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강-고후 2장 9-11절(용서)161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2장 9-11절입니다. 신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2:9-11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방금 읽었던 세절의 본문에 보게 되면, 용서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앞’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 11절에 ‘사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용서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아야만 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 용서라는 말이 의미가 있는 거지요. “내가 너희를 용서하노니.” 이 말을 달리 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희망이 없다. 너희들은 멸망의 길,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 눈에 뻔히 보인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용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용서보다 더 큰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일, 큰 일, 하지만 용서 받았으면 더는 큰 일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용서를 극대화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매사에 “세상에 이런 큰 용서가 저에게 주어지다니 감사합니다.” 이것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용서라는 말 때문에 졸지에 우리는 뭘 해도 죄인으로 규정되고 말았습니다. 네가 뭘 해도 죄인으로 규정된 것에 대해서, 그런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그리스도 앞’이에요. 이 말은 앞에 나온 용서라는 말보다 더 난해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과학이라는 것을 가지도 다 점령을 했어요. 보이는 것들은 현미경과 망원경을 들고 다 분석을 해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과학의 대상이 아닌 것은 무의미한 거예요. 옛날 서양 초기에는 과학 따로 철학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대학의 학문을 보면 뒤에다 다 ‘과학’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불러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의학, 이렇게 다 붙입니다. 좀 있으면 예술과학이 나올걸요. 예술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음악도 과학적으로. 디지털음악이 과학적인 것 아닙니까? 그리고 로봇산업도 과학이잖아요. 로봇이 신문기자하고, 로봇이 작가가 되고, 로봇이 음악가가 되고, 로봇이 화가가 되고요. 좀 있으면 로봇이 설교자가 돼요. 로봇도 은혜 받는다고 난리에요. 기도를 자동으로 해주는 로봇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의미를 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뜻이 뭐냐? 인간자체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 나왔다고 생각들 하기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기서 내가 탄생했기 때문에 내가 기껏 돌아가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안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오늘 성경 10절에 보니까 ‘그리스도 앞’이라고 되어 있어요. 미장원 앞, 빵집 앞, 뭔가 앞이라는 말을 붙일 때는 분명히 뭐가 있다는 거예요. 뭐가 있고 그 앞에 네가 서 있으라는 말이거든요. 그리스도 앞자리가 네 자리고 그리스도 자리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성지 순례할 때, 또 한국에 있는 이슬람교근로자들의 경우에 금요일에 기도할 때 그냥 아무데나 대고 하면 안돼요. 메카를 향하여 방향을 잡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하면, 보이는 것 앞에서 보이는 존재,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보이는 것 앞에서 보이는 존재로 살려면 그 보이는 것과 보이는 나 사이의 관계, 그 연결고리는 보이는 행위로만 연결이 돼요.
메카가 저쪽에 있다. 그래서 방향 바꿨으면 “알라신이여, 방향 잘 바꿨습니다. 절 일곱 번 하겠습니다.” 그 행동이 보이는 내가 보이는 행동을 취하게 되면 그 메카라는 신의 임재의 자리에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동쪽에 있습니까, 서쪽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남쪽에 있나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혹시, 그런 분은 안계시겠지만 혹시 집에서 기도할 때 지묘동 우리교회를 향하여 기도합니까? 몰라요. 서울영락교인들은 영락교회를 향하여 기도할지 모르겠지만. 수능 앞두고 갓바위 올라간다면 갓바위 믿는 사람들은 저 앞산 보고 하겠습니까? 오늘 차 비좁겠어요. 수능이 17일이지요. 집에 있어도 갓바위 쪽을 향하겠지요.
그래서 있음, 뭔가 있음을 추구한다는 것, 과학도 그렇고 그 있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현재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는 계속해서 노력하고, 열성을 다하고, 열심을 내게 되면 곧 다다를 수 있다는 거예요. 그 계신 자리에 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몸이 눈에 보이는 장소만 지정해 준다면 기를 쓰고, 악바리처럼, 온갖 노력을 다해서 접근해서 합류의 시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의 성전이라는 것은, 심지어 그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버려도 그들에게는 성전의 이미지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성전의 이미지를 버릴 수가 없어서 헤롯이라는 사람, 유대인도 아니고 이두매 사람인데, 요새 말로 하면 일본사람인데 일본사람이 조선을 정복해놓고 조선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조선인들이 원하는 단군신전 지어주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게 헤롯성전입니다.
