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강-고후 1장 20-22(약속과 성령)16102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20-22절입니다. 신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경에 보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어떻게 보면 인간을 약 올린다고나 할까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하신 것, 네가 이런 것들을 받은 사람이 맞아?”라고 우리에게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두 자로 기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실시할 수 있는 여기가 있는, 간절히 기다리면, 또 간절히 기도하면 뭔가 얻어지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뭔가 예상되는 멋진 것, 예상되는데 아주 신기한 것, 신기한 것인데 예상할 수 있는 신기함, 그런 것을 종교계에서나 역사 속에서 기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기적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우리 예상자체가 기적 안에 포함되기에 백프로 기적이 아닌 거지요. 말이 좀 어렵지요? 전혀 예상도 안했는데 돌발적으로 뭔가 주어질 때 우리는 깜짝 놀라지요. “이런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라고 할 때 우리 자세나 태도가 달라져요. ‘아, 세상이라는 것이 나를 위한 세상이 애초부터 아니었구나.’라는 것으로 반성이 되게 하는 기적, 그게 바로기적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그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기적을 받아야 돼.”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직도 그 문장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부인, 자기포기가 안된 상태가 녹아져 있습니다. 살기 힘드니까 죽어서는 천국 가야지, 이런 노림수 같은 것은 성경에서는 용납한 적이 없어요. 그걸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여지를 준 적이 없습니다.
구원의 여지를 준 그것은 종교계에서 사람들에게 상품화를 시킨 겁니다. 성당이나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여러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구원이 뭔지는 이야기도 안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각자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해서 청사진을 그리고 계획을 잡아서, 신께서 내가 능력 없어서 못하는 것을 전능하니까 채워주겠지, 덤벼들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한 여름 밤에 불빛을 향하여 날아오는 그 나방들은 전부 다 불전등 유리 막에 받쳐서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뭔가 구미가 당긴다는 그 말은 그들이 집합되어 있는 그것이 생각하지 못한 지옥의 실상이라 하는 것을 아셔야 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이 성경말씀 자체가 전혀 우리로서는 낯선 용어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오늘 분문만 봐도,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했는데 여기 ‘그리스도 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자체가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자기자리가 한 장소에 있으면 다른 자리에는 없는 것이 상식입니다. 한 장소에 있으면 다른 장소에는 없어야 돼요. 그것이 인간이 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제약이에요.
그런데 내가 분명히 여기 있는데 또 그리스도 안이라는 낯선 장소에 또 내가 있다는 이것, 우리의 논리가 거기까지는 끊어지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논리를 따져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시간적인 문제인데, 인간은 자기의 과거가 축적이 되어서 오늘날 현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 미래는 인간에게 오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다시 하겠습니다. 인간은 내가 여 기 있다면 옆 자리 혹은 다른 장소에는 내가 없다는 제약, 이것은 공간적인 제약입니다. 시간적인 제약은, 내가 현재를 살면 절대로 미래는 오지 않은 거예요. 이게 시간적인 제약입니다. 그런데 미래가 미리 왔다면 어떡할래요?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우리가 생각한 것이 아닌 그 미래가 미리 와있다면 우리가 과거를 근거로 해서 나의 괜찮게 되는 미래를 추구하는 미래노선과 어긋맞게 되어 있어요. 미래가 미리 와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된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는 ‘아니요’라는 말을 찾아낼 길이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하자 없이 완벽한, 완결적인 모양새로, 주께서는 이미 완성을 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미래에 있을 그 완전을 과거완료로서,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로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그리스도 안이라는, 생뚱맞은 이 표현, 우리 주민등록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우리 주소에 그리스도 안이라는 주소가 안 나옵니다. 공간적인 제약, 여기 있으면서도 그리스 도안에 또 있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납득이 안 되지요. 그 다음에 과거에 근거한 현재만 아는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 미래가 와서 “모든 것이 합당하게 이루어져야하기에 이루어졌다. 군말 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내밀 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결탁한다든지, 우리와 협조한다든지, 우리에게 이해가 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기적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완성을 시켜놓기에 그렇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이 약속에 대해서 우리는 납득이 안 되거든요. “나는 한국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삽니다. 나는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 미래 안에 삽니다.” 라는 그 고백을 두 자로 줄이면 ‘아멘’이라는 말이지요.
