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6강-예와 아니요(고후1;18-192 1610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17. 18:42
2016-10-16 12:47:21조회 : 91         
   예와 아니요 16101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예와 아니요(고린도후서 1:18-1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9m78LIXRCWE, Hit:3
 이근호16-10-16 13:36 

No와 와 Yes의 차이 

2016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8-19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나 ‘아니오’는 인간들의 선택 성향을 알게 하는 대화 방식입니다. 즉 누가 나에게 묻게 될 때에, 동의가 되면 ‘예’이고 동의되지 아니하면 ‘아니오’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빼놓고서는 모두가 ‘아니오’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게만 모든 것이 ‘예’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은 ‘아니오’로 드러나야 한다는 뉘앙스를 유발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에게서부터 시작되는 의미성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함입니다. 천지창조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를 맨 나중에 돌려놓았습니다. 인간을 결코 창조 이전의 자리로 개입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 이전의 자리에 서게 끌어당깁니다.  

이 작업으로 인해 인간들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고,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모든 가치와 의미를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당연히 나타내게 됩니다. 즉 왜 신은 내 마음에 드는 식으로 내 인생을 끌고 가지 않으냐는 겁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인간들이 자기에게는 무조건 자신이 ‘예’가 되어야 된다고 우기는 바입니다. 즉 인간들도 나름대로 ‘예’와 ‘아니오’를 나누면서 살아온 겁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한 그 결과라는 겁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온 나의 인생을 한꺼번에 그 그릇을 비우지는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가 마음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아까워서라도 나의 것을 내 속에서 못 비우겠다고 버티게 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하나님에게까지 이릅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은 본의 아니게 본인이 아닌 타인의 존재로 둘러싸여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은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때만 살아남는다”는 원칙을 익히게 됩니다. 

‘남으로부터 인정’은 점차 ‘나로부터의 인정’까지 확대가 됩니다. 즉 아무리 남을 나를 인정해준다 할지라도 내가 나를 못마땅할 경우에는 자신마저 제거할 용의가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해서 끝까지 ‘나는 나에게 예’가 되게 말겠다는 겁니다. ‘예’라는 것은 ‘하자 없는 경우’를 뜻하고 ‘아니오’는 하자가 발생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을 하자없는 ‘예’로 가득채워질 존재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 자기 긍정으로 인하여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이 밀어낼 대상을 생산하게 됩니다. 즉 “저 사람을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사귀고 싶지는 않는 자”라는 식으로 분류가 하게 됩니다. 이 분류작업에 인간의 선택과 의지가 개입하게 됩니다. 

타인이 생기고 남이 생깁니다. 이들을 바라보면서 인간들은 스스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가 ‘예’가 되고 내가 밀어낸 저 자들은 ‘아니오’에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신마저 이 자기 놀이에 끄집어당깁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이랬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착한 일을 해서 그 업보로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을까요? 

착한 일이기는 커녕 하나님에게 충실하고 봉사하고 영광되는 일이라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잡아 죽인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그 신과 예수님의 일이 화합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표현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행 9:5) 

이제 사도 바울이 믿는 예수는 그냥 전에 믿는 신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핍박받으신 분’으로서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핍박’ 요소의 개입으로 인하여 사울은 더 이상 신(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모든 의도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사울은 기존의 자기 정체성에 합류되는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사울에게는 신은 없었습니다. 예수님, 그리고 자기로부터 핍박을 받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고부터 그는 스스로 ‘예’의 자리에 있으면 아니되고 예수님 앞에서 ‘아니오’의 자리에 예수님의 ‘예’만이 숭상해야 될 임부가 있어 지금껏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천지창조된 세상은 실은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세상이었습니다. 천지창조 할 때 하나님 곁에 누가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영광과 기쁨의 대상으로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 인계하시고자 천지창조를 하셨던 겁니다. 골로새서 1:15-17의 말씀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없이 생겨난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 분이 이 세상을 찾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이 보편적으로 ‘어두움’으로 표기됩니다. 모두가 어둡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끼리 비교할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사람답게 산다’는 잔소리를 계속 들어왔지만 복음 앞에서 그 주장이 인간들이 제 자리를 떠났기에 나타나는 소리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세상은 어둡고, 예수님만이 빛입니다. 이 빛이 어두움 세계 속에 파고들어옵니다. 그랬더니만 이 어두움 세상에서 대단한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기네들 끼리 잘났다고 비교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행함으로 마일리지를 쌓는 일에 열중하고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이는 십자가 사건이 육의 세계와 영적 세계의 유일한 접점 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육체가 다 예수님에 대해서 핍박을 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똑똑하고 바른 판단만 내린다고 자부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배후에 악마가 있음을 기어이 자백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악마의 생각은 이런 겁니다. 유일한 적은 바로 예수님 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네들 세계에 별 변동사항이 없음을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일종의 어리석고 미련한 해프닝 정도로 간주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내린 조치가 기어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이기를 고대합니다. 따라서 인간들로부터 배척받은 예수님은 배척받을 만한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어리석고 미련한’ 그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앞장세우십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외톨이가 되지 않는 상황을 ‘하자 없는 Yes'로 여기고 싶어하는 인간들 배후에 악마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하나님은 나를 힘들게 하는지 늘 대드는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 성도가 하나님에게 물을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를 아직 죽이지 않습니까? 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습니다”라는 것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난 재미로 사는 이런 상황을 ‘아니오’에 해당되고, 이 ‘아니오’와 예수님의 ‘예’와 관련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0-17 16:22 

