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강-고후 1장 12-14(예수님의 자랑거리)1610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12-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런 투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 안 믿는 것을 내가 아는데, 혹시나 믿는 자가 있을 수가 있다는 투로 이야기를 해요. 천명에게 복음을 전해도 999명이 안 듣는 것을 내가 알고 그것이 당연한데 그 중에 한명이라도 있다면 사도바울이 그 한명을 위해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양이 백 마리 있는데 99마리가 안 듣고 안 믿습니다. 그런데 혹시 한 마리의 양이 있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을 보고 내가 진실을 언급을 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뭐냐? 이미 구원된 자가 있다는 거예요. 구원되려고 애쓰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가 있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구원받았기에 지금도 주께서 작용해서 구원을 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발산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되었기에 구원되는 방식을 주는데 그 방식은 예상하는 방식이 아니고 예상 밖의 방식으로 구원의 능력을 계속 공급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은혜의 행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 은혜의 행함과 대조되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12절에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어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은혜의 행함으로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은 자에 한해서 주어지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보기에 그런 사람이 드물지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지요.
없다고는 할 수 없고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진실만을 전하겠다. 전했을 때, 예수의 날, 구원의 날에 그 사람이 천국에 등장한다면 이것은 서로가 자랑이 된다는 겁니다. 자랑이라 하는 것은 늘 상 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이고, 놀라워라. 대단하네. 성공했구나. 참 기특하게도.” 이런 형용사, 감탄사가 붙으면서 자랑이 되는 거지요.
사도바울의 이러한 비장한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육체이 지혜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이미 눈여겨 보고 있고 다 알고 있어요. 백날 이야기해 봐야 안 믿는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자랑거리가 될 만한 사람이 분명히 등장할 줄로 내가 인정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외치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에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숱한 반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반발을 하게 되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 육체에 지혜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몸의 상식에 해당됩니다. 천국이 있다. 그러면 시도할게요. 구원받기 위해서. 이것은 자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문제가 10절에 보게 되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여기 건진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9절에 보면,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건진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사도바울이 자기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뭔가 비장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너무 쉽게 보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산소 같은 세상, 깨끗하고 말끔하게 표백된 것 같은 세상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이 세상자체가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빡빡하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는다고 우기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특히 고린도교회교인들에게는 굉장히 수월하게 구원을 받는 투로 느끼고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고개가 갸우뚱, 하면서 “저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나 모습이 아닌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분명히 환란 받고 가는데 저 사람들은 환난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신자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분명히 하늘나라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되는데 환란이 없어요. 뭔가 사도바울의 말에 대해서 곡해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심각하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점검에 나서겠지요?
그래서 구원이 뭐냐,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장에 나와요.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죄가 없는 이상은 자기백성도 없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죄라는 것이 먼저 형성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죄에서 건져내거든요. 죄에서 건짐 받을 때에, 찬송가 490장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주님의 보혈로 날 씻으사.”라고 나와 있다고요. 주님이 보혈로 날 씻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죄에 빠져 있는 너는 절대로 너희 행함으로 너를 건져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 그것으로는 구원 안돼요. 헌금 하는 것, 안됩니다. 열심 내는 것, 희생하는 것, 헌신하는 것, 봉사하는 것, 선교하는 것, 다 구원이 안돼요. 착한 일 하는 것, 그런 것은 안 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죄에 푹 젖어 있어야 돼요. 마치 시커먼 잉크병 안에 스펀지가 푹 젖어 있듯이. 그렇게 젖어 있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푹 젖어 있어서 육체적으로 괴로움이 오니까 여기서 빨리 탈피해서 죽어서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것도 바로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유리한 것,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죄에서 못 빠져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인생 자체가 꼬이고 엉망이 되니까 교회 나와서 어떤 해결을 보겠다고 나오는데 그것은 시커먼 잉크가 적신 스펀지채로 그대로 나온 거예요. 그래가지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봉사도 해보고, 교회 놀이 다 해 봐도 그것은 죄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보혈의 피로 씻어내야 돼요. 그리고 보혈의 피는, 죄송합니다만, 본인들 피가 아니에요. 본인이 피 흘려가면서 선교해 봐야 그 흘린 피로 구원을 못합니다. 본인의 땀과 노력과 피도 안 되는데 본인의 헌금과 희생과 봉사, 이런 것으로 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그것이 나를 구원할 것 같아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구원될 것 같습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가 왜 예수님의 옆에 포진되어 있었나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실패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들은 자기의 재산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주님을 3년간 따라다녔습니다. 교육 잘 받았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남은 것은 주님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울산강의에서 그랬습니다. 정말 성도라면 주님을 배신하세요,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주님을 배신해야 돼요. 이게 우리가 들키기 싫었던, 이것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 대목이 뭐냐? “솔직히 예수님이 싫습니다.”하는 그것. 예수님이 싫다, 예수님을 배신하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말은, 비로소 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저는 박수치고 싶어요. 축하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제 아셨어요?
