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강-신 12장 29-32절(진멸당할 민족)1603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2장 29-32절입니다. 구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하실 때에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하고 사전에 의논하거나 협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마치 빵을 쪼개서 그 안에 양배추나 샐러드나 아니면 고기를 거기에다 강제로 집어넣는 것처럼, 내 인생이다 하는 것을 딱 쪼개가지고, 이것은 내 인생이니 손대지 마세요! 했는데 주께서 강제로 절개시켜가지고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어버립니다.
이건 뭐냐 하면 빈 열차에 화물 싣고 달리는 기차와 같아서 비어있는 객차에다가 나무도 싣고 석탄도 싣고 달리듯이, 우리는 그냥 하나의 택배 하는 아저씨, 그런 입장에서 주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우리의 인생은 나에게 주어진 그 말씀이 적합하게 실현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도 같이 변해가는 그런 조화를 가지면서 이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구원하죠.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직접 만들죠.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날 구원해봐라. 그러면 믿어줄게.” 이거거든요. “날 구원해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옆에 있는 강도가 뭐라고 했어요? “예수여 날 건져주면 당신 믿어줄 용의가 되어 있다.” 하거든요. 그러면 그 전에 강도는 자기는 그대로 있고 날 건져내봐라 하는데 주께서 건지시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쓰레기 같은 인간을 건져내면서 이게 바뀌게 되어 있어요. 말씀으로 건져주시면서 건짐을 당하면서 ‘어? 내가 알던 내가 아니네!’ 내가 이렇게 말씀에 의해서 변화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요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저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기행위를 이야기하다가 주께서 그 행위를 떼 내어버리고 주님의 행위가 내 행위를 추방시키면서, 주님의 강권적인 행위가 우리를 딴 사람으로 변모시키는데, 주의 강권적인 행위가 어디서 나왔는가, 말씀을 보니까 말씀 속에서 나온 거예요. 말씀 속에서. ‘아, 말씀대로 되는구나!’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거는 내 이름으로 기도한 거고. 근데 내 이름으로 기도한 것도 돌이켜보니까 내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시면서 주의 이름으로 그게 바꾸어지는 거예요. 참 내가 말해놓고도 참 어렵습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돌아보니까 그게 내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고, 내 이름인 것처럼 여겼던 그 오해를 유발시키면서 결국은 그게 주의 이름으로 다 구원을 해낸 것을, 우리는 뒤늦게 가면 갈수록 그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우리가 하나의 객차고 거기에다 뭘 실었느냐, 등허리 뒤에 신명기 12장 29절에서 32절의 말씀을 이제 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걸 가지고 말씀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백성 아닙니다. 강제로 말씀이 덮쳐진 백성, 이걸 오늘날 신약시대에 보면 성도라, 또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신명기 12장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덮쳐진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버릴 수는 없어요. 옛날에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십일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구약에는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고, 신약에는 믿어서 구원받죠?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거 잘못 된 겁니다. 구원의 대상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의 대상은 없어요. 구원의 대상이 없습니다. 뭐를 행하고 뭐를 믿어서 구원받는 그 대상 자체가 애초에 없어요.
구약에는 말씀에 의해서 멸망할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신약에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될, 천국 갈 백성이 만들어지죠. 만들어지는 것이지, 내가 뭐 구약에는 이렇게 하고 신약에는 뭐 이렇게 하고, 내가 건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건져내니까 사실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죠. 갓난아기가 기저귀 걱정하는 것은 그건 갓난아기답지 않습니다. 그냥 흔들기만 하면 되고, 아이고 쌌어요? 기저귀 갈면 되지, 지가 뭐 기저귀 하나가 얼만데? 해가면서 아껴 쓰겠다고. 그러지 마세요. 그거는 주제 넘는 일이에요.
