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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73강-제사장의 존재의의(신12;11-14) 1603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8. 07:15
2016-03-06 14:58:28조회 : 63         
   제사장의 존재의의 160306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제사장의 존재의의(신명기 12:11-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yANpR6qxnbM, Hit:3

 이근호 16-03-06 15:44 
레위인의 존재 의의

2016년 3월 6일                              본문 말씀: 신명기 12:11-14

(12: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12)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찌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2: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12: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하면 질서잡기에 나섭니다. 작은 단체에서부터 최고 큰 단체라 할 수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서양에서 중세 지나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을 인간 사회에서 내쫓고서는 인간이 인간들끼리 모일 때는 어떤 식으로 나라를 꾸려나가면 좋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속해 있는 그 삶의 환경이 그냥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긴긴 역사와 사건이 사전에 전개되어 왔던 현상입니다. 이 상황과 맞춰서 살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말합니다.

홀로 바르게 사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그 인식도 이미 긴긴 역사를 통해서 점차 누적된 경우들이 내놓은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은 마치 진리의 가현처럼 여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도리어 그 환경이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환경으로 사용하시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민주주제도가 신이 내리신 진리체제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의 동의를 얻어 국가 업무를 위탁받은 사람들이 장악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책임이 일반 다중으로 구성된 의회에 속하는 민주정, 몇몇 선택된 사람으로 의뢰를 구성하는 귀족정, 국가 업무 담당과 그에 따른 통치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군주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군주정 아래에서도 다중이 충분한 자유를 누릴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다중의 지지에 대립해서 군주의 개인의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라면 그보다 더한 불행은 없습니다. 집안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권리를 소유권으로 바꾸고 자녀를 노예처럼 다루는 방식으로 집안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귀족정이 만약 최고 의회의 전적인 의지와 힘에 의존한다면 군주정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귀족통치가 군주정보다 더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족정도 태생적으로 결정적 문제가 있습니다. 법을 지지하는 자가 그것을 위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불합리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귀족 스스로가 만든 법으로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징벌해야 한다는 구조로 인해 법은 구속력이 약하고 쉽게 파기될 수 있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래서 법보다는 귀족의 선택, 전적으로 소수의 변덕스러운 의지, 법으로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의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민주정에 대해서는 능동적 성격과 역할에 주목합니다. 민주정은 완전히 절대적인 국가에 해당합니다. 민주정은 법에만 충성할 의무를 갖고 있으며 더욱 독립적으로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최고 의회에서 투표할 권리와 국가 관직을 담당할 권리를 갖는 국가입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치적 권리를 갖지는 못합니다. '독립적으로 훌륭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한정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자신의 속성을 따라 남겨놓으신 정치질서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이 바로 제사장제도입니다. 제사장은 ’죽음을 보편화‘하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엄연히 살아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상태에서나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인간들은 모두 죽은 자로 취급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자신의 죽음 너머의 세계로 데려가기를 원하시면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도리어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점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의 연속된 활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기능이 제사장직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하고, 동행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들 끼리 기존 목숨들을 부지하는 것이 동행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생명은 ‘목숨을 값으로 치뤄야’ 도달되는 세계에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흠없는 목숨이 대가로 들어서야 합니다. 제사장은 바로 이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성사시켜 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제’라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존재유지를 위한 제사방식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제사장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그 기능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로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내에 ‘죽음의 보편성’을 매일같이 되풀이하게 합니다. 하지만 일반인들로서 이런 ‘보편성’을 개인적으로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인의 것으로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루마티스 환자들에게나 용한 루마티스 전문가가 그토록 존경스러운 법입니다. 하지만 그 외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필요한 분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아쉬운 것을 채워지고 자신을 더 위대하게 되는데 보탬이 되고 이익되는 식으로 관심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다 다른 처지에서 일관된 보편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보편성’이란 ‘사람의 필요에 따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로 따른’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7장에서 나오는 ‘영원한 제사장’의 등장입니다. 히브리서 7:3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기존의 세상의 제사장은 이 땅의 관계성 속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이 땅에서 완전한 조직체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세계를 향하여’ 계속 땅의 의미를 삭제하는 기능을 행하야 합니다. 목숨 부지를 위해 전력을 다 쏟아붙은 세상에서, 제사장은 목숨이 아니라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느냐를 지상에서 재현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이스라엘이기에 그들에게 있어 제사장 기능에 필요한 물자들을 계속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공급되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07 01:38 
73강-신 12장 11-14절(제사장의 존재의의)1603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2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만났습니다. 만날 때에 하나님하고 자기들만 덜렁 만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끼어든 것이 있죠. 중간에 끼어든 것을 ‘율법’이라 하고 더 구체적으로 종속적인 것은 ‘제사법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제사 없이는 못 만난다는 겁니다. 이거는 죽음 없이는 못 만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간과 인간끼리 만날 때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17세기쯤에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조직을 만들 때, 딱 세 가지 종류의 정치 조직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그게 뭐냐, 군주제, 귀족제, 민주주의제도,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라고 그리 봤습니다. 군주제라고 하는 것은, 모든 권력을 한 사람에게 다 위임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왕이죠. 귀족제라 하는 것은 왕이 바보 같으면 곤란하니까 똑똑한 엘리트 모아서 정치하자. 지금 중국 인민공화국에서 하는 것이 그거에요. 민주제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각자 의견을 누구한테 전달시키고, 전달시킨 그 사람이 그 지역에 모여서 그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의견을 가지고 온 국민들에게 도로 베풀어주는,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그것을 민주주의 제도라고 하는 겁니다. 민주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국회, 국회의회의 기본이 되어서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국회의원들하고 군주하고 결합한 것이 입헌군주제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지금의 영국 같은 것, 왕도 있고 의회도 있고 또 일본도 만찬가지고. 그것 말고 왕이 정권을 쥐고 하는 나라도 몇몇 나라도 있습니다. 있는데, 이 왕, 이 귀족들, 그리고 민주주의, 그 정치 중에서 어느 쪽이 맞습니까? 라는 말을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러한 제도를 실시하게 된 이유가 바로 사유재산 때문에 생긴 겁니다. 내 재산 누가 보호할 거냐?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 전에 유럽에서는 모든 재산은 하나님 거였습니다. 이웃을 돌보라고 주신 재산으로 봤습니다.

