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언약설교4(십자가는 과정인가 전부인가)-영영한 언약(렘32;40-42)이근호110622

아빠와 함께 2013. 2. 12. 09:07

영영한 언약 (렘 32: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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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1-06-22 21:10 
영영한 언약

2011년 6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40-42

(렘 32:40, 개역)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렘 32:41, 개역)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렘 32:42,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종 심듯이 유다 나라 속에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심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대한 조치는 오직 하나, 멸망 받게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다 나라는 바벨론이라는 거대 제국에 침략을 받고 포로 잡혀 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를 야기 시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때는 다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을 유다 나라에 담는데 그 그릇에 해당되는 것이 언약입니다. 이 언약 앞에 ‘영영한’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는 곧 언약의 기능이 한 번만 적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적용시킨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결코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조석으로 바뀝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인간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시킨다고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바벨론이라는 우상숭배 나라의 포로 잡혀가는 신세로 이어집니다. 곧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요 벌입니다.

말씀 자체에 문제가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기억력 따라서 말씀을 지켰다 못지켰다 로 판정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수시로 변화하는 인간을 언약요건에 맞추어 영원히 고정된 대상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죄인으로, 사망에 갇혀 있는 자로, 저주받을 자로 규정하는 방식입니다
. 인간이 어떤 변화를 보인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때로는 착하고 때로는 악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언약에 와서 그렇게 규정하면 그것이 영원한 인간의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언약이 오기 전의 언약들은 영원치 않다는 말입니까?

형태는 일시적으로만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 언약의 바탕에는 영원성이 깔려있습니다.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이 모두가 형태는 달라도 그 언약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완성을 향해 이끄는 것은 모두 마지막 언약인 예수님의 새언약의 위력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새언약, 이외의 언약의 언약은 형태상 모두 인간을 상대로 한 언약입니다. 하지만 새언약은 예수님만을 상대로 펼치시는 언약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의 주되심’이란 진공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언약을 자기 위주로 이해했다가 멸망으로 치닫게 된 현실을 염두에 둔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정신과 자기 마음에 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의 대해서 이용하려고 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상대하게 됩니다. 즉 이웃을 대하면서 이웃에게 나타내는 행동이 자신의 이해득실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 이웃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고서는 하나님과 상대해서 자기에게 구원이란 이득을 챙기려는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언약 바탕에 새언약 정신이 깔려있다는 것은 모든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의의에 준해서 해석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장마비가 왔습니다. 우리가 오라고 명령해서 장마비가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비가 왜 오는 겁니까?

언약에 의해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덕분에 비가 하늘에서 오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이나 피조물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혜택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을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왜 인간의 행함이 거들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다 나라가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다가 멸망해버린 경우가 그 해답이 됩니다.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버텨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0:16-20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은 오로지 자기 편하는 것, 자기가 여유로워지는 것, 자신이 안정하게 보호받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이리 앞에 세웁니다. 그것은 새언약 상태가 결코 인간이 언약 지키는 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악된 인간인가를 폭로시키는 방향으로 증거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입을 막고 오로지 예수님이 하실 말을 전하게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와중에서 제자들은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이 새언약 성취방식입니다. 고린도전서 2:8-11에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 모든 말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전부가 우리 인간을 죄라고 규정짓고 오직 말씀 성취는 함께 계신 예수님에 십자가 에 의해서 달성됨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 이외에 알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6-25 17:39 
116강-렘32장40-42(영영한 언약)1106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2장 40절에서 4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6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2:40-42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전혀 손해 보지를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농사에서 모종하듯이, 41절에 있는 대로……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라고 해서 모종하듯이 일방적으로 심어주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심게 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만 자라나게 되겠지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완전히 무시를 당하는 것인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라고 나오실 것인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의 마음과 정신은 어떻게 되는가? 37절에 보면 “보래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 유다나라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식으로 왔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나의 정신과 나의 마음,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노를 자초하고 분노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정신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모종 심듯이 심어서 거기서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히면 그것이 바로 천국인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무엇이 느껴져야 되느냐하면, 왜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고 그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요인인가, 그것이 마음껏 덩달아서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기존에 갖고 있던 우리 마음과 정신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하는가를 절실하게 느끼는 가운데 ‘역시 천국은 주님의 정신과 주님의 마음이 결정하고 오직 그 열매만 주께서 원하시는구나.’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중심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유대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의 모종을 담는 그릇이 우리 속에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40절에서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언약 앞에 무슨 말이 붙어 있느냐, 그냥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영한 언약’ 요새 말로 하면 ‘영원한 언약’이 심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한 언약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한 언약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작용이 영원히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발생이 되어야 되지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한 예를 들겠습니다.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우리가 구원받고는 싶은데, 우리 힘으로 구원 못 받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피를 흘렸기에 그것만 받아들이면 더 이상 십자가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전에 십자가마을에 있던 목사가 마을을 떠나면서 ‘이 근호 신학의 문제점’이라 해서 제시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어디가 틀린 겁니까?”라고 저에게 질문을 준 거예요.