208강-고후 1장 18-19(예와 아니요)1610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18-19절입니다. 신약성경 287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이 본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갑자기 ‘예’와 ‘아니요’ 두 가지 말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전파할 때는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예수님 안에서는 ‘아니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라는 것은 무슨 말이고 ‘아니요’는 무슨 말인가? ‘예’라는 것은 영어로 하면 전부 다 pass가 되는 겁니다. 

  

‘오늘도 성공했네. 오늘도 문제없었네. 오늘 하루도 참 잘 되었네.’ 이것이 ‘예’가 됩니다. ‘아니요’는 ‘오늘도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하루가 되었네. 오늘도 내 뜻대로 안되네. 오늘도 내 소망이 꺾이었네. 오늘도 짜증나는 하루가 되었네.’ 이것은 ‘아니요’에 해당되는 겁니다. ‘예’나 ‘아니요’라는 말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이에요. 

  

‘예’ ‘아니요’는 어떨 때 쓰는 말이냐 하면,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할 때 “이랬어요?” “예” 아니라면 “아니요” 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경우에 예, 아니요, 가 통용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우리한테 묻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무조건 예수 안에서는 ‘예’가 되고 ‘아니요’는 없습니다.”라는 이 말을 하는 것은 평소부터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생 살아봤지?” “예, 살아봤습니다.” “나도 인생 살아보고 너도 인생 살아봤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예스, 패스, 잘되었어, 잘 되었어, 잘 되었어, 그런 느낌만 오는데 너희도 그렇지?”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사도바울의 말이니까 그런 말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윽박지르는 느낌을 가지고 “예, 라고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예, 라고 해드릴게요. 찬양을 원하십니까? 하지요, 뭐.” 

  

약간의 시답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성경에 이러니 합세한다는 식으로 억지로 아멘, 하고 맞춰주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런 가식은 주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 그런 가식은 일체 불필요한 거거든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뭐든지 예수 안에서 ‘예’가 된다고 패스가 되고 오케이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디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라는 것만 있고 ‘아니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은, 네가 인생 살아가면서 네 소원대로, 네 뜻대로 생각한다면 너는 모든 것이 ‘아니요’가 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빠질 것이다, 라고 통보하는 거예요. 네가 네 뜻을 위해서 교회 나왔다면 너는 처음부터 착각한 것이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세상 돌아가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패스고, 예수님에게만 ‘예’가 되지 그리스도 빼놓고 독자적으로 나의 영역에서 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식이고 착각이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성경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한테는 하등 하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요. 

  

만약에 세상이 내 중심에서 내 유용한 쪽으로, 내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여러분은 때로는 예스, 때로는 노, 때로는 ‘예’ 때로는 ‘아니요’ 때로는 오케이, 때로는 엉망진창 꼬인 인생으로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한테 ‘예’가 된다는 말은 이겁니다. 

우리가 의도한 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성경을 본다는 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말을 즐겨 듣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성경을 펼친 거예요. 내가 깨지고, 내 인생이 엉망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라는 그 말입니다. 우리 가정에 어떤 험악한 일이 일어나고, 우리 집안에, 나의 신상에 어떤 낭패가 일어나서 곧 죽을 것 같은 위기가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끄떡도 없이 거기에 눈길 한번 안준다는 것을 각오하시고 성경을 보시라는 그 말입니다. 

