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3-이 근호 목사
세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그걸 증거를 하는데, 여기에 눈이 나오고, 그다음에 손이 나오고, 들었다고 했으니까 귀가 나오고. 귀와 눈과 손은 어디를 말하고 있습니까? 어디서 나온 가지들입니까? 몸이죠. 몸. 요한일서 1장 1절 말씀, 생명의 말씀하고 뭐와 동일 하느냐 하면 몸이, 어떤 특수한 몸이 동일하다는 겁니다. 몸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2절에,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나는 그 사람을 눈으로 봤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졌다.” 라는 이야기를 어떤 경우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 사람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을 눈으로 봤다고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입장이 못 된다 할 경우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봤거든, 우리가 실제로 만졌거든, 우리가 실제로 들었거든 이라는 말은, “지금 그 분이 어디에 있는데?” 라고 이야기하면, “그 분은 현재 우리가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입장이 안 돼.” 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사도요한이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평소에 눈으로 봤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었을 때에, 본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는 우리 선생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 라는 소리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죠. 같이 있을 때에는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봤다는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지금 그 분이 어떤 경우냐 하면,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예수님을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봤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나!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봤는데, 우리는 그 분이 누군지 몰랐어.” 라는 그걸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서 손 만지고, 악수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을 때에, 우리는 그 분이 메시아인줄 알았다? 몰랐다? 몰랐다는 거예요. 몸이 보고 있기에 몰랐고, 듣고 있기에 몰랐고, 손으로 만졌기에 그 분이 누구인줄 몰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나중에 요한복은 20장에서 이런 말씀하거든요. 요한복음을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요한일서가 있으니까, 요한복음의 사상이 끼어들거든요.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보게 되면,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너희들이 본 고로 믿느냐 하는 말은 너희들이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믿지 않고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금 진짜 수준을 이야기할 때는,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입장에서 믿는 것을 인정합니까? 아니면 만질 주님도 없고, 볼 수 있는 주님도 없고, 들을 주님도 없는 상태에서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그러니까 만지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을 때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도, 그것이 도리어 믿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전도할 때, 결국은 전도할만한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도 과일 등장했네요. 멜론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멜론을 지금 보고 있는데, 멜론은 녹색이고 먹음직스럽다. 이럴 때, “너 믿나?” “믿지. 같이 보고 있는데, 먹음직스럽네. 그래 나도 너처럼 믿어.” 라는 것을 주님께서 인정을 안 합니다. 주님께서 이걸 어디에 치워버립니다. 치워놓고, “여기 멜론이 있거든. 녹색이고 먹음직하지? 그렇지?” 하면, 우리 같으면 “주님, 뭐가 있어야지. 뭘 보고 지금 먹음직하다는 말입니까? 보이는 것은 식탁바닥밖에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니가 믿음이 없지.” “보여주면 주의 뜻에 동의하겠습니다.” “그래 보여준다. 보여주니까 어때? 녹색이고 먹음직하지?” “예. 녹색이고 먹음직하네요.” “그러니까 니가 믿음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믿음이야기 할 때는, 교회가 믿을만한 것을 다 치워버려야 해요. 교회 부흥됐다, 헌금이 모인다, 교인들 모인다, 어떤 사람 병 고쳤다, 천국 봤다, 천국 가보고 왔다, 다 치워버려야 해요. 암에 걸렸는데 병 나았다, 다 치워버려야 해요. 그것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자기가 그걸 강요한 것에 자기가 수긍한 것밖에 안 돼요.
