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고난
2016년 9월 25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5-7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그리스도와 우리 인간들과의 차이점은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관련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반면에, 우리 인간들은 그냥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힘차고 무모하게 밀어붙이려 합니다. 이런 인간들에 있어 예수님은 그저 과거 한 때 살다 죽은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자신의 존재함에만 열중하면 생존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는 안 죽고 살아계신 채 활동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은 곧 성도는 단독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게 아니라 조종받으면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참으로 우리들이 성도라면, “나는 살아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아있다”고 말해야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세운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 ‘움직임’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기억력과 나의 이해의 일관성에 예수님의 존재가 종속되는 것이 됩니다.
차라리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뜻과 나의 원과는 무관하게 자꾸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이 터지게 한다고 해야 합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이 예수님의 움직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받으셨던 수모와 곡해를 반복적으로 성도를 통해서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낯선 환란’과 더불어 ‘낯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는 곧 성도가 독자적으로 살아보려는 생존 투쟁의 기대치에서 받게 되는 환란이나 위로는 아닙니다. 인간들이 현실관은 서로의 부대낌 속에서 생존의 터전 마련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장입니다. 즉 잘사느냐 못사느냐를 두고 얽혀있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현실관은 그게 아니라 죄와 의로 얽혀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생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환란과 위로는 이런 입장에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환란의 시작은 세례요한부터 시작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죄인지를 모르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성령에 의해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내용 전체가 세레 요한을 향하여 쏠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창세기 3장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창세기 3:21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죽옷’을 해입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옷을 먼저 해 입겠다는 것은 인간들이 죄짓고 난 뒤에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죄를 가리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방식을 따라 도로 인간에게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옷입는 자’로 정착시키십니다. 이는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디 만드신 인간은 ‘옷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구히 주홍글씨’로 낙인찍으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 어떠한 직업이나 성격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죄를 씻는 행위가 아니라 죄를 더욱더 확대시키는 행위입니다. 이 선지자의 기능은 예수님이 이어받게 됩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대목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은 사역은 죄의 근원까지 다 노출시키는 작업으로 연속됩니다. 점잖아 보이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실은 악마의 하수인들입니다.
옛날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무엘상 5:4-5에 보면,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한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에서패했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이긴 줄로 알았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진면목을 몰랐습니다. 블레셋 우상이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형태로 만든 우상이 두 손목과 머리를 깨어지고 언약궤 앞에 엎어져 있게 됩니다.
