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5 특강 - 언약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주제가 [언약]입니다. 성경에 언약이라는 말이 별로 많이 안 나오죠.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라 돼있고, 구약에는 여호와라 돼있죠. 언약이란 인간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언약, 하나님과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물탱크에서 물방울이 노아한테 떨어지면 노아언약, 아브라함에게 떨어지면 아브라함언약, 모세한테 떨어지면 모세언약, 다윗에게 떨어지면 다윗언약. 예수님께서 고무줄로 연결시키면서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언약의 고무줄이 그대로 이어져오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가능한 거예요.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동류의 사람인줄 알고 상당히 무시했죠. 눈 감기고 뺨때리고, “우리가 가운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히어 봐.”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하잖게 다루었죠. 그런데 예수님 등 뒤에는 하나님과 언약으로 연결돼있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예수님이 언약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내 피와 내 살로 새 언약을 이루었다고 돼버리면 전에 물방울처럼 떨어졌던 모든 것이 새 언약 속에 다 포함이 돼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예고편이죠.
예고편만 봐서는 흐름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본 사람이 티비에서 예고편을 보게 되면 저 장면에서 이 장면으로 옮겨가고, 이렇게 연결되고, 저렇게 끝나고. 그리고 예고편은 결말을 이야기 안 해줘요. 그러나 본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저 문 뒤에 귀신 나타난다고 미리 알려줘서 보는 사람 재미하나도 없도록 만들고.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낯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던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게 아주 우스워요. 마치 이해가 되는 양 그렇게 꾹 참고 “믿습니다.”를 남발하기 시작한 거예요. 정작 예수님 이야기는 이해가 안 되는데. 심지어 열두 제자들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삼년 동안 교육 받으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했는데 예수님도 칭찬해줬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잡힐 때는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저주했잖아요. 그러니까 몰랐던 거예요.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르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뭐냐 하면, 예수님 가신 곳에 제 목숨 버리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아서라 말아라. 너는 지금 너무 일방적으로 나를 생각한다.” 순교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교회 봉사해도 순교할 지경까지는 아니죠. 그런데 순교해도 안 된다면 처음부터 안 되는 이야기였단 말이죠. 상황이. 인간 쪽에서 뭘 해도 안 돼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예수님만 알고, 성령께서는 다루시니까 물론 아시겠죠. 다른 인간들은 배제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다.
그래서 언약이란 인간에게 철저하게 숨겨진 것이다. 언약이란 인간이 아무리 지상에서 교회에서 노력하고, 전도하고, 봉사해도 그것은 언약을 모르게 돼있다는 사실을 언약을 알게 된 사람만 고대하게 돼있어요.
언약을 주님께서는 아시고 우리는 모른다는 말은, 엊그제 가락교회에서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구원에 대해서 네가 관여하지 마라.” 이게 복음입니다. 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관여하지 마라. 걱정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걱정 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걱정한다는 자체가 안 되는 일에 대해서 주제넘게 개입한 셈이 되죠.
예를 들면 터널작업을 하는데 또는 쇼핑센터 공사할 때 그 공사현장에 직원들도 있지만 낮에 가보면 할 일 없는 노인들 구경하고 있습니다. 어디 불나면 구경꾼들 모이듯이. 교통사고 나면 처리반 나오면 나이 칠십 넘은 사람들 하도 할 일 없으니까 구경하잖아요. 그래서 교통순경이 뭐하면 잔소리한다고. 그러면 “할아버지는 관여하지 마세요.” 하잖아요.