“여러분 믿씁니까?” 쌍시옷이 들어가요. 그냥 “믿습니까?” 그냥 시옷인데 쌍시옷이 있잖아요. 그 쌍시옷의 최초의 유행자는 조용기 목사에요. “믿씁니까? 배나 받아라! 은혜 받은 것을 믿씁니까?” 그렇게 하잖아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서 그래요. 그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서 텀을 두기 위해서 “믿씁니까? 할렐루야!” 하는 거예요. 특이한 음정을 하는 것은, 그 특이성을 마치 내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확보하려는 교인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믿는 것이 믿음이지. 어떤 기적도, 어떤 간증도 다 치워버려야 해요. 그러면 왜, 믿을만한 요소를 왜 집어넣느냐, 왜 집어넣어서는 안 되느냐, 믿을만한 요소를 집어넣은 믿음은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 자신의 몸에 문제 있다는 것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항상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이 자체가 엄청난 이게 문제가 있다는 그것을 모르고, “주님이여, 내게 믿을만한 요소를 주시면 내가 딱딱 아멘하면서 믿겠습니다.” 그렇게 마음 준비를 가지는 이 자체가, 이게 불신앙덩어리라는 것을 본인이 감히 짐작조차를 못하면서도 믿는다고.
비행기 조종사, 파일럿pilot이 음주운전을 해서, 유럽에 그런 비행사들이 있답니다. 음주운전해서 비행기를 탔다. 그 사실을 승객 몇몇이 알았다. 그 비행기 타겠어요? 안 타겠어요? 안 타죠. 그럼 그게 믿음입니까? 확률이에요? 확률입니다. 사고 날 확률이 어느 것이 많은지를. 그게 바로 19세기 초반에 나온 수학의 통계학, 통계학적인 수학입니다. 그 통계학이 있을 때,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이 확률로 되어 있어요. 확률. 모든 현대의 물리학은 확률입니다. 진짜 요새는 법원의 판사도 확률을 이야기해요. 판결을 내릴 때, 확률로 합니다. 벌금은 얼마 하느냐 하는 것도, 저 사람이 죄질 재범이 있느냐에 따라, 확률을 계산해서 많을 경우에 벌금을 많이 매기는 거예요.
옛날 조선시대 때 허준이나 초창기의 한국의 의약사들은, 촌에 있는데도 아주 실력이.. “잡솨봐~ 나아~ 한 첩 지어봐~” 요새 의사들은 절대로 그런 소리 안 하죠. 확률이 70퍼센트입니다. 하도 의료사고 재판이 많아서. 왜 70퍼센트지? 백퍼센트 안 해줘요. 이렇게 빠질 구멍은 만들어놓고 이제 이야기하는 거예요. 60퍼센트인데 하시렵니까? 이번 수술 30퍼센트인데 그래도 하시려면 하고 말라면 말고 본인이 알아서 서명하세요. 현대의 진리는 확률입니다. 확률의 퍼센티지가 50퍼센트 넘으면 가능하다는 이론입니다. 그걸 개연성이라고 해요. 개연성. 모호함이 적어질 때.
예수님께서 믿는 믿음은 그러한 확률이 많은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확률이 제로였는데 생긴 믿음을 선물로 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택배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냥 주시는 거예요. 왜? 워낙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보고 듣고 만져서 믿으려고 하는, 이 천국 가지 못하는 믿음 외에는 다른 믿음이 없어요. 그리고 그 믿음을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이 아니고 확률이죠. 평소의 경험에 의해서 투자 되겠다 하면 하나의 자기의 신념이 있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모호성은 천국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있던 그 믿음만 인정해요. 다른 믿음들은 전부 다 가짜고, 가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물로 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있었던 그 믿음이 사실은 누구의 믿음이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믿음이에요. 본인의 믿음인데,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제공해주는 거예요. 똑같이 복사해가지고 그대로 우리에게 제공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하자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하자가, 잘못이 없는 거예요. 왜? 백퍼센트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퍼센트 주님이 인정해준 그 믿음이 선물로 그냥 포장채로 날아왔기 때문에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선물의 내용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의 결정적인 순간, 성도는 다른 사람과 달리 하다하다 안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이씨,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래 되죠.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런 찬송을 해서 주의 뜻대로 행하시라고 할 때, 그 행함을 위하여 나의 행함은 뭐로 되느냐, 나의 행함은 죄인인 것을 전제로 깔고 주의 행함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강의의 결론은 뭐냐 하면, 나는 뭘 해도 불신앙적인,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곧 행함을, 나의 죄악 된 행함을 단행할 뿐이다. 이게 결론입니다. 그럼 우리가 선물로 받은 믿음은 뭡니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던 믿음. 그걸 오늘 본문 3절에서는 뭐냐하면 ,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귀었던 그 사귐을, 예수님의 독자적인 사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어디까지 확장시키느냐 하면, 이제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것이 나에게 그대로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생산함으로,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그 믿음으로, 그 사귐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최초의 이런 발언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이런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런 놀라운 고백을 누가 한다? 