“아멘! 주의 약속대로 모든 것이 착착 그대로 현재화되었습니다. 아멘.”라고 할 수 있게 된 그것마저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 라고 이루어져야 될 일속에 이미 합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할 것을 지시한다는 이것은 종교시장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성당이나 교회, 기독교에서나 하는 짓이에요. 불교는 종교도 아니고 철학이니까 그냥 두고요.
사람이 할 것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노림수를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교회 나왔으니까 30배, 60배, 백배를 얻어 챙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걸 노린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노리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님의 약속의 모든 것이 예스가 되고 ‘아니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구약 때부터 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후서라는 이 신약시대의 성경에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구약에는 왜 이런 이야기가 없는가? 구약내용은 이런 겁니다. “해봐라.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저주다.” 이런 식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을 줄 테니까 네가 이 말씀대로 살게 되면 너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번창하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복이라는 것은 번창이라는 뜻이에요. “만약에 네가 이걸 안하면 소멸될 것이다.” 저주받는다는 말은 소멸된다는 뜻이에요.
뭔가 뉘앙스가 아직 여지를 남기는 뉘앙스를 구약은 갖고 있어요. 그런데 신약은 “아니야, 아니야. 너희들은 끝났어.” 그런 뉘앙스가 강해요. “너는 백날 시키는 대로 해 봐야 안 되는 존재야.”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해 봐. 잘 하면 될 수도 있을걸!” 이거하고 “해 봐. 이미 끝났어.” 확고하게 다른 이 두 성격을 쪼개는 그 유일한 기준점, 기준 되는 이벤트, 기준 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 이후를 신약, 십자가 이전을 구약. 그러면 십자가지기전의 예수님의 생애는 뭐냐? 그것은 과도기. 이렇게 구분됩니다. 십자가를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전부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예가 된다고, 다 이루어진다고 한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돼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냐 하면, 이 땅에서 십자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의 대표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서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결탁될 요소는 전혀 나올 수가 없다는 이것이 확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과거사를 개무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언제 성질납니까? 남이,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무시할 때 성질나지요. 그렇다면 그 무시하는 내용이 뭐냐? 자기가 인생을 평생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고이고이 간직한 것이 있어요. 그 간직한 그것을 자아성, 나는 이렇다는 자기의 정체성, 자기의 본질을 고스란히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나는 한평생 이렇게 괜찮게 살아왔습니다.” 사실 안 괜찮은 것은 다 떼어 내어 버리지요. 가지치기해서 다 버리고 “이것만큼은 누구한테 내놓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런 요소만 담아서 그것이 현재 나의 나됨이라고 간주하고 있는데 거기에 뭔가 무시를 당하게 되면 왈칵 화가 나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 당시까지의 모든 것, 더 나아가서 미래까지의 인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 전부에 대해서 주님께서 잔소리를 하신 거예요. 그 잔소리를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들로 하여금 죄가 있고 죄 앞에 자기를 세우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 앞에 선과 악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것은 하면 선이고 저것을 하면 악이고. 혹시 실수해서 악을 행하면 반성해서라도 선 쪽으로 나가는 것. 이렇게 자신은 객관적 자리에서 선과 악을 판단할 자리에, 죄의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두고 그런 식으로는 너 자신을 모른다는 거예요.
죄 바깥에 인간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죄 안에다 인간을 집어넣어줘야 비로소 너 자신을 안다는 겁니다. 그 죄 안에 인간을 집어넣는 방법은 죄를 더욱 더 확고히 하는 방법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나는 죄인이다.” 혹은 “나는 의인이다.” 판단할 수 있는 그 기준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거예요. 산성설교가 대표적인 겁니다.
맹세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넘어서는 거예요. 아무 맹세도 하지 말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는 그것은 지옥 갈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염려도 하지 말래요, 염려도. 그런 것 때문에 걱정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돈을 벌고 못 벌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네가 지금 부자냐 가난하냐의 문제도 아니고요. 가난한 자는 천당 가고 부자는 지옥 간다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가난하든 부자든 간에 먹을 것 입을 것 가지고, 끼니문제 가지고 염려하는 그 자체가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범위를 훨씬 넓혀 버립니다. 넓혀버릴 때 인간은 뭐가 문제냐? 구약적으로 설교한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피조물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들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창세기 1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본문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적설교에요. 구약에서 그렇게 합니다. 무슨 느낌을 주느냐 하면, ‘아하,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구나.’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있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이것인데 계속해서 무엇이 죄고 무엇이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뭘 알아야 옳게 살 것이 아닙니까?