그 질문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면서 생각해봅시다. 십자가마을을 떠나면서 그 목사가 한 주장이 뭐냐 하면, ‘십자가는 한 번으로 되었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얼마나 누릴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자.’라는 생각을 할 때 그 목사님의 생각이 어떤 생각이냐 하면, 지금 자기 구원 챙기는데 급급한 거예요. 지금 자기가 아쉬운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아쉬운 것은 뭐냐, 행함으로 구원 안 되니까 뭔가 구원을 챙겨주고 도와주면 고맙겠습니다, 해서 일단 챙기고 나서부터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싶다는 쪽으로 가고 싶다는 말이지요. 결국 그 사람이 말하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기억력에 의존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기억력이라는 것은 새벽기도 나올 때 다르고 오전 오후가 다 달라요.


사람은 영영하지를, 영원하지를 않습니다. 수시로 변합니다. 수시로 변하니까 아침에 은혜 받은 것이 오후가 되면 날아가고 사라져버려요. 출발점이 뭐냐, 자기 구원하나 받아 챙기면 끝난다는 거지요. 자기 구원 받아 챙기면 끝나는 것, 이런 육적인 사고방식, 그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겁니다.


관심이 주님의 주되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하나님 이용해서 자기 구원받아 챙기면 그 다음부터는 홱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겁니다. 이런 생각의 오류의 핵심이 뭐냐,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회용으로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언약입니다. 영원한 언약은 그 언약이 담고 있는 것을 영원토록 반복해서 쉬지 않고 계속 발생시킨다는 의미에서 영원한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에 왔어요. 영원한 언약이 영원한 효과를 내게 되면 늘 상 조석으로 달라지는 우리 안에 영원한 요소가 장착되게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약속이 오게 되면, 사람은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 다른 것을 일소에 부치고 영원히 똑같은 요소를 심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너는 뭘 해도 죄인이고 뭘 해도 죽었다.’ 하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에서 끊어져서 생명나무쪽으로 갈수 없다는 그 영원한 요소를 우리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고정을 시켜버립니다. 주께서 그렇게 고정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잘할게요. 잘할게요. 또 잊었습니다. 다음에는 꼭 주의 은혜 기억할게요.’ 하는 식으로 우리는 수시로 조석으로 변하는 우리에다 스스로 영원한 것을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스스로 안담아도 이미 주님께서는 규정을 그렇게 했습니다. ‘예배한다, 찬양한다, 기도한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그런 것, 진실합니다, 성실합니다.’ 하는 것들은 몇 분 가지도 못해요. 십자가 마을 떠나는 목사가 이렇게 저를 욕했어요. ‘이 근호 신학은 2초나 3초밖에 못가는 신학이다.’ 라고 했어요. 제가 은혜 받는 것을 두고 2초, 혹은 3초, 깜빡깜빡 한다고 하니까.


그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준 것, 2초나 3초가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어요. 인간이 영원히 자기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하는 그것이 영원한 거예요. 그 영원한 요소에 주께서 은혜 주실 때 그 순간마다 자기 죄를 느끼는 겁니다. ‘아, 맞다! 영원한 것이 이미 나한테 장착되어 있지. 나는 뭘 해도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이 영원한 요소가 있는데도 나는 일시적으로만 죄인이고 착한 일을 하면 죄인이 아닌 줄로 알고 생각한 그것이 바로 죄구나.’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볼 때 우리가 죄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연구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그 모종, 영원한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그 들어오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언약과의 마주침에서 우리는 영원히 멸망될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성경말씀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유대나라가 멸망당했다. 그렇다면 그 유대나라 중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멸망당한 것은 우리가 멸망당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언약이 오니까 우리는 멸망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언약이 있는 이상 우리는 그 주어진 영원한 언약, 언약이 철수하면 우리는 또다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장착되어 있는 영원한 언약이다.’


