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2012년 봄 특강-언약b

아빠와 함께 2014. 1. 2. 02:54

20120505 특강 - 언약b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2

첫째 시간에 인간이란 말을 철학가도 사용하지 않지만 인간이란 말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용서 입은 자, 용서받은 자, 자비를 받은 자로 표현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냥 ‘나는 인간이다’라고 해버리면 자꾸 뭘 고집하느냐 하면, “나는 인간이야. 예수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할 거야.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간섭하지 마.” 나라는 것을 강조하게 돼요. 누가 개라고 했습니까? 나는 인간이라는 자체가 성경에서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성경에서 의미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줄 아셔야 돼요. 저 자동차는 굉장히 맛있다. 앞뒤가 안 맞지요. 자동차가 빠르다는 말 되는데 자동차가 맛있다는 건 의미가 없다니까요. 나는 인간이다. 의미가 없다니까요. 용서받았어, 안 받았어? 용서받았어. 그때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항상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모습들은 나 말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변화를 유발했을 때 그 변화가 내 몸을 매개로 하여 발산될 때 우리는 언약적으로 의미가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인간이라는 걸 이제 생각하지 말고 용서받은 자로서 밥 먹고, 직장 나가시고, 용서받은 자로서 그림 그리시고, 노래 부르시고, 잠자고, 티비보고. 드라마를 볼 때 용서받은 자로 보란 말이죠. 그림자를 보든지. 그냥 보지 말고 용서받은 자로서 화폭에 그림을 그리란 말입니다. 그게 뭐 어려워요. 성도한테는 어렵지 않아요. 환자 보실 때 용서받은 자로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받은 자로서 본다는 말은 너나 나나 죄인이다 이 말입니다. “너 용서 안 받았지? 그냥 지옥 가는 거야.”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대하란 말이죠. 대통령을 만나든, 국회의원을 만나든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받은 자가 됐다는 것은 나라는 것에서 접근할 길이 없어요. 우회해야 돼요. 돌아가야 돼요. 길이 나 여기 있고, “나 용서받은 자 될래.” 이런 직통 길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게 언약에 가서 새 언약을 이루신, 완성하신 분에 의해서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용서해주는 자로 할 때 우리는 1, 2, 3, 4 거쳐서 우리는 용서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이 구조로 돼있어요.

내가 직접 성경을 보고 실천에 옮겨버리면, 나는 인간인데 성경을 실천에 옮겨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되고자 한다. 계속 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니까 이런 언약적인 노선이 빠져 있으니까 이것은 자기가 교주가 되죠. 이것은 마아슬루라는 심리학자의 욕구설에 보면, 다섯 가지 중 제일 마지막에 인간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제일 밑바닥에 생존의 욕구가 있어요. 인간은 다급한 것이 밥 먹고 사는 것, 잠자고, 아픈 것 낫게 하는 게 제일 기본적인 욕구 이것은 동물적인 겁니다. 인간의 두뇌의 시상하부에서나 일어나는 파충류적인 욕구, 그런 욕망인데 그게 단계가 높아 가면 대뇌피질로. 인간 두뇌의 진화에 의해서 커지면서 많이 채워지는 것이 자아실현, 나는 과연 나구나. 자기로 인하여 도취되고, 자기로 인하여 즐겁고, 내가 여기 존재함으로 행복한 것 심지어 내가 지옥 가더라도 고개 숙인 어깨를 다독거리면서 “걱정 마. 내가 너 따라 가잖아요. 지옥에서도 보살필게.” 하고 위로할 사람은 여러분? 아니죠. 나죠. 내가 나를 마지막 위로 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의 자아실현의 욕구. 불교가 마지막 도착점이에요. 성화론의 마지막   자기로 인하여 자아도취로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바로 언약계통에 들지 않기 때문에.   

