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강-신 13장 6-9절(가까운 자의 유혹)1604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3장 6-9절입니다. 구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네 동복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자니 너는 돌로 쳐 죽이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했던 일은 어디까지나 신명기에서 보면 지나간 과거일이죠. 지나간 일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현실을 사는 입장에서는 부질없는 일의 반복이라 이렇게 느껴질 겁니다. 왜 자꾸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근거로 해서, 기준을 해서 지금 우리가 거기에 매일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그 일을 우리가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일 안에서 내가 생각한 것 말고, 다른 내가 여기서 제조가 되고 조성이 되는 겁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안이 다르면 주체도 달라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구조가 바뀌면 그 안에 속해 있는 주체도 다른 주체로 행동하게끔 되어 있어요. 구조 자체가 다르게 되면. 군에 가기 전에 청년하고 군에 간 후에 청년, 그것 달라요. 군에 가기 전에는 그냥 보통 청년인데 군에 가고 난 뒤에는 “사랑한다 말입니다.” 이 상당히 절도 있게 하다가, 군에 제대해서 이제는 보험사기치고. 그 특전사들. 그러니 상황 바뀌면 주체가 달라져요. 그 상황 속에서 자기가 적응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너는 무엇을 기억하라고 할 때는 머리를 쓰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니가 의도하지 않는 하나님의 다른 의도로 만들어놓은 상황과 더불어서 너희들이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데, 그 상황은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내용을 반복을 시키면서 미래를 끌고 가고 있는 겁니다. 꼭 십자가 같아요. 십자가가 한 번 일어났는데 근데 그 십자가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그건 잊어버려라. 십자가는 한물 지나갔다. 지나간 것이 아니에요. 그 십자가답기 위한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게 되고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주체라는 것도 십자가를 보여주는 주체로 달라지지 아니하면, 그 십자가 위해서 만들어진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있는 나의 주체로서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 주체가 그때그때마다 달라져야 되고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생각하는 그 내가, 지금 생각하는 내가, 내일되고 모레 되면 이거는 쓸데없는 내가 되고 필요치 않는 내가 돼요. 준비된 나는 내일되면 준비된 내가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 년 뒤가 되면 준비된 또 다른 내가 기다리고 있고. 그러면 그 내가 많지 않느냐, 내가 백 개 천개 될 수 있겠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달라지는 주체는 이미 일어났던 십자가라는 내용을 더욱더 보다 더 많이 합류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부합되는 주체로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개는 아니에요. 하나인데, 우리의 옛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걸 삭제하는 방식으로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방식을 만드는데 어떤 방식으로 만드느냐,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하죠.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 하면 이웃이라는 것의 개념을 바꾸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이웃이라는 것, 나와 가까운 사람, 동네 친구, 일가친척, 그런 사람들의 의미가 전에는 그냥 한 가족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랑하고 마땅히 존중하고 복종했다면, 이제는 십자가 사건이 들어오게 되면 남편이라도 자식이라도 부모라도 이거는 뭔가 다른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관계로. 전에는 다이렉트로, 나의 부모로 직접 이어졌지만 이제는 한 코스를 거쳐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했을 때 내 부모는 왜 나를 낳았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노래가, 하도 오래 전의 노래라 가수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부모”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부모라는 노래 가사에 보면 “부모는 왜 나를 낳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니까 부모가 하는 말이 “니도 커서 부모가 되면 그때 알리라.” 부모 돼도 모르는데? 그 노래는 너무 책임을 미뤘어요. 해답을 이야기해야지. 니가 부모가 되면 알리라. 부모 되면 그때 어떻게 아는데요? 그때 누가 물으면? 자기가 엄마한테 들었던 그대로 “니도 부모 되면 알리라” 이거는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이거는.
이제는 알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물론 듣는 상대방은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주 안에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어요. 그 주 안이라는, 니가 공경하지 말고 주님으로 하여금 공경케하는 것을 니가 뒤늦게 확인하라 이 말입니다. ‘아, 이게 바로 공경이구나. 이게 바로 부모라는 거구나.’ 라는 것이 뒤늦게 확인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모에 대한 효심이 꼭 부모에게만 해당될 필요는 없죠.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에 방해하게 되면 그거는 주를 경유해 볼 때 어떤 부모냐 하면 주님을 방해하고 주님께 대적하는 부모로서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는 공경해서는 안 되는 거죠. 부모들 잘 들어야 합니다. 부모라고 자동적으로 공경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모르면 공경 받을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하기 때문에.
제가 오후에 보면 요 근래 앞쪽에서 달라진 게 있어요. 김연선 집사님이 그동안 어머니 챙겨드리고 해서, ‘세상에! 참 자식이 해야 될 것을 김연선 집사님이 다 앞자리에서 하시는구나. 부모를.’ 이렇게 했는데, 얼마 전부터 뒤에 앉으신 김선미 성도님이 부모님을 챙겨줘요. 그래서 저는 느껴지는 것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네?’ 김연선 집사님이 나중 되어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 또 적용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나중 된 자도 또 먼저 된다고.
