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강 – 고후 2장 1-4절(사도의 근심)161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2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2:1-4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냥 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사도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무슨 소리인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근심 이야기 했다가, 기쁨 이야기 했다가, 너희가 나왔다가.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성경을 볼 때에 사도가 어떤 심정, 어떤 상황에 있기에 혼자 중얼거리는 말처럼 들리는 이런 이야기, 앞뒤도 없이 보이는, 분명한 용건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핵심이 보이지 않고 구시렁거리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 복음은 이렇습니다, 복음은 저렇습니다, 외우세요, 잘 기억하세요, 이걸 기억했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심판 할 때 갖다 대시면 합격합니다, 이런 식으로 학원에서 족집게강사가 문제 가르쳐 주듯이 복음을 언급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복음이 이론 적으로 머릿속에 지식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고 사도의 삶으로 파급이 되어버리면 그 복음이 파급되는 그 현장에서 근심이라는 양상으로, 걱정이라는 양상으로, 모든 인간세계에 복음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근심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복음을 알아, 라는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너희들 때문에 근심하고 있어, 라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사도에요.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 종이라는 것은 자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주어지는 대로 살아야 되고 자기의 사견이 아니고 주의 말씀으로 드러나야 돼요. 이게 열두 사도로서 그 시대는 끝이 납니다.
그 뒤에 도사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 성령 받았다고 해서 신의 계시라고 주장하는 시대는 사도 이후에는 더 이상 없습니다. 사도가 있는 것은, 사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반복될 모든 진리의 내용은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확정짓기 위해서 사도가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이지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보면, 내가 한 말에서 더 보태거나 빼는 자에게 생명나무는 없다, 생명나무는 구경도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서 이 사도의 근심은 개인적인 근심처럼 보이지만 복음을 지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중의 하나로서 근심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근심이 근심으로 끝나버리면 안되겠지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근심에서 기쁨으로 전환되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거예요. 뼈 고면 우려져 나오는 것이 있잖아요. 근심에서 시작해서 기쁨으로 마감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우려져 나올 때 복음이 우려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우려져 나오는 말, 복음대로 산다는 말, 하나님의 그 방식이 뭐냐? “네가 실컷 근심해라. 한도 없이 원도 없이 근심해야 돼.”
인간이 근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기대대로, 소망대로 뭔가 일이 안 풀린다는 것이거든요. 뜻대로 안될 때 “나는 이런 상황이 되고 싶습니다. 저런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것도 수상하다는 거예요. 복음이 아닌, 복음 말고 다른 노선에서 은근히 고대했던 어떤 세상영광이 되는 겁니다. 자기자존심일수도 있고요.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이 길이 아니네?’ 인생을 살면서 ‘어? 이쪽 길이 아니네? 내가 다른 노선으로 길을 잘못 가고 있네.’ 이런 것은 복음에 의한 근심이 임해야 비로소 고백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소망을 갖는다, 희망을 갖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소년들이여! 꿈을 가져라.” 이런 이야기 안 해도 알아서 다 꿈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라는 것, 내가 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 자체가 같은 동네, 같은 노선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천국 가는 길이 아닌 지옥 가는 길 안에서 꿈도 꾸고, 비전도 갖고, 소망도 갖는 거예요. 그러면 그 꿈이라는 것은 철거되어야 하고 철수 되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것도. “엄마! 나 이렇게 될 거야.” “꿈 깨라. 네가 그런 꿈을 꾼다는 자체가 네 길이 천국 가는 길이 아니고 지옥 가는 길이기에 그런 것을 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정리가 되어야 돼요.