미친놈이지요. 성경을 본다는 것이 미친놈들 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 보는 대신 어디 가느냐? 교회 나와 주는 거예요. 교회 나와 주는 것은 가식과 가식의 파티,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준다는 거예요. 그 말 맞습니다. 그 말에 동의해요. 요즘 약간 뜨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같은 종교다. 같은 하나님이라는 그것을 인터넷에 퍼뜨렸어요. 칼바르트의 제자인지 뭔지 라고 주장하면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사람 좋으라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가식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식을 긍정해주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것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는 인정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태어나면 아기 때부터 엄마가 “너는 우선 엄마 아빠에게 인정받아야 해.” 계속 양육, 훈계,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행동하면 내 자식으로 나에게 인정받고 그렇지 않으면 맴매 하는 거야.” 이렇게 가다가 그 범위가 커지면 이제는 친구에게 인정받고, 더 나아가서 사회에서 인정받으면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그 내용물이 꽉 차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주체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의 본질은 뭐냐? 마음을 절개해 보면, “남들이여, 나를 인정해주세요.”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여, 내 일가친척들이여, 나 이런 존재니 그쪽에 가담하시고 나를 받아주세요.” 그것이 우리의 양심과 마음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로 다 나와요. 보통 교회 나올 때 잘 차려입고 나와요. 목사가 이렇게 하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거룩한 존재로서 인정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나오지요. 

  

우리교회 처음 나온 교인들이 더러 그런 실수들을 하는 경우 있는데 두주만 참석하게 되면 그것이 실수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등산복 입고오고 그래요. 슬리퍼 신고 오는 경우도 있고요. 그것이 뭐냐? 부모에게 인정받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에게 인정받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인정받으려면 어디 가는가? 교회 가면 된다는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거든요. 

  

그러니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고, 순종하게 되면 먼저 믿었던 사람들, 목사부터 장로가 볼 때 “아, 당신은 우리하고 같이 천국 갈 백성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쓸 사람이다.” 해서 한패로 봐주고, 한패로 봐주면 성만찬에 넣어주고, 머리에 물 뿌려주고, 이렇게 해서 일치된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 하나님이, 내가 어릴 때부터 어르신네의식, 아버지의 이름이 신의 이름으로 확장된 거예요. 

  

그 하나님은 마치 내가 어릴 때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아버지의 존재가 나를 심리적으로 압박을 해서, 말씀 지키면 복 받고 말씀 안 지키면 내가 지옥 간다는 의식을 자생적으로 키워왔던 거예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인 줄 알고 점검에 나서는데 어떻게 점검에 나서느냐 하면, 내가 헌금 좀 적게 하고 신앙생활 소홀하다 했을 때 이번에는 어떤 처벌, 어떤 징계를 받는가를 찾아다닙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찾아다녀요. 

  

점점 더 이게 강화가 돼요. 내가 말씀을 안 지켜서 벌 받았다. 어떤 공포심이 오지요. 그 두려움과 공포심을 뭐로 해소하느냐 하면, 내가 목사님 말씀, 하나님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러한 징계가 완화되고 제거됨으로써 내 팔자는 물론이고 그 의를 근거로 해서 내 자식 대까지 대대로 복 받는 의식으로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불교에서는 복을 만든다, 복을 짓는다는 표현을 해요. 복을 짓고, 복을 짓는 그 선한 행동, 그게 자기 마일리지거든요, 그걸 자기 인생에 다 써먹고 그 나머지는 자자손손에 쿠폰처럼 써먹으면 돼요. 내가 잘해서 자식도 잘된다면 아낌없이 업을 쌓는 선한 일을 하겠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부처의 업이라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사자성어로……, 잘 들어놓으세요. 주권사상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 그걸 다른 말로 개혁주의사상이라 합니다. 정통적인 개혁주의사상이 주권사상이에요. 이게 기독교만 있는 줄 알고 기독교인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슬람교에도 있는 것도 모르고, 모든 종교에, 힌두교에도 있는 것도 모르고, 심지어 교회 안다니는 사람에게도 조물주라는 이름으로 이런 사상이 있는 것도 모르고. 

