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0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0-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한 내용이 뭐냐 하면, 역사 바깥에 대해서 역사 안에 존재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만들어졌다는 말은, 만드신 분의 생각과 만들어진 사람의 생각이 달라요. 로봇하고 로봇을 만든 사람하고 같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만들어진 로봇 입장에서는 자꾸 자기 입장을 합리화해요. 뭐, 이정도 알면 많이 아는 거니까 봐주세요. 그럼 그렇게 되면 피조물의 나라에 가야 합당합니다. 아까 어려운데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기껏 가봐야 피조물의 나라에 가야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피조물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이야기해보세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 어디에 간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나라죠. 건방지게! 이게 주인이 달라요. 우리끼리 만든 나라는 우리끼리 나라에요. 인간나라입니다. 인간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것이 서로 인정되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정하기 나름이에요. 그 기준을. 인간끼리 뭐 합의해서 해봐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인간나라에 살아야지,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인간나라로 족하면 돼요. 문제는 이 인간나라도 마귀가 설쳐대서, 이게 지옥 같아서 문제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려면, 뭐 예수님 빽써서 들어간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고요. 예수님의 빽써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만 갈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그 몸이 되는 지체는 그리스도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이걸 구약에서는 이렇게 해요. 집안에 맏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으면 둘째, 셋째, 넷째..딸내미든, 어떤 것이든 관계없이, 맏이가 모든 것을 소속해서, 결정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유월절 아시죠?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 죽이려고 옵니까? 누구만 죽이려고 옵니까? 맏아들만 죽이려고 오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맏아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이미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가정이라는 거예요. 인정받는 가정.
그러면 그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하늘나라 보낼 때에, 계약자가 맏이하고 단독계약 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집 맏이는 군에 갔는데? 계약자가 없는데?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백성의 맏이가 나옵니다.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작은 모형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천국 갈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죄 진 자가 어떻게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느냐를, 그 원리원칙을 모형을 통해서 솎아내듯이 해서, 그냥 원리만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역사 속에, 현실에 실습을, 테스트를 시켜 봐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좋다고 주의 말씀대로 지킨다고 지키잖아요. 지켰는데, 구약이 끝날 때, 어떻게 끝납니까? 이스라엘의 파멸, 이스라엘의 멸망, 그들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위인들이었더라. 그 이스라엘의 멸망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는, 동기로 동원되어야 될 유대인 집단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주요인물로 해서 단체가 이루어지는데, 그 단체가 극대한 대립, 다시 말해서 그냥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되느냐, 아니면 인간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인정해줘서 구원되느냐를, 바로 그 유대집단이 우리를 대표로 해서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물론 결과는 그들의 아비는 악마라고 해서 지옥가지만 우리한테 유리한 점이 있어요. 그들이 존재해서 유리한 점은 뭐냐 하면 그들이 계시로써 가담되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 좋은지. 왜? 우리의 모델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델. 아, 바리새인들이 저런 사고방식으로 메시아를 생각했구나. 그럼 나는? 나는 메시아를 생각할 때, 어떤 사고방식일까?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좋게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바리새인들이 왜 욕을 얻어먹었는지, 이렇게 성경이 있으니까, 대조를 해보게 되면, 이것은 주님 쪽에서 좀 실수하신 것 같은데요? 라는 것이 늘 이렇게 등장해요. 인간으로서는 할 도리 다 했는데, 더는 못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런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 오병이어 아시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수많은 사람이, 오천 명이 따라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그 사람들이 줄곧 예수님을 따라왔습니까? 아니면 중도에 헤어지게 되었습니까? 그들 오천 명이. 계속 예수님을 추종했습니까? 중도에 헤어졌습니까? 헤어졌죠. 예수님께서 어떤 멘트만, 말만 안 했으면 안 헤어졌어요. 근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그 충성심이 얼마나 갸륵하고, 대견스럽습니까?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는 것은, 메시아가 볼 때 전혀 오류가 없어 보이죠. 예수님이 말만 안 했으면 됐어요.
