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신 13장 1-3절(거짓 선지자)1603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3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다면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다 치워버리고 아예 이것만 똑바로 믿으라고 했으면 굉장히 문제가 간편할 겁니다. 둘 중의 어느 것을 할래? 라고 하면 우리가 참 복잡해요. 그런데 선택해서는 안 될 것을 미리 치워버리면, 딱 하나뿐이기에 딱 하나만 선택해서 구원받게 되면 얼마나 구원받는데 수월하겠습니까? 편하고 수월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우리 곁에 두게 하시는 겁니까? 그걸 나타나게 하시고. 그것은 거짓 선지자를 피해서, 참된 선지자를 찾아서 구원받는 그 모든 업적과 그런 행위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의 선택, 인간의 선택에 문제 있음을 오히려 드러내는 거예요.
구원받아야 될 자들의 행위와 선택과 의지와 생각들이 문제성 있고 잘못되었으며, 잘못된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수정처리해가지고 기어이 건져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가치 없는 자를 건져냄으로 말미암아, 가치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를 건져내시는 주님 쪽에 영원토록 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 선지자를 깔아놓는 겁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천국이라는 곳은 가서 골라잡을 곳이 아니고, 미리 이 땅에서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져야 하는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예수 선택하고, 하나님 선택하고, 무슨 선택을 하든, 그것은 바로 오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헌금을 하는 것이 왜 죄냐? 누누이 이야기하는데, 헌금하는 것이 죄 돼야 돼요. 설교하는 것이 죄 돼야 되고. 그래야 헌금 여부와 관계없이 구원시키는 분의 공로만 높아지잖아요.
만약 헌금하고 십일조 들고 천당 간다면,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얼마나 십일조 자랑하고 헌금 자랑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인간은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얼마나 자랑질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하고 기도하고 선교사 돼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선지자를 미리 깔아놓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마귀마저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미리 우리 곁에 찾아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가 마귀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선별의 그러한 능력과 지식이 우리한테는 아예 없고, 거짓 선지자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참 선지자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우리에게 유발시킵니다. 된장인지 뭔지도 구분 못하듯이,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 구분도 못하는 우리를 주께서 건져주실 때에 우리가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실수의 발자국만 남기며 죄만 지었던 자들, 잘못된 선택과 선택의 연발,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잘못된 선택이죠.
그 잘못된 선택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것을 돌이켜서 잘못된 선택을 잘한 짓이 되게 하시는, 분명히 우리 입장에서는 잘못된 선택인데, 잘못된 선택이라는 그것을 주님과 결합해서, 참 니가 했어야 일을 했다는 식으로, 그걸 긍정적으로 인정하시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옆에 있었던 열 두 제자의 포진이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지옥가야 되지만, 나머지기 제자들은 모든 잘못된 행동이, 주께서는 그렇게 나온 행동을 주님 입장에서는 잘한 짓이 되는 거예요. 그래,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둘둘 말아서 하지 말고 중간에 끊어버리면 잘못된 짓이 잘한 짓이 되도록 조치하신다. 그걸 줄여버리면 막살아도 구원되더라. 더 줄여버리면 막살아라.
막사세요. 그래서 막살아서 구원의 티를 냅시다. ‘그러네. 막 산 것도 잘한 짓이네.’ 생략해놓고 이야기하면 나쁜 짓이 되겠죠. 그런 많은 것들을 생략하게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거짓 선지자를 왜 깔아두시는가, 우리의 선택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러면서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가 선택하도록 하는 그 심성 자체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 잘 해서 구원받을 능력이 일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거짓 선지자와 한 통속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13장에 “너희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말씀을 우리한테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때부터 무슨 작업에 나서는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려고 시도하게 될 거예요. 근데 그 선택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시도하는 겁니다. 어떤 선입관이냐 하면 나는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 중에서 참된 선지자를 골라내어서 거짓 선지자를 내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나한테 이미 들어있을 것이라는 그 잘못된 선택. 그 선택을 주께서는 기어이 찾아내십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속아 넘어가지 않는 그런 거짓 선지자를 주께서는 우리 앞에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깜빡 속을 수밖에 없는 거짓 선지자를 우리에게 딱 만나게 해주죠. 어설픈 보이스피싱을 우리한테 주지 않는다 이 말이죠. 마음 단단히 먹어도 결국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범죄자를, 그러한 마귀의 짓거리를 우리에게 마주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 선지자에게 속았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속은 거예요. 내가 나한테 속았고 나한테 속은 그 작업이 예수 믿음으로 그게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본격화돼요. 이제 죽을 때까지 계속 속고 또 속을 거예요.