근데 주체사상에서는 비록 하나님이 주셨지만 내 노동이 가미되면 그 노동이 소유권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은 내가 힘들여서 벌은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거기다가 하나님도 내 재산 내가 지키라고 했다. 이렇게 하거든요. 교회 제도, 교회법 제도를 민주주의로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이론과 결부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서 만든 법은 교회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만든 법이라고 보면 돼요. 민주주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돈밖에 모르는 세계에서 가장 내 돈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 민주주의 제도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아주 모가지 친 거냐 하면 아예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이라는 그 자체를 없애버리는 그 결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살자. 쓸데없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확인되지 않는 그 신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 헤어지고, 역시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것은 내 재산과 그리고 내 자식, 내 혈연관계 그게 전부이죠.

모든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모였을 때에 제일 먼저 등장한 국가제도는 왕입니다. 왕인데, 그걸 두자로 번역하겠습니다. “깡패” 그 왕의 부하를 “양아치”라고 이야기하죠. 그게 창세기 4장에 최초로 나옵니다. 제가 창세기 4장 미리 강의하면 이렇습니다. 가인의 아벨을 죽였는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인을 살려두고 그 자식들을 확장시킵니다. 그 확장시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의 나름대로의 집단을 한번 번성해봐라. 그리고 그 번성할 때 거기서 나온 그 원리가 뭐냐, 창세기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3절,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나는 왕이거든. 왕을 건드리면 벌을 받는 제도. 모든 권력과 힘이 한 사람에게 완전히 집중되는 그런 제도. 그런 제도가 인간과 인간끼리가 만든 최초의 제도입니다. 이게 낯설지가 않아요. 왜? 몇 수 십 년 전만해도 온 가정마다 그랬어요.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다.” 그게 바로 라멕이에요. 라멕의 재탕입니다.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이게 뭔 뜻이에요? 나는 왕이고 니는, 내 졸개다. 이 말이에요. 여자를, 아내를 그렇게 본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가, 내가 그러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래야 가정이 된다는 거예요. 가정 질서가 된다는 거예요. 가정 질서가 왜 되어야 되는데? 그래야 내 자식들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근데 그 전체가 하나님이 악을 번식하도록 그렇게 의도적으로 몰아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누가 갑질 한다고 하지만 본인도 그 자리에 앉아보세요. 본인도 갑질 하죠.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거예요. 자기 앞에 굽신굽신 거릴 때 비로소 살맛을 느끼는 거, 이거는 누구나 그러는 겁니다.

