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6 요한1서 시카고강의2-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여호와가 사탄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보세요.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밤,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장자들을 무자비하게, 얼마나 효심이 강한지, 공부를 잘하는지, 그거는 일체 보지 않고 그저 죽이는, 그래서 사무라이가 그렇습니다. 무조건 죽입니다. 이유도 없어요. 그냥 죽여 버립니다. 나중에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처음부터 너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니가 죽는 데에 있어서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그런 뜻이에요.
여호와를 만났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근원적인, 나를 가치 있게 보는 모든 뿌리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거예요. 일말이라도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긍정할 만한 모든 근거를 싸그리 전부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살하지? 자살도 못하게 만들어요. 누구 맘대로 자살해? 자살도 못하게 만든다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짜증나가지고, 신이시여! why me?왜 하필이면 나를? 왜 접니까? 졸음운전 때문에 사고 난 그 상대자가 왜 접니까? 라고 하나님한테 그 이유를 묻게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묻는 것은 정답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컨택, 접촉했다는 관계가 중요하죠. 접촉했다는 관계가 중요해요. 누가 유리 하냐, 불리하냐는 더 이상, 접촉한 순간, 그걸 유리한 접촉으로 이제는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접촉 그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는, 보물이 들어있는 보따리가 들어오는 거예요. 보따리가. 이걸 나한테 얼마나 유용하게 쓸 것이냐 안 쓸 것이냐는, 그것은 우리한테 쓸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는 것은, 내가 죽었다, 살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컨택 되었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그걸 강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리스와 함께 내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바로 얘들아! 주님이 나와 접촉했어. 라는 거예요. 내가 이제부터 착하게 사느냐, 나쁘게 사느냐 하는 그 책임을, 접촉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나한테 묻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죄인의 괴수로 살래.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고 얼마나 완벽하냐를 나한테 따져 묻지 마라. 그렇게 따져 묻는 것은 뭐냐 하면, 컨택 이전에, 하나님이 찾아오기 이전에, 너 혼자 나를 믿는 신자가 될 때는, 나한테 선한 것이 복이 온다는 그것이 나에게 유리함으로 작용해서. 성경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교회 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고, 거기서 내가 칭찬 받는 것도 의미가 있고, 천국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했을 때나 있는 이야기지. 컨택 돼버리면 그런 것은, 이거는 내 소관이 아닌 겁니다.
그럼 하나의 방법이 뭐냐, 여호와의 밤이 뭐냐, 이겁니다. 아, 두 번째 시간이 더 어렵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여기 있다가 되죠. 자, 첫째 시간 지나갔는데 잊어버렸나 봅시다. 여기 컵이 있다. 우리는 컵이 있으니까 맞다고 했죠? 맞다고 했는데, 앞에 뭐가 생략되었다고 했습니까? ((내가 보니까)) 컵이 여기에 있네.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여기 컵이 있든 포도가 있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반드시 사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전에 뭘 주장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단 말이야. 내가 여기에 살고 있단 말이야. 제발 나를 좀 무시하지 말라는, 이것을 전제로 깔고, 우리 가정 행복해. 우리 애들 행복해. 이거는 애들이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애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누가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평가도 내가 평가하고, 판단도 내가 판단하고. 결정도 내가 결정하고, 선택도 내가 선택한다는 거죠.
현대 철학에서는 그걸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데, 주체라는 것은 시장에서 물건 고를 때, 거기서 주체가 형성돼요. 애가 두 살 되기 전에는, 애야, 그거 하지 마! 그거 찌찌야. 이거 해. 세 살 네 살 되면, 이리와 봐 여기 분홍색하고 파랑색하고 어느 것 할래? 선택권을 애한테 맡기죠. 애는 고민합니다. 파랑 것을 해서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냐? 분홍색을 해서 자랑할 거냐? 옳지. 분홍을 하면 나에게 이쁘다고 하겠지. 이쁘다고 하면 나에게 의미 있는 칭찬이 오겠지. 그럼 나라는 존재는 나를 믿을만한, 가치 있는 신자로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엄마, 나 분홍색. 그럴 때 주체가 최초로 형성되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이것을, 최초의 자아형성을 1년에서 3년으로 봐요. 근대 교육 심리학의 삐아제 라는 그 사람도 1년에서 3년을 최초의 자아 성숙기로 보는 겁니다. 7살 때는 마지막에 마무리가 되고. 사춘기라는 잠복기가 되면서 성인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두뇌라고 하는 것은, 원숭이는 난지 3개월 만에 형성되지만, 인간은 29세 때까지, 20대까지 두뇌의 피질부분이 계속 발달해가지고, 피질부분이 발달한다는 것은, 인격성이 계속 멈추지 않고 발달해서 완성되어 간다는 거죠. 그럼 이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게 과학이잖아요. 과학은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하냐면 있음에서, 이걸 변동해서 개선시켜요. 개선해서 더 나은 있음이죠.
