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1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2-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18절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적그리스도가 나오죠. 적그리스도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리스도가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다들 그리스도 믿죠? 라는 그런 그룹이 있어야 되고, 그 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매이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되고, 그리스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자기 운명과 미래가 결정 난다고, 그렇게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이게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누군데? 적그리스도? 뭐 그리스도도 인정하지 않는데, 뭐 적그리스도까지 신경 쓸 거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적그리스도를 먼저 알기 전부터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매이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종속적인가를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속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디까지 악하여 질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악하여 질 수 있느냐? 보통 사람들은 내가 어디까지 선하여 질 수 있느냐를 자기의 존재의 가치로 보는 겁니다. 선에 대한 열망, 선에 대한 집착, 그 선에 대한 집착의 끝은 어디냐 하면 선한 사람만이 합격시켜 준다는 겁니다. 천국에 넣어주고, 악한 자는 저 불타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 이런 것은 성경을 덮고, 성경을 모르고, 성경에 아는 바가 없고, 그냥 상식으로 따지고 또 따져 봐도, 모든 민족, 모든 종교의 정신적인 스트레스인 동시에 자기 종교를 규합시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교주가 “여러분들, 그것은 선입니다. 그건 악합니다.” 라고 그걸 결정하는 것은, 그 당시의 선과 악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가지고는 당신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밝습니다.” 라는 것을 결정하는 거죠. 그 기준이. 그 기준은 바로 선과 악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하려고 이렇게 시도합니다. 선하려고 시도하게 되면 무엇이 필요 없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이건 문제가 복잡해지는 거죠. 누가누가 착하냐 하는 시합이 아니라 누가누가 악하냐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죠. 누가누가 악하냐. 자, 여기 사람이 있는데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거 뭐 농사짓는다고 해서, 고기 잡는다고 해서 미래는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아는 거고.
미래와 현재를 연결시킬 수 있는 어떤 중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재자. 옛날부터 중재자는 무당, 그런 사람들도 했고, 선지자, 그리고 위대한 멘토, 스승님. 그런 사람들. 소위 지혜 있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 그런 자를 철학자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철학하는 사람들이 지혜의 핵심인물이었어요.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와서 1665년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난 뒤에 그때부터 지혜 있는 자는 누구냐 하면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이여!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만있어보자. 가만있어보자. 우리의 장래는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과학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가만있어보자. 진맥을 짚어보자. 아이고, 상처 다 나았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호전된 미래의 상태를 보장하는 것은, 문학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과학자입니다. 과학자, 실험과 검증을 거쳐서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 되고 반복될 때, 그거는 일단은 과학자 그룹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것을 대외적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그렇게, 선지자, 중재자죠. 자기를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중재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동안 과학자들이 했던 일을 그전에는 누가 담당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과학자가 했던 일을 누가 담당했던가? 거기에는 사제, 신부, 또는 목사들이 그 일을 담당을 했겠죠. 사제나 신부들이. 자,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과학자가, 중재자가 나설 것 같으면, 여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식과 정보, 더 폭넓은 정보. 정보를 모집하는 것은 컴퓨터.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식이죠. 지식과 정보가 모아지면 미래는 점점 확실하게 다가올 수 있죠.
그러나 만약에 여기 무당이 있다든지, 여기 선지자가 있다면, 무당과 선지자의 그 고귀한 카리스마를 옹호해주려면,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신뢰를 실어주려면 이 무당과 선지자 사이에 개입이 더 벌여져야 되죠. 우리는 무식합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선지자를 이렇게 알아보지 못해서 이런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당님의 용하심을 우리가 이렇게 무시했더니만, 우리 곡성마을이 전부 다 귀신 들고 했습니다. 이렇게 더 낮춰야 되죠.
중재자는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 보통 사람들의 용어에서는 이걸 중재자라고 하지 않고 중보자라고 합니다. 물론 어떤 데에서는 같은 말로 중개자. 중개자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여러분 부동산이 생각나죠. 부동산 중개업자. 양쪽을 연결시키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양쪽(현재와 미래)을 연결시키려면, 현재는 이 딴 것 다 치우고 내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한다면 중재자가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어야 되는데, 사실은 여기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내 미래에 대해서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해요.
