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0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요한1서 2장 15에서 1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389페이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라”
오늘 설교 제목은 ‘조건’입니다. 조건이라는 제목은 육신에다가 조건을 붙여서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육신에 붙은 조건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에서 붙이는 조건이 있고 또 하나는 육신 자체에서 나온, 붙여지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육신에다가 영적세계의 조건을 언급한다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는데, 다시 보게 되면,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게 되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자녀들아” 육신입니다. 육신의 자녀들아, 무슨 조건이 붙느냐 하면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인데, 너희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는 조건이 붙을 때, 그 사람은 영적사람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 사람을 해부하고 집어내는 거예요. 직업과 관계없습니다. 백수라도 괜찮아요. “요게 있잖아. 내가 이걸 집어넣었는데 이게 아직도 유효하게 살아있네. 희한하게.” 그러니까 어항에다 금붕어 집어넣고, “아이구, 이게 아직도 살아있네.” 하고 집어내는 것처럼. “니 죄가 내 이름으로 사함을 얻는다는 이 사실이 아직도 여기서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네.” 그것을 주께서는 끄집어내는데, 그게 영적조건입니다.
또 있습니다.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알았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러한 내용이 꿈틀거리고 있네. 하나님이 알고, 너희들이 태초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이 사실이 아직도 너끈하게 살아있으니까, 이 육신이 보통 육신이 아니네. 어떻게 영적조건이 합치되는 이런 육신이 있느냐? 아비들아! 연세 많은 자들아! 라는 뜻이죠.
또 있어요. 13절,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악한 자, 이건 사람이 생각하는 악한 자가 아닙니다. 자기 돈 떼먹고 도망간 자가 악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를 이겼다는 그러한 조건들, 요소가 아직도 너희 속에 이렇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나의 자녀들이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만 그냥 데려가면 되지, 뭐, 그 뒤에는 쉿! 하고 입 다물고 하지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조건을 주셔가지고, 고맙게도 황공스럽게도 조건 주셔서, 나는 육신뿐이었는데, 난데없이 영적조건이 내려와서 백성이 되었으니까, 그걸로 우리하고 계산 끝났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러면 그 뒤에 또 다른 것이 붙어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영적조건은 개인구원을 하지 않습니다. 나 구원받았다, 손 털자, 이제는 성경 덮자, 이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제가 시카고 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는데, 성경 왜 보십니까? 구원받았는데, 성경 왜 보십니까? 제가 질문을 했더니만, 알고 있지만 겸손들 하셔서 답변을 안 했습니다. 알고 있지만. 구원받았는데 성경 왜 보십니까? 여러분, 구원받으려고 왔잖아요? 구원받았잖아요? 성경을 참고서로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 예를 들었죠. 고3때 수학정석 공부했는데, 대학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대학 들어가 놓고 고3수학정석을 보는 사람 있습니까? 합격했는데 왜 보죠? 정철종합영어, 합격했는데 볼 필요 없잖아요? 근데 이렇게 또 성경을 보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바로 영적조건이 우리의 개인구원의 용도가 아니라는 것이 뒷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뒷부분에 뭐가 나와 있습니까?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인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나 이 유명한 구절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솔직하게 느끼는 느낌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주시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주께서 아시잖아요? 아시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게다가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니?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오늘 아침에 제가 산책을 했습니다. 여기 삼성이라는 글자가 있는 건물부터 해서 쭉 운동 삼아 이렇게 가봤는데, 근데 강이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강이 있었는데, 강가로 도는 파크park,공원이 있고.
저는 생각했어요. 이 강가에 있는 갈대,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 주님이여, 이것도 세상 사랑하는 요소에 포함이 되는 겁니까? 저는 물었어요. 이것도, 강가에 흘러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강에 흘러가는 물을 쳐다보고 있는 이 한적한 시간마저도,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그 항목 속에 포함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 이게 세상 사랑이 그냥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이런 짓은 하지 말라. 이런 것은 세상에서 왔다고 할 때에, 우리가 놓친 것이 있어요. 세상과 나를 따로 분리시켜서 세상은 더럽다고 한 적이 많았지만, 나를 포함해서 나를 세상에 집어넣는 사고방식을 평소에 하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나를 주관으로 간주하고 세상 밖을 객관으로 간주했을 때, ‘참 세상은 지옥이야. 더러워.’ 라고 평가하는 내가 이 세상에 더러운 것에 한 몫 했다는 것.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이 세상을 더욱더 지옥 되게 하는데 한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을 빼먹고 세상은 더럽다고, 내가 그렇게 지칭한 겁니다.