내가 되고자 하는, 아까 한 것 다시 해볼게요. 인간 내부에는 시간성이 들어있다. 이걸 파노라마처럼 펼치면 과거-현재-미래가 나온다. 미래는 나의 꿈이고 나의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어떤 소망과 목적이 있음으로써 지금 내가 힘들어도 일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미래 때문인데 그 미래의 요소는 어디서 채워진다?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경험 가운데서 현재가 편집해서 만들어진다. 편집해서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내 욕망에 미흡한 것, 내 욕구에 만족스럽지 않는 것을 미래로 미루고 그 미래에서 내가 미처 못 한 것을 미래에 달성하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그 용기로서 미래로 달려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순점은 뭐냐 하면, 꿈은 절대로 이뤄지면 안 돼요. 꿈이 이뤄지면 그 다음에 자살입니다. 꿈은 새로운 꿈을 양생해내어 이쯤 되면 새로운 꿈을 제작해내야 돼요. 꿈은 절대로 꿈으로 남아야지 꿈이 이뤄지면 그 다음부터 더 살 이유가 없어요. 꿈 때문에 살았는데 꿈이 실현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그렇게 큰 절망 느껴요. 세리와 창기한테는 메시아 온 것은 기쁨인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한테 메시아 오면 안 돼요. 왜? 희망과 꿈으로서 백성들을 지배해왔는데 완료가 돼버리면 구라가 돼. 계속 미끼를 던져서 꼬셔야 되는데 만약에 지금 예수를 믿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교회 목사들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다 이뤄버리면 다 구원받았는데 미쳤다고 헌금하느냐고. 그래서 돈 안 내고, 봉사 안 하고, 전도 할 테니까 교회가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구원은 받았지만 봉사 안 하면 하늘나라 갈 때 팬티 바람으로 갑니다. 상급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영혼을 장악하죠.

그러면 구원을 받아놨지만 교인들에게 자아실현의 욕구는 남아있으니까 이걸 남보다 뛰어나게 봉사함으로써 남보다 뛰어나다는 비교의식, 남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교회를 더욱더 교회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목표로 작업을 걸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은 당신에게 꿈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청춘의 꿈은 하나님에 의해서 달성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죠. 용기와 꿈과 긍정적인 의미를 계속 부여하는 겁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하죠. 잠언서에 나오죠.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여덟 번 일어서라 또 넘어지게 돼있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백구십 번 용서하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겠어요? 안 되지요.

이렇게 해서 언약적으로 용서 입은 자로 볼 때 이것은 내가 처음 출발할 때 나는 용서받아야 되겠다는 인간을 여기서 삭제됩니다. “너는 용서 입은 자라는 결과물이 되어야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용서하고 싶어요.” 주께서 그 입 다물라. 나는 천국 가야 되겠습니다. 그 입 다물라하고 천국 넣어주죠. 너에게서 출발한 그런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너의 꿈에 불과하고, 너를 천국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꿈이거든요.

이게 대조가 되거든요. 나에게서 나오는 나의 미래, 이것은 철거대상이고 주께서 허락한 것은 나의 미래가 아니고 예수님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의 미래에 우리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특수한 용어가 동원됩니다. 그걸 예수님에게 하는 범위가 확장되어서 들어나 봤습니까? ‘예수 안’이란 용어가 등장해요. 예수 안에서 의입니다. 너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 예수 안에서 너는 교회가 되었다. 예수 안에서 너희는 형제니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되 예수 안에서 사랑하라. 아내는 예수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예수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라.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된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이라는 것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여기 누구 몸이 우선입니까? 예수 몸이 먼저 있죠. 예수 몸에서 확장된 영역과 너의 몸에서 확장된 꿈 영역과 교체해야 된다는 겁니다. 교체할 방법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내 몸에서 나오는 영역 안에 예수고, 하나님이고 좋은 건 다 집어넣는 장바구니에 담듯이 좋은 것은 다 집어넣어요. 성경에 나오는 좋은 용어들 다 집어넣는다고.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 할 것이 없느니라. 하여튼 좋은 것은 다 집어넣어요. 집어넣다보니까 엉뚱한 마귀가 한 말도 집어넣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게 마귀의 말인지 주님의 말인지 분간도 못하고 다 집어넣어요. 그것도 집어넣지, 먹는 날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여튼 사람들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권력의 장을 확장시켜놓고 집어넣는데 여기다 예수마저 집어넣을 때 그것은 너의 안이지 예수 안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슨 수로 바꿉니까. 바꿀 재주가 없는데.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려면 그동안 내가 펼쳐놓은 나까지 따라 나와요. 내가 만약에 담요 위에 넘어서면 담요 놔두고 나 혼자 일어서면 좋겠는데 그 담요가 나의 배설물로 만들어놓은 과거의 흔적이기 때문에 내가 일어서면 담요도 따라서 일어서기 때문에 담요가 질질 끌려온다니까요.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 내 과거의 미흡한 것을 전제로 해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파악하기 때문에 제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응답을 파악할 수 없어요. 일이 안 됐는데 기도하니까 응답이 됐구먼. 그럼 일이 안 된다는 기준은 누가 만들었어요? 내가 짜놓은 판에다 거기다 빡세게 기도하니까 응답되었다 하니까 그것도 사기라. 그것도 조작된 거고.