선물을 받은 성도들도 그렇게 할 때,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귐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귐 안에 이제는 예수님의 택한 백성까지 끼어들 날이 온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데요,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뭐로 보죠? 고아로 보죠. 고아로 본다는 것은 뭔가 미흡하다. 관리하고 보호하고 책임질 사람이 있다? 없다? 고아는 그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렇게 제자들은 결핍되어 있는 거예요. 뭐가 결핍되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만 있으면 결핍된 것이 없어요. 왜? 내 인생은 평소에 누가 관리하기 때문에?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나는 나한테 충족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누구 없이는 못산다? 관리자, 보호자, 미래책임자 없이는 못산다. 이런 사람이 성도가 되고. 그런데 비어있는 자리, 빈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은, 주께서 누굴 보낸다는 거예요. 누굴 보내느냐 하면, 19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가 내 안에, 너희가 예수님 안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안에 아버지 있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결국 누구 안에 있습니까? 아버지 안에 있는 거예요. 이걸 요한일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라는 말이 이 뜻이에요.
지금까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지금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어요. 어려운 것이 없지만, 다시 한 번 해볼까요?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때는 전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냥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인줄 알았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생이라는 분인지 우리가 알지를 못했다.
근데 막상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는, 우리가 만지고 보고 듣고 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으로 왔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만지고 듣고 봤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는 줄로 착각을 한 거예요. ‘아이구,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떠나봐야 돼요. 사랑이 떠나봐야, 사랑은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이별부터 시작해요. 좋은 소리 나오면 좀 적으세요. 가끔 나와요. 가끔. 그래서 영어로 “I miss you”라고 하잖아요.
내가 그리워할 때 사랑이에요. 같이 있으면 사랑인 줄 모르고 맨날 싸워요. 근데 저만치 떠나가게 되면, 그러니까 보이지 않으면, ‘이 미운사람! 이렇게 말없이 떠나다니..이 야속한 사람..’ 이렇게 혼자 질질 짜거든요. 죽은 사람은 지금 그것도 모르고 죽어있는데. 남은 사람이 괴로워요. 남은 사람이. 그렇게 죽도록 맨날 싸우더니만, 암으로 죽고 난 뒤에는 그리워서 어쩔 줄 몰라요. 조용한 거 보니까 헤어져도 그만인가본데. 그러나 검사, 판사라면 이건 또 헤어질 수는 없고.
결국은 어떤 사람이 함께 있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자기 사랑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자기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타인을 그냥 인정하는 거예요. 사랑은. 니 나한테 붙어 있어. 왜? 내가 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니가 그럴 깨달아야 해. 왜? 나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런 쪽으로 사람을 사귀고 싶어 해요. 사귀는 것도 지 욕심 챙기기 위해서 사귀는 겁니다.
자, 그런데 그것이 떠나고 보니까, 우리가 만지고 듣고 보고 했던 그것이 전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말하는 것은 다 치워버리는 것, 없는 상태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을 때에, 그 말을 달리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미리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옮겨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빠질 것이다.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20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제가 문제 낼게요. 만약에 내가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산아! 지금 붕 뽑혀서 저 호숫가에 빠지라고 했는데, 과연 산이 옮겨서 호숫가에 빠지면, 그게 믿음이 좋은 거예요? 안 좋은 거예요? 질문이 어려웠나? 믿음이 좋은 겁니까? 믿음 안 좋은 겁니까? 믿음이 안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실시해보고, 아! 진짜 빠지네! 믿을만한 확률이, 믿을만한 개연성, 가능성이 있는 것을 보고 믿는 것은, 그것은 바로 대표적인 불신앙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안 보고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한 번 해봐. 한 번 해봐서 진짜 되면, 안수해서 병이 나으면, 나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 맞다. 이렇게 뭔가 내가 기대한 것을,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일어나게 해주시면 그제야 믿겠다고 하는 말은, 이게 대표적인 불신앙이죠.
