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74강-피 섭취 금지(신12;15-16)1603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15. 07:27
2016-03-13 15:12:32조회 : 48         
   피 섭취 금지160313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피 섭취 금지 (신명기 1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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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3-13 16:12 
피 섭취 금지

2016년 3월 13일                           본문 말씀: 신명기 12:15-16

(12:15)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즐기는 대로 생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무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음과 같이 먹으려니와

(12:16)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서 노아의 방주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되어 있습니다. 구조물 속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편리하지요.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잠수함 같은 것을 인간 앞에 대령했을까, 사람들은 구원의 간편함에 환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 간편함을 속히 떠나 계속 추가적인 조건을 가미하시는 겁니까? 왜 인간들에게 구원받는데 있어 지속적인 부담을 지워주시는 겁니까? 고린도후서 12:1-4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본인이 천국에 갔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아닌 제삼자가 간 것으로 처리하는 겁니까?

그것은 지상에 있던 자아와는 전혀 다른 자아가 거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계열에 속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형상은 아담의 육이 아니라 전혀 다른 육으로만 합류가 성립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44-49절)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예수님과 더불어 그 몸의 형체는 태양과 같이 빛났습니다. 노아 방주를 통해서 구원이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그 세계는 결코 최종적 천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언제 오는 겁니까? 언제 우리 육체가 해같이 빛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첫열매가 되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3층천에서 해와 같이 빛납니다. 오늘 본문처럼 노아 방주 이후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율법을 유입시키는 이유는, 노아 방주처럼, 어떤 구조물에 몸을 집어넣는 식으로 것으로 하늘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몸만 해같이 빛난다고 천국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이냐 하며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줄곧 내려오는 그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바꾸는 작업을 위하여 오늘 본문과 같은 율법이 이스라엘에 계속 투입됩니다.