그런데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영생을 얻을 수 없느니라.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그들 눈에는 자기 혼자 존재하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존재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구원자입니다. 놓칠 수가 없어요. 탕웨이가 한 광고 있잖아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놓칠 수가 없어요. 말만 안 했더라면.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다가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죽음을 집어넣었어요. 죽음을. “육이냐? 안 돼! 육은 안 돼!” 하나님의 나라는 육은 못가. 내 살과 내 피. 너희들로 인하여 흘려진 내 살과 내 피. 너희들이 하는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대신 죽기 위해서 흘린 내 피와 살이 없으면 영생이 없느니라. 이렇게 할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 이단이요? 당신은 잘못 되었어.”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아주 소박하게 이야기했어요. 딱 네 글자입니다. “어렵도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누가 저 말을 믿을 수 있느뇨” 라고 했어요. 어렵도다. 믿을 수 있느뇨.
그들의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설득만 잘해 주시고 우리가 납득되도록 이야기해주시면 우리가 얼마든지 당신을 좋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눈에 좋게 보기 때문에, 만반의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당신 쪽에서 말을 어렵게 해버리니까, 도대체 우리는? 저걸 이해해야 영생인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건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제자들도 나중에 성령이 와서 이해되었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다 가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지? 왜?” 그러니까 제자 중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 제자들아! 너희들이 알아서, 선택해서, 괜찮다고 여기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희들이 따라왔다고 한다면, 너희는 전혀 영생하고 관계없다. 근데 나중에 아버지의 뜻, 오기 싫어도 와야 되고, 구원받기 싫어도 구원받아야 되고, 지옥 보고 싶어서 환장을 해도 니는 지옥 구경 못하고 천국을 무조건 가야 돼. 이 뜻은 창세기 이전의 뜻이에요. 이미 태어난, 창조 후에 태어난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우리의 바람이 아니에요.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 소망보다 더 우세한 것이 누구의 소망이냐 하면, 창세전에 주님의 소망이 더 우세가 되어서, 우리는 내빼도 내뺄 수가 없는 그런 이상한 팔자가 되고 말았어요. 막 지옥가려고, 뭐 천국에다가 뭐 마약에다가, 합치면 마약 천국. 삐리삐리~오토바이 타면서 온갖 타락과 방탕을 해도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주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천국 넣어줍니다.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할 때는, 십자가만 찾지 마시고 요한복음 6장의 내용도 거기서 끄집어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는 필히 아버지가 책임지고,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아버지로 말미암아 반드시 들어가게 하는 그 결과물이 오늘날 접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 나온다 하죠. 우리라는 결과물은, 원인은 우리의 역사나 행함 속에 없고, 원인은 창세전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의 말씀처럼, 창세전부터 우리는 영생받기로 작정되었다고 사도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놨어요.
이미 창세전에 우리에게 작정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작정이 어려우면, 계획이라고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은 뒤에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어떤 결과물?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주님의 뜻입니다. 뜻이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뜻이에요. 주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창세전과 자기존재를 연결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가느다란 낚싯줄이지만, 거의 안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계속 흘러 들어오죠. 계속 흘러 들어옵니다. 곡물 창고가 위에 지어져 있고 밑에 인간이, 곡물 받아야 될 배급자가 있다면, 이 사이에 파이프가 있어가지고 사료나 곡물이 내려가겠죠. 요거, 요거, 이 파이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이 관계가 의지, 내가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위선이고. 이렇게 엉터리라도 하나님이 구원받게 하신 요(파이프)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것은,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죄를 줄여나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가 아니라, 점점 더 거룩한 성화를 해서가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요 관계,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요 관계로 인하여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검사 있습니다. 표 검사합니다. 표 검사할 때, 행함 들이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한,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겁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서 17절 사이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거기에 나와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은,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남들이 얼마나 비웃고,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은 나로 인하여 얼마나 실망하고, 나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나로 인하여 기도가 안 먹힌다고 낙담을 하겠느냐, 라고 이렇게 자꾸 눈에 보이는 사이를 생각하는데, 여러분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한 분의 응답만 기억됩니다.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대제사장이 되어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간절히 간구하고 계시고, 이 기도의 응답으로 너희가 구원을 얻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기도 할 바를 알지 못했으나, 성령이 실실거리며 비시시 웃으며 그렇게 기도할 줄 알아요.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이고, 주여! 아이고, 이놈아!” 