근심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안되어서 근심하는 정도가 아니고, 처음부터 내가 소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망했고 내가 희망하지 말아야 될 것을 희망한 출발 지점 자체가 ‘길이 아니네. 내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네.’ 이것을 발각당하는 일은 복음이 능력으로 임해야 가능한 거예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개인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못 받아서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구원, 지옥 가는 것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내려준 복음이라는 기준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내놓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근심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꿈이 없어서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너희들은 왜 꿈이 없어? 남자가 되었으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그것 때문에, 용기가 없다는 것 때문에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엉뚱한 것을 왜 내놓느냐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진짜 복음을 줬는데, 천국 가는 힘을 줬는데 네가 평소에 하는 행동과 말씨와 태도 속에서는 나올 필요도 없는 그 엉뚱한 것이 왜 튀어나와? 내가 근심이 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가 “내가 너희 볼 때 참 한심스럽다. 근심된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가서 한바탕 하고 싶다만 그런다고 고쳐질 위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깨달아서 이제는 내가 이제 안긴다.” 이것이 1절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껏 기도하는 것은, 나를 근심케 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기쁨을 얻는 그 정도밖에 안되니까, 아예 내가 가지 않고 너희들이 몽땅 나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나는 너희를 볼래.” 이것이 2절, 3절입니다. 상황과 내용이 굉장히 복잡해요. “내가 가지 않더라도, 바로 그것이 너희에 대한 넘치는 사랑인 줄로 알아라.” 그것이 4절입니다.
쉽게 해서 “와! 이거 참 어쩐다? 쳐들어가서 조져버릴까? 아, 내가 참아야지.”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성질 같아서는 당장 가서 “에라! 이단들아!” 하고 싶지만 안가고 그냥 편지로 띄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고린도후서의 편지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13절 이하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해서 너희 앞에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교회 당회장이 사탄인데, 사도 자기가 보기에는 사탄인데,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나오거든요. 말로만 예수 이야기, 온천지 성령, 복음 이야기는 하는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그 기준에 의하면 이것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에요. 용어가 문제가 안입니다. 언어가 문제가 아니에요. 단어를 어떤 단어를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내용을 전혀 다른 내용으로 다 바꿔치기 한 거예요.
문제는 고린도교회가 그 사실도 모르고 그냥 아멘, 하고 받아들여서 종이 되어 있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 20절에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뺨을 치는데도 “감사합니다.” 그런 형편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걸 편지로 지적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목회를 실패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목회가 실패를 해야 복음이라는 기준이 나와요. 목회가 성공한 교회는 위험한 교회입니다. 뭐가 잘못됐어요. 몽땅 다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다 거듭난 사람들의 집합니다. 워치만 니 라는 사람이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육과 영과 혼이라는 삼분설을 말한 워치만 니의 교회를 지방교회라고 하는데 그 교회가 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끼리 완전한 교회다. 스스로 자기최면들을 걸고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 구원 못 받아요. 이것은 분명히 이야기해야 돼요. 괜찮은 교회 다녔다고 괜찮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론상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고 부활이 어쩌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세계에서 근심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구원에 인간이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뜻은 개인구원을 포기하고 오직 복음으로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마감한다는 그 사실을 구원받은 자가 내놓아야 되는데, “나 구원받았다.” 이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믿음은 선행이 아니에요.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지 선행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믿으라고 하니 믿는 선행을 하려고 인간들이 덤벼들고 있어요.
현재의 노동의 대가가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내가 바르게 살면 장차 내 미래는 환히 열린다, 이런 법은 없습니다. 이런 복음은 없어요. 한두 군데 잘못되었어야 손을 대지요. 처음부터 다 잘못된 거예요. 복음은 우리가 손댈 문제가 아니에요.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지 그것을 자꾸 내 일로 끌어당기면 안 됩니다.
내가 열심히 선행이라는 노동을 해서 그 대가로 천국 가겠다. 그것은 복음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난데없이 주님이 쳐들어와서 그냥 “사울아! 사울아!” 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뒤돌아 보니 자기의 모든 행세가 자기 일인 줄 알았더니 자기 일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주께서 펼쳐놓은 주의 일을 그냥 내 일이라고 착각하면서 인생을 그동안 살아온 거예요.
