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4-이 근호 목사
자, 네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문제있는지도 모르고, 가룟 유다하고 베드로하고 둘 다 배신했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사랑하고, 가룟 유다는 마귀와 접촉을 시킵니다. 원래 사탄, 마귀는 인간의 존재세계에서는 없는 비-존재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보낸다? 마귀를 보내가지고, 비-존재가 존재세계를 파괴시키고 공격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너희들이 보기에 그냥 보통 목수의 아들,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마귀를 부릴 수 있는, 다른 영적인 진정한 존재자로서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것은 마귀가 인간을 자기 수하에 두기 위해서 준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어떠냐 하면 가룟 유다가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반성해서 용서를 얻고자 하는 그런 체재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할하는 세력의 총수. 그게 바로 사탄의 나라입니다. 사탄의 나라의 특징은 뭐냐, 거룩하고 의로우면 구원되는 그런 나라에요. 레위기에 나오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이건 베드로전서에도 나와요(벧전1:16).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의 운동회에서 하는 게임처럼, 과자 하나 놓고 애들이 막 달리잖아요. 제일 먼저 달리는 사람이 바리새인이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바리새인보다 더 빠르지 아니하면 천국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그 의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주님은 약을 올립니다. 모든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지금껏 달려 온 것 땡이라는 겁니다. 완벽에 완벽을. 거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그 소리 듣고 자신만만하겠죠. 왜? 간음한 적 없고, 사람 죽인 적 없으니까. 맨날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서 매진했으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이지. 그 다음에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죄. 오른 눈이 범죄 하면 찍어버려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니가 의인이야? 계속 집어넣어요. 누구든지 판단을 하는 사람은 지가 판단 받고 지옥 간다. 계속 집어넣어요. 아무도 주님의 추가적인 법에 대해서 그걸 당해낼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현대인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짜 듣기 싫은 것이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그 다음 뒤에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지옥 가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했어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은 뭘 안 한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않는 사람만 간다는 거예요. 그럼 누가 가겠어요? 아무도 못 갑니다. 아무도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산상설교에서 실컷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뒤에 8장이 시작하면서 천국 가는 사람 하나 등장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저주받은 문둥병 환자에요. 문둥병 환자인데, 그 사람은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여, 해결 못합니다." 하니까, "내가 있잖아." 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의 저주를 해결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산상설교는 내가 알아서 내 구원 챙깁니다. 하는 사람은, 어떤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알아서 천국 갈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주님의 존재를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겠죠.
그리고 8장에 나온 이야기가 너희 짐을 내가 대신 진다는 이야기에요. 너희 짐을 내가 대신 진다. 벌써 그 이야기 나오면 낌새가, 아하! 주께서는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지시려고 벌써 발걸음을 그 쪽 방향으로 틀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주제가 뭐냐 하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질 수 있는가? 하는 그 문제와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 흘렸다고 해서 우리 죄가 사해진다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 제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아침에 어떤 사람이 호텔에서 커피를 들고, 하얀 양복을 입은 것이 기억나요. 큰 덩치에, 키는 1미터 86에서 87정도 되는 사람인데, 커피 들고 갔습니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커피 안 마신 우리가 그 커피 맛을 그 사람하고 같이 공감합니까? 공감 못합니까? 저 사람만 커피 마셨어요. 우리는 물 마셨어요. 나와 다른,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커피 마셨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마신 커피가 내 커피가 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우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그 사람이 아팠는데 왜 내 병이 낫습니까? 이건 터무니없는 거예요. 의사는 환자대신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고 치료제를 주는 사람입니다. 근데 예수님은 어떤 의사입니까? 내가 아프면 저쪽의 아픈 것이 싹 사라지는 그런 의사입니다. 오떻게? 이건 어떻게?가 아니고 오떻게? 그게 가능해요? 텔레파시 그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벌 받은 것이 어떻게 내 속에 죄의 심판이 면제가 되느냐 이 말이죠. 둘 사이에 뭐가 놓여있는데?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이기 때문에. 몸은 부부라도, 아무리 한 몸이라도 분명히 두 개의 신체로 되어있습니다.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두 개의 신체가 하나의 신체라면 굉장히 편리할 거예요. 밤중에 화장실 가야 되잖아요. 니가 가라. 니가 가. 지가 가서 오줌 누고 오면, 이쪽은 아휴! 속이 깔끔하죠. 이빨이 아프다. 아내는 지지지직하고 아픈데, 남편은 왜? 내가 시원하지.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께서 믿으라고 성경책을 제시한 겁니다. 얼추 믿을 수 있는 정도가 좀 돼야 되지, 말도 안 되는 것을, 못 믿을 것을 주면서 믿으라고 하면, 그런 억지를 쓰면 그 억지는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제자들을 놓았던 것이 힌트가 됩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사탄을 만나죠. 그 사람이 가룟 유다라고 했죠. 요한복음을 잠깐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6절을 누가 한 번 읽어 볼까요?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을 집어넣은 것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왜? 사탄은 천사입니다. 피조물이죠. 피조물은 누구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창조주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사탄을 집어넣은 거예요.