근데 이 과학자가, 이 철학자가, 이 문학평론가가, 그 귀한 딸자식의 있음이, 누구 이야기냐 하면 이어령씨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집회 많이 하잖아요. 그렇게 미국에서 판사까지 하고, 판사하고 암에 걸리고 목사까지 하고, 그리고 누구 친구냐 하면, 허운석 선교사님 친구이기도 하고. 그런 귀한 딸이 꽃다운 나이에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신이 없다고 하던 이어령 교수가 어떻게 됐어요? “나는 생명을 만났다.” 결국은 무슨 이야기에요? 생명을 배웠다? 아니에요. 생명을 연구했다? 아니에요.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니에요. 뭐라고 하는가, “만났다.” 아까 이야기한 접촉했다. 나는 생명을 만났다.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내가 신자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믿음의 대상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던 거예요. 너무 완고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믿는 신자가 여기, 내 믿음은 나를 믿는다고 확증이 됐는데, 어디 바늘구멍이 들어갑니까? 이용할 대상이죠. 신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든, 내가 더욱더 나답게 되기 위한 이용가치가 있을 뿐이지. 이미 신자는 난데. 예수도 나를 위해 이용할 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 오천 명이나 따라왔습니다. 왜 따라 온지 알아요? 예수님을 믿었어요? 아니에요. 너희들은 나 자신만 믿는다고 확인하면서 오천 명 따라왔고, 예수님께서 죽음이야기 하니까, 살과 피 이야기 하니까, 오천 명 가운데 하나도 함께 하지 아니하고 다 가버렸어요.
요즘 말로 하면 교인들이 오천 명이 와서 예배당을 지었는데, 예배당 짓고 난 뒤에 한 명도 오지 않은 것 하고 같은 거예요. 한 명도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너희들도 갈래? 너희들도 가지 왜? 너희들이나 쟤들이나 똑같이, 너희들도 나 이용하려고 붙어 있잖아? 나 믿고 천당 가려고 있잖아? 무슨 집단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름대로의 통일적인 현실관으로, 천국도 자기의 통일된 현실관으로 하나의 요소로 집어넣고, 나는 죽어서 좋은데 갈래. 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나를 계속 이용해먹으려고 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컨택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컨택 해서 좇아올 수 없다. 이거는 너희들의 문제가 아니고 도리어 아버지와 나의 문제의 결과물로 니가 내 앞에 선택되었지, 절대로 니가 나를 선택한 적도 없고,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왜? 인간은 누구만 선택한다? 나는 끝까지 나만 선택하기 때문에. 누구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용할 뿐이죠. 아쉬울 때는 예수 믿다가 여유생기면 다시 멀어져요.
끝까지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인간. 그런데 그 인간이, 사르트르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 인간이 죽음이라는 것이 왔을 때는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왜 오느냐, 이유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은 나중 문제고, 유보하고, 사는 문제나 해보자. 그런데 그들은 알아요. 유보된 그것이, 사는 문제, 진리라고 우겼던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어렴풋이 알아요. 백날 진리라고 하지만 인간은 어느 순간에 교통사고 일어나서 한방에 가버리면 내가 쌓아올린 모든 명예와 명성과 재산은 한 순간에 다 날아가죠. 거기에 나온 단어가 무슨 단어냐 하면 허무입니다.
이 허무를 B.C 5세기경에 기원전 500년경에 그리스에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극. 그리스의 3대 비극이 처음 나온 겁니다. 오이디푸스가 그런 이야기에요. 모든 인간은 신에게 대들다가 깨갱했던 이야기에요. “인간아, 니 꼬라지를 알라. 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로 신전에 적혀있던 말을 추방되었을 때 그걸 인용해서 한 거예요. 인간아 니 자신을 알라. 니 자신이 뭐냐? 니가 비극적인 존재인 것을 알라. 그러면 그 이후에는? 나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무지로 끝나버려요. 모든 학문은 몰라. 모르는데 왜 사는가, 그냥 사는 거야. 그냥 살 때까지 뭐 가보는 거지 뭐. 그냥. 대책 없음. 누가 살래? 몰라. 목적은? 몰라? 죽고 난 뒤에? 몰라. 그냥 살아있으니까 그냥 살아있는 본능대로 루터는 그걸 관성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움직이게 되면 스톱하기 전에 계속 움직인다는 운동의 제일법칙이거든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이미 자기는 자기를 믿는 신자니까. 이건 양보 할 생각 없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존재하지 않음.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 모든 문제가 뭐부터 출발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음부터 출발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올 때,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일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열두제자가 다 왔을 때,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는 말씀을 여러분들 다 아시죠? 열두제자가운데 예수님 믿었던 사람 있습니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열두제자는 백날 내 눈으로 보고 만져봐야 도망치게 돼있어요. 왜? 인간은 자기가 신자기 때문에. 이용할 가치 떨어지면 언제든지 쓰면 뱉고 달면 삼키게 되어 있어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그 이름도 거룩한 베드로. 천주교에서 성자로 치는 그 베드로가 쓰면 뱉고 달면 삼킨 우리의 모델케이스였습니다. 모델케이스였어요. 인간이 아무리 배신해도 베드로만큼 배신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잖아요. 장모가 병이 나았잖아요. 오병이어의 맛있는 빵,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고기하고 아침 뷔페 다 먹었잖아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갖 귀신을 쫓아냈잖아요. 혜택 입을 것 다 입어놓고, 그리고 칭찬까지 받았어요. 니가 교회의 반석이다. 칭찬까지 다 받아놓고.