탄식을 하면서 기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도의 응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은 역사지만, 묵시 안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미 과거완료가 되어 있어요. 이미 금메달 손에 쥐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구원받는지를, 그걸 알아가는 것이, 이제 남은 세월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무척 어려운데, 어려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적어놔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다 눈이 멀어 있어요. 그걸 브라인드 스팟이라고 해요. 미국에 와서 제가 영어를 많이 쓰는데, 원래 영어 잘 안 쓰는데, 맹점,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블라인드 스팟이 어떤 것이냐 하면 제가 위쪽에서 오기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왔거든요. 저 위쪽에서. 나이아가라를 폭포를 가 본 사람, 안 가본 사람, 두 번, 세 번 열 번도 가 본 사람이 있겠지만, 제가 느낀 점은 그거에요. 나이아가라 폭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진실을 보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들이대니까 뭐가 날아와요. 폭포 물보라가 날아와서 폭포 밑에 가니까 그 전경을 볼 수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보기 때문에, 이게 어두움인 거예요. 근데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물보라 때문에, 나도 안 보이고 나이아가라 폭포의 진면목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어두움인 거예요. 맹인이 되는 거예요. 맹인. 그 막 쏟아지는 물보라 앞에서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이아가라 폭포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멀찍이 가서 보면 뭐가 보입니까? 나 여기 있고, 나이아가라 폭포가 500미터 저기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나 여기 있다는 말은 이미 절대적인 진실에서 그만큼 멀어졌다는 겁니다. 그만큼 조작되어 있고 위작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은 환상이고 위작이고 조작된 거예요. 자기 역사에 유용한 것과 역사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된, 나의 해석의 결과물로써 나한테 오는 겁니다. 이번에 비 온 것은 우리 농사 잘 되라고 온 것이다. 언제 주께서 농사 잘 되라고 비가 오게 한 적 없어요. 그런 것 없어요. 아들 하나는 소금장수고, 아들 하나는 우산장수인데, 그럼 비가 왜 왔습니까? 비가 오면 소금장수 아들이 화 낼 거고. 비가 안 오면 누가 화냅니까? 우산장수 아들이 화 낼 거고. 엄마.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집 말아 먹으려고 합니까? 우리 집 우산장사하는 줄 몰라요?
모든 인간의 판단은 자기의 유용성과 자기에게 어느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인가를, 이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런 무리수를 두는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안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나 절대적인 것 앞에서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어떤 누구도, 모든 인간은 소경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경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소경 된 자만 뭐가 보인다? 예수님을 안다는 겁니다. 블라인드 스팟, 맹점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어도 괜찮아요. 왜? 주님의 은혜가 이 결과물이기 때문에.
알아서 잘 챙겨서? 알아서 잘 챙겨서 내가 된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내 욕구와 욕망과 환상 속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것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의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말씀 전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겁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죄인에서 의인되는 것, 여러분 다 아시죠? 구원받으려면 죄인에서부터 의인되는 것, 여러분 다 아시죠? 왜냐하면 원리가 그냥 낚싯대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이 뭘 거칩니까? 십자가를 거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죄는 내 죄 때문이 아니고, 누구 죄 때문에? 너희 죄 때문에 거치잖아요.
그럼 우리는 필히 어떤 위치에 있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자리며,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뭐가 된다? 죄가 될 때,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구원되는 공식이잖아요. 이걸 빨리 한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하지만. 어쨌든 죄인, 이 경로를 거쳐야 되지 않습니까? 거쳐야 하는데, 인간은 절대로 이해 못해요. 잘난 내가 왜 죄인 되는데? 잘난 것 조그만 격려하면 더 잘나질 수 있는데?
이 문제는 무슨 문제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이유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안 만나서 그래요. 안 가봐서 그래요. 나이아가라 폭포를 저 멀찍이 서서 사진 찍어서 그래요. 물보라 쏟아지죠, 비닐 옷 입은 것 다 벗어졌죠, 스마트폰 동영상 찍는다고 하는데 위치를 못 찾아서 실수하고 이러죠. 갑자기 물보라가 오는데, 이게 막 밀릴 정도로 강력한 물보라가 온다면, 내가 한가히 멀찍이, “아이구, 폭포 좋다! 세계 3대 뭐 폭포고 높이가 53미터고..” 이렇게 정보를 발산한 것과, “이러다가 배 뒤집어지겠다!” 실제로 온 몸으로 느끼는 것하고는 달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이사야가 이야기할 때는 멀찍이 서서 하나님은 어떻고, 창세기가 어떻고, 지금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이야기에요. 자기 문제에요. 이 몸 자체가 어떤 몸이다? 망하는 몸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망하는 몸이 잘난 척 했고, 망하는 몸이 남을 의식해요? 이게 무슨?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망하는 몸이 왜 남을 의식합니까? 망하는 몸이 왜 부끄러움을 느끼죠? 복음 안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충분히, 주께서 남들이 너를 놀리는 이상으로, 이미 충분히 놀림의 대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구원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을 구원했기 때문에, 놀림받아 마땅한 것을 충분히 인식하라는 숙제를 주고 구원했기 때문에, 이 자리(죄인)에 머물지 말고 이 자리(의인)에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남한테 모멸감을 당해도 쌉니다. 그거 호들갑떠시면서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수치 문제는 중요한 문제에요. 수치 문제 때문에 자살까지 이어집니다. 사람이 왜 자살합니까? 부끄러워서 자살하는 거예요. 왜? 내가 이 정도 되었다는 평판이 이미 나있잖아요. 친구 만나면 나는 이 정도라는 것이 나와 있는데, 그 사람에게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들 앞에 내가 설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용서가 안 되어서 그래요.