주님한테 실망해야 돼요. “주님이 이 정도였어요? 이 정도로 우리의 모든 기대를 어긋나게 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예수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나는 예수하고는 바이바이, 입니다.” 이렇게 나올 때, 진즉에 그렇게 나와야 돼요. 진즉에 그렇게 예수님을 생각했어야 돼요. 그 전에 예수 알았던 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유포한 거짓 예수를, 상품화된 예수를 손에 쥐고, 복 받을 것이다, 구원받을 것이다, 착각하신 거예요. 주님은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흥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는 죄다 끄집어내고, 완전히 호작질을 해서 우리 죄를 다 끄집어내는 그 작업장 안에 주님이 이미 들어와 있을 때, 껍데기 같은 우리는 주님을 싫어하고 배신하고, 그 안에는 이미 주님이 이미 우리를 장악하고, 그런 식이에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질질 끌리면서 구원되는 겁니다. 드라마 속 장면인데 어떤 남자가 차를 몰고 조수석에는 여자가 탔어요. 가방을 안고 있어요. 남자가 핀잔을 하면서 “가방이 보물이야, 가방에 든 게 보물이야?”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대사 치는 데 1초쯤 걸렀어요. “가방이 보물이야, 가방에 든 게 보물이야?” 뭐 그리 귀한 것을 끌어안고 있느냐는 그 말이지요.
그 대목에서,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잘 묘사했는지.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보물입니까, 여러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보물입니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보물이라면 중간에 깨어져야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실망스러워야 됩니다. 그동안 예수 잘 믿어보겠다고 몸부림 친 것, 다 그거 연기한 거예요. 노림수 가지고 헛짓 한 겁니다.
여러분 보기에 여러분이 더러운 인간입니까? 꼭 품에 안으세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하듯이 꼼 품에 안아요. 여러분 보기에 여러분이 실망스럽고, 여러분이 불신자고, 틈만 나면 주 앞에 원망할 때 놓치지 마세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이제 네가 너라는 무거운 짐을 이제야 놓을 때가 되었구나.” 천국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천국에 합당하다는 그 조건과 기준은 우리가 몰라요. 우리는 육체를 껴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로 천국에 합당하지를 못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들어오자마자 사도바울이 편지를 써가지고 일갈하고, “너희들 안 믿는 것은 알지만 너희들 중에 혹시 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외친다.” 하고 시작한 것이 뭐냐? 환란이었습니다.
