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강-고전 13장 6-7(진리와 함께)16021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6-7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방금 읽었던 이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지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으로써 사랑이 아니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사랑이 아니며 모든 것을 믿는다고 사랑이 아니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 사랑이 아니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이런 결과를 낳게 하지 인간이 행함으로써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이라 하는 것은 선물 주는 쪽에 대하여 선물 받는 쪽이 강요하거나 협박하거나 따질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강요해서, 협박해서 얻어낸다면 그것은 흥정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물이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느냐 하면, 기대하지도 않았고 예상치도 않았는데 택배로 주신 것, 그게 선물이지요.
사전에 간다고 몇 번씩 전화해서 큰 상자가 갈 거라고 했는데 막상 열어봤을 때 실망하는 경우, 뭐든지 미리 예상하고 미리 기대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 은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은 다 선물인데 그 선물, 택배로 오는 내용이 뭐냐 하면, 7절에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별로 원하지 않는 선물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예요. 거기다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런 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특히 7절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이 말은 참을 만한 것과 참지 말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everything, 모든 것,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참을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 바보 만드는 거지요. 사람은 욱, 하는 성질이 있기 마련인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누가 욕을 하든지, 누가 내 돈을 다 가져가든지 관계없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배신하고, 나를 이용하고 모함한다 할지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걸 참고 견디고 그게 진리라고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겠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그 교회 근처에 어떤 악덕업주가 있는데 교회를 핍박하면서 이사를 가라는 둥, 당신들 때문에 땅 값이 내려갔다는 둥 할 때, 그 교회 장로님이 주일에 대표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저 인간 개과천선하게 하옵소서. 평당 20만 원짜리 땅을 5원에 팔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나올 수 있어도 “주여, 그들이 어떤 욕을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참게 하시고 강제로 이사조치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이런 대표기도가 나올 수가 없지요. “하나님, 뭐하십니까?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주의 하늘나라를 확장하려는 이 교회를 두고 사탄 짓을 하는데 하나님이 뭐하고 계십니까? 당장 벼락을 때려서 그 집안 애가 둘이나 죽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기 마련이거든요.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면 천박하다 싶어서 “주여, 정의대로 행하소서.” 두루뭉술하게 하지만 그 안에 다 포함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점점 더 기도하기 힘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기도를 해야 될 텐데 성질나는 대로 기도해 버리면 이것은 육의 기도밖에 안되지요. 이미 해답은 나와 있어요.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답이 나와 있기 때문에 누구 앞에서 내가 성령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겁나요.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참아야 되니까. 이것은 완전히 사람 바보 만드는 겁니다. 사랑의 은사,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꼭 이런 선물, 성령의 은사가 없더라도 우리는 지금 잘만 살고 있는 세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더라도 돈과 함께 기뻐하는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알고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것을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럴 필요 없는 상황을 주께서 선물로 주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안 견뎌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 필요치 않는 삶을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상당히 당황스럽게 되고 ‘주님, 이게 왜 필요합니까?’라고 따지고 싶은 생각마저 울컥 들지요. 따지는 대신 성경 덮으면 그만이지만. ‘난 안 봤다. 들은 적도 없다.’ 하고 덮으면 그만이겠지요. “네가 참을만한 것은 참고 대들만한 것은 대들어라.” 이렇게 나오면 우리가 이해가 되겠는데 “모든 것을 참으며,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따지지 말고 모든 것을 견뎌라.”라는 것이 왔을 때 “주여, 꼭 그럴 필요까지 뭐가 있습니까?”라고 대들고 싶은 충동이 울컥 솟아나기 마련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진리라는 것을 자기중심으로 따로 정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로 정립한 진리가 뭐냐? 본문 7절에 나오는 것,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모든’을 다 빼는 겁니다. ‘모든’을 다 빼버리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나는 참을 것이고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믿을 것이고, 죽어서 천당 간다고 한다면 믿을 것이고, 나한테 유익이 된다면 바랄 것이고, 꿈과 희망을 가질 것이고, 누가 나에게 장래의 무한한 발전을 가져다준다면 나는 기어이 어금니를 깨물면서라도 견딜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것을 진리라고 알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한테 손만 대봐라. 내가 그냥 두지 않는다. 내가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 나 건드리면 못 참는다.”라는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어요. ‘모든’이 빠진 거예요. ‘everything’이 빠진 거예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라는 것은 내 중심의 진리였던 겁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어떤 목표물이 있어요. 그것은 나 잘되기. 다른 말로 하면 “나의 가치 건드리지 마. 지금껏 나라는 것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고 견딜 만큼 견뎠다. 더는 못 참는다. 제발 나 중심으로 짜여있는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좀 괴롭히지 마라. 더는 못 참는다.” 이걸 우리는 진리라고 알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그것이 진리의 전부입니다. 따라서 설교 여기서 잠시 멈추고 결론 내리겠습니다. 진리는 없습니다. 그냥 집에 돌아갈까요? 진리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딜만한 그런 나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런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나는 나에게 이익 되는 것만 참고 나에게 손해되는 것은 못 견디고 못 참는 그런 성질의 사람입니다.” 남자들 이름 가운데 ‘욱’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잖아요. 상욱, 민욱, 그런 이름 볼 때마다 ‘욱’ 하는 성질이 혹시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가요. 욱, 하는 성질, ‘건드리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하는 욱, 하는 성질.