율법이 인간에게 투입이 되면, 인간들은 자신도 예전에 미처 몰랐던 속성이 투입된 율법과 연관지어서 밖으로 배출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곧 ‘자기 잘남’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나로 인해 내가 살기’, 혹은 ‘나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는 그 현상은 곧 아담에서 물러받은 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아담의 속성이 죄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마주칠 때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대할 때, 주변의 유대인들은 무척이나 불쾌함과 굴욕감이 작동되곤 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했던 그들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는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분개를 유발시키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 빼놓고 누구도 예수님에게 그런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마음을 스스로 바꿀 의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아담의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합류하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을 천국 마음으로 바꾸기 위한 조치가 율법을 통해서 실시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피’ 단어가 나오고 ‘땅’ 단어가 나옵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이번에는 ‘피를 먹지 말고 물처럼 땅에 버려라’는 명령으로 전개됩니다. 피가 땅에 관계하는 관련성이 어떻게 아담의 마음을 예수님 마음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을까요? 이는 ‘천국’ 곧 ‘하늘’이란 하늘만 쳐다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땅’ 안에 ‘하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율법을 투입하므로서 ‘의로운 피’ 흘리시는 최후의 인격체를 항햐여 역사는 달려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새로운 형상’을 위한 언약투입 작전입니다. 기존의 아담의 형상이 아닌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 그 중간 중간 동물 제물들이 투입되고 그 제물들의 피가 노아 때 방주라는 구조물의 기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창세기 9:5-6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서 제시된 계명들은 ‘제물의 피’관리 집중하면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즉 피를 흘려야 될 인격체는 결코 아담의 계열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지어 이 땅에 나타날 그분이 흘린 바로 그 피만이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그 피를 섭취해야 할까요? 안됩니다. 그 이유는, 기존의 형상에다 더 추가해서 보탠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즉 제사를 많이 드리고 제물을 많이 바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배척받았기에 비로소 발생된 피가 십자가 피이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상황을 반복해서 실시하십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개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죄인이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피를 믿으므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피의 능력에 의해서 븥들려버린 자가 구원받은 자입니다. 이 사람은 3천층에서는 자기 자랑을 못할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간에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반기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3-14 06:25 
74강-신 12장 15-16절(피 섭취 금지)1603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2장 15-16절입니다. 구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즐기는 대로 생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무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음같이 먹으려니와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어요. 옛날 노아 때는 방주를 만들어서 물의 심판에서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맞죠? 방주 만들죠. 그렇다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괜찮은 그런 건축물이라든지, 구조물을 만들어가지고 이 마지막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면 얼마나 간편할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지금도 미국 같은데, 돈 많은 데는 마지막 핵전쟁을 대비해서 스스로 피난 센터를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소용없는 이유가 마음이 안 바뀌면 소용없어요. 천국은 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과연 천국이 좋아져야 되는 겁니다. ‘세상에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 하고 놀라운 세계가 있어요. 거기는 이런 마음 가지고서는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는데 천국입니다. 일층, 이층, 삼층. 그 삼층 천에 올라갔을 때 사도 바울이 하는 고백이 굉장히 실없게 들립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삼층 천에 올라갔는데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내가 분명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나인 듯이 나가 아닌 다른 나인 나. 뭔데 나인데 지금의 내가 예상한 내가 아닌 이상한 다른 내가 그 삼층 천에 올라 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절차를 통해서 됐느냐, 그러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복음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능력이 너희에게 임함으로 너희는 지금의 너가 아닌 다른 너가 되어 있다. 그 다른 너가 예수님을 닮았지, 기존의 아담을 닮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빨리 했는데 천천히 하면, 그 하늘나라에 갔는데 그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아담을, 아빠 엄마를 닮은 나, 그러니까 아담을 닮은 그런 나가 아니고, 예수님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영광을 닮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기에 가 있다. 이래 된 겁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있으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맞는 말인데, 문제는 마음도 예수님 닮은 상태에서 그것을 내다봐야 할 텐데, 이 썩어 빠진 아담의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껍데기만 부활의 영광을 취하면 이게 맞아들어 가겠는가 하는 거죠. 절대로 안 맞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주 만들어서 들어가자!” 우리 같으면 굉장히 쉬워요. 그냥 발 딛고 들어가면 돼요. 문 닫히고. 자동문이니까. 들어가면 참 좋은데, 거기에 들어갔다 나온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고 지 자식도 저주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게 다가 아니더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주 실려서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고 해서, 새로운 땅에 도착한 그 땅이 그게 아닌 거예요. 1492년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명령을 받아서 대서양을 건너와서 자기는 신세계 인도라고 생각해서 했는데, 와보니까 자기가 생각한 인도가 나중에 보면 인도가 아니었어요. 아메리카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보니까 그게 미국에 들어간 거예요. 아메리카노 커피하고 관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거는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속성은 아담의 속성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영광스러운 것을 그냥 껍데기로 덮치려고 하니까 이게 안과 밖이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맞지를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구원이 되려면, 영광은 물론 하늘의 눈부신 영광이고,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맞춤, 거기에 옷을 입을 만한 맞춤짜리 마음마저도 주께서는 이걸 바꿔주는데 어떻게 마음을 바꿔주느냐, 바꾸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3장의 말씀인데, 율법을 주는 거예요. 법을 주게 되면 가만히 있던 우리의 마음일 발작을 일으켜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잘났습니다.” 하고 갑자기 그 법에 대해서 핑계와 불만과 불평과 또는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마구 튀어나오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대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온 것이 더러운 거예요. 시기와 질투와 이런 온갖 것들이 나온다 말이죠. 그것을 이제 끄집어내는 겁니다. 옛날 초등학교가 다닐 때 난로 피웠는데, 다음에 불 피울 때 당번이 속에 있는 쓰레기를 끄집어내야 하잖아요. 그 긁어내는 작업을 율법이 해주는 거예요. 긁어내는 작업. 제가 의존교회에 가서 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전에 우리 안에 있다가 삐져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 삐져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더러운 구석이 삐져나오는 거예요. 독소가 나오는 거예요. 해독주스 먹고 독소가 나오는 거예요.

주의 사랑이 오게 되면 그동안 나는 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지 잘난체하는 것이 바깥에 삐져나오는데, 그 삐져나오는 것을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 율법이 마중을 나와요.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마중을 나오는가, “이거 해봤나?” “해봤다.”고 하면 “그럼 이거 해봤나?” “고거 했다.”고 하면 “요건 해봤어? 마음속으로 니가 남을 미워해 본 적 없어? 니가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니가 맹세했잖아? 니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했는데 니 오른 눈이 아직 멀쩡하잖아? 왜 아직도 멀쩡한데? 니 오른 팔을 잘라내라고 했는데 니 오른 팔을 왜 아직도 갖고 있어?”