그렇다면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 없고 주님께서 세상자체와 전쟁하는 가운데서 전리품으로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쉽게 하겠습니다. 아까 우리 육신에다가 뭐가 붙느냐, 영적조건이 붙는다고 했죠. 그렇다면 우리 육신자체에서 붙는 조건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자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16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정욕이 유발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내 육신이 있는데, 육신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정욕이 작용을 하는데, 그 정욕의 마지막 목표점과 노림수는 뭐냐 하면, 자랑질을 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육신이, 육신 자체가 영원을 기대하면서 육신 자체에서 나온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두 글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격이라고 합니다. 근데 성격은, 어제 습성이라고 너무 어려운 말을 했는데, 성격을 자체적으로 고칠 수가 없어요. 성격 안에는 정욕이 들어있고, 성격이 노리는 바는 이 육신을 자랑하는 쪽으로, 그런 조건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 세상은 뭐냐, 성격과 성격의 만남. 흔히 말해서 주님한테 죄졌다, 죄인이라고 하는데, 이게 주님 앞에 죄인이 아니고 성격 드러난 거예요. 대개 성질 드러난 겁니다. 이 성질이라고 제가 표현하는 이유는 이게 고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격을 어떻게 고칩니까? 베드로의 성격이 평생 가는 거죠. 고칠 수가 없어요. 안 고쳐집니다. 그럼 남아있는 문제는 뭐냐, 성격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걸 분해해서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성격은 육신 더하기 자랑을 목표로 하는 욕망이 나온다.
그렇다면 주의 일 때문에 티격태격 거렸다. 주의 일 때문에 뭐 이렇게 세상 것 이긴다고 그들에게 전도를 했다 하지만, 사실은 톡 까놓고 말해서 그냥 성질부린 거예요. 성질부린 것. 무슨 거기다가 주의 일을 갖다 붙입니까? 성격과 성격의 부딪힘이죠. 우리는 육신이라고 하니까 조건 없는 육신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육신만 달랑 있고 이제부터 육신에서 내뿜는 모든 것은 성격은 성경 말씀에 의해서 경건성이 더덕더덕, 덕지덕지 갖다 붙여서 그렇게 추가 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영적조건은 우리가, 육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영적조건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갖다 붙이는데, 그 조건이 뭐냐, 여러 번 했습니다마는, 다시 한 번 보면,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이게 대표적이죠. 우리는 우리 성격이 죄라고 하는데, 우리 성격은 죄가 아닙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우리 육신은 반드시 어떤 이유 때문에 조건이 붙는데, 육신은 조건이 붙게 되어 있는데, 육신으로 있지 왜 조건이 붙느냐? 이 말도 어려운데 더 쉽게 합시다.
아이큐가 한 30된다고 봅시다. 아이큐가 한 30되는 사람이 성질 있습니까? 성격 있겠어요? 별로 없습니다. 굉장히 순박해요. 쌈 싸먹을 때, 고기 하나 얹이고, 또 고기 하나 얹이고, 기봉이처럼. 굉장히 순수하게 이렇게 나올 때, 얼마나 순박합니까? 별로 성질, 성격 부릴 것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아이큐가 높고 이렇게 배우게 되면 그때부터 욕망이 등장하고 욕망은 그냥 멈출 수가 없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그냥 미끄러져가요. 이걸 자랑질을 해야 돼요.
이게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영적조건에 대적하는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바로 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왔느니라. 세상은 너가 세상을 이길 수 없느니라. 오히려 니가 세상으로부터 놀림을 받고 다루어진다. 육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영적조건이 붙을 육신에 뭐가 붙는다? 정욕이 붙고, 정욕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어이 자랑질을 해서, 한번 자랑한 자랑질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성격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럼 우리 만남은 성격과 성격의 만남이죠. 다른 말로 하면 세상으로 온 것과 세상으로 온 것과의 챙챙 거리며 싸우는 날카로운 칼싸움입니다. “어이구, 한 성질하네?” “당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의 일은 핑계에요.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주의 일은 딱 한가지에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죄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그게 주의 영적조건이지, 그 영적조건을 부여한다고 해서 우리 육의 성격이나 육의 조건이 그게 달라지고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목사님. 교체 안 되면 이 성질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 있는 한 그것을 우리 손으로 개선하거나 조작할 그러한 입장이 못 됩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악했을 때에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세상에 보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여기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이 세상에 부림을 당하고, 그들에 의해서 조정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세상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써 우리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포함되어있는데, 나는 따로 나는 따로, 따로가 되지를 않아요.