연세 많은 부모님들 문병가게 되면 제일 안타까운 것이, 노인네쯤 되면 이제는 지혜가 있어서 안속아 넘어가야 되는데, 노인네일수록 더 잘 속아 넘어가고 약장수들한테 막 속아 넘어가게 되면 자식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슴 아파요. 젊을 때 그렇게 총기가 넘치던 분인데 어떻게 저 말도 안 되는 건강식품을 오 십 만원주고 그것도 듬뿍 사오냐 이 말이죠. 어디에 속아 넘어갔는가, 약쟁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 자식들 중 누가 여러분한테 재롱부리고 서 너 번씩 찾아와서 친절 베풀겠습니까? 우리 같은 약쟁이들만 찾아오는데 성의 봐서라도 사 주세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늘 속아 넘은 속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거에요.
‘거짓 선지자를 삼가야지.’ 이게 아니고 도대체 내 안에 있는 어떤 요소가 거짓 선지자하고 밀당으로 하고 거짓 선지자하고 한통속이 되어 있는,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요소가 거짓 선지자와 작당을 하는 그런 심보냐, 그것을 찾아내면 되죠. 그러면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하늘을 이야기한다 이거에요. 모든 각양 좋은 것은 하늘에서 온다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이야기하죠.
그러나 실상 구원받는 모든 것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몰래 하늘에서 오시되 몰래 지상에서 일어나는,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그 속에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배신과 배반과 다툼과 투쟁과 비난과 매도와 그리고 질식당함, 이러한 모습의 진리성, 그걸 통해서 구원의 바탕은 거기에 있는 거예요. 하늘 쳐다본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계시 받아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가짜들로부터 얼마나 큰 수모를 받는지, 그 수모 받는 그 현상 자체가,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그 현장에서 진짜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산상설교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하늘을 쳐다보라 거기서 온다가 아니라, 그거는 유대인들이 다 이야기한 거고. 나와 내 이름을 인하여 핍박을 받거든 오히려 기뻐하라. 핍박받는 모습. 이상하게 핍박받는 모습, 미움 받는 모습, 그 모습 속에서 진정 구원의 소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이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온다는 거예요. 양의 옷을 입고. 양이라 하는 것은 못돼먹은 것이 아니잖아요. 굉장히 순하잖아요. 순한 모습으로 나타나거든 그냥 거짓 선지자라고 아시라 이 말입니다. “부족합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할렐루야!” 갑자기 목이 쉬었는데 감기 걸려서 목 쉰 것이지 기도 많이 해서 목이 쉰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당신을 위해서 희생, 봉사한다는 모습을 띠고 나타나거든 사기꾼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양의 옷을 입고 순한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이미 장착을 했어요. 아마 나의 구원주는 이런 모습으로 올 거라고 미리 상상들을 해놨는데, 그 상상을 누가 카피를 해가요. 마귀가 카피를 해가지고 인간들이 속아 넘어 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찾고 있고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그 모습 그 자태 그대로 거짓 선지자가 가면 쓰고, 껍데기를 입고 찾아오는 겁니다. 물론 배후에 주님께서 그렇게 하죠.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이리가 전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13절, 14절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인간들이 참된 선지자라고 뭔가 이미지를 그릴 때, 그들은 그냥 그리는 것이 아니고 나 잘되기 위해 도와주는 어떤 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그들은 선지자를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알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선지자를 찾지를 않고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 자격이 되는 사람인 것을 후원해주고 격려해주는, 다 죽어도 나만 살아야 돼. 왜? 나는 가치 있으니까. 그걸 이렇게 격려해주고 독려해주는 그러한 사람을 찾는 거예요. 찾으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고객만족이라고,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를 구원할 때, 성령이 임하게 해서 “너는 구원될 자격도 없어. 너는 죽어 마땅해.” 라는 십자가를 가지고 일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구원되고자 하는 자는 다 거짓 선지자만 맞닥뜨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죽어 마땅하고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죄가 여러분들이 버림받아야 마땅한가를 알려주는 쪽으로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찾아오고, 그 다음에 자기는 비켜버려요. 찾아오고 계속 막아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겁니다. 제가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해놓고 본인은 피해버리잖아요. 본인은 피해서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죠. “나는 십자가지지 않았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죠.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저는 십자가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파派, 무슨 파派, 따지지 마세요. 주님은 파派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뿐이에요. 십자가 지신 분의 십자가만 직접 여러분에게 올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게 되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희 속에 성령께서 친히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께서 너희 속에 있으면서 친히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라고 사도 요한이 그 사람을 가르쳐요. 교회를 가르치거든요. 그러니 이건 사도 요한이 빠진다는 거예요. 