그래서 내 몸을 예수의 몸으로 바꿀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바뀌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성경에서는 어떻게 돼있습니까? 마리아라는 처녀가 있어요. 저는 마리아라는 처녀를 생각할 때마다 구미공단에 열여섯 살 먹은 똑순이를 생각해요. 누나가 되어서 동생들 공부시킨다고 옛날에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래서 가난한 집안에서 공장에 보내서 자기는 공부 못하고 동생들 학비대려고 한 그 똑순이 있잖아요. 그냥 사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 몸에 임하니까 그때부터 마리아 몸이 어떻게 됐어요? 자기 과거의 미흡함에서 나오는 미래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이 출생한다는 예수님이 계획 잡은 예수님의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범위가 미리 앞당겨서 확장된 그물망에 말려든 거예요. 말려들다보니까 마리아 몸은 하나의 예수님의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배가 불러오네요. 요새 같으면 초음파검사해서 아들인지, 딸인지 할 텐데 이것은 부끄러워서 그야말로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분명히 마리아는 할 말 해도 될 입장이지만 차마 말을 못하는 거예요. 진짜 처녀기 때문에. 처녀 아닌 것은 할 말이 많은데 진짜 처녀라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오해를 해서 사랑하는 재벌 3세 남자친구는 떠나버리고. 논리적으로 그냥 불렀다는 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마리아의 임신이 납득이 안 된다는 말은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납득이 안 되게 돼있어요. 인간의 정자 2억 8천 개가 속도 경쟁하다가 나중에 도착할 때는 일등 하나만 남고 나머진 알아서 죽어버리고.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식의 생산인데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까 만약에 이걸 우리가 이해 못하게 되면 오늘날 성령 받아야 구원된다는 것도 구라가 돼요. “오늘 성령 받았습니까?” 이 말을 다른 말로하면, “애 뱄습니까?” 이런 뜻이에요. “무슨 애? 나는 기분 따라 가는데 뭘 애를 배.” “애 안 뱄어요? 그러면 마리아 계통이 아니네. 그러면 지옥 가야 되겠네.” 그렇게 된다니까.

도저히 어떻게 논리의 다리가 중간에 끊어졌어요. 지혜롭고 똑똑한 인간에게는 감추시고 주님의 모든 구원은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말을 달리 하면, 구원의 능력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어도 좋다는 거예요. 단지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족하다는 뜻이거든요.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래 나 어리석어. 내 미친 놈 될게. 하지만 난 용서받았어.”

주님에 의해서 쓰여진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다른 기존에 세상적으로 내가 나 됨을 내세우고 싶었던 모든 재료들이 본의 아니게 그걸 놔야 될 것을 감 잡았습니다. 자기 자랑거리를 바구니에 집어넣었는데 용서받은 순간, 배가 불러오는 순간,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 그때부터 정작 내가 전하고자 하는 그것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교회가 크다, 우리 교회가 뭘 했다, 신앙생활 사십 년을 했느니, 그런 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못 되죠. 성경을 백독을 했느니, 신학박사가 몇 개니 그런 것도 전혀 자랑거리가 못 돼요. 다만 이것만 아시면 돼요. 개 같은 나에게 용서해주신다. 

