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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78강-진멸의 대상(신13;12-18) 1604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12. 07:21
2016-04-10 15:01:13조회 : 58         
   진멸의 대상 160410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진멸의 대상(신명기 1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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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4-10 16:04 
진멸의 대상 

2016년 4월 10일                                  본문 말씀: 신명기 13:12-18

(13: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13)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3: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13: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3: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13: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 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13: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이웃집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이웃이나 이스라엘이 모두 예외없이 진멸의 저반 위에 놓여져 있음을 밝혀주시는 말씀입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여기에다 가동시켰다가는 여지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이웃 마을의 우상숭배를 방관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존재 바닥이 무엇으로 깔려있는지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바닥을 무(無)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평생 노고를 투입시켜 지금의 자리까지 성과를 얻었다고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논리에 그 어떤 진노와 진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눈으로보면 모든 인간들은 이미 에덴으로부터 추방된 처지입니다.

‘추방되었기에 저희들 끼리살테니 더 이상 하나님은 상관마세요’라고 요청할 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너희들이 추방되었는지 그 취지를 버리면 안돼”라는 식으로 다가오십니다. 즉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반에 관여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인간들은 감이 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만나는 모든 이방민족에 대한 시선 속에 ‘그들이 멸망 받이유’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시선을 잃어버리면 이스라엘도 이방나라처럼 진노하사 멸하신다는 방침을 굳건히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만큼은 유일하게, 인간들이 살던 에덴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추방의 흔적인 곧 인간의 육신입니다. 자신의 육신에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된다면 인간들이 흔쾌히 하나님께서는 그 자를 벌내리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멸이 대상이 ‘나 외’의 그 누군가가 됩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여기에 대한 정답이 나옵니다.

진멸의 대상은 곧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 각자 자신들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죄며, 그 죄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대해서는 우상과 하나님과 비교하시는 구약 방식이 그대로 도입됩니다. 고린도후서 11:4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을 쉽게 추종하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진멸’의 깊이에 대해서 동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진멸의 대상으로 추호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 빼고 남들을 진멸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신약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이가 다 저주의 대상이고 진멸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진멸의 대상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죄’가 됨을 보여주는 과정이 들어있습니다.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 때 사울왕이 나서서 30만이나 되는 암몬의 대군을 물리치므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이스라엘 왕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킵니다. 이 때만 해도 ‘진멸의 대상’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이방민족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3:5에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수의 블레셋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합니다.

사울이 자신이 왕됨을 백성들에게 부각시키는 식으로 전쟁에 나가려고 하는데 전에 암몬 전쟁에서의 동반자인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사울 본인이 단독 지휘 하에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은 사울왕이 아니라 아들 요나단에 의해서 승리케 됩니다.

자신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전쟁이 승리로 끝난 것에 대해서 자존심이 무척 상한 사울왕은, 전쟁 중에는 그 어떤 음식도 입에 대어서는 아니된다는 지시를 어긴 자를 색출해서 왕의 권위를 처벌하려고 하니 결국 자기 아들 요나단의 존재와 만나게 됩니다. 요나단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런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는다”(사무엘상 14:6) 따라서 사울왕은 자신의 공로를 앞장 세우다보니 이스라엘의 승리를 훼방하는 적으로 등장한 셈이 됩니다. 즉 진멸의 대상자가 이스라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왕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지시합니다.

