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이상한 전쟁(대하20;15-17) 160912 한윤범

아빠와 함께 2016. 9. 12. 07:47
2016-09-12 00:35:41조회 : 24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대하 20장 15-17절(이상한 전쟁)160911-한 윤범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대하 20장 15-17절(이상한 전쟁)160911-한 윤범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역대하 20장 조금 줄여서 보겠습니다. 15절에서 17절까지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681쪽입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지금 유다나라에 여호사밧 왕 때입니다. 이때에 모압과 암몬 기타 여러 민족들이 유다를 치러 올라왔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때 시점에서 내일 일어나는 일이에요. 내일 너희가 마주 내려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스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그들이 올라온다는 거죠.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만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아주 이상합니다. 17절이죠.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지금 전쟁에 돌입을 하는 거예요. 연합군이 쳐들어오고, 여호사밧을 비롯한 유다가 그들과 전쟁을 치르러 마주나가고 있는 겁니다. 전쟁을 하려고 서로 여루엘 들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전쟁은 너희에게 싸울 것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전쟁판이 벌어지고, 지금 두 양쪽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이 전쟁은 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전쟁하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전쟁이기에 이렇게 아주 요상한 전쟁을 합니까? 역대하 20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면 이 전쟁이 정말로 이상합니다. 갈수록. 여호사밧 왕이 전쟁터로 나가면서 찬양대를 조직을 하고, 노래를 불러요. 성가대가 나가서 찬양을 합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해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하면서 찬양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날마다 전쟁이에요. 회사에 출근하고, 학교에 아이들 공부하러 가고, 이거 다 전쟁하러 가는 거잖아요. 전쟁터로 몰아넣고, 전쟁판을 벌이고 있는데, 이쪽 상황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 안일하게 보시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렇게 만만하게 여기십니까?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그런 안목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거예요? 세상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 연세 지긋하신 분도 계시고, 다 살아와 보셨잖아요? 퇴직하신 분도 계시고. 인생 사시는 것,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노래로 부르고 난리에요. 그런 노래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야말로 전쟁터고 날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 같습니다. “자, 너희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고, 날마다 전쟁터로 출근하는 모양이라면, 한번 말해봐라. 너희들이 어떤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도대체 무슨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거야?” 라고 물으시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까요? 그 뭐 우리는 비루한 인생답게, 시시콜콜 별별 이야기를 다 하겠죠. “먹고 살기 힘듭니다. 애가 말을 안 듣습니다. 사업이 지진부진 합니다. 가을철이 됐는데, 가을 물건은 준비해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래가면서 우리의 일들을 잔뜩 늘어놓겠죠.

 

그런데 인류역사 이래로 우리가 벌인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고, 그 목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항상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전쟁은 벌어졌어요. 그리고 승자와 패자는 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냥 힘과 힘이 대결을 벌였고, 마주쳐가지고 싸웠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힘자랑한 거예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눌렀다는 그 결과만 그냥 나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많이 들어보셨죠?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리고 승자독식.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

 