그게 사람의 전부에요. 사람은 그런 것으로 뭉쳐져 있어요. 아무리 순한 사람도 상황이 좋아서 사람이 순하지 정말 자기를 괴롭히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태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것을 진리라는 고상한 용어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몸이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내 몸의 진리는 이것뿐이야. 나 건드리지 마.” 이게 내 몸이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이 덩어리, 이게 진리입니다. 내 중심, 더 나아가서 내 가족중심, 내 지방색 중심, 내 나라 중심. 일본하고 축구한다. 자연히 한국 팀을 응원하지요. 왜? 내 나라중심, 내 민족중심이니까.
그런데 일본선구가 한국선수를 태클했다. 갑자기 관중들틈에서 욱, 욱, 욱이 막 나와요. 그러면 그것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에 위배돼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는 이 말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줘도 있으나마나 한 겁니다. 이런 진리는 우리한테는 없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눈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밀칩니다. “제발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세요.”라고 밀쳐버리고 우리는 이런 요구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어요.
그렇다면 나 중심에서 짜인 이 진리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는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첫 번째로 제가 진리는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두 번째로 이야기합니다. 방법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모든 것을 참으며 견디는 그 세계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림의 떡, 그림속의 꽃 같은 그런 이야기, 전혀 우리한테 해당되지 않습니다. 혹시 용서를 구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해도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한 뒤에 돌아서게 되면 여전히 나 중심으로 다시 되돌아오기에 이쪽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비밀이라고 해요. 이쪽 세계는 그냥 비밀입니다. 나타난다고 해서 비밀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다고 해도 그 비밀스러움은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모든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전부 다 가짜가 되는 겁니다. 믿을만한 것은 믿고 안 믿을만한 것은 안 믿겠다고 누가 결정 내리는가 하면 본인이 결정내리기 때문에 그거 가짜입니다. 가짜 신앙이에요.
인간이 침 뱉으면 자기 얼굴에 떨어지듯이 백날 기도하고, 백날 믿고, 백날 사랑하고, 백날 참아봐야 결국은 ‘역시 나 잘났다’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에요. 다시 자기의 절대적 가치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날 기색도 없고, 그런 마음도 없고, 그런 의도가 없습니다. “다 나 잘되기 위해서 있는 일이야.” 그게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고 하니까 다시 할게요.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가 있어요. 있는데 그게 나 중심으로 이미 짜여 있다는 말이지요. 나는 이렇게 애썼고, 이렇게 열심을 냈고, 이렇게 순수했고, 이렇게 순진무구하며, 이렇게 착하며……, 전부 다 내 쪽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다 내 중심의 믿음 소망 사랑으로, 내 중심의 가치를 알아달라는 식으로, 나를 더욱 더 강하게 다지는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어떤 불신자가 자꾸 대들면 대표기도하면서 저주받으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진리도 없다. 있다 해도 건너갈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왜 우리에게 주셨는가? 그런 진리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기도 싫고, 그런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건너갈 방법도 없다면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 내가 뭔가 할 수 없다는 것, 내 쪽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있어도 있으나 마나한 거예요.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이익을 얻어야 될 텐데 내 중심으로 뭘 해도 불가능하다는 말은 있으나마나 한 거잖아요. 