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01강-도피성(신19;3-5) 1610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3. 20:21
2016-10-02 15:00:49조회 : 45         
   도피성 16100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도피성(신명기 19:3-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zzhsZ_1tbQ, Hit:3
 이근호16-10-02 15:51 
도피성 

2016년 10월 2일                              본문 말씀: 신명기 19:3-5 

(19: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 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19: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만한 경위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 중에 그 이웃을 죽인 일, 

(19: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땅입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경우가 없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있어 땅이란 기껏 자기네 민족의 생존을 위해 개발하거나 적응해야 될 땅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기거하는 땅은 이런 인간의 의도를 비켜갑니다. 목적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것이 다른 민족이나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이질성을 우리는 지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선 두 사람이 산에 나무라러 갑니다. 그런데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도끼날이 빠져서 다른 사람을 쳐서 죽게 했습니다. 

난처한 자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죽이겠다는 의도도 없는 상태를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등장한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의 가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알게 뭐람. 평소에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지…”라고 말입니다. 피해자의 가족은 자신이 피해보았다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모든 일을 따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해자의 목숨까지 노리게 될 것이 뻔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는 것은 그 피해자의 가족의 삶의 의욕마저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 됩니다. 그 아픔, 그 상실감은 필히 다른 희생을 발생시켜 감소시키거나 해소되어야 되지, 피해자 가족이 홀로 다 떠맡기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가해자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번에는 가해자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죽일 의도도 없이 동료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했다”와 “내가 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 감정이 중첩됩니다. “어쨌든 미안하다, 하지만 전적으로 내가 미안해야 될 이유는 없다”가 성립됩니다. 

가해자는 난데없이 범죄자가 되어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면 이번에는 가해자 가족들도 함께 억울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사태로 인해서 ‘억울함’을 갖는 자들이 연속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정당성을 지닌 합당한 설명이 외부에서 새로이 도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은 곧 신(神)입니다. 신이 벌린 일 탓에 두 쪽의 억울한 진영이 지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말은 납득이 안된다 는 말입니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는 겁니다. 사전에 예고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개입은 항상 이런 식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어떤 속성을 따로 골라서 믿을 겁니까? 전혀 정의롭지 않는 낯선 일들이 벌어진다면 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말씀의 적용은 난처함을 발생시킵니다. 이는 인간들이 안일하게 간주되는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들이 예상못할 의식에 덮여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세계 안으로 진입하십니다. 이러다 보니 인간들은 자기 속에 진입한 하나님의 낯선 모습을 대하고서는 의아해합니다. 신약의 이러한 조치에 앞서 구약에서는 인간의 논리나 이성으로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난처한 사태에 관한 조항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계명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현실 자체가 이 계명의 취지에 맞도록 갖추려져서 정돈되듯이 발생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낯설기 짝이 없이 툭툭 터지는 사건과 사건들이 현실망을 한땀 한땀 기워나가게 됩니다. 두 종류의 억울함이 발생되면서 살아남은 가해자는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대들게 될 것입니다. 

“하필이면 재수없는 일을 굳이 왜 저에게 발생시키십니까?” 곱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많이 모자라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백성이라는 안일함의 부수게 됩니다. 자신이 당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다루려는 시도를 하나님께서는 인정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보호한답시고 준비하신 것이 도피성입니다. 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원천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전에 사전에 조치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해자의 범주에 자신이 끼지 않도록 왜 하나님께서는 간섭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을 것입니다. 

이는 살인자 보호 조치가 미흡해서가 아닙니다. 아예 원천적으로 ‘사람 죽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싫은 것입니다. 죄인되기 싫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부러라도 사람 죽인 죄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도피성 안에서 만날 제사장의 위상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양식을 제공하거나 정치적은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됨을 알리려 합니다.
즉 죽지 아니하면 영생도 없습니다. 모든 살았다는 사람은 ‘이미 죽은 자’라는 하나님의 평가에 마주해야 합니다. 죽은 자로 하여금 계속 살게 하는 힘은 바로 천국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의의로 보여짐을 알아야 합니다.  