그 점을 먼저 설명 드리고 아까 바꿔치기가 안 되는 걸 어떻게 가능한지 하겠습니다. 가락교회에서 한 건데 어려워서 그걸 되풀이합니다. 이게 피라미드입니다. 꼭지점이 있고 바닥이죠. 예수님께서 원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 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자기 영광을 버리고 오셨다. 그러면 여기서 피가 흘러내려갑니다. 여기에 세상적인 타일이 깔리죠. 타일보다도 화투가 있는데 피가 내려오면서 화투장을 다 까는 거예요. 다 까버리면 숨어있던 아담의 죄들이 번지면서 하나하나 까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닥까지 내려오죠. 그러면 전부다 피로 모든 것이 적셔지는 겁니다. 그걸 깔 때 노아 때는 물의 홍수로 하죠. 그리고 제사에서는 내 대신 누가 피 흘림으로서 그걸 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세상은 처음부터 죄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걸 인격화시키는 거예요. 이걸 개인화시키는 거예요. 세상의 축소판이 나고, 내가 세상의 부분이 되고. 세상 전체가 내 안에 전체로 포함되면서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는 식으로 내 안에서 세상 것들이 늘 순간순간 마주치면서 죄가 드러나고 피가 드러나는 거죠. 죄와 피가 드러나는 이것이 두 번째 하려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제가 던진 질문이 뭐냐 하면, 내 몸에서 나왔던 그 세계관 그리고 예수의 몸에서 나온 세계관이 무슨 수로 교체가 되느냐? 그것은 우리 몸에서 하게 되면, 내가 담요를 끌고 가는 셈이 되기 때문에 내가 담요를 가위로 뗄 수 없게 돼있어요. 그러면서도 바뀌지 않으면 천국 못 갑니다. 지옥 갑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이게 바꿔지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먼저 제시하고, 해답으로 예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신약에는 예수 안이고, 구약에는 이스라엘 안입니다. 그리고 신약보다 구약이 먼저 있습니다. 도저히 안 되는 사람들을 주께서 질질 끌고 가실 때 끌고 가는 원동력이 뭐였는가? 어떤 힘에 의해서 이방나라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아담의 자손으로 똑같은 성질, 기분 따라 살고, 지 마음대로 살고, 지 몸의 욕구대로 욕망대로 사는 것이 양쪽 다 똑같은데 어째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시고, 왜 다른 나라는 공격을 당하고, 멸망당하고, 땅에서 쫓겨나고 이스라엘은 특혜를 받는 입장이 되느냐? 이 이스라엘을 조사함으로써 오늘날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속 시원하겠죠.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껴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껴안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나는, 사실은 나만 죽는 게 아니죠. 예수님은 죽고 나도 죽는데 예수님이 나를 제치고 먼저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거기서 이미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깔려서 현재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 관계라 하죠. 내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내가 살았다고 자꾸 우기는데 사실은 내 안에 누구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이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되는데 그전에 먼저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보여주는 말이 있어요. 같은 장소에 동시에 두 물체가 놓일 수 있느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은 모순율에 의해서 이것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A는 A인데 A가 A 아닐 수가 없다. A가 A 아닌 경우는 잘못 됐다 이 말이죠. 진리가 아니란 말이죠.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모든 납득이 되는 것부터 출발하잖아요. 납득이 되는 것을 다 모으는 거예요. 한 각이 직각인 삼각형은 직각삼각형이고,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⁰며 세 변으로 돼있다고 납득이 되는 그걸 공리라 하는데 이런 진리를 기준으로 해서 진리지?    그러니까 진리에서는 하자가 없이 모순점이 없이 진리는 진리대로 뭉치면 그게 결국 진리의 탑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걸 거꾸로 이야기했는데? “네가 인간이냐?”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인간입니다. 개와 달라요.” “너, 인간 아닌데. 초장부터 달라.” “그럼 뭡니까?” “너는 죄인이야. 죄가 너를 만들었는데 왜 그걸 빼먹고 있느냐?”