천국, 구원, 성령, 하나님의 모든 일은 주님이 혼자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구원에 대해서 관여하면 안 돼요. 이게 왜 자꾸 관여하느냐 하면, 구원이 내 일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내가 설치지 않으면 내 구원은 누가 보장해줄 것인가?”라고 지가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고 신경 쓴다고 해서 구원이 더 빨리 되고 잘 되고, 구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손대고, 안 대고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가만있어도 구원되고, 혼자 있어도 구원 안 되고. 그것은 이미 우리 권한을 벗어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그 말 믿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구원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 그렇게 묻잖아요. 처음부터 안 될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안 될 놈은 안 돼. 괜히 안 될 이야기를 신경 쓰고 된다고 착각하고 쓸데없는 걱정에 교회에 돈만 날린 거예요. 구원되는 줄 알고. 십일조 내고 백날 해도 안 되는 일을.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언약을 아는 사람은 내가 관여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담당하는 전담, 담당 전문가가 이 땅에 내려왔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염려와 불안감 속에 말려들면서 살아왔구나.” 오늘 죽어도 천국 가는데 천국 못 갈까 싶어서 얼마나 안달내고 얼마나 조마조마했어요. 마귀한데 완전히 놀림감 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 흉내 내라고 한 일이 아니고 흉내 내지도 말라고 하신 일이 예수님 일입니다. 십자가 졌다고 십자가 지고. 그런 식으로 흉내 내지 말란 말이에요. 교회 일이란 모방과 흉내 내기로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언약을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이 하는 일에 내가 어떻게 말려드는가? 그것을 우리는 그냥 증거할 뿐입니다.
대구에 수성 못이 있는데 옛날부터 유원지였습니다. 여기에 보트가 유명하거든요. 보트를 타는데 가운데 만약에 돌이 빠진다든지, 여기 뭔가 풍덩 빠져버리면 그 중심에서 일어난 여파로 인하여 변두리에서 보트 타던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자꾸만 흔들거리고 진동이 일어나죠. 이 진동을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열매라 하는 겁니다.
성령의 열매가 내가 중심해서 나한테 작용해서 종교적인 행동을 가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중심지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에게 벌어진 일의 여파가 내 쪽에서 요동과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저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내 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성도기 때문에, 언약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변동이 일어나는 거고, 저쪽은 언약과 관계없기 때문에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파장이 일어날 때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새 언약이 수립되잖아요. 그러면 이 자체가 파장이라면, 위에서 내려온 파장이 수평에서 수평으로 그대로 연결되면서 우리는 예수님 일의 효과와 영향력 입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영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나 잘났다는 소리 안 하고 도대체 나는 아무것도 안 것이 없는데 이 여파가 어디서 오는지 그 중심을 찾아가게 돼있어요.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네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여파가 나한테 도달했다는 그 중심을 우리가 증거하라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고무줄 같은 것이 연결되어서 주께서 일을 일으키면 나도 같이 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흔들리는 현상이 지 성질 따라 나타나는 현상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거죠.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은 간단하게 말해서 기분 따라 산다고 했어요. [시간과 존재]라는 책이 번역한 것이 600페이지가 넘습니다. 그 두꺼운 책에서 핵심이 뭐냐 하면, 사람은 기분 따라 산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이 중에서 기분 따라 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란 그런 이야기에요. 진리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예수가 어떠니, 나는 희생하며 산다, 봉사하는 재미로 산다고 해도 모든 걸 다 정리하게 되면 사람은 그때그때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 기분을 도대체 누가 조성하느냐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어요. 그 사람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람은 분명히 자기 머리, 행동 따라 사는 게 아니고 기분 따라 사는데 이 기분이 내가 주관하는 기분이 아니고 분위기에 따라서 왜 기분이 달라지고, 이 기분을 누가 조성하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은 모르겠다고 하면서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그쪽을 어려운 말로 ‘존재’라고 한 겁니다. 기분 따라 사는 우리가 존재를 보여준다 해서 ‘존재자’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기분 따라 사는데 어떤 지점의 기분이 전부가 아니고 이게 시간 따라 가니까 책 이름이 [존재와 시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책 한 권 떼신 겁니다. 어려운 책. 그 기분은 내가 좋은 기분을 띠고 싶어도 존재자, 당신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당신 밑바탕에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존재자를 흔들어대기 때문에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존재라는 괴물의 정체가 뭐냐? 하이데거란 사람은 ‘죽음’이라고 한 거예요. 프로이드는 이 사람한테 힌트를 얻어서 하는 말이, “사람은 안 죽기 때문에 살아간다. 죽기 전까지만 살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어가고 있다. 존재의 본질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즐겨라. 그 즐기는 것도 기분 따라서 네 마음대로 못 즐기고 기분이 업 되면 즐기고, 다운되면 같이 다운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세상이라고 한 겁니다. 내 말이 틀렸다면 틀렸다고 이야기하라.