젖 뗀 아이가 만족해서, 젖을 먹고 난 뒤에 엄마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시편 131편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성도는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이러한 원리원칙에 조금이라도 행함을 집어넣는다면 그거는 어린아이에게 맷돌을 달아서 깊은 바다에 던지는 짓을 한 것이라고 마태복음 18장에 나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 뒤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애를 죽이려면 그냥 침대에 던지지 말고 애 목에다가 맷돌을 묶고 “죽어라! 죽어라!” 해서 다시는 떠오르지 말라는 식으로 깊은 바다에 집어넣는 그 행위가 어떤 행위냐, “여러분 행함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라는 것하고 똑같은 행위라는 거예요. 그게. 사람을 목에다 해서 엽기적인 살인 행위를 하는 그 행위와, “여러분들은 행함으로 영광 돌려야 합니다.” 하는 그러한, 굉장히 순해 보이는 그 설교와 똑같은 내용이 된다는 거죠. 예수님이 왜 죽었겠습니까? 예수님 오셨을 당시에 행함 천지였어요. 뭐 못 행해서 환장한 사람들 집단에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뭐 부활절이 어떻고 난리도 아니에요. 춘분 지나서 뭐 한 주 후에 어떻게...그걸 왜 지킵니까? 부활절을 왜 지키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부활절 지키는 것은 전부 다 돈, 목돈 끌어내기 위한 수작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런 것은 뭐냐 하면 목돈 끌어내서 교회 헌금 유지하려는 책략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게 하세요.” 라는 그것이 차라리 전부 다 연자 맷돌을 하나씩 달아서 저 동해바다에 전부 다 풍덩 빠트려버려라 이 말이죠. 그게. 그거하고 동일한 짓거리가 된다 이 말이죠. “아무것도 안했는데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고 달려들면 “그러니 믿음이죠. 그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보니까 주님의 믿음으로,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이미 구원된 거예요. 이미. 이미 구원된 자에게 이 말씀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생판 내 쪽에서 어떻게 start해서, 어떻게 출발해가지고 구원받습니까? 이런 것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내 고집과 주님의 고집이 내 속에서 경계선을 이루면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주의 말씀을 우리가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주의 말씀으로 끄집어낼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평소에 나는 내가 어떤 식으로 살려고 애를 썼던가? 그것을 주께서 끄집어내는데, 그러면 그걸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을 주께서 다루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내 실상을 바깥에 전개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단이고 뭐 비 복음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우리한테 붙여주고 그런 비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굉장히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이 여전히 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을 뭐 길게 할 것이 없이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뭐가 됩니까? 물으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옛날에 임금님이 죄인을 재판하면서 “이 나라에 죄 지은 저자의 죄를 처벌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노여움을 씻어 드립시다.” 라는 그런 멘트가 사극에 보면 많이 나와요. “저 죄인을 처벌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노여움을 우리가 이참에 씻어드려야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이 노여워 제 때에 비가 오지 않고 갑자기 큰 재앙이 오는 것은 우리 공동체 내에 분명히 하늘과 연계해서 죄지은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걸 색출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징벌을 내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옛날 사극에만 있을 이야기겠어요? 이 공동체를 우리 집안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 집안이 안 되는 것은 니가 대학 나와서 취직도 못한 니 때문이야.” 라는 것이 연세 지긋하게 한 60된 부모들의 걱정이 그거에요. “저 막내아들 취직해야 하는데, 저것 때문에, 딴 애들은 괜찮은데 자가(저 아이가, 저 애가 경상북도 포항지방의 사투리) 우리 집안의 골칫거리이다.” 꼭 지목해요. 그런 게 있어요. 영화 감독한다고 40되어서 빌빌 놀면서 자력도 못하는 것, 아이가 다섯이라는 그 드라마 보면 나와요. 삼촌 그 놈팡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 말썽꾸러기. 그러니까 항상 니만 잘 되면 우리 집이 HAPPY한데, 니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본문을 또 축소시켜봅시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나는 요런 것은 착한데, 요것은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요것만 고치면 내가 하늘의 복을 받고, 뭘 해도 내가 성공하는데, 요것 때문에 성공 못한다.’ 요게 바로 이방 민족적 사고방식으로 상상의 신과 교류하는 방식입니다. 상상의 신과 교류하는 방식이에요.