오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제국이 통치할 때, 그런 식으로 통치하잖아요. 전쟁을 벌여가지고 완전히 집어삼키는 거예요. 1840년대에 멕시코 전쟁이라고 이름붙인 전쟁이 있었어요. 그때 막 미국이 시작할 때에요. 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가 진 다음에, 멕시코가 가지고 있던 영토의 약 51퍼센트를 빼앗깁니다. 전쟁에 진 결과죠. 그래서 뭐 어떻게 됐습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뭐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크게 보일수도 있지만, 우리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너는 할 수 있어! 잘하면 돼! I CAN DO IT!” 해가면서, 너는 할 수 있다고 격려를 하잖아요. 근데 사실은 그게 격려가 아니고 할 수 있다가 해야 된다는 것으로 바뀌어서 들립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부모가, 너는 할 수 있어! 라고 아이들을 막 독려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해야 된다는 당위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거기에 꼭 부모들이 덧붙이는 말이 있죠. “너는 할 수 있어! 그리고 해야만 돼!” 이렇게. “남들 그렇게 다 해! 혼자 힘들어하지 마!” 이거 부모인지 웬수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작동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개인이든, 어떤 모양이든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게 바로 전쟁이에요.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뭔가 극복해야 되고,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하나하나가 다 전쟁이고 전쟁의 양상입니다. 극기하고 극복하는, 그 모든 것들. 그러나 이런 전쟁을 하면서도 주님이 우리에게 원래 마련해 주셨던 그 아름다운 동산. 그 최적의, 최고의 동산에 살아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잖아요? 거기서 쫓겨났었다는 것도 모르잖아요? 그런 기억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다 전부에요. 그래서 전쟁을 벌이면서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살아가는.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자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모든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산다고 살지만은,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어요. 가는 목적도 없습니다.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거예요. 단 한 번도 그 잃어버린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우리가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죄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쫓겨난 죄인들에게 출구는 없습니다. 출구를 찾으려고, 탈출을 하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치죠. 그 증거가 뭐야? 이렇게 하면 우리 역사가 이렇게 발전했잖아? 이렇게 진보했잖아요? 그런 것을 내놓잖아요. 날마다 계속 스마트 폰이 최신 폰으로 계속 나오잖아요. 1년 6개월, 또는 2년 주기로 또 바꿔야 되고. 약정을 그렇게 2년짜리로 묶어놓고 해서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게 하는 거예요. 신제품이 나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구형 폰이 되어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게 발전한 겁니까? 그게 진보한 거예요? 그래, 바꿔서 좀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그래서 발전해서 뭐? 진보해서 어떻게 됐는데? 계속 이렇게 캐물어 가면 답이 없어요. 그러다 죽겠지. 뭐. 바로 그겁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죽으면 끝이지. 뭐 이러고 마는 거예요. 어느 놈은 죽어 봤어? 죽은 뒤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죽으면 끝이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안 되는 거예요.

 

여전히 마지막 때에 세상이 불타버린다는 그 말씀을 뒤집을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세상 끝 날에 다 불태워버리고 우리가 자랑하는 그 진보니, 발전이니, 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리잖아요. 오직 주 여호와의 말씀만 남는 거잖아요. 우리나라는 미국이랑 프로야구 경기를 하게 되면 챌린지라는 경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가끔 야구이야기를 하시는데, 저도 야구이야기 잠깐 해보면, 그 경기를 보다 보면 아주 미묘한 상황이 있어요.

 