즉 도피성 취지를 알리기 위한 사건들로 억울한 죽음을 낳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도피성으로 도피한 자의 남은 인생은 제사장이 합니다. 그리고 살인자가 도피성에 갇혀 있는 형국은 곧 이 세상 모든 자들이 죄에 갇혀 있어야 될 처지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도피성으로 오게 된 자는 더 이상 자신의 팔자탓을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개인적 팔자와 운명이란 의미없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에게만 있는 죄 씻음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받고 보여주어야 될 팔자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이 ‘바뀜’의 조치를 위해서 제사장이 함께 있는 겁니다. 전에는 자기만의 인생을 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이제는 하늘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실존의 모습을 하면서 오로지 제사장의 가치를 보여주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될 수없는 그런 사건 한복판에는 살인자는 제사장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제사장을 통한 보호와 죄씻음 없이는 이 세상을 아무리 평온하게 보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그 사람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억울함을 보여주는 자는 구원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자기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16-10-03 10:14 
101강-신 19장 3-5절(도피성)1610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9장 3-5절입니다. 구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 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위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 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이스라엘 일어나는 그 역사라 하는 것은, 사실은 숨겨진 하늘나라의 비밀을 이렇게 이 땅에서 얼룩무늬로 보여주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민족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 역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마주치는 것과 거기에 주신 모든 계명들은 숨겨져 있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그 역사를 통해서 느끼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해주신 겁니다. 그 느끼는 조치중의 하나가 사실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낯설고 참 예상 밖의 일이죠. 

이것은 우리가 가는 세계가 상당히 낯설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세계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 될 영원한 곳은, 참 세상적인 그러한 안목에서는, 뭐 이런 세계가 다 있느냐 할 정도로 기이한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경험을 통해서 미리 맛보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혜택이 주어졌는데, 그 숨겨진 비밀이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혐의가 없이, 아무런 감정 없이 사람을 죽였거든, 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도피하게 하는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라.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피해입지 않도록 하라.” 라고 하나님께서 어떤 구역을 정해주셨어요.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들어가야 될 영원한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잘남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그 사람을 보호해줬다. 그걸로 그쳤을 거예요. 

그러나 천국 가는, 영생 얻는 우리들은 왜 하나님께서 구태여 이런 일을 벌이시는지를, 그 내막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살인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아무 감정 없이, 그 사람에게 억하심정 없이 그냥 죽였다. 근데 그 사람이 죽였을 때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가족들로 하여금 복수하도록 허락하지 말고 그 사람을 도피시켜라.  

이러한 내막을 듣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사전에 방비해주면 될 거 아니냐?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요.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그런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이 삼림에 나무하러 갔다가 도끼가 빠져가지고 두 바퀴 반 돌면서, 그게 어지간하면 그냥 멍들고 말텐데, 하필이면 한 방에 가는 급소자리에 퍽하고 맞게 했을 때, “주님이여! 아무감정도 없는 저 사람을 왜 나로 인하여 죽게 하십니까? 억울합니다. 정말 이거는 너무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이 너한테 감정 갖지 않도록 내가 피할 길을 주어서, 도피성에 네가 보호받도록 해줄게.” 라고 하나님께서 제안해봤자, 막상 우연히 살인을 저지른 사람한테는 그게 성이 차겠습니까? 가족도 못 만나고, 친구도 못 만나고, 뭐 하나님이 일을 이런 식으로 합니까? 약 주면 뭐합니까? 처음부터 병이 안 생기도록 해야죠. 뭐, 도피성에 간다고 내가 하나님께 고맙다고 할 줄 알았죠? 아예 그러한 불상사가 안 나오도록 방비를 해줘야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할 건데, 이렇게 불상사 해놓고, 가둬놓고 너를 보호했다고 하면 제가 기분이 좋습니까? 안 좋죠.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무슨 뜻이지를 모르고 있죠. 이제 그 내막을 제가 여러분한테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구원받는 심정을 사자성어로 하면 “대롱대롱”, 이렇게 구원받습니다. 뭐 사자성어도 아니죠. 지어낸 건데. 그냥 대롱대롱으로 구원받습니다. 이 땅에 사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 매달리면서, 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어서, 이 땅에 약 올리듯이 이런 자도 있다고 남한테 과시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특수한 존재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사는 존재로 만듭니다. 