사탄을 집어넣었다는 것 하고, 어떤 아저씨가 커피를 마시고, 내가 커피를 안 마셨는데도 내가 커피 맛을 아는 것 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있어요. 가룟 유다의 몸이 있었죠. 그럼 가룟 유다에게 묻습니다. 가룟 유다가 한 행동이 자기 몸에서 한 행동입니까? 아니면 사탄이 한 행동입니까? 사탄의 행동이죠. 몸은 사탄의 행동의 표현형이라 하는데, 이게 어려워요. 표현형. 사도 바울의 움직임은 사탄을 움직이는 표현형이 되는 겁니다. 그럼 사탄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했죠. 그러면 인간의 몸은, 우리 보기에는 하나, 하나, 하나..몸 열 사람이 있다면 열 명이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다 사탄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탄의 하나 됨에 열 명이 소속된 열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무엇이 형성되느냐, 몸은 멀어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는, 새로운 잠재된 보편성이 여기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보편성을 확 그걸 심어준 거예요. 지금 여기 이렇게 포도 있고, 멜론 있고, 배있죠. 내가 여기서 잉크를 받아요. "목사님. 이건 멜론이고, 포도고, 배입니다." "그래요?" 잉크를 가지고 확 뿌려버려요. 그러면 전부 다 시커멓게 되죠. "다 뭐예요?" "다 잉크에요." 바로 그게 잉크가 주는 표현형이 라는 겁니다. 사람은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생각이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 보편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나의 의는 내가 반성해서 내가 창조한다는 거예요. 내가 거룩하고, 내 착함은, 내가 나에게 대한 선악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에,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나는 점점 더 착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반성문 쓰잖아요. 일기장의 내용이 뭐에요? 일기장의 주제가 뭡니까? 오늘 시카고에 비가 왔음. 화씨91도. 이렇게 쓰다가, 그럼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아동도 아니고, 아동 같으면 그렇게 쓴다지만. 어른들 같으면, 일기장에 뭡니까? 남한테 안 보여주는, 사춘기 애들의 일기장은 뭡니까? 오늘도 나는 잘못을 했다. 나는 속으로 남에게 뒷담화 했다. 험담했다. 바보야! 바보! 나는 이런 인간이 되면 안 되는데. 주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는데. 성경 베드로전서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는데, 또 내가 이렇게 흠집을 내놨네... 이러지 말아야 되는데... 그게 일기장이에요.
근데 이걸 나만 갖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갖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갖고 있죠. 그걸 문명사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을 도덕이라고 하고, 사회공동체에서 이 도덕을 가지고 연결시키는 것을 윤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 윤리는 필요 없어도, 혼자 살아도 이 마음속에 있는 도덕감은 지워지지 않아요. 이 도덕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두 글자로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양심. 근데 그 양심은 그때그때 달라요.
양심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사회에 대한 적응력입니다. "에이, 하나님이여. 이거 제가 좀 들어줬습니다. 왜? 말 잘해야 계속 이 밑에서 남아있지, 바른 소리 했다가는 이거는 큰일 날입니다. 나보다 내 가족이 더 큰일 납니다. 주님 봐주세요. 주께서는 사랑이 많으니까 눈 찔끔 감고 봐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나는 모른다. 나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상관없습니다. 나는 묵비권. 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은 안다는 뜻입니다. 질문에 답변 못한다는 그런 뜻이잖아요. 너의 윤리를 나에게 강요하지 말아라. 나도 나름대로의 나에게 도덕이 있다.