타자가 공을 쳤는데, 1루로 도착하기 전에, 1루 베이스로 도착하기 전에 이것이 아웃이 됐느냐, 세이프가 됐느냐 하는 판정이 애매한 거예요. 그래서 1루 심판이 일단 판정을 내려야 됩니다. 세이프이던 아웃이던.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랬을 때에 양쪽 중에서 불만이 있는 측에서 챌린지 신청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신청을 합니다. 그러면 심판들이 가서 헤드폰 쓰고 영상을 보고, 본부가 있어가지고 거기서 비디오를 돌려 보는가 봅니다. 알려줘 가지고 그래서 심판이 나중에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그 챌린지 신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본래의 그 심판이 판정을 했던, 세이프냐, 아웃이냐 하는 그 판단을,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아무리 역사를 뒤집어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날에 다 불타버리고, 그걸로 주께서 끝내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남고, 주님의 말씀만 남는다는 말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여러분, 증거 있으면 이야기해보세요. 15절 말씀을 잠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큰 무리로 인하여” 지금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숫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쳐들어왔는데, 그들을 마주보고 서있는 자들은 아무런 무기가 없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성가대 조직해서 지금 노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역대하 20장 속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변변한 무기가 있겠어요? 당연히 그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싸움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인데, 여호와의 전쟁의 본질은 거룩 하냐, 거룩하지 않냐, 하는 거예요. 거룩한 자는 거룩하지 않은 자를 이기게 되어 있는 거예요. 너희가 이것을 믿으면, 너희가 거룩한 자에 속해 있으면, 아무리 거룩하지 않은 자가, 원수들이 무기를 강력하게 하고, 뭐 사드배치하고, 핵미사일을 쏘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경에, “두려워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많이 반복되잖아요. 그 말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옵니까? ‘아이, 그래. 두려워할 필요 없지. 뭘 놀래. 주님이 계시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 동안. 3초. 정확히는 0.3초. 돌아서면 또....,제가 여기 오면서 설교 준비를 한 거예요. 처음에 설교 준비를 이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반도 안 남아 있어요. 다 뒤집고 엎어버렸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님의 전쟁은, 그 두렵거나 놀라운 그러한 명확한 상황에서도 그렇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을 우리가 읽고 볼 때마다, ‘아, 그렇지. 두려워하지 말고 또 놀라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써진 말이 아니에요. 주님은 그러한 말을 던지고 내뱉었을 때는, 거기에 합당하고 명확하고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무리가 몰려와가지고 우리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놀랄 수밖에 없지만, “이 전쟁은 내가 하는 거야.” 라고 근거를 딱 제시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놀랄 이유도 없는 거죠. 주님이 다 하신다는데? 결국 뭘 말하는 거예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이잖아요. 내가 거룩한 하나님께 속해 있느냐, 아니냐는 그 가름이잖아요. 내가 뭘 행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 전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전쟁의 양상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요. 이스라엘 안에서 지지고 볶는 전쟁이 일어나요.

 

나중에 신약과 신약 이후의 모든 시대에는 이 전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전쟁이 몸의 전쟁이 돼버리고 내부전쟁이 돼버려요. 그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탄식이잖아요. 그 유명한 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말을 가지고 바울이 믿음이 있었을 때다. 없었을 때다. 바울이 뭘 잘 몰랐을 때 한 이야기다. 그리고 뭐 성숙할 때 한 이야기다. 미숙할 때 한 이야기다. 하여튼 이것도 다, 욕이 들어가는 자리인데, 그 소리입니다. 모르니까 그냥 그런 소리만. 그냥 이것만 들여다보니까, 앞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바울이 그렇게 탄식한 것은, 그 안에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 항상,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놀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누가 이기게 하는 거냐? 너는 아니야. 내가 해! 라는 거예요. 시편 43편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져서 싸우게 될 때, 니가 아는 그 힘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힘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도 적용을 시켜가지고 예수님도 완전히 당해버렸어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내가 아는 하나님은 힘이 많고 능력이 있으신 그 하나님이신데, 그 힘으로 나를 충분히 붙들고 나를 충분히 지켜 줄 수 있고 두렵고 놀라운 상황에서 건져 줄 수 있는 그 하나님이신데,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거예요. 완전히 당해버린 거죠. 그렇게 믿었는데. 그 믿는 것은 니 생각이고, 니 자유고. 그 힘이 그 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예수를 믿거나, 믿을 때,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항상 뭘 구합니까? 힘을 구하잖아요. “주님. 이길 힘을 주옵소서.” 그 힘없어도 이깁니다. 주님의 전쟁이니까. 대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일을 합니까? 전쟁이 예상되면 준비를 하잖아요. 유비무환정신으로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말씀을 들었어요. “아이구, 그 여호와의 전쟁은 주께서 하시는 것이라며? 뭘 준비해?” 라고 어떤 사람이 그 말씀의 티를 낸 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또 어떤 상대방이 받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럼 아무것도 안 해? 그럼 우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래.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가만있어. 그냥 살아!” 라고 하니까, 화가 나가지고 “그게 말이 돼? 뭐라도 해야지?” 이런 식으로 치고 박고 한 거예요.