우리가 늘 아는 사람에게 혹시 모르지만 전도한다고 해보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보여주면 믿을게. 천국 보여주면 믿을게.” 이러잖아요. 그럴 때 이렇게 하세요. 보여주고 믿으면 내가 얼마나 문제성 있고 잘못되었다 하는, 그런 것까지는 안 드러나는 거예요. 안 나타나죠. 믿음이라는 것을 왜 선물로 줘야 하는 합니까? 나한테 믿음이 있으면 선물로 줄 이유가 없죠. 평소에, 나는 믿습니다. 파일럿을 믿습니다. 음주운전 한 택시는 타지 않겠습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데,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3×2=6 이거는 나의 오류가 드러나지 않아요.
이게 바로 믿음이라면 구태여 우리 주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줄 이유가 없겠죠? 선물로 줄 이유가 없죠. 우리의 믿음은 이런 식입니다. 한 다섯 개중에서 네 개 맞으면 믿음으로 쳐주세요. 한 개 틀려도 네 개나 맞았는데, 좀 눈 찔끔 감고 좀 봐 주이소 마. 백점 만점에 팔십 점인데, 그 점수가 어디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천국은 예수님이 아버지로 사귀는 믿음이기 때문에, 백점 만점에 백점이에요. 모든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야 해요.
십계명 마지막 계명이 뭐냐 하면, 탐내지 마라에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예수님 믿으면서 한 번도 탐내지 않았습니까? 어떤 여자 분이 미장원에서 나오는데 머리 잘나온 거 보고 탐 안 나던가요? 어떤 사람이 옷을 사는데, 나한테는 안 맞는데, 저 사람은 너무 어울릴 때, 탐나죠. 어떤 사람은 다리가 길쭉한데, 짧은 자기 다리를 보면서 탐 안 났어요? 모든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탐심에서 나온 겁니다. 모든 게 탐심에서.
그걸 아시고, 그럴 줄로 아시고, 십계명에 딱 마지막 10계명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마지막에 탐내지 마라. 지키려거든, 지킬 솜씨 있거든 한 번 지켜봐라. 이 말이죠. 이 잘난 체 하는 인간들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직접주신 거예요. 하나님하고 독대해서 모세한테 준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 말씀에요. 모세 말이 아니에요. 딱 10계명에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니가 지킬 위인이 되는지 한 번 지켜봐라. 못 지키겠나이다. 그러니까 제사법을 준 거예요. 제사법.