  

세상 되어가는 모든 것은 다 주의 뜻이다. 이 모든 것이 주의 뜻이라는 이 사상이 이단적인 겁니다. 악마적인 거예요. 그런데 지금껏 30년, 40년 신앙생활 하면서, 선교단체에 봉사하면서 죽 들었던 것은, 주권사상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계속해서 양육 받고 훈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걸 뒤집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것이 ‘예’가 된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만들었다고 하는 창조주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되어버려요. 모든 것이 패스가 돼요. 쉽게 말해서 주님 혼자 좋으라고 만든 세계에 우리가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님 혼자 좋으라고 하는 세계에요. 예수님 혼자입니다. 우리 좋으라고 만든 세상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만 사랑하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시작을 일단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놓았으니까 나 좋으라고 나를 만들었겠지, 여기부터 시작하지요. 이것이 뭔가 오해가 된 거예요. 이 오해를 뜯어고쳐야 돼요. 골로새서 1장에 따르면 그것이 오해입니다. 나 좋으라고 세상이 있고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에요. 

  

나 좋으라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 좋으라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제거하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다 죽여 버려요. 쓸데없는 것을 다 잘라버리는 겁니다. 알맹이만 건져내는 거예요. 그게 복음이에요. 이게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어떤 선한 일, 어떤 업을 쌓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그 이름이 사울로 있을 때에 그가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어떤 업을 세웠던가요? 어떤 착한 일을 열심히 했던가요? 사울에게는 예수님 만나려고 착한 일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는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어요. 

  

사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의 그 하나님은 지금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는 그 하나님,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이라고요. 그리고 그 하나님과 사울 사이는 간단해요. 신은 나를 창조했고 만들었기에 그 만드신 하나님에게 헌신과 충성을 다하겠다, 이런 조건이 성립된 그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은 인간이 자기가 만든 조건이지 주님께서 그런 조건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천지 창조할 때 1, 2, 3, 4, 5일 동안 만들 때 인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이 태어나고 난 뒤에 “하나님, 코끼리는 저렇게 코가 길면 안돼요. 금붕어는 물속에서 있으니 불쌍한데 새처럼 공중을 날게 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이미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자로서 관여하거나 간섭할 수가 없어요. 

  

왜? 마지막에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 별이 왜 있는지를 아십니까? 달이 왜 있는지 알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었던 겁니다. 욥은 계속해서 자기가 아프니까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픕니다. 좀 해결해주세요.” 하니까 “네가 북두칠성 만들 때 거기 있었나?” 하고 물었어요. 하나님은 다시 창조시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천지 창조할 그 때 이미 마귀는 만들어졌거든요. 마귀가 6일째 만든 인간을 첫째 날 이전의 자리로 강제로 끌고 간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귀의 심정이 되어서 간섭하는 겁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은 나를 날 때부터 이상한 DNA, 술 좋아하는 이런 DNA로 만들어서 내 인생 힘들게 했습니까?” 이런 것, 또 “하나님, 제가 어딜 봐서 여자성격입니까? 저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적당합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 인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 간섭을 해요. “왜 저는 키가 이렇게 작습니까? 남들처럼 평균적으로 175는 되어야지요.” 이런 식으로요. 

  

이건 누구 성질머리에요? 인간은 그냥 주신대로 모든 것이 패스입니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 7일 동안 만들어진 모든 것이 주께서 따로 사랑하신 분이 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만들어놨지요? 그렇지요? 이제 알았네. 그러니까 모든 만들어진 것들이 그리스 도안에서는 다 패스고 오케이입니다.”라는 고백하라고 주께서는 인간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본인들이 예수님도 아닌데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해야 될 입장에 있는 우리를 마귀가 성질머리 더럽게 만들어놓아서 이것을 마귀가 있던 태초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주적, 원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누구와 싸우는가? 마귀는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종이에요. 마귀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마귀는 적은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주적이 되는 겁니다. 가장 핵심적인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이 사실을 아담에게 알려주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대결장으로서 인류사는 진행될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이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게 될 것이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정수리를 내리칠 것이다. 거기서 인간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빠져야 되는 겁니다. 내 인생에서 나를 빼세요. 덧셈하지 마시고 뺄셈하세요. 여자의 후손에 소속되든지 아니면 뱀의 후손에 소속되든지 소속된 역할만 있을 뿐입니다. 