그래서 동시에 같은 장소에 놓여져 있느냐 말이죠. 됩니까? 아니죠. 이 장소에 이게 못 놓이잖아요. 책 위에 놓여있지 이 장소는 아니잖아요. 이 장소에 놓이려면 책 비켜라! 그것도 동시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다고 했잖아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분과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자기는 지상에 있고 그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쉐마, 들으라는 그 말씀이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킨다고 생각한 겁니다.

문제는 율법이 있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있다 할 때 이 하나님은 네가 갈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확장시켜놓은 나의 다른 모습이에요. 내가 훅 바람 불어서 내가 안 되는 그것을 마저 채워서 나의 이상형으로서 신을 여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없지요. 예수님이 오시 전까지는 하나님은 없어요. 예수님에게만 아버지가 있고 나머지 떠오르는 하나님은 인간이 조작한 하나님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었던 거예요. 대신에 악마가 하나님 행세했던 거죠. 인간이 사탄의 행세를 해서 신을 믿었던 것을 예수님이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악마의 모습으로 온 거예요. 예수님이 악마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은 누가 고백하느냐 하면, 바로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야기한 겁니다. “저 예수란 인간, 귀신대장이야.” 바알세불, 귀신대장이라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한데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등장하면 귀신대장으로 오는 거예요. 이단이 고수 같이 교회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 맞아 죽어도 싸지 뭐. 어떻게 인간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행복을 빼앗아 갑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데 어떻게 나의 것을 강탈해 갑니까? 욥도 처음에는 오해를 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죄 없는 나를 이런 식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처참하게 망가뜨리고 나의 모든 것을 강탈해 가느냐 이 말이죠.

주님 하시는 말이, “내 것 내가 강탈하는데 네가 왜 말이 많아.” 그때부터 욥은 나라는 자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어떻게 하겠다, 내가 믿겠다, 내가 예수 사랑한다는 나 자체에서 고장 난 나에서 엉터리 하나님이 나왔고,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조작했다는 사실을 안 겁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겁니다. 그 바꾸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애굽이란 나라가 있으면 애굽이 부풀어 올라와서 이스라엘 됐어요. 처음에는 애굽 나라에요.

여호와증인의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이죠. 안식일 교인들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이죠. 감리교 교인들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북한에서 남조선이잖아요. 천주교 신자의 국적이 뭡니까? 대한민국입니다. 여호와증인이 태어날 때 당신 나라가 뭐냐? 내 나라는 김밥천국이라 합니까? 코리아라 하죠. 히브리인들 나라가 무슨 나라에요? 나라 자체가 없지요.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현재 애굽이란 나라가 있는데 나라를 만들 필요가 뭐가 있어요.

나라를 만드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소원이 아니고 누구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이죠. 하나님이 나라를 만들 때 나라에 필요한 백성과 구성요소를 나라를 만드는 그분이 모든 걸 제공하게 돼있어요. 오늘 집들이 하면서 “물은 사먹으세요. 한 컵에 오백 원입니다.” 하면 곤란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스라엘을 만드는 취지를 백성들은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그냥 끌려온 거예요. 가만있어 내가 만들게. 그 나라 만드는 방식은 히브리인들이 생각했던 방식과 달랐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소원은 뭐냐?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고 정권교체해서 이제는 새누리당에서 통합민주당으로 바뀌는 그 정도. 정권 바꿔서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살면서 편하게 억압받지 않고 사는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생뚱맞게 이 나라에서 나가자 하니까 그동안 정들었던 이웃들 그리고 돈 빌려준 것, 그때는 카이로 없었지만 카이로 근방에 개발한다고 해서 땅 사놓은 것 어떻게 할 건데? 어음 받은 것. 누가 항의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이여, 저 인간 죽여주세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힘들게 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 속에 시간성이 있고 시간성이란 과거-현재-미래로 돼있으며 우리의 미래란 내 몸에서 나온 나의 미래기 때문에 과거와 끊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힘들었으면 미래는 힘 안 드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소망과 꿈의 한계점이에요. 그 한계점을 주께서는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생뚱맞게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합니다. 그것도 띠 띠고 질질 끌고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길로 가는 겁니다. 이쪽은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사람 찾지 않는 좁은 길, 친구도 동기도 다 떠나고 주변도 아무도 없어. 다 가버렸어. 찾는 이가 적어요. 그리고 앞이 보이질 않아. 깜깜해.