윤리를 할 때, 이익 되는 윤리는 윤리로 나갑니다. "예. 나 착한 사람이에요. 얼마든지 바꿔드리겠습니다." 근데 자기가 불리할 때는, 잠시 윤리는 접어두고, "주님이여, 저에게 양심 있는 것 아시죠? 저는 이 정도 착한, 마냥 나쁜 놈이 아니고, 그저 이번 일만 문제 있었지. 그 전에는 얼마나 착했습니까? 길에서 동냥하는 거지들에게 주고, 주께서 그 선행을 양으로 모아서, 작은 내 죄를 막대한 선으로, 그냥 상쇄시켜주시옵소서." 빼기 더하기해서 대차대조표 뽑아가지고, 차변 대변해가지고 당기순이익, 마지막 남은 것. 선이 1퍼센트라도 더 많으면, 나중에 천국 갈 때, 저울 한 번 달아보자. 어이구, 착하다. 어이구 49, 어이구 51, 빼면 2퍼센트. 뭐 그다지 성적이 안 좋다마는 합격선 통과.
그게 선악과. 선을 아는 지식과 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공유하면서, 항상 내부적으로 양심적인 흥정과 정치적인 타협을 모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란 존재는 다 그래요.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집어다가 교도소에 집어넣죠. 너 같은 인간은 사회에 살 자격도 없어. 이 부모도 모르는 인간! 집어넣죠. 그럼 나머지기는 부모에게 양심적으로 배려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거죠. 그렇게 해서 사회구성원을 이루고, 그것이 유대사회를 이루었고,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산상설교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고, 그 시비 앞에서 의인은 아무도 없었고, 자기를 지적하는 예수님을 처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없던 시절로 다시 원상회복되기를 원하는 그들을, 예수님은 그걸 간과한 거예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야만, 나의 선함은 계속 선함으로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착함은 착함대로 유지되어서, 이 착함이 있기에 신께서는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그러한 반대급부까지 고려한, 경제적인 것까지 고려한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다지 나는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 이게 조폭이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에요. 차라리 조폭이 더 의리 있어요. 이 나쁜 놈아! 조폭끼리 그런 소리 한다니까요. 남을 등쳐먹으면서 이 나쁜 놈아! 한다니까요.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반성한 가룟 유다를, 기존의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속성으로서, 얼마나 양심대로 살았으면, "팔아먹다니?" 하면서 울었어요. 울면서 자살했습니다.
근데 베드로는 통곡을 좀 했습니다마는, 통곡했지만 죽었습니까? 안 죽었죠. 누가 보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마귀가 베드로를 삼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베드로를 막아서, "니 지금 드라마 시작도 좀 했는데 이게 끝인 줄 아나? 니 배신이 드라마 끝 장면이 아니거든?" 드라마 끝 장면이 아니거든요. 마지막에 용서할 수 없을 만큼의 복수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까지, 끝까지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 끝을 봐야 되지 않습니까? 혼자 미리 좌절해가지고, '나는 안 돼! 안 돼!' 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한다면 끝까지 가야 될 거 아닙니까? 주께서는 끝까지 사랑하는 자를, 베드로를 끝까지 구원해내십니다.
베드로를 구원해내시는데, 그럼 여기 개입된 그 원리를 뒤집는 그거는, 반성하고, 착하고 거룩한 것이 그게 아니라면 주께서 집어넣은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배신당한 사람. 주님은 사랑하되, 배신의 여지를 두고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나를 배신해다오!" 이게 통제를 받고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에서는 절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각자 인간, 본인만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그렇게 굳혀놨어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니는 내 사랑을 받고, 나는 고마움으로 회수해야 돼. 이게 인간관계입니다. 받아놓고 어데 딴 짓 해? 인간은 공짜가 없어요. 한만큼 보답을 해줘야 보답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본인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늘도 그런 줄 알고, 하늘에게 은혜를 받았으면 보답해야지. 그 귀한 십자가를 받았으면, 헌금 십일조가 뭐냐? 십일조는 구약이고 신약에는 십에 이조, 삼조 해야지. 돈에 다 환장을 했어. 돈에.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라는 거예요. 순종으로 보답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보답하라는 거예요. 거룩으로 보답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묻지요. "만약에 거룩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룩 안 하면 지옥 갑니다." 하려고 하니까, 소위 목사가 돼가지고, 먼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그러니까 지옥 간다고 하면 이것도 곤란하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상급아이디어입니다.
