고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아이고, 아저씨! 저를 천국 보내려고 죽이려고 했군요. 제가 알아서 십자가에 달릴게요.” 그 영화에 십자가 다 나와요. 십자가에 달려 죽이고 하는데. 이래 되는데, 숨긴다든지, 내 자식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거짓으로 나온다든지, 그래서 저는 그걸 평하기를 가족공동체를 사수하기 위한 인간의 육욕적인 본능이지, 이게 과연 순교냐?
진짜 요즘 시대 순교는 바로 민주주의가 이게 비-복음인 것을 깨닫는 것이 순교에요. 그리고 깨달으면 뭐합니까? 못 벗어나죠. 내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나는 그것이,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우리 순교 한 번 해봅시다. 오늘 순교 한 번 해봅시다. 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이고, 자본주의 과학, 물리, 화학, 생물학, 기술, 전부 다 육을 채택하기 위한, 육을 더 살려내기 위한, 자연을 활용해서, 자연을 활용하는 것뿐이지, 자연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요.
진화론, 창조론, 둘 다 비-복음이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고요? 그건 유대인들도 그런 소리 하거든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든 증거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이야기해놓으면 어렵고, 설명하면 “아! 그거!” 하죠. 피조세계가 전부라면, 사실은 전부가 아닌데 전부라면,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 이 전부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조세계의 일부로서 포함이 되어 있죠. 그래서 우리는 부분 되는 겁니다. 부분은 피조세계가 어떻다고 말할 자격이 안 돼요.
우리가 피조세계가 과연 이렇다고 한다면 그건 어디에 포함됩니까? 피조세계의 범위 안에서 나올 피조세계의 견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피조세계 바깥에 있잖아요. 그럼 우리가 피조세계에서 따로 나와서 평가할 입장이 못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여기 있음을 없음에서 만드신 것 맞죠? 제가 그걸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것도 피조세계가 낳은 상상력이고, 아까 말한 지평 넓히기에요.
지평이라고 해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저 지평선 너머에는 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 천국 세계에 내가 착함으로, 선함으로, 정성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이것이 종교 아닙니까? 세상 모든 종교가 그거거든요. 살아생전 착해서 죽어서는 복 받는 거잖아요. 인간은 어차피 죽음을 못 이기니까,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다 드러났으니까, 니 죽고 나 죽고 다 죽었으니까.
근데 주님께서 저쪽에서 살아서 넘어온 것이 아니에요. 죽기 위해서 온 거예요. 죽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이 세계를 하나님 세계로 접수하는 거예요. 접수해버리면 “니는 죽어도 죽음을 몰라.” 진짜 죽음은 예수님이 죽는 것이 죽음이에요. 예수님 죽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주일 낮 설교는 다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거죠. 죽고 난 뒤에는, 이제는 산다, 죽는다에 대해서 입 다물라는 것이죠.
주께서 그 다음부터는 천국으로 살려 낼 사람과 저주받기 위해서 살려 낼 사람과, 선한부활, 악한 부활과, 그거는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임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이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 창조론 아무리 해봐도 이게 나옵니까? 안 나와요. 성경책을 과학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시건방진 이야기.
노아의 홍수의 증거를 찾았다고요? 노아홍수의 증거, 그리고 방주쪼가리. 아라랏 산, 터키의 북쪽 아르메니아 근교 4000미터에서 방주쪼가리가 나왔다고 방사능동위원소로 해가지고, 그게 B.C. 4400년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그걸 누가 납득합니까? 그걸 누구 납득하라고 준 거예요? 누구 납득하라고 준 거예요? 죄인 납득하라고 준 거예요. 죄인이 납득하면 그게 진리겠습니까? 진리 아니겠습니까? 진리 아니죠.
죄인에게 성령이 와서 납득이 되면 내 죄 때문에 납득시킨 유일한 증거가 과학적 증거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내가 아니고 남이잖아요. 옆집 아저씨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죄인 됩니까? 여기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옆집 아저씨가 죽었는데, 숨 거둔 시간이 새벽 2시 45분인데, 내가 그 시간에 잠을 깨가지고 “나는 죄인이야.”라고 이럴 수 있어요? 없어요? 옆집 아저씨 지가 뭔데? 마찬가지에요. 예수가 죽었는데 내가 죄인이다? 예수 지가 뭔데?
그러니까 연결이 딱 있다고요. 그 연결이 뭡니까? 성령으로 연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죽은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살리기 위해 나 때문에 죽었고, 주님 의 때문에 살아났다. 로마서 4장.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나의 의를 위하여 부활했다. 그것이 성경 로마서 4장을 통해서 알려주니까 그게 믿어지더라 이 말입니다. 믿어지는데, 옆에 사람이 “그게 믿어지나?” “믿어져.” “왜?” “이건 결과니까.” 이렇게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어진다는 이 자체가 원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 원인을 던져가지고 내가 주님의 결과가 된 거예요. 자, 그 점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봅시다. 1절, “유월절 전에 아버지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함이 원인이 되는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사랑하심이.
