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61014b (심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해결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 아버지가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왜 아들이신 예수님께 다 맡기냐는 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심판하시면 되는데 왜 아들에게 맡기느냐?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왜 그래야 되는가? 왜?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심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심판이 뭔가 알려주기 위해서, 세상을 먼저 심판하신 것이 아니고 자기 아들을 먼저 심판을 해버렸어요. 심판의 원형, 심판의 모델, 죽음의 원형, 죽음의 모델을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실 그 모든 심판을.
그래서 두 분이 하신 일이 이 세상 전부에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두 분이 하신 일이, 그 일어난 관계가 구체화 된 것이 이 현실세계입니다. 이 현실세계 그 어떤 것도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에 있었던 계획에 대해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계획에 의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뭐냐 하면 바로 사탄이 꼭 필요해요.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뱀의 후손이 없으면 여자의 후손도 의미가 없어요.
반드시 머리를 맞아야 해요. 누구한테? 여자의 후손한테 정수리를 얻어맞아야 해요. 그리고 뱀의 후손은 반드시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뜯어먹어야 해요. 그걸 공격해야 해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고, 물었을 때 뱀의 후손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고, 뱀의 정수리를 칠 때 비로소 여자의 후손의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들의 실생활과 일상생활 하고, 신곡시장에서 콩나물 파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는 것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우리 인생은 내가 뭘 노동하면 이것이 나에게 밥벌이가 되어가지고 그저 한 평생을 그럭저럭 밥 먹고 사느냐, 그게 우리 관심사에요. 그게 관심사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제 늙어 죽게 되면 죽어서 어디에 갈지, 굉장히 궁금하거든요. ‘죽어서 어디 갈까?’ 생각하다가 ‘그럼, 죽은 자들이 한데 모인 곳이 있겠지. 집합하는 장소가 있겠지. 그럼 장소가 어디에 왜 있을까? 아! 거기서 심판이 있을 거야. 그럼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지? 그렇지! 이 땅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결정될 거니까, 그래 지금부터 업業을 많이 쌓는 거야.’
이걸 복을 짓는다고 이야기해요. 적어도 불교에서 보살쯤 돼야 이런 용어가 나와요. 복을 짓는다. 복을 만들어낸다. 설립한다. 그런 이야기를 불교신자들이 해요. 왜 자꾸 도와줍니까? 우리 좋아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도와주게 되면, 이게 업이 쌓이게 되면, 업은 마일리지라서 자기가 못다 쓴 업은 후손들에게, 자자손손으로 그 성과가 혜택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가 평소에 덕을 많이 쌓게 되면 그 혜택은 자손이 계속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의도가 뭡니까? 결국은 그 의도가 심판을 희석시키고 심판에서 면제되겠다는 몸부림이죠.
근데 제가 방금 불교이야기 했지만 기독교는 안 그렇습니까?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왜 나갑니까? 지옥가기 싫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그럼 지옥가기 싫다고 하면 지옥 안 보냅니까? 교회 나와서 아부 떨면 천국 보냅니까? 이게 전부 다 교회 오든 가든 누구 생각이냐 하면 본인에게서 나와서 본인에게 되돌아가는 생각들이죠. 모든 사고방식들이 이런 생각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개인주의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는 개인주의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이 그대로 반영하는 겁니다.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낼 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심판을 먼저 받아버립니다. 먼저 받거든요. 제가 방금 먼저라는 말을 했어요. 먼저. 일찍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참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왜냐하면 구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신약 있고 신약 좀 지나가면 십자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구약보다도 늦게 온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근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찍 죽임을 당했다는 말, 일찍 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시간을 초월해서 이미 죽임을 당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죽음에 넘기고, 그 다음에 죽은 아들을 아버지가 되살림으로써 하나님이 내뱉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아들을 통해서 성취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놓은 계획입니다. 이게 창세기 22장에 나타나있죠.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는데,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둘이나 셋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독생자 이삭을 죽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죽이는 대신 숲에다가 수양을 미리 준비해서 그 수양하고 바꿔치기 해가지고, 이삭을 어떤 아들로? 이미, 이왕에, 일찍 죽임을 당한 아들로 간주해서 살게 하는 거예요.