구원은 받되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가지고, 천국 구석에 팬티바람으로..그러면 그걸 듣고 무식한 교인들은, "목사님! 그럼 우리는 예수도 믿고, 목사님 시키는 대로 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 돌려받습니다. 십일조 하면 다 돌려받습니다." 그게 바로 보람상조고, 그게 적금 드는 거예요. 알리안츠 보험 드는 거예요. 그거는 결국 하늘에 쌓는 것이 아니고 자기 저금통에, 자기가 자기 것 회수하는 식이에요. 그게 바로 사탄의 표현형입니다. 악마의 모습입니다. 기어이 자기의 가치를 자진해서 폐기할 마음은 더 이상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뭐냐, 사랑해줄 테니까 제발 배신해라. 제발 배신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곧 나의 사랑은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사랑은 누가 챙기는가 하면, 아버지가 챙기니까 더 이상 내가 내 사랑을 챙길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의 생각을 가진 모든 인간은, 나를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 지옥으로 가면서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그건 윤복희가 그렇게 한 거예요. "누가 나를 위해주지?" 빰빰빰~♬ 한 템포 쉬고, "바로 여러분!" 여러분이라는 노래 아십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가 위로 받을 잽이 되냐 ? 이 말이죠. 죄 지어놓고 무슨 위로를 받아요?
그러니까 평소에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말, 멘트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제발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왜? 무조건~♬무조건이야~♬ 무조건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왜? 나는 여기 존재하니까. 나는 유용성밖에 챙기지 못하니까. 그런데 위로 안 해주잖아요? 그럼 내가 니한테 위로해줄게. 그럼 내가 니한테 사랑해줄게. 사랑받는 너는 사랑의 대가를 나한테 돌려 달라. 결국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고무줄 잡았다가 땡기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자, 고무줄 한 번 잡아보세요. 잡았죠? 쭉 잡아당겨보세요. 그러다 고무줄을 놓으면 팅하고 그 순간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거죠. 낚싯대를 던진다고 사랑이 아니라, 낚싯대에 걸린 인간은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고백을 하면서 나한테 돌아오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의 존재감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그런 식으로 이해했는데, 그 대표자들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반대급부로 대가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입 닦고 넘어갈 그런 못돼먹은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하물며 인간들도 서로 도덕적이고 거룩하고 의로워지면 반드시 보답이 있고 대가가 있는 반면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오죽 대가를 잘 지불하겠는가?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거룩한 선을 통해서, 그걸 밑천으로 해서 거래와 흥정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구원은 기본이요, 보너스로 상급까지 받는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설교입니다. 뭐, 더 들을 것 없어요. 한마디만 들어도 이게 줄줄줄 막 따라 나와요. 마귀의 정당이에요. 마귀를 모시고 있는 마귀의 정당입니다.
주님은 사랑해줄 테니까 나를 배신해라. 이 말은 베드로를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니가 나를 배신할 수밖에 없다. 왜? 내가 배신을 유도할 테니까. 이유가 뭐냐, 배신해야 니 본색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본색이 아니고, 사랑할 수 없는 악마의 본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들통날거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왜? 마지막 사랑은 나기 때문에. 나의 마지막 사랑은 나예요. 그래서 주님이 주신 사랑함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고 했습니까? 자식을 바치는데 앞에 뭐가 붙어요. 그냥 자식이 아니고, 미운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식을 바치라고 했어요.
이것은 바로 아버지가 자식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을 배신하는 겁니다. 본인이 본인을 배신하는 것. 이게 바로 가장 어려운 거예요.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애쓰는 나를 내가 배신해요. 끝까지 나를 누가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그거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거든? 제발 여러분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여러분 자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거는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나줘야 해요. 이것을 가지고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라고, 짧은 멘트로 이야기합니다. 지독하게 너를 미워하라. 이걸 멘트라고 하지 말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찾아보면 되겠죠.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영생을 얻는다 이 말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자, 그럼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죠. 자, 아까 뷔페에서 커피 마셨던 사람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커피를 자기 자리에서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커피 맛을 못 느낀다고 했죠? 그럼 우리는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라고 한다면, 하나의 상황극이니까. 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얀 양복을 입은 사람은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 사이에서 서로 따로 놀아요. 왜? 몸은 세포 60조개가 따로 있어요. DNA가 달라요. 항상 따로에요. 생각이 같다고 우기는 것은 본인 생각이지, 생각 자체가 같지 않습니다. 몸은 같아도 다 달라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게 되면 이 몸과 이 몸 사이에 무슨 그림자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CPU, 중앙처리장치에요. 모든 세상 권리를,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경유해서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여기 시카고에 놀이동산 있습니까? 디즈니랜드 비슷한 것 있어요? 있겠죠. 시카고가 대도시니까. 옛날 구닥다리 놀이동산에 이런 것이 있죠. 중앙 위에 큰 원판에 추가 있고 거기에 그네들이 여러 개 달려 있어서 막 돌아가는 것 있죠?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것은 몸에서 더 이상 범위가 넘어가지 않아요. 피노키오처럼 코가 늘어나고 하는 사람 없어요. 팔 길이도 그대로에요. 늙어 가면 줄어들지만. 여기까지는 내 몸이고, 그 외에는 빈 공기층이고, 저쪽 몸은 따로 있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게 되면 누가 등장해요? 사탄이 등장하죠.