자기가 전해놓고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만 내세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된 선지자가 이렇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하느냐, 그걸 알아야 하는 문제인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기적과 이적과 기사를 이룰지라도” 놀라운 기적 같은 것을 원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이미 참된 선지자,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보다 능력이 있을 거고, 우리가 못하는 것을 선지자는 해낼 것이다. 인간들은 벌써 그걸 기적이라고, 하나님이 주신 표적이라고 그렇게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 거짓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3절에 보면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얼마나 이 꿈 이야기가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늘어나고 부풀어지고 많은 경우의 꿈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해요.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욥기 4장 12-17절에 보면, 여러분들이 이걸 찾지 말고 욥이 이야기한 건지, 욥의 친구들이 이야기한 건지 우선 여러분들이 한 번 알아 맞춰보세요. 제가 우선 본문부터 읽겠습니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 서니라 내가 그 방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욥의 친구 빌닷이 이야기한 겁니다. 방금 이 이야기는 거짓 선지자가 이야기한 겁니다.
이 빌닷이라는 사람이 욥기 8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8장 7절을 보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다단계. 다단계 훈련요 멘트에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 빌닷이 꿈에 어떤 형체를 가진 분에 의해서 계시 받고 한 이야기입니다. 마귀를 만난 거예요. 거짓 선지자를 꿈에 만난 겁니다. 거짓 선지자가 양의 탈을 쓰고 천사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빌닷은 시작은 좋았으나 끝은 낭패였느니라. 천사로부터 시작했는데 그 천사가 악마로,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한 사탄이 천사로 나타난 거예요.
우리는 내가 기대하는 모양새로 오게 되면 그 외에는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게 천사의 소리라고, 주님의 소리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정답을 내려버립니다. 납득이 되고 나에게 우호적이니까. 나에게 우호적이고 나 잘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만약에 꿈속에서 제가 나타나서, 어떤 분은 제가 꿈속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하는 말이 “죽자! 죽어라!” 이렇게 한다면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 십자가이야기하면 누가 이야기해도 사탄아 물러가라! 할 거예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니 나하고 이미 같이 죽었어.”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 뜯어보면 그 안에 이미 우리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로 들어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반복되면 우리가 평소에 하는 모든 짓거리가 전부 다, ‘이래서 이 짓 때문에 우리가 죽어 마땅하구나.’ 하는 거예요. 그저 건강할라고 진맥 받고, 이 짓이, 솔다한테 받아서, 이거 완전히 칠공산 부대도 아니고, 전부 다 이 짓이 살고자 하는 짓이 죽을 짓이구나. 평생 우리 그럴 거예요.
항상 성령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너는 십자가의 고난 밖으로 못 벗어나는 팔자가 되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것이 성령의 일이고 그게 참 선지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죄인인 것을, 왜 죄인이라고 알려주느냐, 이미 구원되었기에 죄인인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미 죄인 되었기에. 결론으로 내려졌던 사항이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결론이 왜 결론이냐, “니가 이런 짓거리해서 살라고 하니까 따라서 너 같은 인간의 판단과 너의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너를 끌고 가고 있는 중이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런데 욥에게 빌닷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해석을 어떻게 하겠어요? 빌닷이 꿈에 본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욥의 잘못이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보고 뭐하고 하는 것도 전부 다 마귀한테 꼬임 받아서 그렇게 한 거예요. 평소에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그런데 욥의 마지막에 보면 욥의 친구들을 하나님께서 나와서 판정하기를 그들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욥, 니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들의 죄는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욥의 친구들이 욥 옆에서 지껄인 모든 것들은 바로 인간들의 내부에, 현재 우리의 마음 상태에 있던 것을 쭉 내놓은 거예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한 자가 있겠는가? 악하지.” 들어보면 굉장히 맞는 이야기인데, 그걸로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왜 욥한테 구태여 하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임하신다. 그 말을 하면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가지고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그들은 옳고, 예수님은 그르다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니나 내나 한 성경보고 있으니까 나도 옳다.” “나도 옳다.”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해석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이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로 구원받은 거예요. 세상사는 것 참 편해요. 뭘 해도 옳지 않아요. 세상에 이것보다 유하게 세상사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건 최고의 자유입니다. 뭘 해도.