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은 각각 전문 분야에 오랫동안 거기에 종사에서 숙련된 지식을 포함하고, 경험과 숙련이 구비된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해서 자기 미래를 보장받아야 되겠죠. 예를 들어서 보험사 같으면 보험을, 치과의사 같으면 치과에 대해서, 어느 임플란트가 싸냐? 요새는 백만 원까지 떨어졌다고 하는데. 애들 같으면 교육전문가한테 맡기라고 하던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자신의 미래는 중재자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내가 무당을 선택할지, 어떻게 할지, 전문가를 할지, 전문가 집단 같은 경우는 특별히 그렇죠. 프로야구 선수하는 사람이 판사한테 물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판사가 야구전문가 하는 집단은 아니니까. 야구를 물으려면 하일성 전문가한테 물어야 하는데, 그 사람 자살해서 죽었으니까 뭐.
그러니까 전문가 집단한테 맡겨야 된다면, 그 전문가 집단의 선택을 누가 내려요? 본인이 내리죠. 그럼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누구 형을 닮을 가능성이 많아요? 누구 형? 내 꿈에 맞는,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모델을 충족시켜주는 그리스도를 골라잡아, 골라! 골라! 취사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익히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 더 잘 알 뿐이지,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할 분은 아닙니다. 왜?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내 구미에 맞고 내 만족성을 들어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리스도를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논리에 의한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성격문제라든지, 본질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누가 장악하고 있어요. 선택한 소비자가 어느 그리스도가 합당하냐를 골라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목사님, 그리스도는 한 분 밖에 없는데 골라잡을 수가 있습니까? 물론 그리스도는 한 분 밖에 없죠. 근데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단체는 교회색깔마다 다 다르니까. 소비자에게 있어서는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된 것이죠.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겁니다. 골라먹는 재미도 있지만 골라 다니는 재미도 있고. 이 교회 갔다 저 교회 갔다, 그런 재미도 있고. 아주 선택이 다양하죠.
선택이 다양하다는 것은, 어느 그리스도가 나한테 흡족한지를 골라잡는다는 말은, 결국은 이 말은 더 깊이 논리를 증거해가면 거울을 보면서 내가 알 수 없고, 내가 골라잡은 그 객체, 그 객체에 의해서 내가 다시 조정 받는다는 생각을 여러분 한 번 해보셔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이런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어떤 아가씨가 자기가 어느 정도 미모가 뛰어난지를 몰라요. 어는 정도 내가 신붓감으로 인기 있는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확정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남자를 한 열두 명을 만나보는 거예요. 열두 명을 만나보면서 만나본 소감들을 내가 수집하는 겁니다. “아가씨는 참 성격이 좋습니다.” 하면 성격 좋은 것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다른 남자를 만나요. 그럼 열두 명을 만나보면 어떤 자기의, 희미하나마 잡히는 형태가 있을 거예요, 성격은 좋지만 성질은 급하고, 키는 크지만 하체에 비해서 상체가, 여기서 말조심해야 돼요. 튼실하지 못하고 뭐. 여러 가지 조항들이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말을 조합해서 결국 규정되는 것은, 그래서 ‘아, 나는 이런 존재야.’ 라고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은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것은 확실하게 여전히 남고. 방금 제가 열두 명 했죠? 만약에 120명 만났다면 정보의 양은 더욱더 확실할 가능성이 있죠. 1200명 만난다면, 뭐 그런 여자 같으면 대단한 여자죠. 돈도 많이 썼을 거예요. 이거는 만나서 수집된 정보의 확실성에서 통계에 어프로치approach, 접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남들이 하는 그런 평가에 따라서 준동하고 요동치는 나. 이게 오늘날 현대사회입니다. 현대사회.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피아노 레슨 할 때, 레슨 하는 선생님에 따라서 자기의 수준이 다 달라져요. 근데 막상 실기시험 치러 들어가면 완전히 점수가 예상 밖으로 떨어지게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에서, 지금 이상한 잡소리 좀 하지 말라고 여러분들이 먼저 화를 낼 텐데, 그냥 잡소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만큼 시간을 소비하면서 길게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나의 가치를 정당화시키는 목적이겠어요? 나의 가치를 후퇴시키는 목적이겠어요?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나를 좀 많이 봐주세요.” 하는 노림수가 있죠. 바로 그 자체가 여러분들이 적그리스를 양산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유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자체가 어떤 그리스도의 정책과 책략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나를 칭찬해주고 우리 교회 다니라고 초청했던 그 교회로 말미암아 우리는 왜곡된 자아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서글픈 자아상을 갖는, 비극의 모습들이 시작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열 개중에서 골라잡으려고 하는데, 골라잡아도 참된 그리스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발부터가 이게 수상해요. 출발부터가. 절 이쁘게 봐주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벌써 시작부터가 자기를 너무 과하게 점수를 매기고 시작합니다. 과하게.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저 사는 것이 힘듭니다. 요즘 상황이 힘듭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주죠? 그거는 윤복희가 위로해주죠. 여러분. 누가 저를 위로해주죠? “하나님이여, 기도합니다.” “그래.” “저를 위로해주세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니 뭔데?” “아이, 위로해줘요. 잉~” “뭐야? 그런 것 짜증 부리려면 남편한테 짜증 부려라” “저 위로해줘요.” “니가 뭔데? 내가 무슨 근거로 너를 위로해줘야 하는데?” “하나님이잖아요?” “아하, 나를 찾아오기 전에 또 열두 명의 하나님을 찾아갔구먼.”