제가 시카고 강의에서 몇 안 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강의를 했습니다. 성도님들이 이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주님 소관이지만. 제발 자기에게 실망하라고 했습니다. 제발 매일같이 자기한테 실망하시고, 실망하되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할 권한이 없어요. 내가 내 몸이 아닌데 왜 자책합니까? 우리는 결과물이죠.
내가 잘못해서 결과가 나왔으면 자책하겠는데,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환상을 꾸다가, 환상이 톡 깨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니까 깨지면서 실망하고 돌아서서 감사하고 그래요. 꺼진 불도 다시보자. 이런 표어처럼. 자기한테 실망하고, 자기한테 실망하도록 해주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요한일서 2장 11절의 말씀이 해당되는 겁니다. “니가 어두움이며 어두움에 눈이 멀었음이라” 저요! 저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나설 때, 그 사람 속에 요한일서 2장 11절의 말씀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그대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여러분들 킹크랩 잡숴봤습니까? 뭐 자랑질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껍데기 먹습니까? 속을 먹습니까? 속을 먹죠. 성도는 내 안에 말씀이 들어있어요. 바리새인 들어있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 들어있고, 뭐가 들어 있어도 괜찮아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어떤 것이 들어있으면 어떻습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인데. 주의 말씀을 표현해주는 표현형으로 그동안 우리를 사용하신 겁니다.
어떤 사람이 물어요. 하나님. 에덴동산은 살기 좋게 만든 동산이잖아요? 누가 살기 좋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왜요? 저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빼버립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면 에덴동산을 덴저러스dangerous한, 해골표시해서 위험한 곳이라고 표시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여러분들 혹시 아드님 계십니까? 아드님 키울 때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곰 인형이나 이런 것을 놓아야지, 수류탄 두 개에다가, 가시덤불 놓아가지고, 애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게 말이 돼요? 지뢰 막 깔아놓고.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만 사랑해요. 우리를 사랑 안 해요. 왜? 하늘나라는 하나님 자기를 위한 나라이지,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받고. 어떤 인간도 구원 못 받고 장자만 구원받아요. 우리는 그 장자로 인하여 우리는 양자되어서,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우리는 그 나라에 합류하는 겁니다. 내 영이 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가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영이 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 주제 파악하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에덴동산 해석부터가 잘못되었어요.