그리고 한 번 배신한 것도 아니고, 세 번 배신했고, 그 배신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을 ▢. 이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저주한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참 용기도 좋아. 나는 죄인이라고 시작했던 그 어부의 생활을 생각하면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되는데,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그 저주한 그것이, 그 사람이 천국 갔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존재관리해서 못 가는 나라에요.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내 엉터리 믿음을 수정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냥 존재하세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너밖에 모르죠. 아, 네. 잘 알겠습니다. 너밖에 모르는 식으로 사세요. 쭉 가세요. 그냥 관성의 법칙대로 쭉 가세요. 뭘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그러지 말고 그냥 쭉 가세요. 그냥 쭉 사시고 그냥 가세요.
다만 이건 알아야 돼요. 내가 무지한 채로 쭉 가야 됩니다. 무지한 채로. 나보다 몇 배 똑똑한 사람이 내린 결론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면, 우리도 모르는 채 쭉 가시기 바랍니다. 뭐 안다는 생각하고 그런 것 없어요. 왜 어차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자칫하면 내가 지옥 가잖아요?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쭉 가라하는데, 그냥 쭉 가면 되는데, 또 뒤돌아서고, 자꾸 back해가지고. 그냥 사시는 대로 쭉 사시라니까요. 쭉 사시라는 말이죠.
이 말은 뭐냐, 나에게 관심두지 마세요. 어차피 모르는 것. 내일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특히 그리스 문학에서 나중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철학이 나올 그때, 플라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가면이에요. 페르소나persona, 가면. 인간은 모두 다 가면을 썼는데,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얼굴이 없다는 거예요. 가면 벗기면 뭐가 나오는 줄 알아요? 가면2가 나와요. 가면2 벗기면 가면3가 나오고.
그 가면을 누가 줬느냐,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주위 사람들이 나한테 세뇌주고, 학습해 준 거예요. 계속 하라! 하라! 학습하는 겁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아. 우리 집안에 살 것 같으면 너는 계속 그렇게 해야 해. 그럴 때, 이걸 ‘옳다! 진리다!’ 진리는 뭘 준다? 당근을 줘요. 진리가 아닌 것은 맴매해요. 채찍. 채찍과 당근으로 모든 인간들은 어릴 때부터 양육과 훈육을 받게 되어 있고 학습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크면 친구와 교사를 통해서. 더 크면 목사님을 통해서 학습 받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나의 주체의 삼겹살 껍질을 형성합니다. 층층이 껍질을 형성하는 것을 푸코는 고고학이라고 해요. 고고학의 특징은 껍질 벗기는 작업이에요. 제일 위에 있는 최초의 3기, 그 밑에 시대, 그 밑에 시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고고학이. 같은 시대 층에 있는 유물은 다른 시대 유물과 비교해서, 이 시점에 나왔으니까 중생대 3기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인간도 똑같아요. 내가 난데없이 아픔을 겪을 때는, 그 아픔을 겪을만한 이유가, 나는 잊어버렸는데, 일곱 살 때 어떤 사건을 경험한 것이, 그동안 지층 밑에 있었는데, 어떤 친구가 무심코 단어 하나 내뱉었는데, 그게 되게 아픔으로 다가온다 말이죠.
우리 누나 같은 경우는 어릴 때 잡채 먹고 체한 적이 있어요. 그도 지금 67살인데, 아직까지 잡채를 못 먹습니다. 트라우마에요. 트라우마 라고 하는 것은 잠시 과거의 상처가 기억나는 것이 트라우마가 아니고 과거의 상처가 내 몸의 증상으로 나타날 때 그걸 트라우마 라고 해요. 몸의 증상으로 나타날 때. 몸의 증상이 없으면 트라우마가 아니에요. 노이로제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아픈 기억들이 몸의 증상으로 나올 때, 신경질환으로 나옵니다. 신경질환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정신질환은 치료가 가능하지 않아요.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때그때 약물로 덮는 수밖에 없어요. 치매 같은 경우는 두 종류가 있는데, 정신적인 치매 같은 경우는 어떻게 손 댈 수가 없어요. 치매엔 약도 없고.