 

복음이 꼭 이런 식으로, 복음이 던져지면 꼭 이런 식의 모습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완전히 도돌이표에요. 복음을 전했어요. 십자가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뭐 십자가마을 수련회 같은 것을 하면 또 밤새도록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뭐 기도 안 해도 되겠네? 십일조 안 해도 되겠네?” 뭐 자기가 안 해도 되는 것,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죠. 그 다음부터는 뭔가 찜찜해가지고, “정말 안 해도 돼? 그래도 뭔가 해야지?” 뭐 이렇게 해요.

 

그리고 다 듣고 “아멘”하고. 분위기 좋게 가다가 맨 끝에 또 “목사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뭡니까?” “우린 어떻게 살아야 돼요?” 마지막 질문을 그걸로 굳히는 거예요. 그렇게 다 들어놓고. 이것이 계속 도돌이표처럼 계속 반복됩니다. 도돌이표가 무한도돌이표에요. 계속 반복, 반복, 반복됩니다. “전쟁이 일어난데. 준비해야지.” “아, 주님이 준비했는데 뭘 준비해?” “가만히 있어?” “그래. 가만히 있어. 가만히 살아.” 그럼 어떻게 돼야 하겠습니까? 이젠 그러려니 하죠.

 

이 기가 막힌 전쟁의 실상! 근본 원인이 뭐냐 하면, 우리 전쟁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누구의 전쟁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이 거기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창세기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싸움구경하는 거죠. 그 대표적인 유명한 구절이, 출애굽기 14장 13절 이후에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지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주님이 다 하신 다잖아요? 그죠? 그럼 이제 우리는 구경하는 거예요. 구경.

 

그런데 구경한다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다고 해야 되나? 그 전쟁의 양상이 이렇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에요. 고래가 싸우는 것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면, 싸움은 고래가 하는데, 피해는 새우가 입는 거예요. 이걸 좀 유식한 말로 하면 “부수적 피해”라고 합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그런 말을 제목으로 한 책도 있어요. “부수적 피해.”

 

전쟁이 주 목적이잖아요. 싸우는 게. 전쟁이 주 목적인데, 거기에 부차적으로, 부수적으로 어떤 피해가 생겼다는 거예요. 한국전쟁 당시에 총 사망자를 가장 크게 잡으면, 사백오십만 정도 됩니다. 되는데, 전쟁에 직접 총,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당사자, 군인들의 사망자가 약 사십사만 명이래요. 그럼 나머지? 90퍼센트 이상은 민간인이 죽은 거예요. 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식으로, 더 많이 죽은 민간인의 죽음을, 전쟁 당사자 입장에서는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다라고 이렇게 발표를 합니다. 미국 CNN뉴스 같은 것을 보면은, 전쟁 상황 발표가 당당해요. “아, 여기 우리 군인이 몇 명 죽었고, 부수적 피해로 뭐 얼마..” 이걸 영어로 멋지게 해야 되는데..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운동회 같은 것을 하잖아요? 저희도 큰 아파트 단지인데, 옛날 같지 않고 초등하고 운동장이 꽤 작습니다. 그리고 인조 잔디 같은 것을 깔아놓고 그랬어요. 그래도 그 작은 운동장에서 운동회 같은 것을 해요. 여러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이어달리기잖아요? 달리기 시합이잖아요? 달리기 하는 여러 팀이 딱 출발을 했어요. 열심히 달립니다. 달리다가 어떤 한 아이가 넘어졌어요. 엎어졌으니까 무르팍이 깨져서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일단 애들은 피를 보면 놀래잖아요? 그 피를 보고 주저앉아서 달려야할지 말지, 그런 것은 잊어버리고 엉엉 울고 있는 거예요.