전에, 수십 년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왜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 가지려고 하고, 부교역자 안 할라고 하고, 왜 당회장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느냐, 그거는 갑질하고 싶은 정신, 라멕의 정신을 본인이 삭히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난 수요일도 여자 목사님이 참석했지만 말입니다. 여자 목사님이 저한테 질문을 한 것이 있어요. “목사님은 여자 목사님을 옹호합니까? 아니면 반대합니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신에서는 반대하는데, 어떤 강사가 잘려서 요새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어데, 여자가 목사를 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데, 왜 자꾸 목사 되려고 하느냐? 근데 그 합동측 빼놓고 전부 다 여자 목사 시켜 주는데, 목사님은 어느 쪽이 맞습니까? 라고 해요.

그럴 때마다 답변하는 것이, 그 목사 왜 되려고 하느냐? 에요. 그 갑질 하려는 본성을 못 이겨서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여자 사찰을 허락하라! 이런 데모는 없거든요. 여자 종을 허락하라! 총회여! 이런 것 없다 이 말이죠. 여자 목사를 허락하라! 이 말은 이미 그게 좋아 보이거든요. 그게. 목사 자리가 굉장히 좋아 보이고 평소에 남자들이 그걸 가지고 교회에서 갑질 해대니까, 니만 갑질 하냐, 나도 갑질 하자. 이래가지고 그게 은근히 탐이 난 거예요. 그러면 이런 소리하지 말고 목사 당신은 어느 쪽이냐? 빙빙 돌리지 말고 딱 까놓고 이야기해라! 뭐냐, 교회는 말씀과 말씀의 만남이기 때문에, 말씀 전하면 임시적으로 목사 하면 되고요. 그 사람입에서 복음 안 나오면 목사라고 해도, 교인들이 취급 안 하면 되는 거예요.

왜? 교회는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발생되고, 그때그때마다 생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든, 남자든, 여자, 남자 따지지 말고 오셔서 복음 전해주실랍니까? 그러면 임시 땜빵으로 목사 되면 되고, 복음 더 이상 안 나오고 슬슬 갑질 하려고 하면 교인들에게 목사라고 우겨도 그 사람은 목사 아닌 거예요. 라이센스, 이거는 인간세계에서 만든 것이지 주님의 나라에서는 라이센스를 허락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 모든 일은 천사가 해요. 그 천사가 하는 일을 눈에 보이게 하면 되지 않느냐?

그게 오늘 본문 제목이에요. “레위인의 존재의의”입니다. 이미 신약에서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확정되고 난 다음에는 사도라 할지라도 “나는 십자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볼로? 뭐 게바? 우리는 그냥 뿌리는 자고, 심는 자고, 물주는 자이지, 자라게 하시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누구도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말씀의 완성을 개인에게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에요. 스데반 집사도 믿지 마세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말씀의 언약이 보이는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다른 분의 기능을 이 땅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능을 발휘하는 그 분에게 몽땅 다 갔어요. 군주제에요. 그 분을 왕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지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언약 완성과 무관한 사람이다.” 다만 언약 완성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저 분이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자로서 사도 바울이 세워 진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과 우리하고 똑같죠. 자기를 증거 하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 하게 되면, 그게 아프리카를 가든 어디를 가든지 임시적으로 목사가 되죠.