에덴동산이 우리 좋아라고 있는 동산 같으면, 죽음의 요소가 거기에 심어질 이유가 없어요. 한 20년 지켰다고요? 그러면 25년째에 안 따먹을 줄 알아요? 한 오백년 지켰다고 해서 오백년 그 다음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데, 오백년 지켰으니까 뭐 따먹어도 봐주세요. 뭐 이런 거 없어요. 천년이 지나도 그건 유혹입니다. 여러분, 유혹을 이긴다고요? 이길 유혹 같으면 애초부터 유혹 값도 못한 거예요. 유혹이란 못 이기라고 주신 것이 유혹입니다. 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세월 간다고 유혹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유혹에 빠지면 돼요. 이게 뭐냐, 정말 나는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내가 보이는 내 시선을 블라인드 스팟, 없애버리면 돼요. 없애버린 그때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존재하는 ‘나’가 새롭게 발견될 것입니다. 어둠속에 들어가세요. 거기서 나를 잊어버리세요. 거기에 안 들어가려거든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보시면 됩니다. 정신 차릴 수가 없어요. 폭포 찍으려고 갔다가 폭포는 안 보입니다. 잔뜩 물보라만 찍히고, 나중에 윤곽보이는 것은, 저쪽은 캐나다선(船), 이쪽은 미국선, 미국 배를 조금 뺏을 때에, 그때 어렴풋이 물보라가 보이면서 밑에 윤곽이 흐르는 것이 보여요. 그때 찰칵찰칵 찍어요. 정면 안에 보면 하나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 하나도 안 보여요. 멀찍이 보는 하나님 그건 가짜고. 내가 보고 있다고 의식하면서 보는 것은, 전부 다 가짜믿음이에요. 근데 그 가짜 속에 말씀이 들었다면, 그건 진짜입니다. 그래서 나의 외부가 나의 내부를 찢는 그 시간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성화론 없습니다. 거룩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이 관계가 거룩이예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그 ‘너희’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너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부터 시작하는 새롭게 피조물 된, 어떤 죄인을 가지고 말씀으로, 킹크랩 속에 집어넣어서 만든, 이런 쓸데없는 인간도, “아버지여, 제가 이 피를 흘려서 구원했습니다.” 라고 예수님 자기자랑 할 만한 그러한 결과물이 바로 ‘너희’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장 12절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그 다음에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여기에 세 종류의 육신이 나옵니다.
첫 번째 육신은 뭐냐 하면 자녀가 나오죠. 자녀 나오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아비 나오고, 그 다음에 뭐 나옵니까? 청년 나오죠. 이렇게 세 가지의 육신에 관한 호칭이 나오는데,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의 육신은 그 어떤 경우라도 확정되어 있어서, 육신이 육신의 관계를 변경하지 못한다는 요소가 육신에게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엄마가 자식을 낳잖아요. 자식이 좀 애를 먹는다고 하면, 농담 삼아 뭐라고 합니까? “그럴 거면 집 나가! 나는 니 호적에서 뺀다.” 이렇게 하죠. 절대로 못 뺍니다. 육신은 확정된 거예요. 내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고 오면, “아이구,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하지를 못해요. “이놈의 자식아! 그래, 이제 돌아와?” 이렇게 합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가 자아가 있다고 해서, 육신의 관계를 변경할 수 없는 그 상황, 형태를 가지고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뭐냐, 고정성. 육신의 확정된 이 고정성이 육신의 특징이에요. 육신을 니 마음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나는 저 이쁘다고 내 자식 만들고, 저 못난 자식은 니 자식 하라고 이렇게 바꾸지 못합니다. 자녀, 아비 사이 절대로 못 바꿉니다. 한 번 태어난 자녀는 영원한 자녀고, 한 번 태어나게 하신 부모는 영원한 부모에요.
꼼짝 못합니다. 이 관계는 꼼짝 못하죠. 그 확정된 꼼짝 못함을 사도요한은 그대로 영적 관계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육만 꼼짝 못하는 줄 알아? 영도 육신 이상으로 꼼짝 못해! 니가 손 못 대! 그 관계를. 너의 구원, 너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니가 육신을 니 마음대로 못하듯이 영의 세계도 니 마음대로 못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나와 너 사이가 자녀의 관계라면, 이 자녀의 관계가 확정된 것처럼,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이 내용도 확정적이다. 니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미 사함을 얻었다는 것도, 육신 그 이상으로 확정적이다.
자, 여러분 묻습니다. 확정적인 것을 알려면,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강의에서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내가 확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확인하고, 증명하고, 이걸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아시는 분, 뭐 손들고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확정적이라는 것을? 묻는 내가 잘못이죠.
내가 믿던 것 다 깨지면 됩니다. 내가 믿던 것. 저게 확정적이었다는 것이 다 깨지면 돼요. 깨지고, 깨지고 다 깨진 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안 남으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아무것도 확정적인 것이 아니고. 다 깨지고 마지막 요한일서 2장 12절이 남으면,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음이요, 이게 남았으면, 여러분 처음부터 세상 모든 것을 얻어 챙긴 것이 되는 겁니다. 자녀 떠나고, 남편 떠나고, 아내 떠나고, 집 떠나고, 재산 떠나고, 불나고.....,
어떤 분이 자살을 할 때, 굶어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내가 믿던 확정적이었던 그것들이 파편이 되어 조각조각 깨어질 때, 내가 의지할 것이 없는 거예요. 내가 뭘 믿고 살아야 되느냐? 앞으로? 무슨 보람으로 살아가야 될 것인지. 손에 쥔 것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뭘, 해볼 여지가 없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무슨 이야기 되는 겁니까? 니가 그동안 확정적이라고 여겼던 것은 다 구라고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니가 지금 믿지 않으면 될 것을, 그걸 가지고 믿음의 대상으로, 내용으로 포함시킨 거예요.