내가 어떻게 따로 됩니까? 내가 만약에 따로 된다면 내 성격한테, 저리가! 저리가! 말 한마디 하면 성격이 뚝 떨어져야 할 텐데. 우리가 어디를 가도, 우리가 주의 일을 해도 우리의 성격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 달라져서 목회한다고요. 우리는 목회 그만둬야 해요. 어느 세월에 성격이 달라져서 목회합니까? 성격대로 목회해야죠. 장사하는데 성질 나빠서 장사가 안 된다, 성격 고치고 장사하겠습니다. 어느 세월에 성격고치고 장사합니까? 성질대로 장사해야죠. 성격대로 장사해야 해요.
미용사가 여자분들 머리할 때, 유행에 맞춰서 머리를 손질해주지, 그것도 모르고 본인은 마릴린 먼로처럼 해주세요. 머리가 다른데, 무슨 마릴린 먼로에요. 육신의 조건은 이미 따로 있는데, 뭐 거기다가 배두나처럼 해달라고 하면, 그거 안 돼요. 본인의 성격은 세상으로부터 덧붙여진 조건을 육신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어떻게 내가 내 마음먹은 대로 달라집니까? 안 달라져요. 달라질 수가 없어요.
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영적조건을 주셨다. 그러나 제가 한 말이, 개인구원은 아닙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영적조건 주었으면, 구원받았으면 성경 덮어도 괜찮아요. 구원받았는데, 대학 들어갔는데, 옛날 고3참고서 왜 봅니까? 볼 필요 없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조건을 준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적, 세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를 충분히 활용한 것입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성격을, 우리의 깨질 수 없는 이 더러운 성격을, 더러운이 아니고, 더러븐 성격을 주께서 세상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충분히 활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니 성격 니가 고치지 마!” 사람이 성격고치면, 또 다른 면의 자랑질이 또 나옵니다. 나 예수 믿고 성격 고쳤다. 그거는 육신의 자랑이 아니고 뭡니까? 그것도 육신이 자랑이에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까, 새사람 되기에 합당한, 흔히 말하는 합당한 주의 형상을 본받아서 이제는 예수 본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한테 묻고 싶어요. 그러면 서울대 합격했으니까 고3 참고서 보지 마세요. 그거 왜 봅니까? 성경 왜 봅니까? 구원받았는데.
우리가 자꾸 내가 내 성격을 고치려고 하는 버릇을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니가 적이 아니야. 니가. 니가 적이 아니고 주님의 적은 따로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세상이 적이라는 겁니다. 세상이. 그러면 세상이 왜 우리에게 성격과 육의 조건을 주었는가? 그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자기가 점점 더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신은 뭐 까지 자랑질 하려고 하는가 하면, 영적세계까지 포함해서 자랑질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육신 더하기 자기가 육신에 맞는 영적세계를 갖다 붙여서, 나중에 죽을 때는 이것이, 우주선에서 캡슐은 떨어지고 우주 궤도에 올려놓고 우주선은 그동안 자기에게 봉사했던 캡슐과 해체되고, 자기를 위에 올려놓게 했던 캡슐은 불에 타고 헤어지듯이, 육신으로, 육신을 가지고 영적조건을 붙여서 쭉 가다가 육신은 떨어지고 내가 기대했던 영적조건을 만족시켜서 천국에 합류하겠다는 이 사실. 이것이 누가 보기에는 굉장히 경건해보이고 어쩌면 세계기독교 이천년 역사가 그걸 믿었던 거예요.
