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은혜(룻2;20) 1609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19. 18:04
2016-09-18 15:37:19조회 : 33         
   은혜 160918이름 : 우리교회 (IP:175.206.141.20)   

은혜(룻기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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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16-09-18 23:28 
룻기 2장 20절(은혜)160918-오 용익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2장 20절입니다. 룻기 2장 20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近族)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고 대화하는 내용입니다.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바깥으로 나갔다가 쫄딱 망하고, 남편, 아들 둘, 남자들은 다 죽고, 미망인들만 셋 남았는데, 며느리 한명은 자기백성에게 다시 돌아가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이라는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와서 이삭 줍는 일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그렇게 사는데, 이삭을 줍고 온 후 그날 저녁에 하는 하루의 대화내용입니다. 

제가 이 본문에서 특이하게 본 것은 뭐냐 하면, 그 나오미의 시선, 제가 설교 제목을 은혜라고 했는데, 은혜의 지평이라고 붙이고 싶었거든요. 뭐냐 하면, 나오미가 그 은혜를 바라보는 시선, 또는 지평이 보통 그런 것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보통 살아있다는 것과 생존한다는 것은 가운데 둑이 막혀있어 가지고 이쪽은 이쪽이고 저쪽은 저쪽이다. 그렇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겁니다. 살아있는 것은 내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죽은 것은 죽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죠. 구분이 가는 건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와, 이렇게 뚝을 터놨어요. 이런 점이 참 특이해요. 보통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어떤 시선이고 지평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복과 은혜, 이런 것을 유보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밀어놓는다는 거예요. 

보통 교회가든, 절에 가든, 은혜를 구하거나 복을 구할 때, 어떻게 구하는 거죠? 이미 복과 은혜라는 것이 내가 구하기 전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정해놓고 달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잘 안 되면 내 정성이 부족하다던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복과 은혜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나오미는 그런 지평이 아니에요. 그런 시선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누구하나 다리를 거쳐요. “주님. 복을 나에게 주세요.”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그”라고 하는 어떤 제 삼자, 여호와하고 연결되어 있는 “그” 라고 하는 제 3자 사이에 어떤 복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본문 끝에 보면, “우리의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여기가 복이 고이는, 은혜가 고이는 어떤 그릇 같은 건데요. 근데, “주세요!”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밀어놓는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안 보이니까, 그 복이 어떤 식으로 올지, 그 복의 내용이 뭔지를 일단 모른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가 무슨 일을 해야 해요. 지금. 그가 무슨 활동을 벌여야 해요. 그래야지 여호와와 그 사이에 있던 복이 지금 밑에 내려오게 되어 있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참, 혼자 신기한데. 특이해요. 이게 특이한 거예요. “주세요!” “못 주겠습니까? 정성이 부족합니까?” 이런 식의 유보는 아니죠. 제가 말한 유보가. 밀어놓는다는 게, ‘좀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나중에 주실 건가 보다.’ 지금 그런 식의 유보를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른다고요. 뭐가 내려올지를 모른다고요. 하지만 뭐가 오긴 올 거예요. 그건 알긴 알아요. 하지만 밀어놓는 거예요. 구멍을 뚫어놓는 거예요. 왜? 저쪽에 달렸습니다. 이렇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특이한 것은 뭐예요?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의 사이에 뚝을 터놓는다는 것은 뭐예요? 자기를 빼는 거예요. 내가 관여할 사항이 못 돼요. 지평이 확 넓어졌으니까, 사람은 죽음 너머에 대해서 관여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확 뚝을 터놨으니까, 자기가 관여하지 못하는 겁니다. 참 특이한 시선이에요. 두 번째 복과 은혜라는 시선도, 그것도 참 특이한 시선이에요. 그 다음에 나오미 지금 쫄딱 망해가지고 여기 온 거거든요. 지금 완전히 망했다 말이에요. 사람이 보통 실수하거나 실패하면 재기를 할 때 발판이 뭡니까? 

이렇게 발판 삼습니다. 대개 다 그래요. 뭐냐 하면 반성하고 자기 처벌하는 거예요. 반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어디서 잘못했는지, 그거 따지는 거예요. 따진 다음에 실패의 요소, 실수의 요소가 발견되면 거기에 대해서 자기를 처벌하는 겁니다. 자기의 뭐가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를 처벌하면, 그게 죄 씻음이 되어가지고, 자기를 구원에 이르게 해서, 그 의를 발판으로 그 사람은 다시 성공 쪽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게 보통 실패자가 옮기는 다음 행동이라 이 말입니다.  