환란이라는 것은 이미 사도바울이 당하고 있는 거예요. 당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환란을 당할 수 있는 이유, 사도바울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환란을 당해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조건 때문에 환란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계신 분 때문에, 그 분을 겨냥해서 세상이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너는 네 속에 있는 자와 헤어지라고 자꾸 세상자체가 우리보고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남들은 다 자기 잘난 재미로 살아. 나 자기매력에 빠져서 살아. 다 자기 스스로 자랑스러워 살고 있어. 그런데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예수에게 얽매일래? 이 바보야. 남들은 교회를 가도 편하게 가는데 너는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복음에 꽂혔느냐?”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의 입장은 뭐냐? 사도바울이 자기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세상에 시비를 걸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자기하고 경쟁대상이라고 세상에 있는 악마를 그렇게 공격을 하겠어요? 사도바울 안에 뭐가 있어요. 가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방 안에 뭔가 있어요. 이 가방 안에 든 것 때문에 가방이 괴로워서 못살아요. 가방이 힘들어서 못살아요. 늘 티격태격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고 복음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귀한 그릇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천하고 천한 그릇에 복음이 들어 있는 거예요. 미국 뉴저지 이상현 목사님이 작년 6월에 설교한 것을 누가 언급을 해줘서 제가 올려놓았습니다. 찾아보니 한 개가 딱 있었어요. 그걸 봤습니다. 1시간 26분인가 설교를 해요. 제가 목사님에게 좀 짧게 하라고 했거든요. 예배마치고 결혼식 가는 사람도 고려해야 하니 짧게 하시라고 했는데, 목사님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셔서 설교 하시지요.
그 내용이 이겁니다. 부자는 이름도 없고 거지는 이름이 있는데 거지 나사로가 왜 거지되었는가? 그것은 거지되어야 구원받기 때문이 아니에요. 거지 나사로를 앞장세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함, 예수 그리스도의 양상으로서 전개하는 겁니다. 물론 비유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지라고 얼마나 얕잡아 보겠습니까?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개 무시하겠지요?
반면에 앞집에 사는 부자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넘쳐났습니다. 무슨 복을 받아서 저렇게 부자가 되었느냐고 전부 다 하나님과 부자 된 것을 연관시키면서 이야기했겠지요. 그리고 거지는 누가 봐도 저주받았기에 거지가 되었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거예요. “속았지? 이것들아!” 너희 꾀에 속은 거예요. “구원받고 싶어? 내가 구원자 보내줬어.”
사람들은 “어디 왔는데요? 언제 왔는데요? 없는데.” “갔었어!” “언제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자체가, 죄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건져 낼 구원자에요. 제가 미국 가서 강의할 때, 예수라는 이름 자체를 아무리 원어분석을 해도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오는 그 내용이 안 나온다고 했어요. 예수는 그냥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 마태는 이렇게 붙여줍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 예수에요. 그 이름이 예수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라는 이름은 이름 자체가 아니고 그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 되도록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연관된 기능을 그 사람에게 발휘시켜 버려요. 어렵지요?
예수라는 이름에 뭐가 걸쳐 있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라는 복잡한 기능이 엮여 있는 이름의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본인의 인생을 못살아요. 본인의 인생을 못 챙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거지 나사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들이 겪지 않는 환란을 겪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나 나나 우리는 죄에 머물러 있다는 그 정도가 아니고, 죄에서 건질 수 있는 어떤 여력, 능력도 우리한테는 소멸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보혈의 피로 씻음 받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기능, 가방 속에 있는 보물이 있어 놓으니까 본인은 죽을 지경이지요.
나는 남들처럼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그렇고 그런 인생이 살고 싶은데 내 안에 계신 분이 그걸 용납을 안 하네요. 나를 힘들게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열두 제자의 가는 길, 그 코스를 밟아야 돼요. 나름 최선을 다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마지막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의 그 고백을 거기서 내뱉을 수밖에 없어요. “나는 저 사람 모릅니다. 나는 저 사람과 앞으로 결별합니다. 나는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죽겠습니다. 숨 좀 쉽시다.
그랬던 자들이 바로 베드로였고, 도망치기 바빴던 자들이 열두 제자였고, 그 중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53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양들이 다 제갈 길로 갔거늘. 여러분,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지점, 우리의 위상을 똑바로 이야기해 줍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당이라는 제갈 길로 갔고, 어떤 사람은 목사 된다는 제갈 길로 갔고, 어떤 사람은 목사 된다는 제갈 길로 갔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다니기 시작하는 제갈 길로 갔는데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자기 성질대로 했던, 자기 나름대로 ‘이러면 구원되겠지’라고 통박을 굴렸던 죄의 또 하나의 양상으로서 그 짓 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파키스탄의 선교지로 가는 죄를 지었고.