세계 모든 기독교 역사, 교회의 모든 설교는 육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신을 가지고 영적조건을 구비하셔서, 육신 가지고 하다가, 나중에 육신 죽고 떨어질 때는, 여러분이 그동안 몰래 가꾸어놓은 보험 들고 공들이고 저축한 아름다운, 변변한 고상한 것들을 모아서 그걸 하나님께 쑥 들어가시면 여러분의 구원에 성공하십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합치되는 이야기에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십니까? 라고 한다면 요한일서 뒷부분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의 주장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의 영적분위기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 생겼으니, 그들은 결국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떠나게 되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와 뭉쳐져서 적그리스도처럼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언급한 것이 상당히 이상스럽게 들릴 거예요. 그러나 요한일서 1장 10절을 보시는 분들은, 8절과 10절을 보시는 분들은, 제가 이상할 것이 없이 여러분들 스스로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8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아, 이게 성경에 나올 말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죄 있다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혹시 이 강이 무슨 강인지 아십니까? 오버팩 강. 자, 아침에 오버팩 강을 보면서, 그냥 갈대를 보는 것도 이게 죄입니까? 아무리 살펴도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코 보는 것이 이게 무슨 죄에요? 자기가 더불어 유유자적한 것이 이게 무슨 죄입니까? 그래서 설마 이것까지 죄가 안 되겠지, 하고 요한일서 1장 8절을 보니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제가 그 오버팩 강을 볼 때에 눈으로 봤습니다. 왜 보느냐? 왜 봐요? 보고 싶어 봤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네요. 그게 안목의 정욕이에요. 내 육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꾸 뭔가 고상함을 띠는, 고상함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 이 육신에서 나오는 거예요. 육신에 부합되는, 육신에 안 맞는 것이 아니고 딱 적합한, 나의 성격에 부합된, 합당한 영적조건은, 내가 불편함이 없이, 원활하게, 잘 맞아 떨어졌다는 그 소급을 스스로 만끽하면서, 이 정도하면 나는 죽고 떠나도 영적조건은 나를, 우주선이 캡슐과 떨어지듯이, 그때는 내가 고이 했던 성과급들이 하늘로 올라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끝까지 우리는 죄 있는 존재로 되어야 한다. 왜? 그 세상의 유혹을 니 맘대로 벗어난다든지, 니 맘대로 싫어! 싫어! 한다고 세상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육신은 바로 세상의 악한 조건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거기에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죽이시는 것에 대해서 동감합시다. 그리고 살리십니다. 죽이시는 것에 동감하신다면, 제발 부탁합니다만, 여러분들에게 영생을 줄 때, 그거 순순히 따라주세요.
죽어가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늙어가는 이 청춘을, 누구는 뭐 맨날 바닥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달라고 하는데, 이 청춘을 돌려줄 수가 있습니까? 나훈아 이야기입니다. 청춘을 돌려달라고 해도 결국은 늙어가거든요. 늙어가는 것에 이거는 동의여부가 아닙니다. 늙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로 영생 얻는 조건은 육의 조건과 유사해요. 육의 조건을 우리가 거부할 수 없듯이, 영의 조건도 거부할 필요가 없는데, 다만 영의 조건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왠지 찝찝하게 찾아와요.
“너는 평생에 죄인이다.” 자, 이런 조건을 제시하고, “그 죄는 예수 이름으로 씻어진다.” 이런 조건을 갖다 들이미니까. 에이, 차라리 내가 고상하게 살아서, 내가 경건하게 살아서, 이걸 내 육신에다 갖다 붙여가지고 나중에 육신이 죽을 때, 괜찮은 조건만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죠. 그러나 성경은 그럴 줄 알고, 너는 뭘 해도, 무심히 오버팩 강을 보더라도 그게 죄 아닌 게 아닌 겁니다.