제사법은 그냥 맛있게 압력밥솥에다가 밥에다 우리 먹는 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피를 내서 드려요. 껍데기는 치우고 안에서 피를 끄집어내요. 우리 가운데, 아까 식사할 때, 고기 먹었지, 피 먹었습니까? 저는 고기 싫고요. 이 소 잡을 때 나왔던 피 좀 한 사발 소금 간해서 좀 주세요. 지가 드라큘라도 아니고 뭐예요? 아니죠. 주께서 피를 바른다는 말은 나는 의인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인을 받되, 그냥 받지 않아요. 그 죄인을 위해서, 피를 같이 겹쳐서, 피가 죄를 사한 그 과정을 받아요.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스스로 못 씻는데, 예수님의 피가 결합되면서 이게 용서되는 효과가 있어요. 오늘 강의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죄를 용서하는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게 오늘 강의 핵심이에요. 그냥 믿습니다. 하지 말고 하나하나 그 과정을 밟아나가야 해요. 우리 성도님, 저를 처음 만나서 질문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저는 십자가가 안 믿어집니다.” 십자가가 안 믿어지는 것은,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발설하지 않은 것을 성도님이 와서 먼저 발설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의 피가 용서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지금 기분 좋은 이야기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어째서? 왜? Why? 도대체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는 그 과정을,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없어지게 하시는지. 그 한 단계, 한 단계를 놓치지 말고 이야기해 달라. 저는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이 이야기가 맞습니까? 제가 너무 과하게 나갔나요? 무대포로 안 믿겠다는 거예요. 한번 따져보자는 거예요. “예. 믿습니다.” 하는 것으로 속 시원한 것이 아니거든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힌트는 처음부터 이미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 대해서 제자들의 몸은 믿음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죠.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을, 같이 3년 동안 부대끼면서 살아도 전혀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고, 몰랐다는 거죠. 그 모른 이유가 자기 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지금 오셨어도 강의 새로 하려고 다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이 모임이 이래서 좋아요. 요한일서 1장 3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사귈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었습니까? 아니죠. 그런데 이 땅에 있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내가 보고 있기에, 내가 만지고 있기에, 내가 듣고 있기에, 예수님일거라고, 거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거라고”
그런데 예수님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했으니까, 이 믿음은 뭐냐 하면, 바로 1장 1절에 태초에 있는 그 믿음이죠.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이니까. 그렇다면 생명의 말씀은 무슨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태초에 있던 믿음과 관련돼야, 이게 생명과 생명 속에 현존하고 있고 생명 속에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이 맞죠? 처음부터 나오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이렇게 했지만, 목자를 치니 도망쳤잖아요. 실컷 만졌는데, 실컷 봤는데, 실컷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도망을 쳐버린 거예요.
자, 그러면 제자들의 몸은 태초에 있는 믿음입니까? 아닙니까? 아닌 거죠. 그럼 태초의 믿음이 아니면, 순순한 믿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믿음이 아니라면 생명의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죠. ‘뭐 그거 믿을만하네.’ 개연성이나 확률로 따지는 거죠. 자, 그렇다면 성경을 주신 몸이 영생을 주기 위한 이야기죠. 영생을 주려면 태초에 있던 그 믿음이 우리한테 선물로 와야 되죠. 그럼 선물로 와야 하는데, 어떻게 오느냐? 그 문제잖아요. 지금 그거부터 시작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거 시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택배 선물로, 성령의 선물로 오죠. 믿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은 이건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에.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그럼 선물 안에 내용을 뜯어보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사귀었던 그 관계가 그대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아버지를 볼 때, “아버지 좀 보여주세요. 아버지 좀 내가 만지도록 해주세요.” 이게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그 선물이 오기 때문에, 진짜 믿음은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그것을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간증이라든지, 어떤 획기적인 것, 실적적인 것, 다 걷어치워야 합니다. 왜 걷어치워야 하느냐 하면, 그걸 보고 믿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나서게 되면 뭐가 문제냐, 내 안에 있는 내 믿음이 영생 못 얻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본인이 몰라요.
뭐, 그냥 내가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는 절대로 영생 못 얻습니다. 열심히 믿음이 아니고 그냥 믿음이에요. 그 당시 제자들이 하도 믿음이 큰 것, 열심히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놀리듯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너 바다에 빠질래? 하고 한 번 해볼래? 이랬습니다. 세상에,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주님께서 보기에는, 아니,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걸 못한다면, 그렇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거예요. 너희는 믿음이 없는 거야. 믿음도 없는데 왜 자꾸 말씀하십니까?
니가 믿음 없다는 그것이, 믿음을 줄 수 있는, 그게 바탕, 전지작업, 택지가 돼요. 원래 숲이 있는 곳은 불도저로 밀어내야 신축단지, 상가가 들어설 게 아닙니까? 전지 작업을 주께서 시작하는 거예요. 믿음 없지? 믿음 없으니까 오라는 거예요. 믿음 없으니까. 와! 내가 채워줄 테니까. 선물로 줄 테니까. 하나님의 영생 줄 테니까. 영원히 천국 줄 테니까. 믿음 없는 사람도 그냥 와!