몽땅 다 아멜렉을 진멸해야 한다는 지시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의 승리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진정 진멸당한 적이 누군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이기고 난 뒤, 이스라엘 진영에는 진멸해야 함으로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것들이 사무엘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사무엘상 15:9) 따라서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왕의 제거와 파멸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손 수, 아멜렉 왕을 참수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진멸의 대상은 인간 내부에 자리잡으면서 스스로 ‘진멸당할 대상’임을 거부하는 힘으로 발산됩니다. 여전히 자신 내부에 아끼고 키우고 고이 간직하고 싶은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마음, 바로 이것이 우상숭배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좋은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시편 51:17)

상한 심령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거나 희망을 가지 건덕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자꾸만 우리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고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하면 그 누구도 성도를 고발하거나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진멸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이 남아있는 한 늘 터져 나오는 자신에 대한 미련은, 죄를 의로 유일하게 성사시키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환경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상한 심령으로 바꾸어주시는 그 창조의 영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4-11 05:51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3장 12-18절입니다. 구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 이니라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이스라엘이 있는 이웃 동네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배치를, 배정을 그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보류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결정된 것이 아니고, 너와 이웃과의 차이성, 네가 거하는 그 이웃의 성읍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내가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웃과 다른 방식으로 살면 너한테 자비가 주어지지만 만약에 네가 이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면 너를 가만두지 않고 진멸해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말로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 말로 때우지 말라는 거예요. “니가 니 옆에 있는 어떤 성읍에서 다른 소문을 듣고도 니가 거기에 대해서 방치하거나 그냥 못 본 척 한다면 그거는 니 옆에 있는 그 동네와 니 동네와 똑같은 사고방식에 있다고 내가 그렇게 간주해서 너에게 진노할 것이다.” 라고 그렇게 언급을 해버리죠. 특히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멸해버리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진멸은 기정사실이다. 이제는 어떻게 진멸에서 모면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받느냐가 문제지, 앞으로 잘하면 진멸 안 시킨다는 이런 것은 없는 거예요.

진멸은 이미 깔렸어요. 그걸 저변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원칙이 벌써 그 위에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다른 모든 민족들도 같이 놓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심판을 깔아놓고, 심판이라는 멍석을 깔아놓고 내뱉는 말씀이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간추려서 이야기하게 되면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그냥 의사를 물어보고 찾아오심이 아니라 아예 작살을 내시려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원래 에덴동산이 아니고 쫓겨난 동네거든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동네라 이 말이죠.

그러면 추방되었으면, 그 추방된 취지를, 하나님께서 추방을 시켰는데, 그 추방된 취지를 너희들이 곱게 그걸 품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이왕 쫓겨난 것 우리끼리 살자.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취지를 아예 삭제해버리고, 무시해버리고 사느냐, 그걸 이제 물으시는 겁니다. 쫓겨나갔다, 뭐 쫓겨났으니까 할 수 없지. 우리끼리 살자 라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쫓겨나왔으면 왜 쫓겨났는지, 뭐가 문제인지, 이런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민족만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 신명기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을 해요. 이 말씀을 지키려면 진멸을 해야 하는데, 진멸할 거기에 필요한 칼이나 총이나 뭐 활이나 그런 무기 같은 것이 마련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예를 들면 예배당 이렇게 지었으면 예배당 저쪽 창고 같은데다가 수류탄, 기관단총, 그리고 M16 이런 것들을 놔두어야 해요. 왜, 말씀대로 해야 되니까. 그래서 이 근처에서 굿한다든지, 절에 불당소리 들리면 총 꺼내서 전부 다 사격 총! 해가지고 절에서 하는 행사를 전부 다 진멸해버릴 때 우리는 신명기 13장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킨 것이 되죠.

사람들은 “아이고 목사님 그렇게 무식하게 하는 데가 어딨습니까?” 그렇게 하죠. “뭐 아무리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지만 무식하게 총 들고 예배드리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데, 있어요. 어데? IS. 지금 이슬람이 구약을 믿습니다. 이슬람 경전 코란은 구약 들어가기 코란이에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마호메트에요. 구약대로 그렇게 해요. 구약대로. 도둑질 했다, 손가락을 잘라버려요. 그 나머지기 손가락이 하면 그것도 잘라버려요.