뭐 지식을 배우고, 학문을 하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권력을 쥐고. 그것 다 죽음 안에서 노는 그때그때 기분 따라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국회의원하고 싶어도 기분 좋을 때 하는 것이지 기분 나쁘면 국회의원도 때려치우는 거예요. 왜 때려치웁니까? 기분 더러워서 하면 끝난 거예요.
해답은 뭐냐 하면, 사람은 기분 따라 사는 거니까 거기다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란 말이죠. 신을 위해서, 예수를 위해서 희생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본인은 기분 좋을 때는 구제하고, 이웃 사랑하다가 기분 나쁘면 이웃 사랑이고 기도고 다 때려치우고 주 앞에 원망하고 사는데. 그걸 종합해보면 진리라는 것은 여유 있고 배부를 때나 교회 다니지 배고프면 교회 다닐 시간도 없는데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말고 안 되는 소리죠.
오늘 첫째 시간에 조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분명히 하나 정리하고 갑시다. 사람은 그냥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예수님은 익히 알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에게 봉사한다, 충성한다 하지 말고 너는 네 기분 따라 살면 돼. 아프리카에 가서 울지 마 톰슨인지, 뭐 봉사한다 그러지 말고, 그것은 기분 업 되어서 하는 짓이란 말이죠. 저 남자와 결혼해야 됩니까, 말아야 합니까? 기도할 것도 아니고 기분 당기면 하고 아니면 말고 하면 되지. 그것을 무슨 “주여, 이게 옳습니까, 선합니까?” 선하다는 말 자체가 어디서 도발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옹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끄집어낸, 조작된 그림에 불과한 거예요. 자기한테만 선이지.
가락교회에서 그런 예를 들었지요. 어린이날 앞두고 아이들이 갑자기 착해지잖아요. 이번엔 비싼 장난감 얻어내려고, “아빠, 나 착하지.” 한다 말이죠. 그런데 아빠가, “이빨 고치러 가보자.” 어린애는 자기가 대단히 착한 어린애에요. 말 잘 듣지, 학교에서는 질문 잘 하고 칭찬 받지, 부모한테 사랑받지, 특히 이모한테 용돈 많이 받지. 그래서 굉장히 좋다 생각했는데 치과에 가서 치과의사가, “이빨 어떻게 닦았어? 이렇게 네 마음대로 이빨 닦아도 돼.” 일곱 살 때까지 누구한데 꾸중들어본 적 없는 애가 치과에서 이빨 잘 못 닦았다고 꾸중들을 때 애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치과에 와서 존재의 실존을 아는구나.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사람이란 우쭐댈 수 있는 환경에서나 우쭐대지만 만약에 예상 못한 다른 환경에 들어가면 우리는 꾸중 들을 수 있는 항상 그런 요인들이 있어요. 자기 동네에서는 오야봉인데 다른 동네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 이게 바로 죽음 안에 갇혀있는 실존의 한계다. 그냥 기분 따라 살면서 그걸 자꾸 종교적인 이름으로, 예수 믿는다고 자기를 거룩한 것으로 포장 짓을 하는 그것이 현대의 실존의 모습이라고 하이데거는 묘사한 겁니다.
왜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갑자기 했느냐 하면, 하이데거가 신을 만들었어요. 신이란 것을 만들 때 인간을 모아놓고 그 속에 있는 공통점을 다 끄집어내요. 분명히 인간을 신이 만들었다면, 인간의 각각 개성은 추려내고 공통점을 따라 추적해가면 반드시 신을 만날 수 있는 흔적이 인간 속에 내장돼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속에 내장된 것을 추적해서 그것으로 연결시키면 하나님과 연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는가? 하이데거가 시도한 겁니다. 그전에 이미 천주교에서 시도했지만 요샌 개신교도 이걸 시도해요.
