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4강-사형선고(고후1;8-11) 1610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3. 06:10
2016-10-02 12:38:52조회 : 65         
   사형선고 16100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형선고(고린도후서 1:8-1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VniNVllpTjE, Hit:2

 이근호16-10-02 13:30 

사형선고 

2016년 10월 2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8-11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가 처해있는 세상이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역사의 흐름을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이의를 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지금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발언을 쏟아놓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품고 있는 진정한 본색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고요해보이고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이 세상은 오직 성령받은 성도를 통해서만 밝혀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와 닿는 실감나는 현실을 가지고 ‘나를 사형시키려고 시도하는 성질을 보이는 세상’이라고 평합니다. 이러한 사도의 고백은 모든 성령받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에 의해서 세상을 통과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히 하나님의 의지를 경유해서 주어진 상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이 어떤 짓을 했는지를 줄기차게 나타내보이고자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가 받은 환란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상적 안목에서 보게 되면 사도가 평소에 가만히 있었으면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에게도 하게 되면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요? 즉 예수님이 이 세상이 살아가면서 아뭇 소리하지 않고 조용하게 살았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설치지 아니하면 우리가 포근하게 느끼는 이 세상의 본색이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점잖게 때로는 우아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 되어 있을 지경입니다. 즉 세상이란 우리하기 나름이다 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건드리지 않으면 세상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는 겁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세상이 그동안 인간을 통치한 방식입니다. 즉 “이 세상 안에서 너희는 너희 살 궁리만 하라, 적응해서 살아남을 때까지 애쓰고 힘쓰다가 나중에 힘빠지면 그때 죽으면 그만이다. 죽음이란 남들 다 가는 길이나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식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사도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즉 악한 귀신이 예수님과 바울을 평합니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주요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의 존재 역할은 특별납니다. 

이 세상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요 십자가 사건의 내막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즉 인간들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 권력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상을 경이로움으로 보았습니다.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도철학자와 불교에서는 세상을 고통으로 보았습니다. 노력해서 빠져 나가자는 말입니다
중국철학은 세상은 난세(亂世)로 보았습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항상 안정된 강력한 권력에 순복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는 세상은 존재의 바다로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세상을 나타난 ‘존재자’와 숨겨진 ‘존재’로 보았습니다.
과학은 세상을 에너지의 흐름과 운동으로 보았습니다. 

종교계에서는 세상은 나타난 것과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구분지어 말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지옥봤다, 천국봤다, 기적을 실제로 보여라는 것을 미끼 상품으로 하여 사람들의 돈을 유인해서 끌어모은데도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는 세상을 뭘로 말합니까? 죄와 의로 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찾고자 해도 찾아지지 않는 그 죄와 그리고 오로지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에서만 수립된 하나님의 의(義), 혹은 거룩으로 갖추어진 구조가 세상이라는 겁니다. 복음이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이 아닌 것은 인간들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사시키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받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존재와 활동으로 인하여 인간들이 바로 이 세상 죄에 갇혀있음을 드러내는데 동원된 자입니다. 오늘날 성령받은 모든 이들이 이와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있는 이 세상을 문제삼아야 합니다. 그 수상한 권력질서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윤리와 도덕으로 층층히 쌓여 있습니다. 인간의 순수함이나 솔직함이란 실은 그 시절에 권력구조의 순수함을 그대로 솔직하게 반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 시대의 권력 아래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계의 질서를 형성하는 윤리나 도덕은 모두 ‘홀로 서기’와 관련있습니다. 즉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 얻어진 그 결과를 마일리지로 간주해서 그것을 쌓고 또 쌓고 나열하고 또 나열하고, 전개하고 또 전개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당연히 착하고 당연히 죽어서도 천국가야 한다는 식으로 버티게 됩니다. 