소용없는 거예요. 나에게 소용없는 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나에게 소용없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나에게 소용없는 것이 왜 이렇게 약 올리는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되지도 않을 이야기가 왜 나와 있느냐 하는 거지요. 그것은 이쪽 세계, 성령의 은사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서 볼 때 “우리는 죽은 자요, 저주받은 자요, 심판받아 마땅한 자요, 지독하게 악한 자요.”라는 평가, 저쪽 세계에서 이쪽을 불의한 것으로 지적하고 고발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있는 겁니다. 혼자 있으면 자기만큼 착한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나로 하여금 사귀거나 다룰 수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쪽세계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요. 알도리가 없는데 저쪽세계의 어떤 특정 기준에 준해서, 우리가 모르는 다른 기준, 내 중심의 기준 말고 그쪽 중심의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요, 지옥가야 마땅한 자로 주께서는 평가를 내리는 겁니다. 심지어 회개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믿는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야기를 이렇게 끌고 가는 이유가 뭡니까? 왜 자꾸 이야기를 이렇게 끌고 갑니까? 안된다고 하면서도 온통 지옥과 저주는 다 갖다 발라버리고, 왜 그렇게 설교를 몰아갑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모든 구원의 작업이 사람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홀로 하시는 일인 것을 우리가 증거 해야 될 성도로서 사랑의 은사를 선물로 받는다는 겁니다. 네가 사랑의 은사를 받아서 이익을 보라고 준 것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 인간이 내 중심으로 살면서도 이것이 예수님만 증거 하는 용도로 활용시키는 그 작업을 저쪽 주님 쪽에서 해내신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그것은 주님만의 솜씨에요. 죄인을 가지고 의인되었다고 주께서 우기시면서 하시는 것은 “너 죄인인데 의인되었으니까 이익 봤지?” 그런 내 중심의 이익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만큼 대단한 분이잖아.” 죄만 짓는 우리 죄인을 가지고 주님만 증거 하라고 우리를 그렇게 활용하신다는 그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생존을 근거로 해서 살기 때문에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이런 것은 별로 필요치 않아요. 고린도전서 13장 내용이 생계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우리한테는 소용없는 거예요.
서문시장의 상인이 중력파에 대해서 꼭 알아야 됩니까? 시장 통의 아줌마들이 어물전 고기 팔면서 빅뱅의 중력파를 꼭 알아야 되겠어요? 개성공단에도 관심이 없는데 최첨단 물리학을 알아서 뭘 할 거예요? 그냥 밥이나 먹고 살면 안 됩니까? 밥 먹고 살면 되고 공부 잘해서 나중에 돈 벌어서 부모 효도하면 되잖아요. 그게 전부 아닙니까? 그게 진리잖아요.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잖아요. 왜 모든 것을 참아요? 바보에요? 모든 것을 참게. 우리가 욱, 하는 성질이 없어서 참는 겁니까? 더러워서 참지요. 한계를 넘으면 그것도 못 참아요. 모든 것을 견딘다고요? 바보 아니에요? 왜 모든 것을 견뎌요? 고소하지.
세상은 진리가 진리답게 작용하는 소모품입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3장 20, 21절에 있어요.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하지 이럴 때는 참 기분 좋지요. 우리 중심으로 사는데 주께서 만물이 다 우리 것이라고 하니까 기분 좋지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이만희도 우리의 것이요. 어떤 교주가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야, 이거 넘어서야 돼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우리가 욕했던 죄인도, 우리가 좋아했던 어떤 분도 사실은 내가 좋아하든 말든 관계없이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만들어놓은 소모품입니다. 그것을 페어링이라고 합니다. 로켓이 올라가다가 덮개가 바다로 떨어지잖아요. 그 연결덮개를 페어링이라고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 모든 것은 사실은 그 자체로 봐서는 가짜고 껍데기에요. 그 모든 것이 껍데기고 우리 보기에는 ‘저 인간이 왜 사나’ 싶지요. 그런데 이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필요한 소모품으로 반드시 태어나야 하기에 저 인간이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 인간이 누구인지 각자는 알아요. 우리 자신이 소모품이라니까요?