제가 왜 이런 하이데거의 이론을 끄집어내느냐 하면, 언약을 설명할 때 천국이라는 것이 인간의 공통점,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경건한 자질들을 끄집어내서 가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간다고 돼있어요. 예수님을 모르게 되면 천국도 모른다는 이야기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 너의 천국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이야기한 천국으로 교체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천국은, 내가 만든 천국이고 거기에다 예수님 믿어서 플러스, 첨부해서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천국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이 알려준 천국과 비교해서 내 천국을 포기해줘야 되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와 라이벌 관계로서 등장했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것도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내 영역 속에 집어넣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내 능력에 포섭된 그 예수를 내가 일방적으로 소유한 게 되죠. 예수 믿는다는 게 사기다 이 말이에요. 내가 조작한 거란 말이죠.
안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놀리죠. 예수 믿는 사람들 다 나와. 공통점을 뽑아내면 열 명이면 예수가 열 가지란 말이죠. 그러니까 열 가지란 말은, 예수님은 실제로는 한 분인데 열 명이 다 다르니까 너희들은 사기다. 그러니까 난 예수 안 믿는단 말이죠. 내가 너희들 따라 그렇지 않아도 많은 예수를 내가 믿어서 내 나름대로의 예수 만들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 제가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언약에 대해선 인간을 일체 모르게 돼있다. 그래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마태복음 17장.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듣게 되면, 이왕 하이데거 나왔으니까 좀더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공통점은 결국 죽는다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그 사람의 학력이나 지식이나 재산 정도나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죽음 앞두고 있는 인간들은 항상 동일한 것을 끄집어내더라. 인간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파노라마처럼 펼치더라. 이것은 영사기고 여기는 극장 스크린이고.
그러면 하이데거는 생각했어요. 이 과거, 현재, 미래는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 속의 공통점에 담겨있는 시간성에서 나온 거예요. 시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간이 과거에 경험한 것인데 사실은 편집한 거죠. 경험한 게 다 과거가 아닙니다. 현재 자기한테 유용한 것, 유리한 이득이 드는 것만 따로 편집해서 과거가 되니까 전체 과거 가운데 여기서부터 조작이 일어나요. 왕년에 17:1로 싸웠다. 안 믿지요.
본인도 자기 과거에 대해서 몰라요. 왜냐하면 잊어버렸거든. 어제 일도 모르는데. 차타고 아카시아나무 꽃잎 수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분명히 과거잖아요. 분명히 제가 용성 넘어 왔잖아요. 나는 용성 넘어온 과거 속에 일부로서 스쳐 왔잖아요. 왔는데 용성읍내 내려오면서 나무 하나 있는데 그 나무 가지에 잎사귀 수를 내가 모른다 이 말이죠. “목사님, 나무 가지 몇 개였습니까?” “77개인가.” “79개다. 어디서 거짓말하노.”
수많은 과거가 있지만 나와 관련된 것만 추려서 나의 과거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그 과거가 어디서 나왔는가? 내 속에 이미 나를 옹호하기 위한 시간성들이 창작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공 되는 역사밖에 없어요. 그래서 과거에서 자기에 유리한 것만 현재라고 잡다보니까 자기의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면서 미흡하고 모자란 것은 미래의 꿈으로써 실현하겠다고 하니까 이것은 야심이죠. 야망, 목적, 인생 의미 이런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란 과거-현재-미래가 있음으로써 항상 과거는 현재의 생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과거 중에서 필요한 것을 찾고, 모자란 것은 미래에서 보태겠다는 그런 심보로 혼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일방적인 역사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도 예수의 모든 말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서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버리죠.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요. 자기가 듣는 것만 듣고 뽑을 것만 뽑는 거예요.
하이데거가 이걸 밝혀냈거든요. 하이데거가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해서 과거 인간의 주장을 다 이야기했다 말이죠. 인간은 죽음 안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고 사람은 정해져있으니 이 땅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자. 그것이 그나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봅니다.