그래서 그들은 이런 폭력이라든지 전쟁, 테러를 말씀에 입각해서 정당화하는 겁니다. 근데 그들은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가, 여기에 전부 다를 죽여요. 모든 아이들과 어른 할 것 없이 가축이고 다 죽여 버려요. 왜 그러느냐, 그래야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 것이 티가 나기 때문에. 그러면 너무 참 과격하지 않겠는가? 지금 과격이 문제입니까? 그런 전쟁 벌리다가 순교하면 천국에서 제일 좋은 자리 간다고 이렇게 사기를 쳐놨으니까. 천국에 제일 좋은 자리 가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위해서라도 포탄 두르고 자폭하든지, 뭐 무슨 수를 내죠.

근데 우리들이 보기에는 미쳤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 미친 집단이 서울보다 좀 더 가게 되면 개성에 가게 되면 있어요. 개성 위에 가면 또 있어요. 뭐 희한해요. 34살 먹은 젊은 재벌 3세 놔두고 울면서 지도자여! 하고 있고 뭐 인민 국기 흔들고 하는 거 보면, 저거는 뭐 종교단체지. 통일교에요. 통일교, 여호와증인, 신천지, 그런 동네지 이거는 국가가 아닙니다. 완전히 어디 미쳤어요. 노래도, 노래 가사 보면 참 희한해요. “원수님! 언제 쉬시렵니까?” 잠 잘 자고 있는데. 원수님은 밤새도록 인민들을 위해서 일하셔서 언제 쉬시렵니까? 이거는 시편에 나오는 말씀과 너무 유사해요. 여호와께서 쉬지도 아니하시고 세상을 관리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에다 전부 다 김 정은을 집어넣었어요. 여호와의 이름이 존귀하잖아요. 그러니까 김 정은을 존엄한 자라고 하는 거예요.

북한 김 정은이 때문에 성경 해석하기 참 쉬워요. 책 보면 밤 오잖아요. 근데 북한 보세요. 그들은 왜 미사일을 만드는가? 진멸하기 위해서. 누구 빼놓고? 자기 집단 빼놓고. 사실 이런 식으로 무기까지 준비하지는 안했지만, 마지막 핵전쟁을 대비해서 방주를 준비하는 단체는 한 두 개가 아니에요. 수 백 개의 단체가 방주를 준비해요. 안상홍도 마찬가지고. 생수 같은 이런 것도 준비해놓고. 그거 준비하려면 집단생활을 해야 하고, 집단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팔아서 그 교파에다가 다 바쳐야 돼요. 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세상 끝나니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산 위로 가면 안 되니까. 그런 산속으로 가야죠. 산 위에 가니까, 위를 덮치라 하니까, 산 속으로 벙커 만들어서 피신하게 되면 핵전쟁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렇게 살고 싶은 모양이죠. 그렇게 살고 싶은 모양이죠. 하나님 덕분에.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가 방금 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도대체 진멸의 대상이 누구냐? 뭘 진멸하고 누구를 진멸하라는 말이냐? 성경이 구약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멈추지 않고 구약 말씀을 근거로 구약의 실현태, 실현 상태라 해서 구약 말씀이 한 그 말씀이 완성된 상태는요, 그 당시 사람들은 몰랐어요. 신약에 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이, 구약의 신명기 13장이 완성되는 모습을 그들만 알아요. 성령 안에서 그들만 알아요. 그럼 여기 진멸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 코란을 믿는 이슬람 사람들이냐? 북한의 김 정은이냐? 아니면 이스라엘 당시에 옆집에 사는, 옆 동네에 사는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민족이냐? 아닙니다.

진멸하는 것은 누구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진멸해야 하느냐가 신약에서 완성이 됩니다. 무엇을 진멸해야 하는가? 우리 속에 죄를 진멸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죄. 나 빼놓고 너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나. 나를 진멸해야 해요. 내 속에 있는 나. 왜 그러냐 하면 구약에서 죄라는 것은 그냥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빌미로 해서 죄가 들추어집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면, 이거는 저의 예가 아니고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예입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예수. 복음 말고 다른 복음. 성령 말고 다른 영을 받게 할 때에 그거는 진멸이 돼요. 그러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우리의 육신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지금 진멸하는 중에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고마운지. 치과에 가서 스켈링 할 때 자기 이빨에 더러운 때 꼈다고 의사 붙들고 달려드는 사람은 아마 치매 걸린 노인네 빼면 없을 거예요. 대부분 “아이고, 시원합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할 거예요. 그 민물의 악어도 악어새가 와서 이빨에 껴있는 것을 빼주게 되면 얼마나 악어가 시원한지.