왜, 자꾸 임시적이라고 하느냐, 왜냐하면 임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항상 그때그때, 그 순간 발생되기 때문에, 교회가 발생되었다 사라지고 발생되었다 사라지고 그런 겁니다. 자 그러면 다시 정리해봅시다. 귀족주의도 아니다. 엘리트주의, 똑똑한 사람 뽑는 것도 아니고. 군주제,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면 하나 남았는데, 이스라엘 제도는 뭐냐, 이게 레위제도에요. 제사장 제도입니다. 이걸 자꾸 누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제사장이거든요. 선지자고.

제사장 제도가 교회제도입니다. 그러면 제사장 제도하고, 제사장이 왕질 하면 그거는 제사장이나 왕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제사장 제도로써 왕 한 것과 일반의 왕이 차이점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살아있는 자가 왕질 하면 이거는 군주제가 되지만 죽으신 분이 왕이 되게 되면 이거는 제사장 제도가 되는 겁니다. 복음이란 뭐냐, 구원이란 뭐냐, 이미 죽었던 분이 살아있는 사람을 자신의 죽었던 세계로 초빙하고, 초대하고 뽑아 가줘는 것이, 그것이 구원이에요. 산 사람을,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자꾸만 죽은 자기 세계로 데려가는 그 과정이 바로 성령의 의한 구원과정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인간들이 얼마나, 아까 <존 로크> 이야기한 것처럼, 얼마나 인간들이 자기 사유재산 안에서, “이거 내 거야! 내 거야! 이거 내가 노동한 거야!” 자기 노동을 가치로 바꾸어서, “이거 내 거야! 건드리지 마!”

근데 그 인간이 죽었다고 한다면 뭘 놔 버려요? 그동안의 자신의 사유재산을 다 놓아야 되고, 이거는 곧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기 비난, 자기 포기, 자기의 삭제를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내 노동을 포기했다는 뜻이에요. 이거는 자기 자아의 죽음, 자기 주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한 적절한 예가, 그걸 반복하는 것이 제사장제도인데, 그걸 반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과 제물들을 오늘 본문에 보면 한마디로 거제라고 했어요. 거제. 거제라는 말이 나와요. 11절에 “너희 손에 거제” 지났지만 6절에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