46년간 지었어도 완공하지 못했을 정도로 잘 지은 성전, 지금도 그 성전이 있는데 그 성전은 네 구역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접수를 했던 그 세력에 의해서 후손들이 구약을 네 개로 쪼갰습니다. 십자가 갈보리언덕 구역은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이 접수했어요. 알라신을 믿는 상인들이 거기서 십자가기념품 팔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 자기의 신앙의 흔들림을 잡아주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특정지점을 고수한다는 것은 구약적발상입니다. 구약적발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을 모욕하고 헛되이 하는 겁니다. 어떤 지정된 날에 예배드리고,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드리고, 11시에 시작하는 예배는 큰 예배, 오후 2시의 예배는 피곤하거나 잠이 오면 참석 안 해도 되는 예배, 수요예배는 더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 식으로 차등을 두는 것, 그 다음에 무슨 행사든 예배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것, 제사지내는 추도예배, 결혼식도 결혼예배, 기독교신자들이 모여서 낚시하면 낚시모임 예배, 축구대회 할 때 예배, 예배에 걸쳐서 뒤풀이 행사를 하는 눈에 보이는 이 행위의 모든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모독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신약을 보고 있잖아요. 고린도후서를 보고 있잖아요. 신약인데 신약은 그렇게 어려워요. 구약부터 차고 올라와야 되거든요. 구약은 인간들이, “내가 눈에 보인다. 하나님께서 지정된 자리에서 우리를 만날 거야.” 그게 눈에 보이는 인간의 한계에요. 인간이 믿는 하나님 섬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내가 눈에 보이는 방식을 동원해서, 눈에 보이는 날짜에, 시간에 절기를 지켜서 어떤 지점에 가서 눈에 보이는 제물과 돈을 바쳐서 눈에 보이는 이벤트 잘 했다, 이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 그것은 구약에서 지겹도록 반복해서 다 한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에서 하는 것은 구약에서 다 한 것이라니까요. 그것이 예수님을 살해하게 만든, 죽게 만드는 원인이었고 동기가 되는 겁니다. 그게 구약이라니까요? 그 구약의 완성은 “나 너 때문에 죽는다.”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바보라서 그렇지 우리는 똑똑해서 그런 짓 안합니다.” 하는데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선택받은 인간들이에요.
그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속성을 다 미리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가상적인 신을 섬기지만 그들에게는 직접 하나님이 찾아왔어요. 가상적인 신은 모든 것을 용납하지만 진짜 신이 임해서 인간의 본성을 다 발췌해서 그 본성과 진짜 신의 만남에서 그들의 성전 섬김, 제사, 십일조, 십계명 지키기, 모든 율법 지키기는 실패와 실패로 끝났고 그들이 “아니야. 우리는 성공이야.”라고 우겼던 그 우김이 결국 진짜 하나님을 살해해버리는,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사태를 유발한 거예요. 그들이 남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자라니까요.
그들은 그런 짓을 하면서도 그것 외에는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교회 모여서 멍청하게 고구마나 구워먹고 있을까요? 뭐하고 있을까요? 정형에 맞는, 틀에 맞는 예배를 드리면 뭔가 푸근하고 그것도 없으면 심심하고 뭔가 허전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정당화한다는 사실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러고 있는데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대나 근거를 제출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정당하기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랐어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들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데요. 그 때 “어찌 할꼬”라는 말을 해요.
집단적으로 의견을 모아서, 합일해서, 그래서 촛불집회 해서 예수를 죽였잖아요. 예수님을 죽였을 때 자기들이 밤새도록 “없애라! 없애라!” 해서 없애버린 그 분을 진짜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앞에서, 다른 말로 그리스도 앞에서 그들은 “어찌 할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할꼬” 비로소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눈에 보이는 자신이 눈에 보이는 실적들, 업적들을 남겼는데 그 눈에 보이는 것의 극한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그 방향, 초점이 그쪽으로 모아지게 된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 있기에 행동하는 그것이, 내가 결심해서, 내가 결단을 내려서 시작한 나의 일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게 본인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어제 친척 결혼식에 갔다 왔습니다만, 사람이 거울 앞에 설 때 “네가 누구냐?” 물어본 적 있어요? 거울 앞에 서면 자기를 연출하게 되어 있어요.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반하는 것은 연출의 힘입니다. 여자는 가꾸기 나름이에요. 꾸미기 나름입니다. 남자는 그 꾸민 것이 여자의 전부라고 느끼지요. 여성들은 꾸미지 않고서는 바깥에 나서지 않아요. “곧 나갈게.” 하면 아직도 뭘 바르고 있어요.