이는 마작놀이하는 이와 같이 자기 앞에 자기에게 의미있다고 여기는 것을 줄꿰듯이 꿰는 즐거움으로 살고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중가요 옥경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 
너도나도 모르게 흘러간 세월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도 대답 없이 고개 숙인 옥경이” 

인간은 자꾸만 길게 엮어진 자기 세월, 자기 역사, 자기 이야기를 사랑하는 재미로 험한 세상을 이겨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결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로마서 4:17에 복음이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매일같이 살아있는 우리를 죽이시고 죽이신 우리를 다시 살려내시고, 맨날 있다고 우기는 우리의 존재를 없애시고, 없다고 여기는 우리 자신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활동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관계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결코 자기만 홀로 즐길 그 어떤 인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천국이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은 세상입니다. 나를 위해 살던 자들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신의 착함과 위대함과 경건함에 매료되는 재미로 살고 싶은 생각이 돌출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힘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악마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그 악마의 정수리를 내리칩니다. 성도는 대중가요 바람의 가사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형선고를 받아야 마땅하고 머물지 않고 훌쩍 떠나도 이의가 없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성도를 통해서 세상의 정체를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우리로 하여금 사형선고를 내리는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감지토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6강-고후 1장 8-11(사형선고)1610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8-11절입니다. 신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어른 보면 사도바울의 개인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개인의 고백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과거지사에 해당되고 우리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처럼, 그래서 배제해도 상관없이 들리겠지만 사도바울이 죽을 고생을 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이나 나나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똑같은 경우를 아마도 겪게 될 것입니다.”라고 예언조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저에게 일어났던 일이 그냥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필히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성경으로 이렇게 쓰여 있다면 이 성경은 여러분 자신의 현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겁니다.” 이런 조로 이야기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 고생 꽤 했네.”라고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이런 지경에 놓여 있다는 그 현주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라고 했는데 본문에 보면 ‘사형선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처한 입장을 간단한 용어로 ‘나는 사형선고를 받을 줄 알았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사도본인이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은 나를 사형시키는 쪽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이 나를 못살게 구는 세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람이 처한 모든 환경이라는 것, 또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시대를 반영해주고 있어요. 사극을 보게 되면 뭘 느낍니까? 저는 이런 것을 느껴요. 나름대로 그 시대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 보입니다. 사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든 행동, 신하나 백성들의 행동은 “그 시대는 이런 조로 권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21세기에 있는 우리가 말하기를 “참 옛날 사람들은 어리석다. 나 같으면 이민가지 뭐.”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민 갈 비행기가 없어요.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수백 년 후에 우리를 본다면 “21세기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권력에 얽매여 살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권력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고 삶에 적당하게 적응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와, 살아보려고 저 짓까지 하나?’라는 식으로 하지요. 우리는 자꾸, 그런 식으로 왜곡되게 보지 말고 순수한 내 모습을 보라고 반발할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걸 아셔야 돼요. 순수한 내 모습은 우리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내 모습이라는 것은 없어요.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함은, 이 시대의 권력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를 순수하게 보여줄 뿐이에요.

 