바로 이스라엘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 앞에 이런 자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즉 자신들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자기 중심지’로 여긴게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인간들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곧 중심이 되고 거기서 파생된 의미가 온 세상을 상호 연결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도가 당하는 환란이란 곧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도출된 그 환란입니다. 환란은 위로 동반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이 ‘갇혀 있는 상태’에 빠져나감이 이미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겁니다. 사람들의 모든 근심과 염려와 두려움과 걱정은 자기에게 있어 자신이 중심이라고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중심이 따로 있음을 알리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기대하는 바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 겪였던 그 아픔을 공유케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성도의 생존과 움직임이 그 개인을 위함이 아님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성과를 보여줄 기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던지 상관없이 이 세상과는 별개의 세상에 소속된 존재로서 움직인다는 사실이 이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하나한 것처럼 성도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이로서 성도가 받게 되는 위로는 세상에서 빠져 나간 자들만이 보이는 위로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예수님 한분의 의미를 분배받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5강-고후 1장 5-7(그리스도의 고난)1609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5-7절입니다. 신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개인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자기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원은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모든 물체와 사물, 물건들, 그런 것들은 자체적으로 계속해서 영원히 그것을 유지하려는 성격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천국에는 그런 잡동사니를 넣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어지고 그 깨지고 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로 재정비되고, 재정립되는 존재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야 그 천국은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 할 때 그 주체가 예수 믿는 것은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조물이 아니고 자기의 결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아니라 주께서 작용해서, 믿어지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로 합류가 될 때, 흡수가 될 때, 통합이 될 때 그 주님의 능력 안에서 헤엄치고, 자유를 누리고, 어디를 가든지 주의 인도함을 받을 때 이미 시작된 천국입니다. 이미 개시된 천국이에요. 성경에서는 모든 인위적인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을 저지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되기 위해서 성경에서 준비되신 분이 있는데 그게 성령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성령이 오셔야 육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그 모든 것이 저지되고 깨지게 됩니다. 성령의 활동, 이것은 그 사람의 옛날에 있었던 그런 자기물체, 자기사물, 자기육체를 그냥 그대로 고수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성령은 우리에게 어떤 움직임을 발산케 합니다. 그 움직임을 오늘 본문에서 환란이라고 합니다. 고난이라고 이야기하고. 고린도후서 쓸 때 이미 예수님이 몇 십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몇 십 년 전에 돌아가신 그 분, 그 분이 여러분의 눈에 하나의 사물로, 한물간 실체, 물건, 또는 신체로 보이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딱 깨놓고 말해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이에요. 죽으신 분은 어디까지나 이미 죽으신 분, 이미 지나간 분이고 사라진 분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미 처리가 되신 분이고 우리 가운데 없는 분입니다.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한다는 말이지요.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그 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면 그 고난이 무엇이냐고 물어서는 안 되고, “주님, 지금도 살아계신 것 맞아요?”라고 질문해야 돼요. “주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습니까?” “그러면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은 먼저 주님이 살아 있기에 그 다음에 제가 살아 있는 그런 관계성 맞지요?”라고 물어야 돼요. “따라서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살게 하신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 맞지요?”라고 질문이 와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고난이 나오고, 환란이 나오고, 위로가 나오니까 우리는 선입감에 ‘참 예수 죽은 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죽은 분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시련이 많으니 우리 팔자가 참 더러운 팔자다.’ 이렇게 자기신세 타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신세한탄으로 자기신경 쓸 것이 아니라 환희와 희열이 돼야 돼요. 