우리의 과거사,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 내가 세상을 정복하는 일이 나의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냐를 탐구하는 세월이 우리 인생이지요. 살아온 지난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운 거라는 말이지요. 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뭐가 일이 잘못되었어요. 독자적인 나만의 영토, 나만의 영역을 따로 고집해서 다른 것은 다 끌어 모았는데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남아 있으니까 어떻게 무슨 수가 없는가, 보는데 교회 가보니 십자가 걸려있고 예수 믿으라고 하니, 지금까지 착하고 선하게 살아 왔으니까 거기에 보태기로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 선행까지 해서 이제는 구색을 다 갖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으로 모자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 들고 가면 천국 넣어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천당 보내는 학원입니까? 자격증 따게 해주는 데에요? 십자가복음은 십자가에 주님 달릴 때 언제 달렸느냐, 몇 시간 달려 있었는가, 그런 지식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를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십자가를 구성하는 환경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에덴동산도 그래요. 에덴동산 전체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 주신 이유가 에덴동산 자체를 위해서 인간이 그 환경의 일부가 되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에덴동산은 인간이 살기 좋으라고 만들어놓았다고 그렇게 뱀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인간들 쉬라고 에덴동산 만들어줬다고 잘못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에덴동산의 심어놓은 선악과는 뽑아버려야 돼요. 그 위험한 폭탄을 왜 둡니까? 그것도 동산 한 가운데에 왜 지뢰를 묻어놓아요? 우리가 에덴동산의 그 환경의 일부라는 말을 잘 새겨보세요. 내가 주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 환경의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주인은 따로 있고 그 주인을 주인답게 하기 위해서 네가 어떤 책무와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선악과 따먹지 말라.” 네가 쫓겨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에덴동산이 다치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다치는 거예요.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자꾸 우리는 우리 주체로부터 출발하십니까? 이게 아주 수상해요. 우리부터 출발하는 자체가.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 해 볼게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 다음에 대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심판했습니다. 자 이러한 성경전체의 내용에서 중간부분, 대들었다는 그 일이 왜 거기에 끼어들어야 되는지 여러분이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끝!
왜 하나님의 작업은 이걸로 마감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받아줬다. 그렇게 해도 우리는 이해가 돼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대들었다니까요. 사람이 살다 보니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느지막이 나이 들어 예수 믿어서, “이제 네가 주인을 찾아 돌아오라고 해서 하나님 품에 안겨서 구원받았다. 역시 나는 기억력이 나빠. 그런데 기억력이 좋으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
이렇게 되어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일치를 시키겠는데 그게 아니고 왜 대들었다는 요소가 끼어드느냐는 말입니다. 왜 대들어야 돼요? 대든다는 말은 적극적으로 반발한다는 뜻입니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에요. 살다보니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에요. 적극적으로 대들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볼 때 적극적으로 원수로서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요소가 왜 가미되어야 되는가? 그 부분이 왜 들어가야 되는지를 여러분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출발하는 이 지점 자체가 이미 악마에 포로 잡힌 채, 악마에 포로 잡힌 채로 움직이는 아바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인간은 껍데기만 인간이지 속은 기계에요.
그걸 자동인형이라고 하는데 삐비비빅, 삐비비빅, 자동인형이에요. 뭔가 뒤에서 자꾸 시키는 게 있어요. 시키는 것이 있는데 누가 시키는 줄을 모르고, 다만 뭔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어떤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어떤 성향인가? 열심히 살 테니까 제발 내 것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 것은 건드리지 마라.
여러분이 복음으로 논쟁을 하다 보면, 삼위일체가 어떠니, 한국교회가 썩었느니, 죽 이야기를 하잖아요. 논쟁을 죽 하는 것을 여러분이 옆에서 듣든지 가만 생각을 해 보세요. 결국 딱 하나에요. 모든 논쟁이 마감되고 난 뒤에 남은 결론은 뻔합니다. 나름대로 내가 바르게 살 테니까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말라는 그거예요.