도대체 주님이 누구시기에 같은 형제, 같은 혈육을 나눈 그것마저 뭔가 다른 것으로 집어넣느냐 하면 부모 자체가 수상하다는 겁니다. 어미의 모친에서 죄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죄는 잘라내 버리고 우리 부모다 라고 시작했을 경우에는 이 부모와 더불어, 함께 지옥 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나타난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어떻게 하게 되면,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이웃 사랑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는 주체를 바꿉니다. 부모가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에이, 우리 부모는 예수 믿지 않으니까 공경할 필요가 없어.’ 라고 생각하는 그 주체, 그 나를 같이 상호 교류해서 같이 바뀌어져야 해요. ‘엄마가 내가 교회 가는 것을 방해했을 때 그러면 나는 공경 안 해도 되잖아? 편하게 됐네.’ 라고 생각하는 나는 또 뭐냐 이 말이죠. 은근히 공경하는 것을 귀찮아해서 핑계를, 주님 핑계대면서 주님을 공경했다고 우기는 그런 주체는 또 바뀌어져야 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공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공경할 자격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는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거든요. 그러면 그 예수님을 경유한다는 말은 십자가를 경유하고, 십자가를 토대해서 새로운 주체가 생성된다면 부모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천대하거나 박대하거나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안 믿는 부모라도 배나 공경하라고 말씀이 나와 있다면. 정말 배나 공경해야 되겠죠.
그리고 그것이 어떤 차원이냐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 갑자기 원수가 등장했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공경을 해야 된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공경을 한다는 것이 그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공경이냐 아니면 부모가 하는 것을 다 가로막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부모의 공경이냐 이 말입니다. 젊은 새댁이 애를 맡겨 놨더니만 할머니가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6개월 된 애기한테 초콜릿을 계속 먹이는 거예요. 그걸 보고 이상하게 애가 집에 오면 입 주위가 시커멓게 묻어있으니까, 누가 이랬는가 싶어서 그 며느리가 CCTV를 달았더니만 시어머니가 애가 좀 운다 싶으면 초콜릿을 갖다 집어넣고, 집어넣고 해서 애가 살이 쪄서 갑자기 이렇게 부었을 때에, 어머니한테 그걸 하라고 해야 되는지 말라고 해야 되는지. 그때는 바로 필요하면 주님을 경유하잖아요. 또 주님을 경유해야 돼요.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여기서 또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 물에 부모님이 빠지고 애가 빠지고 내가 빠졌을 때 누구 먼저 건지겠느냐, 이 이야기거든요. 이거 스트레스 받는 질문이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스트레스 받아놓고 어른 돼서 그 스트레스를 또 받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정답과 해답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정답과 해답을 내릴 권한과 자격과 실력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 우리가 조마조마하고 주저주저하고 우리가 당황스러워하고 하는 그것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주체가 되어서 하신 결실물이고 답입니다. 그게 답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을 내가 제대로 실천에 옮겨서 구원받겠다는 그 시도, 그 시도 자체가 이게 주님에 구원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게 주님에 웬수에요. 웬수. 정리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점차점차 폭을 넓혀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은 우리가 해답을 내리고 그걸 정답대로 실천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아예 박탈되어 있음을, 우리가 항상 십자가를 경유해서 확인시키고 확인시키는 일들인 거예요.
정답을 알아서 뭘 할 건데? 그러면 우리한테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당황해야 되고 주저주저해야 하고 정답이 없어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 지금부터 약간 어려워져요.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려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절에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라” 용서 없이 그를 죽이라는 거예요. 예배당에 이걸 길게 써놓고 액자를 만들어버릴까요? “용서 없이 죽이라” 어떤 인간치고 용서 없이 죽일 사람을 자기 돈 떼먹은 인간밖에 없어요.
근데 자기를 평생 키워주고, 찬바람 맞아가면서 시장바닥에서 고생고생하며 키워준 부모가 단지 복음을 모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 때문에 용서 없이 죽일 위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습니다. 항상 팔은 자기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한테는 관대해요. 이게 용서가 돼요. 남이 뭐 하면 거품 물고 그러지만 자기가 되게 되면 뭐든지 좋아져요. 박근혜 싫어하는 사람은 뭘 하든지 박근혜가 싫고. 노무현 싫어하는 사람은 노무현 쪽에서 나오는 그쪽에 있는 뭘 해도 꼴사납고. 관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제가 오전에 이렇게 했죠. “인간은 분열되어 있다.” 통합할 수 있는 재주나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통합해서 뭐 할 라고요? 통합해서 구원받으려고요? 통합해서 구원받는 것은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과 악을 알아서 통합하지 마세요. 선악과 따먹은 채로 멸망당하세요. 구원은 생명나무지 선악이 아닙니다. 이걸 제가 수 천 번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안 돌아섰으면 좋겠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선을 행해야지.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했으니까. 맨날 이런 식으로 또 돌아서서 악은 감추고 선 쪽으로 나가는데, 없습니다.