제가 아는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교인들로부터 존경받았어요. 한 오천 명 되는 교회에요. 오천 명 되는 교회인데, 제천에 어떤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분이 누군지는 말은 못하는데, 그 분이 그 교회에 다녔으니까. 그 분이 나이 한 오십 얼마 되어서 교인들 한 일곱 가정이 남았어요. 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뭐, 뭐 이럴 수라니요? 뭐가 어쨌는데요? 교인이 오백 명이 아니고 오천 명이에요. 제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오천 명이 었쨌다구요? 그 사람이 지금 예수 안 믿습니까? 믿죠. 그럼 됐잖아요? 죄 용서 안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그럼 됐잖아요?
분명히 공식이 뭡니까? 죄인을 뭐했다? 십자가로 뭐했다? 십자가로 의인되었잖아요. 그럼 의인으로 확정된 방법은 뭡니까?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뭐로 드러나면 된다? 죄인으로 드러나면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은, 죄인이면서, 아닌 척 하면서 의지했던 모든 것은 어떻게 돼요? 이런 껍데기를 다 벗겨버려야죠. 그렇다면 내가 진짜 예수 믿었는지, 아니면 예수 이름으로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었는지가 드러날 겁니다.
그러면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어릴 때부터 부모 교육 가운데서, “우리 가정에서 너 같은 존재는, 적어도 이 정도 되어야지.” 라는 이것을 줄기차게 양육 받고 세뇌 받고 훈련시킨 거예요. 계속해서. “우리 집안은 니같은 인간은 용납 안 된다. 똑바로 해!” 이렇게 양육 받고 훈련받다보니까, 나는 이정도 돼야 나답다고 여기는 거예요. 블라인드 스팟(맹점, 맹인)이 안 된 겁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안 선 거예요. 멀찍이 사진 찍은 거예요.
그리고 내가 사진 찍는다. 저 나이아가라 폭포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예수님 잘 계셨어요?” 인사하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근처도 안 갔어요. 행여나 내 가정이 다 깨질까싶어서. 멀찍이 있으면서, 지금 벌벌 떨면서 가는 거예요. 그럼 우리교회 교인들은 늘 복음 아닌가, 복음인가를 정말 예리하게 집어냅니다. 제가 설교하려고 딱 서면 교인들의 눈빛이, “새로운 것 내놔! 아는 것 말고 새로운 것 내놔!” 계속 내놓으라고 하는 봉사해야 되는 임무가 있어요.
그렇게 예리해요. 예리한데, “근데, 저 김집사님. 기도순서인데요?” 이렇게 하면, 삑(☓). 복음 잘 아신다면서요? 그냥 고백하면 되잖아요? “아아~못합니다.” 말을 더듬어서 못하고...뭐, 왜 못할까요? 생중계 때문에 그래요. 생중계. 예배 생중계 되거든요. 생판 모르는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복음 아는 교인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복음이가?” 씹을까봐. 그럼 어릴 때부터 뭡니까? 너는 남한테 씹혀서는 안 돼! 이게 본능적으로 습성이 되어 있어요.
습성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습성이라는 말은 습관이 아니고, 어떤 것이 몸과 하나가 되어서, 자연적으로 몸이 그걸 정상적으로 할 정도로 이미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남한테는 욕 얻어먹고는 못 살아. 그럼 자살해야지. 그렇기 때문에, 멀쩡한데, 그럼 기도 안 하면 되지, 괜히 기도해가지고 온 뒷 담화 다 듣고, 김집사,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만, 기도하는 꼬라지하고서는. 이러니까 얼마나 우사스러운지. 그런 우사를 왜 사서합니까? “미안합니다. 저는 빼주세요.” 저는 그 결과가 묵시적, 창세전의 결과기 때문에 동의합니다.