그러니까 주께서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우리가 법에 대해서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진즉에 지킬 수 없다고 하면 일은 깔끔하게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영광스런 삼층 천에 우리가 올라갔을 때에 “주여, 제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말씀 지켰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그 말을 미리 땡겨서, 말씀이 주는 그 지점에서 고백을 하게 되면 마음 바뀐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마음 바뀐 사람.

제가 이 정도 이야기하면 ‘아! 뭘 해도 죄가 되는구나.’ 하고 여러분들은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것도 뭐 방주 들어가는 것처럼 별로 어렵지 않네. 뭐 연습하면 되니까. 뭘 해도 죄인입니다. Yes Sir! 죄인입니다. 이것도 하기 쉬운 겁니다. 하기 쉬운 거거든요. 뭘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하기 쉬운데, 막상 주어진 현실 속에서는 그게 굉장히 어려워요. 아까 김민정 성도님 기도했는데, 오후에 기도를 한다는 이 말은 어떤 기분이냐, 곧 이세돌의 기분이에요.

온 세계에서 다 쳐다보고 있습니다. ‘니가 어디 수를 잘 두는지 못 두는지 함 지켜 볼 거야.’ 기도 못한다는 온 소리를 듣고 “네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러면 될 텐데. 실제로 시키면 삑(☓)이럽니다. 이게 뭐냐 하면 말로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해놓고 실제는 이게 안 돼요. 나는 우사스러운(창피한) 것은 안 돼. 이게 현실인 거예요. 하나님! 이것까지는 노출시켜도 되지만 이런 것 까지 노출시키면 저 창피해서 교회 못 나옵니다. 이런 게 있다 말이죠.

굴욕적인 것. 그 굴욕적인 것을 주께서 십자가 앞에 끄집어 나올 때, 그때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관계없이, 그냥 남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여! 어찌 할까요?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그 대화는 강도가 남을 의식해서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했을 뿐이에요. 주님 앞에 저 죄인입니다. 이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죄인이라는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못 알아듣습니다.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니만 젠틀맨이냐? 나도 젠틀맨이다. 그렇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걸 꼭 남한테 믿는 체 해가지고 나는 죄인이라고 떠벌리면 이거는 밤새도록 자존심 상하는 것 밖에는 안 돼요. 목 다 쉬면서 그것밖에 안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럴 필요 없이 주님 앞에만 하면 될 것을, 떠벌리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나 잘 났다고 자랑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께서는 말로, 지식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실질적으로 우리 삶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보통 굉장히 놓치고 싶은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16절에 나오는데 “오직 그 피를 먹지 말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중요해요. “물같이” 그 다음에 “땅에 쏟을 것이라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천국은 땅에 있다는 겁니다. 천국은 땅에 있다. 이미 땅에 천국의 흔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예요. 하늘에서 준 별이 땅에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왔다면, 그 보석이 하늘 쳐다보지 말라고 하면, 하늘에 있던 그 별이 땅에 온 거예요. 동방박사가 그 별 따라 왔었고. 어둠에 있는 세계에 빛이 비취나니. 빛은 이미 이 땅에 온 빛이에요. 죽어서 하늘나라 보면서 빛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땅에 이미 내주하신, 이 땅에 들어온 빛을 봐야 해요. 그걸 베드로후서에서는 “샛별”이라고 해요. 샛별이 이미 니 마음속에 떠오르고 있다. 이 말은 니 마음 어두운 거야. 이런 뜻이거든요. 니 마음이 어둡지만 별은 떠올랐다. 그 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온 방주부터 해서 온 율법의 완성이 그 안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 담겨있는 겁니다. 사랑이, 나밖에 모르는 이 어두운 세계에 사랑이 떠오르게 되면 그 현상이 뭐냐, 내 잘난 체 하는 것이 바깥으로 삐져나와요.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그동안 내 안을 잠식하고 있고 내 안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 독소들이, 죄들이 바깥에 튀어나오면서 그것이 바깥에 있는 율법의 세계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이 것이 니 안에 들어있었던 죄들이었다고 이렇게 주께서는 들추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져요.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병행해서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방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어요. 알았을 때, 그때 일어난 현상은 바로 축복과 저주를 양분해서 이야기 될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아! 너는 저주받아라. 아들아! 너는 축복받아라. 이것은 모든 아들이 내 뜻대로 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축복과 저주를 나를 통해서 세상에 던지게 하고 퍼트리는 겁니다.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내 몸을 통해서 퍼트리는 거예요.