  

그 역할을 하려면 지금 우리가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우리의 이 자리가 강제로 이송되어야 됩니다. 어디로 이송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이송되어야 합니다. 그 이송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성령이며 성령이 왔다는 그 증거는 뭐냐?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사건으로서 우리에게 통보해주지요. 

  

십자가사건이 뭐냐 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육적인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의 접점이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다 이루었다.” 그 당시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했어요. “저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너무 아프니까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뭘 다 이뤄? 뭐 달라진 것이 있어? 어이, 친구야! 저 인간 죽는데 뭐라도 달라진 것이 있어?” “없어.” “아줌마는 뭐 달라진 것 있어요?” “없어요.” 똑같아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요. 

  

서기 30년경 일입니다. 그 후에 세상 끝나지도 않았어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고 마태복음에 나와 있어요.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약간 돌아다니고, 그 다음에 일식이 일어나면서 해가 어두워지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문둥병자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그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그 다음날도 그랬느냐 하는 겁니다. 그 다음날은 멀쩡하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십자가의 그 다 이루었다는 그 발언자체를 무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배후에 누가 그렇게 했느냐?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뱀의 후손, 사탄, 악마가 그걸 개 무시하라고 충동질 한 겁니다.

  

“모든 것을 용납해 주겠다. 하지만 십자가복음에 대해서는, 영과 육의 접점이 되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마라.”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신이 사람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한다고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언급한 거예요. 십자가 밑에 섰던 로마 군병이 “저 인간 뭐라는 거야?” 하듯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보면서도 우리는 “사도바울이 이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 거야?” 개 무시해버리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성경이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우리 성경 하나 만들자.” 이렇게 요청한 것이 아니에요. 요청하지 않았는데 그 책이 우리에게 펼쳐졌다는 말은, 절대적기준이 여기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절대적기준이 들어 있다는 말은, 이 기준은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 책을 덮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납득 안 되고 이해 안 되면, 모든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리스 도안에서는 하자가 없다, 하자 없는 세상이고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게 무슨 희한한 소리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덮어버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게 있다고 우리는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가 선택할 사항의 문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제 삼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당 가거나 지옥갈 수 있는 제 삼의 독자적이고 고립된 우리의 영역은 없습니다. 그런 선택권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 땅에서 힘들어서 못사니까 죽어서는 호강하자, 그래서 천국 가겠다고 나대는 그 모든 짓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마저 사탄의 일로 간주해버립니다. 

  

왜? 시작을 내가 납득이 되는 일로부터 했기 때문에 구원받겠다는 것이 죄가 되고 심지어 그 죄의 극단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이 사탄의 마지막 하게 만드는 고백입니다. 굉장히 성스러워 보이지요. 거룩하고 경건해보이고.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악으로 악을 씻어내는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악으로 악을 씻어내는 방법. 

  

여기서 악이란 악마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천국 가느냐 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야기해봤자 항상 우리는 우리가 예스가 되는 쪽만 생각하기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항상 자기가 자기 인생을 선택한 결과로 자기를 간주해요.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은, 내가 이렇게 선택했기에 나의 선택의 열매라고 자기 인생을 보는 겁니다. 

  

선택을 하게 되면 밀어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 밀어내는 사람을 타자, 남, 이방인, 그런 겁니다. 알고는 있지만 함께 지내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 누군지는 알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어요. 계속 밀어내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선택은 무조건 오케이, 나에게는 진리가 돼요. 

  

그래서 예, 아니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실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결정은 무조건 오케이고, 그렇게 않고 오케이가 성립되려면 ‘아니요’가 같이 발생되거든요. 그래서 너는 나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고 밀어내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사람이 따로 장착되고 내가 싫은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 사귀고 싶지 않은 사람은 계속 밀어내는 작업을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나의 세계가 형성돼요. 나의 세계의 이 덩치, 이 덩치를 그대로 천국까지 끌고 가겠다는 것이 소위 신앙인들의 고집입니다. “하나님, 제가 선택해서 예수 믿었고 오늘도 제가 선택해서 바쁜데도 교회 나왔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인정받기를 좋아한다고요.