그 언약을 이제 주님께서는 새 언약으로서 약속한 겁니다. 옛날언약,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들은 그 언약의 요소가 달라졌었어요. 대상에 따라서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도 변하는가, 라고 하는데 노아언약, 모세언약, 아브라함언약, 다윗언약, 이런 언약 속에 제일 밑바닥에는 영원한 언약이 면면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어떤 대목도 문자를 살짝 들춰봐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지만 문자를 들춰보면 그 안에 피가 담겨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이 세상 어떤 것도 예수님의 피 없이는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희생덕분에 모든 것이 그 덕을 보고 있다.’ 지금 장마 비가 오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이렇게 장마 비가 오는 거예요.


이걸 강감찬 장군도 몰랐고 세종대왕도 몰랐어요. 영조도 모르고 나폴레옹도 몰랐지요. 예수님의 희생덕분에 온 겁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이래야 돼요. 예수님의 희생덕분에 오늘도 살았는데 이걸 내 공로로 돌리는 내가 망해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이렇게 못된 나를 용서하지 마소서. 이렇게 못된 나를 왜 용서하십니까?’


우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아도 이미 언약자체에서 용서가 포함된 겁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고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로 골라야 되는 문제, 선택에 따라서 추가적으로 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이 들어오면서부터, 영원한 언약 그 자체부터 용서 안 받고 싶어도 천국 안가고 싶어도 가야만 되는 거예요. 구원은 우리 숙제, 내가 달성해야 될 내 숙제가 아니고 주님의 업무에 내가 말려든 거예요. 주님 앞에 내가 붙잡힌 겁니다.


이것은 빼도 박도 할 수가 없어요. 이집트 모래사막에 가면 그 어떤 것도 한 번 빠지면 도저히 못 빠져 나온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대요. 꼭 우리 신세가 그래요. 모래구멍에 빠진 신세가 우리 신세 같습니다. 언약이라는 깔때기에 빠져버리면 우리 주변이 온통 언약이라는 배경으로 다 바뀌어버려요. 언약으로 바뀌면서 그 깔때기의 면에 다 요한계시록의 글자가 죽 나열되어 있습니다.


성령받기 전에는 돈 만 오천 원 쯤 주면 사서 볼 수 있는 이 성경에 글자가 새겨진 줄 알았는데, 성령 받고 나서는 나를 둘러싼 그 깔때기의 벽면이, 나를 둘러친 그 모래구멍의 모든 모래벽이 전부 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다 섞여 있어서 그 모든 말씀이 오직 십자가를 겨냥해서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겨냥하는 말씀 안에서 허우적대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이 ‘목사님, 그거 거짓말 아닙니까? 너무 오버합니다. 과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게 오버가 될 수 있지요.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해서 그런 아이디어를 지어낼 수도 있는데 반드시 성령은 우리한테 먼저오신 것이 아니고 먼저 예수님한테 왔어요.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성령 받은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얼마나 허우적대는가를 보세요.


허우적댄다는 그것이 말의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이 병고치고 기적을 일으킬 때도 혼자서 하신 것은 없어요. 성령의 지시 아니면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니면 말씀도 어떤 기적도 베풀어준 적이 없어요. 심지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도 그냥 차 시간 되어서 오는 차 잡아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매’ 올라갔습니다. 형제들이 ‘예수님, 명절(무교절)이니 올라갑시다.’ 했는데 ‘때가 되지 않았다.’ 해놓고는 혼자 가버렸어요.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스케줄 따라 착착 진행된 겁니다. 그 스케줄 안에 뭐가 적혀 있느냐, 그 벽면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말씀이 다 때에 맞추어서 예수님 홀로 이루어야 될 것을 겨냥해서 쓰인 말씀이에요.