아까 예배 전에 우리 하원이가 돌아다녔거든요. 전에 같으면요, 요 꼬마가 돌아다니면 그냥 꼬마가 돌아다닌다고 이래 생각을 했는데, 요새는 제 마음이 바뀌었어요. 꼬마가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 애를 키우는 외할머니의 아픔과 고통이 덩어리 채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아느냐, 참 이런 사적인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만, 외손녀가 아미가 세 달이 다 돼갑니다. 곧 있으면 백일 되는데,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해요. 혹시 담이 걸리지 않을까, 어디 아프지 않을까, 코만 벌렁거려도 뭔가 차여있지 않을까, 근데 본인은 아무 의식이 없어요. 그냥 막 삽니다. 지는 움직이는 대로 막 살거든요. 울고 싶으면 울고 젖 달라고 하면 젖 달라하고 막 사는데, 누가 조마조마 하는가, 옆에 보고 있는 엄마와 할머니가 밤잠도 못자고 조마조마해요. 애들이라 하는 것은 부모의 아픔, 이런 것은 전혀 몰라요. 앞에 앉아서 떠들어도 엄마가 뒤에서 얼마나 초조해하고 신경 쓰인다는 것을 애들은 모른다니까요. 지만 편하면 되고 지만 속 시원하면 되면 다 좋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심려와 배려가 하나의 작품화 되어가지고 작품처럼 있는 거예요. 애가 돌아다니까 뒤로 데려갔는데, 이게 예사로 안 보이는 겁니다. 아, 우리 아미도 언제 빨리 커서 저렇게 돌아다니고 할 수 있느냐, 그만큼 키우는 사람의 아픔과 고통이 많이 들어가야 되겠죠. 그 자식이 나중에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집가게 되면 시집가서 잘 사는가 봐야 되고, 사는 것을 지켜봅니다. 집은 전세인지, 자기 집인지 신경 쓰게 되고. 하여튼 항상 이렇게 보호자가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천국 가려면, 천국 간다는 그 시도를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철딱서니 없어요. 막 친구와 돌아다니면 그게 다예요. 그런데 우리를 천국 보내겠다고 정성을 시작하신 분이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정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껍데기는 영광스럽게 변한다고 했습니다. 속이 문제거든요. 속마음도 그 영광스러움에 부합되기 위한 영광스러운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준비된 시추에이션, 상황들을 딱, 딱 이렇게 주시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방주가 아니고 피를 먹지 말고 땅에 쏟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여기 담긴 내용을 알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16절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지니라” 방주 만들고 들어가면 되는데 왜 피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고, 방주 대신으로 우리에게 주느냐, 이거는 우리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 마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게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데 왜 이 말씀을 주시는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짓국 안 먹고 피를 땅에 쏟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야 그게 다가 아니야. 그럼 그게 다가 아니라면 어디까지 가야 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릴 때까지 가야 되는 거예요. 중간 과정에 이게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길게 이야기하게 되면 뭐 비비 꼬고 잠자고 뭐 이렇게 해서 간단히 결론부터 먼저 하고 결론 나오기까지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결론 부분이 창세기 9장 6절에 나옵니다. 노아가 홍수 마치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요 대목이 해답입니다.

이건 뭐냐 하면, 그 피를 쏟으라는 말은 그 피가 원래부터 속해있던 그 형상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형상이 예수님까지 오기까지 짐승의 모습으로 너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주셔서 그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 피는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된 형상에 속해 있는 피에요. 현재 우리 피가 아니고. 사람 피가 아니고. 준비된, 하나님께서 요 형상입고 천국에 올라오너라. 준비된 형상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말을 하는 겁니다.