그냥 태어난 이삭과 아버지한테 죽을 뻔 했다가 태어난 이삭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그냥 살아있으면, 그냥 존재하게 되면, 이삭이 죽음을 언제 경험하게 되느냐 하면, 이것은 나이 많아서 죽을 때, 그때 죽음을 경험하게 돼요. 이거는 일찍 죽임을 당한 그 죽음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 죽을 때 십자가 믿을까요? 일찍 십자가 믿을까요? 사실은 이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성령이 십자가를 앞장세워 와버리면 이거는 일찍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는 일찍 죽임을 당한 자가 돼요.
살아있어도 이미 십자가 안에서 살아있지, 사실은 십자가 밖에 나가면, 십자가 없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게 구약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과 이삭 사건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겁니다.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말은, 모든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과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일이 반드시 재현되어야 해요. 한평생 가운데서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야 돼요. 그럼 목사님, 우리 아들 잡아야 됩니까? 근데 다행히도 우린 딸이 있기 때문에 좀 낫긴 나은 것 같은데, 딸은 안 받으니까. 여자는 안 받으니까. 그럼 남자 있는 자식은 죽어야 됩니까? 하는데, 십자가가 그걸, 우리를 대신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걸로 간주가 돼요. 결국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에게 있었던 그 정보가 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장되어 있을 때만 이게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미 영생 얻은 자가 돼요. 목사님,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가 내뱉은 언약을 위해서만 일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위해서.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속에 있는 뜻과 마음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냈고, 이삭을 통해서 나타냈고, 야곱을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다 자기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했으니까 잃어버렸고, 이삭은 자기가 믿었던, 자기가 복 주려고 밀었던 자식은 저주를 받아버리고, 자기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밀지 않았던 야곱이 장자가 돼버렸죠. 이거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삭의 생각을 거부한 거예요.
이삭 생각을 거부한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저주받는지, 저주받고 구원받는 거기에 대해서 인간의 뜻이 가미될 수 없고 섞일 수가 없어요. 본인의 뜻이. 야곱은 여러분이 아시죠. 야곱의 아들이 죽은 이유는 유명하잖아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이 누구였죠? 요셉이에요. 옷도 특별하게 베옷, 채색 옷을 지어줬어요. 근데 그 베옷에 피가 물들 줄이야! 물론 그게 짐승의 피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짐승의 피로 믿어지지 않고, 죽은 사랑하는 자기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의 피라고 처절히 믿고 자기에게 이미 요셉은 죽은 자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약의 지평에서, 구약의 평지에서는 결국 뭐냐 하면 사람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끝났네.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그 죽으면 끝난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 경계선의 범위가 넓어졌어요.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주의 일은 멈추지 않고 주의 일은 계속된다 이 말이죠.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탁구대가 있는데 이쪽은 산 자, 저쪽은 죽은 자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살아 있을 때 하지 죽은 자는 찬양하지 못한다는 시편115편에 17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죽은 자는 소용없고 살아있을 때나 잘하자, 라고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으신 가운데 살아났죠. 그러므로 말미암아 여기 탁구대 경계선이 없어졌어요.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든 자의 주가 되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죽은 자가 도리어 이쪽에 범람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넘쳤다고 생각해봐요. 죽은 자가 넘치는 거예요.
이걸 캘거리강의에서 그림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완료를 하고 난 뒤에, 완료된 상태에서 이미 모든 게임이 끝나고, 끝난 그 이후의 상태가 성령을 통해서 이 지상에 덮쳐버리면, 역사 위에 묵시가 덮치는 양상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되냐,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이 되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뉘앙스가 무슨 뉘앙스입니까? “시험 끝났는데?” 이런 뜻이에요. “저 대학 입학시험...?” “아이고, 야! 합격자 발표 났어야. 벌써 끝났어. 합격자 발표 났어.” 이거라 말이죠.