그 열두 명의 하나님을 찾아가니까, 전부 다 위로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배부르잖아요. 이왕이면 열두 명의 위로 중에서 더 환각적인, 환상적인 위로의 카드를 제시한 쪽에 내가 마음이 굳어지는 겁니다. 이거는 신앙이 아니고, 그걸 두 글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번 읽어보세요. 경매입니다. 경매. 노예시장 경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예는 튼실하고 힘 잘 쓰고 일 잘합니다. 하루에 목화밭을 1에이커를 갑니다.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이구, 그럼 70달러! 여긴 100달러!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 라는 노벨문학상 받은 유명한 작가가 있죠. 그 뿌리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대목인데요. 흑인 노예가정이 노예시장에 뿔뿔이 다 흩어졌어요. 실화니까 헤어졌습니다. 아버지하고 헤어졌는데, 캐나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 흑인 아들이 하는 말이 “나는 어서 성공해서 아버지를 돈 주고 사와야지.”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니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려면 그냥 만나면 되잖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를 돈 주고 사와야지.” 어서 돈을 벌어야 아버지를 다시 되찾아 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흑인은 언제 어디서나 노동시장의 상품으로만 존재하지, 가족도 상품으로만 존재하지, 그냥 백인들처럼 태어난 자체로, 출생자체로 패밀리,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거기서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작가가. 예수님이 노예입니까? 아니면 심부름꾼입니까?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가 우리하고 흥정하고 협상할 그러한 개체에요? 그러한 대상입니까? 묻는 제가 나쁘죠. “목사님, 그건 아니죠.” 그냥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제가 그게 섭섭한 거예요.
“예수님은 그냥 노예입니까? 우리를 그냥 도와주는 머슴입니까?” “아니요.” “그럼 뭡니까?” 입을 꾹 다물어요. 머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머슴처럼 그러한 선입관을 갖고 그리스도에게 다가왔잖아요. 그러면 그 이유를 알아야죠. 왜? 예수님이 머슴처럼 나를 위로해줘야 하고, 나를 사랑해줘야 되고.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주님이 위로해줘야죠.’ 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사고방식이에요? 도대체? 그건 워낙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생산되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는,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참 그리스도는 뭐냐,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너부터 고치라는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이구 왔어요? 어이구, 훌륭했어요?” 그런 사랑을 기대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죄를 지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보다 악할 수가 있느냐? 그걸 연구해야 진짜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윤곽이 이제 잡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모임 같으면, “자, 이제부터 여러분 저를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이래하겠는데, 저는 그런 것 안 할랍니다. 안 한다는 것이 더 무서운 말이겠지만. 안 하겠는데, 그냥 시키자면,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모험에 나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갑자기 목표가 생겼습니다.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자, 그러면 이제부터 그걸 시작해봅시다. 우리가 중재자와 무당과 선지자를 찾고, 전문가 집단, 과학자를 찾고 할 때, 우리가 만약에 참으로 악랄하다면, 악하다면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부리려고 하겠죠. 자기가 갑이 되고 이런 사람들을 을로 하겠죠. 변호사한테 상담은 받지만 변호사를 존중하지는 않아요. 돈 주면 상담해주니까. 많은 지식을 부러워하고 놀랄 수는 있지만 자진해서 고개 숙일 의사는 없어요. 그냥 그 지식을 잠시 더 높은 나를 위해서 이용할 뿐이죠.
