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강-신 19장 6-10절(복수금지)1610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9장 6-10절입니다. 구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성급하게 아멘은 했습니다마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가 언뜻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봐야 사랑을 안다. 그냥 니가 니 자립해서 인생 잘 살 때는 사랑을 알 수 있는 기회마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말은, 고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을 죽였을 때에, 그 가족들이 자신을 살인자로 취급해서 자기의 가족을 죽였다는 이유 때문에, 끝까지 추궁해서 자기 가족이 목숨을 내 목숨과 바꿔치기 해서, 나를 죽임으로써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는 그런 세상. 이것을 오늘 본문에는 뜨거움이라고 했는데, 복수심이 발휘되는 세상, 이렇게 보는 겁니다.
복수심이 내 것 건드렸다고, 내 사랑하는 가족을 건드렸다고, 죽였으니까 니도 한 번 죽어봐라! 라는 그것이 뜨거움이니까, 뜨거움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일본 아소산에 화산이 일어났잖아요. 화산이 있다는 말은, 평소에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는 복수심이 마그마처럼 깔려 있습니다. 내 것 건드리면, 욱하면서 복수심이 폭발합니다. 아무리 10년, 20년 친한 사이라도, 내 것에 뭔가 토를 달았다 싶으면 그때 순간적으로 적이 됩니다.
독일 철학자 슈미트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은 동지 아니면 원수, 원수 아니면 동지뿐이다.”라고. 이 말은 영원한 원수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고, 나한테 잘 해주면 원수라도 동지가 되고, 아무리 수십 년 동지라도 나한테 손해 입히면 원수가 되는 그러한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질적인 도피성을 마련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꿰뚫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위에서 볼 때, ‘참 고생한다. 지옥 같은 세상 사느라고.’ 그렇게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근데, 그 지옥 같은 세상이, 우리는 괜찮은데 남들이 더러워서, 죄악 돼서 지옥이 아니라, 우리도 한 몫 일조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을 지옥 만들고 더러운 세상 만드는데 우리라고 거기서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남이야기 하지 말고 만약에 니 어린 자식이 고등학교 수학여행가서 물에 빠져봐라. 니 가만히 있겠나? 4억 5천 타고 가만히 있겠나? 아니면 매일 시청에 가서 데모 할 거냐? 니 어떤 것 할 거야? 4억 5천이, 니 자식 죽은 것에 위로가 되겠나?” 하죠. 위로 안 되죠. 위로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복수해야 겠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복수 할까요? 유병언이 죽었는데. 누구한테 복수 할까요? 근데 문제는 복수를 안 하게 되면 복수심이 잔잔해지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의 성질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 세상보고 지옥, 지옥이라고 말하지 마라 이 말이죠. 니 마음부터 먼저 지옥이야. 니 마음도 지옥인데, 뭘? 니가 뭘 깨끗한 세상에서 산다고, 주게 넘게, 주제 파악도 안 되는 것이, 지 마음도 더러우면서도 깨끗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하느냐 말이죠. 만약에 이런 정신머리가지고 천국가면 천국 다 버려놓습니다.
자식에 대한 열정이 한국 사람한테 많은데, 이민 가면 이민 간 그 동네 전부 다 학원 다 만들고요.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 치맛바람 불고 사교육 만들고 다 그래요. 자기한테 뭔가 진흙이 묻어놓고, 자꾸 가면서 진흙이 왜 묻어있지? 지가 진흙을 질질 흘리면서. 누가 자기 그림자를 떼 낼 수 있습니까? 그런 재주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폭발하는 그 마그마를 억지로, 억지로, 윤리도덕으로 맨홀 뚜껑 덮듯이 꾹꾹 눌러서 덮는데, 압력밥솥처럼 덮는데, 이거 나중에 한 버 터져버리면, 견디다, 견디다 폭발해버리면, 압력밥솥 뚜껑 다 날라 갑니다. 나도 한 성질 한다고 다 터져버려요.