연출한다는 그것은 내가 누구냐를 묻는 방향과 다른 방향입니다. 내가 나를 얼마나 다른 나로 구성할 수 있느냐, 그런 시도지 자기근원을 묻는 방향은 아니에요. 연출 말고, 이 위장술 말고, 가식 말고, 진짜 나는 누구냐, 그쪽을 바라보는 방향은 아니에요. 연출의 힘이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가식에 가식을 점점 더 추구시키는 겁니다. 부풀어지는 거품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연출을 할 수밖에 없고 자기를 위장할 수밖에 없는 동기, 이유, 대체 누가 그렇게 시켰고 어디서 나왔는지를 아무도 알지를 못하는 거예요. 성경은 그냥 폼으로 있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성경에 보면 악마, 악마는 영인데 그 영이 실체를 가지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실체를 사용해버린 겁니다.
인간은 물질로 되어 있어요. 흙으로 만들어진 물체입니다. 악마는 영이에요. 물체가 없어요. 물체가 없는 것이 물체가 있는 인간을 자기 앞잡이로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실체를 가꾸기만 원하고 자꾸 연출만 하지 내 영혼은 어디서 왔는지, 내 정신상태가 어디서 왔는지 자기를 물을 수 있는 의사도 없고 해답도 본인이 안 갖고 있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지난 금요일에 의존교회에서 강의 하면서 세 가지 용어를 제시했어요. 첫째는 대상보호, 두 번째는 대상공간, 세 번째는 대상해체. 이게 무슨 뜻인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을 왜 사용하는가?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 아침에 한 성도님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이 가락교회 강의하면서 실수를 했다는 겁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는 것을 비둘기가 성령같이 내려왔다고 말실수를 했다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우스웠다는 거예요.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은 실체가 없는, 물질이 아닌 영이 비둘기같이 오는 거예요. 그 출발이 영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제가 무심코 한 말, 비둘기가 성령같이 온다는 말은 시작부터가 이미 물체에 비중을 두고 시작하는 거예요. 제가 말실수를 한 거예요. 말실수를 했는데 가만 들어보니 말실수한 그것이 오늘 설교에 굉장한 보탬이 되었어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나라는 실체, 물질화 되어있는 이것부터 출발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라는 실체와 물질은 다른 것에 복무, 다른 것에 봉사하기 위한, 그래서 만들어진 후차적인 물질이고 실체라는 것을 우리 인간들은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인간이라는 물체, 이 흙이라는 것, 해와 달과 별이라는 이 모든 실체, 물체는 어떤 계획을 위해서 후차적으로 나타나야 될 것이거든요. 그 계획에 대해서 오늘 본문 1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의 계획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요. 사탄의 계획은 창세기 2장과 3장에도 나옵니다. 인간을 앞잡이로 삼아서 영인 존재인 사탄이 물질의 세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점령한 사건이거든요. 눈에 보이는 모든 실체가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 넘어간 거예요.
넘어간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보이는 것들이 넘어가 버리면 보이는 것들이 마주 보면서 아무리 의견을 내도 거기서 배후에 있는 영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기 마련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이러면 세상 사람들은 별로입니다. “성령이 어디 있는데?” 과학에 속하지 않는 것은 없는 거예요. 과학만이 이 세상에서 진리라는 거예요. 성령은 눈에 안보이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비둘기가 성령같이 온다면 그것은 비둘기라는 실체가 있으니까 “그래? 그런 비둘기가 있어? 얼마면 돼?”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사랑을 돈으로 삽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좋은 것으로 봤으면 사랑도 좋은 것으로 번역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거예요. 얼마면 돼, 모든 것을 이렇게 돈으로.