사탄의 특징을 누가 보여준다? 열두제자 중에?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특징은 뭐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반성하고, 자책하고, 회개하고, 자기 죄 문제를 누가 알아서 한다? 자기가 알아서. 그럼 자기 구원 문제를 누가 알아서 한다? 내가 착함을 많이 누적해서 그 착함으로 천국 넣어줄 수 있는, 내밀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있는 사람이 우리다. 이 말이죠. 자, 딴소리 하지 말고 아까 이야기했던 것 다시 해보면, 여기에 우리 있고 저 옆에 양복 입은 사람 있고. 그런데 예수님이 딱 오셔가지고 모두 어두움이요. 죄라고 한다면, 이 사람 커피 마시고, 커피 안 마신 우리가 동시에 이 외치는 한 사람 때문에 연결이 돼요. "감히 우리 인간을 모독하다니?" 커피 마신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우리도 "당신이 내 인생을 알아?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모르면서 어떻게 일괄적으로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라고 할 때는 우리하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하고 공동으로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를 배반하도록 하는 조치가 예수님으로부터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세상에 빛으로 오매 세상은 뭐다? 어두움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뭐냐, 어두움을 확인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여기도 어둡고, 베다니도 어둡고, 가나안 혼인잔치도 어둡고, 갈수록 어두워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잠잠하다가 갈수록 어두움의 농도가 짙어져가지고 나중에는 이구동성으로 죽여 버리자! 강도 바나바를 살려줄까요? 예수를 살려줄까요? 빌라도가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를 죽이고 살인강도를 살려달 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죠.
그 중에 "예수를 살리세요!" 라고 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죠. 그때 제자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갔죠. 그러면 베드로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리라고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죠. 의인은 없나니 단 한명도 없다. 산상설교 지킨 사람도 없을뿐더러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부 다 판단 miss. 그것은 우리의 몸이, 주님께 영생 얻을 몸이 아니고, 아담의 죄를 그대로 덮어씌운 거예요.
그 몸을 가지고 우리는 그동안 스스로 선악논리 의해서 그동안 아주 나쁜 짓을, 일 년에 한두 번 과속했는데, 나머지기는 뭐, 나쁜 일 한 것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 스스로 착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위로하면서 살았죠. 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산상설교나 십계명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성경에 말씀을 율법으로 준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뭐 하나 물어봅시다. 우리가 그렇게 주접떨고 주 앞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올까요? 반발 할까요? 반발하는 것을 주께서 기다리십니다. 왜? 그게 바로 주의 사랑의 의도이기 때문에. 내 사랑에 대해서 뭐하라? 제발 좀 배신 좀 해라. 배신. 배신해야 그게 사랑이에요. 배신하는 그것을,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천국 가는 공로에서 완전히 우리 공로가 배제가 됩니다. 그래서 천국 가서 미리 면류관을 쓸 자격이 없어요. 이것은 요한계시록 4장봅시다.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 앞에 보면 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이게 남의 면류관이 아니고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집니다. 천국에는 보좌가 두 개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 있고 아버지의 보좌 있고. 그 보좌 앞에 면류관을 아낌없이 반납합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내 힘으로 구원되지 않았는데 이걸 쓸 수 있을까? 나는 공짜로 구원받았는데? 얼마나 우리는 자기 딴에 안다고 우기고, 얼마나 자기반성 잘하고 했지만, 내가 주님에 대해서 배신하고, 창조주 자체에 대해서 배신할 줄이야. 내가 미처 몰랐는데, 주님께서 말씀하니까, 울컥,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잠재성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켜서 날마다 배신. 또 배신. 내일 되면, 9월8일에 배신이라고 써있어요. 또 배신.