1장 10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제가 무슨 나쁜 짓 했습니까? 라고 하지 마세요. 니 소속이 어디냐? 니가 세상에 속했으면, 세상이 이렇게 악한 세상이 되는데, 나는 세상의 악함에 보태지 안했다고 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우리가 존재하는 자체,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세상의 악함에 많이 기여들을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영적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제발 자책하지 마세요.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실수해서, 내가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을까? 하지 마세요. 그거 후회한다고 그 다음에 그런 짓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를 너무 몰라요. 후회한다고 해서 그 짓, 안한다고 하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자기 자신을 자꾸 고상하게 만들어내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게 되면 뭘 자꾸 잊어버리게 되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마치 없는 것처럼, 없는 척을 하게 되고, 마치 자랑을 안 하는 것처럼 위선 떠는 꼬라지가 정말 보기 싫어요. 모든 움직임이 자랑이고요, 그 자랑 배후에는 대가와 보상을 기대하는, 그 기대감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적조건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몸부림치고 어떻게 스스로 이 죄 많은 것으로부터 탈피하려고 하는지 다 아셔요. 아시기 때문에 그것마저 능가하는 조건으로 오신 것입니다. 니 모든 죄는 예수의 이름으로 사했느니라. 그 한 마디 속에 우리가 어떤 몸부림을 해도 안 되는 것을. 이미 영적조건을 붙인 겁니다. 그리고 붙인 것은 우리의 개인구원이 아니라, 니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그 세상에서 이미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것이 요한일서 2장 14절에 나오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우리는 흉악한 자를 구경도 못했습니다. 얼굴에 칼자국 난 조폭은 구경했지만, 진짜 흉악한 자는 구경도 못했어요. 구경 안 해도 됩니다. 이미 우리는 흉악한 자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요한일서 보면서 사도요한이 계속 추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근데 놀라운 사실은 적그리스도가 신앙이 좋다는 사실이에요. 보기에, 사람들 보기에. 자기 학대까지 할 정도로. 이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육신은 나쁜 거야. 그러니까 그것이 적그리스도에요.
미리 말씀드릴까요? 예수님께서 적그리스도냐, 아니냐 하는 조건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적그리스도들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더러운 육신을 가질 수 없다고 그들은 그렇게 주장했던 겁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이야기하죠.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분리되고 난 뒤에, 그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기위해서 요한일서를 이렇게 썼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거 맞는 이야기 아니에요. 뭐 영지주의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지주의는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 아닙니까?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가 얼마든지 영지주의 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일수도 있어요. 어쨌든 영지주의 사상이라는 것은 뭐냐, 이미 기독교교리에 정통했고, 교사 있고, 교회 부흥되었고, 그들 식으로 이미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더 도를 닦고, 도를 닦고 할 때마다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영적세계를 추구해야 된다. 왜? 그래야 구원받는다. 이런 논리를 했고, 그 논리에 미혹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온 거예요. “나도 구원받고 싶어요.” “나도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어요.” 하면서 온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개인구원이라고. 그게 바로 개인구원입니다. 구원파가 개인구원입니다. 구원파만 일까요? 모든 교리가 개인구원을 노리고 접근하는 거예요. “여러분, 나 따라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상대 안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여러분 육으로 이렇게 해놓고, 혼으로 이렇게 해야 되고, 영으로 이렇게 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이 구원받아 놓고 또 그렇게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중도에 탈락하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육으로 해서 구원받았으면 혼으로 약간 기여를 해서, 말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이 이제는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혼적인 차원에서 열심히 노력하세요. 그러면 영적인 구원이 보장됩니다.”
여러분 결국 이것은 무슨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구원하려고 환장했습니다.” 그 이야기밖에 더 돼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는 거예요. 에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느냐? 우리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해 있는 우리 우두머리하고 싸워요. 세상의 대적하고 싸우기 때문에, 졸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주여. 제가 또 죄지었습니다. 원래, 니 성격이 그래. 죄 졌다고 하지 마. 성격이 그렇다고 이야기해. 그 성격이 어디서 왔습니까? 세상으로부터 왔죠. 이 성격 못 고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격 고쳐서 목회하려고 하지 마세요. 왜? 우리 목회 안 해도 예수님이 자기백성 구하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목회 하는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한다니까요. 목회하는 내가 방해해요. “주여, 오늘도 목회 그만두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목회자가 해야 해요. 주님이 목회자인데 무슨 목회자가 또 필요합니까? 그래, 목회자가 없어가지고 주님이 방방 뛰고 그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목회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한테 목회당하는 자입니다. 목회하면서 지 성질 다 드러내면서, 주여 이거는 고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 세상의 악함에 일임했군요. 내가 이 세상을, 이 나쁜 세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세상에 나도 포함시켜서 나쁜 세상이라는 것을, 왜 그걸 몰랐는지,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니까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모독하는 자로다. 그럴 때, 아, 내가 나를 빼놓고 했던 이런 잘못을 저질렀구나. 주께서 아시는구나. 내가 주관이 얼마나 강하기에, 나 빼놓고 객관으로 상대해서, 그걸 내 맘대로 판단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 그럼 그 다음 문제입니다. 뭐,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뭐 안 된다, 고치지 말고 그냥 막살아라, 뭐 이렇게 성격이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 이렇다면 도대체 그런 우리를 구원하는 영적조건 속에, 개인구원이 아니고, 정말 세상을 이긴 주님의 영적조건 속에 뭐가 들어 있기에, 뭐가 들어있기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이미 천국을 확정 시켜 놨으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왜 저한테 영적조건이 와가지고, 우리 죄를 주님의 이름으로 사했다는 것을 왜 이렇게 믿어지게 만드셨습니까? 왜?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한 번 톡 깨고 싶어요.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한 번 쪼개보고 싶어요.