내 것 건드리지 마라. 그런데 내 것 건드리지 말라는 그것이 복음입니까? 이게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던가요? 이것 털어내고 저것 털어내고 다 털어내니까, 나는 교회를 몇 년 다녔고, 그런 것을 다 털어내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기에 그래서 생긴 내 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마지막 남아 있는 찌꺼기, 그것이 복음이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인가요?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고, 신학박사가 되고 다 있는데 그것을 다 털어내면 남는 것이, “나는 이 정도니까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 성질난다.” 그 이야기가 복음이냐는 말이지요. 건드리면 성질나는 그것이 본심인 것은 알겠는데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이냐는 그 말입니다. 아니잖아요. 아니면 배후에 악마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교회 왔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신학교수 했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목사 한 거예요.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성경 좀 아는 사람은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에 하루의 모든 행동과 삶과 정신자세의 그 베이스가 딱 깔려 있어요. ‘내 것 건드리지 마라. 내 차 뒤에서 박지 마라. 내 위는 내 것이니까 위암 걸리면 안 돼. 해독주스 마셔야 해.’ 모든 드라마나 예능프로, 그 모든 것이, 내 것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복음이냐 그 말입니다.
본성인 것은 이해할게요. 본성은 얼마든지 수용합니다. 복음은 아니에요. 본성에서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본성에서 복음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가운데 근심해야 됩니다. 근심하는 것도 사도정도는 만나서 근심해야 돼요. 주의 성령 받아서 근심해야 돼요. 성경에 기쁨이 나온다고 해서 성급하게 기쁨으로 가면 안돼요. 근심 거쳐서 기쁨 나가야 돼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아주 잘 묘사한 글이 있어서 제가 잠시 인용합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인용한다 해봐야 뻔합니다. 유행가 가사에요. 고상한 것 안 나옵니다. 권혜경씨가 부른 노래, ‘산장의 여인’의 가사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나오는데 꼭 저에게는 성경 같아요. 얼마나 노골적인지 들어보세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여기서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다고 할 때 ‘나’가 나오지요. 찾는 이, ‘너’ 나와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여기서 아주 제 가슴을 치는 것이 뭐냐? 끝부분에, 나 홀로 재생의 길을 간다는 거예요. 재생, 요 근래에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생명, 재생, 영생.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인생 뭐 있어요? 이거거든요. 왜 남이 너를 찾아야 되는데요?
그런데 이것은 이유도 없어요.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니까. 우리의 본성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다시 말해서 주변의 모든 상황은 나를 위한 환경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떤 환경의 일부가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모든 꼬락서니가 나를 위해서, 나를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있어야 된다고 누가 이야기해? 내가 이야기하는데 그 내가 누구의 아바타라는 그 말입니다.
누가 나에게 그런 심정을 줬는데 그게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그게 마귀인데. 어쨌든 배후에서 시키는 대로 “날 건드리지 마라. 나름대로 난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노력하는 인간 뒤에서 밀지 마라. 엎어진다. 난 열심히 살려고, 또 살려고 한다.” 열심히 살려고 해도 죽어요. 몰랐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결국 죽습니다.
권혜경씨가 후두암에 걸려서 죽었는데요. 이 사람이 재상의 길을 찾지도 못한 거지요. 불교신자로 살다가 죽었는데 그 사람이 다른 노래도 불렀는데 그 노래는 더 노골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잘 말해줍니다. 제목은 ‘호반의 벤치’입니다. “내 님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임일까 만나보고 싶네.” 처자의 심정을 이렇게 잘 표현한 것이 없습니다. 솔로는 외롭잖아요. 계속해서 꿈을 꾸는 것은, 나중에 내가 어떤 남자와 결혼할지, 그것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10월만 되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이런 노래 나오잖아요.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우리가 사는 영토, 나의 영역의 범위가 뭐냐 하면, 다 나를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세상에 대해서 현실이라는 말을 붙이고 살아가는데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천국이에요?