그 중에 또, “여보. 당신 기도순서에요?” 하면 제 아내가 기도해요. 기도하면 우리 애가 독일에서 생중계로 듣습니다. “엄마, 말하는데 와 벌벌 떠노?” 벌벌 떠는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를 주시해야 될 것을, 지금 자기를 주시하는 시선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목사 부인이니까 그동안 복음을 수 십 년 들었으니까 얼마나 잘 알겠느냐? 알기 개코나 알아?
정말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해야 해요. 예수를 알고, 십자가에 죽었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나는 무조건 죄인이고 소경입니다. 그런 고백 자체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오고, 9장에 나온다는 것은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내 안에 들어있는, 내가 발산해야 할, 내가 바리새인이며, 내가 사두개인이라고, 고백하라고 주께서 킹크랩 속에 만들어놓고, 그 킹크램은 천국 가고. “내가 바리새인입니다. 내가 소경입니다.” 이야기하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소경이라고 하는 자는 보는 자요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자는 소경이니라. 그 말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럼 이제부터 내가 연구해서 소경이 안 되어야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소경인거예요. 그 말씀은 그 말씀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지, 이게 내가 요리도 못하면서, 어설프면서, 셰프도 아니면서, 손대면 안 돼요. 주여, 이걸 그대로, 소경이라는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현실화되게 하옵소서. 표현형이 되게 하옵소서. 제가 발음이 안 좋아서. 표현형. 여러분들 각자가 알아서 하세요.
표현하는 형태가 바로 나의 하루하루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 이것이 말씀이고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가로채서, 주님 홀로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서, 거기서 생긴 하나님의 그 의를, 낚싯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낚싯줄,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빨대 꽂듯이 꽂아서, 우리의 죄를 쏙쏙 뽑아내면서, 그 죄를 하나님의 십자가의 피에 섞어서 의로 만드는 생산 공장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칠 것이 죄밖에 없어요. 재료가 많으면 의도 많아지잖아요. 쓰레기 많으면 재활용도 많아지듯이. 날마다 내놓는데, 내놓는데 그냥 못 내놓아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놓습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전에는 실제로 간통해야 간통인줄 알았는데,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야호! 죄가 또 생겼네! 남을 비판하는 것도 죄고. 성령 이 외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적용시켰던 그 모든 사례가 죄가 되는 겁니다.
“성령 주시옵소서.” 그 외에. 왜? 하나님은 구하는 것은 성령만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밤새 금요철야기도하면서 성령 달라고 했던 그것이, 성령 외에 것을 달라고 한, 죄가 되는 겁니다. 복음 듣지도 않은 사람에게 외쳐가지고 기어이 목사 값을 한다고 하는 그것도 죄가 됩니다. 왜? 산상설교에 보니까 개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저 인간 내가 반드시 꼬셔서 내 교회 만든다고 설쳐댔으니까. 꼴을 보면 참 가관이에요. 가관. 나와요.
선택 받은 사람은 누가 정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누가 정합니까? 그건 하나님의 몫이지, 목사가 관여할 몫이 아니에요. 왜 지가 그렇게 애가 타서 난리입니까? 이미 정해졌는데. 우리는 복음만 전하면 되지. 어떻게? 말로? 아니요. 내가 죄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증거 하면 되지. 왜? 자기가 한 명 더 꼬신다고 하늘나라에서 더 좋아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노아방주에 몇 명 들어갔습니까? 8명 들어갔죠? 맞죠? 근데 노아방주의 크기가 어떻습니까? 8명만 들어갈 크기에요? 수십 명이 들어갈 크기에요? 더 많이 들어갈 크기죠? 그러니까 노아가 방주 지어놓고 8명만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미안함 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온 노아를 가지고 벌서고 손들게 했습니까? 이게 교회는 크게 지어놨는데 달랑 8명? 그것도 말이 좋아서 8명이지, 자기 집 식구밖에 없었어요. 하나님은 걱정했습니다. 혹시 9명 데리고 올까봐.
