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언약
2008년 9월 24일 본문 말씀: 이사야 59:20-21
(사 59: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사 59: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세상은 변합니다. 안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쉴새없이 변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염두에 사는 자를 구별해내기 위함입니다. 가수에 무대 위에 서게 되면 가수가 요청하지 않아도 조명이 알아서 가수의 지점에만 비취게 합니다. 이 때 가수는 그 조명을 움켜쥘 수가 없습니다. 조명은 빛이니 말입니다. 이는 곧 빛이 가수를 비추지 결코 가수가 임의대로 조명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고백해야 한 것이 바로 조명빛과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따라서 이 언약에 대해서 늘 변화는 우리 자신의 의도가 개입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손에 쥐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변질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우리 자신의 것이 그 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0:8에 보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영원한 언약은 오직 그 안에 들어있는 언약에 의해서만 달성됩니다. 그러니까 언약 안에 또 언약이 들어있어 안에 들어있는 언약에 바깥에 있는 언약을 성취시켜 버리는 겁니다. 즉 언약은 자체적으로 달성해 버리는 겁니다. 변하지 않는 언약이 변치 않는 언약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변화하는 인간은 여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완성은 신약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구약 때도 이미 포함된 언약이 포함시킨 언약을 이루는 작업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었기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버린 일들이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사하기도 전에, 창세 전부터 결정된 바 있는 사랑과 미움의 내용 때문에 야곱은 사랑받게 되고 에서는 미움받게 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래야 말씀이 홀로 힘으로 말씀이 곧게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업이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계획이 잡혀 있어 애굽 군대는 홍해 바다에 빠져죽고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홍해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서 찬송을 합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이 찬송의 가사 밖으로 못벗어나게 됩니다. 이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용사가 되어 우리를 건지셨다. 용사로서 활약했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전쟁이 분명 있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의 수중에 포로 잡혀 있었다. 우리는 자력으로 그 포로된 것에서 탈출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우리를 빼내어주셨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 전쟁의 전리품이다. 그런데 이 전리품 안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요 성소가 되게 하셨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소와 성소는 결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하나님만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성소가 되기 위한 조건은 하나님만이 치를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결코 성도는 만들어 내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이미 성소 안에 들어온 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그동안 자신은 악마가 주는 자양분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자신이 악마에 소속된 자라는 사실 자체를 일깨워주신 것은 오직 용사되신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소 안에서는 오직 용사되시는 예수님만 영광돌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나 메시야 개념은 다 거짓된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를 여전히 포기 하지 않는 생각해서 도출된 신 개념이요 구원자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성소 개념은 다윗 때 와서 그 내용이 뚜렷해집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시온이 나오는데 이 시온이라는 개념은 지리적으로 이미 있는 시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철저히 죄라는 것을 인식할 때만 알게 되는 시온입니다.
즉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죄인에서 태어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시온이라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앉아있지만 그 왕의 자리는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인간이 죄에서 출생했음을 밝혀주는 자리임을 다윗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시온이란 들어앉아 있다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근본적으로 죄에서 태어난 자라는 것이 인식하는 자에게만 이해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시온은 은혜로만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시온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에 합류하시지만 사람들이 찾아가서 들어앉아 살 수 있는 공간적 시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예루살렘성, 곧 시온성은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는 하늘에 있었습니다. 시편 11:4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시온성이 마지막 완료 때가 되면 하늘에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서 인간의 죄가 근원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근원적으로 증명되는 사태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즉 인간이 왜 언약 완성에 일체 개입할 수 없는지가 확실히 굳어지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인간은 악마의 조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악마의 노림수는 ‘인간의 가치성 추구’였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가치를 모독하는 자를 그냥 두고 보고 있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이로서 사람들이 다른 메시야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폭로되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용사이십니다. 전쟁을 벌렸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죄인됨 것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주님의 전리품들이 주님에 의해서 건짐받게 됩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될 뿐임을 말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신들은 예수님의 전쟁을 거치지 않는 신이라서 다 가짜요 이단이요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조명에서 비켜나 있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말하는 자는 악마 밑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언약은 오직 언약자가 따로 계셔서 그 분에 의해서만 성취됩니다. 그 언약자의 언약 완료가 되면 시온성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일체 인간의 공로는 삭제되고 오직 어린양 되시는 분의 공로만 높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곧 언약대로 된 상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무가치성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