방금 이야기했지만, 이 도피성이라는 것, 도피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특이한 장소입니다. 특이한 장소인데, 이 특이한 장소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서 잘 아는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도바울이 생명의 면류관을 언급하면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너를 통해서 영원한 것을 계속 발췌해 내겠다는 그런 말씀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실 때, 이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당히 기분 좋은 말씀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말씀은, 우리가 썩을 면류관 말고 영원함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는 사도바울의 이 본문 말씀이 우리한테는 무척 종교적인 부담을 줘요. 왜냐하면 인간의 착함은 이게 피로감을 줍니다. 나중에 착하다, 착하다, 하게 되면 나중에 에이씨, AC가 나와요.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봉사를 해야 됩니까? 언제까지 주 앞에 바르게 살아야 됩니까? 에이~~길게 하고 씨가 나와요. 이게 뭐냐 피로감이 누적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보면 그런 게 있어요. 큰 교회에 그런 게 많은데, 장로님들이 젊을 때는 뭔가 호기심이라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보기 위해서,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부흥사가 오면 한 결심해서 순교하는 입장으로 있는 집 전세로 돌리고 나머지는 헌금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실적으로 예배당 고딕체로 짓고, 주차장 넓혔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게 30년 전에, 40년 전에 한 번 했거든요. 하고 난 뒤에 그 목돈 낸 그 덕분에 장로 되고 했는데, 그 덕분에 자꾸 새롭게 들어오는 새 신자들, 그리고 새 교인들, 젊은 사람들을 눈 여겨 봐요. 나는 저 나이에 목돈 냈는데, 저 인간들은 목돈 얼마 낼까? 하고 가만히 지켜봐요.
미쳤어요? 돈 내게? 안 내요. 내지를 않아요. 그럼 지만 뭔가 손해 본 느낌이 들어요. 자기만 사기당하고 손해 본 느낌이 든단 말이죠. 그래서 목사를 뽑을 때는 젊은 사람들 주머니 털 수 있는 목사를 뽑는 거예요. 왜?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제는 나이60이 되고 70이 되었는데, 이제는 낼 돈도 없다는 거예요. 젊을 때 목돈 냈잖아? 이제 쳐다보지 마라는 거예요. 나, 냈다. 장립집사 너그들이 내라. 너그들이. 왜 자꾸 보냐 이 말이죠. 앞자리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것만 지적하지 말고. 니도 내 나이 돼봐. 다 졸아. 그러니까 딴 거 지적하지 말고 이제 돈 낼 차례는 너그들이 돈 내야지. 우리는 한 번 냈잖아? 이게 뭐냐 신앙적인 피로감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갖다 바쳐야 되느냐 말이죠. 한 번 목돈 냈으면 그걸 복리로 계산하면 이자도 엄청난데.
이런 피로감 때문에, 이렇게 우리한테는 생명의 면류관,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면류관이라는 그러한 이야기가 엄청 부담으로 느껴옵니다. “여러분 속에서 영원한 것을 내세요. 영원히 썩어지지 아니 할 면류관이 있지요? 있으면 있음의 값을 하세요.” 라고 무심코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는 자체가 교인들한테 뭐로 들리느냐 하면 ‘또 내란 말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원래 그래요. 말만 했다하면 ‘또 내란 말인가?’ 이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어요. 경기 날 정도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이게 바로 영원한 것은 절대로 우리의 행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마련한 이질적인 영역, 도피성이라는 영역은 이미 만들 때부터 인간들의 의견을 청종한 게 아닙니다. 괜찮은 교회 만들어줄까? 이런 식이 아니고. 지하실에 뭐 교육관 짓고, 뭐 이렇게 좋게, 좋게 의논해서 만든 그 영역, 도피성이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과 행함과 상관없이, 영원함이 계속해서 우러나오는 아주 특이한 영역이 도피성입니다. 이 도피성은 복수가 금지됩니다. 복수가 금지된다고 할 때, 기분 좋아할 그러한 파트에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기분나빠할 파트에 있는 사람도 있겠죠.