배신은 딴 게 없어요. 주여,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배신이에요. 주님이 왜 제 일에 끼어들었습니까? 이게 배신이에요. 나의 착함, 나의 의로움을 한몫 챙기고. 그보다 더 못된 마귀는, 주여. 제가 마음을 낮추었나이다. 그 자기의. 그걸 또 반성하고 회개하고 성경 읽고 기도했습니다. 하는 요 자기의. 이것은 죽을 때까지 배신의 근거기 때문에. 내린 결론은, 구원을 한 번 외쳐볼까요? “끝까지 배신하자!” 왜? 배신할 때마다 끝까지 사랑함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기 위함이에요.
그 피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의 배신이, 옴팍 들어가 있어요. 배신 한 것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배신 할 줄로 아시고, 니가 아무리 배신해봐야 이 십자가의 용서하심을 뛰어넘을 배신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에는 우리의 배신이 한몫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피거든요. 좋게, 좋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알아들었지?” “예.” “아이구, 착해.” “알아들었어요?” “아멘.”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아멘. 예. 알아들었습니다. 알아들었으니 이제는 주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이 전체가 뭐가 되느냐, 배신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표현형으로 나타납니다. 배신이.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지옥 갈 사람도 배신하고, 천국 갈 사람도 배신했는데, 이것을 온전한 주의 사랑으로, 이미 사랑 안에 배신의 여지를 남기고, 우리가 배신의 덫에 갇혀서 아무공로 없이 간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은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이고. 주께서 이렇게 사랑했으니까, 여러분 바른 인간 되어서 두 번 다시 배신하지 말고, 바르게 살고, 이제는 성화하고 성경 읽는데 봉사도 많이 해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자. 이렇게 나오면 그게 바로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냥 막 사세요. 그냥 사세요.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배신은 우리 평생에 끝나지 않고, 항상 우리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의 배신의 특징이 뭐냐, 그게 바로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 마지막에 원치 않는 길이죠. 원치 않는 길. 들어는 다 봤죠? 자 문제 들어갑니다. 주께서 인도해서 이 길로 갔다. 질문은, 이게 원치 않는 길입니까? 원하는 길입니까? 대답: 원치 않는 길. 아니에요.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길이에요. 주의 은혜면, 주께서 원하는 대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로 내가 예상했던 길이에요. 그래서 25억 돈 벌어도 그게 나한테 환란이라고 하는 거예요. 25억이냐, 아니면 몽땅 말아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것은 일체 이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왜? 배신자에게 줄 것은 사랑밖에 없지, 배신자의 예상을 내 앞에 펼쳐놓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제, 지난 시간에 제 앞에 멜론이 분명히 와 있었어요. 오늘 분명히 멜론이 와 있을 거라고 내가 예상했다고 칩시다. 사실은 제가 예상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필요 없고요. 예상했다 칩시다. 그럴 때 멜론이 나왔잖아요? 제 요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왜, 제가 원치 않는 멜론을 주십니까? 지금 제가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역시 나는 맞혔어! 이게 아니고, 왜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주시면서, 원치 않는 멜론을 내놓습니까?
그것은 바로 니가 예상했든, 안 했든, 관계없이 주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온 거예요. 일방적으로 왔다는 말은, 여기 멜론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예상했던 안 했던 관계없이 나는 원치 않는 선물을 받게 된 겁니다. 내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모든 하루하루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원치 않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지옥 간 사람은 뭐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미리 예상해서 기도 확실히 해야 되는데. 기도 안 했더니만 내가 과속으로 경찰한테 걸릴 줄 알았어. 자꾸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는. 그럼 원치 않는 것을, 어떻게 원치 않을까요? 아, 내가 멜론을 원치 않으니까 분명히 주님이 바꿔치기 해서 포도가 나왔구나. 이거는 이미 내가 예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상하지 않는 한, 원치 않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도권을 절대 뺏기지 않습니다. 여기 볼펜이 있는데, 여러분 알아맞혀보세요. 몇 바퀴 돌리는지 맞혀보세요. 몇 바퀴 하겠어요?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하죠. 나는 안 돌려요. 왜? 답을 수집하고 보니까 답 중에 없는 게 하나 있어요. 안 돌린다. 이게 없어요. 그래서 안 돌리는 거예요. 자꾸 주도권을, 사랑받은 내가 사랑에 보답한다는 것에 주도권을 안 빼앗겨야 뭐가 남아 있어요? 우리는 배신하는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 그 방정식에, 그 공식에 놓여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자, 오늘 강의 처음부터 해봅시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판단하는 믿음이라고 했죠. 그러면 믿음을 함으로써 나의 가치는 없어질까요? 믿음을 하면 할수록 나의가치는 계속 유지될까요? 계속 판단하려면 판단하는 주체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이 믿음의 주체는 창조 전의 믿음이 아니고, 창조 되고 난 뒤에, 그때 마귀도 창조되었어요. 마귀도 만들어졌고, 인간도 만들어졌고, 뱀도 만들어졌고, 코끼리도 만들어졌고, 만들어져서 이미 범죄 한 이후에 믿음이죠. 이 믿음을 지들끼리나 실컷 믿으라고 하세요. 문제는 영생이 없어요.