  

두 번째 이야기한 것이 나름대로 ‘예’와 ‘아니요’를 본인들이 늘 실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내세우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진짜 살아 있는 영적세계는 접점이 뭐라 했지요? 십자가지요. 그 십자가라는 것은 살해당한 사건이에요. 누구한테? 사도바울한테, 그리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충성한 자들에게. “너는 싫어.” 하고 그들의 단호한 선택으로 밀어낸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유대인들의 지도자는 아주 명석하고, 판단력이 있고, 합리적인 사람들이고, 침착하고, 성급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평소에 회의할 때도 함부로 누군가의 독자적인 주장이 진리가 되어서 하나님에게 벌 받을까 걱정을 하면서 70인을 모아서 그 70인의 의견이 만장일치가 되지 아니하면 신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의 합리적 사고에 의해서 어느 누구하나 예수 죽이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명석하고 똑똑한 유대지도자들이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정신 바짝 차려서 결정해서 생긴 결과가 십자가사건이에요.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사건을 가지고 도로 우리에게 들이닥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어리석고 미련하게 본다. 너희들은 나처럼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어리석고 미련한 편에 서서 살아야 된다.” 십자가사건을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자기 딴엔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했는데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사건으로 들이닥쳤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구십니까?” 벌벌 떨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냥 예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러면 사도바울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냐 하면, 내가 핍박을 할 수밖에 없는 예수를 사도바울은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 그런 관계라야 우리가 예수한테 인정받는다는 애초의 욕구와 기대는 거기서 삭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소에 인간은 날 때부터 남에게 인정받는 보람과 행복으로 살았어요. 

  

심지어 그 인정받는 그것이 과도하게 되면, 내가 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그 결과는 뭐냐? 자살이에요. 자살해서 죽는 자만 자살이 아닙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자살하고 있는 중이에요. 영어 알파벳이 a, b,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c거든요. 씨, 씨, 하면서 매일같이 항상 자살할 만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까짓것 힘들면 죽지 뭐.” 

  

내가 날 거둬주고 내가 날 인정해주지 않으면 누가 날 인정하겠어요? 그놈의 인정받는 그것이 나보다 더 세요. 인정받겠다는 힘이 내가 살아가는 그 힘보다 더 세요. 인정받는다는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꾸 남들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 부끄러움이 두려움과 공포로 작용합니다. 

  

옷 입으면서 여자들이 그러잖아요. “여보! 이 옷 어때?” “괜찮아.” 남편이 귀찮다는 듯이 분명히 이야기해요. “좋아. 그대로 입어.” 그거 입고 나가는 줄 알았어요. 5분도 안되어서 “이 옷은?” 그걸 왜 묻는데? 그것도 괜찮아. 더욱더 귀찮은 것은, 아까 입었던 그 옷을 다시 입고 와서는 “이것은 어때?” “괜찮다고 했잖아.” 

  

왜 혼자 있을 때는 신경도 안 쓰다가 나갈 때는 옷에 신경을 그렇게 써야 합니까? 가식이 없는 세상은 없기에 모든 것이 가식적으로 평소에 살아온 본때가 습관이 되었어요. 살아가는 것이 그저 남들 의식해서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래요. 이런 식의 인간세계에서 그냥 머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천국에서도 그걸 인정해주느냐 하는 겁니다.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자기의 과거와 예수님 만난 이후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중심이 아니었고, 6일째 만든 그 피조물 중심이 아니었고, 만들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 옆에 계셨던 예수그리스도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해 주신 겁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을 위하여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은 다 갖추어질 대로 갖추어졌다. 심지어 마귀까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빛이 오니 갑자기 이 세상은 졸지에 보편화가 되어버립니다. 갑자기 누구누구 할 것도 없이 전부를 뭐로 보는가?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갑자기 어두움이라는 용어를 써버려요. 모든 인간도 비교할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어두움이 어두움과 비교해봐야 비교가 되겠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어떤 비교도 하지 말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은 옷을 뭘 입었느냐 하는 것도 의미 없고, 남에게 인정받을 이유도 없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어두움에게 인정받아서 뭐할 건데요? 지옥 갈 거예요? 어디에 ㅆ먹을 것이 있습니까? 아무 써먹을 데가 없어요. 