그 다음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래 되어 있죠. 주님의 속성 가운데서 가룟 유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미워할 것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안 했어요. “인간아. 니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런 이야기를 구태여 달 필요가 없어요. “이 못된 놈! 죽어라!” 이래 될 텐데. 그게 아니고 “아이고, 니는 왜 그런 역할을 다 맡았나?” 그런 식이라니까요. 역할을 그런 식으로.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긍휼이 여겨야 한다. 긍휼히. 불쌍히 여기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에서 나오죠. 팔복 속에 있잖아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나 목사들을 그런 점에서 불쌍히 여겨줘야 돼요. 그 사람들은 인간과 인간으로 승부를 걸자는 거예요. 구원은 당신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서사구조를 자기가 만드는 것이 돼요.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친절하신 마귀께서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지가 안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해야 돼요. 믿는 것은 없지, 천국 보내준다고 해야 장사는 되지, 당신 결심 따라 간다고 하니까 똑바로 결심하고 난 뒤에 앞에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9절에 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베드로의 사고방식은 서사적입니까? 가산적입니까? 가산적이죠. 왜? 발 더하기 손 더하기 머리, 가산적이잖아요. 면적이에요. 면적. 양적이에요. 양적. 머리어깨무릎발~♬ 가산적이에요. 이 베드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속마음을 앞당겨서 이렇게 시범적으로 잘 보여줘요. 가산적이에요. 이 베드로가 너무 순수해요. 발만 씻겨주니까 발 말고 딴 것도 다 씻겨주옵소서.
결국 베드로의 이 주장은 누구만 살면 된다? 나만 살면 된다. 나만 살면 돼요. 따라서 이 베드로의 말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응해야 돼요? 안 응해야 돼요? 응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막살아야 되는 거예요. 평생 막살아야 돼요. 지금 우리가 배부를 때는 그렇게 안 돼요. 그런데 당장 집에 부도나고 갑자기 입찰 들어오게 되면 가산적 입니다. “주여, 이 TV만큼은 가져가지 말게 하옵소서.” 가산적이에요. “이거는 가져가되 이 금반지만큼은 내 추억이 담겨있는데...” 가산적이라.
그 다음에 주님께서 이 가산적인 것을 듣고 서사적으로 이야기하시죠.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발을 씻긴 이유가 뭡니까? “니는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고 되어 있어요. 깨끗하여 진 이 꼬라지 좋다. 배신하고? 깨끗하여졌다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13장 1절에 근거해서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시간요소가 날아가버려요.
왜? 모든 있음은, 있음이라는 시간의 역사는 없음이라는 정지된 시간에서 받쳐주니까. 지금 예수님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베드로는 시간 있음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야 언젠가는 이 말씀이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랑한 자는 지가 예수 믿거나 안 믿거나 관계없이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소급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받는 겁니다.
여러분, 영생은 선물입니다. 영생은 선물이에요. 여러분, 영생은 선물인 것을 아시죠? 거기다가 보태겠습니다. 우리의 몸도 선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출생도 선물입니다. 툭 던져졌으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협의 없이 태어났으니까. 우리의 죄짓는 한평생도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끝나고 난 뒤에 그러면 주여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그게 오늘 본문 20절에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19절부터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주께서 혼자 일을 다 이루셔놓고, 그 이루심에 우리가 편입되어 있는 거예요.
고등학교 떨어졌다고 갈 데 없으니까 PC방에 가서 게임하다가 늦게 들어오니까 이미 합격되어 있어요. “야야! 어디 갔다 이제오노?” “게임하고 왔습니다.” “야야, 내일부터 어느 고등학교에 가라. 내가 다 해놓았다.” 이미 다 편입시켜놓았어요. “그래요?” 이게 믿음이에요. “진짜요?”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안 해도 이미 되어진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서사구조 속에 이미 편입되어 있고 합류되어 있습니다.
이제 내려가는 지평은 내가 아는 지평이 아니고 주님이 아는 지평이 나의 지평이 될 거예요. 주님의 아는 지평이라는 것은 주님의 용서가 나의 죄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 더 크다는 그 지평을 아는 거예요. 따라서 주께서 점점 더 말씀을, 아까 말한 해삼을 자르면, 이것마저 죄? 이것도 죄! 점점 더 우리로 하여금 이것도 이기주의? 이것도 이기주의! 점점 우리 속에 육적인 것을 발췌시키면서 그것마저 아울러서 이미 처리가 된 상태. 그것이 주님의 자비를 나타나게 한 죄.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상한심령 되기.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 20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전에 대칭성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관계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때, 이 일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고 그대로 예수님께서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떠나고 나시면 성령이 오시죠.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 받은 사도들, 성령 받은 성도들이 생깁니다. 사도 죽고 난 뒤에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서 전하게 되면 자기 죄와 더불어서 십자가 은혜를 같이 전하게 됩니다.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거는 말씀에서 나와요. “나는 이러한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전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는 방식이 아버지와 아들의 방식이라고 같은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동의하게 되어 있어요. 동의. 그걸 태블릿PC 카톡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유라고 하죠. 공유. 공유하니까 도깨비 생각이 나요. 공유. 공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했다고 갑이 되면 안 돼요. 전도 받았으면 이거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의 배후에서 하신 분은 주님이시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 진적도 없다. 내가 한 것은 복음이지, 성령의 나타남이지, 나의 말로, 지혜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주께서 당신을 사용했습니다.” 언제까지? 복음이 나올 때까지. 안 나온다? 입 싹 닦고 돌아서야 해요. 돌아설 수밖에 없어요. 돌아선 줄 알았는데 1년 뒤에 또 나오더라 또 돌아오면 되거든요. 항상 우리는 말씀으로, 복음으로 이미 완료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지, 사람 따라 가면 안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서사적인 그 이야기를 우리가 같이 보았습니다. 시작한 것, 마지막,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역할을 이렇게 맡겨 주셨사오니, 가벼운 마음으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이 소경된 자, 귀머거리 된 자, 역할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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