사탄의 계획은 이미 이 세상 전부가 사탄의 계획이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출발점이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소멸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해요. 죽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마땅히 눈에 보이는 것을 보호해야지요. 그래서 제가 대상보호라고 한 겁니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할 최고의 유일한 대상으로 나를 지정해 놓고 그 지정된 나를 보호하는 겁니다. 출발점이 눈에 보이는 나에요. 그런데 11절에서, “성령 받은 우리는 사탄의 계획을 안다는 겁니다. 사탄의 계획을 알고 이미 사탄의 계획에 점령당한 너희여. 눈에 보이는 너를 가지고, 날마다 연출하는 너를 가지고, 거울 보면 보이는 너를 가지고 어디 앞에 서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앞에 서라. 그리하면 거기서 하나님의 용서가 나온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용서, 그리스도 앞, 그리고 사탄의 계획,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세트로 되어 있어요. 복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복음으로 구성되지를 못합니다. 복음의 세계에 눈에 보이는 어떤 행위로 접근할 수가 없어요. 12절에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나오지요.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앞에 있는 9절, 10절, 11절이 있는 거예요.
복음이 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용서라는 것. 그런데 용서는 어디서 생긴다?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어떻게? “악마의 계획에 접수당하고 점령당한 너희여. 그래도 그리스도 그 앞에 나오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복음 앞에 서라. 그러면 세상 어떤 큰일보다 더 큰 일, 용서가 너희에게 있음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았기에 그 용서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나는 산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요약해 달라고 한다면, “사탄으로 사세요.” 이게 요약입니다. 사탄으로 사세요. 악마로 사세요. 더도 덜도 말고 악마의 종으로 사세요. 제가 이렇게 해도 사람은 악마의 종으로 안삽니다. 자기는 자기로 살아요. 내 의사결정은 본인이 한다는 거예요. 시작점이 나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나부터 시작해서 눈에 보이는 쪽으로 가게 되면 눈에 보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리겠지,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눈에 보이는 코스를 이야기해 준다는 겁니다. 여러분, 용서 앞에서는 코스가 없습니다. 용서는 일시불입니다. 용서는 석 달 분할, 이런 것은 없습니다. 한 번에 용서해요. 용서는 코스도 없고 길도 없어요. 그냥 용서가 폭탄으로 폭격하듯이 폭격해 버립니다. 그 폭격 말고 더 큰 일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탄으로 살려면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 아는 것은 구약에서 이미 보여줬는데 구약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두 가지 예를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상보호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유일하게 지켜야 할 최후의 남은 대상자로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지난 마태복음 수련회 할 때 마지막 강의를 이 내용으로 했어요. 인간은 자기신전에 경배할 뿐이다. 그 신전을 지어놓고 거기에 자기를 앉혀놓고 오직 자기에게만 고개 숙이고 자기에게만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어요. “이 참하기도 한 나야. 그동안 고생고생 하면서 열심히 살았구나. 이 훌륭한 나야. 오늘도 나는 너에게 경배를 드린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경배의 대상은 나라는 신이에요. 내가 곧 우상입니다. 대상보호에요.
그렇게 대상보호가 되려면 대상보호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 주변에 어떤 특별한 공간이 필요한 겁니다. 택배 받을 때 거울이나 깨질 그릇 같으면 그릇만 달랑 오지 않지요. 깨질 위험이 있으니까. 거기에 스티로폼이나 안 깨지도록 조치를 하지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 권력의 조치들을 밑에 깔아놓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연출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긴 권력을 주위에 깔아놓는 겁니다. 그 권력은 어디서 오는가? 똑같은 보이는데서 오는 거예요. 그게 타인이에요. 괜찮은 힘을 가진 남으로부터 안락과 안주할 수 있는, 거기서 거주할 수 있는 힘으로 예쁘게 늘 포장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여자애들이 어릴 때 보는 동화에 보세요. 백설 공주, 신데렐라, 여러 가지 동화는 항상 공주에요. 공주가 설거지 하는 것 봤습니까? 하녀들이 다 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포부에요. 나를 빛낼 수 있는 방법은 주변에 자기에게 시중드는 사람을 많이 거느리는 거예요. 그 안에서 나는 덜거덕거리지 않고, 깨지지 않고, 연약하지만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거예요.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상공간으로 하는데 그 대상공간에 필요한 것이 타인들이에요. 대상보호, 이것은 이스라엘을 보면 되고 대상공간, 이스라엘을 더욱더 확충하고 권력을 가져서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커지게 되면 감히 다른 나라가 넘보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우리를 대표해서 이스라엘민족은 구약에서 하나님마저 죽이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을 발전시켜 온 거예요. 대상보호에서 대상공간으로.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대상보호, 대상공간의 특징은 뭐냐? 거기에 용서라는 것이 없어요. 대상보호, 대상공간이 되려면 나는 가만있으면 흠도 티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무풍지대, 중성의 지역, 중립의 지역, 관찰의 장소, 나 자체에 대해서 흠도 티도 없는데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착하게 산다는 자기만의 독보적인 절대적 자리를 따로 마련하는 겁니다.