  

그런데 그 어두움, 완전히 먹물보다 새까맣게 보편화를 만들었는데 주님께서 그 어두움 속에 잠입을 합니다. 잠입을 하게 되니 그 어두운 세계가 예상외로 굉장히 복잡해졌어요. 어떻게 복잡해졌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노력들, 종교가 아주 발달되어 있습니다. 종교가 발달되어서 주의 말씀을 뭐로 바꾸는가? 자기의 윤리와 도덕으로 다 바꿔요. 윤리와 도덕으로 자기 몸을 다 변신시켰어요. 가식으로 다 변신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개 같은 인간이 교회 나와서 인간이 되어서 천당 가겠다는 거예요. 이게 절정의 어두움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내가 어떻게 됩니까, 자체를 묻지를 말라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나의 가치는요, “하나님, 저 어때요?” 물으면 안돼요. 십자가에서는 “하나님, 어떻게 살까요?” 그것 묻지 마세요. “하나님, 저를 왜 죽이십니까?” 묻지를 마세요. 

  

이렇게 물어야 돼요. “주님, 왜 아직도 저를 살려주십니까? 내가 꼭 여기 왜 있어야 됩니까? 있을 필요가 없는데 왜 꼭 있어야 됩니까? 이 쓰레기를.”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가 마귀의 앞잡이다 보니까 맨날 그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슬쩍 TV를 보니 이런 대사가 나와요. 

  

평소에는 순한 남자친구인데 재벌 2세입니다. 여자 친구 하나 놔두고 두 남자가 주먹질을 하고 있어요.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여주인공이 하는 말이 있어요. “너는 평소에 보자기만 내는 줄 알았더니 주먹을 내내?” 가위바위보, 단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자기는 모든 것을 받아주고 순하다는 의미로 쓴 거예요. 

  

평소에 보자기만 주먹도 낼 줄 아네, 그런 뜻입니다. 왜 주먹을 내서 또 다른 남자친구를 때렸느냐는 그 말이지요. 여자 하나 놓고 두 남자가 서로 싸우는 그 대목에서 그 순하디 순한 그 남자가 여자문제만큼은 양보 못하고 주먹질을 하더라, 그 이야기에요. 평소에는 내가 양보하지 뭐, 내가 다 안고 간다, 하다가 그 여자 앞에서는 주먹질을 하더라는 그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희생하고 양보하고 봉사해도 그것이 내 안에서는 다 선함의 마일리지로, 자기 의로 쌓일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를 갖고 있는 거예요. 이 구조를 그릇 엎듯이 엎어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심지어 내가 복음 아는 그것마저 착함의 마일리지로 포함이 되어버린다니까요. 

  

그러니까 자꾸 자기가 착해져요 착해지니까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착함을 포기할 생각이 점점 더 없어지는 겁니다. 낭패에 이르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내가 무가치한 존재로 나타나야 되는데 뭘 하기만 하면 착한데 어떻게 합니까? 정말 우리 교인들 같아. 너무 착해요. 맨 날 주먹 안내고 보자기만 낼 사람들 같아요. 

  

이걸 어떻게 갈아엎느냐 그 말입니다. 관건은 이겁니다. 신앙생활 개판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신앙생활 나름 착하게 하고 있는 그것이 문제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뭘 준비하셨는가? 말씀을 준비하셨습니다. 내가 필요해서, 내가 착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고, 나의 뒤통수치는 말씀들로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깔아놔 버렸어요. 

  

뒤통수를 치기 시작합니다. “사람 보기에 네가 착해 보이지?” 뒤통수를 치면서 “네가 이 말씀을 지켰어?”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나오는 항목들이 죽 있어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또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왜 삽니까? 일찍 죽는 것이 낫지 왜 삽니까? 사는 이유가 없잖아요. 자꾸 모으기 위해서 살잖아요. 노후대책 마련하기 위해서 살잖아요. 

  

