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강-신 18장 19-22절(거짓 선지자)1609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8장 19-22절입니다. 구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가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오늘 본문에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가짜 선지자를 말합니다. 가짜 선지자라는 말은 바로 진짜 선지자와 대비하는데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그러면 진짜 선지자는 무엇이냐, 오늘날의 진짜 선지자는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을 두고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들이 누구냐, 바로 성도라는 사람들이 성령 받은 자가 되고 이 시대에 어두움을 밝히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본인이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 군데서 수차례 이야기한, 성도는 막살아야 된다는 바로 그 점을 언급하는 겁니다. 막살아야 된다는 것은 막사는 것을 통해서, 그 막산다는 것이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막사는 것이냐, 아니면 성령과 관계없이 스스로 자기를 절제하고 다짐해서 자기가 자기를 성도 만들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막 살지 않기냐, 그걸 한 번 따져봅시다.
그렇게 될 경우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한테 억매여 있다면, 매여 산다면, 막살던, 안 살던 간에 어차피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인도한다면 그 어떤 행위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역할을 다 한 겁니다. 볼펜이 글씨 나오면 됐지, 볼펜에 금 달고 은 달고 다이아몬드 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선지자의 기능은 선지자 본인의 우수함과 잘남과 믿음이 좋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참된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참된 선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우리가 거짓 선지자가 되면 되는 겁니다. 뭐 말도 되도 않는 소리를 또 늘어놓느냐, 이렇게 또 생각하시는데, 구약성경을 통해서 거짓선지자로 시작하지 않는 참된 선지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거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 죽임의 의미를 아는 분은 바로 본인이 누구인지 정체를 아는 자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십자가에 의해서 죽은 분이라면, 그리고 우리 죄 때문에 죽은 분이라면, 도대체 그 십자가에 담겨 있는 우리 죄가, 성경말씀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추적해갈 거예요.
그러면 어떤 성경말씀도 우리가 지킨 적이 없고, 도리어 성경말씀에 대해서 대적하는 거짓 선지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는 것이 늘 차후 적으로 소급적으로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목표는 뭐냐, 어떻게 하면 거짓 선지자가 되는가가 목표입니다. 우리는 참된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결과적인 이야기에요.
우리가 거짓선지자였는데 노력했더니만 참된 선지자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거짓 선지자로 일관될 수밖에 없는데, 막다른 길 까지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너는 죄인이었는데 나로 인하여 구원되었다는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드러내는 증인 노릇 하기 위해서 주께서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내가 그동안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해왔다는 것이 발각되면서, 동반해서 예수님만이 참된 선지자요, 구원자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구약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 그 다음에 신약이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구약만 고집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약만 고집하기 때문에 지금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는 이미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미 왔기 때문에, 이미 오신 선지자를, 오신 메시아를 증거 하는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게 없죠.
이미 오신 메시아가 자신의 영을, 성령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시므로 말미암아, 이건 내가 뭔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세상을 끝장내버리고 마감하신 그 분에 의해서 움직여지니까, 다루어지니까, 우리는 가차 없이 뭐를 하던 간에 참된 선지자의 모습을 팍팍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주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는 아직까지 도달하지 않은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현재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미래에서 마중을 나오는데, 그 마중 나오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하나님의 신을 보내셔서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방향타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쪽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와. 그쪽 아니야 그쪽은 넓은 길이야. 좁은 길로 가야 영생이 있지.” 자꾸 이렇게 그 당시의 선지자를 박아놓고 선지자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외에 사람들은 말씀을 지켜보는 식이라면, 선지자는 이미 말씀을 다 지킨 입장에서 그가, 그 선지자를 장악하고 있는 선지자의 신은 이미 어디로 가야 길이 나오는지를, 목적지가 나오는지를, 벌써 훤히 아는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맨날 얻어맞고, 돌에 맞아 죽고, 칼에 맞아 죽고, 광야에 유리하고, 설움 받고, 곡해당하고 그런 식으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미리 온 전령사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핍박을 많이 했어요. 뭐 딴에 안다는 이야기죠. 뭐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딴에 안다고, 뭐 아무것도 모르면서, 멸망으로 가면서, 자꾸 고집을 부리면서 안다고, 우리 식으로 하면 구원받는다. 그러나 선지자는,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의견이 반대가 되고 충돌이 되니까, 사람들은 선지자를 핍박하고 저주하고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교회들이. 그러나 그것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는 시험 준비하겠는데, 이미 메시아가 다 끝냈잖아요. 시험 다 끝났어요. 수시모집 끝났어요. 합격자 통지 돼버렸는데.