거기에 대고 신명기니, 갈라디아서니, 마태복음, 출애굽기고, 뭐 산상설교를 갖다 대니까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장점은 그냥 살리고 단점가지고 자기한테 어떤 문제되는, 신에게 벌 받을 요소는 그 성경 말씀을 순종해서 이걸 개조해가지고 고치게 되면, 장점에다 또 장점 개조한 것을 붙여버리면 온전한 내가 되어서 이제는 예상되는 저주로부터 나는 구출될 수가 있다는 이런 아이디어가 팍팍 올라오겠죠. 연자 맷돌 하나씩 다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 민족들이 했던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절한다, 전멸시켜버린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전멸시킨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명기 전체 내용을 잠시 제가 요약을 해볼게요. 신명기 전체 내용이 뭡니까? 저한테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앞에 나서서 하나님의 이름과 적들, 가나안 땅 원주민들과 싸워서, 승리해서 그들을 내쫓고, 그 빈 터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작업이 신명기 작업입니다.
근데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이 의아해하는 것을 제가 알죠. 뭐냐 하면 사람이 나가서 싸우는 것은 이해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나와서 싸운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어디 명찰 들고 나오는 거예요? 사람이 싸운다는 것은 둘 다 보이는 실체가 있기 때문에 챙챙하고 칼싸움이 보이는데, 너희들은 칼과 병거의 숫자와 수레의 마병가지고 다가오나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뿐이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여호와여!” 하면 살려줍니까? 귀신보고 주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하면 귀신이 물러갑니까?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귀신은 없습니다. 귀신 물러나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궁금해요? 오백 원.
“그래 나 못났다.” 이 한마디만 하면 귀신이 안 오는 것을 가지고, 자꾸 잘났다, 잘났다, 잘났다. 내 속에는 장점이 있는 거야. 자꾸 이래 나오니까 귀신은 이거 완전히 밥이다 해서 하루에 기도 두 시간 해야 되고 성경 다섯 장 읽어야 돼. 니 그렇게 하면 복 더 받을 거야. 다섯 장 읽었으면 열 장 읽어야 돼. 그러면 뭐 까지 해야 돼? 자꾸 숙제와 과업을 주니까 자기는 그 저주, 앞으로 올 예상된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점점 더 연자 맷돌에 목을 더 칭칭 감는 거예요. 점점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겁니다. 칼 가지고 밧줄 좀 끊었으면 좋겠어요. 끊어가지고 물 위로 좀 떠올라야 되는데, 자꾸 자기한테 징크스 같은 무거운 짐을 지우는 거예요. 짐은 자꾸 벗어야 돼요. 자꾸 숙제를 스스로 안지 말고. 그거 했다고 해서 예상되는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오죽했으면 막 살라고 했겠어요? 오죽했으면. 좀 물 위로 떠오르라는 말이죠. 몸무게를 가볍게 해야 물에 떠오르죠. 무겁게 해가지고 율법으로 칭칭 감아놓으면 점점 더 마귀가 있는 곳, 지옥으로 가고 있지. 방향이 반대방향으로 막 가고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서 싸운다는 이 말은 너희들 가만히 있어라. 하나님의 이름이 나서서 싸운다. 그럼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 이름은 약속에 있어요. 약속에 있습니다.