그러데 십자가마을에 있다가 떠난 그 목사는 뭘 모르냐, 중간에 예수님이 했다는 것을 빼버리고 하나님이 하신 것을 가지고 내가 어떤 이득을 챙기느냐, 지금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맞상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믿어줄게요, 피 믿어줄게요, 또 무엇도 다 할게요.’ 이제부터 더 이상 죽은 존재가 아니니 더 이상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죽는다는 것이 숨넘어가는 것을 가지고 죽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다 죽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예수 밖에 못나가요. 왜, ‘예수 믿었으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따로 놀게요.’ 할 수가 없어요. ‘이리와. 너는 못나가.’ 그 모래구멍에서 나갈 수가 없다니까요.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은 그 모든 말씀이 우리한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해당되는데 우리한테 해당되는 것은 뭐냐, ‘유다나라같이 네 정신과 네 마음가지고는 멸망당해도 싸다.’ 그런 취지로 성경말씀을 다 읽고 그 말씀을 어디로 가져가느냐하면 주님한테 가져가요. ‘그런 너를 너와 함께 있는 예수님이 그 모든 말씀을 다 이루어서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의인되고 구원받은 거야.’라는 그 현장을, 한시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이동하는 곳에 같이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우리 입에서 주님의 죽으심만 증거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것이 그렇게 불친절하게 느껴집니까? 지금 저는 나름대로 친절하게 한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은 자기가 자기세계를 따로 가진 채 남을 상대하듯이 상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웃과 상대하듯이 ‘식사하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는 독자적으로 자기자리에 자기밖에 없고 그 다음에 이웃이 되었던 예수님이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내 중심이고 내 마음이 계속 발생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유다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런 것에 계속해서 저촉이 돼요. 신약성경에서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영영한 언약이 와버리면 이제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내 중심과 내 마음은 멸망당할 죄밖에 안되고 우리를 통해서 이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는 마음껏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님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인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서에도 나와요. 요나 선지자가 자기는 부름 받았다고 까불거리면서 니느웨에 가서 멸망을 선포했는데 나중에 가면 누가 골칫거리고 문젯거리로 등장하느냐하면 니느웨성이 문제가 아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이미 구원받았다.’ 하면서 깝죽대는 요나가 문제인 거예요.


요나가 삐져서 나자빠졌어요. 니느웨는 회개하면서 감사하고 있는데 요나는 감사도 없고 삐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새 언약이라는 영원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성도는 죄인의 입장에서 세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해서 보내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은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이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외의 사람들, 권세 잡은 사람들이 되겠지요.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이리를 만들어놓고 그 이리 속에 양을 집어넣는 겁니까?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문제는 제자들이에요.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리를 이리라고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제자들은 편하게 살고 싶을 뿐이지 ‘나는 양인데 어디 이리가 없나.’ 이런 것은 제자들의 의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리 앞에 세움으로 말미암아 양이 어떤 점에서 양인지를, 어떤 점에서 자기가 양인지를 알려주는데 거기서 핵심적인 것이 뭐냐, 마태복음 10장 19절부터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니라.”


참 하나님이 짓궂지요? 제자들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아니면 군대가 있습니까? 그냥 아무것도 없이 예수님만 따라다니면서 벌벌 떠는 거예요. ‘너 예수쟁이지?’ ‘아닌데요. 저 아니거든요.’ ‘베드로 너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잖아.’ ‘아닌데요. 저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이런 겁쟁이들을 왜 이리한테 보내는 겁니까? 그것은 ‘내가 저 사람을 이겨서 그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서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라 네 속의 성령이라.’ 하는 주님의 함께 있음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서운 환경 속에서 파악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고 쉽게 고개 숙이고 쉽게 아부해버립니다. 돈 벌이에 바쁘면 교회도 안 나오지요. 양이고 이리고간에 돈만 있으면 최고예요. 돈 많은 이리도 아주 순한 양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돈 만 있다면 양이고 이리고 없어요. 그것이 우리 정신이고 우리 마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 정신과 우리 마음은 내 속 편하고 내 돈만 들어오면 그것으로 땡인데 장땡, 최고라는 말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정신이고 우리 마음이에요. 우리를 예쁘다고 해주면 그것이 여호와의 증인이든 통일교든 가리지 않고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겁니다. 이것이 우리 정신과 우리 마음이에요. 우리한테 불리한 일이 있으면 예수고 삼위일체고 하나님이고 다 던져버리고 ‘예, 예예예!’ 얼마든지 고개 숙일 만반의 준비태세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누가 아시는가, 주님이 아십니다. 이미 주님은 유다나라를 멸망시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최선을 대해서 지키려고 했던 유다나라도 멸망했거늘 하물며 율법도 없고 성경도 안보는 이방인인 우리가 얼마나 세상권세와 권력을 그리워하고 그 앞에서 고개 못 숙여서 환장한, 세상권력과 돈과 정, 여기에 목매고 그리워한다는 것을 뻔히 아십니다.