이러한 것을 그냥 방치해 버리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구원받은 자 아니겠지요. 제가 설교 처음에 이렇게 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제 구원의 기능이, 구원시키는 기능이 발산되는 조로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인식은 믿을 것이 못돼요. 구원을 시켜주는, 구원에 합당한 고리, 주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가 계속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아,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런 특이한 현상이 내 인생에 스며 나오는구나.’라는 것을 소급해서 아시면 되는 겁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그런 주제를 걸고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복음이라 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고 그 버린 아들을 다시 되찾는 그 작업이 가방 안에 있는 보물처럼, 우리를 가방으로 여기고 그 안에 같은 기능이 일어날 때 우리 안에 복음이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과 대조가 되는 것이 뭐냐? 열 두 제자들이 아주 정확하게 묘사를 했어요. 예수님을 이용하게 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가짜 복음이에요.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가짜 복음을 세일을 해버렸어요. 빅세일이죠. 본인이 설치는 겁니다. 나대지 말아야 되는데 나대는 것이 문제에요.
왜 그리 나대느냐 그 말이지요. 그거 하면 구원받은 티가 납니까? “우리 목숨 바쳐드리옵나이다.”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안 받는다!” 안 받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들의 피, 보혈의 피만 받아요. 교회 40년 다니고 그걸 이제 아셨어요? 누가 이야기해 줘야 알지요.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요. 보혈의 피 안에 뭐가 섞여 있는지 알아요? 우리가 열심 낸 것이 섞여 있습니다.
어떤 레벨을 붙이면서. 이게 바로 악마가 너에게 시킨 죄라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열심 냈던 그것이 바로 죄의 극단이었고 절정의 죄였습니다. 그냥 살면 될 것을 괜히 설쳤어요. 십이로 괜히 했어요. 속임수에 넘어간 거예요. 아니,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말이 잘못이에요. 제발 날 좀 속이더라도 내가 구원받은 사람의 티를 증명해 달라고 요청했지요. 본인들마다 그렇게 요청한 거예요.
거기에 목사가 플라시보효과라고 가짜 약을 남발한 거예요. 가짜 약을 남발하니까 헌신하고 봉사해서 구원받은 척을 하니까, 갑자기 맘이 평안이 오고 안식이 와서 찬양을 한다고 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고, 그 짓 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그 짓을 하고 있고요. 갑자기 말이 안 되니까 방언인줄 알고 착각을 하면서 랄랄라, 하고 있고.