층층이 누적이 되어 있죠. 기억의 층. 이걸 파헤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고고학이라고 했죠. 고고학인데, 어릴 때부터 층층이 있던 이 주체가 크면서 한 꺼풀 두 꺼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는 것이 자꾸 새로운 양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가면입니다. 가면 뒤에 본 얼굴 있다? 인간은 영원히 본인 얼굴을 본인이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본인이 몰라요. 그때그때 변장할 뿐인데, 이 변장하는 것을 연극단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출입니다. 연출의 귀재. 연출의 귀신. 모든 인간은 연출에 어설프면 출세를 못해요. 아부를 하던 뭘 하든 간에.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자기 연출이에요.
이 모든 원인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첫째 시간에 제일 먼저 한 게, 내가 여기 있다 에서 나온 거예요. 이유도 모르는 채 무조건 있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있고. 있으니까, 왜 태어났는지 그거 잘라버리고, 죽어서 어디 가는지 그거 잘라버리고. 김밥이나 토스트에서 끝을 자르잖아요. 맛있기는 그게 맛있는데, 상품가치가 없으니까, 여기 잘라버리고, 저기 잘라버리고 몸통만 있잖아요. 고등어 머리, 꼬리 잘라버리고 몸통만 먹잖아요. 인간의 몸통을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존재하매 나는 내 종교의 신자고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비-존재.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존재의 세계에, 있음의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 목수의 아들이다! 자, 목수의 아들이라는 뜻을 풀이하겠어요.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이미 뭐가 존재한다? 목수 아버지 요셉이 존재한다. 너는 존재하는 것에서 나온 그 존재의 자식이야. 너는 대단치 않아. 너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니가 있음에 있다는 말은 너 먼저 이전에 있음이 있을 건데, 그게 요셉이라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고, 니 엄마 이름은 마리아가 있다는 말이죠.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왔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내 아버지는 여기에 없다. 내 아버지는 여기에 없다는 거예요. 존재가 없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존재에요. 제가 철학적인 용어를 쓰는 것 같지만 성경적이에요. 이 세상에는 내 아버지가 없다 이 말이죠. 더 나아가서 없으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무지가 나옵니다.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모른다 하는 거예요. 그 모름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존재한다는 그것이, 니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 라는 뜻이에요. 나는 여기 있다. 컵이 있다. 컵이 있네. 니가 컵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해봅시다.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곤충의 구조는 3개로 되어 있다. 머리와 가슴과 배로 되어 있다. 꽃은 4개로 되어 있어요. 암술과 수술, 그 다음에 꽃받침, 그 다음에 꽃잎. 여러분 이거 초등학교에 자연시간에 배웠죠? 이거 옳습니까? 그럼 말을 바꿔서 이게 우리한테 유용합니까? 유용하죠. 과학은 뭐다? 유용성이에요. 과학은 유용성이죠. 천문학자들이 이 세상의 별을 다 압니까? 모릅니까? 다 모르죠. 왜? 새로운 별이 나타나니까.
그러면 현대 천문학자들이 다 모르는데 왜 연구해요? 그 별 가운데서, 지구나 환경이 안 좋았을 때,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 되는, 가장 지구를 닮은 그런 별을 찾는 이유가 뭐냐, 뭣 때문에? 유용성 때문에. 마션. 화성탐사 영화가 마션이에요. 인터스텔라도 있죠. 모든 과학은 유용성이에요. 무엇에 유용합니까? 죽는데 유용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살아있는 것을 기어이 질질 끄는데 유용하잖아요. 있음을 계속 있게 하는.
그런데 있음을 왜 포기 못하죠? 이유를 몰라요. 분명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왜 포기를 못하죠? 이유를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과학, 철학자들은 몰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본능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걸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 그런 본능을 가졌죠? 질문이 또 나오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죠? 잘못하면 얻어맞습니다. 그거. 여자를 왜 좋아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몰라서 묻나? 이런 소리 하면서 그냥 넘어가요.
아르케arche, 근원이라는 뜻이에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 잘라내고 시작한 거예요. 우리는 나한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다 잘라냈어요. 근데 유용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 진리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꼴 보기 싫다고 내쫓은 그 자식이, 진짠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땅에 와서 쫓겨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근데 그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요한일서가 아니라 요한복음은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비-존재로 시작하는 거예요.