전에 중국을 간적이 있는데요. 닥터피시라 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간질간질해요. 보니까 쬐만한 물고기가 와서 발가락 사이의 있는 것들을 전부 다 뜯어내요. ‘이놈의 고기 어디서!’ 하면서 때찌! 때찌! 하지 않죠. 아이구 얼마나 고마운지. 가만히 있으면 더러운 것을 다 먹어주듯이. 주께서는 우리 힘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 육신을, 주께서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로써 다 이걸 진멸해주십니다. 이 육신을. 육신을 멸해줘요. 육신을 멸해주는 고마운 하나님을 놨두고 벙커 만들고 생수 해가지고. 핵폭탄, 핵폭탄은 더욱 더 고마워요. 불로 지지면 따갑기만 하지. 뭐 2도 화상. 근데 핵폭탄은 내가 맞으면 고맙게도 ‘나’가 소멸돼요. 0.000....1초 만에. 번쩍 없어져요. 이거는 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는 것보다 더 편리합니다. “자 가만있어요. 가슴대고. 다 됐습니다.” 하고 번쩍 없어지듯이. “자 핵폭탄입니다. 김 정은이 만들었습니다. 자 앞에서..” 번쩍 다 없어졌어요. 고마운 김 정은.

진멸의 대상은 우리의 육에 있고, 육에서 진짜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 진짜 성령이 아니고, 진짜 복음이 아니고,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육이 있는 이상 계속해서 생산되고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진멸하라는 말은, 아까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너도 동의하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아까울 것이 없는데 니가 따로 아깝다고 챙겨놓으면 그건 진멸이 아니야. 라는 뜻이에요. 진멸하라는 말은 하나도 아깝다고 두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6절에 보면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서 네 하나님께 드리라” 스티로폼 넣어서 곱게 포장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불살라서 드려라. 불살라서. 불살라서 드리는 마음은 무슨 마음이냐 하면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사실 우리의 육신은 불살라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육신을 불사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 있어요.

그 보내시 자가 뭐냐 하면 사탄이고 사탄의 종들입니다. 악마의 종들, 불교, 또 이슬람교,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자꾸 우리한테 허락하신 이유가, 그런 사람들은 우리한테 악어새와 같은 참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게 뭐 고마워 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하겠지만, 로마서 8장 31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되어 있어요. 잘 들어보세요. 복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는 말이 이게 성립이 되려면 매일같이 우리를 쥐어뜯고, 니 그러면 저주받는다, 그러면 니 지옥 간다, 그러한 소리를 해주는 이단들이 주변에 쫙 깔려있어야 해요.