이 모든 짓거리가 보혈의 피, 아버지와 아들의 복음을 모독하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만있으면 주께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육체의 지혜를 들춰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행함만 주시기에 육체의 행함을 전부 다 지우는데 어떻게 지우는가? 육체의 행함이 노림수가 있어요. 내가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것을 은근히 노리면서 인간은 육체의 행함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육체의 일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관계가 복음입니다.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다른 시간이 들어와요. 이게 뭐냐? 미래를 위해서, 미래와 연결된, 미래에 확정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카펫처럼 쫙 깔아버려요. 영화제에서 카펫 깔 듯 죽 깔아버리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복음 안에 있는 시간관입니다. 미래가 미리 와서 그 미래를 위해서 과거가 설쳐대 버려요. 이미 구원받았기에 네가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미래를 아끼고, 미래를 소중하게 여기고, 미래를 증거하기 위해서, 미래의 우리의 드러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서 지금 과거라는 것이, 현재라는 것이 있어줘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14절에, “그것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서로가 자랑이 된다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걸 미리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아이고, 수고했습니다. 이 환란을 어떻게 통과해 왔어요? 아이고, 대단하네! 그 과거라는 환란의 터널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발목 잡는 세상의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왔습니까?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의 것으로 남에게 내세우며 자랑질 하고 싶었던 그 유혹을 어떤 식으로 떨쳐버리고, 그것을 다 팽개치고 이렇게 버젓이 구원받은 자로 왔습니까?” 하고 주님 앞에 자랑이 되는 그것을 미리 알고 우리에게 현재 그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미래를 조성해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전체에서 그러한 예들이 나오는데 구약성경 사무엘상 9장을 보겠습니다. 방금 제가 한 것을 두 자로 예언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9장에 보면 사무엘이 나오고 사울이 나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촌사람인데 그의 아버지 기스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상 9장 15절에 보면,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이게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우리 속의 보물입니다. 예언입니다. 여기 있는 사무엘에 예수님을 대입하시고요. 여기에 돌아다니는 사울에 여러분 자신을 대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살아왔던 과거, 지금 살고 있는 현재, 몽땅 예언된 겁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서 이러한 인생을,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을, 절대로 그 외에 다른 인생으로 길을 가서는 안 되는 확정된 미래 때문에 확정된 과거의 코스를 카펫 깔 듯 깔아서 우리를 질질 끌고 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 예언이 9장 15절에 한 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9장 17절에 또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20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라고 사무엘이 사울보고 이야기 합니다. 이미 암나귀라는 그 짐승 하나가 설정되어 있어요.
사울을 사무엘에게 이끌기 위해서, 유도하기 위해서 짐승 하나 조차도 주께서 무대에 필요한 구조물이고 배치물이에요. 그렇게 설정되어야 돼요. 결국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소품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연극의 소품으로서. 우리 가방안의 보물이 그런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우리 안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 자체가 미래에 확정된 것인데 그 미래가 우리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가 아닙니까?
그 아들의 나라, 아들을 주 되게 하신 필요한 모든 조건이 예수님 이후에 우리에게 그대로 장착되게 해서, 장착된 그 우리 안의 기능이 돌아보니까 과거마저 미래와 죽 한 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미래를 보니까, 너는 이미 구원받았고, 이미 구원받았던 그 능력이 계속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과거의 내 노동에 의해서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꾸만 그것을 가지려고 해요.
우리가 소유하는 힘보다도 잃어버리게 하는 힘이 더 세요. “이것은 내꺼야. 이것은 못 놓겠어. 이것은 내가 쥐고 있을 거야.” 그것마저 툴툴 털게 하는 힘이 더 셉니다. 더 강해요. 외손녀가 막 기기시작하고 뭐라도 잡고 일어서기 시작하거든요. 그 때부터는 집안이 난리가 나요. 전부 눈에 띠는 것은 다 손으로 쥐고 입에 넣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따라가면서 손에 쥔 것을 빼앗으면서 “맴매, 이것은 먹는 것 아니야.” 그러면 애는 안 빼앗기려고 쥐고 있고 엄마는 떼어 낼 때 애가 소유하는 힘보다 그것을 떼어내는 그 힘이 더 세요. 제가 동영상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엄마가 외손녀보다 더 세니까 애는 결국 자기가 자기 입으로 가져가던 그것을 결국 빼앗기더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기는 뭘 알겠습니까?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기껏 아는 것, 우리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전부 다 과거의 것이고, 그것도 내 것이라고 장착할만한 것을 골라서 나의 존재가 이 정도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끌어모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거든요. 그런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복음에 끼어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육체의 소욕으로 변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육체의 본성상 우리가 건질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죽어라고 안 놓거든요. 그게 우리의 양심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암 걸리는 이유가 뭐예요? 양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양심은 뭐냐 하면, 선과 악을 내가 알아서 조정하겠다는 겁니다.