우리가 “왼쪽 길로 갈까요? 오른쪽 길로 갈까요?” 물으면, 주께서 “위로 가라.” 이렇게 엉뚱한 소리한다고. “그러면 왼쪽 길로 갈까요, 오른쪽 길로 갈까요, 위로 갈까요?” 그러면 “밑으로 빠져라.” “그러면 왼쪽 길로 갈까요, 오른쪽 길로 갈까요, 위로 갈까요, 밑으로 꺼질까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할 게 아니야.” 하여튼 무슨 말을 해도 우리가 끄집어낸 모든 가능성을 주님께서 실망으로 바꿔버려요. 어떤 기도도 실망으로 바꾸면서 질질 끌고 갑니다. 기도응답 노리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기도응답 받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은 우리 예상 밖의 나라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그냥 죽음이 있는 곳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이게 오해하면 안 되는데 죽는 곳으로 간다면 하이데거밖에 안 돼요. 인간은 결국 죽는다. 누구나 알죠. 무슨 죽음입니까? 어린양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생겨나게 했던 그 지점까지 가는 곳 거기에 누가 기다리느냐? 어린양이라는 물체와 만나는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 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이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족하지 여기다 플러스 이름이 붙어있으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준 분이 따로 있을 것이고, 이름을 붙였다는 말은 그 이름을 불러줄 때만 그 하나님과 접속이 되지 그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부르면 어긋난 길로 간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거든요.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발성구조가 있고 혀가 있고 목청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 또는 ‘야훼’, ‘야’ 하든지, 예수 하든지 이렇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부르는 것으로 쳐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부를 때는 부르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놓고 네가 부를 수 있느냐고 측정하게 돼요.

백만 군대가 유다나라를 쳐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상식은 애굽나라, 그 당시에 미국이죠. 강대국을 의지해서 말과 용병을 돈을 주고 사서 전쟁을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모든 걸 놓고 찬양합시다. 이것은 바로 찬양해서 백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걸 좋아하지 마시고 우리는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우리는 질식할 정도로 “이제는 끝났어. 완전 종쳤어. 나의 모든 청춘은 여기서 끝난 거야.”라고 절망 상태에 이르게 해놓고 너는 이 절망 상태에서 뭘 제대로 찾을 것인가를 보는 거예요. 모든 걸 놓을 때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때 그게 이름이 야훼든지, 여호와가 됐던, 주가 되던, 예수가 되던 의미 없습니다.