편하게 산다는 말은 표면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내부에는 기분 따라 사는 것이고. 이 기분이란 환경을 이야기한 것이고, 이 환경을 실존이라고 했고 실존 밑에는 존재가 있고, 존재가 이런 것을 보여주는 매개체가 존재자, 인간이라 하는 겁니다. 왜 인간이란 말은 쓸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자란 말을 쓰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냈기 때문에 인간이란 자체가 틀린 개념이기 때문에 이 개념을 쓰면 안 된다는 거죠. “나, 인간이다.”란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너, 인간 아니야. 나는 더 인간에 가까워.”
플라톤이란 철학자는 사람이 선에 가까울수록 인간이 점점 더 인간다운 거예요. 그리고 선에 가깝지 못한 인간인지 짐승인지 분간이 안 되는 사람, 김태촌, 깡패, 짐승 같은 존재 그래서 그걸 순서를 매기자는 거예요. 순서를 사회적으로 환산시키면 그것이 바로 카스트 제도, 계급이 되는 거예요. 양반과 쌍놈이 되는 겁니다. 사회는 그렇게 해야 질서가 잡히니까.
이게 뭐냐 하면, 똑똑하고 선하고 착하고 덕 있고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서 못 배운 사람들이 교육 받아야 그 사회는 질서에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회의 모든 조직은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만 달랑 남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은 더 높은 자리에 앉고 못 배운 사람은 허접한 일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이 사회가 되는데 그 사회에서 범죄란 다른 게 아니고 못 배운 인간이 배운 인간을 지배할 때 사회질서를 전복시키는 반란적 의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배운 사람이 그런 인간을 가만두면 안 되고 교도소에 집어넣어야 돼요. 경찰 동원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런 사회에요. 분석해보면 간단합니다.
대학수학교수가 교회 왔다. 목사가 하는 말이, “당신은 수학박사지만 교회에서는 내가 오야봉이니까 당신보다 내가 더 높다.” 교회란 질서는 오야봉이 있게 마련이고 질서가 되려면 특수한 권위가 그 사람 몫으로 따로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이 인간 사회인데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오야봉으로 해서 일곱 단계의 계급이 형성된 그 사회에 예수님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세리와 창기가 오야봉보다 먼저 천국 간다.”
그럴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우리가 이렇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는 남보다 율법, 하나님의 법을 더 잘 지키기 때문에 그렇다. 요새 말로 하면, 우리가 저 사람보다 더 성화되었기 때문에 성화된 사람들의 말 듣는다는 것은 신에 가까이 간 사람, 기도도 오래하고, 은혜도 많이 받고, 간증도 오래하고, 경건해서 신에게 근접해서 은혜 많이 받아서 신과 많이 닮아있다는 말은 곧 저 짐승 같은 인간에게 교육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받았다고 생각을 먹으라 이 말입니다.
이게 모래시계인데 이 모래시계를 역으로 엎어버리면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위에 있는 나의 선이 아래로 흘러들어가서 개 같은 너희들도 내 선함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하거든요.