무슨 거기다가 추가적인 행함이 남아있습니까? 목사 섬김. 헌금. 교회봉사. 십일조. 선교사. 주일학교봉사. 장로집사 목사 봉사하기. 그거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복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교회에서 그걸 시키는, 성경에서 감독, 집사 시키는 이유가, 니가 어떠한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이미 합격자를 가지고, 통보받은 자들만 가지고, 계속해서 ‘아하, 이런 식으로 문제가 있었기에 주께서는 그 귀한 피를 흘렸구나!’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니 더러운 목숨 바친다고, 니 더러운 재산이나 몸이나 시간과 목숨을 교회에 바친다고 니 순교자 되는 것이 아니야. 그렇게 해서 순교자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제가 이번 미국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돈 없는 부모는 부모도 아니다 했거든요. 뭐 죽을 때까지 돈 있거든 자식한테 주지 말고 꼭 쥐고 있으라고 했어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탕웨이가 하는 것처럼, 꼭 쥐고. 꽉 쥐고 있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쥐고 있어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이 계속해서 확인되잖아요. 여기서 말조심해야 됩니다. 여기서. 아니 돈 다 줘버리고 자칭해서 나 돈 사랑 안 한다. 어이쿠, 좋으네. 돈 안 사랑해서 천국 갈 줄 알아요? 위선에다 곱빼기 위선이죠. 세 배, 네 배 곱빼기로 위선 떠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모든 재산 교회에 바치고, 나 바쳤으니까 구원은 책임질 거라는. 그게 바로 마귀한테 속은 겁니다.
마귀는 오류를 조금씩 줄여가자는 취지로써, 마귀가 작용합니다. 여섯 글자로 개혁주의신학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우리는 진리를 모르니 조금씩 줄여가게 되면 진리에 접근할 것이라는 것이 개혁주의이론입니다. 그게 사탄의 이론이고 악마의 이론입니다. 그걸 선분적인 시간관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분적인 시간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기계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면 거기서 비 진리는 제거하고 진리만 남을 거니까, 남은 진리를 쌓고, 쌓고 이렇게 하면 천국으로 골인할 것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해서 지금 현재의 정보 쌓기, 추가적인 정보를 계속 쌓게 되면 진리에 합한다는 것은 바벨탑이지, 바벨탑 사고방식이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개혁주의신학은 복음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 뭔가 좋은 날 볼 것입니다. 하는 거예요. 무슨 이런 사기가 다 있어요? 그거는 유대교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착함과, 착함과 착함이 더욱더 모이면 경건이 되고, 경건이 모이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마귀를 아비로 삼고 있는, 사탄의 용병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손에 죽었어요. 내가 메시아니까 나를 믿으라고 하니까 못 믿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메시아를 죽일 때, 근거가 뭐냐 하면 오늘 읽었던 신명기 18장 20절에서 22절을 근거로 대는 겁니다. 우리가 읽는 본문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어요. 그들의 주장은 이겁니다. 니가 메시아라면 증험을 보여라! 기적을 보이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 앞에 획기적인 기적을 이야기하게 되면 니가 메시아인 것을 인정하겠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악하고 음란한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내가 보일 기적은 하나밖에 없다. 뭐냐, 내가 죽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저거 미쳤나? 니 죽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살아서 우리 앞에 더 멋들어진, 마술사보다 더 마술 같은, 서프라이즈를 한 번 보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를 한 번 낯 뜨겁게 만들어봐라 이 말이죠. 아이구, 당신이 그렇게 저런 메시아였어? 웁스Ooops! 뭐 미국 갔다 왔다고 영어를. 저럴 수가! 우리를 놀래 켜라 이 말이죠.
놀래 켜야 대중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바리새인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이냐, 이 말이죠. 그 교회 가면 병 낫더라. 그 교회 가면 부자 되더라. 이게 바로 예수님을 시험했던 두 번째 시험입니다. 니가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깜짝 놀래 키라! 서프라이즈! 깜짝 놀래 키게 되면 당신이 메시아인 것을 우리는 인정하겠다. 우리는 신명기 18장 20절에서 22절에 근거해서 당신을 참된 선지자로 인정해줄게. 인정하노라.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죄인이 성경을 봐? 이것들이? 니가 근본적으로 죄인인 것을 모르지? 이겁니다. 주님께서는 기준을 세웠는데, 그 기준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기준이에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따라서 예수님이 거쳐 간 모든 현실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번져난 최초의 지점을 예수님 자신의 지점으로 생각한 거예요.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행동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인과 그 이유가 되는 고리를 형성하고자 하시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 패턴이 있어요. 그 패턴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먼저 나를 공격해야 하고, 먼저 짓밟아야 하고, 나를 모독해야 하고 모멸해야 되고 무시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찾아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장악한, 확보한 인간의 패턴을 그대로 우리 안에 칩으로 심어 넣어버리면,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다 이야기했을 뿐인데, 우리가 있는 그 장소에서, 우리가 있는 교회에서, 그렇게 심한 모욕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간단하거든요. 너무 간단하거든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며,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라는 것을 기분 좋게,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하죠. 기분 좋게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로 인하여 이 안정된 질서가 혼란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니가 그런 소리 하게 되면 우리가 파악하고 우리가 수립하고 있는 이 인간 정신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상당히 재미나는 말입니다.