그게 뭐냐? 주의 이름이 기능화 되어서 주의 이름이라는 안개 속에 흡수하게 되면 주의 이름만 높이는 존재로 그 순간만큼은 돌변하게 됩니다. 어린아이 젖먹이의 입으로서 강대국을 이기게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이 작용할 때 일어난 현상입니다.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혔다. 온 동네에 소문 다 났다. 그리고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 온 동네에 소문 다 났다. 이사할 것이냐, 말거냐? 요셉이란 남자친구도 떠났다. 사귄다고 돈 좀 들였는데 이미 약혼한 사이인데 저쪽 집안에서 어느 남자도 모르고 임신한 채 시집온다고 이미 찍힌 상태인데 그럴 때 마리아는 그런 상황마저도 주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는 사실을 마리아는 고백하죠. 뭐라고 합니까? “종은 주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처녀가 아기 낳는 게 마리아에게 적용되는 경우라면 지금 강의 들으면서 조는 것은 우리가 성령 받은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상황을 모델로 삼지 말고 지금 모든 게 꼬여서 돌아가는 이 모든 상황이 주의 이름이 스스로 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가는 환경이라고 받아들이면 그게 바로 주의 이름 안에서 주의 이름에 하나의 제작물로, 주의 이름을 위한 생산물로 되어가는 성령의 열매로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뭘 더 원합니까? 그냥 기분대로 살면 되지. 믿음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얼마나 믿어지지 않으면 믿습니다 하겠어요. 남 들으란 듯이. 기도할 때 두 손을 이렇게 모아야 할지, 손을 깍지를 껴야 할지, 꿇어앉아 해야 하는지 기분 내키는 대로 해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주일오후에 기도하라 하면 기분 내키는 대로 집에 가버리는데. 그것도 주의 이름으로 하시는 기능이죠. 마리아가 임신하는 것과 똑같은 경우란 말이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주의 이름이란 평소에 과거적으로 네 이름으로 해왔던 행세,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게 해서 네 힘으로 저 환경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살아계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쥘 수 없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홍해. 사람들에게 물 속에 집어넣으라는 거예요. 이걸 생각하면 제가 군대생활하면서 불현듯 전방고지 때는 1976년도 겨울, 술 처먹은 인사장교 대위가 와서 여자친구가 결혼하니까 화가 나서 사람들 다 깨워서 강 속에 옷 벗고 들어가라는 거예요. 죽는 줄 알고 들어가야죠. 졸병 때였는데 용감한 제대 말년이 “중대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괜히 나서서 구둣발로 차이고. 차고 난 뒤에는, 대신 죽으심이 그거에요. 지가 차고 나니까 분이 좀 풀린 모양이라. 고참만 차이고 다른 사람은 홍해 들어갔다가 나왔지요.

그런데 홍해에 들어갔다가 나온 게 아니고 지금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지 아니하면 뒤에 따라오는 애굽 군사와 함께 폭삭 망하는 거예요. 결국 애굽 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77년도 겨울밤 열 시에 들어간 것처럼 늘 홍해를 맞닥뜨리는 경우를 주께서는 강가로 질질 끌고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부딪치는 것은 어찌할꼬? 또 살아 돌아오고. “주님 이제는 제 힘으로 하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기도로 하겠습니다.” 하면 그것마저 해결 안 되는 경우를 또 만나게 합니다. 사업 쪽이 해결되면 자식이 아프다든지, 자식이 사고 쳐서 해결하면 남편이 가출한다든지. 우리는 가만있어도 자꾸 사고가 일어나면서 나는 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인지 아니면 주의 이름에 휩쓸려서 구원받고 있는지를 늘 우리에게 물어가는 그런 환경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긴 말을 두 자로 할 수 있습니다. 환경. 주님이 계시는 환경, 같은 지점에 동시에 두 물체가 놓일 수 없다. 내 몸이 놓여있으면 이 몸은 내 몸이고 절대로 예수님은 내 몸에 놓일 수 없다. 왜? 두 물체는 동시에 같은 공간에 놓일 수 없기 때문에. 이게 우리의 애굽적인 발상인데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하시면서 그 환경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주님이 일하시는 환경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주의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남의 신앙을 흉내 내지 마세요. 신앙에는 모델이 없습니다. 모델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주 수상한 사람이에요. 흔히 한국교회에서 모델로 제공되는 몇 사람 있는데 그 중에 세 사람 정도 있습니다. 한경직, 손양원, 주기철. 이것 악마적인 발상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사참배 안 한 것도 죄라는 것은 가르쳐야 될 건데 그 후배들은 신사참배 안 한 것은 선이고, 참배 한 것은 악이라고 우긴 거예요.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안 한 자기 자신을 경배한 사람이 돼버렸어요. 십일조하면 십일조하는 나를 경배하게 돼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제가 설교시간에 했지요. 헌금하지 마라. 주님의 헌금 덕분에 사는데 우리가 새삼스럽게 헌금해버리면 두 헌금이 서로 누가 더 세냐고 맞설 거잖아요. 이번 일이 잘 된 것은 내 헌금입니까, 주님의 헌금입니까? 서로 충돌이 생기잖아요. 내 헌금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헌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만약에 내가 헌금해버리면 헌금한 것은 주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자기의식의 더욱더 강렬하게 일어날 거란 말이죠. 헌금 안 해도 구원받는데 뭐하려고 헌금하는지 모르겠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환경이 있잖아요. 주의 이름이 손수 일하시는 환경이 있는데 이 안에서 내 몸 또는 내 이름으로 조성된 환경이 따로 만들어지게 되면, 여기서 나는 기도했습니다. 헌금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내 뜻대로 안 됩니까? 따로 자기 안에 자기 환경을 따로 해버리면 주의 환경이 모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십자가 졌으면 너도 똑같이 네 안에 십자가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날 따라오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너는 날마다 죽은 자로 살아가고 나는 죽은 너를 살려내는 산 자로 살아있고. 그래서 네 자랑하지 말고 날마다 살려내는 영이신 주님을 증거하라. 어떻게 살려내는가? 나로 하여금 내 이름만 고집하는 죄인인 것을 밝혀내면서 날마다 우리를 살려내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바로 주님의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아서 주님의 용서하심이 크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아야 남을 용서하지 않는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가 더 빛이 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용서를 해줘버리면 그건 용서가 아닌 것을 용서라고 과거 앨범에다 인증 샷, 자기가 용서한 것을 카메라로 찍어서 “나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고 그걸 찍어서 기념물로 간직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또 근거로 해서 복 달라고 내밀 거고.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네가 남 용서한 것을 잊으라고 하지 않고 너는 네가 남을 용서해주면 그걸 잊지 못하는 죄인인 줄 알고 내가 익히 알고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리 용서보다도 주님의 용서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을 용서해야 됩니다. 말도 앞뒤가 안 맞네. 우리는 남을 용서해줘야 이 용서가 주님의 용서와는 비교하기 위해서 용서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기분대로 사세요. 용서하고 싶으면 용서하고 말면 말고. 용서하지 말라 했다가 용서하라했다가.