사실은 이런 중보자, 중재자라는 용어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잘난 내가 내 필요에 따라서 미지는 모르니까, 그냥 연결을 시켜서 이쪽으로, 중재자들한테 한 번 시도해보는 겁니다. 쭉쭉 뻗어 나온 이 그림을 보니까 리우올림픽 때 조정경기 준비할 때 , 그 선 같아요. 정말 그렇다면 솔직하게 뭘 치워버려야 해요? 중재자 자체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뭐만 남습니까? 중재자 없이 나 있고 여기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있고. 중재자 없이 다이렉트로,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겠다는 것이 가장 솔직하고 노골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귀찮게 뭐? 중재자 필요 없어. 필요 없어. 내가 하나님과 직접 하겠다.
여러분,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뭐 한국의 교회나 건전한 교회는 다 중보자를 원합니다.” 라고 여러분들이 저한테 조언을 하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중보자를 귀찮아합니다. 하나님과 직접 맞상대하기를 원합니다. 그럼 중보자를 안 믿는가? 아니, 믿죠. 중보자를 믿는데, 믿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니까 자격미달이 되어 있어요. 어떤 미달이 있느냐 하면 죄가 있어요. 그럼 필요한 것은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그 열의와 집념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데, 잠시 내가 자격미달 되어가지고 아쉬운 거예요.
뭐냐 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만나 준다고 하니까, 방법은 딱 나왔죠. 뭡니까? 내 죄를 위해서 누가 해소만 해준다면, 아이구.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서서 이제 뭐합니까? 죄 없는 상태로 직접 누구하고 맞상대한다? 하나님하고 맞상대하고 싶어 해요. 그걸 상품으로 교회마다 내놓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 믿어야 죄용서 받는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 할 때 너무 목이 멥니다. 너무 감격해서. “모든 교회가 설교한 것을 한 마디로 끄집어내주세요.” 라고 한다면, “십자가에 머물지 마세요.” 이겁니다. 십자가에 머물지 마시고 더더더더더 나아가세요. 어디까지? 새 생명에 이를 때까지. 부활이 능력에 참여할 때까지. 더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건 뭘 의도하는 걸까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사람들은 이게 뭘 의도하는지 모를 거예요. 이게 바로 유대교 신학입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알아요. 홍해가 갈라진 것은 자기들 능력이 아닌 것은 압니다. 근데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홍해 갈라질 때는 믿음으로 갈라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후에는 십계명이 주어졌죠. 그러면 그들의 원리 딱 나왔네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고. 딱 공식 나왔잖아요. 공식 나왔어요. 자, 공식 쓰겠습니다. 나만 흥분하나? 여러분들은 미동도 없는데?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 자, 이게 플러스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게. 믿음 더하기 행함인데, 이게 플러스가 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일반교인들은 예수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한 푼도 없습니다. 상급 받으려면 내신 성적 제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부터 믿는 티를 많이 내야 한다는 거예요. 믿는 티를.
일반목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귀하신 보혈의 피를 받았으니까, 이제 믿쑵니까?” 쌍시옷 들어가게 하면서. “믿쑵니까?” “믿쑵니다.” “그러면 염치가 있어야지요? 염치가? 그렇게 공짜로 받았으면 아낌없이 여러분들의 모든 시간과 재물을 주를 위해서 내놓아야지요? 지금도 마귀 사탄의 세계에서 하늘나라를 확장시켜야 되는데? 하늘나라를 확장하는데 여러분들이 돈과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확장합니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잖아요? 군사잖아요? 군사면 군복과 무기를 살려면, 여러분들이 진짜 구원받았으면 입 닦지 말고, 티를 내서 하늘나라를 확장시켜야죠?”