아, 주님이 살아계심으로 현재 내가 살고 있다면 이제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떤가, 내 직업이 어떤가, 내 한 달 수입이 어떠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세자로 움직임입니다. 진리는 눈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움직이는 움직임이에요. 움직임 자체가 진리로서의 움직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움직임, 우리로 하여금 자꾸 한쪽으로 몰아가게 만드는 움직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양들이 그렇게 고백할 때 양들이 차렷, 열중쉬어, 하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는 겁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을 만세삼창으로 외치고 맨날 그 자리에서 외우기만 하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양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줘야 되고 그 움직임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목자가 양들을 끌고 있다는 그 움직임을 양을 통해서 발산하겠다는 것은 숨어계신 목자의 사역의 방법입니다. 그 사역이 오늘 본문 6절 중간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역사한다는 것은 히스토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움직인다, 활동한다, 그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속에 움직인다는 말은, 앞으로 네가 “주여, 제가 살아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살아 있음의 주체자리에 들어설 자리는 없는 거예요. “주여, 제가 살아 있잖아요.”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여, 살리든 죽이든 하나님의 움직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 주님의 살아 있음을 증거 해야 돼요. 주님의 살아 있음을 고백해야 돼요. 내가 살아 있음을 고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고백해 버리면 그 다음 나오는 과제가 생겨요. ‘어떻게 하면 더 살아볼까?’ 그 사는 방법은, 아침에 30분 이상 운동해야 되고, 약 먹어야 되고, 혈당 체크해야 되고, 조깅해야 되고, 등산가야 되고, 팬티 바람으로 마라톤 해야 되고. 맨날 신경 쓰는 것이, 나 살아 있어, 나는 살아야 해, 그것은 자기 움직임이지 주님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나 운동하는 것? 너희 보기에 내가 운동하는 것이 내가 살아 있다고 보여? 주님이 살아계셔. 주님이 나로 하여금 팬티 바람으로 마라톤 하게 만들었어. 주님이 살아계셔.” “주님은 2천 년 전에 돌아가셨어.”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옛날 과거의 인물인 이순신 장군 믿듯이 그렇게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게 아니야. 내가 믿는 것은 천국에 못가.” 내가 믿는 그 예수는 절대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주님이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가게 해주지 내가 확신하고 내가 인식하는 그 예수는 나의 치매현상 때문에, 나이가 듦에 따라 죽어가는 정신, 깜박하는 기억력의 내 인식 안에서 그 예수도 함께 허상으로서 사라질 겁니다. 내가 기분 좋을 때 믿는 예수와 기분 나쁠 때 믿는 예수가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내가 조작한 엉터리 예수 상에 불과해요. 이제는 그런 예수 철폐합시다. 그런 예수 버려야 되는데 그런 예수를 우리가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 예수는 내가 만들었기에,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위로받기 위해서 옵니다.” 누가 위로해 줘요? 윤복희? 여러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위로할 분은, 정말 예수님의 살아 있음의 결과물로서 우리를 통해서 고백되는, 연결되어 있는, 관련되어 있는, 관계되어 있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늘 고백해야 될 우리 환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위로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이제부터는 쉽게 갑니다. 우리가 보통 세상에서 위로받는 것은 뭐냐 하면, 살아보려고 하다 보니 당하는 고생가운데, 고난이 아니고 고생 가운데, 내가 살아보려고 애쓰는 고생가운데 당하는 환란이고 보통 그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환란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고생에 대해서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유발되는 그 고난에 대해서만 예수님께서 위로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저는 낯선 환란에 주어지는 낯선 위로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이번에 미국에서 강의를 했는데 이동하는 중에, 강의 장소를 옮겨가는 그 길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는데 거기서 큰 환란을 만났어요.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을 온 몸에 뒤집어 써야 하는 큰 환란을 겪었어요. 주님 때문에 당하는 환란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나이아가라호텔에서 숙식을 하는 환란, 카지노를 통과해야 되는 그 환란, 통과해서 나이아가라폭포 밑에 들어가는 그 환란, 우리가 위로 받을 것은 뭐냐 하면, “주여, 왜 저로 하여금 캐나다 배도 아닌 미국 배를 타고 퍼런 우비를 입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들어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위로받게 하기 위함인데 거기서 제가 알게 되는 것은, 정면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사실을 위로로 받았습니다. ‘아, 우리 쪽에서 다가서는 그런 방식은 주님 쪽에서 밀어내시는구나.’