그리고 그 권력에 맞춰 살아야 산다는 우리의 생존본능만 순수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군지를 우리는 모른다는 거예요. 살아보려고 투쟁하고 몸부림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보여주는 것은 이런 짓거리까지 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것만 순수하게 보여주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보여주는 순수한 사도바울의 모습은 뭐냐? 사도바울 본인이 처해 있는 이 상황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렇게 반복음적으로, 악마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순수하게 보여주는 모습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도 만만치 않아. 너도 성령 받았고 나도 성령 받은 입장이라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냥 세상 사람들은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은 무엇을 노리고 사도바울 이 사람을 죽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는가? 그 내막,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속한 본질을 그대로 노출시키고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 처음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일하신다고 했지요.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어떤 성도가 마라톤을 한다면 다른 사람 보기에는 사람이 마라톤을 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성도 본인은, 주께서 오늘 마라톤을 하게 하셨다는 것, 내가 마라톤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주체가 마라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는 따로 있고 그 주체에 의해서 오늘 아침에 마라톤을 한다, 그런 식으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는 중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낮설교로 다시 돌아와서, 주께서 일을 하신다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어떤 기준에 의해서,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십니까, 라고 그 일하시는 내용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 펼치기를 잘했어요. 만약에 성경 펼치지 않으면 이렇게 돼요. “목사님,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교회 나온 행동의 주체를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열두시에 결혼식이 있어서 설교 끝나면 점심 안 먹고 바로 가야 됩니다.” 모든 움직임 자체가 주체자가 누구냐 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 결정과 내 판단에 의해서 나는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는가? 이 세상의 본질은? 내 세상의 내막은? 완전히 그게 누락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자체가 이 시대를 반영해주는 선지자나 제사장 노릇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자체가 제사장의 움직임이고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는 것은 본인이 ‘사도해야지. 사도노릇 잘 해야지.’ 이래서 사도를 한 적이 없어요.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 알을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이게 되면 그 주위에 사도의 냄새가 막 풍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막 살라고 했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사세요, 라고 했잖아요. 그 말은 본인의 의미를 본인의 행위로부터 출발해서 정립하지 마시라는 그 말입니다. 주체자는 하나님이지 여러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을 갖지 말라고 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 거예요. 신앙을 갖게 되면 그 신앙을 갖는 주체자가 내가 되기 때문에 이 신앙은 치매 걸리면 날라 가버리고 없어요. 정신없어요. 왜 교회 왔는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화좀 나게 되면 믿음이 없어 보이고, 좀 평화롭게 보이면 신앙이 있어 보이고, 이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놀아나는 짓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 짓까지라도 성경에 이미 나와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 펼치기 잘했습니다. 펼치고 보니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지금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설교 다 끝나고 난 뒤에 동일한 고백만 하면 돼요. “목사님, 저도 지금 사형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한 달 수입 2천 5백만 원인데 미치겠어요, 이것 때문에. 수입이 2천 5백만 원이 되어서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수입, 부동산의 시세 오름, 남들 보기에 좋아 보이는 그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래, 내가 떠나줄게. 나를 그렇게 죽이고 싶으냐, 이 돈아!” 이런 것.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아이고 그래, 이 돈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줄 몰랐다. 이놈의 인기, 인기! 이놈의 인기 때문에 못살겠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래, 일찍 죽자. 주여 저는 사형선고 받고 있습니다. 이놈의 인기 때문에.”

 

또 동일한 고백을 내뱉어야 돼요. 얼추 보면 행복해 보이지만. 이 세상은 모든 성도를 향하여 사형을 시키고자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왜냐하면 성도 안에는 수상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보기에 수상한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들은 본인밖에 몰라요. 본인을 위하여, 본인의 있음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본인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복음이라 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복음이에요. 인간이 지어낸 유사복음은 뭐냐 하면, 자기 잘되는 것이 복음이에요. 내가 살아남는 것이 복음입니다. 왜 살아남고자 하는가? 내가 행복해야 되니까.

 