나쁜 짓도 하지만 선한 짓을 많이 하게 되면 나쁜 짓을 적게 했으니까 상쇄하고 남는 것으로 천국 가겠다는 거예요. 이게 선악구조에요. 죽을 때까지 거기서 못 빠져 나옵니다. 이만큼 봉사했으면 백배는 안 바라지만 60배나 30배정도는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늘 간직하고 있어요. 과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쥐고 있어요. 안 놓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나의 선함과, 나의 가치 있음과, 나의 의미 없음과, 나의 훌륭함과, ‘절대로 나는 다쳐서는 안 되고 나는 깨져서는 안 돼.’ 이걸 붙들고 있는 겁니다. 과거를 소중하게 여겨요. 그러나 주님은 미래를 소중하게 봅니다. 그 미래에 합당하지 않은 것, 그 과거에 있는 것은 다 맴매, 해서 다 깨버리고 털어내는데 그 털어내는 것이 뭐냐 하면, 환란입니다. 그게 바로 고난이고 환란이에요.
아까워서 못 내놓습니다. 너무 귀해서. 제가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천명이 들어도 천명이 다 안 믿는다고 했지요. 여러분, 종교는 오락이고 이것은 장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실재에요. 우리는 놀기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고 농담하기 좋아하지 실재는 정말 무섭습니다. 사도바울은 알아요. 아무리 해도 이 고린도교회가 안 듣는다는 것을 알아요.
고린도후서 뒷부분에 나옵니다.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고린도후서 다 끝나고 나면 압니다. “너희들 중에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할 정도로 아주 강하게 나와요. 하지만 그 중에 한 명이라도 믿는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도바울은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진실은 이겁니다. 미래가 능력으로 와서 과거가 깨트려진 사람은 혹시 여러분 중에 누구요, 그걸 찾고 있는 겁니다. “주의 날에는 주께서 우리를 건졌습니다. 환란의 과거라는 시스템을 가동시켜서 환란이 없었으면 절대로 우리는 과거에 연연해서 과거를 안 놓을 위인들이었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깨트리면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라고 나올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까 그 사무엘상 계속 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본문 보면 볼수록 신기해요. 한 번 들어보세요. “네(사울)가 오늘 나(사무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비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그 다음에 3절에 보면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
시나리오 다 나왔네요. 벌서 만화책 각본 다 나왔습니다. 사울은 그냥 그 책대로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에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두 사람 만나고 세 사람 만나는 것까지 다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죽고 사는 것이 네 뜻이 아니고 발걸음도 세시고 키가 자라는 것도 네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예언덩어리고 말씀덩어리라는 거예요. 그 가운데서 네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꾸역꾸역 그래도 고집을 부리는 것은, 네가 어디에서 강렬하게 집착을 하느냐 하면, 네가 네 행함으로 살았던 과거의 업적을 꼭 쥐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과거의 업적을 가지고 뭘 만드는가? 선악적인 양심까지 괜찮게 구축해 놓았습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그들의 자기 죄에서 건질 자지요. 그렇게 되면 죄라고 지적하는 것이 어디까지 침투되어야 하느냐 하면, 끝까지, 우리의 양심까지 침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양심을 깨세요. 양심은 깨져야 됩니다. 아마 깨어질 거예요.
양심 붙들고, 그것이 자기의 기본 양심이다, 자존심이다, 이것은 나의 유일한 의로움이다, 가치다, 하는 그것, 여러분, 연세 들어가면서 다 깨어집니다. 남는 것은 육신의 본능밖에 없어요. 아프면 아야, 하고 배고프면 밥 달라고 하고, 힘없으면 자빠지고, 그저 “먹을 것 줘.” 자기에게 잘해주면 좋고, 귀찮으면 나가라고 하고.
벌써 그런 상황에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만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연세 많으면 몸 귀찮으면 다 귀찮은 거예요. 온유와 화평, 형제우애? 어차피 교회는 농담이었고, 말씀은 장난이고 오락이었습니다. 목사질 한 번 해보는 것도 취미로 해보는 것이고, 장로나 집사도 한 번 해보는 것이고, 자기의 허점을 감추기 위해서 위선 짓을 해 본거예요.