라는 복음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위로 받으려고 아침 8시 30분부터 줄을 서서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 가서 폭포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물보라세례를 몽땅 받는 환란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환란은 처음 받았어요. 놀러가는 환란을. 그런데 그것이 왜 환란인가? 놀러가 놓고서 은근히 자랑 질하느냐, 할 텐데 그게 왜 환란이냐 하면, 낯선 환란이기 때문에, 내가 기대했다거나 내가 가고자 한 것은 아니니까. 그 모든 책임은 다 나에게 환란을 준 그 시카고 팀에다 다 미뤄버릴 거예요. 낯선 환란이에요. 낯선 환란 속에 성과는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려고 하는 나의 응시가 나이아가라의 응시와 마주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보기는 어디를 봐? 네가 감히 보기는 뭘 봐? 멀찍이 봐. 멀찍이 사진이나 찍어. 가까이 오지 말고. 네가 가까이 설 장소가 아니야, 이곳은.” 이사야 6장이 생각났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우리는 멀찍이 예수를 믿고 멀찍이 하나님 믿고, 그냥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물 체처럼, 어떤 광고에 나오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그런 모습이지만 막상 능력으로 다가온 십자가 앞에 설 때에 우리는 그동안 내가 나에게 신경 쓴다는 자체가 엄청난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하고, 내 인생, 내 가정, 내 재산에 대해서, 감소되는 내 인기와 내 가치에 대해서 염려하는 그 자체가, 그것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에 격이 맞는 범죄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 자체가. 우리가 뭔가, 내가 뭔가 되었다고 자꾸 자기에게 신경을 쓰는 순간 뭘 놓치는가 하면, 진짜 위로를 우리가 상실해 버리고 놓치는 경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짜 위로에 매달리고, 가짜 평화를 자기의 행함으로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의 손발, 나에게서 나름대로의 움직임을 낸다는 이것이 골칫거리고 이게 문제꺼리에요. 뉴저지 아카데미강의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5장 4절을 보면서 이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블레셋 진영에서 승리해보려고 까불대다가 언약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 대장 둘이 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패배하게 한 것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잖아요. 왜 같은 편이 배신을 때립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대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낯선 하나님으로 변했습니다. 내가 믿던 여호와 하나님이 안도와주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 동안 수십 년 교회를 다녔는데 하나님이 안 도와준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렵니까? 그러나 제가 안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단절되고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정말 엉터리 같은, 우리가 지어낸 하나님이 아니고 참된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알려주시는 혜택을 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상 5장 4절에 보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던 다곤 신이 적들인 이스라엘이 믿던 여호와를 이겼다고 좋다고 포로 잡아오듯이 언약궤를 가져와서 다곤 신당 앞에 세워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제가 그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CCTV를 달았으면 좋았겠다고 했어요. 도대체 상자에 불과한 언약궤가 어떻게 덩치 큰 다곤 신상의 손모가지 발모가지를 다 부러뜨려 놓았느냐고요. 도대체 어떻게? 그래서 저는 그 강의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언약궤에서 허연 영감하나 도포입고 나와서 다곤 신상의 손모가지 발모가지를 다 부수어서 여호와 앞에 퍽 엎어지게 해놓고 손 털털 털고 사라진 것이 새벽 2시 46분에서 3시 15분까지의 작업, 뭐 그런 겁니까? 이 말씀이 주는 것은, 진작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손모가지 발모가지가 다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적진에 가서 보여주는 거예요. 블레셋 적진에 가서 보여주는 거예요. “네가 여호와를 알아? 네가 하나님을 알아? 너희는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만 했지.” 자신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멀쩡하기 위해서 교회 와서 예수 믿은 거예요. 교회 와서 성령 믿고, 십자가 믿고, 하나님 믿은 거예요. 삼위일체 거론한 겁니다. 자기 몸 멀쩡하기 위해서. 그런 인간 천국 못갑니다. 이것은 다곤 신상이에요. 진짜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이 교회 오는 것이 낯선 환란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낯선 환란 속에. 우리가 기대하고 노렸던, 우리가 예상한 위로와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우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실컷 여호와 믿어놓고 오신 하나님, 창조주는 죽여 버리고. 그 행세를 오늘날 교회가 똑같이 하고 있어요. 세상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은 뭐냐 하면, 얼마나 돈이 많으냐, 얼마나 내가 행복하냐, 그것 경쟁하는 장이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고생, 세상에서 받는 환란이라는 것은 돈이 없어서 받는 환란이고 건강이 없어서, 행복이 없어서 받는 환란이에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이시여, 나를 좀 도와주소.” 