근데 나오미가 쫄딱 망해서 온 사람인데, 그런 동선, 그런 움직임이 안 보여요. 오히려 반대로 상당히 뻔뻔한 것을 많이 보여줘요. 예를 들어서 자기 며느리를, 무슨 공작을 펴서 자기 며느리에게 누구의 발치로, 기업 무를 자의 발치로 들어가라고 해요. 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전개돼요. 이거 참, 무모한 것 같기도 하고. 들어가라고 했거든요. 

근데 성경이 재미있는 게, 꼭 도미노게임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나오미가 툭 밀어요. 나오미가 툭 밀면 룻은 툭 넘어지고. 그 모든 일을 저쪽이 다 해결해야 해요. 그리고 저쪽까지 왔는데, 툭툭툭 넘어져서 보아스까지 왔는데, 보아스가 보니까 자기는 기업 무를 자의 1순위가 아닌 거예요. 그럼 문제가 생겼잖아요. 그러면 또 실패잖아요. 

실패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말한 실패했을 때의 순서를 밟아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룻기 3장 18절에 보면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해요. 자기가 일 저질러놓고. 문제가 생겼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해요. 어떻게 보면 뻔뻔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주변 상황들을 아예 안보기로 작정한 사람 같기도 하고. 이 룻기라는 성경이 어떻게 보면 보통 그런 상식을 가지고는 잘 이해해 할 수 없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제가 지금 세 가지 특이한 점을 이야기했는데요. 첫 번째는 은혜의 지평이라는 것.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라는 그 둑방을 툭 터놓고 말이죠. 그게 뭐냐 이 말이에요. 사람은 이런 것은 아니에요. “내가 죽어서 천국가게 해주세요.” 그거는 지금 나오미가 말하는 그것과는 관계없는 거예요.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에게까지 열린 나오미의 지평은 아니에요. 그것은 이쪽에서 자기 욕망의 지평을 쭉 늘려서, 그냥 자기 욕망을 펼쳐놓은 것이지. 이거하고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평, 그리고 두 번째는 복과 은혜라는 것에 구멍을 뚫어놓고 유보하는 이런 것. 또 세 번째는 말씀드린 대로 실패에 대한 이상한 태도들. 이건 정말 실패한 자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이에요. 자,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오미는 그냥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실패한 사람이 아니고, 정확히 하면 이런 뜻이에요. 언약에 실패한 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언약에 실패한 자의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이에요. 그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지평이 열린 거예요.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헤를 베풀기를 원하노라” 이런 희한한 지평.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복은 그 분에게 달린 문제지,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런 희한한 시선. 이런 정말 희한한 시선이 온 거예요. 복은 나한테 와야지, 복은 내가 받아야지, 근데 어떻게 복을 밀어놓는 이런 것. 실패에 대한 이런 뻔뻔함. 

그렇다면 잠정적인 결론을 하나 내릴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자리가 복된 자리라는 겁니다.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는 겁니다. 결국은. 그냥 있기만 했는데, 그게 은혜의 자리라는 거예요. 그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뭐냐 하면, 그게 은혜의 자리라는 거예요. 그게. 남들이 보면 저주받았는데, 아무리 봐도 저주받았잖아요? 
남편 잃고, 자식 잃고, 며느리 하나 달랑 데리고 이삭 줍고 있는데, 그게 뭐가 복이에요? 아니 진짜 복 받았다니까요? 이게 뭡니까? 남들이 못 보는 것을 지금 봐야 복 받은 것이 아닙니까? 맨날, 남들이 챙기는 돈, 나도 예수 믿어서 챙기고, 남들 팔자 고치는 것, 신세고치는 것, 그런 것은 복 받은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거 죽으면 다 끝나는 문제입니다. 

지평이 넓어져야 돼요. 확 터져야 돼요.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교회 다니면서 반성한다고 암세포가 없어지지 않아요. 그저 도 닦듯이 예수 믿고, 자기 고치고 하는 것, 죽으면 끝난다는 이 말을 지금 제가 하는 겁니다. 암 걸리면 다 소용없잖아요. 암세포가 그 믿음을 비웃어요. ‘웃기고 있네! 나는 자라고 자라서 니 믿음 좋다는 주둥이까지 막아버릴 거다.’ 이게 암세포의 믿음이에요. 무슨 암세포를 이겨요? 기도원에서 지금도 막....., 

자, 어떻게 이 자리가 복된 자리가 된 거예요? 그것도 실패한 자리가 말이에요? 이제 개념 하나 또 모셔 와야 해요. 뭐 실력이 돼야 말이지. 모셔올 수밖에 없어요. 출애굽기 24장에, 이건 지난 여름수련회 때 다 들은 거예요. 저만 들은 느낌이긴 해요. 언약 체결공식이라는 개념을 모셔오겠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하고 언약을 맺을 때, 언약을 이렇게 맺는다는 거예요. 열두지파 들어가고, 그다음에 법, 율법 들어가고, 이제 기억이 새록새록 나시죠? 그다음에 피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언약을 체결한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언약체결공식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제사장 만드는 공식이에요. 언약의 나라, 피의 나라 만드는 공식. 