내가 행복해야 된다는 것과, 예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과 차이나지요? 분명히 차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왜 오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는 것을 그동안 목사님은 모르셨어요?” 이렇게 막 짜증내면서 “우리를 지금 무시하는 겁니까?” 이런 인상들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포기하셨습니까?” 와 같은 질문인데.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 왔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왔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나신다면 질문을 다시 할게요. “여러분의 행복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교회 왔습니까? ‘주여, 오늘도 내 행복을 반납하겠습니다. 여기 내 행복 가져왔으니 제발 박살나게 해주옵소서.’ 이러한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니잖아요. 그 두 개를 합쳐보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왔습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면 정작 내가 은근히 원하는 나의 행복도 아마 주실걸?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주시겠지.’ 그런 꼼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형선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싶은 것은, 사도바울이 세상을 볼 때 “세상아, 네가 나를 사형선고 시키는구나.”라는 관점은 어떤 신앙에 의해서 정립이 되었는가, 그걸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 그냥 고요하기만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인데 왜 성령 받는 사도는, 세상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라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 불신자가 보기에 “사도야! 내가 그것을 알려줄까? 너 몰라? 사람들이 자꾸 너를 괴롭히는 이유를 몰라? 네가 나대서 그렇다.” 하는 겁니다. 사도가 가만히 있으면 사도의 멱살을 쥐고 흔들 일이 없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지요. 그 이유가 뭐냐? 나대서 그래요.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드를 골프장에 배치를 하든 말든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물대포를 왜 맞습니까? 샤워하다가 맞는 겁니까?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노인연금이나 타먹고 커피나 타 먹고 있으면 아무 일도 없어요. 괜히 나대다가 물대포 맞아서 죽어버렸잖아요. 왜 나댑니까? 나대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복음 또 나갑니다. 두 번째 복음. 첫 번째 복음은 막 사세요. 두 번째 복음은, 나대지 마세요. 나대지 말고 그냥 조용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우리하고 똑같아요. 고생을 낙으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편하게 최고에요. 편하게 ‘엄지 척’이에요. 나를 시비 안거는 것이 최고에요. 그러나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성령 안에 계신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을 알아요. 가만히 있고 싶어도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뭔가 외쳐야 돼요. 자기 안에 어떤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데 그 예수님이 공생애 때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질 일이 없어요.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 받고 난 뒤에 계속해서 움직였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서 움직인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듯이 예수님도 움직였습니다. 움직였더니만 주변에 있는 이 세상은 의외의 반응을 나타내요. 이것은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예요. 좋은 것이 좋은 거예요. 서로 친하게 지내면 됩니다. 종교 같은 것은 묻지 않고, 사상도 묻지 않고, 이데올로기도 묻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움직이게 하시니까 주변에 있는 세상이 자기의 본체와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사도행전 15장 13절 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여기서 악귀, 귀신이 말하기를……, 귀신이 예수님을 안다는 이것은 상식적으로 아니까 이것은 충격이 아닌데 뭐가 충격이냐 하면, 예수도 내가 알고, 마귀인 내가 알고, 그 내가 누구도 아느냐 하면, 바울도 안다는 거예요. 이게 누구 이야기냐 하면 영적존재인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해요. 그러면 사도바울을 여기에 모셨다고 칩시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보아도 전혀 우리에 비해서 특별한 점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우리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가는 길을 사람들이 개 무시한 겁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데 나대지 말고 좀 가만히 있지 왜 자꾸 설치느냐? 우리가 아는 사상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 본인도 몰라요. 본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본인도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복음에 대해서 행동하고, 복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행위라 하는 것은 본인조차 자기 맘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자기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지고 “아저씨 잠깐만요.” 하고 콧기름도 바르고, 주문도 외우고, “이젠 해보세요.” 그렇게 했습니까? 그냥 사도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얹으니까 병든자가 낫고 귀신도 떠났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기이하게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세상을 영적으로 봐야 되는데 우리는 영적으로 보지를 않고, 너나 나나 똑같으니까 돈만 벌고 그걸로 밥이나 먹고 살다가 늙어서 그만 죽자, 그런 식으로 그냥 흘러가듯이 가는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걸 문제 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지금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너희는 어떠냐?” “저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누가 저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요?” 하나님께서 “거참 이상하네. 세상은 너를 사형 선고시키는 세상일 때 비로소 세상의 진면목에 네 눈에 뜨일 것인데 네가 그렇게 되면 세상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밥이나 축내면서 살아가는 그런 식인거야?” 이렇게 돼버립니다.

 

그러면 다른 말로 하면, “너 신자 맞아?” 이런 이야기고, 또 다른 말로 하면, “너 성령 받은 사람이 맞아?” 같은 질문을 우리보고 퍼붓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세상 자체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그 세상의 본색을 드러냈는데 그 본색은 도대체 어디에 기초해서, 세상의 권력이 뭘 보고 나를 이렇게 주목해서 나에게 신경써가면서 나를 죽이고 없애고자 시도하는가? 그 근거가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나옵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일하십니다.” 그것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하십니까? “몰라요.”