하는 그런 이야기밖에 안됩니다. 이 헌금 먹고, 이 봉사 받으시고, 이 충성 받으시고 내가 진즉에 원하는 것,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좀 팍팍 후원해주시고 알려 주시옵소서, 라는 식의 예수로부터 오는 환란을 기대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전부터 이야기해 왔어요. 교회 오는 것은 인생만회하고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서, 깨어진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온다고요. 그것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 그냥 옛날 블레셋 사람들이 오해한 것,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하기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우리 보기에는 포로 잡히고 빼앗기고 실패한 하나님처럼 보이는 그 장소가 바로 실패가 아니고 비로소 하나님다운, 하나님의 그 면면을 드러내는 성공적인 하나님의 상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것, 그것을 드러내는 그 이벤트, 그 사건, 유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말고는 없어요. 우리는 세상에 뻗어나간 우리의 사지를 돌돌 말아서 다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부수어진 채로. 우리 자신이 사지가 멀쩡하고 생각이 멀쩡하다고 생각하니까 우리 쪽에서 기대와 목적이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할 테니 이 소원 들어주세요.” 여행 다녀와서 여행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안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또 나오게 되니 참. 미국에서 강의 마치고 캐나다로 이동을 하는데 그 지역 온도가 벌써 10도 아래로 내려갔고 벌써 캘거리의 산에 눈이 와 있었어요. 강의에 바빠서 아무 대비가 없었어요. 그래서 캘거리의 집사님에게 “혹시 추위에 입을 옷이 좀 있습니까?” 했더니 자기가 다 사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오시기만 하라고 배려를 해주셨어요. 그것을 저는 ‘과잉자비’라고 표현했습니다. 넘치는 자비죠. 그런데 제 아내를 위해서 준비한 그 점퍼의 특징이 뭐냐? 그것을 둘둘 말아서 넣으니까 럭비공만한 주머니에 다 들어가요. 신기해요. 그걸 보고 느낀 점은 뭐냐? 주님께서 우리를 그냥 넣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자랑 질하던 사지를 돌돌 말아서 통통, 주께서 다루시면 그냥 다루어지는, “너는 이리로 가라.” 혹은 저리로, 이렇게 다루시면 그저 다루어지는 공처럼 되는 거예요. 주님이 다루시면 통통, 뛸 때 그것이 세 글자로 우리의 ‘움직임’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는 주체자로서, 내가 주체자라고 내세울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주께서 통통 뛰게 하셨어요. 뭘 하든지 간에.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이 떨어지는가 하면, 그 통통 뛰는 가운데서 무슨 껍질이 다 벗겨지는가 하면, 은근히 기대했던 것, 예수 잘 믿어서 은근히 노렸던 나의 찬란한 미래상이 마치 각질 떨어지듯이 하나 둘 다 떨어지게 만들고, 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덩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덩어리로 뭉쳐진 사물, 물체덩어리로서의 우리 인생만 달랑 남게 하는 겁니다. 쓸데없는 껍질, 쓰레기들은 다 떨어지게 해요. 통통, 할 때마다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툭툭 떨어져 나가는 것은 나의 개인적 기대나 소망들입니다. 이런 것을 줄줄이 다 떨쳐 내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 속에서 예수님이 이 땅을 살았던 공생애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우리의 생을 통해서, 백프로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는 그 전략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바로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오늘 본문은 무척 쉽습니다. “나 안 죽었다. 내가 안죽은 것 봐. 저런 죄인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복음의 성공을 드러냈잖아.”라고 통통 통통, 우리를 가지고 사용하실 때 당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살해한, 예수님을 퇴학시킨 이 세상이 주는 그 아픔을 고스란히 우리도 함께 공유하게 만들었습니다. 함께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주께서, 성령께서 그렇게 환란을 주시지 않았다면 나의 야망 때문에 결핍됨, 나의 야망달성에 미흡 됨, 그 미흡 됨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예수는 나의 스트레스 받는 그 환란에 대해서 은근히 노리겠는데 이것은 이미 공처럼 압축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주님의 위로, 십자가의 위로만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몸은 다른 몸으로 변신되었다는 뜻입니다. 달라졌다는 거예요. 강의하러 가는 곳마다 “맛있는 것 뭐 해드릴까요?” 평소에 햄버거도 먹고, 늘 먹던 것들 있지만 저에게는 스테이크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 스테이크는 저에게는 환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듣고 스테이크는 끝났어. 이 이야기는 괜히 했어. ‘목사님 또 오시게 되면 두 번 다시 스테이크 해 주나 봐라.’ 이럴까봐 걱정돼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런 것 대신 위로를 주시는데 떡볶이, 쫄면, 오뎅, 그런 음식들을 뉴저지아카데미에서 집사님들이 준비해주셨어요. 그리고 국수. 그런데 이 이야기는 괜히 했네. 내가 복을 걷어찼구나.