합격자 발표 났는데 그 당사자에게 통보는 누가 와서 합니까? 성령이 와서 통보해주는 거예요.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대. 끝” 근데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다는 통보는 받는데, 주께서 너를 미워하신다는 통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줘도 사람들이 거부해버려요. “아니, 나는 못 믿겠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통보를 이렇게 합니다. “주께서 너를 이미 저주하기로 작정했었어.” 라고 온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자가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그게 로마서 9장 3절에 나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주께서 하신 일이라면 내가 수용하겠습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을 챙기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이 구원은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였음을 받아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구원은 나한테 구원이 온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심판과 구원 작업이 이미 주님께서 실시하고 있음을, 그 주체자가 주님임을, 우리가 아님을 인정할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안 믿는 거예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관여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주체자가 되는 그 결과물로서 우리는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연결된 상태에서 보는 거예요. 왜? 나는 죽은 자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에게 니는 구원받았다, 니는 지옥 간다, 라는 이러한 평가는, 그거는 의미 없고요.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티를 내게 되어 있고, 저주받았으면 저주받은 티를 내게 되어 있지, 내가 구원을 소지하고 저주를 소지하는 그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소지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의 우리를 소유해야죠. 주님이 우리를 소유해야지 왜 우리가 주님을 소유해요? 어디 뭐 셰퍼드처럼 부릴 일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도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꼼수를 쓰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지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이거는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것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에게 이것을 믿게 하셨군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문장, 이 말씀이 내 인생을 통해서 이 말씀을 늘 확인시켜 주는데 참여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직업이 세리냐, 창녀냐, 고아냐, 과부냐, 하는 것은 전혀 우리한테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거지가 되던.
안양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런 점을 확인하는 방법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확인하는 방법을. 아까 디모데후서 4장 2절 할 때도 했지만, 거기 디모데후서 4장에 나오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죠. 한 사람은 바울이고 또 한 사람은 디모데죠. 맞죠? 뭐, 두 사람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뭐 대단한 재벌쯤 됩니까? 뭐, 세상적으로 부러워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까? 별로 없죠. 사도바울은 장가도 못 간 사람이에요. 자식이 이쁜 것도 몰라요. 9개월 돼서 기는 것은 구경도 못했어요. 뭐, 사도바울에게 부러운 것이 있어요? 전혀 부럽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내세워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니가 니 상태를 그냥 복음으로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라는 말은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너를 갖고 다니신다 이 말이거든요. 다니시면 그때가 바로 복음 전하는 때가 되는 거예요. 왜? 주님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로마서 5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심판을 자기가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셨습니까? 왜 맡기셨는가? 이 질문 자체에 대해 언약을 이루는 그것이 주님의 목적이라고 이렇게 대답한다면 바로 그게 정답이 됩니다. 언약 상대자가 누구밖에 없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아들이신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냥 아들이 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당사자가 진짜 아들입니다. 그러면 이루었다, 안 이루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정하느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것도 우리가 죽는 죽음은 사망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망이 사망이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이 영생이고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증거 하라는 말이 그거에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이거에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의 의 때문에 살아났다는 겁니다. 거기에 해당되는 죄와 의라는 개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죄, 의, 개념하고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에 그렇게 단어를 붙인 거예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태를 의와 죄, 거룩, 사랑, 이런 걸로 해서, 거기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의미를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예수님께서 어디서 뽑아내는가, 이것은 요한일서 할 때 했죠. 어디서 뽑아내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몸에서 뽑아내요. 예수님의 몸에서.
몸에서 뭐가 나왔느냐, 물이 나왔고 피가 나왔고 성령이 나왔는데,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 그러면 성령, 물, 피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뭘 증명하겠어요? “예수님이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모든 언약을 이루신 주님입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제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치고, 슬슬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만약에 배가 고파서 갑자기 빵이 먹고 싶었는데, 아무도 안 본 것 같아서 빵을 하나 훔쳤습니다. 이게 복음적일까요? 복음적이지 않을까요? 안다고 치고 묻는 겁니다. 성도한테는 이게 복음적입니다. 왜 복음적이냐 하면 성도의 눈에는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일하시고 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봤죠.
그렇게 되려면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성도 본인이 왜 주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가담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이루는 것이 목적인데, 그 이루는 목적의 언약대상자는 누구밖에 없었다?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유일하게 새 언약의 완성입니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고 했거든요.