도대체 몇 만 평을 확장해야 해요? 몇 만평? 대구에서는 어느 아파트를 빙빙 돌라는 거예요. 아파트를 다 접수하라는 거예요. 조폭도 아니고, 자기 나와바리, 영역으로 다 만들어버려요. 그것은 뭐냐, 교인들이 나태함이 일을 안 하니까, 계속해서 목적으로 이끄는 삶 해가지고, 목표 줘가지고 교인들을 임금은 안 주고 노동시키는 것 있잖아요. 그걸 시키는 겁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원가나 단가가 떨어지면 가치가 높게 돼요. 임금 적게 주면 그 상품은 반드시 가치가 높게 되어 있어요. 제한된 가격에서 한쪽을 낮추면 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믿음은 다가 아니고 행함이라고 하니까, 그럼 머리 좋은 사람은 또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고 행함은 전혀 없으면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속으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꼭 묻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물을 때는 목사가 잠시 주저해요. 그것도 잠깐. 그것도 힘없이 이야기해요. "예.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왜? 그 이야기 안 하면 이단소리 듣기 때문에. "하지만 상관은 없습니다. 팬티바람으로 천국 갈래요?" 이래 나와요. 팬티바람으로 상급 없이. 여러분, 십일조를 해주셔야지, 여러분, 십일조는 손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다 돌려받습니다." 이게 보람상조죠. 적금 붓는 겁니다. 알리안츠 하고 똑같은 거예요.
믿음 플러스 행함이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뭘 믿느냐가 중요해요. 뭘 믿느냐? 그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라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그 십자가사건 안에 내 죄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어느 쪽을 믿습니까? 내 죄가 있다는 것을 믿죠.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는 나의 어떤 죄가 들어있다는 것을, 그걸 알고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떤 죄가 있는지. 뭘 차압해서 가져갔는지, 세무서에서 와가지고. 뭘 몽땅 차압해서 가져갔는지 그걸 알아야 될 거 아니냐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이 이야기는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좀 해볼게요. 내가 만약에 대충 알고 있는 내 죄를 가져가버리면, 그 가져간 죄보다 무엇이 우세하느냐 하면, 그 죄를 가져갔던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나의 선행이, 가져간 나의 죄보다 이게 더 커요. 더 크면 나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 믿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선행으로 구원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죄인입니까? 선한 자에요? 선한 자가 되는 거예요. 논리가 그렇게 돼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이 누굽니까?” “왜?” “저도 이웃을 사랑해보려고요. 이웃이, 고게 좀 걸려가지고, 이웃이 누군지 안다면 그 이웃을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웃을 이렇게 하라.” “어떻게요?” “이렇게 하라.” “어떻게요?” “자비를 베풀어라.”
이렇게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주님께서 뭘 집어넣어줘요. 자비를 베풀 것 같으면 자비를 베풀라고 이렇게 하는데,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이웃사랑이 아니에요. 어떤 강도만난 사람이 있는데, 처음에는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고, 그 다음에는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고, 그 다음 세 번째는 사람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이 자기 여비를 다 털어서 그 사람을 도와줬다. 이 중에서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선한 사마리아인 이니이다. 너희도 이같이 자비를 베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기의 말씀에 의하면 이웃이라는 것은 유보적이에요. 누가 이웃인줄 몰라요. 그럼 이웃의 시작은 뭐냐 하면, 된 통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분부터 이웃의 개념시작은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이 되려면 이웃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말을 해놓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이웃이 되면 안 돼요. 이웃은 따로 있고 내가 이웃을 믿는 사람이 될 때는 계속 행함의 그 범주 안에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좀 감이 오십니까?
내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고 싶어요. 근데 지금 무엇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이웃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웃이 등장하기만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나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 되어서, 선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갈 수 있는 거예요. 그 질문을 한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이웃의 등장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웃의 등장이 되려면 낭패당한, 이거는 뭐 강도 만난 사람처럼 자기 자력으로 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야 해요.
그리고 더 무서운 이야기는 강도만난 사람이 지금 누워 있잖아요. 그냥 퍼질러 누워있는 거예요. 자, 강도 만난 사람이 고릅니다. 첫 번째 출연자 나오세요. 제사장. 두 번째 출연자 나오세요. 레위인. 세 번째 출연자 나오세요. 사마리아인. 그러면 이웃이냐, 아니냐의 결정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저 세 사람들이에요? 누워있는 강도 만난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으로 행세하려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사람의 출현을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기다린다고 그 사람이 나의 이웃으로 관계 맺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골라잡아야 돼요.