8명이 구원됐으면 8명만 구원받아야지, 9명을 데리고 오면 안 됩니다. 그걸 정하는 방법은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진상도 모르고 물만 흠뻑 적시다가, 사진 찍은 거 보니까 물보라면 허옇게 있어요. 나는 아는 것은 전혀, 그 순간 내가 나를 잊었어요. 물보라 속에서. 그 물보라는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그 물보라 앞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 순간 잊어버렸어요. 내가 없어졌어요. 내가 없어지면 스트레스도 없고, 내가 없으면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과 그리고 수치도 없어요. 그게 바로 스데반이 받았던 성령 충만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비들아, 그리고 청년들아, 하는 것은 특정인물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육신에 확정된, 아무리 해도 변경되지 않는, 확정된 육신의 관계를 통해서 조건을 제시합니다. 어떤 조건? 니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는 이 내용은, 니가 행한 것이 아니요, 확정적으로 니한테, 킹크랩 속에 집어넣어주고, 그 집어넣은 것을 주님이 손으로 그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봐라! 니 같이 더러운, 니 속에 이게 들어있었다. 이게. 이게 고름처럼 들어있었잖아. 이런 게 들어있었잖아. 이런 게.” 수술해서, “봐라 너 같은 못난 자도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했잖아.” 이걸 끄집어낼 때, ‘저런 은혜가 나한테 있었나?’ 이래 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는 판사, 의사, 그런 것 묻지도 않습니다. 교사나 농부나 묻지 않습니다. 내과의사가 해부할 때, 어떻게 합니까? 뭐 고관직위 보지 않고 뭐하는지 보지 않고, 그냥 완전히 살점덩어리. ‘암세포가 어디 있을까?’ 하고 찾잖아요. ‘여기 있네.’ 족집게 꽉 집어서, “자, 보호자 보세요. 이 부인에게 암세포가 있었습니다.” “아이구, 그게?” 그러면 거기에서 “나 국회의원 부인이야!” 국회 의원부인이 왜? “나 목사 사모야!” 이게 왜 있습니까? 보이는 것은 암세포만 보듯이.
주님께서 ‘보자, 보자 쪼개보자. 어이구, 창세전부터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이 여기 있었네.’ 핀셋으로 집어가지고 “니 안에 이게 들어있었다.” 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와 속죄함을 끄집어낼 때, 그게 말씀의 완성입니다. 말씀의 완성된 형태를, 태초에 약속이 죄인 된 몸을 가지고 재료로 삼아서, 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피어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성령을 집어넣어서, “거봐! 내가 성공했잖아. 예수님이 성공했잖아.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낸 것을 성공했잖아.” 핀셋으로 집어내서, “주님. 여기 한 명 구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도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구원받는데 그 직업이 지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장 없죠. 주여 저를 생각해주옵소서. 저 암세포자입니다. 알았어!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 앞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저 죄인입니다. 알았어! 저 소경입니다. 알았어!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처음부터, 애초부터, 행함도 없이, 죄인이라고 알 사람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왜 인간은 자기를 죄인으로 안 보느냐 하면, 행하기만 잘하면, 몇 달 후에, 몇 년 후에 내가 행한 결과가 나오는데, 그걸 왜 놓쳐요. 그걸 왜 놓칩니까? 희망이 있는데, 그걸 왜 놓쳐요? 희망이 없으면 자살한다 이 말이죠. 그럼 희망이 있는데, 악바리하면서 뭔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나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죄인은 죄인이지만, 전적인, 뭘 해도 죄인이 되는 그것은 나는 인정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버티기 마련이에요. 근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가 그 안에 오거든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요. 우리가 미래를 안 가 봐도, 우리가 백년, 천년을 안 살아봐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아담의 죄, 우리의 죄가 아니에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어야 될 죄인이라는 것을 미리 땡겨서 아신다면, 우리는 주님의 핀셋이 마음껏 다 헤집고 다니도록 그냥 공개하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있던 모든 것을, 제발 남한테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남한테 이야기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남한테 이야기하지 마시고. 그럼 남한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잘 하는 것이 있잖아요? 우리 애가 일등 했어요. 일등 하라고 안 했는데. 이번에 땅을 하나 샀는데, 기도 별로 안 했는데, 땅을 사게 되었네. 그런 이야기만 하세요. 그건 잘하는 거거든요.
하지만 주님 앞에서, 주여! 이것도 죄인 것을 제가 압니다. 그렇게 고백하세요. 제발 남 앞에서 자기 간증 좀 하지 마시고,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그런 것 해봐야 그 사람들한테 스캔들거리밖에 안 돼요. 그거 믿을 것 못 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누구 집사 하지 말고, 아이구, 이 죄인! 김 죄인! 우리 알지? 십자가 앞에서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냥 교회로 모일 때, 자기 죄만 자랑하면서 모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