예수님이 살과 피를 제시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몸, 살과 피만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살과 피, 몸은 원하지 않아요. 백날 수혈해봐야 그거는 주의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는 행위 하나 자체가, 우리는 도둑질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보잖아요. 내가 물건 훔치면 나쁘다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생겨서, 어디를 경유해서, 어디로 나온 결론이 나쁘다는 겁니까? 내가 빵 훔치는 것이 나쁘다면, 그럼 빵을 훔치지 않는 것은 뭐가 돼요? 중립이 돼요? 선한 것이 돼요? 선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선할 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뭐가 나쁘다, 선하다, 라는 말은 뭐를 포기를 못하는 겁니까? 선악적인 지식을, 선악체제를 때려 죽여도 나는 못 버리겠다고 고집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성도가 배고팠다, 누가 배고프게 했습니까? 주께서 배고프게 했겠죠. 근데 아무것도 없으면 되는데, 하필이면 여기에 빵이 있더라. 빵이 그냥 있더라도 사람들의 눈들이 있으면 되는데, 진짜 아무도 없어요. CCTV빼놓고는.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빵, 단팥빵을 먹었다고 칩시다. 먹었는데, 하필 그 빵 주인이 CCTV를 단 이유가 벌써 몇 달 전부터 단팥빵만 골라먹는 도둑놈이 있어가지고 지금까지 245개나 없어졌기 때문에. 돈으로 치면 하나에 천 원씩 하면 이십사만 오천 원이에요. 그래서 어디 한 번 걸려봐라 하고 CCTV달고 난 뒤에 한 오 분 만에 걸렸어요. 지는 처음 훔쳤는데. 지금까지 없어진 빵 값을 다 물어주게 돼버렸어요. 지금까지 니가 훔쳤다고 해가지고 억울하게 다 물어주게 생겼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요. 그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사적인 일이라 말은 못하지만. 아다리あたり,당첨됐다고 하죠.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거든요.
그렇게 했을 때에 성도가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빵을 주께서 주셨다고 보지 않고 자기가 훔쳤다고 보는, 이미 죽어버린 인간이, 죽어버려야 될 이유가, 선악체계가 배고픔을 통해서 바깥으로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거예요. CCTV보고 이야기하든지, 주인보고 이야기하든지, 배고프니까 빵이 먹고 싶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없으니까 몰래 먹었다고 생각하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 그 가책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양심의 가책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말은 내가 안 훔치면 건전한 인간이고, 주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데, 훔쳐가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 깨지게 했다. 그 책임자가 누구다? 바로 내가 그 책임자로 느끼는 순간, 뭐가 다 날아가요? 그 회로에서 뭐가 누락됐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 회로에서 뭐가 빠졌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빠져버렸죠.
그걸 나중에 와서 성령이 깨우쳐주시니까, 성령 받은 성도는 성령이 반드시 깨우치게 해요. 일련의,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하지만, 막상 배고프고 할 때는 배고파서가 문제가 아니라 저걸 훔치면 안 돼! 라는 선악체계, 기제(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라고 하는데, 메커니즘, 선악체계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미워! 자기 자신이 너무나 실망스럽고 너무나 미운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훼방하는 자는 누굽니까? 본인이 십자가를 훼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선교를 누가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선악체계를 들통 나게 하신 본인을 상대로 해서 주께서 선교를 벌이신 거예요. 이걸 빵 주인한테 그대로 전하는 거예요. “주인님. 제가 당신의 빵을 훔쳤다니 정말 나쁩니다. 25만원이 아니라 250만원 물어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나쁜 짓을 했다고 저는 착각했습니다.” 그럼 주인은 “갑자기 이 사람이 무슨 소리하는 거야?”
250만원 물어주면서도 제가 나쁜 짓 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훔치기 전에, 내 돈 내고 빵 먹어도 나쁜 놈인데, 자기 돈 내고 빵 먹을 때는 착하다고 여기고, 주님한테 영광 돌리고,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착각했는데, 막상 배고플 때는 같은 인간인데, 같은 성도인데, 어떤 때는 스스로 착하다고 착각했고, 어떤 경우에는 주님의 영광을 가렸다고 착각했고, 도대체 내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내릴 자격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뭐 할 자격이 없다? 심판할 자격이 없어요.