나의 십자가와 관련 있는 사람이 그 중에 등장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쪽에서 선택한 쪽이 이웃사랑의 완성입니다. 논리가 굉장히 길게 나갔는데, 따지고 보면 이 논리가 제 입장에서는 맞아요. 강도 만난, 상해 당한 쪽에서 선택해야 하나님의 이웃사랑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을, 결국 율법의 말씀은 누가 가로챈다?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로채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웃사랑을 완성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나갔던 사람들은 잠재적인 어떤 사람들이 되는 겁니까? 이웃이 아닌 자로서 잠재적으로 되겠죠.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가 비로소 죄인들이라는 겁니다.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처음에 뭐라고 멘트를 던졌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악랄하게 될 수가 있습니까? 그거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내가 이 정도로 악랄 하냐,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판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고,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판정을 내리십니다. 판정을 내리면 우리는 졸지에 뭐냐, 악랄한 죄인이 되죠.
죄라고 할 때, 예수님 쪽에서 드디어 화살을 쏩니다. 예수님 쪽에서 화살을 쏘아버리면 이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 참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에요. 지금껏 강의한 것이 뭐냐, 누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누가 골라, 골라, 골라잡는다? 내 쪽에서 하죠. 골라잡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는 더더욱 불확실하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 갈지, 지옥 갈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답답해서 적당한 그리스도를 우리 쪽에서 골라잡았습니다. 교회 한 열 두어군데 다니면서.
그런데, 어떤 식이 되었든지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한, 그 목사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미 내가 적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식이 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적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원인제공자가 누구냐 하면, 내가 원인제공자에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벌써 시작할 때부터 이미 적그리스도를 아예 싸고 들어오는 거예요. 적그리스도를 만날, 아다리 될 가능성이 농후한 거예요. 내가.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기다려봐! 기다려봐! 내가 너를 찜할게. 어떻게요? 이 악랄한 놈이라고 찜할게. 날 때부터 이 죄인 된 자야! 시편 51편에 나오죠. 모친의 죄 중에서 이 악랄하게 태어난 인간아! 지적해줄게.
그 지적자체가 이미 손가락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나왔죠. 예수님의 몸통에서 나왔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지체지, 뭐예요?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나왔으면 지체라 이 말이죠. 그럼 그 관계는 무슨 관계입니까? 온전하게 하나님의 이웃사랑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제가 지난 시간에 했죠? 하나님의 의. 그 관계. 그게 바로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두 글자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지금 사도요한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쭉 자녀들아 하면서, 지난 시간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조건과 육신에 결합된 사람들을 제시합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형제들아, 니 속에 니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뿜은, 로봇 팔이 쭉 나가는 것처럼, 가제트형사처럼 쭉 뻗어나가서, 가제트형사처럼 팔이 길어져가지고 도달하는 거예요. 오! 아직도 내가 준 죄사함과 성령이 아직도 여기에 있었구나! 뽑아간다고 했죠. 쭉쭉쭉~
그렇게 설명해놓고 그 다음에 나온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 이게 나온 거예요. 지금 제가 요한일서를 쭉 설명하면서 적그리스도까지 나왔는데, 만약에 성질 급해서 그냥 2장 18절을 읽어버리면, 아이들아 마지막 때에 뭘 주의하라?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보겠습니까? 대번에 나온 문제가 그거에요. 목사님. 성경 묵상하다가, 표준용어로 큐티라고 하죠. 제가 아마추어라고 모르는 것이 있는데, 여기 적그리스도가 있는데, 적그리스도가 빨간 그리스도를 말하는 겁니까? 적그리스도가 뭡니까? 하고 묻죠.