너희들만 있는 있음이 있는 세계에서, 그거는 있음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있음의 용어를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있음의 용어가 바뀌어 집니다. 어떻게 바뀌어 지는가, 세 글자로 바뀌게 됩니다. 어두움으로 바뀌어져요. 어두움으로 바뀌어 지는 이유가 있음에 대해서 여기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빛이 올 경우에만 있음이 어두움이 되지, 빛이 오지 않는다면 있음은 절대로 어둡지 않다. 자체발광이라는 말이 있죠? 자체발광. 잘생긴 남자가 지나가면 뭐라고 합니까? 자체발광 이라고 하죠. 미인 지나가도 자체발광이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신이고 자기가 태양이기 때문에 자체발광 하는, 자체적인 태양열발전소가 있어서 그 에너지 가지고 평생을 먹고 사는데, 그것도 60지나면 보톡스 맞고 수리하고 바빠요. 잡아 땡기고, 올리고 뭐. 위아래 해가지고. 또 그런 노래가 있어요. 근데 갑자기 있음 자체가 어두움이라는 것은, 다른 빛이 오는데, 아까 점선으로 했죠. 여기 있음에 해당이 안 되니까, 이게 뭐냐 하면 비-존재가 되는 거예요. 존재 아님이 되는 거예요. 존재 아님. 있음 아님이 되는 거예요.
있음 아님이 되니까, 여기서 어려운 게, 있음 아님이 되면 이쪽 동네에 오지 말고 그냥 살지,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왜? 여기에 대한 답이 뭐냐 하면, 접수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조직폭력배용어인데, 이 바닥에 오지 마라. 여긴 우리가 접수한다고 하잖아요. 접수한다는 것은 무장해제 시키고 접수하는 것.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에요. 접수하는 거예요. 어느 세계를? 비-존재가 있음의 세계를. 그러면 비-존재가 예수님뿐입니까? 놀랍게도 예수님과 비-존재로 또 등장하는 것은 누구냐 하면 진짜 숨겨진 존재,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부터 시작하게 하는 그 존재는 바로 피조물인 악마, 타락한 천사가 예수님이 나타날 경우에만 같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악마가 있다? 없다? 없다. 평소에 귀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있음의 세계에서는 없어요. 근데, 나의 있음의 세계가 흔들릴 때, 그때는 아이고, 이거 귀신 아닌가? 갑자기 자기 존재에서 믿을만하지 못할 때, 예상치도 않았는데 벼락치고 갑자기 잠자고 있는데 뭔가 꽝하고 문지방이 흔들릴 때, 아이고, 이거 귀신 왔다. 이러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존재가 내 존재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입장이니까, 이거는 반드시 외부세력을 해서, 외부 변수 하나를 설정해야 합계가 맞는 이야기가 돼요. 원인, 결과가 이게 논리가 되려면, 나로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여기에 귀신 존재 하나 불렀잖아요. 그렇지만 자기 존재는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흔히 교회 가는 신자들은, 신자 개념이 중요해요. 제가 말하는 신자는 무엇과 반대되느냐 하면 성도의 반대말을 신자라고해요. 모든 인간은 신자이기 때문에. 갑자기 개념 자체가 혼선되기 시작하는데.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성도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고 이미 거룩 된 존재, 이미 끝났어요. 이미 작업이 만료된 그 자가 성도에요. 성도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성도 아니고, 애썼다는 것은 존재의 미흡함에 불과해요. 존재의 미흡함은 그냥 계속 뭔가 믿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은 진짜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고, 그냥 트라이Try하는, 시도해보는 거예요. 이덕화가 메리야스 선전하는 것 있어요. 벽 치면서. 트라이. 단어 몇 개 알지도 않는데, 벌써 다 나왔어요.
신자의 반대말은 성도입니다. 신자는 노력하는 반면에 성도는 노력 끝. 이제는 베케이션vacation, 방학이에요. 결국은 노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남이 해줬기 때문에, 유유자적 누리는 것만, 참 배짱이 대단하죠. 근데 이러한 모든 순서가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하나의 배우들이 등장해요. 연극무대에, 연출무대에,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고 여기에 열두제자가 악역, 허장강 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나쁜 일만 골라 했거든요.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삑(☓), 니는 사람도 아니야. 너를 저주해! 라고 한다면 그 뒤에 줄줄이 걸쳐있는 모든 인간은 당연하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렇게 그림 그립니다. 인간은 이미 존재기 때문에, 여러 번 나오는데, 존재는 의미, 의미는 유용성, 유용성은 믿음을 만들고, 믿음은 진리죠. 현실은 진리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예요. 