뭔가 저지른 일은 있는데,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설치는 사람이 있을 때에, 그 영토에 거하면 복수 금지니까 얼마나 신바람 나고 신나겠습니까? 그런 사람한테는 좋지만, 이미 자기 것이 빼앗기고, 귀한 것이 빼앗겼을 때에, 거기서 입 다물라! 할 때, 얼마나! 이거는 도피성을 만든 하나님한테 복수하고 싶어요. 복수를 금지한 당사자, 하나님한테 대들고 싶어요. 이게 바로 도피성을 만든 이중적인 목적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울산을 갔습니다. 울산을 갔는데, 뭐 밤이라서 차가 어느 정도 꼴아 박고 있는지 저는 안 보이지만, 하여튼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특히 갑자기 유명한 데가 태화종합시장 아닙니까? 서점한 아줌마, 아저씨, 책에 물이 다 잠겨있을 때에, 그때 저를 운전해주신 황집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와 비가 오다 마는데?” 와? 비가 오다 마느냐 이 말이죠.
그동안 울산시민이 얼마나 교만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소득이 제일 많다고, 제일 복 받은 도시라고, 교회마다 그렇게 축복받았다고 자랑질 하다가, 그 축복이 228밀리미터의 비에, 한꺼번에 그 축복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답니다. 축복은 영원한 거거든요. 영원한 것이 나오면 영원한 것이 계속 나와야죠. 뭐가 와도? 홍수가 나서 태화강이 범람하고 태화종합시장이 잠겨도 계속 나와야 되는데, 그 영원함이 228mm에 중지가 되고 말았어요. 그게 뭐냐 종교적인 피로감입니다. 한계입니다. 자기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 좋아한다고요? 아니죠. 썩을 면류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티가 나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뽑아내는데, 인간이 영원하다고 우기는 그것은 결국은 인간의 자기 행함으로써는 도저히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하다하다 보면 진짜 부아가 날 정도에요. 도대체 어디까지 빼먹을 겁니까? 시간 뺏어, 돈 뺏어, 봉사 뺏어, 뭐 목사는 주의 사자라고 하니까, 주의 사자는 곧 하나님의 말이니까. 목사가 하는 지시와 명령은 곧 살아계신 주님의 명령으로 간주한다면, 그것도 간주 안 하면 어린애 같은 믿음이라고 해서 믿음 없다고 하면 또 당하니까, 일단 그걸 믿는 척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놀아나야 되겠습니까? 바로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로 영원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이미 까발리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부자청년이 와서 하는 말이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에, 주님이 그런 소리 할 줄 알고 내가 다 지켰사오니, 아직도 내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니까 이 부자청년은 아직도 자기의 행함에서 영원이 나올 줄 알았어요. 인간의 행함과 영원함이 끊어져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행함을 통해서 영원함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열심히 해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영원함을 끄집어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거든요. 이 청년이 부자라는 것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이 말씀 듣고 깜짝깜짝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이기에 해당되니까, 우리한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음을 아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부자이기에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 다시 말해서 그 인간은 자기가 십계명 지킨 어떤 보상 같은 것으로 부자가 되었으니까, 이 부자에 대해서는, 이 부자 됨은 영원함에 속한 것으로 생각한 거예요.
주께서는 그걸 부숴버립니다. 너한테는 일체의 영원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 이럴 때, 그 부자가 근심해서 돌아갑니다. 저는 여기를 주목합니다. 주의 말씀에 근심하고 있다는 말은, 지금 주님을 상대로 보복하고 있고, 복수하고 있다고, 이렇게 보시면 정확합니다. 삐졌다 이 말이거든요. 니가 감히 내 걸 건드려? 이렇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은 영원함이나 이질적인 것을 낼 수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도피성에서, 예상 못한 이질적인 것은, 내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가만히 그냥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친구랑 나무하러 갔는데, 도끼가 나무자루에서 빠질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빠졌으면 딴 데로 튀면 되는데, 하필 친구가 맞았는데, 맞더라도 엉덩이 맞으면 전치1주라서 안티프라민 바르면 낫거든요. 하필 한방에 가버렸어요. 근데 그 친구가 형제가 한 열 명 쯤 되면 좋은데 하필 5대독자에요. 5대독자에다 결혼 한지 2개월 반됐네. 그러니까 그 마누라하고 가족들이 죽인다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뭔가 벌집을 쑤셨어요. 벌집을. 되게 억울한 거예요.