그 전에 예수님의 형상, 천국 갈 형상과 아담의 형상, 지옥 갈 형상이 차이가 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실 하나님의 형상을 대용해서 바로 제물이라는, 양이나 제물, 짐승의 피로 그 오실 분을 미리 언급한 겁니다. 그 피는 너가 소유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의 피를 소유해서는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의 소유 대상이 안 돼요. 나 예수 피 가졌으니까 구원된다는 것은 없어요. 피가 우리를 소유해야 되지 우리가 피를 가질 수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피를 소유해버리면 현재 아담 형상에다가 플러스 추가해서 예수의 피를 마주치게 되는데, 이 피 자체가, 예수의 피가 십자가 피거든요. 십자가 피는 아담 형상을 배척하게 되어 있고 배제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하면 다 끌어 땡겨 가지고 그러니까 피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다.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예수의 피 때문에 나는 그대로 간다. 그대로 가서는 안 되거든요. 피로 인하여 내 마음 자체가 이게 바뀌어져야 하는데 안 바뀐 채로 그냥 가버리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그 피를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피거든요. 창세기 9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진 피는 너가 흘려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어요. 땅에 흘려서는 안 된다. 피는 하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땅에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노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피를 흘려서는 안 되는 인간의 형상에는 뭐가 계속 유입되는가, 하나님의 천국의 내용이 인간을 만들 때마다 계속해서 유입이 되는 겁니다. 유입이 되게 되면 그 인간은 계속해서 다른 인간으로 변모합니다. 다른 인간으로.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요.

그럼 인간은 뭐냐, 처음 인간은 나를 위한 인간인데 갈수록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된 피조물로 모든 인간이 전부 다 그렇게 규정을 받아요. 참 어려운 이야기,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쉬운 이야기인데, 우리가 교육받기를 이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식으로 우리는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과학적 사고거든요. 과학적 사고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단백질의 자기 존재 방식을 가지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단백질은 이웃하는 단백질과 교류하게 되어 있고, 교류해서 필요한 것은 남기고 필요치 않는 것은 자연 배설되고 이게 해체되게 되어 있어요. 그 일어나는 생명이 뭐냐, 메커니즘이 바로 생명의 현상이라는 겁니다. 모든 생물에서 그렇게 하죠. 그러면 더 나아갑시다. 그 세포는 뭐로 되어 있느냐, 모든 세포는 단백질. 단백질은 아미노산. 아미노산은 탄소 중심으로 되어 있는 유기체. 탄소는 뭐로 되어 있는데? 탄소는 탄소 원자. 탄소 원자는 수소와 전자와 핵으로 되어 있고, 핵은 뭐로 되어 있는데? 양성자, 전자, 중간자. 그건 뭐로 되어 있는데? 에너지. 그럼 그 에너지는 뭔데? 정보. 그건 정보죠. 숫자죠. 왜? 나중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 없는 것이 에너지화 되어서 그게 규칙에서 모아지면 그게 물질이 되고, 물질은 하나의 안에 있는 모든 물리 법칙에 정보화가 되어 있고, 그 정보화가 결집이 되어 가지고 원칙에 따라서 나중에 분자, 원자, 세포가 되고,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생명일 때, 죽음은 뭐냐, 해체다. 이게 결국은 불교사상이 되는 겁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죽음에서 죽음으로 간다. 니체라는 철학자도 세상은 영원히 돌고 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에요. 윤회설 비슷한 거예요. 영겁이죠. 그래서 그들은 영원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영원이라는 것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고 영원하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따먹고자 했는데, 그런 성질의 영원을 하나님이 차단해버렸습니다. 선악과조로 계속 돌아가는 영원은 내가 허용하지 않는다. 왜? 허용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염원해도 못가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러면 영원을 추구하는 인간 속에 다른 영원이 들어와야 되죠.