기존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교회는 정주고 정 받는 거예요. 이것을 아는데 30년 걸렸습니다. 교회는 예수고 하나님이고 필요 없어요. 정주고 정 받는 데입니다. 서로 시간 잘 보내고 친구 만나서 우정 쌓고 서로 다독거려 주고 심심하지 않게 놀아주고 내 가슴 아플 때 잘했다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그 이상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복음이고 십자가고 예수고 언약이고 다 관심 없습니다. 애 데리고 교회 가면 당회장 목사부터 시작해서 ‘아이고, 똑똑합니다, 잘생겼네, 피아노도 잘 치네, 나중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큰 일 하겠다.’ 하면 누가 그 교회 가지 말래도 아침 일찍 애 세수시켜서 주일학교 보냅니다. 교회란 그런 곳이에요. 정주고 관심 가져 주면 교인 모으는 것,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런 식으로 집단화 되어 있는 여호와종교로서 완전히 단단하게 굳어진 사랑의 공동체인 그 유다나라에서 열두제자를 뽑아서 그들이 왜 이리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주는 일에 세웁니다. 그들은 평소에 원했던 그 권력자들 앞에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하면 그들에 당하지 않을까, 그들 앞에서 겁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제자들의 정신과 마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이고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인겁니다.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이 튀어나온다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간단한 문제입니다. 제가 질문하고 제가 답변할게요.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정답은,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으로 푸는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해석 못한다.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모든 성경말씀은 아무리 지켜도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해석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제 멋대로 지켜봤자 그것은 유다 꼴로 멸망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성령이 없는 곳은 빈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의 영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이니까 자기편하고 누가 관심 가져주고 칭찬해주고 말동무해주고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정을 주고 사랑을 주면 그것이 최고인거예요. 그런 쪽으로 다 성경해석하면서 자기 딴엔 성경말씀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마음으로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노라.” 하시면서 10절에서 ‘오직 성령으로 십자가를 아는데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한다.’고 하면서 11절에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뭘 모른다? 십자가를 모른다. 십자가를 모른 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전부 다 엉터리고 이단들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알고부터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성경해석은 책속에 있는 성경해석이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깔때기 같은 모래 홀 속에 빠진 것처럼 이 모든 성경말씀은 나한테가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 질 수밖에 없는 그 일을 위해서 총 동원되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 다, 모든 성경말씀이 전부 다. 그래서 성경말씀 들출 때 마다 예수의 피가 다 묻어 있어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왜 주님이 십자가를 졌는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졌지.’ ‘그러면 우리는 애초부터 무엇이었던가?’ ‘죄인이었지. 그렇다면 죄인주제에 감히 성경말씀 지켜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안 되지.’


영원한 언약이 우리에게 오니까 그것이 살아서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성경해석 참 쉽지요? 정말 쉽지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정신과 하나님의 마음을 영원한 언약에 담아서 심어준다는 이것이 에스겔 36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것이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신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하나님의 깊은 것,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 십자가,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종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우리가 행함으로 얻으려 하는 하나님의 의와 천국과 용서하심이 오직 십자가 피 안에만 담겨서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 언약 속에 갇히게 돼요. 모래구덩이에 갇히게 되는 것처럼 그 피안에 갇히게 되면서 모든 것을 피에 근거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장마 비가 왔습니다. 누가 오라고 했습니까? 장마 비가 차창을 때리면서 주룩주룩 내립니다. 우리는 졸지에 장마 비속에 갇혔어요.


새 언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그 사랑 안에 우리가 갇힌 셈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 언약으로 주신 이 놀라운 능력과 사랑을 모르고 주의 희생도 모르고 내 힘으로 내가 버틴다고 생각했던 이 오만함을 용서해주시고 그것이 죄라고 알게 해주시고 이런 죄까지 이미 구원받고 살아가는 입장인 것을 오직 주님의 희생에만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