요한일서에서 주겠다는 영생은 태초에 있는 믿음이에요. 태초에 있는 믿음인데, 우리는 자꾸 뭘 관여하려고 하느냐 하면, 지금 있는 믿음은? 인간의 머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저를 만들었죠?” “어.” “만들었으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있겠죠.” “어.” “그러면 하나님의 요소를 잘 뽑아내서 한 데 모으면 하나님이 흠뻑 좋아하시겠죠?” 하나님이 아무소리 안 해요. “그럼 그거 드리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 때, 저 짐승같이도 아니하고, 저 코끼리같이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줬다. 섬길 마음을 가지고 하게 되면 그게 믿음이다.
이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의와 가치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연결, 접촉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보고 믿고, 판단이니까. 보고 믿고, 만져서 믿고, 듣고 믿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복되다 할 때, 너희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 불신앙만 마음껏 표출해낸다는 거예요. 그 중의 하나는 가룟 유다고, 중요한 것은 그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말릴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누구도 사탄을 이길만한 힘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식당에서 우리가 여기 있고, 옆에 하얀 양복 입은 사람이 있었고, 여기에 예수님이 오시니까, 너희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할 때, 여기 커피마신 아저씨가 “예수 당신은 뭔데 우리 인격을 모독합니까?” 할 때, 우리가 여기서 말릴 위인이 있어요? 없어요? 말리지 않았다는 말은, 목자가 치니 양이 흩어졌다는 말은, 전부 다 한통속이라는 이 말입니다. 전부 다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받았다. 한 통속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은 “배신하자!”에요. 더 구체적으로 하면, “끝까지! 갈 때까지 배신하자!” 그걸 달리하면 주님 끝까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원하면 절대로 천국을 주지 않습니다. 주지 않는 방법으로 우릴 천국에 넣어주십니다. 우리는 성격이 급해서 내가 원하는 천국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는 천국에 넣어주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천국은 가짜라고 치고, 그럼 주님이 원하는 천국을 한 번 맛보면 안 되겠습니까? 니게 니 소원이야? 제가 원하는 겁니다. 니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
왜냐, 그런 식으로 천국가면 천국 가서 자랑하니까. 내가 주님 천국을 커닝을 해야지. 니 몰랐지? 나는 간절히 기도했더니만 미리 앞서서 보여줘 가지고 나는 그걸 꼭 유지해서 들어왔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걸 달란트비유라고 하는데 주께서는 달란트 유지하면 복 준다고. 세상에! 달란트비유는 다 엉터리비유에요. 달란트비유라는 것은, 없는 것을 내놓아라. 이게 달란트비유에요. 예수님 쪽에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새로 생긴 것을 내놓아라. 이 말은 새로 생긴 것은 주님의 움직임의 공로기 때문에, 면류관을 다 반납하죠. 이게 달란트비유에요.
신랑이 왔으면 신부를 만나면 되잖아요. 일부러 안 와요. 그것은 뭐냐 신부의 결혼함은 신부가 이쁜 것이 아니고 기름 준비가 아니고, 신랑의 지체함이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근원적인 원인제공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처녀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우리가 봤던 요한복음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정리하고 강의마치겠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배신의 여지를 가지고 사랑을 해야 되는데. 인간의 사랑은 해준 만큼 더 얻고자 해요. 내가 월급을 이만큼 갖다 주는데, 니가 그걸 가지고 나를 무시해? 돈 왜 줬어요? 돈 준 것이 아니고 고무줄 준 거죠. 줘놓고 땡기는 거예요. 받은 것은 몽땅 나의 소유가 되는 거예요.