 

우리가 신앙이 있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하시는가?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매일같이 일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매일같이 죽은 자로 만드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우리는 없는 자 같이 만드시고 우리가 없는 자 가운데서 새로 생기는 모습으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그 활동의 결과물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 그렇게 되어간다는 그 말이지요.

 

그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죽음이라는 그 위협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에 의해서 매일 같이 생산되는 것이 나라면, 나의 연속성과 나의 동질성은 내 행함에 의해서 연결될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이 하신 일을 경유해서 다시 나 자신에게 되돌아와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복잡하지요. 상당히 복잡한데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에 낯설게 느껴진다면 참 유감스럽습니다. 사도바울이나 성령 받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현실을 이런 식으로 봐요. “주께서 일하시는데 어떻게 일하시는가? 죽이시고 살리시고, 없애고 있게 하시고, 그것이 멈추지 않고 매일 같이 공작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결과물이 지금 눈에 보이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인정들 하시지요?” 이렇게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성경 펴놓고 “그렇게 인정들 하시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음……, 목사님은 지금 뭘 강요합니까? 그냥 입을 다문채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성경은 그 때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한계치까지, 한계치까지 주께서 몰아넣는 상황을 매일까지 우리에게 부여하는 거예요. 우리의 한계치까지. 예를 들면 길을 가다 복권을 하나 주웠다 합시다. 로또를 주웠어요. 자기가 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주워서 보니 토요일까지 발표날짜가 아직 남아 있어요. 토요일에 맞춰보니 1등이 되었어요. 지금 상상의 극치를 달리는 거지요. 혼자서 1등이니 약 40억의 돈을 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은 왜 저로 하여금 나로 인해서 내가 사는 그 평지에 끝까지 저를 몰아넣습니까? 이것은 제가 기대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닌데 왜 예상도 하지 않은 일을 저에게 일으킵니까?” ‘아하, 내가 이 땅에서 예상한 것을 없애시는 하나님이시구나.’ 내가 기대한 내 미래상, 나의 드림, 희망, 비전, 날마다 이걸 뭉개시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제공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먼저 온, 미리 온 천국입니다. 미리 온 미래에요.

 

죽어서 가야 될 천국생활을 앞당겨서 여기서 실습을 시키는 겁니다. 어떤 실습? “주님, 제가 왜 이곳에 왔습니까? 왜 제가 천국에 왔습니까? 이것은 제가 원한 것이 아니잖아요. 주여, 제가 원한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세계였지 이런 세계가 아니잖아요. 주님만 섬기고,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으로서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주님 있음으로서 영생을 얻는 이런 세계는 제가 꿈꾸던 세계가 아닙니다. 저는 나로 인해서 즐겁고, 나로 인해서 행복하고, 내 자존심 때문에 기쁘고, 내가 나를 사랑함으로서 꿀리지 않는 세계의 훈련과 연습으로 한평생을 지내 왔습니다. 이런 세계는 낯섭니다. 왜 이렇게 이런 세계에 오게 했습니까?” 내가 너를 날마다 죽였기에, 그렇게 너밖에 모르는 너의 세계를 날마다 죽였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벌써 장차 가야 될 영생의 세계가 미리 앞당겨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과 동반해서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들은 거예요. 왜? 자기가 사는 세계하고 예수님 사는 세계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그래서 행함을 버리고 나를 믿으라고 이야기할 때 왜 우리 행함을 버려야 할지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행함으로 만든 그것이 살아 있는 내가 안 죽고 계속 살아있으면서 일구어낸 업적들이고, 있는 내가 계속 또 있기 위해 노력한 그 대가가 현재 나의 삶이라고 그렇게 착각해서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있는 것도 죽여 버리고, 있는 것도 없애는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속 실습을 시키는 겁니다. 이 핀트가 맞지를 않는 거예요.

 

예수의 말씀이 납득이 안 되고 이해 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에 있었던 이 복음의 세계는 뭐냐? 왜 이 멀쩡하고 조용한 세상이 나를 사형 선고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작용이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질서를 문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질서가 뭔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이 세상 질서가 어떻게 구조되어 있는가?

