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71강-하나님 이름의 처소(신12;4-7) 1602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2. 24. 07:27
2016-02-21 14:53:30조회 : 79         
   하나님 이름의 처소 160221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하나님 이름의 처소(신명기 12:4-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0LtbLrh5YD8, Hit:7

 이근호 16-02-21 15:48 
하나님의 이름의 처소


2016년 2월 21일                               본문 말씀: 신명기 12:4-7

(12:4)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12: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12: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12:7)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신’이란 인간이 붙여주는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나의 필요에 따라 의지하고 싶어 꾸며낸 초월적 존재가 신이며, 세상이 존재하고 유지되고 흘러가는 합당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설정해놓은 관념적 용어가 신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의지대상은 ‘죽은 조상’입니다.

조상에게 잘 보여서 후손이 복을 받도록, 죽은 조상이 집합해 있는 그것에 절적하게 종교적 압력을 행사하고 싶은 겁니다. 즉 “우리 종족은 처음부터 하늘의 복을 타고 났다. 따라서 우리는 그 조상을 우대하므로서 조상이 받았던 그 복이 후대까지 흘러내려오도록 길을 터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다 이런 식으로 신을 섬기고 있는 형편이라서 누가 누구를 보고 일방적으로 “너는 우상섬기네”라고 매도할 수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저 자신의 족보의 정체성과 결합되어 지속적으로 후손이 잘되도록 배후에서 복으로 관리하는 그 신을 전통식으로 반복하는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만큼은 시비 걸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기존의 일반적인 신을 우상으로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살고자 하면서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 못할 하나님이 자신들을 찾아와서 자신의 죽음에 직면한 경우를 유발하면서 비로서 알려지는 신과 접촉 중입니다.

즉 그냥 하늘에 계시지 왜 기어이 인간들 속에서 들어오시는 신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스라엘쪽에서 미리 아는 바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인간들로서는 무척 불편만 야기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진해서 인간 속에 들어오시면서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환경까지 친히 조성해놓으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쪽에서 원한 그 어떤 요소와 무관합니다. 순전히 하나님쪽에서 원하신바가 있기에 찾아드시는 겁니다. 이게 우상과의 차이점입니다. 인간들이 은근히 고대하는 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은 이곳을 목표 삼는 순간부터 그 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 방안을 자신의 행함으로 가능한 방식으로 채워놓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에게는 이런 술책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에 의한 변화가 일어나는 현장을 만들어냅니다. 로마서 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의로운 자’가 발생하는 현장이 곧 성령이 작렬하는 현장입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없습니다. 비록 돈없고 권력없고, 노숙자 신세가 되고, 처량하게 왕창 망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 받았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것은 돈이나 권력으로 유발할 수 없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이러한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천국의 양상을 구약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로서는 거룩한 하나님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께서 기어이 자신의 이름을 인간들 속에서 두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이름입니까? 쉬운 예를 들면, 어떤 학생이 자기 집에 돌아와서 자기 교복에 있는 명찰을 떼어 방바닥에 두고서는 곧장 친구 만나려 밖에 나갔을 때에, 뒤늦게 들어온 부모는 자기 아들이 이미 집에 왔다 갔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름이 적혀있는 그 명찰에 자기 아들의 속성과 성격과 인물이 다 담겨있다면 아들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보여주시는 바가 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의 ‘하나님 이름의 기능’을 수행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감당못하는 그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들 속에서 들어오시면서도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능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으로 생산되는 작용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름’이란 실체의 전부를 대변해주는 겁니다. 지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부 담는 장치가 이스라엘 내부에 심어놓으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 작업이 바로 오늘 본문 신명기 12:6에 나와있습니다. “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즉 이 장치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장치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일단 그 제단에서의 제사의의에서 바꾸기 전의 상태가 드러나야겠지요 이점을 알기 위해 초반 시절의 제단의 의의가 출애굽기 20:22-24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너희를 위하여 만들기 말고’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우상숭배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고 활동하고 사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한 신을 선택하고 섬기고 전통적으로 모시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죄인이 마치 신을 섬긴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인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기치는 일입니다. 평생을 신을 섬겼는데 그 세월을 통해서 여전히 죄인되어 지옥가게 되면 참으로 기가찰 일이요 사기술에 흠뼉 빠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단을 쌓던지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오는 하나님 나라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단은 출애굽기 24:5-8에 보면, ‘피뿌림’으로 인해 더 본질이 다가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제물의 피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곧 제사행위가 곧 제사의 완성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제사의 완성은 인간의 손에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 행위가 실패로 드러나고, 저주거리로 판정나는 그 순간, 곧 십자가에서 천국의 실체가 같이 드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왜 피가 필요한 인생인지 평생을 걸쳐서 동행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2-21 20:44 
71강-신 12장 4-7절(하나님의 이름의 처소)1602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2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남기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5절에 나왔듯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하신 장소가 있답니다.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특별히 만드신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장소를 두시는 이유는 우상과 차이점을 두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신이죠. 하나님 쪽에서는 그것을 우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입장에서는 그것도 신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백 명이면 백가지 신이 나오고 천명이면 천 가지 신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별로, 또 자기 민족이 잘되기 위해서 민족 단위로, 집단적으로 대를 위해서 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신은 조상입니다. 모든 인류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는데 어디에서나 조상숭배만큼은 어느 민족이나 다 있습니다. 대만 같은 경우에, 대만을 안 가봤습니다만, 대만의 풍속을 보게 되면 명절 때마다 향불을 피워요. 가정마다 향불을 피워서 조상신을 섬기더라 이 말이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고 중국도 마찬가지고.