심판할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매일같이 나에게 반성문 쓰게 만들고, 나를 스스로 책망하고, 채찍질하고, 나를 혼내고, 니 오늘 나쁜 짓 했지? 성경 두 장 더 읽어! 자꾸 나한테 벌칙을 가하고, 오늘 예배 참석하는데 늦게 왔으니까 천원 더 얹어! 천원 더 얹고, 10분 늦으면 얹은 데다 더 얹고. 왜 자꾸 자기 자신을 곱게 가다듬으려고 하고 정돈시키려고 합니까? 그러면 햇빛이 활짝 웃고 별들이 활짝 웃습니까? 세상이 마치 나를 보고 같이 환호해주고 칭찬해줄 것 같아요?
아까 질문 다시 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그냥 지 맘대로 살았어요. 지 맘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어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마음대로 찾아오신 거예요. 그것도 역사 위에 묵시로써 덮친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이미. 옮기고 보니까 과거에 자기가 예수 믿은 사람 죽인 것도 하나님에게 뭐가 되었다? 하나님의 하나의 준비된 절차요 카페트였어요. 그 코스를 밟아야 돼요.
강도는 강도 돼야 되고, 창녀는 창녀 되어야 되고, 소경은 소경 돼야 되고, 귀신 들려야 되면 귀신 들려야 돼요. 12년 동안 귀신 들렸다고 낫게 해주니까 내 청춘을 돌려달라고 나중에 뒤에 와서 주님한테 따지면서, 내 청춘을 돌려다오! 열아홉 살 때부터 서른 한 살 까지 한창 꽃다운 나이에 귀신 들려 가지고, 올해 서른 두 살 되었는데 이제는 결혼하고 싶어도 선 볼 자리도 없고. 애기가 깨서 너무 미안하네. 너무 떠들어서 미안해. 내가 또 잘못을 했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일서에 나오는 대목인데요. 그 대목을 한 번 봅시다. 신약 392페이지입니다. 4장 18절, 사랑에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뭘 내쫓는다?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온전한 사랑이 뭐냐 하면 앞에 나오죠. 우리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 되셨다는 이게 사랑이죠.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이게 사랑이잖아요.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화목제물 이게 사랑이잖아요. 이 화목제물이 우리 내부까지 들어오게 되면 두려움을 내어 쫓는 거예요.
이런 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더욱더 계속 두려움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전파하는 종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되었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배고파서 빵 훔치게 만들고. 자식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서 자식에게 화를 내고. 부모가 자식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두렵다는 거예요.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성적이 안 나올까봐 자식한테 닦달 내는 겁니다.
성적이 안 나오게 되면, 내가 자식 잘 키웠다고 소문내고 싶은, 나에게 기대를 거는 친정엄마부터 시작해가지고 가족들이, “니 아들 이번에 몇 등 했나?” 그 물을 것을 미리 대비해야 될 거 아닙니까? “아, 이번에는 한 개 밖에 안 틀려서 학급에서는 1등 안 뺏겼는데, 전교에서는 1등 못 할지 싶다.” 이런 식으로 자랑질 하고 싶은 것을 미리 생각한다면 속이 흐뭇하죠. 그런 애가 한 개 틀린 것이 아니고 한 개만 맞았을 때, 갑자기 두려움이 찾아오잖아요.
이런 일이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돼요. 죽을 때까지.
왜? 그래야 주님만 증거 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 자기를 자랑질 해요. 나 성령 받았다. 나 그리스도 형상 본받았다.맨날 지 자랑만 하기 때문에 그거는 물과 피와 성령이 나오는 그런 바닥이 아니잖아요. 뭔가 빠졌어요. 십자가회로가 빠져버렸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원하는 새 언약이 빠져버리니까, 이거는 껍데기만 남으니까, 이거는 천국갈래도 안에 내용물이 없네. 배터리에 불났어요. 스마트폰 갤럭시7이 날아갔어요. 안 돼요. 벌써 갤럭시7이 폭발해버렸어요.
반드시 우리 안에 화목제물이 있다면, 화목제물만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뭐로 드러난다? 죄인으로 들추어지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줄기차게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순간이 뭘 전하는 순간입니까? 시도 때도 없이 복음 전하는 순간이죠.