 

그것은 윤리와 도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은 선악체계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어요. 우리는 이게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마귀가 우리의 발목을 끝까지 잡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강하게 협박하고 위협하는 권력 속에 우리가 놓여 있었던 겁니다. “네가 이런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이번 주 네 행운은 다 날라 가고 저주받는다.” 이것이 계속해서 가시처럼 찌르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잘못을 했기에 앞으로 징계가 만만치 않을 걸?’ 이런 두려움, 불안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어디로 나와야 되는 거예요? 교회에 나와야 되는 거예요. 이 질서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모든 종교나 모든 사상들이 다 그런 겁니다. BC 500년경의 헬라철학자들은 세상을 뭐로 봤는가? 경이로움으로 봤어요. 끝은 모르겠다는 그 말입니다.

 

인도철학,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고통으로 봤어요. 고통으로 봤다는 이것이 마귀의 생각이거든요. 고통으로 봤다는 것은 빠져나오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얼마나 도를 닦아야 빠져나오겠습니까? 중국철학에서는 이 세상을 난세로 봤어요. 이 세상은 난세, 정돈되지 않은 세계.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을 존재로 봤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있음에서 있음으로. 아까 로마서 4장 17절과 다르지요?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있다는 거예요. 불교사상과 비슷해요. 하이데거는 이 세상을 뭐로 봤는가 하면, 그 숨어있는 존재와 나타난 존재, 존재와 존재자로 봤어요. 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자는 다 뿌리가 있다. 그 뿌리에 의해서 된다.

 

일반적인 종교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계.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의 모습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사람들을 유인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인기 있는 것이, “나는 천국 봤다. 지옥을 봤다. 나는 병 고치는 것을 봤다. 귀신 나가는 것을 봤다.” 모든 것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미끼상품으로 던져서, 사람들을 유인해서, “당신도 기도 열심히 하고 성령 받으면 여러분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새벽기도 해 가면서 “천국 보여주옵소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유인해 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종교가 그렇게 많고 교회가 그렇게 많은 겁니다. 그러면 복음은 뭐냐? 복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죄와 의로 봅니다. 죄와 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 때문에 죽었거든요. 그래서 세상에서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이유는, 이 세상은 죄와 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죄, 의, 또는 죄와 거룩으로 구성된 거예요. 죄와 거룩이라면, 거룩이라는 것이 깨끗함이라면 뭐가 더러움이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의 질서가 더러움이 되는 겁니다. 내 윤리와 도덕이 추잡하고 난잡하고 더러운 것이 되는 거예요. 이것 몰랐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바르게 살아야지,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가 거룩하게 생활해야 된다, 교회 왔으면 티를 내야지, 은혜 받았으니 은혜 받은 그 티를 내면 이제부터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이런 것이 주님 보기에 “추접하고 더러워서 못 보겠다. 그 꼴을 내가 더러워서 못 보겠다.”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자.” 주님은 말합니다. “그 꼬라지를 더러워서 못 보겠다.” 그게 바로 더러움이에요 그게. 그게 바로 감추어진 더러움이에요. 감추어진 더러움, 내가 미처 몰랐던 더러움이에요. 왜 그렇게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뭔데요? 바르게 살게 되면 은근히 노리는 나의 행복과 행운과 재산이 불어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망가진 인생 원상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대가나 보상받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그 더러운 짓을 한 거예요.

 

여러분이 꿈속에서나 일상 속에서 “하나님, 이것이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앞으로 바르게 살게요.”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이 꼬깃꼬깃 숨겨놓은 마귀모습을 그대로 노출한 순간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더러운 것이 깨끗함을 위장해서 깨끗하다는 그 순결하고 경건하고 고상한 이름으로 위장된 그 더러운 것, 가장 추잡한 마귀의 얼굴이 그런 식의 윤리도덕으로, 선악체계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에라이 마귀야! 창세기 3장 15절에, 그럴 줄 알고 그것이 튀어나올 때는, 십자가의 뾰족한 그것을 가지고, 그 올라온 마귀의 자투리, 그게 올라온 마귀의 대가리에요, 뱀 대가리, 그것을 그대로 부숴버려요. 이게 바로 괴물, 그걸 쳐버립니다.