여기 33절에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라고 한다면, 송사하는 자들이 있어야 해요. 고발하고, 고소하는 자들이 있어야 돼요. 그 다음에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한다면 “너는 예수 믿어도 의로워지지 않아. 니가 바르게 살아야 되는 거야.” 라고 하는 이런 헛소리하는 그런 단체, 그런 교회, 그런 이단들이 주위에 쫙 깔려 있어야 돼요. 그런 사람들 만나면 고맙다고 악수 한 번 해야 됩니다. 정말. “나는 니가 그런 소리 안 했으면 주님이 날마다 우리를 위한다는 것을 내가 깜빡깜빡 잊을 뻔 했다. 체험 안 될 뻔 했는데, 너가 그런 소리해서 내가 잘못된 것을 지적질 해주니까. 그렇지. 니 말대로 내 힘으로 구원 못 받는 거 맞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사” “아, 다시 한 번 너 때문에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으심을 다시 한 번 기억해서 아이고 고맙다 친구야!” 반갑다 김 사장! 하는 것처럼. 악수해야죠.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 말은 뭐냐, 이단이 와서 지적질 한다는 말은, 평소에 우리 육신에서 뭐가 나오느냐, 내가 나를 지적질 하는 것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그 지적질이 누가 하는가, 내가 그렇게 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어머 우짜노! 니 말이 맞다! 하면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누구한테 사기를 당한다는 것은 평소에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요. 욕심 없는 사람을 사기쳐봐야 그건 사기 칠 맛도 안 안나요. 뭔가 지금부터 내가 엄청난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니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라고 우리의 어떤 희망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주죠. 그렇게 되는 순간, 육신은 죽어서는 안 돼요.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우리는 진멸되어서는 안 되거든요. 왜? 나는 너무나 잘났으니까. 그럴 때 우리 앞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왔을 때, 아, 그동안 내가 또 다시 잊어버렸던 나의 진멸의 요소가 내 안에서 그만큼 들끓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계기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할 것은 뭐냐 하면, 신명기 13장과 로마서가 너무나 거리가 멀잖아요. 그 중간에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 말이죠. 그럼 신명기와 로마서까지 너무 머니까, 그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남을 진멸하다가 결국에는 이스라엘 자체까지 진멸당하는 그런 경우들을 주께서는 깔아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친절하신지. “니가 보기에 저 사람 기분 나쁘다고 진멸하고 싶지?”

사실 신학교 처음 나와서 그 통일교라든지, 안식교라든지, 이런 것이 나오면 하나님 뭐 하시 노? 뭐 하시 노? 우리 하나님? 하나님이 능력 있는 하나님이면 통일교하고 안식교 이런 것, 여호와증인, 귀찮게 하는 것, 전부 다 놀러가다 차 뒤집어져서 졸지에 다 죽고, 좀 이래줬으면 얼마나 감사한데, 왜 그런 사람들 멀쩡하게 맨날 도를 아십니까? 하면서 귀찮게 하도록 하게 하시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죠. 젊은 혈기가 왕성한 때니까.

그런데 사건은 뭐냐 하면 그런 이단들 때문에 사건이 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동대구 경북대학교 북문 근처에 어떤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신원교회라고. 아, 여전도회가 놀러가다 차 뒤집어져서 8명 죽었어요. 얼마나 가기 전에 기도했겠습니까? 일반교회 가보세요. 놀러가기 전에 기도 빡세게 합니다. 주여! 주여! 기도했는데 차 뒤집어지고. 기도 안 해도 멀쩡하게 갔다 오고. 이게 구약을 우습게 봐서 그래요.

구약에는 교체과정이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같이 싫어서 멸망해주세요.” 라고 할 때 하나님은 “그런 니가 싫다.”는 거예요. 그런 니가. “나는 잘났고 저 사람은 못났으니까 저 사람은 졸지에 망하게 해주옵소서.” 하는 그런 너가 너 자신을 너무나 모른다는 겁니다. 그 중간 과정에서 어떻게 바꾸느냐, 블레셋과 아말렉을 주께서 배치해놓으셨습니다. 사무엘상 이야기입니다. 13장, 14장, 15장이야기에서,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13장에서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숫자를 보니까 상당히 많은 숫자가 쳐들어왔거든요.