우리에게 로또를 주셨는데 그것이 1등 되었다. 옳지 않는 행동이에요. 그런데 로또가 왜 당첨이 되었는가, 내가 옳지 않은 행동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등 당첨된 거예요. 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걸 가지고 누구한테 줄 필요 없어요. 지가 챙겨야지. 내가 얼마나 부동산을 좋아하는지, 부동산을 사야 돼요. 뭘 해도 편하게 살면 돼요. 왜? 어차피 결론 난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내 행동은 정당하죠? 내 행동은 옳죠?” 이렇게 하니까 그저 만나는 거짓 선지자만, 주께서 거짓 선지자만 계속해서 파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욥기 9장 11절에 보니까, 이거 미리 정답을 이야기했는데, 정답을 모른다 치고 이거 누가 이야기했는지 한 번 들어보세요.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고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게 욥이 이야기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가, 중간단계가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지금 욥은 나는 정당한데 나에게 고난이 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도 지금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와도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맺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답이 아니에요. 뭔가 중간에 거쳐야 돼요. 어떤 거침? 내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죄였다고 알려주는 사태가 일어나고 난 뒤에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관여해서 욥은 죄를 뒤집어쓰고 제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제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안 드릴수가 없는데, 사무엘상 10장 6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는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 7절,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8절,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이게 사무엘 이야기거든요.
근데 그 전에, 사무엘 이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울도 예언을 합니다. 근데 어떤 지점만 딱 들어가게 되면 자동적으로 거기서,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는 그런 지점이 있었어요. 구약에서 어떤 지점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사울도 예언을 했다 되어 있어요. 벌거벗은 채로. 그래서 사울도 하나님의 선지자 중에 하나냐 하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그렇게 되었거든요.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에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19:24).
보통 기도원 같은데 이름을 보게 되면, 그 기도원만 올라가게 되면 바로 기도원 입구부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방언을 하는, 그런 기도원이 되고 싶어 해요. 기도원 원장들이.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왜 하느냐, 아무리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더라도 그 예언의 마지막 최종 정답은, 그 확답은 그 예언을 한 사울과 다윗의 만남에서 다윗이 쫓기고 핍박받는다는 그 사건이 하나님의 모든 일의 집대성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성신 받아 예언한다, 이게 끝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해요.
사울이 백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하면 뭐합니까? 다윗 잡아 죽이려고 했죠. 가해자죠. 피해자는 다윗인데. 성경은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어떤 신적인 놀라운 기적과 이적과 표적, 방언, 이 모든 것을 다 허용하는 이유가, 글쎄 그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그 신기함이 결국에는 십자가라는 진짜 신기함, 십자가라는 숨겨진 복음을, 진리를 알리기 위해서, 그런 신기함을 찾는 인간들에 의해서 도리어 진짜 복음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원하는 신기함을 막 깔아놓으신 거예요.
버림받은 진리, 질식당하는 복음, 미움 받는 복음, 점점 소외당하고 버티기 힘든 십자가 복음, 그야말로 한마디로 말해서 포위되었어요. 오늘날 십자가 복음은 포위되었어요. 십자가 안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전부 다 모른다고 하고. 십자가 이야기에 질식당하게 되었어요. 십자가, 십자가 하지 말고, 지겹다 이제는 그 이후를 알려 달라? 구원 그 이후! 무슨 십자가 그 이후가 어디 있습니까? 구원 그 이후가 어딨습니까? 그런 것 없어요. 그걸 알려 달라는 것은 은근히 나 잘났으니까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자기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 앞에서.
그래서 십자가만 증거 해야 돼요. 왜? 자신의 숨겨진 본색은 십자가로 마감되는, 종착되는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거짓적이고 위선적인, 거짓 선지자만 찾고, 오히려 본인 자체가 거짓 선지자로 행세하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 안다, 복음 안다, 주장했지만 결국 다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신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것, 다 먹고 살자는 주장이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을, 주여 십자가로 다 들통 나게 해주시고 우리 자신도 들통내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만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