 

자, 또 다른 한 아이도 넘어졌습니다. 무르팍이 깨졌습니다.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 피를 스윽 보더니, 그냥 툭툭 털고, 씨익 한 번 웃고, 여기 씨익 한 번 웃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씨익 한 번 웃고 그냥 골인지점으로 달려 나간 거예요. 자, 지금 달리기 시합이라는 주된 목적을 가진 어떤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근데 달리다가 넘어진 것은 부수적 피해에요. 근데 씨익 웃고 골인지점으로 달려간 아이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러한 피해가, 그러한 상처가, 그러한 아픔이, 그러한 죽음까지 내게 있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나는 골인지점으로 달려갈 거기, 골인지점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야 된다는 거예요. 뭐가 중요한지를 아는 거죠. 그죠? 깨지든 말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냥 억지로 참아야지. 이 힘든 일 참고 이를 악물고 참아야지.’ 해서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고, 인내는 그렇게 참아지는 거예요. 웃으면서. 왜냐하면 주님께서 발생시킨 일. 주님께서 전쟁을 벌였는데, 피해는 내가 입는 식으로 닥쳤을 때, 이 피해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아주 명백한 운명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한 일들이 보상을 못 받고, 대우를 못 받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많아요. 그럴 때마다, 그냥 주님 생각하면서 그냥 씨익 웃고 넘어가버린다면 그게 인내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깨지고, 엎어지고, 자빠지게 한 것도 주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주께서 하신 일이라면, 내가 당한 피해도, 내가 당한 실족한 일도 주께서 하신 일 아닙니까?

 

오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는 그 잣대를, 늘였다, 줄였다,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돼요.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저울은 항상 고치거나 옮기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자꾸 십자가 복음을 안다, 뭐 예수를 안다, 뭐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넘어진 지점에서 웃을 수 없으면, 그것은 그 안다는 것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에요. 사도들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 시련을 당하거든 어떻게 하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성경은 정답이 다 있다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안 찾아보고 우리가 관심을 안두어서 그렇지. 여러 가지 시험이 오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죠. 억울한 일 당해도 마찬가지잖아요. 무르팍 깨진 것이 대수에요? 예수님이 왔다 갔다는데? 그런 일을 겪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은, 그 근거가 뭡니까? 그 밑에, 그 배경에, 백그라운드에 주님이 계신 거예요. 주님이 다 아시고 관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부수적 피해에, 무르팍 깨진 것에, 그냥 온 신경이 다 쓰여 지는 거죠. 아무리 눈을 부라리고 안다고 우겨도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그냥 정보, 정보차원에서 정보하나 습득한 거예요. 정보라는 것이 뭡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필요한 어떤 것이잖아요. 그래서 그 상황이 바뀌면 내가 아는 정보는 소용이 없습니다. “11시 57분 실시간 교통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2시 57분에 그 교통정보가 소용이 있어요? 없잖아요.

 

또 하나, 주식시장의 고급정보. 오늘은 필요한 이야기이겠지만, 내일은 필요 없잖아요? 만약 내일 주식시장의 그래프가 어떻게 움직인다고 안다면, 오늘 달러 빚을 내서라도 다 사놓겠죠? 그죠? 내일 확실하니까. 그러나 주식정보는 항상, 더군다나 나에게 오는 주식 정보는 항상 고급정보는 아니죠. 그죠. 시간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다 날아갑니다. 날씨 정보 또한 마찬가지죠.

 

전쟁을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무대포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되잖아요. 오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은, 마귀의 전략은 뭡니까? 뱀의 후손으로서 마귀의 전략은 어떤 전략이에요? 분할통치를 한다고 했죠? 분할통치. 한 인간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면 인간인 거예요. 근데, 마귀에 의해서 어떻게 됐습니까? 한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진 거예요.

 

인종이 있어요. 흑인이 있고, 백인이 있고, 황인이 있고, 홍인종도 있어요. 아까 미국이야기도 잠시 드렸지만, 그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초창기에 인디언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어요? 흑인들이 얼마나 많이 백인에 의해서 많이 죽임을 당했습니까? 이게 분할통치하는 거예요. 종교 마찬가지죠. 경제, 문화, 이런 차이로 갈등을 조장하고, 경쟁으로 내몰아넣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우도록 하는 거죠. 분열을 획책하는 거죠. 주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거죠. 십자가를 멀리하도록 하는 거죠. 마귀의 전술입니다. 전략입니다.