하나님 믿는다는 것, 다 헛말이고 거짓말이었습니다. 숫자 몇 명 안 될 때는 얍삽하게 보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지만 숫자가 과도하게 와버리면 하나님을 대번에 원망하게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떻게 자기가 처분할 수 없는,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일이 왔을 때, 하나님께 원망해요. “하나님이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면 저는 못삽니다.” 라고 원망하죠. 벌써 많이 수상해요. 적들을 멸하러 간 것이 아니고 적들이 오는 것을 보고 그런 적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조치가 현명하지 못하고, 너무 과도하고, 미워하는, 반발하고, 반항하는 요소가 내 안에서 슬그머니 뱀처럼 기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보내어 암몬을 다 쳐부수어주니까 사람들은 여호와께 감사한 척 하면서 누구에게 종속되느냐 하면 사울 왕에게 종속됩니다. 우리에게는 사울 왕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적들을 이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요.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교회 문제 있을 때 목사만 바뀌면 옛날처럼 부흥된다, 교인들 정신 못 차렸습니다. 교회가 문제 있으면 우리가 교회를 의지했는지, 말씀을 의지했는지, 복음을 의지했는지 그걸 확인해야 되는데, 여전히 교회만 붙들고 있으면서 목사만 바뀌어 괜찮은 목사가 오게 되면 자기는 안 다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를 또 준비했어요. 블레셋이 쳐들어와요. 전처럼 사울 왕이기 때문에 왕한테 안심 푹 놓고 일임합니다. “왕이여 옛날 솜씨 한 번 보이소서.” 사울도 까불까불 거립니다. “그래. 여러분 나를 믿으세요.” 이제 전쟁을 해야 할 때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아요. 약속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지를 않습니다. 오지를 않으니까, 적들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백성들은 동요하고 있고, 자기는 백성들이 자기에게 일임했으니까 자기가 감당해야 하고, 사무엘이 제사를 안 드리면 또 재수 없을까봐 하고 있는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라, 내가 드려야지.’ 제사 드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울이 전쟁을 하는데, 사울이 전쟁이 안 돼요. 그 전쟁을 누가 이기는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돼요. 사울은 무능하고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시키는데 요나단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전쟁은 사람 수와 관계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요나단이 처음이었습니다. 사울과 그 백성들은 저쪽 블레셋을 진멸할 대상으로 봤는데, 하나님께서는 요나단 빼놓고 모조리 진멸의 대상이에요. 여호와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 이스라엘 내부에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신명기 오늘 말씀이 진전을 보여요. 발전을 하는 겁니다. 발전을.

제가 지난주일 주보에 군에 누가 갔다고 했죠? 현동씨. 제가 현동씨에게 “군에 가서 낯설고 원치 않는 환경에서도 주님과 더 가까이 하기를 바랍니다.” 라는 이 말은 주님이 너를 지켜준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후방으로 빠졌는지 모르겠지만, 지켜준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과연 주님한테 지킴 받을 위인이라는 되었는가를,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연히 지켜줄 만한 가치 있는 그런 인간이냐, 그런 가치 없어요. 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지켜줘요. 버림 안 받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아도 마땅해! 하는 그런 사람에게만 자비와 긍휼로 지켜주시는 거예요. 그 인간성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바꾸려고 하는 거예요. 현동이 때문에. 현동이 군에 보내고 우리는 지금 그걸 바꾸는 거예요.