그 대롱대롱 매달려서 살게 만든다는 그 원형이 뭐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땅에 살았지만 그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뒤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그럼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듯이 복음은 뭐냐,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만 아는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 의, 외에는 모든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위해서, 주님처럼 대롱대롱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그 의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생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처음부터 있는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겁니다. 

어제 어떤 분이 자기 딴에는 굉장히 심각한 질문을 해요. 목사님 어떤 공무원이 아파트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아파트에서 자살하려고 위에서 뛰어내리다가, 하필이면 그 공무원이 맞아가지고 자살하는 사람도 죽고 그냥 착실한 공무원도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분이 저한테 질문하는 의의가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죽게 하십니까? 도대체 인간의 죽음의 의미가 뭡니까? 이게 질문이었어요. 그것도 제가 한참 시차적응이 안 되어 잠이 안 와서 있는데, 태블릿으로 그런 질문이 왔어요. 그래서 답변을 해주었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질문하는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왜?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입니까? 너무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너무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인간은 죽어있습니다. 죽어있는데, 늙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그러니까 왜 죽이십니까? 이렇게 질문할 것이 아니고, 어차피 죽어갈 것을 왜 살려두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셔야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시므로 모든 자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살려두신 이유는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의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살려두시는 겁니다. 죽어가야 되는데,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것은 분명히 다른 요소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는 감을 잡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와 예수님과 연결된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살아있다? 이게 웬 떡이지? 웬 은혜지? 아! 그 은혜가 예수님이 갖고 있는, 예수님이 보여줄 영생과 관련되어서 살아있구나. 이것을 하기 위해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답변이 됐는지도 궁금하고 있는데, 카톡! 카톡! 하면서 카톡이 또 왔어요. 제가 카톡 그런 것을 진짜 안 하려고 벼르고 별렀는데, 이게 동영상 유튜브 올린다고 어쩔 수 없이 했어요. 해놓고 인사 막 들어오고 그랬는데, 제 때에 답변 못해드렸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카톡! 해서 보니까, 어이구 놀랍게도 “감사합니다. 전에부터 설교시간에 그렇게 이야기하셨는데, 자꾸 까먹어서 이제 다시 한 번 생각납니다.” 오히려 누가 고맙냐면 제가 고마워요. 그 납득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감사하다고 나오니까, 제가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숨겨져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바로 타인의 관계에서부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야기에요. 타인. 같이 산에 나무하러 가는 그 타인 말이죠. 타인. 우리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그 사람을 몰래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오늘본문의 말씀대로 아무 혐의 없이 죽이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부러 집에서 갈 때, 도끼를 일부러 이만큼 빼놔요. 

저걸 때려죽이고 싶은데, 혹시 또 진짜 죽이면 나도 살인자가 되어 나도 죽기 때문에, 나만 손해기 때문에, 일부러 빼놓고 미리 연습을 열 댓 번 하는 거예요. 딱 했을 때, 이게 공중에서 몇 바퀴 돌아서 몇 미터 반경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친다는 것을 생각하고, 줄로 재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아이구, 여기 중요한 보석 같은 버섯이 있네!’ 나무치는 척 하면서 죽이는 경우는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는 별로 없구요. 도끼로 나무를 쳤는데 쑥 빠져서 죽었을 때, 그 타인, 나에게 좋은 친구요, 벗이요, 벗이니까 같이 갔을 거 아닙니까? 심지어 친척일 수도 있고 내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뭔가 중간에 어떤 힘이 개입해가지고, 도끼가 빠져가지고 공중 세 바퀴 반 돌아서 어깨 맞을 수도 있고 다른 곳을 맞을 수도 있는데, 정면으로 맞게 만들어서 죽게 했을 때, 저 타인은 진정 누구라는 말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내 도끼에 맞아죽는 타인을 왜 등장시켰습니까? 