그럼 약속을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약속을 안 믿으면 인간적으로 나가요. 아이성이라는 성이 작았거든요. 시시하게 본 겁니다. “아이구 야야! 우리 군사 몇 명만 보내면 저거 점령된다.” 그러다가 아주 대패하고 서른여섯 명이 죽었어요. 아, 이게 우리가 가는 곳이 평소에 내가 내 인생을 꾸려나가는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세계, 부자가 되었으면 못 들어가는데, 가난한 자도 못 들어가요. 부자 못 들어가면 가난한 자도 못 들어가요. 성경에 부자가 못 들어간다고 하니까 가난한 사람이 휘파람 불고 있는데 말이 안 돼요. 부자 못 들어가면 아무도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은 할 수 없는 곳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안 되는 걸 가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 약속이 피라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이거든요. 이 죽음은 뭐냐, 예수님이 저주받아 죽은 그 죽음이 약속이 되어서,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인 것을 인정한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보여주는데 이방나라를 하나의 미끼로 삼아서 보여줘요.
이방나라의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진멸해버립니다. 그 진멸하는 것을 여호와의 이름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의 전쟁이 벌리는 특징이 뭐냐,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가축이고 어린애고 간에 다 죽여 버려요. IS같아. 다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진멸입니다. 그거는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 하는데, 바닷가 모래사장에다 인간의 얼굴을 그려보세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방주연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죠. 딴 건 다 그렸는데, 심지어 턱에 있는 점까지 찍었는데, 마음은 못 그렸다는 가사가 있어요.
인생이란 뭐냐, 모래사장에 찍은, 그냥 모래사장에 그렸던 우리의 얼굴에 불과합니다. 바닷물이 밀려와요.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누가 있었나? 누가 여기 살았어? 그뿐이에요. 지묘동엔 제가 살고 있지만 한 숨 쉬고 훅 지나가버리면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까도 시편 90편 이야기했지만 3절에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라” 니 세계 아니다. 4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절,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바닷가의 홍수처럼 쓸어가요. 그래서 9절, “우리의 날은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10절,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이유 없이 고생하라고 태어난 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원인도 없이. 15년간 아무 이유도 없이 군마두만 먹었던 올드보이처럼.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고생해요. 왜 고생 하냐고 물으면 고생하라고 태어난 거예요. 왜? 가인의 후손이니까. 고생하라고 태어난 거예요. 그냥. 고생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에요. 우리가 보여 줄 것은 고생이에요. 고생이 안 하면 이거는 땡잡은 줄 아시고 또 고생 하면 이거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고. 고생하라고 온 거예요. 쓸어가는 겁니다. 진멸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진멸하는 시범조가 바로 이스라엘 경계선 바깥에 저 이방민족이 바로 우리 속의 실정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주의 이름 앞에 쓰여 집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다 주의 앞에 진멸되어야 되는데, 우리 쪽에는 뭐가 있느냐, 말씀의 혜택이 있어요. 말씀이 있는 쪽과 말씀이 없는 쪽은 축복과 진멸이라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면 약속 속에 뭐가 들어있기에 우리는 복 받고 말씀이 없는 쪽은 진멸하느냐, 말씀이라는 것이 순두부나 두부 만들 때 간수를 붓게 되면 옹기종기 고형물, 형태가 생기잖아요. 말씀이 이렇게 모이게 되면 거기서 어떤 인격체, 사람이 나와요.
그게 말씀으로 된 사람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그게 바로 독생자라 이 말이죠. 그럼 독생자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주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자기 쪽으로 전부 다 몰수 했어요. 손대지 마!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니가 하지 마!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 니가 지키려고 하지 마! 내가 해! 말씀 줘놓고, 말씀을 던져놓고, 그물이거든요. 주님의 그물에 걸린 사람은 전부 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서 걸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덩어리 되면 그 말씀의 덩어리의 기능이 나오는데, 그 기능이 뭡니까? 바로 이웃사랑이에요. 그럼 이웃사랑을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없는 자를, 이웃사랑이 주어지게 되면 이웃사랑의 그 현장에 없었던, 사랑받지 못할 자가 사랑받는 자로 새롭게 생겨나는 거예요. 새롭게. 이래 이야기하면 꼭 약장수 구라치는 것 같은데, 자꾸 자아가 있고 이거 내가 지키려고 하니까 튕겨져 나가는 거예요.