그러나 어떤 인간도 믿음 없어도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자기 사이에 뭐를 두느냐 하면, 거리가 생겨버려요. 이 거리, 나와 주님 사이에 거리가 있으면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 대상, 또는 대상체가 돼요. 그럼 나는 대상체가 있으면 판단하는 주체가 돼요. 그 대상체를 주체와 대비해서 객체라고 합니다. 주체와 객체사이에는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판단이 성립됩니다. 판단이 규정되게 되면 거기서 이름을 붙여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러 가지 짐승들을 보여주죠. 그때마다 아담은 이름을 딱 던지죠. 이름을 붙입니다(창2:19).
그런데, 여자에게는 이름을 누가 붙입니까? 아담이 붙입니까? 하나님이 붙입니까? 그러면 아담이 여자 이름을 붙일 때(창2:23, 3:20), 아담은 여자를 자기 대상으로 봐야 돼요? 하나로 봐야 돼요?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는 둘인데 하나가 됐습니다. 창세기 2장의 이 이야기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어요. 2=1 어떻게 둘인데 하나냐? 이 말입니다. 둘이 하나된 것이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하나인데, 양태는 둘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설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 둘로 세지 말고, 둘이 붙어 있는 그 관계를 only, one 하나로 봐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고, 근데 예수님과 아버지와 우리 사이가 또 하나고. “우리가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게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에요. 교인수가 있는데, 우리는 모두 성령 안에서 하나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그 하나라는 것은 1+1=2와 같은 레벨의 하나가 아니고, 격상된, 위상이 높아진, 모든 차이를 다 소멸시킨, 그 궁극적인 하나를, 하나인데, 그 하나가 지상에 내려와 보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잖아? 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하나로 지칭하듯이, “예수님, 니도 똑같은 하나. 니는 하나의 대상체야.” 이래 되는 겁니다. 대상체니까 판단해보고 믿으려고 하는데,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더라. 이러니까 다 흩어지는 겁니다. 영생을 얻는 믿음이라는 것은 위상이 다른 그 하나를 우리한테 새겨 넣는, 개입시키는 집어넣는 작업입니다. 그럼 성경에 보면, 아내는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사랑하듯이 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바친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 에베소서 5장에 나오죠. 들었어도 들은 척 안 하겠지만 성경에 그런 것이 있어요. 그 말은 절대로 아내와 남편을, 너는 하나의 대상체로, 너 하나, 나 하나, 둘로 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나눌 수 없다고 했잖아요.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이혼이 안 된다는 이 말이 아니고, 반드시 뭘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아무리 봐도 니는 2가 돼요. 너1 나2, 2가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둘이 있더라도 경유하는 통로를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들어버리면, 그림을 그리면 나, 너가 있으면, 너1 나2, 우리는 두 명이다. 이래 하지 말고, 나를 누구한테 양보하느냐 하면, 보이지 않고 믿는 자가 주님이죠. 주님이 이 관계를 부부되게 했잖아요. 결혼하게 했잖아요. 믿씁니까? 믿씁니까? 했죠.
그러면 남편은 내가 알아서 결혼 안 했는데, 왜 너는1 나는2, 또는 나는1 너는2 라고 하느냐? 그러지 말고, “주님이 했습니다.” 이게 딱 와버리면 둘이 연결된 이 연결고리가 1이 되는 겁니다. 그 연결고리에 주님이 있으면 셋이 합해서 하나가 돼요. 그러면 에베소서에 아내는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는 것을 내가 지켜야 합니까? 안 지켜야 합니까? 안 지켜야 하죠. 안 지키라고 하는 것이 정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안 지켜야 하느냐 하면, 나와 아내 사이에 거리가 없어졌어요. 내가 지키려고 해버리면 이게 또 거리가 생겨버려요. ‘나는 저 사람의 아내니까 성심성의를 다해서 저 남편을 존경해야지.’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 저 잘했죠?” 이렇게 나온다고요. 자기 의가 생겨버려요. 그럼 어떻게 해요? 태초의 영생의 말씀은 누구의 소유다? 예수님의 소유죠. 예수님께 뭘 갖고 있죠? 1을 갖고 있죠. 그 1이 1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줬다면, 이미 우리가 지극정성하나마나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면, 그거는 아내가 남편을 주께 사랑하듯 한 사랑이라고, 판단을 주님이 내리십니다.