애굽을 이스라엘로 만드는 원리를 아직 설명 안 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갈 때 이 원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어서 애굽에서 너를 분리해내었다. 구원이란 분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현재 죽었는데 살아있다. 이삭도 살아있다. 야곱도 살아있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을 너희를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만들어내고야 말겠다. 왜? 내가 개입해서. 이거거든요. 우리의 미래는 없어요.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한데 그냥 강제로 덮쳐지는 겁니다. 그 모델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에요.

그러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브람은 죽어줘야 돼요. 아브람은 아브라함 되어도 맨 그 몸이 그 몸이에요. 남들 보기에 그 몸이나 그 몸인데 같은 죄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요소가 여기에 가미되어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 몸밖에 모르는, 내 인생관, 내 담요밖에 모르는 나를 하나님이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려면 이 몸 자체로 쪼개지고 잘라지는 게 아닙니다. 이 몸 그대로 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기분대로 살게 되면 거기서 주께서 작용하는 아브라함으로 변한단 말이죠.

변할 때 여기에 무슨 요소를 집어넣느냐 하면, 어린양, 제사죠. 희생제물 받는 제사가 언약이란 형상을 집어넣으면서 언약이 네 속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고추 끝을 잘라서 아브라함을 언약의 사람, 개인에서 집단으로 바꿔요. 언약의 사람 개인을 언약의 민족의 아비로 바꿔요. 밑에는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그렇다면 아브라함 같은 작용이 일어난 사람만 아브라함 나라가 되죠. 아브라함 나라 제일 끝에 아브라함 자손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 아브라함 자손 여러 명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한 명이죠.

미래에 오실 그분이 인간 속에 있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현재-과거의 모습으로 거꾸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겁니다. 장차오실 예수님의 의가 죄 많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의인으로서의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안이라는 공간성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시간성으로 예수 안을 표현한다 이 말입니다. 예수 안이라는 것은 안과 밖이라는 공간성 표현이지만 그 표현된 용어는 사실은 미래에서 앞당겨서 주어진 시간성을 공간성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