 

분할통치를 깰 수 있는 그 유일한 방법은 바로 통일입니다.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통일 전선을. 말이 좀 그런데..., 이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입니다. 28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거예요. 하나. 그리고 또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9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자의 후손 되시는 주님께서 마귀를 대적하는 그 전쟁에서 사용하시는 그 전략은 통일전선입니다. 남과 여를 우리는 구별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라는 거예요. 자유자나 노예나 하나라는 거예요. 인종, 문화, 정치, 종교 갈등, 모든 갈등이 그냥 하나라는 거예요. 어디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그러니 그 안에서 뭔가 나누는 것은,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는 거죠. 그래서 주 안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거기에는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나라는 것을 따로 상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모셔놓고 그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겁니다. 그게 통일체를 이루고. 근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안다고 해도 그냥 정보차원에서 듣고 흘려버린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그저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구약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저는 기억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기억하라. 옛적 일을 기억하라. 여호와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라. 네 조상들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

 

신명기에 보면 대표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아주 압축적으로 해서 다 기록이 되어 있죠. 너무 그 오고 오는 후손들이 다 잊어버리니까 그걸 기억하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못 기억하고 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못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쫓겨난 것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돌아가야 된다는 것도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생각이 안 나는 거죠. 이른 봄에 매화꽃이 피면 우리는 그걸 보고 감탄을 합니다. 감탄을 하다가도 진달래꽃이나 철쭉꽃이 활짝 피게 되면 매화꽃은 어디 갔습니까? 이 기억 속에서 다 사라져버리죠.

 

우리는 주님의 말씀도 꼭 그런 식으로 처리해버려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그래서 목사가 맨날 똑같은 소리해도 되는 모양이에요. 그저 내 눈을 호강시키고, 우리 살다가 또 어려운 일 당하면, 그냥 말씀이고 뭐고 팽개치고 다 그냥 돌아서버립니다. 가끔 버티는 사람이 있어요. 가끔 버티더라도 그 버티는 것이 자기 투자한 돈이나 시간 때문이지, 결코 믿음 때문에 버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 이 기독교 종교는 아주 사악한 종교로 이름이 났어요. 뭐 피를 마시고, 뭐 몸을 떡으로 삼아먹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즐비하게 나오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즐비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발라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소스처럼 뿌려진 그 피의 복음이 입에 맞지 않으니까 그냥 뱉어버리는 거예요. 뱉어버리고 돌아서버리는 겁니다. ‘에이, 맛없어. 다른 집에 가서 먹어야지.’ 이러고 돌아서버립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잘 가!”하죠. “어디 예복도 없이 와가지고 이 고급음식을 타박을 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하면서 가는 것 붙잡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을 보고 제자들도 “참 이 말씀이 어렵도다” 했어요.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이 말씀을 듣고 소화시켜낼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결과와 정답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로 이상하고, 정말 이렇게 신기한 여호와의 전쟁은, 그 시작하신 분이 끝도 내십니다. 우린 아무생각 없이. 생각이 많으면 뭐가 상한다고요? 비위가 상합니다. 아무생각 없이 사세요.

 

성경 한 구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46편 9절과 10절인데, 9절,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거예요.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쉬게 하신다는 거예요. 쉬게 하실 때에 쉬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늘과 땅에서 난리가 났어요. 모든 사단이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임을 알고, 그것이 복인 줄 알고 그냥 사시면 됩니다. 쉬라고 하셨으니까 우리는 쉬면되겠죠? 그죠? 여러분, 잘 쉬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고 주님께서 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우리가 나서서 어떻게 할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맡겨진 채로, 주께서 끌고 가시고 있으니, 주님 하시는 일을 보면서 쉬라 하신대로 잘 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