자기는 날 때부터 별 탈이 없는 존재고 항상 선을 추구하고 악을 미워할 정도로 괜찮은 성품을 가진 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사탄이 예수님께 대들었던 이유입니다. 나 천사로서 이만하면 괜찮다는 거예요. 선악도 알고. 그것을 그대로 인간에게 집어넣어서 모든 인간을 자기 앞잡이로 만든 거예요.
악마의 상징이 배포된 거예요. 계속 같은 제 2 제 3의 악마를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똑같은 복제물을 찍어낸 것이 인간들이고 그중의 하나가 우리들이라니까요. “내가 어때서, 내가 어때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용서라니? 내가 왜 용서를 받아야 돼? 바르게 사는데 웬 용서? 나 때문에 누가 죽어야 된다고? 그렇게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교회 나오는 이유도 결국은 대상공간을 더욱더 완벽하게 갖추기 위해서,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십자가를 가지고 장치를 해서 결국 그 안에 있는 것은, 복음 때문에 내가 이렇게 천당 간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배를 더욱 더 완벽하게 갖추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세례 받고 성만찬하는 그것도 그렇고. 본인이 안 다치도록 거기에 필요한 조치들을 타인을 통해서 받는 거예요. 목사를 통해서.
결국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눈에 보이는 것들, 눈에 보이는 인간들, 사탄의 하수인들이 신을 만들어도 눈에 보이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신을 만들어요. 교회에서 바자회열고, 발 씻겨주는 의식도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네. 고마워라. 이런 것 안 지켰으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니까 우리는 성의를 다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구원되겠네.”
공식을 자기가 그렇게 짰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아까 교독문에서도 읽었지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요. 그 뒤에 하는 말씀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물어요. 누가? 예수님이.
이 물음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목숨이 음식보다 더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더 중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취지를 우리는 의아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내 몸 하나 챙기기 위해서 음식보다 중한 내 몸을 위해서 살아왔고, 옷보다 더 중요한 내 몸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우리의 평소의 행동이라는 말이지요.
평소의 행동인데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우리가 뻔히 아는 것을 다시 묻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지금 너희들이 헛짓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에서 출발하는 그 몸은 사탄의 가현체, 사탄의 몸이기에 그런 몸을 위해서 내가 음식을 준 적이 없고 의복을 입힌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뭐냐 그 말이지요.
사탄이 만든 그 몸, 그 실체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몸을 바꿔야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다른 몸을 갖고 온 거예요. 너희들이 갖춰야 될 몸은 이 내 몸이다. 하늘에 속한 몸, 이 독생자의 영광에 속한 몸이지 너희들 기존의 그 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새로운 피조물 돼야 돼요. 그게 그 뒤에 나와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시는 몸이 있는데 그 몸이 궁금하냐? 궁금하면 나의 공생애를 보아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어서 사흘 만에 부활할 때까지 그 몸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 몸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비둘기같이 온 그 몸이에요. 지금 천국 가는 몸은 그 몸뿐이에요. 내가 종교적 액션을 덧입혀서 살겠다고 하는 그 몸은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의 마지막 모습이 나와 있고 열왕기하 13장에 보면 엘리사의 마지막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선지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액션, 행동으로 보여주는 선지자는 엘리야, 엘리사입니다. 이들은 성신 받은 사사와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사사가 발달한 것이 사무엘이고 사무엘이 발달한 것이 엘리사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기적선지자라고 할 수 있고 그 뒤에 나오는 선지자는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글을 남기는 선지자라는 말이 뭐냐 하면, 해도 해도 말을 안 들으니까 이미 끝장났다는 거예요. “끝장나고 난 뒤에 내가 남긴 글을 보아라. ‘우리가 옛날에 이랬다.’ 하는” 것을 문서를 가지고 고발하기 위해서 준 선지자가 문서선지자에요.