 

사람이 윤리와 도덕에 벌벌 벌 때 감사와 기쁨은 다 날라 가는 거예요. 감사와 기쁨. 그동안 여러분이 얼마나 속아왔습니까? 자신에게 속고, 교회한테 속고, 목사한테 속고, 장로기도에 속고, 얼마나 속아왔습니까?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부흥케 하옵소서. 열심히 헌금할 테니까, 선교사로 나갈 테니까, 우리 가정은 주께서 책임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꼬깃꼬깃 숨겨놓은 악마의 보이스, 다른 말로 보이스 피싱,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 못했던, 계속 암세포처럼, 이것은 사진 찍어도 안 나오는, 정말 끄집어내고 싶어도 못 끄집어낸 마지막 남은 괴물덩어리가 바로 그겁니다.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마귀 짓을 했고 순교라는 이름의 더럽고 추잡한 짓들을 해왔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에서, 헌신도 죄고, 희생도 죄고, 순교도 죄라고 했습니다. 그거 모르면 사도바울 말씀 하나도 이해를 못합니다. 홀로 버티는 것, 홀로 버티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홀로 버티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복음이라고 제가 초반에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초반에 그 이야기를 한 취지를 여러분이 아시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한 것은 거룩한 것도 아니고 고상한 것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아버지여, 저를 죽여주옵소서.” 였어요. 왜? 아버지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숨어 계시는 아버지가 참된 아버지기 때문에. 착한 일 많이 하고 자기 마일리지 많이 쌓은 사람이 “주여, 죽여주옵소서.”라는 말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할 리가 있습니까? 자기가 쌓아놓은 것이 아까워서도 그런 소리 못하지요. 제발 우리가 매일 같이 쌓아놓은 것, 이것은 고상한 것, 이것은 착한 것, 이것은 훌륭한 일, 그 쌓아놓은 그것이 사도바울을 만나면 사도바울 멱살 쥐고 죽이려고 덤벼들 거예요. “내가 이 정도인데 네가 나보고 뭐라고 했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 이런 식으로 멱살 쥐고 흔들 거예요.

 

사도바울은 나대고 싶어서 나댄 것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갑자기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될 주변의 동료들과 그 많은 사람들이 안색이 바뀌면서 길길이 뛰기 시작하면서 예상 못할 어떤 놀라운 혼돈이 일어나요.

 

갑자기 질서 잡힌 이 세계가, 도덕과 윤리로 질서 잡힌 이 세계가, 착한 사람은 천당하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고 깔끔하게 정돈된 이 세계가 십자가 복음 전해버리니까 혼란이 일어나면서 “이게 어디서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해? 내 의로움을 부추기지는 못할 그런 소리를 왜 하는 거야? 교회 충성을 왜 부추기지를 못하고, 헌금을 부추기지 못하는 그런 소리를 왜 하는 거야? 점점 더 인간이 나아지고, 착해지고, 거룩해지고, 고상해지고, 경건해지는 동인, 동력을 네가 뭔데 차단해버려?” 이런 식으로 멱살 쥐고 달려듭니다. 그동안 우리가 도대체 성경 왜 봤어요? 도 닦으려고 보셨습니까? 그러면 도 닦아서 지옥가세요. 거기 가면 도 닦는 사람 한 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많아요.

 

사형선고라는 것은, 우리가 아프고 고난 받을 때 사형선고가 아닙니다. 사형선고가 눈에 보인다는 것은 저쪽을 탓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이쪽, 여러분 각자,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를 복음이 나오는 모습과, 복음이 나오는 태도와 복음이 나오는 내용을 주께서 다룸으로 말미암아 동반해서 벌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못 참겠다고 죽이겠다는 식으로 달려드는 거예요.