제사에 거제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말은, 거제라는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이것이 제사장의 유지와 관련된 제사, 우리는 죽더라도 제사장은 무조건 밥 먹고 살아야 된다는, 제사장의 존재를 자기 존재보다 우선시하면서 그 의미를 담은 제사가 바로 거제입니다. 높이 들리는 거예요. 그걸 높이 들면 제사장이 그걸 흔들죠. 요제. “주여, 저 사람들이 나만 살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주님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를 주님이 마련하신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그것도 특수한 죽음입니다. 일반 죽음 말고. 특수한 죽음에 저들을 참여해서, 그 특수한 죽음의 공간이 천국인 것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안에 있는 약속의 내용입니다. 참 이상해요.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는요,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더 편하게 살 수 있느냐, 그것과 관련된 인간들끼리의 협약이고 계약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도 문제가 있기는 있지만 대충 보면 그래요. 사회 계약을 맺어서 그렇다는데 사실은 문제가 있어요. 언제 어린애보고 계약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거는 부모가 그 안에 살고 있으니까, 그냥 태어나니까 한국 사람이나 미국사람이죠.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 하는 겁니다. 자꾸 14년 전에 쫓겨난 유승준이가 한국 들어오려고 하는 것은 계약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계약 위주가 아니고 출생지 위주입니다. 타고난 그것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살아있는 내가 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부여받는데, 제사장 제도는 그게 아니에요. 매일같이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매일같이 뭘 쳐다보느냐, 제사장이 제대로 지금 잘 굴러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될 그런 관계가 제사장 제도입니다. 참 이게 어려운데,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쉽게 말씀드리잖아요. 돌아온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얼마 전에 시작했는데 거기에 보면 주인공이 지가 죽었다고 설치해놓은 그 제사에 지가 절을 하고요, 앞에 있는 잿밥을 지가 먹어요. 희한하죠. 영정사진 딱 있는데, 사진보니 지 사진이라. 사진을 딱 걸어놓고 가족들은 죽었다 하는데 자기는 멀쩡하게, 멋있게 근육질 있는 가수 비로 변해 그 앞에서 통곡하며 엉엉 우는 겁니다. 누구한테 우는 건지, 지는 살아있는데 왜 울죠? 지가 제가 볼 때는 살아있다는 것을 가족들한테 말을 못해서 우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미래상을 제사장이 미리 하나님과 맞닥트리면서, 그 초상화, 살아있는 내 초상화가 결국에는 저 초상화로 변한다 이 말이죠. 죽은 나와 하나님께서 만날 때는 잘났습니다가 아니라 어린양을 인정하느냐, 그러면 하나님과 살고 어린양의 피를 인정 못하면 죽어요. 왜? 그게 약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민주주의 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협의한 것이 아니고, 우리끼리 뭐 사유재산가지고 흥정한 것이 아니라, 이리 확정이 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거 진짜입니까? 현실에 맞는 이야기입니까?” 하는데 그게 현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홍해 건너가는 것 보면 알 수 있고, 애굽의 열 가지 재앙 나타날 때 알 수 있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를 때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고, 이 사람들만 맏아들이 멀쩡하게 살아나는 그 현장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 포도주를 나누고 떡을 나누면서 이거는 내 살고 내 피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더 확실하고 최종적인 것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사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그리고 산 자들을 자기가 죽어서 가신 그 나라로 우리를 데려 가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 제도입니다. 살았느냐? 자, 나와 함께 십자가에 더불어 죽고 나와 함께 진짜배기로 살러가자. 제가 지난 울산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이거는 맞습니다. 먹는 것 있어야 되고, 입는 것 있어야 되고, 잠 잘 때 있어야 되는 거예요.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위해서. 그러나 하늘나라에 필요한 것은 목숨이 아니고 생명이거든요.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쌀도 아니고 오곡도 아니고 돈도 아니에요. 옷도 아닙니다. 아파트, 집도 아니에요.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레위언약입니다. 대신 죽으신 그 피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합니다. 영원토록. 따라서 제가 그 분들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뭐 답변할 분들도 아니시지만 일방적으로 물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살 겁니까? 생명을 위해서 살 겁니까?” 물었어요. 그 분들이 답변을 못하죠. 그러면 생명을 위한 것 같으면 지금 직장에 사표를 내야 됩니까? 이런 소리가 나올까봐 겁이 나는데, 저한테는 그런 소리 안 나오겠죠. 안심 푹 놓고 답변하세요. 생명을 위해서 산다면 그전까지 나의 직장, 나의 가족, 나의 돈, 나의 저축한 이 모든 것이 나의 생존인 것처럼 여겼던 그것의 의미를 바꿔주면 돼요.

이 돈 있어도 이 돈보다 더 좋은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쓰레기를 모으고 있다 이 말이죠. 그 쓰레기 중의 하나가 벤츠잖아요. 벤츠. 그 쓰레기 중의 하나가 내 아들이 사법고시 합격한 것이고. 그래서 울산강의 때 “이이고, 저 두 번째 쓰레기가 사법고시에 또 합격했네. 아이고, 저 쓰레기 언제 치울꼬?” 이렇게 사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빌딩 가진 것이, 빌딩 이름이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삼성 그룹이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왜? 내 생명에 요만큼도 보탬이 안 되니까. 목사라는 이 라이센스가 쓰레기에요. 장로, 집사가 쓰레기에요.

전혀 주께서는 이 민주주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쓰레기야! 나는 쓰레기를 부르러 왔다.” “뭐 주시려고요?” “니 목숨이 귀하지? 나는 생명 줄게.” “하나님 어떻게 생명을 주십니까?” “목숨 다오. 생명 내놓을게.” 이렇게 되거든요. 우리의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목숨이 닳아지고, 또 닳아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 제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 왜 죽는가? 내가 죽는가? 는 중요하지 않아요. 원래 쓰레기니까.