여기서부터 도피성에 있는, 숨겨진 하나님의 영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만들어버렸어요. 살인자로 만들어버렸어요. 제가 캘거리강의를 쭉 올려놨잖아요. 거기서 이야기했지만, 20년 째 아무리 친했어도, 21년 째 어느 가을에 그 사람이 왠지 밉다면 그것은 살인죄가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또 저한테 전화해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몸의 욕정과 몸의 욕망을 우리가 어떻게 다스립니까? 라는 질문을 했어요. 육체가 누구 겁니까? 지금 본인의 질문자체가 뭐냐 하면, 이 육체는 내 건데, 내가 잘 다스려야 내 자존심과 내가 신앙이 있다는 티를 내야겠는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자기 관리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뭘 가지고요? 내 육체를 가지고요. 으음음~ 노노노~본인의 육체는 없습니다. 

왜 본인의 육체에요? 같이 삼림에 나무하러 가는 저 육체가 내 육체입니까? 그리고 억울하게, 억울하다고 하는데, 얼마나 본인이 평소에 내 육체를 내 거라고 어겼으면, 얼마나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이 튀어나오겠습니까?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뭐? 어떤 수? 제가 억울합니다. 니 육체가 누구 육체인데? 제 것 아닙니까? 니 것 아니거든. 우리가 자꾸 하나님께서 시작하는 그 바탕을, 우리는 자꾸 뭐로 덮어버리느냐 하면, 내 것, 나의 것, 나의 소유, 이런 걸로 자꾸 포장을 해놓고, 내 거니까 내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내 인생을 잘해보겠다는 식으로 계속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꾸 우기는 것을,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관리, 자기도덕성, 자기 착함, 우리는 이걸 어떻게 손 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개입해야 되죠. 어떻게? 십자가로 개입해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 몸을 아버지의 뜻대로 쓰시옵소서.” 그 취지가 멀쩡한 내 인생에 개입해버리죠. 

개입해버리면 우리는 놀라버립니다. 이럴 수가! 어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나는 저 사람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어떻게 해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살인자로 졸지에 변질시킵니까? 주님께서는 그게 바로 평소에 니가 니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참에 내가 개입해서 살펴주겠다. 이 개입이 구원입니다. 참, 이 개입이 구원이에요. 

억울한 일에 얻어 터졌다, 주께서 주먹으로 우리 심장까지 파고 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 이게 내 게 아니구나. 내가 착실하고, 조심조심하고, 매사에 조심한다고 이게 살 수 있는 인생이 아니구나. 주께서 마음대로 요리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주님한테 있지, 나한테 없구나. 하는 거예요. 주여,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 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살아야 될 그런 이유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고, 그런 권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몸에서 남은 죽어도 되고 나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이게 자꾸 나오니까, 수상해도 많이 수상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것을 갈아치우게 합니다. 이걸 뭔가 교체를 시켜요. 어떻게 교체하는가? 투입을 합니다. 투입을 할 때 뭐로 하느냐 하면 도피성으로 투입합니다. 도피성에 누가 살고 있는가. 바로 제사장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제사장의 가치, 제사장의 의미가 합류된 인생을 살아야 돼요. 

단순히 하나님께서 “야! 니 몸은 니 게 아니고 내 거야.”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몸이 주님 것이라면, 주님께서 이 몸을 쪼개가지고 무슨 조치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바로 제사장제도가 우리 몸에 들어오게 돼요. 제사장제도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죄 있는 자를 죄 없는 자로 바꿔치기 하는 그 시스템이 바로 제사장제도에요. 죄 있는 자를 죄 없는 자로. 방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데, 그건 찾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목을 알려줘요. 피고는 몇 년도에 이런 죄를 지었고, 마음속으로 간음죄, 마음속으로 미워한 죄, 전부 다 살인죄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한 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는데 비판한 죄, 성령을 구하라고 했는데 니 세상적인 것을 두드리고 구한 죄, 통성기도하면서 니 집안 잘 되라고 기도한 죄, 모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쭉 낭독을 해요. 말씀을 통해서 쭉 낭독을 합니다. 낭독을 하게 되면 그 하나하나가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항목들이고 계명들이에요. 