보험을 왜 듭니까? 안 좋은 일 생길까봐서 미리 대비하잖아요.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뭘 잊으려 하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자꾸 애써서 그 이야기에서 애써서 도피하고 도망치고, 그런 말씀이 안들 리는 곳으로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돈을 모으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나의 혼자의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이 정신이 뭐냐? 내가 착하게 사는 이 마일리지 가지고 천국을 뚫어내겠다는 겁니다. 예수 잘 믿는 그 마일리지, 교회 봉사하고 헌금한 그 마일리지, 충성한 마일리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한 그 마일리지, 그 업보, 이게 기독교신자인지 불교신자인지 구분도 안 되는, 그냥 도 닦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것,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본래의 자리를 이탈했기에 마귀의 앞잡이로서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번에 우리를 뭐로 보는가? 우리를 처음부터 하나님의 원수로 봅니다. 예수님이 개입해야 비로소 이 사실이 알려져요. 우리한테 예수님이 왔을 때 우리는 남하고 비교할 생각하지 마시고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비교해야 돼요. 예수님은 어디까지 낮아졌는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졌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낮아질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기까지는 안 되고 근처에서 그 죽는 것을 관광하는데 까지는 갈 용의가 되어 있어요. 관광버스 타고 예수님 십자가 관광할 용의는 되어 있지만 진짜 죽기까지 되어버리면 살아온 것이 아까워도 너무 아까워요. 그리고 나 죽는 것은 괜찮은데 내가 죽어버리면 자식은 누가 키우고, 걱정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가 죽는 것 까지는 좋은데 막 태어난 내 자식은 누가 키울 것인데? 그 설움 받는 것은 어떻게 할 건데? 자식이 그렇게 걱정이 되면 본인만 달랑 합격해서 천국가고 자식은 불합격해서 지옥가면 천국에 가서 맘이 편하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전설의 고향이나 믿어라. 근본적으로 우리한테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말씀이 들어왔다는 사실, 요청하지 않은 말씀 속에서 우리가 원하지도 않은 하나님의 절대기준이 우리 속을 날마다 죄인이라고 꾸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돼요.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매일같이, 네가 핍박하는 예수를 날마다 만나야 돼요.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핍박하는 짓을 하면 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사세요. 그것이, 내가 나를 위하고, 내가 나를 보호하고, 내가 나를 지키는 행위들로 점철되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고 우리 안에서는 ‘아니요’입니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주님한테는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아니야.” “주님! 제가 열두 명 전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니야.” “제가 복음 설교를 했습니다.” 주께서는 “아니야.” “제가 이번에 기도응답 받았습니다.” “어디서 응답도 아닌 것을 응답이라고 붙이느냐? 왜 네 기도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응답이라고 하느냐? 그것도 아니야.” 

  

평생토록 우리는 ‘아니요’라고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예’가 되기 때문에, 그 ‘예’를 위해서 필요했던 ‘아니요’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덮쳐지면 우리는 주님의 그 ‘예’를 위하여, 주님만 ‘오케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아니요’로 편성된 시나리오에 가담이 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복입니다. 이게 우리의 영광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니요 예수 그리스뿐입니다.”라는 고백이 진정성 있게 튀어나오는 거예요. 매일의 삶을 통해서. 내가 여기 살아가는 것은, “나는 죽어도 그만인데 예수님을 위하여 아직도 주께서 살려주시는군요.” 살아가면서 주님만이 왜 ‘예’가 되고 우리는 ‘아니요’인지를 진짜 맘 편하게, 자기에게 절대로 기대하지 않고 맘 편하게, 주먹을 내든지 보자기를 내든지 그냥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겁니다. 악으로 악을 씻어내는 거예요. 악마가 와서 도와주게 되면 우리는, 아까 기도하신 장로님의 기도내용처럼, 나한테 끼어있던 양파껍질이 다 벗겨지면서 고스란히 내 안의 괴물 같은 내가 나왔을 때 비로소……. 그게 나오기 전에는 이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이여, 인생을 어떻게 살면 바르게 사는 겁니까?” 이런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여,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더는 이런 인생 못삽니다. 남에게 인정도 못 받고, 사람취급도 못 받고 부끄러워서 못살겠습니다.” 이렇게 항의하듯 기도하다가 세 번째로, 드디어 세 번째의 영적단계에 들어가지요. 

  

“주께서 더 안 살려줘도 괜찮습니다. 나의 소원은 이 몸을 떠나 주와 합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한 2초가요. ‘내 성질에 안 맞는, 희한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고백을 내가 하다니.’ 그렇지만 그런 순간이 불꽃놀이처럼 짧지만, 왔다가 사라지지만, “주여, 제가 주 앞에 죄인입니다.” 하는 순간 그 멀리 갔던 행복이 한꺼번에 확 밀려옵니다. 

  

자일리톨 껌? 박하사탕? 그런 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희열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양이 되어서 우리에게서 우러납니다. “주여, 더 안살려줘도괜찮은데 그저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내가 뭘 해도 죄인인 것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껏 ‘아니요’라는 삶을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아니요’인줄도 모르고 그게 ‘예’가 되는 줄 알고 우리는 그 대가와 보상을 은근히 노렸습니다. 이제는 뭘 해도 이미 주님만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을 위하여 ‘아니요’라는 삶을 살더라도 한 순간도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