그 세계에 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너희끼리 존재하든 그런 거 아무 관계없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 집이 중요해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교회 목사들 지가 당회장으로 있는 한 용서하지 않잖아요. 끝나고 난 뒤에는 망해버려야 돼요. 자기가 있는 한, 이거는 나의 세계에요. 나의 세계. 내가 갑이 되는 세계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죠. 인간들의 현실은 뭐로 구성된다고 했습니까? 가정이 있고 애를 하나 낳으면 애를 하나 재료로 삼아서 짜깁기 한다고 했죠. 그래서 나의 영원한 보자기라고 했죠. 근데 나중에 세월 지나면 그 보자기가 뭐로 변한다? 빵꾸가 나요. 구멍이 나요. 애들이 전부 다 백조가 되어서 날아가요. 이거는 내 가정, 내 울타리라고 했는데, 그 세계가 전부 다 헛수고에요. 그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자기는 자식을 위해서 다 했는데, 자식은 다 도망가 버렸어요. 그럼 나를 보호하는 보자기 아직도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서도, 뻔히 알면서도 그 외에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실선의 세계로 되어 있는 진리, 다른 말로 하면 현실입니다. 현실인데, 뭘 추방하느냐, 점선의 세계, 환상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를 꺼지라고 하죠. 예수님도 꺼져가 되고, 또 뭐가 꺼져가 되죠? 아까 했잖아요? 비-존재에서? 악마죠. 악마도 꺼져가 되죠. 귀신도 안 믿어요. 과학시대에서는. 하여튼 종교적인 용어나 영적세계는 다 꺼져! 라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럴 줄 아시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 맞서서, 이걸 잘 그려야 해요. 실선에서 뭐로 나온다. 점선으로 나오죠. 주께서는 점선으로 해서 뭐로 나오느냐, 꺼져가 아니라 침투. 어디로 오느냐, 현실세계에 침투했습니다. 나가실 때는 뭐로 나간다? 점선으로 나가버려요. 그 이야기가 바로 요한일서 1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거 이야기하는데 한 시간 반이 됐어요.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이제 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이 이해되시겠습니까? 딱 보는 순간, 제가 이해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잖아요? 답변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제가 상황 극을 벌이면서 답변하도록 할 테니까. 지금 누구한테 질문할지, 이제는 지목해서 질문할 거예요. 자, 이제 상황 극을 제가 실제로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냐 하면 기독교집안도 아니고 불교집안도 아니고 종교라는 것은 관심이 없다. 아무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다는 것은 나한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의미가 없다는 것은 나 자체로서 의미가 충족되니까.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나만 사랑하니까. 나는 내가 즐기는 재미로 사니까.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길에 가는데, 바람이 불어서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2절이 보도블럭에 떨어져 있어요. 무슨 종이인지 주워보니까 글자가 쓰여 있어요. 요한일서 1장 1-2절이 쓰여 있습니다. 근데 나는 뭐냐 하면 관심 없어요.
자, 질문 들어갑니다. 그 쪽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자, 1번. 그냥 지나간다. 2번. 관심 둔다. 몇 번 이겠어요? 1번이죠. 왜냐하면, 이미 관심 둔 것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답변을 내가 해버렸는데. 이게 뭐냐 하면, 실선에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점선으로, 환상의 세계로 왔잖아요. 이게 계속해서 이 방법을,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예수님께서 계속 실시한다 이 말이에요. 계속 실시하는 거예요. 교회 장로가 되었다. 근데 요한일서가 날아왔다. 의미 있다? 의미 없다? 의미 없는 거예요. 장로 된 내가 날 믿는다. 장로 된 나를 믿어요. 이 말이 중요하지 않아요.
만약에 이것을 믿게 되면, 나라는 장로 된 실선이, 사실 실선이 아니고 완전히 파괴되어서 점선에 포함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내 힘으로써는, 내 능력으로써는, 그러한 권한이, 이거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습니다. 장로 된 지 몇 시간 되었다고, 이 의미 있는 장로직을 치워버려요? 점선이, 이 환상의 세계가 비-존재가 의미 있다고 하려면 장로가 됐든, 신학박사가 됐든, 목사가 됐든, 이거 의미 없습니다가 이거는 상쇄가 늘 풍성히 돼야 돼요. 지금 회사에 취직이 되어 있잖아요? 근데, 요한일서 1장 1-2절이 날아왔다. 그러면 이게 뭐냐, 취업되고 안 되고 무슨 상관이 있어?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시죠?