제사장이 왜 어린 양과 함께 날마다 죽어야 하는가? 그 의미는 한마디로 말해서 죽음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죽음의 보편성. 이거 설명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전에 미국에서 우리교회에 오신 목사님 계시죠. 그 사모님이 류마티스의 전문의입니다. 자 우리들 가운데 류마티스하고 전혀 관련이 없다고 칩시다. 제가 좀 무릎이 좀..그때 주사 맞을 걸. 류마티스하고 아무 상관없는데, 제가 우리 사모님은 류마티스에 세계적인 전문가입니다. 어땠습니까? 존경스럽습니까? 물으면 으음~ 류마티스와 상관없는 사람은 류마티스 전문의 전혀 존경스럽지 않아요.

장기 두고 화투는 칠 줄 아는 사람들, 바둑 하나도 못 두는 사람들은 이세돌이 왔다고 해도 전혀 존경스럽지 않아요. 이세돌인지 삼돌인지 사돌인지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인공지능과 9일에 다섯 판 붙게 되어 있는데, 10억 걸고, 이기면 다 가져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바둑 못 두는 사람은 전혀 존경스럽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 자신이 절대화된 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나한테 이익이 되고 내가 뭔가 은근히 바라게 되고 추구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그것만 존경스럽지 그 외에는 전혀 존경스럽지 않습니다. 이거는 보편화되지 못하고 개개인 중심에 특수화가 된 거예요.

젊은 아가씨들이 유아인하니까 와우!! 유아인에 대해서 평이 이래요. 유아인은 어떤 사람이냐, 얼굴이 선행이고 몸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권사님들은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구원은 원래 교회에서 주는 거잖아요. 근데 유아인 몸만 봐도 구원받은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천국 간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얼굴은 선행이고. 그러나 남자들은 별로 잘 생겼다는 느낌을 못 받아요. 유아인이 그 소리 들으면 어이없네~ 그 소리 할 겁니다. 보편적이 되지 못해요.

왜냐하면 나한테 필요한 것만 줄 수 있으면 나는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나한테 잘해주면 좋은 하나님이에요. 내가 이미 절대화된 입장에서 하나님도 나와 개인적으로 관련된 하나님이지, 온 세상과 보편화된 하나님은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어린 양하고 왜 그렇게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가, 죽음의 보편성 때문이에요. 모든 인간이 잘났다고 하지만 죽음 앞에서 누구는 잘났다, 이쁘다가 전부 다 사라집니다.

그것이 뭐냐, 히브리서 7장에 나옵니다.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멜기세덱을 보게 되면, 3절 읽어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마무리하겠습니다. 멜기세덱 이 사람은 제사장인데 어떤 사람이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당시에 이거는 가짜에요. 하나의 모형입니다.

이 사람들은 거제를 통해서 “우리는 가짜입니다. 진짜는 따로 계십니다.” 라는 표시를 하듯이 드리는 거예요. 누구를 향하여? 진짜 영원히 계시는 제사장을 향해서. 그 분이 누구냐, 진짜 멜기세덱의 반열에서 완성하신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보편성입니다. 성도는 바로 류마티스 걸리나 안 걸리나 주님만은 영원한 자기 구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까 목사님 사모님이 등장했다, 존경스럽죠. 류마티스와 관계없는데? 주께서 또 보내신 형제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유명의사라도, 일반적인 보통사람이라도 같이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예수님바라보라고 만나게 해주신 그렇고 그런 얼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가 못났고 서로가 잘난 것 없음을.

진짜 보편성은 각자가 보편성이 아니고 내 중심이 아니라 따로 계시다는 것. 그 분은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면, 우리는 아비도 있고 족보도 있고 어미도 있고 소속도 있으니까 우리는 자꾸 우리 절대성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에 있어요. 그 한계를 날마다 제사장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삭제하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이 주신 생명을 앞당겨서 담아내는 그릇으로 산다는 사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준비해야 하는 예물들이에요. 그러한 상태로 하나님이 지금 신명기 12장에서 동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군주제, 귀족제, 양반, 쌍놈, 민주제, 기껏 인간들이 아는 세상. 그런 조직으로만 알았는데, 하늘나라와 땅 사이에 제사장이 계셨습니다. 죽음의 세계로, 그 천국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앞당겨서 생존하지 말고 생명을 담으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