이게 왜 재미나는 일이냐 하면, 오늘 읽었던 본문 신명기 18장 20절에서 22절과 신명기 13장 1절에서 3절과, 이게 같은 신명기인데 이게 대조가 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에는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할 때, 22절에,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18장 2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증험도 있고 성취함도 있으면 참된 선지자냐? 라는 문제가 발생돼요.
내가 예언한대로 뭔가 이루어진다면, 그럼 이제부터 나를 참된 선지자로 인정해줄래? 앞으로 무슨 말을 해도 주의 말씀으로 간주해서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할래? 그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젊은 애들 게임가운데 굉장히 위험한 게임이 있어요. 만약에 내가 이기면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야? 완전히 자기 자존심 다 걸고 하는 시합이에요. 옛날 같으면 권총으로 서로를 죽이는 그런 식으로 막 몰아가요. 젊은이들이. 저 사람을 자꾸 자기 팬으로, 종으로 부리고 싶은 거예요.
목사들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카리스마라고 이야기합니다. 카리스마 있는 목사가 뭐냐 죽이라고 엄지 척 내리면 죽여야 되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되고, 오라고 하면 와야 되고. 어떤 전도사는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이 나가라고 해서 나갔습니다. 목사, 지가 뭔데 그 교회에게 왜 나가라고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납득이 알죠? 질투의 화신에 나오는 납득이 그 배우, 조정석. 그 당회에서 월급을 안 주는 것은 인정을 해요. 근데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은 목사, 지가 할 소리가 아니에요. 내가 오고 싶어서 왔는데, 지가 뭔데 나가라고 합니까?
지금도 우리교회 안 보여서 그러는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어디 계신지 모르니까, 어디를 보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돌아오세요. 모든 차에는 유턴이 있습니다. 제가 나가라고 했습니까? 오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런 자격이 돼요? 이 교회 내 겁니까? 나도 죄인인데. 이건 뭐 친목단체도 아니고요. 우리교회에 뭐 회칙이 있습니까? 없지요. 회원들은 뭐 만원씩 내라고 하는 그런 것 없잖아요.
사람이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이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이 기준이거든요. 주께서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나이다. 그 백부장처럼. 그 백부장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천국에 가려고 하는 자들은 다 비켜라 비켜. 이 사람의 몫이다. 니가 가라 하와이. 니가 가라 천국이다. 천국은 너의 것이다 이 말이죠. 기준이 예수님 같으면 계속 기준이 예수님이어야지, 예수 믿는다는 인간들을 왜 기준으로 우리가 수용해줍니까? 그거 믿지 마세요. 예수 믿는다는 그 인간들 믿지 마세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요? 형제는 우발적으로 등장해요. 형제는. 진짜 형제는 나로 하여금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인간으로 들추어내는 성령의 방식으로만 형제가 등장해요. 내가 가인인 것을 폭로시키는, 아벨의 모습으로만 형제가 등장하지, 내가 만약에 형제를 고르라고 하면 어떻게 고르냐 하면, 그저 예쁜 것, 돈 많은 것, 목사 순종 잘 하는 것, 그런 것만 형제라고 하고, 뚱뚱하고 못생긴 것은 내 앞에서 가라고 하고. 돈도 안 내고, 꼭 젊은 처자들한테 돈만 쓰게 하고, 돈 한 푼도 안 내고, 점심값 천원도 안 내고, 가라! 가! 필요 없다. 그렇게 할 거예요.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 구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왜 인간은 실패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왜 실패해야 되는가, 예언은 이미 성취된 상태에서 예언이 주어지는 것이지. 가다보면 되겠지. 어디까지 가야 돼요? 어디까지? 하다보면 천국 도달하겠지. 이건 뭐 돈 놓고 돈 먹기도 아니고요. 뭐 도박하는 겁니까? 지가 타짜도 아닌 게. 이미 성령이 왔으면, 성령이 온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의인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착한 적도 없었어요. 무슨 착한 일을 해요. 똑같은 인간이. 그냥 성령이 주입된 겁니다.