내가 안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상황에 의해서 그냥, 마치 치약 짜듯이, 누르니까 치약이 나오듯이, 주께서 눌러버렸는데 내 앞에서 어떤 낯선 행동이, 낯선 상황, 결과를 낳았을 때, 나는 그냥 있었던 치약에 불과한데, 온 욕설이란 욕설은 다 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피성으로 피해라!” “왜요?” “그것이 천국이니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우리의 겐또(어떤 일을 예상하거나 고려함)잡아서, 일본말로 겐또 잡아서, 딱 눈치 봐서 들어가면 괜찮겠다, 이렇게 골라 선택해서 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우리가 치약이라면 군화발로 팍 밟으면 튜브 밖으로 액체가 팍 튀어가지고, 튀어서 들어간 곳이 천국이다. 이런 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외부에서 악한 자가, 다 같이 악하거든요. 이 세상은 누구하나 예외 없이 다 악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다 악한데, 같은 악함이 악한 나를 때릴 때, 나는 악하면서도, 이렇게 내가 수모당할 그런 악한 짓은 안 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도피성에 들어와요. 도피성에 들어와 보니까 거기에 누가 계시느냐 하면 나보다 더 억울한 분이 계셔요. 그게 누구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죽음은 바로 죄 있는 죄인에 의한 죽음이기 때문에, 나는 죄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죄 있고. 도피성에 들어가 보니까, 그야말로 죄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 죄 있는 사람 때문에 대신 죽어야 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분이 내 앞에 있을 때에, 그 앞에서 과연 우리가, 나는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어요. 그러면 도피성 없는 곳은 천국도 없다는 이 말이죠? 없어요. 그럼 도피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겐또에요. 들어가지 마세요.
이 세상이 도피성입니다. 이 세상 전체가 이미 도피성으로 만들어져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영원함과 썩어지지 않는 면류관을 가지고 주께서 이미 이 땅을 방문했으면 도피성이 되는 겁니다.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왔으면, 그런 제사장으로 왔으면, 그건 이미 도피성 기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럼 도피성 기능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린 뭐 그런 억울한 이런 일이 왜 안 일어납니까?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주셨죠. 주셨는데, 우리가 평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못지않게 내 것 건드리면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우리가 주의 말씀을 곡해해서 이해한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나와요. 6장 3절에 보면,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른손이 구제할 때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이것이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면류관처럼 영원한 요소거든요.
근데 이걸 행함으로 지키려고 하니까 이게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오른손이 한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 아무리 도피성의 주인공으로 왔다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감을 가지는 거예요. “주님이여, 이건 못 지킵니다. 십계명은 지키겠는데, 이건 못 지킵니다.” “또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이 있다고 기도하지 마라”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이유가 없는데요. 원천으로 기도할 이유가 없어요. 기도할 때는 아쉬울 때 기도하잖아요.
근데, “아쉬운 것은 기도하지 마라, 왜, 그거는 니가 기도하나마나 내가 필요한 것만 니한테 다 주도록 했는데, 니가 그딴 것 가지고 기도 하냐?” 라고 이러면 “그럼 기도를 뭘 위해서 하란 말입니까?”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거기에 대해서 감사로 받아들일 경우는, 그거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 죄를 알 경우고.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이거는 욱하는 성질이 나와요. “주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더 이상은 주님의 말씀을 볼 마음이 안 듭니다.” 하고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성경을 안 봐요. ‘어차피 못 지킬 건데.’ 삐져서, 한참 삐졌어요. 얼굴 벌개가지고. “어차피 못 지키는 것 왜 봅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꼭 저한테 대들 듯이. “어차피 못 지키는 것을 왜 봅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교회 올 때는 왜 죄인입니까? 알라고 오라고 하는데, 칭찬 받으려고 오는 거예요. 제가 울산에서 강의할 때 이런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혼하라는 말이에요. 그 말씀이. 납득이 안 되죠. 실제로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사실 이혼상태에 있으면서 주의 말씀 지킨다고 호시탐탐 핑계거리만 노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마누라한테. 저거, 뭐로 책잡아서, 모세의 이혼증서에 사인해가지고, 하나님이여, 정식으로 이혼 청구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러니까 제 탓하지 마세요. 라고 할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판국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한 거예요.
