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언약
2008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이사야 61:8-11
(사 61: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사 61:9)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사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설명하시는 대목에서 자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예를 드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역할을 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만들어냅니다. 즉 그저 여자였던 여인을 아내로 만드는 것은 아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아내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아내가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따로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즉 아내가 하는 일의 여부에 따라서 부부관계가 성립되고 지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됨에 있어 아내가 해야 할 것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남편은 부부되게 하는데 있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있게 관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시작된 부부는 남편됨으로 인하여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원한 언약’의 수행자도 아내가 아니라 남편에게만 국한됩니다. 즉 신부되는 아내가 영원한 언약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따로 해야 할 것은 전혀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봐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면서 아내를 배제하고 남편되시는 하나님의 작업으로만 성사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있기 전에 이 이스라엘에게는 한시적인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적인 언약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상식과 만나게 됩니다. 그 상식이라는 것이 바로 ‘바르게 살면 복받고, 악하게 살면 벌 받는다’는 상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마치 어떤 여인이 하나님이 점지해주시는 남편 말고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선택적 판단이 유감없이 마음껏 반영 되는 그런 남편을 먼저 만나는 경우와 같습니다. 자신이 납득이 되는 남편이고, 또한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남편이기에 반겼습니다. 하지만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쉽게 그냥 넘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언약을 고수했다고 여겼던 이스라엘은 자신이 고수한 그 율법으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호되고 철저하고 당하게 되고 징벌을 받게 됩니다. 즉 율법이 금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리어 하지 말라는 그것을 더욱 더 하고 싶은 충동이 부채질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초반에 보면, 이런 율법을 사도 바울은 옛 남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옛 남편은 신부에게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추궁을 실시하게 됩니다. 아내의 모든 행위에는 법이 달라붙어서 그 잘못을 끄집어내게 되고, 그 끄집어냄을 당한 죄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벌이 저주가 가해지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은 결코 영원한 언약은 아니라는 겁니다. 한시적이고 임시적으로 들어온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무서운 언약이 이제 없어진다는 이 사실만으로 아내 입장에서는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만약에 새로 들어온 남편이 이런 율법적 성향을 영원히 아내에게 강요한다면 이는 신부의 입장에서 더욱 난감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기 전에 한시적인 언약을 제공하므로 말미암아 영원한 언약을 받는 신부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자기 의를 주장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의에 대해서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아내가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거룩한 남편과의 관계가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전에처럼 율법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영원한 언약이 수립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마리아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영원함’의 개념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곧 상대적으로 여인이 떠주는 물은 곧장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이다 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즉 여인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늘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퍼고 또 퍼고 마셔도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자기로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진리의 성령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 때와 성령을 주시는 때와 신부에 대해서 어떤 점이 다릅니까? 율법의 경우, 율법은 신부의 완벽함을 향하여 공격해 들어가게 됩니다. 신부에게 여전히 어떤 가능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가 크게 울러 퍼집니다. 하지만 이 똑바로 함은 항상 신부로 하여금 ‘목마르게’ 합니다. 사람이 나름대로 아무리 철저를 기한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항상 미흡하고 불만스럽습니다. 처음 결심이란 잠시 시간이 흘러가면 그 초심을 상실하게 마련이고 또한 상황이 바뀌면 ‘철저함’의 기준에 곧장 변동이 일어납니다.
즉 시와 장소에 따라 철저함을 기준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자신도 자기를 믿게 못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신부를 향하여 정죄하는 모든 율법은 아예 폐지시켜버렸습니다. 율법이 적혀있는 문서를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로 말입니다. 십자가로 찢었다는 말은, 율법성향을 지닌 우리의 육도 함께 죽여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육은 율법을 따릅니다. 항상 선과 악 사이를 왕래합니다. 율법을 찢을 때, 우리 육도 항상 반복해서 죽을 대상인 것도 아울러 결정 났습니다. 하지만 육은 육을 옹호해주지 결코 부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언약에서는 성령님께서 우리 성도를 장악하게 됩니다. 로마서 8:13-14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육으로 율법적인 판단과 열매를 추구하는 그 육적인 태도를 부정하고 그런 육을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율법을 찢어주신 그 남편의 사랑에 대한 고백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런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남편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신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서나 언제든지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