애가 공부를 잘한다. 근데 요한일서 1장 1-2절이 나한테 날아왔다. 나한테 받아들여졌다. 그러면 애가 공부 잘하는 것이 의미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거는 존재가 노력한 것이 아니고, 컨택,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가 본다는 것의 의도를 바꿔서 이제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너를 주시한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수련회 교재에 나왔던 단어, “응시”입니다. 바라봄. seeing. 누군가 부담되게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부담되게. 시선은 상대방에게 시비를 유발합니다. 만약에 쳐다보면, “뭐야? 그냥 가던 길로 가시죠.” 시비 거는 조로 쳐다보면, “뭐? 불만 있어?” 이래 되는 거죠. 커피숍에 앉아서 아메리카노 한잔 시켜놓고 있는데, 저쪽 테이블에 앉은 아가씨가 자꾸 본다 이 말이죠. ‘누구지? 이 상황, 이 시추에이션은 뭐지? 커피 값 떨어졌단 말인가? 관심 있나?’ 그래서 다가가서 “아가씨! 관심 있습니까? 왜 쳐다보십니까?” “그게 아니고...지퍼가 열려가지고...내가 도와 줄 수도 없고 해서..”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모르는데, 나는 의미를 모르는데, 저쪽은 이미 의미를 알고 있어요. 왜 쳐다보는지. 쳐다보는 것 자체가 컨택이에요. 쳐다보는 것만 해도 만남이에요. 다른 모임 같으면 다 같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자제를 해야 돼요. 이게 우리가 만난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응시하고 있음이, 점점 더 가까이 클로즈업 되면서 나한테 실험하면서 통일된 현실관에 군데군데 빵꾸가 터지기 시작 하는 겁니다. 뭐 보일러가 샌다든지, 좋은일 하나 생각하면 나쁜 일 둘이 생길까봐 미리 겁먹는다든지. 애가 성적이 올랐는데, 헌금을 만원 더 할까? 말까? 걱정이 생긴다든지. 자꾸 뭔가 좋은 일 생겨도 불안하고, 나쁜 일 생겨도 이 끝은 어딜까? 걱정이 되고. 알 수 없는 불안.
이게 존재가 미처 모르는 비-존재에 둘러싸인, 포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의 이야기입니다. 그걸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성령이 나오죠. 이 성령은 어떻다? 인간의 현재 과학책에 있어요? 없어요? 비-존재적이죠. 비-존재하니까, 이 세상에 귀신이 있어요? 없어요? 귀신 없어요. 과학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다 배제되는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 계속 비-존재적인 것을 문장에다 그 단어를 집어넣어요. 하나님 나라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인간의 상상에서 나온 겁니다. 그것은 실선에서 실선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거는 하늘나라 아닌 겁니다. 항상 하늘나라는 이 실선의 세계에서는 상상의 세계에요. 그 다음에, 29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경우에서 집주인 셉니까? 도둑이셉니까? 도둑이 세죠.
그럼 집주인은 사실은 도둑의 응시에 포위되었다 하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 포위되어 사세요. 누구의 응시한테? 주님의 관찰 속에 속하세요. 그게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표현 한 겁니다. 예수 안. 성령 안. 그냥 가던 대로 사세요. 뭘 느껴야 된다? 그냥 사시는 대로 사세요. 우리 인간은 절대로 못 고칩니다. 내 중심 절대로 못 고칩니다. “나를 닮아라.” 도대체 나를 닮으라는 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요. 내가 왜 미쳤다고 양보를 해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죽더라도 내가 나를 배려하고 내가 나를 관여하고 내가 제일 중요한데. 양보 못 할 것 같으면 양보하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래서 제 설교가 막 살라는 것이잖아요. 그냥 막 사시라고요. 하지만 무엇은 받아들여라? 무대에 비치는 스포트라이트, 방금 동남아에서 순회공연하고 온 가수가 무대에 서면 여기에 단독으로 뭐가 비칩니까? 스포트라이트 비치죠. 이 비치는 응시를 의식하시면 됩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중요해요. 니 또 잘못했구나? 매 맞아야 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응시하는 거예요. 니 참 고집부리고 가는구나. 그냥 지켜보는 거예요.
베드로가 저주할 때, 주께서 입 막지 않았습니다. 워워~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그냥 짓고, 닭은 닭대로 울고. 베드로는 짓고, 닭은 울고. 니 곁에 닭 울음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니 곁에 말씀성취 있다. 이 말입니다. 니가 먹고 마시는 것, 이미 말씀 안에, 이미 프로그램에, 시나리오에 다 짜여져 있다. 각본대로 가게 되어 있죠. 너의 실선의 세계에서는 내 할 일 할 뿐이에요.
아까 주체는 어떻게 생긴다고 했습니까? 내가 선택함으로 주체는 다시 확인이 돼요. 이건 내가 선택했어. 프로스트의 시에 보면 내 숲속의 길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가던 길이 있고 안 가던 길이 있다. 나는 안 가던 길로 간다. 청소년들이 의미도 모르면서 액자에 걸어놓은 시가 있어요. 사람은 가던 길 가면 안 되고, 안 가던 길로 가야 비전이 보이고 용기 있는 인간이라는 거예요. 청소년들을 격려하면서 그런 시를 말하거든요. 선택하는 길이든, 선택하지 않는 길이든, 좁은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한 길 밖에 없어요. 내가 선택한 길과 남이 선택해 준 길.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남이라고 할 때, 그게 남이 누군지를 몰라요. 왜? 실선이기 때문에. 어쨌든 통일된 현실관을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못 벗어나도 괜찮아요. 스포트라이트 있으면 되잖아요. 따로 놀면 되잖아요. 따로. 이게 복음이에요. 따로 놀면 돼요. 따로. 어떤 사람이, “주님이여! 포도를 먹을까요? 복숭아를 먹을까요? 자두를 먹을까요?” 언제 주님께서 그런 것 기도하라고 했어요? 그냥 니가 땡기는 대로 먹어. 땡기는 대로. 먹었을 때, 포도를 먹고 난 뒤에 주께서 포도를 먹게끔 너를 사용한 거예요. 그게 응시입니다.