또 예를 들게 되면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아, 이거 또 남편이 야구를 좋아해가지고, LG하고 넥센 하고 준 플레이오프전 한다고, 아까 여섯시 반에 넥센이 1대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겠다.
근데 금요일 이 저녁에 드라마 뭐 하는지 모르지만, 드라마 하나 하는 것이 있는데 남편이 야구 보겠다고 해가지고, 화가 나니까 당신은 스마트 폰으로 보라고 하면서 리모컨을 뺏었어요. 뺏고 난 뒤에, 이게 복음적으로 정리가 되어야 되거든요. 뭔가 두려웠어요. 뭐가 두려웠어요? 드라마 못 볼까봐, 본방 놓칠까봐 두려웠던 거예요. 본방 놓치면 왜 안 되는데? 본방 놓쳐버리면 친구 만날 때 이야기 할 게 없어지고, 재방은 또 언제할지 모르고. 모든 게 두렵기 때문에 화를 냈거든요.
화를 낸다는 것은 뭔가 두려운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하! 드라마를 통해서 나로 하여금 또 다시 화목제물 아니면 구원 못 받는 죄인인 것을 깨우치게 한 거예요. 그게 복음 증거 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다 보고 난 뒤에 남편한테 가가지고 “여보! 오늘 당신한테 복음 전했는데 눈치 챘나?”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니가 예수 믿는 자 답지 않고 화를 내는 거만 느꼈다.” “그게 바로 복음이야! 당신은 복 받은 줄 알아라. 그게 바로 복음이야. 십자가 앞에 죄인하고 같이 사는 것이 복음이야. 우리 다음에 또 싸우자.”
모든 되어 가는 것이 복음 전파하는 것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의 자기 소관이에요. 어떤 것도 인간에게 떼 준 적이 없고 하청 준 적이 없어요. 우리보고 이거는 니가 담당하라는 그런 업무를 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혼자 했어요. 모든 것을. 욥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심지어 끝까지 한 게 없어요. 친구를 위해서 기도한 것도 주께서 다 시켜서 한 거예요. 거기에 거부할 수 없습니다. 뭔가 거부한다는 것은 두렵다는 건데,
인간이 언제 두렵지 않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사랑 앞에서, 화목제물 앞에서 죄를 느낄 때는, 그 순간만 두려움이 없어요.
죄인인데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이렇게 되지, 아이구! 이래 되면 장차 뭐가 깨지고 뭐가 손해나고 하는 이런 생각이 든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점점 낭패에 이르게 만들죠. 모든 것을 은근히 기대했는데 기대한 족족 다 실패로 끝나게 만들어요. 계속 낭패로, 낭패로 몰아넣어버립니다. ‘아이고만 될 대로 돼버려라!’ 그 말 나올 때까지. 그게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정리할 단계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언약의 완성이라고 했죠. 이 언약이 완성됐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주가 되시면 아버지는 박수치고 계십니다. “아이고, 내 아들 참 잘했다. 참 잘했다. 모든 뜻을 다 이루었으니 너로 하여금 만유의 주가 되게 해줄게.” 하고 아버지가 만든 모든 만유로 예수님을 주로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상태가 되면 아버지는 대만족입니다.
자, 그렇게 될 경유에, 그러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마귀의 역할은 뭐냐? 악마의 역할은 뭐냐? 아까 이야기했죠. 이미 서울대 합격했는데 또 학원 다닐 필요 없고, 또 참고서 꺼낼 이유는 없잖아요. 그러면 구원받았으면 성경공부도 하지 말아야지, 왜 자꾸 구원받았다고 해놓고 자꾸 성경을 왜 보느냐 하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이 질문하는 것처럼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왜 마귀는 아직도 설칩니까?