지금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우리가 어딜 가요? 우리는 이런 말을 해야 됩니다. ‘이길이 아니네? 이 길로 가면 안 되네?’ 참, 호반의 벤치 가사 더 봅시다. “무엇을 하는 임일까 만나보고 싶네 신문을 보실까 그림을 그리실까 호반의 벤치로 나가고 싶네.” 호반의 벤치로 가면 거기에 노숙자밖에 없는데 거기로 나가겠다는 거예요. “내 임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임일까 만나보고 싶네.”
그 다음에 처자들이 생각하는 것을 아주 멋지게 표현했어요. “갸름한 얼굴일까 도톰한 얼굴일까” 이 아가씨는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그거예요. 지금 솔로기 때문에. 40이 되건 50이 되건 홀로 살면 이 생각밖에 없어요. 호반의 벤치로 가면 거기에 노숙자가 앉아서 화투치고 있는데 거기 가서 뭐하는데?
사람 사는 것이 뭐예요? 이렇게 사는 거예요. 이렇게 살다가 가끔 교회 나오고. 뭐예요, 이게? 이 길이 그 길입니까? 이게 복음의 길이에요? 사도바울은 이걸 보고 답답해하는 겁니다. 근심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근심을 기쁨으로, 근심을 복음으로 바꾸어주는 내용을 이제는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 대목에 가기 전에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한 해답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네가 지금 짐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너의 짐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짊어질 짐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짐이 되느냐 하면, 이게 내 것이라고 여기니까 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안 져도 되는데 안 져도 되는 짐을 본인이 짊어지고 있어요. 왜 짐이 생기는가?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뱀이 에덴동산에 침입해서 에덴동산이 파괴되잖아요. 파괴될 때에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노린 점은 이거예요. 이제 너 자신에 대해서 네가 따로 챙겨야 된다는 그것을 최후의 무기로 삼아서 마귀가 인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환경의 일부가 되어야 할 아담이 자기 것을 따로 챙기면 자기 빼놓고는 다 타인, 남이 돼버려요. 내가 되고 남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짐이 추가가 되느냐 하면, 그 타인을 내가 해석해야 돼요. 나한테 도움이 될 사람인지 나를 공격할 사람인지 해석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확정적이지 않아서 불안한 겁니다.
저게 동지가 될지 적이 될지. 적이라고 했다가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저 타인은 항상 불안요소로 들어오는 거예요. 심지어 에덴동산부터 부부사이라도 이제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숫자로 하면 2가 되어서 남이 된 거예요. 마귀로 인하여 남이 생기고 타인이 생겼다는 그 말은 나와 타인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나만 있지 않고 남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한테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협박공갈을 할지 도움을 줄지. 아니면 도움을 주고 난 뒤에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줬으니까 지금에 와서 나를 내치면 안 되지.”라고 협박공갈로 나올지. 그런데 나라는 것이 이미 된 이상은 그 타인이 없으면, 아까 본대로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그것처럼, 남이 없으면 자신이 쓸쓸해서 살 수가 없네요.
이래저래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하는데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 남과 나 사이를 통해서, 그 속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그 다툼 속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올라옵니다. 심판기준이 올라오게 되면, 그 심판기준이 마그마처럼 올라와서 지표에 퍼지게 되면,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남을 해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곧 주님의 해석물이 되는 거예요. 해석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항상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은 내 인생을 내가 판정 내리는데 있어요. 내가 판정내리고 나를 때리고 또 나를 칭찬하고, 이런 것이 계속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느냐 하면, 나와 견줘서 비교되는 타인에게서 그 정보를 찾아낸 겁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나으니까 성공한 사람, 나는 저 사람보다 못하니까 나는 못난 인간. 자기 앞에 등장한 그 타인으로 인하여 나의 왜곡된 해석들이 쌓이고 쌓이니까 그 해석이 내 안에서 타인이 되고 남이 되는 겁니다. 내가 둘로 나뉘어져서 나라는 이름을 걸치고 있는 그 나가 나를 죽도록 패죽이고 있는 거예요. 매일같이 “죽어라 인간아! 이래도 살 맘이 있나.” 이렇게 늘 죽이고 늘 때리고 늘 벌주고 늘 책망하고.