옳게 살고 바르게 살 수 있는 여지,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여기는 그런 분위기가 구약적 분위기에요. 모든 교회가 구약적분위기라고 보시면 돼요. “여러분, 아직도 구원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목사로서 성경말씀 대로 이야기할 테니까 이 말씀 들으시고 결심하시고 이제부터는 부처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신다면 여러분의 구원은 가능합니다.”라고 목사 자기가 뭔데 이렇게 여지를 줘요.
아직도 구약시대입니다. 구원주고 돈을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공짜로 구원을 받아 챙겼으면 사람이 낯짝이 있지 헌금도 안하고 말이야. 교회를 짓고 있는데 건축비도 안내고 말이지.” 그런 식으로요.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이런 식으로.
신약에는 그거 끝났습니다. 세일기간 끝났어요.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못 돌려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 못 본받아서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이 왜 살고자 하느냐, 그게 문제에요. 왜 매사가 내가 나를 살리는 식으로 살아가느냐는 그것을 근원적으로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었는데 왜 너희들이 사는 방향은 내가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이냐는 겁니다.
나는 낮아졌는데 왜 너희들은 하늘을 향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고개를 쳐들고서. “너희들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신약에서 이런 내용을 사도바울은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안과 밖이라는 말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제가 좀 더 쉬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어로 membrane, 막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막이라는 단어가 적당하다고 보는 이유가 뭐냐? 막에 갇혀 있으면 그 막을 뚫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막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갇혀 있음’을 막이라는 한 자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을 째고 나올 수가 없어요. 마귀의 막이고, 동시에 율법의 막이고, 저주의 막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육의 막이고. 육신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선하고 싶어도 육신이 피곤하면 선한 것도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병원이잖아요. 병원에 가 보게 되면 새생명 주지 않습니다. 병원이 하는 일은 뭐냐? 막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옛생명이지요. 두자로 목숨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가져와서 다시 뒤로 돌아 갓! 병원은 옛날 목숨을 연명하고 지연시키는 것밖에 못해요. 현미밥을 먹으면 뱃살이 빠지고, 탄수화물 줄이세요, 밀가루도 통밀로 먹어야 되고 가공한 것은 안 되고, 해독주스라는 것도 만들어서 성분을 이야기하고, 내장비만이라니, 고지방다이어트가 나와서 버터 먹어도 괜찮다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소고기 먹어도 괜찮고, 온갖 것들이 쏟아지는데 뭐냐 하면, 구걸하는 거예요.
옛생명에 대한 애걸복걸, 구걸하는 겁니다. 그것 뭐냐 하면, 예수님 보기에 갇혀 있는 꼴이에요. “기껏 네가 아는 옛생명인 목숨 부지하는 그것이 네 소망이었잖아. 그것 때문에 성당에 나왔고,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왔고, 그것 때문에 절에 다니잖아. 죽고 난 뒤에는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것은 놔두고 이 땅에서 네가 네 몸의 쾌감과 행복을 추구해라.”
그 자체가 멤브레인, 막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빠져나오지 못하는 막 안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 막 안에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온전한 죄인은 아니라는 것을 유포시킵니다. 전적인 죄인은 아니고 죄는 지었지만 구원될 가능성은 있다는 식으로 자꾸 가능성을 이야기해요. 가능성을 이야기해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기적을 은근히 희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희망, 그 소망을 휘저어버려요. 말씀으로. “네가 그리스도 안의 의미를 아느냐?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된다는 의미를 아느냐? 네가 성령의 인치심을 아느냐?” 예상 못할 단어를 쏟아 붓습니다. 어떤 구원의 여지를 일체 용납하지 않아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런 구절에 여러분이 은혜 받습니까? 이런 구절로 액자 하고 싶어요?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여지를 없애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제 3의 어떤 지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지요,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마련해 놓고 그 안에 있는 자만이, 이 죄안에 갇혀 있는데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는 그 말이에요.
빠져나온 과정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그것을 안들 뭐합니까? 그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이야기니까. 어떤 수단과, 어떤 행함과, 어떤 노력을 다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만 빠져나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누구도 실패했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왜 우리 힘으로는 실패하는가를 평생토록 아는 시간들을 보내야 돼요.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 내 식의 종교적인 열성과 헌금과 전도와 선교와 예배참석, 성경공부, 이 모든 것이 왜 실패일 수밖에 없는가를, 나의 철야와 금식, 왜 이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아는 사람만이 과거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미래 속에 살고 있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선악과, 선과 악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력과 흥정과 거래를 해야 될 힘든 입장에 있습니다. “착하면 복줍니까? 성실하면 30배줍니까? 헌금하면 60배 갚아줍니까?” 맨날 흥정하듯이, 맹세하듯이, “이렇게 맘먹고 결심할 테니까 이 결심에 대해서 호응되는 보상책을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 앞에 헌신할 테니까 그에 대한 대가는 주께서 아시지요,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미완료, 미완성속에 있어요.