그게 오늘 디모데후서 4장 한 번 봅시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그의 나타나실 것과,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는 거죠. 재림의 원 뜻은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그냥 나타난다는 거예요. 없는 분이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원래 여기 계셨던 분이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어디 안드로메다에 갔다 오시는 것이 아니고. 북극성에 계시다가 슈퍼맨~해가지고 바지위에다 팬티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그게 우리가 육의 몸이 있으니까 안 보였을 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서 육의 몸을 벗고 그때는 주와 함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 주님이 함께 있잖아요. 함께 있으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벌어지고, 어제도 버스사고 일어나고, 경주에 지진 일어나고, 다 주께서 일으킨 사건들이에요. 주께서 함께 하신 거예요. 이제 본색을 나타내는 그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있고, 그리고 우리한테는 마귀의 있음이 무슨 의미가 되느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은 죄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내려갔습니까? 그냥 잔소리만 하고 올라갔습니까? 어디까지 내려갔어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려갔죠. 이 자리가 뭐냐,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빌2:5). 곧 무슨 마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의 마음이 어디에서 다 완성됩니까?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예수의 마음이 다 드러났잖아요.
성령께서 이 자리를 가지고, 십자가의 자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버리면 우리는 죄의 극단까지, 죄의 마지막까지 경험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충실한 하인이 있어요. 열심히 일해야 할 일꾼이, 보조 조교가 있습니다. 조교가 누구냐 하면 욥에게 찾아왔던 사탄입니다. 사탄이에요. 얼마나 이 유격조교가 일을 잘하는지, 욥에게 찾아와서 뭘 뺏어갔습니까? 자식 열 명 다 뺏어갔죠. 또 그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욥의 대응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 사탄이 가져갔는데? 아니에요. 사탄은 하나님이 지시해서 허락한 대로만 움직이지, 지 마음대로 못 움직여요. 사탄은 피조물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사탄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져야 해요. 악마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자, 강의를 한 번 정리해봅시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들어보니까 결국 목사님 주장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이 이미 깔아놓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 말이에요? 라고 여러분에게 들려올 거예요. 그 말은 맞는데, 제가 강조한 것이 있잖아요. 언약을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맺은 언약을 위해서 그랬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말은 제가 이해하겠는데, 그 말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것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사랑을 알게 되면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다 했죠. 근데 두려움이 언제 없어진다고 했습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죠.
어느 정도 낮아질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참, 나는 인간도 아니네요.” 라고 느껴질 때, 십자가가 드러나기 위해서 죄인 되는 관계에 있었을 때에, 우리는 내가 죄인 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와요. 우리가 왜 두렵냐 하면 죄인 안 되려고 하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기어이 마지막 착함을 손에 쥐려고 하니까 두려운 거예요. 이것 빼앗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 빼앗기면. 내가 가진 힘보다 가질 수 없는 힘이 더 세요. 하나님의 성령의 힘이 더 세다니까요.
지금 9개월 된 애기라면 돌아다니면서 온갖 것 다 뜯어먹을 거예요. 이런 것이 먹는지 못 먹는지도 모르면서. 그때마다 엄마가 따라다니면서 손에서 다 떼어내잖아요. 사랑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두렵지 않는데 우리는 왜 두려우냐 하면, 십자가와 결별해버리고, 십자가가 참 고마운데, 이제는 혼자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마귀가 그런 쪽으로 우리에게 작용을 하는데 얼마나 마귀가 고마운지, 고맙다고 하면 좀 이상한데, 마귀의 자기 성질이 있잖아요. 자기 성질. 자기 성질을 고스란히 우리한테 줘요.
그게 뭐냐 하면 지고는 못산다는 거예요. 지고는 못산다. 정말 지고나버리면 자살해버려요. 복수하듯이. “이래도 내가 돈 해먹었나? 나는 이렇게 결백하다.” 결백을 증명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산에 올라가가지고 나무에 매달아 죽는 거예요. “나는 결백하다. 세상 더러워서 못살겠다. 나 빼놓고.” 그러고 자살해요. 나 빼놓고 더러워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진짜 죄인인 것을 안다면, “죽겠습니다.” 하지 않고 “고맙습니다.” 해요. “그동안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속 살려주신다면 고맙게 계속 살겠습니다.” 이래 나오죠. 죽겠다고 나오는 것은 속이 뒤집어져서, 더 이상 화딱지 나서 못살겠다고 죽는 거예요. 그게 뭐냐, “왜 이렇게 깨끗한 나를 괴롭히십니까? 신이면 다에요? 예수님이면 다가? 왜 행정처리를 잘못해가지고 저 나쁜 놈은 잘되고 나는 벌 받고, 이런 불합리와 부주의를 눈뜨고는 더 이상 못 보겠다. 에이! 죽을란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유명한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한테 사탄이 들어갔다니까요.