그걸 옆으로 이목사님이 쓰시면서 붙였는데요. 밑으로 세우면 이게 성전 안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성전 안으로. 그렇게 해서 다시 새긴 돌판. 깨졌는데 다시 새긴 돌판 들어가고, 법궤, 언약궤 안에 들어가고. 그다음에 그 위에 시은좌, 은혜가 내리는 자리라고 해서 거기에 피가 덮이는 거예요. 거기에 피가 덮이면, 하나님은 뭐만 보시느냐 하면, 유월절 때처럼, 심판의 천사가 뭘 보고 지나가느냐 하면 피 보고 지나가는 거예요. 피를 보고. 그 안에서는 고기 뜯어먹고 있고. 죄인이라 이 말이죠. 띵가띵가~ 하고 있었던 거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이 뭐냐 하는 거예요. 복이. 복은 다른 게 없어요. 그냥 다 덮는 것이 그게 복입니다. 시편 32편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게 복이에요. 전부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법이 죄를 빨아요. 죄를 짓는다고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다 빨아요. 
다시 말하면 더욱더 죄인 되게 만드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성령 받고 나서 그걸 알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 안에 들어갔으니까. 새 언약 안에 들어갔으니까요. 그 공식을 예수님이 그대로 이루시고, 새 언약에 들어가면 자리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정해진 자리가 있는 거예요. 막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죄인의 자리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사도바울이 그걸 알았어요. 율법의 기능이 뭔지 알았던 거예요. 율법이 왜 들어왔는지 알았던 거예요. 구원을 알려면 피만 들어오면 되죠? 그렇잖아요? 죄인과 피를 그냥 만나게 하면 돼요. 지금 이런 이단종파들이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성령 받았으니까, 니가 이제 주체가 되어서 주님처럼 니가 하면 된다는 이런 이단종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순서를 바꾸어놓았어요. 피 다음에 율법으로. 죄인, 피, 율법해가지고, 피로 구원받고 그 다음에 말씀 지키는 걸로. 아니에요. 주님이 이유가 다 있어서 순서대로 착착 다 집어넣은 거예요. 열두지파, 죄인, 집단죄인인 거예요. 율법이 들어와서 그렇게 만드는 거죠. 율법이. 죄를 전부 빨아가지고. 죄를 전부 빨아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피쪽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피는 죄를 받고, 저쪽으로는 피의 효과를 전부 다 내보내는 거죠. 그 교환, 그 교체작업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성전입니다. 죄 빨고, 피 덮고. 죄 빨고 피 덮고... 이렇게 계속해서 교환의 작용이 일어나는 거죠. 바로 그 교환의 작용 일어날 때, 그 피가 덮치는 자리,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이유 없이 마구마구 덮치는 거예요. 바로 그 자리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나오미, 룻이 같이 들어가 있는 그 자리인 겁니다. 그래서 그 희한한 은혜의 지평이 열린 거예요. 

그러면 나오미나 룻이 그 자리에 쏙 빨려 들어가죠? 뭘 잘못해서요? 아니죠. 남자 잘못 만나서 그런 거죠. 남자 잘못 만나서. 남자 따라 나갔다가. 하여튼 남자가 문제라니까. 남자 따라 나갔다가, 남자가 잘못되니까 거기에 쏙 빨려 들어간 거예요. 그래야만 되었던 거죠. 그래야만 새신랑을 만나지 않겠어요? 지금 새신랑이야기에요. 새신랑. 그래서 성도를 신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를 신부라고 하잖아요?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뭘 어떻게 해서, 내 팔자를 고쳐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자리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자리로. 그럼 남은 문제는요, 왜? 꼭 그 자리가 은혜 받는 자리에요? 다른 자리하면 안 돼요? 왜, 꼭 그 자리여야 되죠? 이건 참 빤한 이야기 같은데요. 이거는. 