이 무서운 흥정과 대가요구는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가? 마귀하고 상대하는 겁니다. 마귀하고 상대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구원 안 받았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한테 보낸 거예요. 왜 우리는 구원에 실패자일 수밖에 없는가를 마귀와 대화하는 것이 최고의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하고 대화하는 그것마저도 그리스도 안의 구원 안에서는 예가 되고 합당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떤 글귀를 봤습니다. “당신이 나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나는 당신이 행한 것을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가 아니고요. 경상북도 문경시 농협 남자화장실 변기 위에 있는 문구에요. 남자가 함부로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더러 봤지만 이렇게 긴 문장은 첨 봤어요. 이게 흥정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지기전에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5-26) 사람이 숨어서 하는 일은 다 들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들키라는 이야기에요. 조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말에 조치를 해서 처신 똑바로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부자청년에게 말하기를,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오면 영생이 있을 것이라는 그 말은, 돈 가진 자가 모든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내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내 말의 그 반대로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니고 말씀이 있으면 제 3의 자리에 따로 네 자리가 확보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든 예수 말씀이든 지켜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여지를 흥정하듯이, 마귀로부터 그 행동을 닮아서 실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주시면 그것을 지켜서, 지킴으로서 구원 얻겠다는, 그래서 자기 의를 획득하고 그 획득된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 가겠다는 시도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래도? 저래도? 계속 주는 겁니다. 계속 주는데 예수님 가까이에서 받았던 자들이 누군가? 열 두 제자에요. 결국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흩어지리라. 그게 바로 예수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예’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되는 거예요.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반대로 생각한 겁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되는 줄 알고, 성령세례 받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성령세례를 왜 구합니까? 구하겠다는 의도자체가 굉장히 수상해요. 누구 좋으라고? 누구 좋으라고 성령세례 오는데? 나 여기 있는데 성령 세례가 내 앞에 있다. 성령세례가 온다. 그러면 나는 구원받는다. 아직도 영역이 나의 자리, 특별하고 특수하게 생각하는 나의 영역, 절대적인 나의 영역을 따로 고수하고 그 바깥에 성령이든, 예수든, 십자가든 내 앞에 내세우고, 내가 그것을 믿어줌으로 말미암아 그쪽에 있는 전능하신 구원의 능력을 내가 소유해서 그 소유된 능력가지고 내 구원을 따내겠다고?
마귀가 그렇게 사기 친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그게 구약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반드시 성령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약속부터 해서 성령으로 나아가야 돼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이 말은, 모든 약속은 누가 낚아채는가? 인터셉트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님이 낚아채요. 예수님이 낚아채서 예수님께서 이미 창세전부터 이런 말씀을 이 땅을 향하여 작정하시고 쏘아댄 거예요. 그래서 중심은 뭐냐? 창조가, 시작이 중심이 아니고, 시작점이 아니고 예수님이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시작점이 처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지막 때가 천지창조의 시작점이에요.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가 맞닿은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약속을 하고 난 뒤에 21절에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줬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주시기 전에 먼저 정리정돈하신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의 실현의 과정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우리의 요청 따라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겁니다. 요청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그냥 집에 있든지 알래스카에 있든지 간에 성령이 거기에 가게 되어 있어요.
성령에 가게 되어 있으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그것이 미래거든요. 그 미래 안에는 그 시작부터 모든 것이 함께 한 세트로 들어 있어요. 내가 이런 희한한 이야기를 여기서 꼭 해야 되는지. 정말 희한한 이야기에요. 진짜 누가 들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느낌이 들 거예요.
성경이 원래 그렇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쉽게 말해서 이 대구 땅이 불심판 받는다고 롯이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어요. “장인어른! 우리 상대로 농담하지 마세요.” 롯은 지금 진담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농담으로 들었어요. 롯에게는 왜 그것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냐 하면, 롯은 미래를 알고 있는 천사와 만나서 미래 속에 있거든요.