그러니까 사탄은 뭐냐 하면 속에서 배알(성미나 자존심)이 꼬이거든 자살해버리라고 부추기고 있어요. 너의 가치를 흠집 냈거든 하나님 앞에 보란 듯이 죽어버려라. 번개탄 피워놓고 죽어버려라. 앞으로 번개탄 값 팍팍 오를 거예요. 아마 물어보고 팔 겁니다. 그냥은 판매 못하게 만들 거예요. 하도 번개탄을 피워대싸서. 혼자 죽지 또 계 모아서 죽고. 사탄이 도와줘서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는데 항상 십자가는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소급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미리 아는 십자가는 이거는 이론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마귀노릇을 해가지고, 실컷 우리가 잘난 체 하다가 그게 깨졌을 때에 오는 그 죄인 됨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사탄이 노리는 성질이 뭐냐, 이겁니다. 우위성. 오늘 제목입니다. 참 어렵죠. 너무 어려우면 바꿉시다. 우월성. 남한테 지고는 못산다. 내가 니보다 낫다는 것. 이게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기 의. 순서 세우고 계급정하고 석차정하는 겁니다.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우선 나하고 석차를 매기죠.
어제보다 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보다 더 나은 내일. 이게 어떤 사는 보람처럼 느낍니다. 날마다 십자가로 떨어져야 되는데, 날마다 십자가에게서 멀어지기를 소원하고 있어요. 십자가? 에이, 십자가 알지. 알고 이제 남은 것은 성화하는 것만 남아있어서 이제는 보다 더 착하게 살아가지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전에는 어두움에 있었으나 이제는 빛의 자녀라. 빛의 자녀답게 살라는 그 말씀에 순종해가지고 멋들어지게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뭐예요? 결국은? 결국은 누구 자랑한다? 자기자랑.
자기자랑하면 무엇이 생길까요? 사랑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자기관리에 나서게 되면 뭐가 생길까요? 그때부터 마귀가 사방에서 끌어 모은 불뱀들이 와가지고 물어뜯습니다. “니가 이렇게 하게 되면 전보다 성적이 떨어지는데 안 되겠지? 더 열심히 해야지. 더 충성해야지. 더 헌신해야지. 더 완벽해야지.” 사람이 바짝바짝 마르거나 아니면 터지듯이 살이 찌거나. 바짝 마르거나 살이 찌거나.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폭식하거나 안 그러면 거식증에 걸리거나.
“요새 니 무슨 고민 있나?” “고민은 무슨 고민?” “고민 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표현을 못해요. 자기가 왠지 불안하고 두렵고 무섭다는 것을.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유 없이 무섭고 두렵고 떨리니까. “요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갱년기인가? 갑상선 암 조사해볼까? 갑상선인지?” 갑상선이 아닙니다. 마귀성입니다. 십자가에 가기 싫어하는 그 증상. 보다 높아지려는, 남보다 위에서려고 하는.
이 시험거리에 가장 잘 걸리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목사들이에요. 지가 가르치는 교인보다 지가 질적으로 낫다고 여기는 겁니다. 지가 나아줘야 말이 먹혀들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는 죄 안 짓고 교인들은 죄만 짓는 인간으로 보겠다는 거예요. 날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십자가 앞에서 똑같은 존재라는 것.
산 자나 죽은 자나 주 앞에서 그리스도만 주가 되면 되지, 단독적으로 내가 더 낫다, 더 못하다는 것은, 그것은 마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마귀 짓이라고 깨닫는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성도에요. 내가 또 마귀한테 말려들어가지고, 나는 니보다 낫다는, 그것이 내 안에 차오르는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해볼까? 하는 해소책으로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그런 식으로 평생을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일어나게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죄인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여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라고 감사하시면 여러분!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헛짓 많이 하고 헛수고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를 누락시키면서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던, 마귀에게 놀아났던 이 장난질을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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