제가 미국에서 요한일서 했잖아요. 요한일서에서 계명이라는 말을 했는데,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걸 안 지켰을 경우에 지옥 간다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는 거죠.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기준인데, 기준이기 때문에 계명인데, 형제를 목숨 바쳐 사랑하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서 지옥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계명이에요. 최종적인 계명이. 

그래서 줄줄이 낭독을 해요.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항상 토를 달아요. 그때는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요. “그때 제가 운전해서 사람 친 것은 비가 많이 와서 폭우로 운전대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미끄러지다보니까 내 옆에 있는 조수가 안전벨트 안 해서 죽었습니다. 이거는 정말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고, 죽어라! 죽어라! 해서 죽인 게 아니고, 이거는 어쩔 수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죄를 묻지 마세요.” 그럼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니 바뀔래? 안 바뀔래? 니 바뀔 거야? 안 바뀔 거야?” “저 이대로 쭉 갈랍니다.” “어떤 모습?” “나는 남한테 고의로 죄 진 없다. 이걸로 그래도 갈랍니다.” “그럼 그대로 가면 니 죄 없는 자야? 니 천국 갈지 싶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뀌어져야 한다니까요. 내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주님이 나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다룹니다. 주님이여! 에고 미치겠다. 정말. 주님, 제발 그만 몰아세우세요. 이러다 교회 안 나올 수 있어요. 왜, 자꾸 내 인생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는데, 왜 자꾸 죄인, 죄인, 죄다, 죄다, 헌신도, 희생도, 선교도, 모두 죄고, 헌금도 죄다, 예배 참석도 죄다, 왜 자꾸 몰아넣습니까?” 그럼 주님께서, “니 바뀔래? 안 바뀔래?” “그럼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니가 죄 없이 한 짓도 제사장이 아니면 너는 죄가 없는 자가 되지를 못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정말 우리 허락도 없이 강제로 몰아붙이는 지극히 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고집하고. 주님께서는 숨겨진 아버지와 아들의 복음을 위해서 나를 늘 사용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우리는 괜찮은 내 인생, 내가 간직하겠다고 하는 것이 내 사는 보람이라고 우기고. 그러니까 손대지 말라고, 몰아붙이지 말라고, 너무 우리를 궁지에 몰아붙이지 말라고, 사형선고 받는 데까지 그렇게 몰아붙이면 우리는 그렇게 억울하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억울한 것을 알아도, 니가 고의로 행한 행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네 몸은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그것이 오늘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어떻게 하느냐, 홀로 살면 안 됩니다. 함께 살아야 돼요. 함께. 제사장의 언제까지?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나라에 한 분 밖에 없는 제사장이 늙어죽을 때까지는 도피성에서 못 나옵니다. 일종의 교도소죠. 갇혀있죠. 어떻습니까? 상당히 억울하지 않습니까?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억울하죠. 

하지만 이 억울한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본의 아니게 빠져나올 수 없는 죄와 악마와 율법과 저주와 권세 아래 갇혀 있음을. 바로 아무 감정도 없이 남을 죽게 한 니가 그 도피성에 안에서, 그걸 표본으로, 모델로 보여주는 기능으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어서 십자가 졌습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말렸습니다.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아니야. 이로써 우리가 의를 이루어야 한다.” 죄 없는 분이 죄 속에 들어온 이유가 이처럼 모든 인간은, 이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죄에 갇혀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의 죄를 설명하면서, 설교 준비하면서, ‘우리가 갇혀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꼬?’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제가 TV이 거의 안 보는데, 마침 탁 보니까 뭐가 하나 나왔어요. 보니까 저게 바로 우리가 숨을 수 없는 죄다. 이게 나왔습니다. 어느 프로에 나오느냐 하면, 최고의 사랑이라는 프로인데요. 거기에 김숙하고 윤정수하고 나오는데, 추석특집 같아요. 