아무리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양심 건드리면 누구라도 가만 안두겠다는 그 되도 않는 외고집, 이것은 환란이 없이는 깨지지 않습니다. 가방 안에 있는 보물이 이 가방을 손댑니다. “네 평생을 살면서 네가 언제 한 번 주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랑한다고 고마워한 적이 있느냐?” 보물이 그렇게 하면 가방이 이야기합니다. “제가 25년 전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사랑했다면 네가 어떤 경우가 오더라도, 심지어 네가 죽는 경우가 있더라도 감사해야지요. 그게 사랑 아닙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것 챙기면 그게 무슨 사랑이에요? 남 이용해 먹는 거지요. 우리는 사랑할 줄 모릅니다. 우리의 육신의 본능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본능대로 그냥 사세요. 어차피 믿고 안 믿고, 택함 받고 안 받고는 목사가 결정할 문제도 아닙니다.
보물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지 마시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제가 보물을 넣어주는 사람도 아니고 배급 주는 사람도 아니에요. 여러분 속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사도바울의 이러한 이야기, 미래에서 이미 구원 받았고, 받았기에 이제부터 복음대로 네 죄를 들춰낼 거야, 라는 이 작업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예언대로 쓰시는군요.” 우리는 과거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우리 속의 예언을 지키려고 해야 돼요. 나의 이 과거 덩어리,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이 과거덩어리 붙잡지 말고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 주님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말씀이 나를 오늘도 어떤 식으로 장악하시고 어떤 식으로 나를 가지고 노는지를, 여러분이 기대하면서 주목해 봐야 돼요.
오늘도 나의 양심에 드릴을 박아요. 드르륵 박아서, “적어도 이정도 양심은……” 드르르르륵! 내일 되면 “주여, 이 정도 양심은 신앙적인 양심……” 드르르륵! 양심은 흥정의 산물입니다. 교회 좀 늦게 오면 헌금 천원 더 하고, 이런 것이 양심이거든요. 두 주 빠지면 만원 더 얹고. 하나 얹고 또 하나 얹고, 그것처럼 자꾸 ‘양심아, 양심아! 내가 너를 관리해줄게.’ 이런 식으로 하는데 관리할 양심이 있으면 여러분 암 걸립니다. 스트레스 받습니다.
양심 자체를 포기하세요. 여러분, 양심이 있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만 그것은 깨질 준비를 하시고 갖고 있으세요. 양심대로 살지 마시고 양심이 산산조각 깨진 그 조각조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 이렇게 까불다가, 잘난 체하다가 다 깨졌습니다.” 누가 깼는가? 내 가방 안에 있는 보물이 그렇게 깼다고 고백할 때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내 안에 성령이 임하면 네가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선교? 멀리 갈 필요 없어요. 이라크 가지 마세요. 바로 주님이 선교합니다. 누굴 향하여. 우리 자신을 향하여 지금도 선교하고 있습니다. 네 죄를 알게 되면 그것이 주님의 선교의 성공작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주님이여, 왜 아직도 저를 살려주십니까?” 살아 있기에 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뭘 하게 하시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왜 살아 있는지의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꿈적거리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움직일 때마다 여러분은 또 깨졌던 양심 조립해서 “이정도 하면 괜찮은 인간이지요, 하나님?” 또 이렇게 내세울 겁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미처 내가 몰랐던 죄라는 겁니다. 선악과에 미련가지고 선악을 자꾸 조립하려는 그런 것이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죄였고 그 죄를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음 받아서 우리를 이미 구원받게 하셨기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시는 주님의 기능이 여러분 속에, 가방속의 보물처럼 지금도 작동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고 제가 이렇게 설교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어차피 농담 같은 인생,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데, 하지만 살다보면 결국은 괴롭기 마련이고 이유도 모르고, 어딜 가는지도 모르는 저희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예언대로 간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이제는 내가 나를 지키지 말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완성된 예언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