이미 대구 땅은 불심판 되고 난 뒤의 정경으로 보고 진정성 있게 지금 사위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빠져 나오너라. 뒤돌아보지 말고.” 그럴 때 사위가 못 빠져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의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과거를 일거에 개무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무시를 당하면 화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화가 난다는 것은 개무시를 당했다는 것이고 그 개무시당한 것이 십자가사건을 유발시킨 거예요. “네가 뭔데 우리의 모든 업적과 성실하게 살아온 인생자체를 짓이기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미 구약 때부터 이런 심판사건과 더불어서 세상 자체가, 전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토대위에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여기 있다면 저기에는 없다는 공간적 제약으로 살아가는 그것도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을 이미 구약에서도 조금씩은 퍼붓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 약속이 있고나서 그 다음에 성령인데 약속이 뭐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경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드릴 테니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해 보세요. 시편 114편 2절,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졌는데 북쪽 나라를 이스라엘로 하고 남쪽을 유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그것까지도 사전에 계획 잡혀 있는 거예요. 유다가 하나님의 성서가 된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성소를 따로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5장 17절에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에 천국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성소를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 성소는 인간들이 찾아가면 되겠네요?
그 성소는 없습니다. 이 땅에 천국은 없습니다. 없는데 생겨요.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 냅니다. 내년 1월 둘째 주에 대전에서 하는 십자가마을수련회에서 골로새서를 할 것인데 제목을 정했습니다. <복음의 생산> 이 땅에는 천국이 없어요. 하늘도 없어요. 하늘과 땅 자체가 전부 다 천지창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이고 땅이고 다 날아가 버립니다.
없어요. 없는데 생깁니다. 뭘 통해서?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전쟁을 통해서 생깁니다. 그 전리품이 뭐냐? 하나님의 성소가 돼요. 우리가 하는 전쟁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로 막 안에 갇히게 만든, 아무리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선악과 따 먹으라 할 때부터 우리 인간에게 찾아왔던 악마의 그 공간이 있어요. 악마의 성소지요.
마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이 세상은 악마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악마를 섬기는 성전이라는 말이 뭐냐? 그 성전의 교리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된다. 사는 것이 남는 것이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천국도 행해야 얻는다. 돈도 행해야 얻고 사는 것도 네가 꼼지락 거리면서 얼마나 열심히 행했느냐에 따라서 잘살고 덜 살고가 결정된다. 거지는 지옥가고 부자는 천당 간다.
이것이 이 세상 원리입니다. 끊임없이 인간은 살아 있기에 더 살아야 된다는 욕망을 본인이 발휘하게 되어 있고 그 욕망은 본인의 힘으로 저지할 수가 없어요. 정 살기 힘들면 나중에는 자살까지 해버립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내가 살고 싶은데 세상이 안도와주니까 죽고 싶은 거예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줄을 몰라요. ‘내가 왜 살아야 되지? 내가 그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을 할 줄을 몰라요.
왜냐? 자기는 십자가 안, 그리스 도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마저 자기 바깥에 세워놓고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 양반을 믿을까 말까? 믿는 척 할까 말까? 교회 나갈까 말까?’ 판단은 본인이 하고 결정도 본인이 하고 선택도 본인이 해요. 내 자리는 포기 못해요. 사나 죽으나 내 것은 내 것이라니까. 그러니까 힘들면 면도칼로 팔목 그리면 되지요. 슈퍼가면 몇 푼 안하는 것이 번개탄이고. 테이프로 차의 창문 다 발라놓고 피우면 되니까. 그것도 혼자서 심심하면 여관방에 동호인들 불러서 같이 죽으면 되니까. 장렬하게.
그 장렬한 죽는 모습을 보면서까지 희열을 느끼는 거예요. ‘결국 나는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겠어?’ 그런데 근본적인 질문을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과연 내가 나를 챙길만한 자격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내 바깥에 세웠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안에,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사용되는 그것마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것,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본성상 강력하게 거부하지요. 왜 예수님은 나를 개무시하느냐고.
신이면 다냐는 말이지요. “신이면 다냐? 만들었으면 다냐? 나는 살려고 애쓰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살려고 하는 이 의지마저 짓뭉개려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신앙자랑이 뭐예요? 신앙 자랑하는 그 꼬락서니, 간증하는 꼴이 뭐예요? 살려고 애썼는데 주께서 도와주셨다는 그거잖아요. 그게 마귀간증이지 무슨 신앙 간증입니까?
“주여! 나는 살 가치도 없었습니다만 주께서 주님의 복음증거하기 위해서 꾸역꾸역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게 진짜 고백이에요. 우리는 맨날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름철 7월에 제일 약 오르는 것이 뭔지 알아요? 장마철이라고 기상대는 이야기했는데 비가 오지를 않아요. 더 약 오르는 것은 먹구름이 항상 끼어요.