나는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것을, 왜 주님의 조건은, 안 되는 것을 이렇게 너끈하게 만드는 솜씨와 재주가,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가능 하느냐, 이 말입니다. 레위기 3장에 나옵니다. 레위기 3장 2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주의 방법은 희생제물을 뿌리는 거예요. “에잇! 귀신아 물러가라!” 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제단에 피를 뿌리는 겁니다.
자, 이 하나님의 피 뿌림과 우리의 개인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비교해봅시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려면, 구원해야 될 구제책은 내 육신이어야 하고, 따라서 육신을 학대할 수 있더라도 육신 그것마저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겠죠. 건진다는 것은, 만약 mp3를 건진다면, mp3가 유지되어 있어야 건짐이 성사되잖아요. 이걸 건진다면. 그래서 내가 육신을 육신으로 건진다면 아무리 육신을 학대해도 마지막 남은 이 육신마저는 내가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결코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저 귀한 것. 구원시키려고 애썼던 이 귀한 것을 어떤 식으로든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걸 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어떤 사물과 개체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을 붙이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 몸은 내 이름이고, 나는 주의 이름 백날 해봐야 내 이름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일서 2장 11절에 보니까, 너의 죄는 너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름으로 구원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결국 뭐냐 하면, 이 육신의 건짐에 대해서 다른 육신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내 육신은 내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아까워서, 물론 자학을 하죠. 금식은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니 지옥 가.’ 이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마지막 나에게 나를 유일하게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끝까지. 만약에 우리가 지옥가도 끝까지 힘내라고 하고, 너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하고, 마지막 격려는 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부인 안 하면 되지? 그럼 부인 안 하면 돼요. 뭐 되지도 않는 것을 힘들게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제가 하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갈고 닦아도, 그것이 점점 더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이 반대로 자기의 가치는 증강하고 증가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애썼습니까? 나를 구원하려고.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아낌없이 죽음에까지 내놨어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죽음 내놨는데 우리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못 내놓는 거예요. 심지어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머리가 좋아서 베드로처럼, 내 몸을 죽일 테니까, 죽은 내 몸을 너무 버리지 마세요. 자꾸 꼼수를 써요. 죽은 내 몸을 다시 건져내는 그런 몸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죽은 몸 말고, 새로운,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구원받아야지, 내 몸 가지고 구원받으려고 하면 흙에 속한 몸이 천국 가는 셈이 되어서 그런 것은 없어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려면 아담에 속한 형상을 포기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포기를 못합니다. 이게 어딘데? 그동안 얼마나 아까웠습니까? 아침마다 운동하면서 뱃살 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 70키로 밑에 내려갔거든요. 근데 만약 목표가 70키로 아래 65키로 라면, 65키로가 되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해버리면 그럼 내 목표는 언제 이루어져요? 사랑하는 딸이 9월20일에 결혼한다는데, 예수님의 재림이 9월 19일에 와버리면, 사랑하는 딸 결혼식도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은 나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탓하고 나무래도 결국은 포기를 못해요. 부모가 자기 자식 아무리 나무래도 끝까지 포기는 못하잖아요. 호적 뺀다고 하면서 나가 죽으라고 거친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돌아와! 응? 적금 하나 넣어줄게. n분의 1로 나누어서 유산 장롱에 넣어놨어.’ 이렇게 하듯이 내가 그짝이에요. 내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나무래도, 이 못된 놈! 마약을 또 못 끊다니? 그렇게 하지만, 결국은 누구 편이냐 하면, 나는 내 편입니다. 