소모품인데 우리는 소모품인지도 모르고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끌어당긴 거예요.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특히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뭘 해줄 겁니까?” “너는 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나의 진리입니다.” 자기가 진리래요. 요한복음 14장 6절을 여러분이 들은 기억이 있을 거예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라는 말은 예수님 뒤에 누가 있는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그 내용에 대해서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 하지만 모르고 있는 것조차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소모품으로 이 세상에 깔아놓았다는 겁니다. 하나의 덮개입니다. 덮개는 벗겨져야 되고 뜯겨져야 되지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 여러분 속에 선물로 잠입하고 침투가 되어 있으면 그 때부터 여러분은 여러분을 갉아먹어야 됩니다.
사과나 귤을 보관하다 보면 막 썩어 들어가요. 밑에 짓눌린 부분부터 막 썩잖아요. 그러면 상한 부분을 쳐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네 인생이 뭐냐 하면, 내 안에 주님이 주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는, 내 중심이 아닌, 주님 중심의 것이 침투되어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칼 가지고 도려내고 깎아내야 돼요. 여러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갉아먹어야 됩니다. 이걸 가지고 저는 ‘실패의 생활화’라고 합니다. 매일 실패하세요. 매일 실패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실패를 해야 하나하나, 볼펜부터 모든 것 하나하나가 귀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귀한 것이 돼요.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막산다, 막산다, 하니 일부러 죄짓고 하는 그게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늘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물 한 방울도 귀하고, 머리카락 하나도 귀하고. 연세 들면 다 알게 돼요. 머리카락 다 빠져나가면 머리카락 하나도 귀해요. 옆에 있는 자식, 어느 것 하나 안 귀한 것이 없어요. 전에는 시시하게 보면서 보석 같은 귀한 것이 따로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를 갉아내고, 자기를 도려내면 모든 것이 주님을 증거 하라고 주신 귀한 것들이 부케 꽃다발처럼 모아져 있는 겁니다.
하나하나, 나에게 안주셔도 되는데 이 귀한 것을 주셨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그런 운동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고맙게 여겨지고 감사한 거예요. 이것은 모든 것을 견디는 적극적 방식이에요.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해서 이 악물다가 이빨 깨지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면 견디지 말라고 해도 ‘난 견딘 적이 없고 그저 고마웠을 뿐인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뒤돌아보면 그것이 견딘 것이 돼요. 참은 것이 돼요. 누가 ‘저 인간 참 오래 참는다’ 여겨도 정작 당사자는 ‘난 참은 것 없어. 난 그저 고맙게 여기고 살았어. 주께서 저런 인간 붙여줘서 그저 고맙다고 여긴 것뿐인데.’ 이런 생각이 들지요.
평소에는 그게 나타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평소에는 세상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익 되는 짓은 행동으로 하고 손해되는 짓은 죽어도 안하지요. 손해되는 짓을 미쳤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진리라는 것은 내 절대적인 가치만이 진리인데. 내가 진리잖아요, 내가. 내가 진리라고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 가신 곳에 어디든 제 목숨 내놓고라도 가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베드로에게는 무엇이 진리인가? 자기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자기에게 진리라고 여긴 겁니다. 예수님은 단호했습니다. “못 온다.” 아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못 온다. 할 수 없다.” 그리고 14장입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너에게 올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네 쪽에서 그곳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에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내가 발견되는 거예요. 선물이 성령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이지 내가 애쓰고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종교하고 치열한 싸움을 해야 돼요. 깡패하고 싸우기는 쉬워요. 어지간하면 경찰에 고발하면 그만이니까.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의 종교, 다시 말해서 자기 가치와 싸운다는 것이 제일 싸우기 힘든 싸움입니다. “어떡하면 내가 실패를 할 수 있어요?” 벌써 시작이 그래요. 어떻게 하면 칼 들고 나를 도려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걸 아름답게 윤기가 나도록 광을 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종교거든요. 교회 가서 술 끊고, 담배 끊고, 그래서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세상에 성령 받고 성화해서 이렇게 착하고 예쁠 수가 있느냐, 하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것을 위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와서 다 튕겨져 나가요. 꼭 설날에 폭죽놀이 하는 것 같아요. 다 튕겨나가 버려요. 이 방송 듣다가도 막 방송 끄고 튕겨나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가치를 지금보다 향상시킬 수가 있는가, 그런 싸움이 아니고 지금껏 나의 가치를 더 장려하고 개선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 그 놈의 하나님의 형상, 그 아름다운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그렇게 애쓴 그것이 왜 그래서는 안 되는가를, 그게 왜 도려내야 할 마귀장난인지를 아는 싸움인 겁니다. 실패의 생활화, 자기 절대가치와 싸우는 그 싸움을 해줘야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내가 남아 있는 한 나의 증인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진리입니다. 내 이야기는 끼지 마세요. 그런데 내 이야기가 끼거든 그것을 칼 가지고 도려내야 되거든요. 정말 나의 이야기라고 여겼는데 도려내고 보니 이게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history,그분의 이야기, 그 분의 역사에요. 예수님이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지역에 태어나게 했고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신 겁니다. 마침 자장처럼, 자석처럼. 자석은 어디에 두어도 거기서 고유의 파를 내요. 이걸 시그널이라 합니다. 케이블채널에서 하는 드라마이름하고 같아요. 어제 8화까지 했는데 거기서 못된 놈 잡혔어요.