저는 추석 때 미국에 가 있었으니까 못 봤어요. 그런데 재방송을 해서 보는데, 송편을 만드는데 겨자를 넣었어요. 장난삼아. 김숙이 원래 장난꾸러기 같아서 겨자를 마구마구 짜 넣었어요. 이 송편 먹는 사람은 혼나라고. 송편을 쫘 펴놓고 송편 먹자고 하는데, 이거는 복불복이라. 맛있는 거 걸리는 사람도 있고 겨자 걸리는 사람도 있죠. 보시는 분은 고개 끄덕끄덕하시는데. 이게 딱 걸렸어요. 지가 만든 겨자송편에 지가 걸려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으로 끝났겠지. 이랬는데, 세상에! 이런 기적이! 또 골랐는데 또 지가 만든 겨자송편에 지가 걸려서 인상이 오만상이 되었어요. 

근데 거기에 나온 죄가 뭐냐 하면 네 글자로 ‘인과응보’에요. 그게 바로 그렇게 우리가 찾아내고자 해도 찾아내지 못하는 죄입니다. 인과응보로 뒤집어 씌어 질 때, 우리는 뒤집어 씌어 진 채로 지옥 갑니다. 바로 지옥은 인과응보를 따지는 곳이 지옥입니다. 죄 진 놈은 죄 값을 하고, 착한 사람은 의 값을 하는, 이게 선악과 따먹었는데, 선악과 따먹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 줍니다.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를 못 따게 해요. 얼마나 평소에 우리는 인과응보에 주눅이 들어있는지, 내 돈 떼먹고 도망간 놈은 십리도 못 가서 엎어져라. 항상 나한테 해코지 한 놈은 맞아죽어라. 여기서 우리의 사상과 정신이 벗어나지를 못해요. 완전히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손톱으로 파도 그걸 파지를 못해요. 그 인과응보로 꾹꾹 눌려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한방에 빠져나옵니까? 빠져나올 방법 있습니까? 있습니다. 산에 나무하러 가세요. 도끼 너무 꽉 해놓지 마시고 평소에 풀어놓고. 산에 한 번 나무하러 가서 아무 연고 없이, 도끼 날 두 바퀴 반 돌아서, 그것도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보세요. 우리가 하나님한테 할 소리가 이겁니다. “주여, 저 어쩌라고 이런 낭패를 주십니까?” “니가 보기에 니 낭패야? 니가 쓰임 받는다고 생각 못하나? 니 인간 안 바뀌면 안 돼! 니는 바뀌어야 돼!” 

괜찮은 내가 천국 간다고 하지 말고, 주님 쪽에서 대롱대롱 내려온 낯선 네 모습으로 바뀌어져야 해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관계.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아무 대가도 없이 영생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를 통해서 발산케 하시는 겁니다. 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희생의 나라, 그것을 이 땅에서 천국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난데없이 여러분에게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여러분 자기 인생을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거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이제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설교 마치면서 딱 따져봅시다. 우리가 사실 힘든 것은 우리 잘못 없이 주어진 겁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평소에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얼마나 빨랐어요?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것,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남을 죽였다 하는 것보다,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저 국회의장 정세균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새누리당에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아무 연고 없다? 사실은 그런 말 잽도 못 됩니다. 사실은 인과응보로 따져도 우리는 지옥가야 돼요. 근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삭개오를, 돈 많은 삭개오를 그냥 천국 보내듯이,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것을 그냥 천국에 보내놓고, 그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보게 하면서, 영생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너를 사용하고 싶다. 인간이 그쪽으로 바뀌어 지라고 우리한데 당부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피성이라는 낯선 구역, 우리한테는 예상 못하는 영역이, 천국의 모습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우리가 놀랍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나의 영역만 생각했는데, 우리 자리에 영생의 낯선 영역이 늘 다가오고 차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