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몸으로 오실 때에 죄의 몸으로 오시기전에 먼저 오신 분이 있는데 세례요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앞장서서 세례요한이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죄를 씻어주는 분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죄를 유발하시는 분입니다. 오셔서 네 감추었던 죄까지 다 들춰내시는 분입니다. 그 세례요한이 선지자에요. 그러면 구약성경전체 내용이 하나의 파이프로 통합된 그 출입구의 그 위치에 선지자 세례요한이 최종적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세례요한은 무엇의 성취인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언하고 난 뒤에 성취한다는 그 상식을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묵시적으로 성취하고 난 뒤에 예언이라는 카드를 후차적으로 제시하듯이 밑에 깔아놓은 거예요. 헬리콥터에 모든 완성이 있고 헬리콥터에서 삐라 뿌리듯이, 거기서 종이 뿌리듯이 예언이라는 종이를 인류역사에 줄곧 뿌려 왔습니다. 그렇게 예언이 왔다는 것은 그 예언과 성취가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로 산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확정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우리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다만 예수님이 겪었던 환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고, 환란만 오는 것이 아니고 환란과 동반해서 위로도 같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환란과 위로가 색다른 거예요. 우리 예상 밖의 환란과 위로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 한국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고소한지요. 내가 빠졌을 때 지진 나서 잘되었다. 그런데 아차! 집은 그대로 있잖아. 이사하고 나서 지진이 났어야 하는데. 여러분, 지진은 성도라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지진이 난다고 이미 예언을 해 줬습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은 호들갑을 떨어도 성도만큼은, ‘그래, 예상했어.’ 그래야지요. 특히 경주에 있는 성도라면, 경주에 집을 두고 살고 있는 성도라면, 적어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나와야지요. 요한계시록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했잖아요. 호들갑을 떤다는 것은 그만큼 요한계시록을 보기는 봤는데 안 믿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모든 움직임이, 지금이라도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데 봐주고 있다는 과잉자비적 차원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그 위로 속에 있음을 알아야 되지요. 지금도 우리의 어떤 행동과 관계없이 매일같이 위로해주시고, 매일같이 환란을 주시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외치는 그것이 뭐냐? 구약성경 전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지어온 인간들을 끊임없이 숫자를 증가시켜서 십자가까지 오게 했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것이 완성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난 뒤에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가죽옷은 죄 씻는 용도가 아니고 네 쪽에서 내 쪽으로 건너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아예 죄인에 낙인을 찍는 것이 가죽옷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옷이라는 것은, 이젠 하나님한테는 다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옷 입는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옷 벗은, 벌거벗은 인간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옷이 장착되었다는 말은, 옷 입어야 인간답다고 행세하는 너 같은 인간은 영원한 죄인이야, 하고 아예 낙인을 찍은 것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옷을 입은 이상은 각자의 영역을 고수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의 영향력을 옷 바깥에 있는 저쪽세계의 옷 입은 쪽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잘해도 이순신 장군이 옷을 입었고 내가 옷을 입는 한 서로가 자기의 고유의 영역을 고수하는, 그 자기영역 안에서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아무리 존경해도 그 존경은 자기 옷 바깥으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게 무슨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런 어려운 이야기에요. 캘거리강의하고 났더니 어렵다고 난리인데 어떤 분들은 그게 뭐가 어렵냐고 해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이게 어렵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에게 옷 입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라는 자체사고방식, 옷 입은 것은 아담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서 옷을 입은 거거든요. 죄를 가리는 것을 자기원래의 모습이라고 자꾸 우기기 때문에 제 말이 어려운 거예요. 옷을 입었습니까? 그것은 정상 아니에요. 하나님이 만든 인간 아닙니다. 그래서 옷을 입은 것은 뭐냐? 옷을 입었다는 그 자체가 “나는 죄 지었습니다. 나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못가는 인간이고 그런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사방팔방에 까발리는 모습, 그게 옷 입은 모습이에요. 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었거든요. 인간이 스스로 죄인이면서 의인인척 하는 그 모습을 주께서 그대로 모방하셔서 “에라, 그렇게 척을 하려면 영원히 척을 해라.” 해서 가죽옷을 입힌 거예요. 둘 다 옷이거든요. 둘 다 옷을 입어놓고, 솔로몬도 옷을 입었고요. 