여기서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라는 이 항목 속에 일가친척 가족들 다 포함되어 있어요. 시작이. 이것을 실천하려면 내 손으로 부모를 죽이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 속 편해요. 나를 죽이는 것이. 차라리 자신을 죽여서 자기가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어느 한 말씀을 지킬 재주나 그럴 위인들이 못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확대시켜요. 점점 범위를,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점점 확대시켜 나가면서 파악되는, 진정 하나님의 적이 누구냐를.
정말 애석히 여기지를 말고, 그 다른 신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를 확대시켜 나가면서 깨닫게 하는데, 그 확대가 평생 갑니다. 평생 가면서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주의 말씀을 어느 선까지는 지켰다고 했는데 그 선에 만약에 나한테 도움 주는 사람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갑자기 기존에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기준자체가 새로 투입된 그 존재로 인하여 다 깨집니다. 손녀 하나 낳아보세요. 그렇게 근엄하고 엄숙하고 나는 누구 앞에서 나의 이 품위를 잃은 적이 없다고 자부했던 그 할아버지가 우쭈쭈쭈!! 하면서 손녀 앞에서 애가 되잖아요. 그 품위고 뭐고 다 깨져버려요.
내가 절대로 나의 자존심과 품위를 지켰던 나의 기준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안,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그 기준이 얼마나 어설프고, 전혀 나의 의로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차라리 그것을 용납하고 내 기준과 함께 자결하는 것이 나한테 속이 편하죠. 그렇다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뭐냐, 우리의 내부적으로 흐르고 있는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성질 같은 것이 온 가족과 인류를 전부 다 동일하게 꿰뚫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제목이 ‘가까운 자의 유혹’인데, 유혹이라 하는 것은 멀리 보게 되면 유혹이지만 가까이 이미 우리 속의 유혹은 잊혀진 나의 그리움입니다. 지금은 생각되지 않는데 어! 만나고 보면 반갑구나! 반가워~ 김사장. 만나면 반가워요. 아이구 오랜만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끊어졌던 그 모든 것들이 어떤 새로운 답답한 상황에 들어가 버리면 끊었던 술도 먹게 되고 끊었던 담배도 피우게 되고, 담배 맛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네. 아침 이슬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이렇게 돼요. 참 이슬인지 아침이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걸 다시 수용하게 되는 거예요.
유혹이라는 것은 우리한테 유혹이 아니에요. 나의 그리운 이상형이에요. 내가 뭔가 그립던데 그게 뭐지? 바로 그거야. 그게 유혹으로 준비해놓은 모든 인간을 꿰뚫고 있는 동일성입니다. 우리 내부에서 그걸 뽑아낼 재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섬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섬 이름이 ‘구브로’라고 되어 있어요. 요즘 지명으로 ‘키프로스’에요. 이집트 항공을 가짜로 폭파해서 망명 요청을 하기 위해 머무른 곳이 키프로스라는 섬입니다. 키프로스에 ‘바보’라는 지명 이름이 있어요. 바보에 바예수라는 박수무당, 남자무당이 있었는데, 그 남자무당이 사도 바울의 복음을 방해를 해요.
제가 지금 말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자기 생애에서 범위를 계속 넓히는 거예요. 자꾸 넓히게 되면 사도 바울은 뭐냐, 자기가 있는 이 복음이 그냥 개인적인 사견이 아니고 이미 모든 인간을 꿰뚫는 보편적인 진리 그 자체인 것을 계속 확인하는 거예요. 그런 취지로 제가 사도행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 우리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 못지않습니다. 점점 인생을 살면서 넓혀보세요. 그러면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하나의 종교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하나 적용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넓혀지는 거예요.
그렇게 바울을 대적하여 총독이 못 믿도록 하니까, “사울이 성령이 충만해서 그를 주목하여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이 사람의 이름이 엘루마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소경이 되어서, 어둠이 그를 덮어서 인도하는 사람을 두루 구하였다는 이 말이거든요.
근데 여기서 뭐냐 하면 그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한다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언급을 하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돈 관계로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사도 바울 본인의 주체가 그리스도의 성령에 사로잡혔다는 그 말을 제가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이 말이죠. 세상을 볼 때에 사적인 감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통하는 모든 것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확인하는데 주의 할 것은 뭐냐 그 복음 전파에 본인도 포함을 반드시 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잘났고 니는 못났다.”가 아니라 “내가 전하는 이 복음에 언제든지 내일 모레 되어서 적용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고백을 해야 돼요. 이 말은 주체는 달라져도 나를 달라지게 하는 그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오늘 신명기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용서하지 말고 진멸하라” 우리 입에서 그런 소리 못 나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 형제 같으면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그런 소리 못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되게 하시는 주체로 달라지게 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으로 너무너무 잘 알고 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감나게 현실화되게 하기 위해서 남은 여생이 준비되었사오니, 우리의 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범위를 넓혀가면서, 우리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남을 지적하기 보다는 다 같이 주님 앞에 지적받는 상황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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