그 다른 영원이 바로 땅속에, 땅의 모습으로 하늘이 쳐들어온 거예요. 뭘 가지고? 피를 가지고 들어온 거예요. 그 피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완성했다는 증거로써 흘려지는 피에요. 그 피에 대해서 기존의 아담에 속한 인간들이 기여한 바는 뭐냐, 그 분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굴욕적인 자존심을 드러내면서 니가 뭔데 니를 믿어야 돼? 내 나름대로 착하게 할 수 있고 바르게 할 수 있는데? 니가 뭐야? 나는 내 행위로 구원받을 거야. 근데 주님은 이건 안 되고 이 피로만 된다고 할 때, 니 피가 뭔데? 나를 구원해주는데? 그 피를 내가 소유하면 되느냐?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소유할 수가 없는 피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기존에 있는 이 마음가지고서는 예수님의 하늘의 영광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소유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먹지 말라고 하는가? 이 말씀을 하고 오후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굉장히 깊은 이야기인데, 시간관계상, 또 여러분들의 단백질의 피곤 관계상 빨리 지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이 피를 먹지 말고 땅에 쏟으라고 주어지게 되면,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와락 모여드는 군상들이 있어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말씀을 우리가 지켰기 때문에 다른 민족하고 달리 우리는 구원받은 민족이라는 자기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아담의 본성의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말씀 주면 말씀 순종하고 뭐 하라고 하면 듣겠나이다. 쉐마, 쉐마 듣겠나이다. 해가지고 우리는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그 악마의 본성을 확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다 그래요. 꿇리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 절대로 굴욕적인 것이 아니고 당당하게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스라엘 내부에, 사사기 전체를 보면 전쟁이 일어나요. 그 전쟁이 일어나면서 억울한 자가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삼손이에요. 사사기 13장부터 나오는 삼손.

삼손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능력 주니까 이것을 바람피우는데 다 소모했어요. 바람피우는데. 여자는 한 남자를 바라보지만 남자는 여러 여자를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인공지능은요. 통제되면 이미 인공지능이 아니에요. 그건 로봇이 되죠. 시키는 대로 하면 로봇이지 인공지능이 아니에요. 통제 이상의 것을 인간들은 원하고 있어요. 인간들이 원한다니까요. 인간의 손으로 통제 안 되는 그 무엇을 원하는데 이게 누굴 닮았는가, 사람을 닮았어요. 사람의 속성은 사람의 이성과 노력과 훈련으로 통제되지 않는 구석이 평소에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을 알아야 됩니다. 어디까지 갈지 몰라요. 어디까지 튈지를 모른다니까요.

부부사이가 좋다는 말은 스스로 양보하고 있다는 셈이지, 이게 동의하고 있는 셈이 아닙니다. ‘한 번 보자.’ 이게 하나의 휴전단계지 전쟁의 종결단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서로 주도권 쥐기 위해서 전쟁이 벌어졌거든요. 그것 때문에 바로 억울한 사사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 선지자의 피가 어떤 피냐, 왜 우리가 피를 먹어서는 안 되냐, 이 피는 너희들 때문에, 먹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튕겨져 나온 피, 인간들의 자기의 의, 자기의 잘남 때문에 배척받은 피, 그 피가 오히려 배척한 사람을 찾아와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오직 그 내용 뿐이에요.

그게 사도행전 17장 3절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하면서 2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새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절,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이게 성경 신구약 전체의 유일한 테마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죽었다와 십자가와 부활밖에 없습니다.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한다. 골로새서 2장 1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어떻게 풀었는가, 무엇을 모티브로 잡아서 핵심적으로 풀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전체를 다 풀은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 말씀처럼. 십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갈 수 없다. 그 십자가를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피를 먹지 말라는 거예요. 그 피는 너와 전쟁을 벌일 피기 때문에, 너가 그걸 소유한다는 것은 너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는 그 피 앞에서 삐져야 되고, 흥! 칫! 우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는데, 그러한 본성이 들추어진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본래의 자리에 와 있는 셈이 됩니다. 그 본래의 자리에서 그 피를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피는 내 피가 아니에요. 내 피는 아담에서 흘러온 더러운 피고. 이 노선은 지옥 갈 노선이고. 이 노선을 삐져나와서 천국 갈 노선은 누가 미리 마중 나오는 노선이 오는데, 그 꽂힌 그것이 뭐냐 내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그 피에 의해서 우리가 사로잡힐 때,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내 자랑하는 그런 죄들이 나오면서 우리는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 현상이고 결과입니다. 이제는 내가 피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피가 내 안에 나의 모든 것을 장악해서 오직 피만이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증거 하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속에 두 마음이 있음을 이제는 감사합니다. 나 잘났다는 마음과 주님께서 그런 인간조차 용서하는 주님의 마음이 함께 있기에 매일같이 우리는 주의 마음한테 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