근데 가룟 유다가 그렇게 예수님을 슬퍼한 이유가, 평소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자로 생각하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는 내 거야. 나한테 유용가치가 있어. 내가 나를 천국 보내는데 당신은 쓸만해. 근데 베드로에게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가서 천국에 넣어줄게. 계속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거예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줄곧 원치 않는 길로 해서 천국 가게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것은 사랑의 배신자. 배신자여~ ♬ 사랑의 배신자로서 가기 때문에,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을 때, 그 죄인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배신자 역할에, 죄인 역할에 조금도 소홀해서 스스로 주님을 배신하는데 반성의 여지를 가지지 마세요. 그 정도로 우리가 아직도 훌륭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반성함으로써 반성하는 자체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칸트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든 근대의 윤리도덕은, 근대에 자본주의가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에 경제구조와 합당한 도덕 윤리가 같이 만들어져요. 그걸 만드는데, 거기에 필요한 주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계몽주의라고 합니다. 그냥 교양이니까. 계몽이라고 하는 것은, 빛으로써 눈을 뜨게 하다는 뜻이에요. 계몽주의의 가장 쉬운 예는 아프리카는 조져야 된다. 무식한 아시아는 식민지로 만들어야 돼. 왜냐하면 거의 무지한 짐승 같은 인간을 신의 사명을 받은 똑똑한 우리가 계몽해야 되기 때문에.
한국의 계몽주의자로 제일 유명한 작가는 바로 심훈입니다. 상록수. 한국 사람은 다 압니다. 그게 농촌계몽이에요. 공동체 운동도 어떤 계몽. 희생으로써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거예요. 나하나 희생하면 어떤 괜찮은 거 나오듯이. 계몽주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입니다. 칸트라는 사람의 주장은 딱 하나에요. 모두를 속여도 딱 하나 속일 수 없는 것은 내가 착함을 행한 이 선한 동기는 어떤 경우라도 이거는 사라지지 않아요. 왜? 하나님이 나한테 그 마음을, 절대적인 도덕률을 주셨기 때문에.
따라서 칸트는 이야기합니다. 교회 나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있는, 장착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사랑을 일깨워주시면, 교회 꼭 그렇게 나와서 미치지 않더라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위하십니다. 새로운 칸트 종교의 시작입니다. 이거는 맹자의 성선설과 유사하죠.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데 환경이 나쁘다보니까, 악해졌으니까,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거예요.
도 닦는 거예요. 도만 닦으면 거울에 먼지 하나 안 보이잖아요. 훅! 훅! 불어가지고 탈탈 다 털어내면 다시 맑은 명경 같은 주님의 하나님의 형상, 어린양의 형상을 본받게 되면, 주께서 그거 공자이야기나, 맹자이야기나, 칸트 이야기나, 그것가지고 오늘날 교회에 전부 다 동원시켜놨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교인들이 뭐 평소에 자기 원하는 것이 뭐가 있어요? 신이시여, 어느 정도 착하면 천국 넣어줍니까?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절로 아멘! 영어로 에이멘! 에이멘! 할렐루야! 막 터져 나오죠.
거기다가 만약에 복음 전한다고 여러분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이라고 하면, 저놈 끌어 땡겨! 내가 말해놓고 니 혹시 이단교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막 공격하는 거에요. 주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데, 니가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으라, 이제 어두움의 자식이 아니고 빛의 자녀니 날마다 새로운....이렇게 분명히 나오는데, 이걸 왜 안하느냐? 이걸 왜 무시하느냐?
그 모든 말씀은 원치 않는 가운데서 주어집니다. 세상에! 부부싸움이 사랑일줄 꿈에도 생각 못했죠. 1과 1이 아니라 누가 존재한다? “둘 다 배신자야. 입 다물어!” 하고 끼어드신 예수님 이 하나 됨으로써, 싸우던 말든, 하나님보시기에 하나 될 수밖에 없는 부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뭐 이렇게 저렇게 해도 주 안에서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주안에서는. 이것이 바로 원치 않는 길, 창세 이전에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았던, 그 사귐의 믿음이 선물을 통해서 선물로 받게 되면,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이미 금메달 손에 쥐고, 재방송 보는 그런 느긋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