들풀은 옷을 입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들풀 옷 안 입은 그 모습이 솔로몬 옷보다 더 귀해요. 그 낙인 찍힌 죄,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내가 뭐 어때서? 나는 나 자체로 고귀해. 나는 가치 있어.” 이럽니다. 세례요한이 “이리와, 이리와, 이리 와! 네가 죄 없다고? 에라, 도끼로 콱! 이래도 죄가 없어? 죄가 없다고? 그냥 물속에 빠져버려. 그 정도로 죄가 많아.” 이걸 저는 과잉 범죄라 했습니다. 세례요한, 선지자는 인간의 숨겨놓은 그 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완전히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진짜 우리모습이 과연 어떤 대우를 마땅한지, 도끼로 난도질을 해야 마땅함을 세례요한은 보여줍니다. 세례요한의 그러한 이야기가 유대사회에서 고난과 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환란이 어디까지 인수인계 되는가? 진정한 선지자의 완성, 그 다음차례의 바통은 예수님이 잇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모든 인간의 숨겨놓은, 옷 입고 다니면서 잘난 체 하는 이 모든, 자기 한계 밖으로 못 벗어나는 것, 이 갇혀있음, 이 갇혀 있음 안, 거기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그 갇혀 있음 자체가 지옥이라는 거예요, 지옥. 지옥에 갇혀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계속해서 새로운 말씀을 막 거기에 투입합니다. 미원치고, 다시다 치고, 하여튼 니글니글 만들도록 막 뿌려댑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다. 오른뺨 때리면 왼뺨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죄다. 누가 오리를 함께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 줘라. 좁은 길로 가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그것도 살인죄다. 오른 눈이 범죄하면 그 눈알 빼버려라.” 잘났다고, 살아서 천국가야지, 하는 모든 인간들을 “그 입 다물라. 천국이 어딘지 네가 알고나 천당 간다고 하는 건가?”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믿습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사탄이다.” 여러분, 우리의 화려한 무대 뒤편, 그 커튼을 들추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나락만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커먼. 이 뒤에 있는 옥색 커튼 벗겨볼까요? 제가 생중계로 예배참석 했거든요. 옥색커튼 깔끔하게 나와요. 오장로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인생의 무대 이거 벗기면 지옥이 있어요. 이 커튼 때문에, 우리의 옷 때문에, 뭔가 근사한 존재처럼 착각을 하는데 십자가 앞에 그 옷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 커튼은 다 무용지물이에요. 하꼬방 같은 무대를 만들어놓고 그 무대에서 재벌이니, 국회의원이니, 장관을 했니, 목사니, 장로니, 집사니, 그게 대체 하늘나라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가슴에 주홍글씨 있는데요. 가죽옷을 입혀놨는데. “너는 죄인이야.” 도장을 찍어놓았어요. 인간의 세계는 그냥 갇혀 있는 채 영원한 아이, 영원한 소년 소녀처럼 꿈이나 꾸듯이 바깥세상을 전혀 모릅니다. 그 안에서 돈이나 벌고 자식이나 키우고, 그 다음에 죽음이 오면 힘 빠지고 맥 빠져서 죽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환란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살아볼까, 어떻게 살아볼까, 하는데 사느냐 죽느냐의 그것으로 얽혀 있는, 우리의 욕망으로 얽혀 있는 것에서 우리는 환란과 위로를 거론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환란과 위로는 죄와 의로 얽혀 있는 환란과 위로입니다. 죄와 의로 얽혀 있어요. “주여, 이것도 죄입니까?” “그래, 그것도 죄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것도 용서합니까?” “십자가는 그것마저 용서한다.” 죄와 의로 얽혀 있는 구조, 그 구조, 그 구조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하늘로부터 성령 안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위로받는 것은 십자가뿐이에요. 예수님께서 가신 길, 또는 선지자의 길, 또는 세례요한의 길, 그 길, 세례요한이 크게 부풀려 놓고, 예수님이 더 크게 확대시킨 그 죄는 그냥 그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해결책을 향하여 질주하고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그 끄트머리에 있는 십자가 앞으로 지금도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라서 거기에 질질 끌려가서 “똑바로 봐! 네 눈으로 봐! 십자가의 피를 봐!” “주여, 이미 해결되었군요. 이미 주의 것 뫘군요.”라는 고백을 드러낼 때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 주님의 성과의 전부입니다. 우리의 사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 맞군요, 라는 고백, 어떠한 죄를 지어도 그 죄가 의가 되는 재료가 되는 것이 맞군요, 라는 감사가 이어질 때 벌써부터 시작된 천국 생활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환란이 너희에게 임한 것은 예수님의 위로가 너희에게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존재는 뭐냐? 그냥 그저 들러리에 불과한 거예요. 매일같이 우리는 인간의 죄를 알기 위해서 매일같이 살아야 돼요. 죄를 알기 위해서 매일같이 살아야 된다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의 위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가죽옷이라 하는 것은, 결국 가죽옷을 입혔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생명나무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끊어진 거예요. 없는 겁니다. 너는 영원한 죄수로 살라고 낙인찍은 것이 가죽옷입니다. 