그게 바로 신랑이 정해주는 자리라서 그런 거예요. 니가 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신부 니가 정하면 안 돼요. 신랑은 원래 다 덮어주는 분으로 오시는 신랑이기 때문에, 그 신랑은 다 덮을만한,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고, 죄인의 자리여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신랑과 신부가 딴딴따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성도의 복이란, 성도가 팔자 고치는 것이란,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새 남편이 거지같은 옛 남편에게 “저리가! 그지 같은! 니가 남자야? 너 같은 놈도 남자야? 저리가!” 하고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 남편이 들어오니까, 졸지에 복 받게 되었다는,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정말 졸지에 복 받은 거예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정말 복 받은 자리에...., 

이게 웬 복인지! 하다보니까 웬일로 내가 그 자리에 있고. 하다 보니 자꾸 은혜의 지평이 열리네요. ‘아니야. 아니야.’ 제가 수련회소감문 쓸 때 했는데요. 갈 때 보니까 제가 기운이 쏙 빠졌잖아요. 벤츠 타는 것 보고. 뭐야? 같이 수련회 참석했다가 누구는 벤츠타고 집에 가고? 아니 누구는? 소울도 좋은 차지만. 그랬다가도 자꾸 은혜의 지평이 열리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까짓 게 뭐라고? 이게 뭔데?’ 자꾸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요? 본인이 뭐가 달라서요? 룻과 나오미가 뭐가 달라서요? 덜렁덜렁 따라갔다가, 덜렁덜렁 망해서, 또 덜렁덜렁 이리 왔다가, 저리 왔다가. 지금 룻기 안에서 하는 행동들이 그냥 다 덜렁덜렁 이라니까요. 뭘 좀 차분하게 계산하고 하는 그게 없어. 저 밑에 자는 데에 들어가라. 들어가서 발 빼고 가만히 있어라. 무책임해요. 무책임. 성도들이 그래서 무책임한가? 우리교회 교인들이 그래서 무책임한가요? 형광등이 그렇게 나갔는데...아이구, 몇 년 전 이야기네요. 형광등도 목사님이 했다고 하고 저것도 목사님이 했다고 하고.. 그건 일종의 엄살? “아멘” 아멘?(하하하) 

이제 마지막 이 이야기하고 가겠습니다. 애들 설교할 때, 삭개오 이야기가 나왔어요. 나무 위에 삭개오가 올라갔는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른 거예요. 삭개오는 일종의 호기심이었겠죠. 소문이 쫙 돌았어요. 근데 지목해서 딱 “너야! 너 내려와!” 그래서 제가 어린이들한테 그랬거든요. “너! 천국 가!” 그럼 제가 끝난다고 했거든요. 

그럼 벌써 자리 끝난 거예요. “너는 죄인의 자리고, 나는 너를 용서해주는 자리야!” 그걸 끝났어요. 근데 그 삭개오가 얼마나 신났던지, 예수님을 초대해서 잔치벌이고, 그게 얼마나 좋았던지, 잘못 한 것이 있으면 재산의 네 배나 갚겠나이다. 이런 거 했단 말이에요. 

뭐냐 하면, 신난다는 거죠. 예수님은 자기 백성 하나 찾아가지고, 참 좋아 죽겠고. 그리고 이 삭개오는 자기 자리를 찾아서 너무 신나는 거예요. 불행이라는 것, 딴 거 없어요. 자리 못 찾아서 헤매는 것. 죽어도 자리를 못 찾고 귀신처럼 헤매는 것. 그리고 구 귀신 짓을 여기서부터 하고 있는 것. 추석 때는 집에 갈까? 아님 여기 남아있을까? 올라가? 내려가? 여기가 내 고향이야? 저기가 내 고향이야? 자리를, 직업은 뭐며? 맨날 헤매. 헤매. 근데 우리도 똑같이 헤매요. 

우리도 똑같이 헤매는데, 주님이 지정한 이 자리만 생각만 하면 참 부럽지가 않네요. 내 재산이 있으면 네 배라도 풀어서...제가 마지막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정말 본인이 그 자리에 있는 건지? 아, 나 그 자리 맞아? 내 자리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 정말 신나는 거 맞아? 돈이 신나는 것도 알고, 세상 사람들이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 그거 다 신나는 거 맞는데, 아니야. 아니야. 진짜 신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바로 니 자리는 여기야! 라고 딱 정해줬다는, 그 지정해준 그 자리에 아주 못으로 때려 박았네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십자가에 때려 박았어요. 정말. 그게 진정 신나는 건지? 건지? 한번 살면서 확인해보시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 확인하는 것은 나한테 잔고가, 은행의 잔고가 얼마나 있는지, 내가 앞으로 몇 살을 살 수 있는지, 내 자식새끼들한테 돈을 얼마를 물려줄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더 건강해서 이 세상에서 수壽를 남부럽지 않게 누릴 수 있는지, 그렇게 귀신처럼, 그런 자리를 찾아 헤매고 떠도는, 그런 귀신같이 떠도는 저희들, 더 이상 떠돌지 말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런 것 다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를 퍼부어주시는 죄인의 자리에 두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주여! 남은 인생 살면서 우리가 과연 그 자리에 놓여 있는지, 우리가 진짜 그 은혜를 좋아하는지, 늘 확인하면서 살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