 

그래서 로또 1등 당첨된 그것이 우리한테는, 나로 하여금 이 세상 더 살맛 안 나게 만드는 이벤트가 되고 사건이 되는 겁니다. “주님, 이 당첨된 50억을 가졌는데 제가 이걸 버리고 어떻게 속 시원하게 ‘죽여주옵소서.’ 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주께서 주신 축복이니 이번에 새집 계약하고 난 뒤에 그 때 재림하시옵소서.”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갑자기 있는 것을 없애시고, 또 있게 하시고, 또 살아 있는 것을 죽이시고 살리시고, 하는 주님의 액션, 주님의 활동이 로또 한 방에 다 잊어버리게 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껴안는 셈이 되잖아요. 그리고 그것을 나중에 성령의 깨우침을 통해서 알고 보니까, 아하, 이러한 환경, 여유롭게 느긋하고 배부른 환경, 바로 이것이 “너는 사형당해야 해.”라고 외치는, 말해주는 하나의 시추에이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불신자들, 불신자들이란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다 포함됩니다, 이 불신자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 힘으로, 단독으로, 홀로, 그저 홀로 사는 것이 취미기 때문에 홀로 천국 따내기 위해서……, 옛날 중국영화에 보면 여자들이 담뱃대를 길게 만들어서 빨면서 마작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와요. 저도 길거리에서 마작을 하는 모습을 더러 봤어요.

 

마작이라는 도박은 줄을 세우는 겁니다. 진열하고 전개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느꼈어요. 인생이란 뭐냐? 자기가 괜찮게 했다는 그 성과를 마작하듯 진열하고 전개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요. 배후에서 누가 그 짓을 했는가? 내 속의 마귀가 자꾸 그 짓하게 만들었어요. 저는 이것을 한마디로 해서 옥경이 인생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맨 날 아침에 눈만 뜨면 내 앞에서 마작을 하듯이 진열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살았고, 멋있게 살았고, 이렇게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스토리, 자기역사를 자꾸 전개해요. 그것은 바로 비복음적이고 마귀가 노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옥경이 인생이 아니라면 성도는 뭐냐? 제가 성도의 인생을 노래가사로 말씀드린다면,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그 노래 부른 가수를 좀 흉내 낸다면 “그대 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오늘 설교 간단해요. 옥경이에서 뭐로 바뀌어라?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매일같이 있다가도 주의 은혜로 살아가고, 죽어야 되는데 주의 은혜로 또 살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 마일리지 쌓으면서 살지? 나는 매일같이 주님 덕분에 산다.” 이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의 멱살은 쥐었습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 안정된 대한민국에서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다니.” 멱살 잡힙니다. 멱살 잡힐 줄 알고 그냥 입을 다물지요. 조용하게. 입을 다물더라도 성령 받은 행동과 태도는 감출수가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아이고, 놀래라.” 하면 싱긋이 웃으면서 “주께서 또 있는 것을 없애시는군요.” 경주의 황남빵도 없애고, 첨성대도 없앤다면 저는 ‘역시 복음대로 없앴구나.’ 기뻐하겠습니다.

 

내색을 하게 되면 또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멱살 잡히니까 혼자서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인생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주어진 모든 것을 통해서 이곳이 우리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늘 깨우치기 위해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부동산 값 올라가고, 주식값 올라갈 때 ‘아, 주여! 이곳이 살 곳이 못되는군요.’ 자식 공부 잘해서, “엄마! 또 백점 맞았어요.” “주여, 이곳이 살 곳이 못되는군요.” “주여, 교회가 부흥되었어요.” “안됩니다. 주여! 이것이 나의 발목을 잡는군요. 살 곳이 못됩니다. 제가 떠나야 되는데 이 세상이 나의 발목을 잡는군요.”

 

이럴 때 여러분은 사도와 같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쩌면 사도바울이 가는 그 세상과 우리가 가는 세상이 같다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모르고 살았습니까? 이제는 알고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보냈던 세상, 사도바울을 순교케 했던 세상, 스데반집사를 돌로 쳤던 세상, 그런데 왠지 우리는 고요합니다. 주여, 고요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달 리볼 수 있는 신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