끝까지 내 편이에요. 끝까지 주님이 잘못했지, 나는 내 편이에요. 우리는 끝까지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에잇,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면서 피를 뿌려요. 어? 이게 뭐야? 무슨 액체가 날아오나 보니까, 무슨 피가 날아온다 말이죠. 이 피가 뭡니까? 니가 안 되는 걸, 니가 안 되는 것을, 니 대신 내가 아버지 앞에서, 쟤 대신 내가 죽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제는 걔의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끝난 육신과 더불어서 삑(☓)날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내 육신으로, 하늘에 속한 육신으로 나의 하나의 사지가 되는, 지체가 되는 새로운 하늘의 형상의 육신이 되어서, 나에게 부활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부활을 해주옵소서.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에 속한, 아담의 육이 아닙니다. 아담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담의 흙덩어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그들을 친히 예수님이 만들어내십니다. 마지막 때 그렇게 하기 전에 미리 와서 작업을 하신 분이 계시는데, 누구냐 하면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의 겉 사람은 뱀이 허물을 벗듯이 탈피해야 하지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새롭다는 말은, 날로 말씀이 점점 더 누적되어 내 안에 차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말씀이 점점 더 차고 들어와서 완벽에 완벽을 기합니다. 조금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그것도 개인구원이잖아요? 아니죠. 왜냐하면 나의 이 새로운 피조물의 이 몸은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어있기 때문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 되느냐 하면, 사나죽으나 주의 몸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고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제가 그냥 툭 던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왜? 내 것이 아니니까. 니가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니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짧은 순간에 기쁨이 오죠. 내 것 아니구나. 내 것 아니라는 말은, 내 것 아니구나. 그런데 왜 내 것이 아니지? 아! 나를 죽이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시켜주는 그런 작업장이구나. 우리 몸이.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이 말씀이 내 안에서 계속 반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필요한 겁니다. 이야기가, 논리가 이상히 흘러가죠. 사실 이상히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잘 하잖아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백화점 그냥 못 지나갑니다. 저 옷 참 좋다. 아니야.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렇지. 거룩해야 돼. 나 안 살 거야. 안사겠습니까? 또 곗돈 하나 탔는데. 사람은요, 봤으면 잊지를 못해요. 봤으면.
왜냐하면 이 육신의 정욕은 기다리고 있어요. 안목의 정욕,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들만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다고 드디어 여기서 발동을 일으킵니다. 오늘 오후 2시에 니 백화점 지나가다가 쇼윈도에 있는 것 봤지? 봤지?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나는 참을 거야. 나는 먹음직도, 보암직도 나는 그런 끝났어. 며칠 가는지 한 번 보자. 절대로 우리는 이기지 못합니다. 제 논리가 좀 이상하더라도 참아야 될 문제인데, 주께서 피를 뿌렸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제발 죽을 때까지 해주시라 이 말입니다.
이건 뭐, 해주시지요? 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어요. 하던 대로 사시면 돼요. 성격 안 변합니다. 똑같습니다. 기어이 우리는 뭔가 하나, 몇 명 전도하고 이렇게 설교 잘하면 우리는 자랑질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요. 육신이 그래요. 이거는 원래 그거 하라고 있는 육신입니다. 그런데 이 적그리스도들은 그것을 감춥니다. 위장합니다. 뭐라고? 내가 나쁜 것을 알고, 나쁜 나를 주의 말씀으로 한 번 고쳐보겠다고 실시합니다.
주께서 일단 피 흘린 것은 감사하고, 감사해서 소유하고, 자, 예수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설설 이제는 육신의 정욕은 끊고, 안목의 정욕도 끊고, 내 자랑도 안 할 참이야. 내가 보기에는 그게 자랑질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자랑이야. 지가 도 닦은 거. 지가 순수한 거. 여러분 육신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습니다. 목표는 뭐냐 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을 보는 순간, 그게 하나의 욕심이 되어 버려요. 나도 사도바울처럼! 나도 예수님처럼! 나도 요한처럼! 이게 하나의 내 육신이 어느 정도 재주가 넘치고,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과시하고 싶어서. 과시라는 말은 바로 자랑이죠.