참 남자들 군에 가는 거요, 저도 군에 갔다 온지 40년이 넘었지만, 74년도, 아직도 꿈에 나타난다니까요. 아직도 꿈에서는 군에서 제대를 안 했어요. 미치겠어요. 내가 뭐가 그렇게 못났는데 고생하느냐. 딴 거 아니에요.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원치 않는 고생이 왜 나를 찾아왔느냐, 그거 딱 하나입니다. 내 인생에 왜 고생이 끼어들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고생해서는 안 될 존재로 자기를 자꾸 각인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아까운 거죠. 아깝다 보면 나의 적들이 내가 아니고 주변이 나를 힘들게 하는 나의 적들이 되는 겁니다. 그게 진멸이에요. 아직도 내 속에 진멸의 대상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다 나이 많으면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것이 뭐냐 하면 사울은 아직도 멀었어요. 용감하게 이긴 아들 요나단을 나무랍니다. “니는 내 지시도 안 받고 싸웠잖아?” 그러니까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임금님.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죠? 임금님의 아들 왕자가 그렇게 몸 바쳐서 전쟁은 사람 숫자에 있지 않다 하면서 전쟁했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어데 거기서 자존심 채운다고 감히 나한테 지시도 안 받고 그렇게 함부로 음식을 먹는다고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죠?” 하면서 오히려 요나단에게 표가 많이 몰린 거예요. 엎드려 절해봤자 이미 끝났어요. 표는 이미 요나단한테 가있어요. 무소속한테 가있어요. 새누리당 안 돼. 그래도 사울은 정신 못 차렸어요. 백성들도 정신 못 차렸어요. 어쩌나 저쩌나 뭐 사울 같은 집안이 했기 때문에 역시 사울 왕은 우리한테 귀한 존재라고 그렇게 했는데, 그 다음에 아말렉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을 붙이는 이유가 제발 좀 너희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취지와 더불어서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겸해서, 같이 엮어서 여호와를 이해하라는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아말렉을 주면서 하는 말이 사무엘이 이야기해요. 15장에 나옵니다. “사울 왕이여. 아말렉이 올 테니까 모조리 다 죽이소서.” 사울 왕이 “에고 뭐 그 정도는 하지요.”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승리했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막상 진멸하려고 하니까 귀한 게 너무 많아요. 15장 9절에 보니까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 하니라”

이게 바로 뭐냐, 하나님께서는 사울아! 이스라엘아! 니가 바로, 니가 그럴 줄 알고 니 속에 진멸대상이 있음을, 내가 아말렉이라는 그런 허수아비들을 붙여줬다는 거예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습니다. “전쟁을 이겼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도대체 이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소리?” “왜 양이 우는 소리가 나고 소가 우는 소리가 납니까?” “아이고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치려고 일부러 남겨놨습니다.” 라고 이렇게 변명들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뇌물 받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받아요. 상한 심령을 내기 싫으니까 돈 바치는 거예요. 돈 받치고 십일조 받치는 겁니다. 나 안 상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참 이런 소리 할 때는 속에서 가래가 나오려고 해요. 안 그래도 감기 걸려 기침 나오려고 하는데. 몰라도 왜 그렇게 몰라요. 하나님은 봉사, 희생을 받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받습니다. 죄를. 죄를 받아서 의를 끄집어내는 주님의 요술 같은 솜씨를 우리에게 환영받기를 원해요. “봐! 니 못났지? 나 잘났잖아?” 그걸 받기를 원합니다. 죄 갖다 바치고 의가 나오는 솜씨를 마음껏 찬양합시다. 그거에요.

여러분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그런 노래가 있어요. 찬송가 405장에 나오는데, 그게 영어 가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내가 한 때는 잃어버렸지만 지금은 발견되었습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 과거에는 소경이었으나 지금은 봅니다. 이게 얼마나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달콤한 사운드 소리입니까? 이 가사가 너무 좋아요. 특히 더 좋은 가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공포를 줬지만, 그 나에게 준 공포가 나로 하여금 공포를 거두어가게 하셨습니다. 깜짝깜짝 간 떨어지게 만들어놓고 우리 힘으로 못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 거두어감으로써, 나의 죄도 함께 회수해 가시는 것.

하나님이 위하시면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이것의 반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현장은 무슨 현장이냐 하면 신명기 13장 본문이 어떻게 죄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완성 상태로 주님에 의해서 실현되는가를 보여주는 그 장터, 그 현장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속이고 우리의 마음입니다. 신명기 13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뜯어고치는, 요란하게 뜯어고치는 현장으로 우리를 제공하시면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여러분 있는 죄 그대로 내놓으시면 돼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여. 저 이렇게 막삽니다. 그렇게 막사는 것, 그대로 가져오세요. 주께서 그 막사시는 것을 받아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가치 유지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했던 저희들, 이제는 그것이 진멸의 대상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사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받쳐서 주께서 처분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주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 헌신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