차마고도란 다큐멘터리를 봤죠. 티베트는 보통 어지간하면 오천 미터고 좀 높으면 칠천 미터거든요. 그 높은 곳에서 오체투지 쉬운 말로 삼보일배,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는 것 있잖아요. 몸의 다섯 가지 체형을 땅에 던지는 거예요. 몸에 가죽을 대고 수백 킬로미터를 가는 거예요. 왜 하느냐? 오체투지 하기 전에 나무판을 댄 손을 세 번 칩니다. “내 뜻과 내 정성과 내 마음은 모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대신해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으니 부처님이여 내 고난 속에 지금 이 고난을 모르는 중생들에게 저주 내리지 마시고 내 희생 하나 받아서 복을 받게 하옵소서.” 대리해서 고난 받는 희열, 거기서 자기가 오체투지하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이걸 교회에서 네 자로 이야기하죠. 중보기도.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이 독특한 건 없어요. 그냥 말만 바꾸었을 뿐이지 행동하는 것은 그냥 똑같은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지요, 십일조 했지요, 그 다음에 구제했지요. 이 말은 모래시계 위에 있는 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너희들은 구제 안 했지만 내가 대신 구제해서 짐승 같은 너희들도 복을 받아라. 하는 식으로 복이 내려가는 대신 다만 내 희생으로 된다는 종교적인 카리스마, 영적인 카리스마를 너희들이 보장해줘야 이 유대나라가 종교적, 영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걸 뒤집어버리니까 창기와 돈만 밝히는 세리가 위쪽에 있으니까 뭐가 떨어집니까? 죄가 떨어지겠죠. 이 죄가 많이 떨어진 사람이 구원받는 거예요. 선을 많이 발휘한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죄가 많이 떨어진 사람, 여기 많습니다. 죄가 비듬 떨어지듯이 머리, 어깨, 무릎, 발 한 번 소릴 지를 때마다, 행동할 때마다 죄가 우수수 막 떨어지는 사람,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
기차나 버스 탈 때 제가 혹시 휴대폰 크게 한 사람 없는지 찾지요. 그냥 가면 심심해서. 서울까지 가려면 얼마나 심심한데요. 요새는 상식이 있어서 큰 소리로 안 하고 칠십 넘으면 큰 소리로 하는데 보통은 소곤소곤해요. 그런 사람도 잡아냅니다. 그것도 나중에 재미가 없어서 잘 안 해요. 요즘은 문방구에서 천오백 원 주고 산 귀마개한 뒤론 조용해졌어요. 이젠 간섭할 것도 없지.
그게 아까 어린애 치과 이야기했듯이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과거에 집착된 경험에 의하면 이 정도는 용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인간은 용납 된다는 발상 자체가 용납이 안 돼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줘야 내가 선을 행합니다.”라는 그런 발상 자체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 태어난 네 인생이라고 한 거예요. 이것이 선일까, 이건 악일까? 따지면 니만 피곤한 거예요. 그렇게 따지지 말고, 그냥 뭐대로 살아라? 오늘 배운 게 뭡니까? 막 살란 소리 안 했어요^^ 또 오해한다. 기분대로. 그냥 기분대로 안 살아도 되고, 살아도 됩니다. 문제는 그 기분을 조작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제 말에 대해서 이의가 있다고 토다는 사람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기분이 나빠. 나는 착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기분 좋아. 나는 나쁜 짓해서 행복한 적이 없어. 불행해져. 그러나 착한 일하면 왜 그런지 행복해져. 그러면 그것도 선이 될 수 있잖아.”라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기분대로 해놓고 그걸 선이라고 나중에 사후적으로 조작을 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예수님이 그것마저 악하다고 했을 때에 강력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 돼버립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그래서 첫째 시간에 한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고 있는 것이 언약이다. 그리고 언약에 대해서 콩고물 떨어지듯이 떨어진 사람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였다. 마지막에 세례요한에 떨어졌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갈 때 엘리야, 모세 등장했지요. 벌써 언약을 알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도 모르고, 세례요한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야기할 때 아무도 못 알아봤다 이 말입니다.
못 알아 본 것을 우리는 축복이라 보자. 왜 축복이냐? 못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어떤 대기상태에 있는 거예요. 여기서 못 알아본 사람이 어떤 선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대적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관여한 바가 되기 때문에 이 자체를 무로 돌릴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우리가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를 마음 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자 노력한다는 그 애씀과 힘씀 자체도 사실은 구원과 전혀 연결점 없고 상관없는 거예요. 그걸 성령이 오게 되면 차후에 부질없는 헛생각 속에 지나갔구나 하는 것을 무릎을 치면서 수용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교회에 돈만 갖다 바쳤지 헛수고한 거예요. 그걸 알 때 비로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하는 앞에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과 예수님 사이, 자꾸 간통한 여인, 예수님 따지지 말고, 그 관계 속에 초빙되면 들어오게 되면 이게 자유다. 예수님이 너희를 강제로 힘 있게 하게 하심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 간통한 이 분이 같은 천국에 동반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간음한 여인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용서받은 자가 되죠.
아까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서 기분대로 살면서 죽음에 휩쓸려간다. 이것을 존재자라 했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집어넣으면 예수님에 의해서 용서받은 자, 예수님에 의해서 피 뿌림을 입은 자, 이러한 입장이 되면 이것이 바로 지상에서 시작된 제대로 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이게 지상천국이에요.