그게 바로 마귀에요. 나는 마귀 같은 것이 아니고 아예 내가 마귀에요. 내 속의 마귀가 늘 말씀을 가지고, “말씀도 못 지키면서 이래서 영광이 되겠어? 이래서 하나님 형상 본받겠어? 십계명 못 지키는 것이. 교회도 오늘 늦게 나왔지?” 물론 늘 늦게 나오지만. 이렇게 늘 어쩌고저쩌고 하면 책임지우고, 늘 강요하고, “이런 짓 했으니 이번에 너 벌 받을 각오해. 이번 주에 너 죽었어. 수능도 며칠 안 남았는데 네가 이런 행동을 했으니 애 점수 10점 내려간다. 수능 앞두고는 조심조심 해야 하는데 과속을 왜 해? 새벽이든 철야든 기도를 해야지 왜 몸을 함부로 나대? 너 때문에 네 자식에게 저주가 임하리라.”
내 안의 마귀가 계속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선악체제를 고수하라.” 그게 악마의 외침입니다. 악마의 외침은, “네가 선악범주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름대로 바르게 살면 그것이 몽땅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어떻게 처리할까요? 이거 빼지도 못하는데.
악마가 하는 것, 선악체제 앞에서 양심대로 살려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니 제발 날 건드리지 말라는 이것이 베이스로 깔려 있잖아요. 그런데 고맙게도 십자가가 이걸 건드려줘요. 이걸 건드려준다고요, 십자가복음이. 그게 오늘 본문 4절에 나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근심하는 것 자체도 주님의 사랑의 결과물인 것을 네가 인정하라는 겁니다. 네가 근심하고 고생하고 걱정하는 것조차도 그래야 돼, 그래야 ‘아, 이 길이 아니네.’ 하는 이런 전향적인, 내 성질 더러운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서있는 이 자리, 노선이 문제가 돼요. 가서는 안 될 길, 복음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판정하느냐?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맨 날 “날 건드리지 마라.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여기서 더 강요하면 나는 자빠진다. 지금 교회 나오는 이것도 힘들어죽겠는데 더는 못한다. 더 이상 뭘 하라고 하지 마라.” 누가 뭘 하라고 했어요. 무거운 짐을 벗고 내게 오라고 했지.
주님한테 한 번 가 볼까? 가보니 주님께서 지금 피 흘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주님의 몸에는 상처, 창 자국이 있고 못 자국이 있는 거예요. 주님은 없음이에요, 없음. 우리는 가득 있음인데. “주님, 이거 열심히 했으니 훈장처럼 달아주세요. 스물 몇 살 때 교회에 헌금했고 서른두 살 때 방언했고, 서른다섯 살 때는 병 고쳤고, 봉사했습니다.” 잔뜩 훈장 들고 왔는데 막상 그거 들고 주님 만나보니 주님은 없다, 아무것도 없이 주께서는 그냥 피만 뚝뚝 흘리고 있어요.
“누가 너보고 정죄를 하더냐.” 이런 멘트를 쏟아내 버립니다. “누가 너를 정죄해? 아하, 목사들이 정죄했구나.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정죄했구나. 십자가 모르면 지옥 간다고 정죄했구나. 십자가 받아들이라고.” 그거 받아들여봐야 선행밖에 안돼요. 십자가 믿습니다, 하면 선행밖에 안되고 손들고 앞으로 나가도 선행밖에 안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계가 처음부터 고장 난 정도가 아닙니다. 안가야 될 길 지옥으로 인도하는 동작, 작동을 바라고 있는 기계를 품에 안고 있었어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아는 그것으로 천당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나 없다. 너는 많이 가졌네? 너는 많이 가져라. 나는 없다. 하와이는 네가 가라. 나는 이 자리가 천국이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게 미리 하는 최종면접시험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미리 면접시험을 치는 거예요. 예수님 만날 때 키가 180인 분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만나요. 아이고, 참!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그게 사랑이거든요. 사랑은 껍질을 벗기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가릴 필요도 없어요. 사랑하니까. ‘러브 이즈 뭔들’이라고 하잖아요.