예수님의 공생애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선지자인데 나중에 예수님의 사도들은 문서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너는 남이 일로 여겼지? 봐라. 이 세상이 십자가 아니고서는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알겠지?”라고 성령께서 이 성경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하기 위해서 이 문서, 성경책을 남긴 거예요. 이 성경책 남기고 모든 선지자는 다 날아가 버렸어요. 열 두 제자는 끝나는 겁니다. 성경 남기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기적선지자 이야기입니다. 기적선지자의 끝을 보게 되면 엘리야의 끝은 불 수레를 타고 날아가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엘리야는 과연 우리가 원했던, 우리가 초빙하기를 바랐던 그 타인이냐는 말이지요. 눈에 보이는 내가 잘되기 위해서 요청한 그 타인이냐 그 말입니다. 엘리야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 선지 성도 50명이 찾았지만 없었어요.
엘리야는 실체가 있어요. 하지만 엘리야의 기능은 그 실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붙어 있는 기능이 앞당겨서 엘리야에게 들어붙은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엘리야가 되고 싶지요. 엘리야처럼 불 수레 타고 올라가고 싶지요. 불에 타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엘리야처럼 된다는 것은 엘리사가 보여줍니다.
열왕기하 13장에 보면 엘리사가 죽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거의 두 배나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어요. 그런데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그냥 죽어요. 불 수레 타는 것이 기적이냐, 하나님의 오실 예수님의 기능과 접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죽는 것이 기적인가? 엘리사 죽었을 때에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21절)
엘리사의 죽음은 부활과 영생의 기운이 빠져 나온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에 많은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가 나타났지요. 사람들은 엘리사가 눈에 보인다고 생각했고, 엘리야가 눈에 보인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눈에 보인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우리가 생각한 그 노선, 사탄의 몸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본문 보면서 “우리가 사탄이 되자.”라고 한 말뜻이 뭐냐? 우리가 출입구를, 나라는 출입구를, 거울 봐서는 모르는 ‘내가 누구냐’, 나를 아는 출입구를 하나님부터 시작하지 말고 사탄부터 시작하자는 말입니다. 악마로부터 시작하자. 악마가 나를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악마의 기운으로, 죄의 왕 노릇부터 우리가 출생했다고 시작하자는 말이지요.
출입구를 나쁜 쪽, 저주받는 쪽에서부터 출발하자 그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모든 행동을 안 받는 이유를 알고 우리의 종교적인 모든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납득을 하고 충분히 이해를 해야 돼요. 평생 죽을 때까지 나는 사탄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셔야 됩니다. 그래야 용서가 나와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할 때 법이 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법은 노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 들락거리면서 우리를 쑤십니다.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 죄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못 지킨다고, 지킬 수 없다고, 지킬 능력도 없다고. 왜? 자신이 주체도 모르니까.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요. 우리의 자존감을 건드리고.
구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언제 하나님이 사탄이 종들을 구원했어요. 구원한적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낸 거예요. 2천년 동안 교회가. 자기가 사탄으로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령이 왔기 때문에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엘리야고 우리가 엘리사입니다. 평범하게 죽어도, 평범하게 살아도. 남들 보기에 나를 연출하지 마세요. 정말 답답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건드려주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왜 타인을 원합니까? 왜 괜찮은 대통령을 원합니까? 이게 바로 대상공간이에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괜찮은 대통령으로 바꾸라는 거예요. 어제 대구에서 서울로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올라가는데 평소에 3시간 반이면 올라갔을 차가 5시간 반 걸려서 올라갔습니다.
회덕분기점에서 광주에서 차들이 올라오지요. 울산서도 올라오지요. 다 데모하러 간다고. 서울로 집결하는 거예요. 평소에 자신이 권력 속에 없다고 생각하지요. 뭔가 상황이 되면 어느새 우리가 정치적으로 놀고 있고 괜찮은 정치 안에서 나를 택배의 물건처럼 고이 안주하려는, 그 안에 거주해서 괜찮은 나를 더욱더 괜찮은 나로 빛내려는 악마적인 속성을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는 겁니다.