물으면, 그 목사님이 이렇게 할 거예요. 아이고, 집사님 참 질문 잘하셨습니다. 아이구, 그렇잖아도 지난번에 설교하려고 했는데, 요새 신천지가 날개 치는데, 신천지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혹시 또 길에 가다가 신천지뿐만 아니고,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구원파 만나거든 주의해야 하고, 도를 아십니까? 하는 이것은 더더욱 주의해야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그 사람들이 진짜 적그리스도 됩니까? 똑같아요. 똑같아. 똑같다 이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왜 궁금해 하는 거예요? 이 질문 잘 나왔다. 왜 적그리스도를 궁금해 하는 겁니까? 우리가 궁금해 하니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겁니까? 아니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우리가 궁금해 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죠. 이미 나타났다고 했는데 언제 나타났습니까? 아시는 분 이야기해보세요. 마지막 때. 마지막 때이니까 쉬운 말로 아슬아슬할 때에요. 절벽 끝에 있는. 마지막 때는 뭐가 나타난다? 적그리스도 나타난다.
그럼 우리의 머리는 팍팍 돌아갑니다. 내가 적그리스도를 알아채면 나는 마지막 때라고 할지라도 구원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확정되는 그러한 보너스가 주어지겠죠. 보너스가. 그러면 마지막 때 알고 적그리스도 알게 되면 사실은 내가 성경에서 챙길 것 다 챙긴 것이 되잖아요. 그래서 666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7년 환란, 3년 반 환란이야기가 그렇게 유포된 겁니다. 소설책 휴거가 나와서 유포된 거예요. 전부 다 사기에요. 사기. 사기에요. 그거. 베리칩. 베리베리베리칩. 그거 맞지 말라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666맞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믿는 건지, 정보수집인지, 모르겠어요. 바로 그런 이야기 때문에 아까 출발점을 정보수집 한다는 이야기했죠. 전문가 집단, 다시 말해서 666집단한테 묻지 마라. 7년 환란 3년 반 환란, 그런 집단에게 묻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중재자역할을 하는 거예요. 부동산 중개업자에요. 하나님은 자기네들이 알고 여러분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여러분의 미래는 보장된다. 이 말입니다. 언제 핵전쟁 일어나가지고,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 일어나니까 우리 말 듣고, 우리 집단에 가입해서 생수준비하고 벙커준비하고. 벙커준비하기 위해서 기금모금하고. 뉴멕시코에 가서 집단생활하고 공동체생활하자. 이것은 정보수집이에요. 그것 때문에 제가 아까 전문가집단이야기를 한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믿는 것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 믿는 것이 아니에요.
지식으로 확보해서, 경상도 말로 단도리, 단디 해라고 해서 대구은행에서 단디 카드가 나왔어요. 은행금리 단디 보장해준다고. 그냥 단도리 하듯이. 보험 열 개 넣듯이. 그냥 단도리 하듯이 성경공부 하는 겁니다. 여기 네 천사는 무엇입니까? 알아서 뭐 할래? 구름타고 언제 주님 오십니까? 감람산에 언제 두 발 딛고 섭니까? 감람산에 두 발 딛고 선다는데, 어디 마징가제트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입니까? 무슨 이스라엘이 있습니까? 요새 무슨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새 이스라엘 그냥 혼혈집단이에요. 정치적으로 분석을 안 해서, 못해서 그래요. 실력이 없어서.
성경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같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혈통적으로 계산 해봐요. 아무관계 없어요. 그 사람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 국가를 믿죠. 자꾸 성경과 현실을, 현실적으로 읽어야 된다고 해가지고,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성경에 억지로 꿰맞춰서, 곡이 어떻고, 마곡이 어떻고, 뭐 터키회복지가, 러시아가 시리아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드디어 곧 온다. 그래서 믿음도 없는 사람이 정보취득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 사람들만 거기에 다 빠져 들어간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짜 그리스도하고 우리의 관계는 이미 주님께서 지목해서, "너 악랄한 자!" 이미 지목했어요. 악랄한 자로 지명 받으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니가 나한테 이웃노릇을 해야 되는데, 못했다는 겁니다. 십자가 의미는 바로 그 죄를 말씀에 의해서, 뻗어나간 그 팔에 의해서 수거되는 그 말씀들을 내가 내 몸으로, 온 몸으로 받아들여서 이것을 한꺼번에 아버지 앞에서 해결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만약에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하는 거예요. 누구에게만? 영적조건이 붙어있는 자에게만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 앞에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나왔네요. 자, 적그리스도의 개념은 이미 나왔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적그리스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했어요. 근데 그 많은 적그리스도가 백날, 천 날 내놔봐야 공통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를 우리 금융회사에서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그거에요. "여러분의 원하는 가치를 더 키워드리겠습니다. 30배, 60배, 100배 키워드리겠습니다." 백이면 백, 적그리스도입니다. 