시그널, 신호에요, 신호. 생명의 신호, 지난 수련회에서 강의한 요한계시록, 제목이 “생명의 신호”였잖아요. 내 속에 ‘나는 건드리면 가만 안 둬.’ 이게 나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내 안 저 깊숙한 곳에 다른 시그널이 나옵니다. 어떤 파가 나와요. 이것은 미국에 가나, 독일에 가나, 필리핀에 가나 관계없어요. 북극에 간다 해도 그 신호가 여전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어떻고, 못사는 동네에 살았느니, 중국에 사느니, 그것은 핑계에요. 주님의 시그널은 어떤 자리에서도 그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이 땅에 사는 모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신호가 죽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날마다 시그널을 찾기 위해서 날마다 칼 들고 그 문드러진, 썩어빠진 과일을 아낌없이, 전에는 생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그널을 방해하는 종교적인 것들은 전부 다 잘라 내버려야 돼요. 나 중심의 가치를.
그러면 나로 인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를 위하여 내가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쪽에서 건너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발견된 거예요. 저쪽에서 주님이 발견해서 은사로서 선물을 주신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여기서는 은사라고 했지만 구약에서는 그걸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은혜가 구체화되는데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나오게 되는 최초의 경우는 출애굽기 33장에 나옵니다. 그 전에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고 창세기에 나오지만 그것은 결과만 나온 것이고 구체적으로 나온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처음으로 나온 이야기가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같은 말이 이어집니다.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은혜를 줄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그런 뜻이에요. 은혜를 주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22절에 보면,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히브리어로는 ‘코페르’라고 하는데 ‘덮었다가’ 이게 은혜에요. 덮어주는 거예요. 덮개.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는 덮개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덮어주는 거예요. 내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지 않고, 인위적으로 내가 조작하지 않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덮어준 그 덮개가 있어요. 물체인가? 물체가 아닙니다. 실체인가?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동사에요. 움직인다, 동사에요. 무한한 활동입니다. 무한한 활동이 묵시적용어로 명사화 되면, 동사가 명사가 되어버리면 그걸 진리라고 합니다. 그걸 은사라고 해요. 무한한 동사기 때문에 하루만 덮어주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늘 덮개로 덮어줍니다. “아이고 이 죄인아! 네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죄인아! 죽을 때까지 너 밖에 모르는 죄인아!”
지난번에 안양에 갔을 때 멀리서 오신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어머니가 자꾸 자기 며느리가 돈 가져갔다고 욕을 한다는 거예요. 치매 걸려서 그렇다고 해요. 금반지 가져갔다고 하는 같은 유에요. 그걸 볼 때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이 많거나 치매 걸려도 “내 것을 왜 가져 가는가?” 하는 거예요. 마지막 남은 치매현상, 곧 죽어도 “내 것 왜 가져가느냐? 이 도둑××!” 해 가면서 왜 내 것을 가져가느냐고 하는. 아, 철두철미하게 자기중심이에요. 대체 그 사과와 배는 어디까지 칼로 도려내야 합니까? 뭔가 시그널이 나와야 되는데.