사랑은 뭐든지, 뭔들 못해요. 너만 있다면 되고 너 이상 다른 것을 바란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너하고 살기를 원하고 이렇게 살았으면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만약에 나에게 죄를 묻는다면 너를 만났고, 너를 사랑했고, 너를 지키지 못해서 먼저 보낸 것이 나의 죄입니다.” 박신양이가 이야기했대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십자가사랑을 원하는 거예요. 사랑의 내용을 잘 들어 보세요.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심이고, 그의 살으심은 우리 의 때문에 살았다는 그 말이거든요. “내가 너를 위해서 뭔들 못하겠느냐. 내가 너의 죄 되는 것도 내 행함으로 했고 네가 의가 되는 것도 네가 한 것도 없이 그냥 내 행함으로 의인되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내 앞에서 없애버려라. 사랑이 있잖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나만이 영토, 나만의 영역을 키워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가 근심을 하는데 남의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 입장은 못돼요. 구원은 주님 소관이지 자기소관은 아니에요. 사도는, 당신 구원 받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지도 마,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분명히 주님은 사랑을 줬는데 교회라는 집단이 있다 보니까 마귀 들린 인간이 와서 사랑을 다 바꿔놓았어요.
열심히 바르게 삽시다, 하는 이런 것으로 다 바꿔놓았다고요. 바르게 살면 복 받고 제대로 못살면 매 맞는다는 식으로 자기 선악체제로 다 바꿔놓았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주의 나라의 환경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똘마니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마귀 들린 인간들은 왠지 그러고 싶어. 주님도 꺾고 싶어요.
어쨌든 간에 나는 안 다치고 싶어요. 남들 다치든 말든 간에 나는 안 다치고 싶어요. 나만 지키고 싶어요. 모자는 푹 뒤집어쓰고 프라다 신발 한쪽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저 나만은 안 다치고 싶어요. 누구 욕할 것 없어요. 만약에 우리 이모가 그랬다 치면 마찬가지에요. 누구라도 마찬가지고. 아내든 여동생이든 누가 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남이니까 욕설을 퍼붓지 나와 관련된 사람이 그렇게 하면 잘한다, 잘했다, 칭찬할 거예요. 왜? 나의 영토기 때문에. 이게 복음입니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복음이에요? 늘 주께서 반복해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근심케 하시고 기쁨을 주시고, 또 근심케 하시고 기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보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구원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환경의 일부로서, 조교로서 우리가 채택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너 같은 마귀 대장도 내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날마다 근심하고 기뻐하고, 근심하고 기뻐하고. 초림에서 재림이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미 십자가사건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서 재림이 있는 겁니다. 십자가로 다 끝냈지만 재림이 있는 이유는, 반복이라는 것, 인간세계의 그 대들고, 심판하고, 구원하고, 그것을 반복해주는 사람들 가운데 두 종류가 있지요.
한쪽은 구원받은 종류가 있고, 기쁨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날 건드리지 마라.” 하고 내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 자체가 십자가지신 취지를 마음껏 보여주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이 따로 있고 뱀의 후손이 따로 있다. 그것조차도 주님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는 환경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가 그 환경의 일부가 된 것, 주님의 환경, 십자가의 일부가 된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길이 아닌데,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복음으로 갈 수가 없지만 복음이 먼저 찾아오셔서 사랑이 뭔가를 다시 일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짐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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