그 말은 뭘 유도하느냐 하면, 나한테 복수해라. 너는 평소에 마그마처럼 복수하고 싶어 하잖아? 나한테 복수해. 이런 말을 남기는 나한테 복수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한 나한테 복수하고,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그런 소리를 한 나한테 복수하고, 나한테 마음껏 복수해. 원래 그게 바로 니 속에 있는 행함의 정체라 이 말이죠.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의 말씀에 대한 행함은 나중에 필요해요. 나중에는 하다하다 지쳐버립니다. “더는 못합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더니만 여기에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 육신으로는 더러 못합니다마는, 성령으로 하면 됩디다.” 이렇게 나와요. 저 거짓말! 세례요한 같으면 도끼 들고 했을 거예요. 사람이 피곤하면은 만사가 귀찮아져요. 사람이 피곤하게 되면. 웃음을 띠어도 억지웃음이에요. 그야말로 실소, 피식, 비웃는 웃음.
주께서 그나마도 약간 피곤을 덜어주니까, 좀 헤헤거리고 웃죠. 사람이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사랑하는 가족도 귀찮고, 심지어 누가 귀찮은 줄 알아요? 본인이, 본인이 귀찮아요. 본인이. 그냥 꿈쩍거려도 귀찮아요. 이 세상 환경은 이마에서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저주스런 환경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힘드니까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말씀 지킨다고 설치는 것도 당연해요. 왜?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겠다는 것은 그냥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행함을 가지고 의미를 두는데, 그게 난데없이 나무하러가서 도끼가 날라 가서 갑자기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죽인다고 달라 들어보세요. 이거 부아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그런데 그 억울한 그 순간이 닥칠 때, 도피성이 비로소 체험되는 순간입니다. 아, 복수를 금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복수를 금지한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선함과 악함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이게 원초적으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착했습니다.” “아이고, 이거는 나쁜 짓 했습니다.” 하는, 선과 악을 내가 살핀다는 자체가 이미 눈의 시선이 잘못된 데에 시선이 꽂히고 있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백날 살아봐야 스트레스 받습니다. 이거는 잘한 짓, 이거는 못한 짓, 그걸 나누지 마세요. 나누지 말라는 이 명령어도 소용이 없는 줄 알지만, “목사님. 기도 잘했어요?” 잘한 기도 없고, 못한 기도 없어요. 그냥 기도는 울며 터져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내 육신의 본성, 피곤하니까 괴로우니까, 너무 살기가 빡빡하니까, 힘드니까, 아프니까, 그냥 외침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너무 아름다운 고백으로, 경건으로 위장했다고 해서, 주께서는 그 위장을 모를지 싶어요? 니가 힘드니까 이야기했지? 청춘? 아프니까 청춘이잖아!
그처럼 인생은 아픈 거예요. 아프니까 헛짓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인간을 주께서는 주님의 아픔에 참여하기 위해서 난데없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당하게 만들어서, 주님한테 따지러 오게 하는 거예요.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하고 와보니까, 자기보다 더 억울한 분이 거기에 딱 기다리고 있어요. “니만 억울하나? 나도 억울하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런 식으로. “내가 더 아파. 니 때문에 내가 더 아파. 아프다고 나한테 짜증내고 화내는 니 때문에 내가 더 아파. 니가 쏘고 있는 화살을 내가 다 맞고 아버지한테 저주를 받은 것이다.”
바로 이 특수한 영역, 이 특이한 영역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수에 깔려서 행동하면서 퍽이나 복수 안 하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도 이제는 지겹고, 정말 스스로 짜증납니다. 주님 위장하지 말고 솔직하게 우리의 성질을 보이되,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다 쏟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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