시그널이 나올 때 이렇게 나와야 되거든요. “주여, 이게 바로 죄입니다.” 이게 나와야 되는데 “이게 죄입니다.” 하는 그것은 아직까지 안 나와요. 5밀리 남았어요. 또 잘라내고. 그런데 이것도 아닌데, 뭐가 또 있어야 되는데……. 그 정도로 인간은 덮개 없는 삶,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중심으로, “세상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자기중심주의. 왜? 그게 나에게는 진리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참지 않을 거야. 나는 모든 것을 견디지 않을 거야. 누구든지 내 교회를 욕하고, 내 목사에 대해서 욕을 하고, 내 장로나 집사에 대해서 욕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바라지 않을 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믿고 기대할 거야. ‘암 걸리게 하옵소서.’ 나는 이런 것은 안 믿을 거야. 내가 손해나는 것은 절대로 기도 안할 거야.” 이게 바로 죄입니다. 덮개가 없는.
모세가 이런 은혜를 받아서, 그 다음에 모세가 받은 은혜를 보편화시키기 위해서 출애굽기37장에 보게 되면, 드디어 언약궤를 만들고 언약궤를 덮어주기 위해서 속죄소를 만듭니다. 피 뿌리는 데지요. 언약궤, 그리고 속죄 소, 다른 물체지만 피 흘림으로 이어져버리지요. 피로써 그 무서운 율법, 언약궤, 저주하는 율법과 그 저주가 나오는 것을 피로써 덮는 거예요. 덮어주는 겁니다. 저주받을 힘을 용서의 힘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피고 그 피가 무한한 동사로서 은사가 되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믿으며, 이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인정하지 않아요. 왜? 내 중심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진짜 성령이 와서 믿게 된 믿음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지요?”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그런 결과를 낳습니다. “예수님이 이 못된 나를 인간 만들었지요?” 이렇게 예수님 은혜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37장 9절에 보면, “그룹들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긍휼과 사랑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이 덮어주는 것, 이게 말로만? 아닙니다. 추상적? 아닙니다. 실제 이 역사 속에 사건으로 터졌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십자가와 무관한 가짜 복음들이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가, 그 말입니다. 지금도 교회들이 예수를 믿자고 합니다. 다 위험한 거예요. 예수를 믿자는 말은 예수님은 내 앞에 대상자가 되고 내가 평소에 누군가를 믿듯이 예수를 믿겠다는 겁니다. 예수 이용하겠다는 거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곧 인간이시다, 삼위일체의 정신으로 예수를 믿자.”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주체 자를 고스란히 살리면서 믿기 때문에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가 돼요.
십자가 사건으로 매일같이 우리는 실패가 생활화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게 명사가 아니고 동사 속에 휘말려 있는 겁니다. 주님의 용서와 긍휼 속에, 맹렬한 활동 속에, 그 힘 속에 우리는 덮여 있는 거예요. 우리 성령의 내부가 시그널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실패해요. 시험에 합격하는 실패, 로또에 당첨되는 실패, 은혜 받았다고 좋다고 까부는 실패, 결혼한다고 하는 실패, 아들 낳았다고 좋아하는 실패, 모든 것이 왜 실패인가? 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거든요.
주께서 왜 그런 일을 주십니까? 네가 평소에 얼마나 참을 것만 참고, 믿을 것만 믿고, 견딜 것만 견딘다는 네 중심으로 평소에 살아왔음을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 피와 대비시키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예수님 옆에 있던 그 강도,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그것을 운동력 있는 은사, 운동력이 있는 사랑의, 진리의 능력이 매일 같이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그 덮개를 보라는 거예요. 죄는 짓되 덮개를 보세요.
내가 만들지 않는 덮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덮개를 만들어서 그 이불로 우리를 푹 뒤집어씌운 겁니다. 그 긍휼과 사랑,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신 분의 공로로 인하여, 조금만 건드리면 참지 못하고, 조금만 건드려도 견디지 못하는 이 죄인을 용서하는 그 용서를 증거 하라고 우리를 평생 치매 걸려도 자기밖에 모르는 죄 짓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진리와 함께 살아야 되는데 내 중심의 진리와 함께 버텼습니다. 사는 것인지 버티는 것인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인지 나를 증거 하는 것인지, 나의 절대적 가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 정말 주를 위해 증거 하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 저희들의 모습, 다시 한 번 용서라는 덮개로 덮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