이것이 만약에 여러분에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 저한테 따지지 말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하이데거한테 가서 따져요. “나는 그것 안 믿습니다.” 하면 하이데거 불러요. 안 믿는 것과 나와 상관없는데 나와 따져보자. 나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 네가 벗어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지 끄집어내보라. 못 끄집어냅니다. 다 기분 따라 사는데 빠져나올 길이 없어요. 지금은 하이데거지만 예수님 당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다시 정리할게요. 모래시계, 여기 선이 있고, 선을 나눠줌으로써 오체투지죠. 내가 갖고 있는 선을 나만 구원받으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너무 염치없고, 이기주의는 안 되고, 이타주의가 돼야 된다는 양심은 있어서 일단 내가 구원받을만한 것은 챙겨놓고 그 다음에 여분의 노력을 많이 하는 거예요. 십일조 해도 되는데 십일조는 내 구원용이고, 십의 이조하게 되면 아직까지 교회 안 다니고 있는 내 며느리 위해서. 그렇게 여분의 선이 있으면 그 여분의 선을 나눠줌으로써 이 사회가 선한 사회로 멋진 사회로 이루겠다는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강도, 창녀, 세리를 위에 내세워서 이런 자들이 구원받는다 하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거꾸로 세우게 되면 죄가 떨어지는 겁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합시다. 방금 죄가 떨어진다고 했는데 떨어지는 죄가 뭐냐? 여기에 세리와 창기, 강도를 모래시계에 얹어놓았습니다. 이게 떨어지는 죄가 세리니까 돈만 아는, 돈만 챙기는, 돈독이 든 사람, 창기는 윤리도덕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한 사람, 강도는 사람 죽이는 것을 개 잡듯이 해서 자기 유익만 챙기는 동물적인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 이 사람에게 떨어지는 죄가 만약에 이런 죄라면 우리는 이런 사람에 참여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강도, 창기, 세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정교육 잘 받아서 이런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못 받았어요. 가정교육이 너무 완벽해서. 우리는 교육집안이 되어서 너무 자녀교육을 잘 시켜서 우리는 이런 걸 하고 싶어도 되질 않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떨어지는 죄에 참여 못하면 결국 우리는 위쪽에 나란히 죄인 중에 괴수에 서지 못하는 셈이 돼버립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암벽타고 올라갈까요? 그럴 필요 없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느냐? 그 비법이 뭐냐? 내가 지은 죄는 죄 축에도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링거로 죄를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큰소리치는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이번 시간 마지막 큰소리인데.
죄를 집어넣어줘요. 그러면 내 시간성 속에 과거에서 경험하지 않은 죄인데 아담이 따먹었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 죄가 나도 모르게 허락도 없이 링거 속에 들어가면 수시로 백화점 쇼윈도우 지나가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봄 신상품 나왔는데……
어떤 여자 분은 남편이 억대 연봉을 받는데 자기가 직장 생활하는 이유가 명품 사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세리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만약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겠죠. 왜?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걸 보게 되면 그동안 내 안에 잠재돼있던 죄가 그때그때마다 우발적으로 내부에서 표면층으로 튀어나올 때 “아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맞구나.”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으로 그걸 집어넣을 때, 죄를 끄집어낼 때 율법 다시 말해서 법을 우리 안에 집어넣으면 그 반응으로 우리 죄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비로소 탐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죄라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형제를 질투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여기서 첫째 시간을 정리하게 되면, 아까 하이데거처럼 인간이란 없어요. 존재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언약의 매개물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를 대신 흘려서 용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란 우리를 계속해서 거기에 합당한 죄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이미 말씀이라는 것은 자꾸 고무호스로 집어넣어서 내장돼있는 죄가 반발하도록 조치를 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이것은 지키겠는데 이것은 못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 주님께서, “모든 걸 지켜서 이것 하나 어기면 몽땅 다 못 지킨 것이다.”라고 해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너를 위해서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는 식으로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