“나를 지켜줄 위대한 영웅 없어요? 나를 보호해줄 사람 없습니까?” 그것 찾고 있습니다. 데모해서라도 찾고 싶어요. 나를 지켜줄 영웅을. 네가 뭔데? 그런 식으로 교회 다니고, 그런 식으로 성경보고, 십자가 운운했고, 그런 식으로 사탄이 어쩌고, 하나님의 계획이 어쩌고, 복음 안답시고 그렇게 했지요. 용서보다 더 큰 일 없습니다.
김정은 이가 대통령되어도 괜찮아요. 김정은이 대통령이 되는 그런 일조차 용서에 한참 못미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시답지도 않은 것, 성도에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을 큰일 난 것처럼, 큰일 난 것 같은 그런 일을 계속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주님한테 관심 있는 척 연출을 하다가 뭐 하나 있으면, “목사님, 지금 박대통령이 하야를 해야 됩니까?” 엊그제 식사자리에서 물어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난국을 어떻게 풀어야 됩니까?” 네가 난국이에요 네가. 네 속이 난국이라, 네 속이. 늘 대상보호를 하려고 하고 안전하게 지키려고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것.
참, 살아온 것이 죄입니다. 별 짓 다하고 살고 별것 다 보고 살아가고 있어요. 놀라지 말아야 되는데 왜 자꾸 놀랍니까? 마네킹은 시류에 놀라지 않습니다. 마네킹은 좀 추워도 괜찮아요. 인간은 연출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귀해서 연출합니다. 이걸 어떻게 가꿔볼까 싶어서. 이게 실체를 갖고자 했던 악마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농락을 당했고.
국정농단이요? 마귀농단이 먼저입니다. 마귀한테 우리가 먼저 농락당했어요. 신앙생활 잘한다고요? 정치가 이슈가 되니까 거기에 관심이 더 있지요. 주께서 빨리 보내버려야 되는데 안보내가지고. 너무 오래 살아서 문제에요. 아무 큰 문제도 아닌데 주께서는 경쟁을 붙입니다. “이런 큰 일 어떠냐?” 우리는 “그게 무슨 큰일입니까? 고린도후서 2장 9절에서 12절이 중요하지요.” 이렇게 툭 내뱉을 수 있는 초연한 사람. 그게 자유 아닙니까?
처음부터 나는 사탄의 종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에 속하든, 어떤 국가에 속하든 다 나에게는 과분하고 합당한 저주의 환경입니다. 내가 꾸미려고 하는 것은 저주받아야 딱 맞는 저주거리의 민주주의, 저주의 국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내가 미국 시민이라면 트럼프 찍어버립니다. 전에도 그랬어요. 트럼프가 되어야 된다고.
왜냐하면 힐러리가 너무 점잖아요. 트럼프는 너무 개판이라 딱 우리와 닮았어요. 트럼프와 힐러리의 차이점은 트럼프는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힐러리는 연출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나를 지켜줄 괜찮은 국가를 원했던 그 자체가 얼마나 사탄이 종이면서도 아닌 척 연출하며 살아왔습니까?
진짜 놀랄 일은, 이제는 거울 앞에서만 서지 마시고 십자가 앞에서 그 피를 보고 놀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그 피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우리한테 자존심상하는 일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여러분에게 덮칠 거예요. 마땅히 깨어질 자존심이 마귀가 시키는 대로 덧입혀져 있는데 그 위장술을 벗겨내면서 기어이 우리 안에 용서라는 귀한 보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케 하심으로, 깜놀, 이런 나밖에 모르는, 나를 우상으로 나만 섬기는 내가 십자가피로 구원받다니, 하고 자기 자신의 새로운 피조물 됨을, 자기의 영적기념물 됨을 깜짝 놀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놀랄 일에 놀라지 아니하고 감사할 일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짧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한 우리가 잠정적인 세월을 살면서 부질없는 원망과 불평과 걱정으로 지내고 있는 이 사탄의 종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십자가만 증거될 수 있는 주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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