먹구름이 끼고 바람은 부는데 비가 안와요. 장마철인데. 6월말에서 7월에 걸쳐서 장마철인데 비가 오지를 않아.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안으면 짜증나잖아요.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해 놓은 입장에서. 기상캐스터가 비가 온다고 분명히 했는데도 비가 안와.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그거예요.
은혜 주신다고 해서 궁둥이 빼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냥 기다리는 거예요. 행여 줄까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행여 줄까 싶어 또 헌금하고 봉사하고. 그래도 안와. 그걸 가지고 사자성어로 마른장마라고 해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추적추적 매일 같이 사랑의 비를 흠뻑 받고 있습니다.
물에서 건져낸 미역줄거리. 물에서 건져내면 물이 막 줄줄 떨어지잖아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줄줄 떨어져요. 이렇게 살아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뭐기에 아직도 안 죽게 만들어서 이렇게 고생고생, 진즉 데려가시지 무슨 낙이 있다고, 무슨 솜씨가 있다고 아직도 안죽이시고……, 연세 많으신 두 분 계신데 미안합니다만, 아직도 안 죽이고 추적추적 용서가 뚝뚝 떨어지고, 어디를 가도, 어디에도 걸치면, 지묘동에 있으나, 미국에 가나, 서울에 가나, 어디를 가도 그리스도의 용서만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또 실패자, 또 실패자로 느끼게 하는 이 은혜, 고맙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 은혜, 이것이 바로 성도의 고백입니다.
물에 젖은 미역줄거리처럼 흠뻑 주의 사랑을 받은 것을 우리가 늘 느끼려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매일같이 실패해야 돼요. 내가 할 전쟁이 아닌데 내가 시작하는 전쟁,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마귀야, 오라. 한바탕 붙어보자.’ 하는 식인데 이것은 돈키호테입니다. 풍차가 무슨 적인 줄로 알고 기사복 입고 풍차에게 달려드는 이 미친 인간들.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해요. 하나님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잡고 있는 뱀의 후손과 전쟁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 그 열매로, 아무 대가없이 천국의 생명나무를 그냥 허하는 겁니다. 허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 저 남자는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 하는 것처럼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저 인간은 내 성소다. 나의 유다며 나의 영토 이스라엘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인치심, 도장을 팍 찍어주는 거예요. 인감도장을. 우리 안에는 이러한 성령의 인감도장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이것이 신약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십자가에 죽어야만 가능한 것,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너는 약속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든 존재”라는 것으로 도장을 꽉 찍어버립니다.
도장 찍으면 소유권이 달라져요. 내 인생에서 내 소유권은 없어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권이 되어서 이제 우리의 남은 것은 오직 우리 인생이 스스로 얼마나 실패할 수 있느냐는 그것만 보여주면 돼요. 이제부터 실패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실패하는 방법은 선악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착한 일 하면 복 받겠지.
그 착한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 본받고,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열심내서 하나님을 섬기고, 충성봉사하고, 영광 돌리는 그 일을 여러분이 도모해 보세요.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반드시 주께서 실패로 마감되게 해 주실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가 은근히 세상을 따라 좋아하는 그 돈과 명예, 세상권세를 얻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거룩을 빙자해서 내 썩어질 육체가 은근히 외치고 있는 그 욕망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얻어내고자 하는, 그것을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은근히 얻어내고자 하는 꼼수쟁이, 얄팍한 가식쟁이, 그런 것으로 평생을 우리가 지탱하는 이것마저 그리스 도안에서 예가 된다는 것, 그런 과정은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는 이젠 남은 과정에 그런 실패의 과정이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간파하시고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캘거리 강의 마지막 시간에 그런 연기를 했지요. 자기 죄 때문에 흐흑흑흑, 울다가 흐흑흑흐하하하하하하! 웃으라는 말이지요. 울다가 헤헤헤헤, 하면서 이것마저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마음껏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마귀와 단짝이 잘 되었습니다. 죽이 잘 맞았습니다. 이것 지키면 내 것 주시렵니까, 이것 지키면 내가 원하는 소망 이루어주시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저희들인데 주께서 막대개로 휘저어주시고 추적추적, 모든 것을 긍휼과 용서의 미역줄거리 되게 해주시는, 이 죄에서 막 빠져나온 자유함이 우리의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