참 주님은 고마우신 분이에요. 싸워서 멍들었고, tv는 깨져있고, 옷은 다 나와 있는데, 아이고, 이거는 니가 특별히 오늘 밤 10시 반에, 니가 특별히 남편을 사랑하는구나. 남편은 프라이팬으로 얻어맞아 멍해있는데. 남편들아 아내사랑하기를 자기 목숨을 아내에게 바쳐라 하거든요. 미쳤어요? 자기 행복과 편리를 위해서 아내를, 어디 하녀 하나 월급이나 주면서 하녀로 데려왔는데, 그 하녀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쳐요? 이럴 것 같으면 결혼 안 한다고 하죠.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니까, 그럼 미쳤다고 결혼합니까? 이래 나와요. 버리는 재미로 결혼하는데.
마태복음 19장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하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러니까 10절에 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또 유용성이야기가 나옵니다. 결혼을 자기 자신의 유용성을 위해서 결혼했다. 그럴 때는 아내가 나에게 의미가 없죠. 유용성이야기 했죠?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영생은 있어요.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주께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는 믿음은 자꾸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판단내리는 것이 이게 화근이 돼요. 이게 문제가 되죠. 그러면 주님께서 영생줄 때는 무엇을 터치하게 되어 있어요? 바로 우리가 뭔가 믿는다는 그것을 깨부수는 작업이 시행되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믿지 않는 자여, 제발 좀 오라! 도망가지 말고. 아이구, welcome to 그냥 오너라! 믿지 않기 때문에 오너라! 믿음 없다는 것을 니가 어떻게 알았어? 참, 니 대단한 사람이야. 오너라는 거예요. 니에게 그 필요한 믿음은 내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인간은 자기를 판단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내 믿음은 어느 정도 확률적으로 정확성이 뛰어나다. 이걸 자부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없어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몸에 대한 사랑으로 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을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백날 예수님 이해해도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키려고만 했지, 주여. 그런 지킬 능력 없습니다. 하고 나자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세리와 창기정도 되면, 주여. 손들고 옵니다. 이렇게 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동안 나도 얼추 잘 살아왔거든요. 이만큼 노력하고 판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지금 이 세상 살아왔는데, 왜? 하루아침에 그 가능성과 그 재주를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죠. 포기할 마음이 들겠어요? 이만큼 했는데.
그래서 절대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생각을 먹질 않습니다. 안되죠. 주께서 안 되는 것을 첫 단계로 놨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열두제자가 있는데, 그 중에 특별히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한 사람은 가룟 유다고,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둘 다 제자들입니다. 둘 다 몸을 가진 사람이에요. 둘 다 특징이 있어요. 둘 다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배신하면 지옥 갑니까? 아니죠. 그 근거는 베드로도 천국 갔습니다. 배신해도, 저주해도 천국 갑니다.
그러면 왜 가룟 유다는 천국 못 갑니까? 같이 배신했는데 베드로는 가고 가룟 유다는 왜 못 갔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배신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가지고 판단해버리니까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똑같아. 똑같았으면 똑같이 같은 꼴로 마지막을 끝내버려야 하는데,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갔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니가 판단하는 그 판단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내 판단에.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기도해도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 기도는.