우리는 이방인이거든요. 그러면 어린애든 뭐든 다 진멸당해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 앞에 우리는 그냥 뼉다구, 그냥 뼈가 되어 진멸되어 있는데, 여기에 뭐냐 주께서 말씀대로 하옵소서. 말씀이 오게 되면 이제는 여기서 힘줄이 생기고 이게 하나 둘 꿈틀거리면서 말씀이, 뼉다구에 말씀 붙이면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나요. 그것을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죽을 죽음을 미리 땡겨서 죽으니까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예수님도 죽었으니까, 죽은 자에서 사흘 만에 부활되니까, 그 부활의 능력이 오게 되면 “니만 죽었나? 나도 죽었다. 하지만 나는 살았잖아.” 부활의 첫 열매거든요.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어서 말씀으로 살려내면 그 다음 차례인 성도를 말씀으로 살려내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나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거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이거는 제 솜씨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에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오늘 죽어도 괜찮아요. 근데 또 사는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증거 하라고. 쉽게 말해서 주님의 이웃사랑을 자랑질하라고 또 살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씀 드리면 이제 ‘아하,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아마 모르는 사람 없을 거예요. 고린도 전서 13장 2절, 지나가도 잊어버리지 마시구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웃사랑입니다. 주님만 행할 수 있는 이웃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어 있죠. 특히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이 대목에서는 나는 단박에 떠오릅니다. 신학교 박사, 공부하는 목사, 그리고 철학자들, 그리고 저한테 물었던 많은 사람들.
“목사님 결국엔 목사님 이야기는 신의 주권이네요?” 신의 주권 알아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신의 주권사상이네요? 그거 저도 알고 있는데.....,” “알아요? 신의 주권 알았으면 그럼 모든 것을 알았네요?”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았잖아요. 구원됩니까? 구원 안 돼요. 본인이 진멸되어야 될 입장이라는 것을 인정 안 하고, 그저 정보만, 그냥 지식만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은 데이터DATA에 불과합니다. 요번에 이세돌이고 하고 알파고 붙어가지고 구글은 그 기간에 주식 액면가를 58조로 만들어놨고, 이세돌은 몸무게 7키로 빠졌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은 2100년도가 되면 모든 인간은 사라지고 데이터만 남는답니다. 생명은 데이터에요. DATA. 정보의 집결에 불과합니다. 다 고칠 거예요. 이 팔, 다리 한 천 년 가도록. 두뇌도 바꿔치기 할 겁니다. 뇌 빼버리고 인공뇌를 집어넣을 거예요. 앞으로 계속해서. 그게 장사가 되니까. 다 바꿀 거예요. 모든 것을 알고, 알파고 모든 바둑을 잘 두고, 알파고가 바둑 세계 랭킹 2위로 올라갔습니다. 1위는 커제, 2위는 알파고, 3등이 박정환, 4등이 이세돌이 돼버렸는데.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지식, 어떤 수의 확률을 다 따져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기계에 불과하고.
사랑은 뭐냐, 진멸돼야 되는데 말씀을 객차에 실어가지고, 말씀이 스스로 자기 솜씨를 발휘해서 사랑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이렇게 십자가로 다가오는 그 사랑을 받았으니, 자랑할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 덕분이잖아요.” 라는 이러한 고백과 속삭임. 고마움. 범사에 감사함. 이거 할 것 밖에 없어요. 주님 실어 나르는, 그야말로 무한궤도를 달리는 열차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을 가득 싣고. 빨리 달리지 말고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
주님의 사랑의 무게에 의해서 그냥 달리시고, 내 모든 행함이라는 연자 맷돌을 다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의 덩어리로써 솜사탕처럼 살아가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멸하면서도 그들은 진멸당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알아서 죄 제거하면 신의 노여움을 벗어날 줄 알았던 그들의 본성이나 우리의 본성이나 동일했습니다. 주의 말씀 속에 있는 예수님의 피의 사랑이, 이웃사랑이 우리를 매일같이 건진다는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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