근데 그 자랑은 창피스러움을 계속 감추면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이 뭐냐 하면 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흔히 말하는 사자성어, 신앙생활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부탁합니다. 신앙생활 하지마세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믿는 게 무슨 생활입니까? 믿는 것은 생활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생활이라는 것은 수동적이지, 주께서 알아서 성경대로 유발시키는 주님의 생활이지, 내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질 부리고, 주님께서는 그 성질부린 것을 바꾸어주시고. 그렇게 맨날 티격태격 싸우다가 볼 일 다 보는 거예요. 맨날 싸워요.
자,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오늘 은혜 받았다. 이제부터 나쁜 생각 안 가질 거야. 3초도 안 지납니다. 나쁜 생각 안 한 나는, 괜찮은 육신이 되고 말았다는 착각. 이제부터 어떤 능력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내가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만들 때, 그걸 제가 육신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내 육신으로 만든 영적인 것이 붙어있는 것. 그러나 주님의 영적조건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이리와! 부릅니다. 왜요? 착한 놈 이리 와! 이게 뭐야? 예. 십자가입니다. 이 액체가 뭐지? 피 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 “아들의 피로 우리 모든 죄를 씻었느니라” 다시 한 번 봐! 아들의 피로. 아들의 피로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육신에 이름이 붙어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바로 우리 죄와 같은, 죄 있는 육체, 죄 지은 적 없지만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 왔습니다. 똑같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의 피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영적조건을 계속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피 만이어야 하느냐, 왜, 행함이 아니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대로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 믿는 사람들과 우리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틀립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뭐 같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뭐 백화점 세일하면 서로 사려고 싸우고, 이런 점이 똑같은데, 고 3이라고 애 교회 안 보내고 애 공부시켜가지고 뭐 SKY대인지 뭐 좋은 대학 시험 치게 하려고 하는 이것은 똑같은데, 뭐가 차이 납니까? 성도는 영적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아! 바로 요한일서 2장 16절을 증명하고,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충분히 주님께서 나를 활용하시는구나.’ 라는 것은 성도고요. ‘내가 이제 개인구원 받았으니까 이제는 막살자.’ 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아니고요.
활용한다는 말은, 전에는 세상에 일부인 것처럼, 지금은 하늘나라의 일부로서, 충분하게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는 일원이 되는 겁니다. 주여, 이 부족한 몸을 가지고 충분히 활용하셔서, 제 성질, 못 고치는 성질을 충분히 활용하셔서, 제발 예수님의 피만이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이 거짓말 할 수 없는 진리를 증거케 하옵소서. 그것이 더러운 육신에 붙어있는 주님의 피, 다시 말해서 영적조건입니다.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레위기는 피를 뿌립니다. 제사장이 피 뿌리죠. 어린양의 피죠. 온통 피에요. 피. 피 입니다. 죽음이죠.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이게 적그리스도, 나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예수의 피는, 성령과 물과 피가, 진짜 예수님은 피로써만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 온 것을 자랑질을 했죠? 자랑질 하라고 했잖아요.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잖아요. 멀리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직접 가보니까, 감히 이 폭포를 보다니? 어리석은 중생들아! 해가지고, 폭포가 안 보여줘요.
이게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안 보여줍니다. 왜? 우리가 보려고 했기 때문에. 보지 마! 해서 물보라 일으키니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 절대자에서 나온, 나를 완전히 쫄게 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내는 그 응시, 그 시선이, 진짜 하나님 속에 있는 살아있는 성도입니다. 영적조건입니다.
피가 우리에게 왔을 때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보라를 생각하세요. 정신없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냥 피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뭐 몇 분, 몇 초 가지도 않아요. 다시 헤헤거리면서, 나 오늘도 십자가 믿고 예수 믿었다. 또 개인구원으로 가가지고 또 자랑질하고. 니만 구원받았나? 나도 구원받았다. 이런 육신의 조건. 주께서 오늘도 충분히 활용하고 계시는데 대성공을 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뭐 말로만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그게 헛소리인 것을 주께서 너무 잘 아시고, 그거는 입발림에 불과하고, 진짜 주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그 방법은 오직 말씀대로만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그 작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영적조건은 오직 피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