그런데 그 가죽옷을 예수님도 세례 받으면서 덜렁 입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위로가 오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이라는 것은 내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엇 때문에 수모를 당했는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수모를 당한 것이 뭐 때문에 그런가 하면, 그가 세상이 속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런 겁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환란에 동참하게 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신같은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우리가 미국이나 캐나다에 이민을 간다 해 봅시다. 갔을 때 거기서 어떻게 사느냐가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 고민과 걱정자체가 만드는 환란이 있어요. 살아보려고 애쓰는 환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에 대해서, 그 점에 대해서 주께서는 절대로 위로하지 않아요. 네가 부자 되게 해준다든지, 이 땅에서 너를 스타 되게 해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민 가서 어느 날 생각을 해 보면, 주께서 보내셨다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되면 이것은 주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통통 튀는 공이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이곳에 와야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는 환란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옛사람, 내가 이 땅에서 버텨야 된다는, 내가 살아야 된다는 그것 때문에 생기는 그 환란, 그 환란을 뭐로 바꾸는가 하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고생고생 시키는 거예요. “너 아직도 멀었어. 너 더 부도나야 돼. 너는 네 인생에 대해서 절망해야 돼. 너는 몰라. 네가 얼마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몰라.” 너는 개인적으로 단독적으로 가치 있고 나는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우기는데 그것은 네 중심이고, 너에게 그런 환란을 주는 것은 너로 하여금 네 중심에서 진정한 중심, 숨어 있는 그 중심선, 그 중심선으로 이끌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 뿜는 환란으로 유인해 가는 거예요. 내가 이곳에서 살려고 하는 것, 캐나다에서 혹은 미국에서 살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내가 상상도 못했던 죄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죄를 알려주시는 이유는 이미 준비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일한 위로라고 남에게 선포하고 그것을 발산하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내 뜻대로 안 되는 환란을 주시는 겁니다. 정작 환란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에, 세상의 죄 때문에 환란을 받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누구를 오히려 공격하느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오히려 공격하는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런데 바꿔서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의도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랬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를 마감하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짜증내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게 해요. 돌아서면 마찬가지니까. “내 인생을 이렇게 꼴아 박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하게 하시되 진짜 성도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그 환란이 이어지는 것이 다른 중심에서 진짜 숨어 있는 이 세상 현실의 중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보다 먼저 살아계신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이 세상현실 모두를 자기 살아 있음의 증거를 위하여 조성해나가는 현실 속에 우리가 하나의 거미처럼 걸려든 거예요. 우리는 살고자 하는 죄 때문에 고난당한 그 주님의 환란은 생각하지 않고 맨날 나 중심이에요. 맨날 내 중심, 맨날 내 중심이야. 맨날 술이야. 맨날 맘대로 술이나 먹고. 맨날 내 중심이거든요. “네 중심 아니거든!” 이 중심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예수님이 주라는 그 중심에서 파생된, 연결된 자리가 네 자리니까 너는 어떤 고생도 네 고생 아니고 주님이 당한 고생에 동참하는 고생이고 그런 고생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너의 모든 죄는 다 씻어졌다는 기쁨과 감사가 나올 때, 세상이 아무리 모방해도 할 수 그 감사와 기쁨이 쏟아져 나올 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속하지 않는 사람 되기 위해서 여러분, 이상한 소리입니다만 할 수 없어요. 오늘도 밥이나 먹겠다고 고생을 되게 하세요. 시작은 그것부터입니다. 내 자식, 내 새끼, 어떻게, 어떻게……, 그것부터 시작하세요. 바닥부터 시작하면서 주께서 그 죄부터 긁어 가십니다. 긁어가면서 주님의 위로는 십자가에서 다 주셨다는 사실, 우리가 천국백성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평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매일 교회와도 당최 무슨 생각을 하면서 교회 오는지, 그냥 건성으로 습관화 되어서, 그냥 예배 때우기 위해서, 대충 다니면 복 주겠지, 이런 자기중심을 전혀 버리지 못한 채 나오는 않았는지요. 이제는 우리가 파괴되게 해주시고, 분해되게 해주시고, 깨어져서 세상적인 근심걱정은 다 떨어지고 주님에 의해서 통통 튀는 공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