장로회 간판 걸고, 침례회 간판이고 아무 의미 없어요. 천주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가치를 북돋아서 키워드리겠습니다." 그거 키워서 뭐 할라고 하는데요? 키워서 어디 가는데요? 그거 키워봐야 적그리스도와 함께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 들어가 봅시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나 되나?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적그리스도를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 물어볼게요. 적그리스도가 불신자입니까? 그럼 불신자는 다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너무 많잖아요. 적그리스도가 뭔가 그냥 안 믿는 사람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자기와 하나님과 직접 대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자체가, 내가 하나님과 직접 대하면 이미 그 사이에 끼어들 필요가 없죠. 이미 자기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뭘 하면 됩니까? 자기가 모든 일을 직접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교회에서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예수 믿게 되면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으면 여러분 속에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이 있다면 여러분 더 이상 뭘 의존하려고 하지 말고 찡찡 거려서 얻을 생각 하지 말고 성령 받은 여러분들의 그 능력을, 달란트를 마음껏 발휘해서 그동안 못 지켰던, 죄 있어서 못 지켰던 그때 시절처럼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폼으로 줬습니까? 성령 받았으면 이제는 모든 말씀을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여 지켜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그 지시에 따라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을 할 때, 아마추어인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박하겠어요?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하겠어요? 그래?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이제는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영광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뭘 뒤로 빼돌리고? 십자가는 뒤에 두고. 그러니까 서울에서 ktx기차를 타고, 대전 지나서 대구 왔으면 대전 역은 잊으라 이 말이에요. 대전 역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이렇게 하듯이. 이제는 대전 지났으면 눈앞에 보이는 대구를 바라보라 이 말이에요. 목표를 향하여. 그게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잖아요. 그러면 나가려면 뭘 해야 합니까? 이제는 말씀을 실천으로 옮기면 되죠. “말씀을 실천해야 된다.” 이게 바리새인 주특기입니다.
그럼 목사님,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나라 군대하고 사탄하고 싸워서 이겨야 되죠. 그럼 사탄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나라 군대가 되어서 이기면 되겠죠. 그럼 하늘나라 군대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생활에 억매여서는 안 되죠. 이제 노골적으로 자기 색깔을 드러내죠. 자기 생활에 억매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부르면 살림하는 것 딱 그만두고, 교회 와서 노동을 하되, 무임금으로 그렇게 해야죠. 그럼 바빠서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쁘면 돈으로 대납할 수 있는 편리한 제도가 또 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꺼진 불도 다시보자는 구호처럼, 돈 내고 시간 바치고. 시간 바치고 돈 내고. 그렇게 될 때, 결과가 뭐냐, 돈에 울고 사랑에 속고. 그 수법이에요. 목회 뻔합니다. 그 수법입니다.
그 시작점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잊으라는 겁니다. 근데 그 교회에 난데없이 복음 아는 사람이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삐용삐용~♬비상 걸리는 겁니다. 당신은 왜 십자가에 머물러서 맨날 제자리 뛰기 합니까? 왜, 맨날 제자리 뛰기만 합니까? 나가야지? 사람에게는 본래 노림수가 있어요. 부푼 가슴을 안고, 교회 올 때 희망을 안고, 그 희망을 교회는 존중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세례 받아버리면 나라는 자체가, 희망을 보던 그 나 자체를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께서 찢어버리십니다. 그만! 이제 그만! 꿈 그만! 교회놀이 그만! 권사 될 때까지 30년, 50년 했으면 됐어! 그만! 찢어버립니다. 교회놀이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는 뭐냐 하면,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능력이 없나니, 이제는 니가 전에 판단했던 그것은 어리석음이 되고, 십자가에서 뿜어 나오는 새로운, 니가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것이 이제는 구원받은 새로운 지혜로 작용하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 이미 이겼다는 거예요. 이미. 니가 군대 되려고 설치지 않더라도, 이미, 예수님 홀로, 활과 칼과 말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의 이름으로 이미 승리한 것을, 그것을 너는 느긋한 마음으로, 무거운 짐이 없이, 이미 승리감에 마음껏 도취되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