제가 뉴저지 아카데미에서 한 강의에서 예를 들었어요. 심해 4200미터의 물고기는 그냥 선으로만 되어 있다. 왜? 바깥에 있는 바닷물과 자기 속에 있는 내장도 바닷물로 되어 있는 이유가 심해의 수압을 견디기 위해서는 그냥 가느다란 선으로만 경계선을 그을 뿐이죠. 수면 가까이에 있는 고등어나 오징어는 심해에 들어가면 자기 내장들이 다 터져버립니다. 심해에서는 안과 밖이 같은 것처럼, 우리 성도라는 것도 세상사가 다 똑같아요. 같이 돈 좋아하고, 세상 권력 좋아하고, 지 자식밖에 모르고, 자기 사랑해주면 사랑해주고, 자기 미워하면 미워하고 똑같아요.
다만 하나님의 경계선, 하나님의 성령의, 예수 그리스도 범위 안에서 그 사람은 너 안에서만, 그 테두리 안에서만 용서가 주어진다. 예수의 피, 사죄의 용서가 너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확보된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교회자랑, 교회숫자자랑, 교회헌금자랑, 목사 ,장로, 집사된 것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게 기준이에요. 본인이 기준이에요. 군에 안 갔어도 여성분들 이야기하세요. 기준하면 손들고, 기준! 십자가 기준 여기 있습니다.
나 같은 인간이 구원되다니! 이게 기준이에요. 세상에 쓸모 짝 없는 인간이 바로 우리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우리 자기 자신만 챙기기 때문에. 그렇게 쓸모 짝 없는 우리를 주께서는 선지자로 기준을 세운 거예요. 저들을 보아라! 강도를 보아라! 창녀를 보아라! 세리를 보아라! 거지를 보아라! 저들도 구원받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과다. 이 복음 말고 다른 복음 있습니까? 20년 교회 다녔다고 유리한 것이 아니에요.
근데 마귀는 안정된 질서를 갖고 싶어 하고, 소유하고 싶고. 그래서 마귀의 특징은 소유입니다. 그 소유의 질서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를,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과 요나의 기적으로 전부 다 부숴버렸어요. 거기에 대상들이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유대교라는 질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핵심 되는 장소를, 요새 방식으로 하면 폭파시키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성전 자체를 뒤엎어버렸습니다. 이게 성전이라고? 이거는 니가 만든 것이지? 이게 성전이야? 누가 이걸 성전이라고 해? 요새 말로 하면 이게 교회야? 이게 성당이야? 누구마음대로 교회야? 누구마음대로 성당이야? 교회라는 것은 성령이 임해서, 성령에 의해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그러한 순간적인 사건으로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교회라는 것은.
그래서 교회는 없으면서도 항상 어디든지 있습니다. 유비쿼터스(물이나 공기처럼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하죠. 항상 출몰하는 것이 교회고, 교회를 잡으면, 손에 쥐려고 하면, 소유하려고 하면, 사라지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돈이 모이니까, 그 돈, 부동산을, 건물이 있고, 토지가 있으니까, 그 부동산을 노리고 그 교회를 장악하려고 하는, 이러한 수상한 자들이 설치게 되면, 그러한 자들에게 이런 참된 선지자, 성령 받은 성도는, “여러분 이게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의 복음이 작렬하는 성도가 바로 교회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겠죠.
그럼 그쪽에서 어떻게 합니까? 이 교회는 수십 년 된 교회고, 뭐 어떻고, 저떻고, 어떤 장로가 갈멜산 기도원에서 응답받아가지고, 땅을 사라고 해서 샀더니만, 땅이 30배 올라가지고 그 땅에 예배당 건물을 지어서, 그 곳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축복의 전당이고, 어떻고 저떻고, 벽돌 뜯어먹고 천당이라고 했어요. 백날 해봐야 뜯어먹으면 악어가 되겠지, 무슨 인간이 되겠어요.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그냥 4200미터 심해에 있는, 그냥 경계선만 있는 물고기만 되세요.
세상 욕 할 것도 없고, 그들이 하는 것과 우리도 똑같은데,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유롭게 이 바다에서 아니 갈 곳 없고, 어디도 갈 수 있고 어떤 곳에서도,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참된 선지자라 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반드시 거짓 선지자는 참된 선지자와 비교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는 모든 인간이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 선지자에서 예수님만이 참된 선지자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이 임해야 했고, 그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효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용서하여주지 마시옵소서. 우리가 늘 우리한테 실망케 하여 주시고, 우리가 어디가도 실패자인 것을 감안해서, 이런 실패자마저도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선봉장이 된다는 사실을 늘 뒤늦게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