실상은 내가 선택했다는 것이 실상이고, 결과는 뭐냐, 보이지 않는 환상 속에 계신 분이 실상을 이용한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관계 또는 관계성입니다.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 또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바로 거룩이에요.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거룩한 거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거룩하지 않은 나를 거룩케 하시는, 주님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 낚시 줄 잘 안 보이죠? 그것을 인정할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 관계를 보기 때문에 뭘 치워야 돼요?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그것도 결과적으로.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쳐다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를 쳐다볼 의미도 없고, 의미 없으면 유용성도 필요 없고, 유용성이 없으면 나한테 존재가 아닌 거예요. 나는 나의 존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인생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응시에 의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그 이상으로 끌고 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시가 되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이게 어렵고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여튼 국만 시키지 말고 밥 하나 더 시켜가지고 국밥 말아서 잡수라는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국이 전부에요. 그런데 주께서는 밥을 준비해가지고 말아먹으라는 거예요. 말아먹을 때, 국이 맛있다 하지 말고 밥이 맛있다 그래야 되죠. 주님의 거룩이 내 거룩보다 더 세고, 주님의 의가 나의 의를 깔고 뭉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결과가 될 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에는 존재만 알았던 인생관이 이제는 뭐까지 아우른다? 주님의 세계까지 아울러서, 세상 보는 눈이 이거는 무한대까지 열려지는 거예요.
이제 죽고 난 뒤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에, 태초부터 알게 된 거예요. 태초부터 있던 것부터 알게 되는 거예요. 내가 없던 시절, 만들기 이전부터 세계를 이미 다 같이 그걸 함께 알게 된 겁니다. 뭐, 알게 되면 행동이 바뀌어야 됩니까? 행동이 안 바뀌어요. 안다고 해서 행동이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누적된 고고학층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겁니다. 노출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점잖은 척 하죠. 나이 칠십 넘으면 지퍼도 안 올리고, 발 냄새나도 누구 배려하지도 않고, 술 먹고 길에서 고함지르다가, 여기 도착하자마자 우람한 시카고 경찰 다섯 명한테 체포돼가지고. 내 옆에 있던 한국 사람인데, 나이 한 75쯤 되었나, 술 먹으면 곱게 먹지, 옆에 외국인 여자를 추행을 해가지고. 자기는 그냥 희롱만 했다고 하는데, 외국인 여자는 추행했다고 해서, 비행기 내에 있는 승무원한테 조서 받고 내려서 경찰한테 인계되고. 무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내가 거룩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내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은, 이게 고고학적으로 옛날 어릴 때의 버릇들이 나이 들면 이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대로 또 나옵니다. 계속 또 나와요. 그렇게 할 때,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하게 하셨구나. 뭐 좋아라고? 비-존재가 존재보다 우위에 있고, 선점하고, 먼저 존재했다는, 비-존재가 존재보다 먼저 있었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목적을 두고,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이거 두 시간 동안 강의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2절까지 밖에 못했어요. 3절, 4절은 무작정 기다려야 하고, 하고 안 하고는 주의 선택이 어떻게 되는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갈 길을 쭉 가시면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자, 3절 봅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그래 이 말은 뭐냐, 이 보고 들은 바라는 것은 우리의 역사 속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과거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거고. 지나간 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맞죠? 과거가 존재합니까? 현재만 존재하지, 과거가 존재하느냐, 보이지 않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요한일서가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너희들 동네는 존재하지 않지만 너희들 동네를 포위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지금 주님이 활발하게 살아서 일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 하려 하노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제 조금 이해되십니까? 존재, 비-존재하니까 확 이해가 되죠. “영원한 생명”(2절), 아, 이 땅에 없는 거구나. 쉽잖아요. 그 다음에 “너희에게”(2절), 주님은 우리의 현실 세계를, 여기를 주시하고 있고 관리하고 있구나. “생명의 말씀”(2절), 아, 이 땅에는 생명의 말씀이 없구나.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한테 믿음이 없구나. 믿음 없는 채로 그냥 가시기 바랍니다.
뭐가 믿음이냐 하면 나한테 없는데,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된 곳에는 나한테 없는 것이 다 들어 있고. 주께서 원하는 거룩도 있고, 믿음도 있고, 완전한 율법지킴도 있고, 천국도, 영생도..이걸 관계라고 하는데, 이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말씀. 이걸 그냥 말씀이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그 중보자적 기능을 알려주는 겁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