왜? 주님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기도할 때, 사람이 예상하잖아요. 절대로 그 예상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왜? 우리의 판단이 잘못됐으니까. 그러면 가룟 유다 왜 갔느냐,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자, 이런 이야기하니까, 아까 강의한 것이 생각나죠? 영생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영생을 규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실 줄 아시고 이게 슬슬 마무리 지으려고 하신다 이 말이죠. 다 우리 영생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 다음에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끝까지 사랑하죠. 끝까지 사랑하는데, 예외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은, 열한제자는 사랑하시고, 가룟 유다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게 어려워요. 열한제자를 사랑하시고 가룟 유다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열한제자는 사랑하고 가룟 유다한테는 마귀가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왜?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이 안되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이 안돼요. 베드로는 왜 천국 갔는가, 마귀와 접촉이 안돼서 그래요. 마귀로부터 온전하게 장악하도록 허락지 않았어요. 왜?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마귀와 접속된 인간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배신이고, 배신보다 더 노골적인 마귀적인 모습이에요. 세상은 그동안 마귀가 지배해도, 사람들이 마귀가 지배하는 줄을 몰랐던 이유를 바로 가룟 유다가 다 보여줍니다. 이거에요. 반성하는 존재=가룟유다=마귀의 생각, 마귀의 사상을 뒤집어 쓴 사람. 반성하는 존재. 양심이 스스로 반성해서 반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자기에게 벌을 내리고, 자살이라는, 내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내가 양심의 회개하는 것과 이꼴(=)이 될 수 있는, 같은 양으로써 회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그나마도 내 양심이 해소될 수 있는 그 정도로, 나는 이렇게 심각하게 주님 앞에 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후회하고 거기에 대한 징벌을 누가 채택한다? 본인이 채택해서 얼추 이 정도 맞추면 내 양심은 여전히 착한 양심으로 유지되겠지, 라는 이것이 무엇과 관련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탄의 생각이 그대로 표현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가룟 유다는 마귀의 종이 아니고 마귀의 표현입니다. 마귀의 표현. 그래서 이 세상길에 가시면서 여러분들은 많은 마귀의 표현형들을 보시게 되는 겁니다. 이 시카고에서. ‘아, 내 탓이야. 내 탓이야.’천주교 신자들 차 뒤에다 ‘내 탓이오’ 라고 써 붙여 놓고 마귀 싣고 막 돌아다녀요. 절대로 여러분들을 버리지 마세요. 벌을 줄 자격이 없어요.
왜? 우리 몸은 누구 몸이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는 몸이기 때문에. 벌을 내리든 뭘 하든 주님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나를 벌 내리면 나는 스타가 되고, 나는 위대한 마음이 착한 사람이 돼버려요. 착한 사람의 그 착함은 내가 나를 사랑한 착함에 있고,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이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영생은 삑(☓)없습니다. 영생은 물 건너가고 없습니다. 태초의 영생을 위해서 자기를 비워두세요. 주여, 나는 손톱 하나 안 댈래요. 이거 나쁜 짓인지 아는데, 이 나쁜 짓도 주님이 알아서하세요. 내가 나한테 벌 내리고, 손들게 하고, 성경 다섯 장 더 보기 하고, 기도 오늘 삼십 번 더하고, 늦게 왔으니까 헌금 이천 원 더 하기. 이런 것들 하지 마세요.
원래 제가 이렇습니다. 제발 믿음 없는 채로, 그냥 죄인인 채로 오라는 말입니다. 병원에 환자로 와서 지가 의사 되어가지고 아는 척하면 골치 아프고. 제발 유식한 채로 오지 말고, 내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무식덩어리로 그냥 오시면 돼요. 우리는 태초를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것이 태초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한 소크라테스 공자라도 태초에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를 어떤 사이인지 몰라요. 이러면 영생도 없는 거예요. 이제는 그걸 주시겠다는 겁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제자들은 착각해가지고, 야! 영생이다! 눈에 보이네! 귀에 들리네! 우리는 믿는 모양이라. 그 중의 하나가 마귀의 표현형인줄 제자들도 몰랐어요.
그리고 베드로 본인도 내가 예수님을 배신할 줄을 본인도 몰랐어요. 하자가 있는 인간을 열두 명 채택한 겁니다. 그 중에 우리가 끼어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도 하자있는 모습으로 끼어 들기를...남아있는 것은 뭐냐, 예수님 쪽에서 이 하자를, 오류 있는 자를, 어떻게? 영생줄자로 바꾸는지, 그거는 10분 쉬고 그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