조상신을 섬기는 것이 문제 있다고 하는 그 쪽이 오히려 문제 있어요. 왜냐하면 다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죽은 조상이 잘하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 이거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조상을 섬기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쪽이 나쁜 쪽으로 그렇게 되죠. 유일하게 조상신에 대해서 거부하는 민족이 있다면 이거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을 믿는 것이 아니고 조상들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기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하고 차이점이 뭐냐, 다른 민족도 우리 아버지가 믿었던 신을 믿겠다, 우리 할아버지가 믿었던 신을 믿겠다, 똑같은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 아브라함과 이삭이 믿었던 하나님이 이 땅에 다시 온대요. 그게 차이점이에요. 다른 신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냥 하늘나라에 집합해가지고 지상에 있는 후손들에게 복이나 주고 나중에 자손이 죽으면 다시 하늘나라에서 선배들하고, 조상들하고 모이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구태여 죽은 조상이 이 땅에 올 이유는 없어요. 구태여 이 땅에 다시 올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그 마태복음 17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 옛날에 죽은 조상 모세나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나타났습니다. 조상인데 이 땅에 나타났어요. 보통 조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우리 한국 같은 경우에는 그게 그냥 조상이 오는 것이 아니고 조상신이 오죠. 조상신이 오게 되면 갑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무병신을 앓게 돼요. 무병신을 앓는다는 것은, 이거는 굿 안 하면 못 낫는 병이라는 겁니다. 굿을 해야 낫는 병이라는 거예요. 굿을 하게 되고, 이제는 박수무당이 되어 가지고, 여자는 그냥 무당, 남자는 박수무당, 무당이 되게 되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깔끔하게 아프지 않으면서 본격적으로 무당의 길을 접어든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무당의 길은, 사이비 무당 말고 진짜 무당은 무신의 병을 앓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최영 장군의 귀신이 오게 되면 최영 장군 섬기게 되어 있고, 단군이 오게 되면 단군 신을 섬기게 되어 있고, 그래서 일반사람들이, 그러한 무당신이 없는 일반 보통 사람들이 뭐, 우리 딸 시집은 언제 가야 되고, 우리 집 이사는 언제 가야 되는지, 집안의 우환은 왜 많은지 물으면 자기가 모르고 최영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이라든지, 강감찬 장군이라든지, 단군한테 물어 가지고 한 2만원씩, 3만원씩, 굿하면 한 천 만원씩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그 사람들 세금도 내지 않아요. 하여튼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어쨌든 간에 모든 인간의 신은 신을 위한 것은 없고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한 신이라면, 나의 미래를 보장하는 신이라면 나는 어떤 신이라도 섬길 용의가 되어 있다. 그게 바로 신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 믿는 이유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냐 하면 인간이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그 신과 진짜 하나님과의 차이점을 이스라엘 사람들만큼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내가 이 지상에, 이 땅에 오겠다는 겁니다. 올 필요도 없는데. 자,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천지를 만드신 분이, 창조자가 이 땅에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당을 못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무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거룩한 분이 더러운 인간과 함께 살아버리면 더러운 인간들이 다 죽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이 땅에 오시겠다는 거예요. 참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유는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몰라요.

하나님께서 기어이 이 땅에 오시겠다는 겁니다. 오시면서 기존의 인간들이 감당을 못하니까 감당할 수 있는 장치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서 이 땅에 오시겠다는 겁니다. 그 곳이 어디냐, 그 곳이 자기 백성들 속입니다. 그게 중요해요. 보통 우리가 그 곳이 어디냐 물으면 몇 번지 하잖아요. 몇 번지. 동성로 몇 번지, 이렇게 지정된, 여기서 몇 키로 이래 되는데, 하나님께서 오시는 그 장소는 특정 지정된 장소가 아니라 자기 백성이 만들어지고 생산되는 그 현장이라면 그 곳에 내가 있는 줄 알아라. 이래 되는 겁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백성 될 수도 없는, 지옥 갈 사람을 천국 갈 사람으로 전환 시키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걸 오전 설교와 연관해보면 뭐냐 하면 사랑이 머무는 곳에 주님이 함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어떤 분은 저한테 그런 질문을 간혹 해요. “하늘나라가 어딨습니까?” 상당히 궁금한 질문이죠. 그 분의 질문이 “하늘나라가 몇 번지입니까?” 그런 뜻이에요. 하늘나라가 지리산에 있습니까? 설악산에 있습니까? 한국에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어딨습니까? 이렇게 구체적인 질문을 저한테 묻는 거예요. 홍콩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이스라엘 땅에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반갑게도 성경에 해답이 있어요. 그럼 사람들은 “몇 번지인지 찾아가자. 거기까지 대한항공이 뜨는지는 모르겠다.” 이래하고 있는데,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거기에 장소가 나와 있습니다. 그 장소가 좀 모호해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거기 장소가 “성령 안에서”랍니다. 성령 안에서. 대구 지묘동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다시 말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거든 니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는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그걸 찬송가 식으로 하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모신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 유비쿼터스,UBIQUITOUS 어디든지. 어떤 지상에 관계없이, 그게 교도소든, 파출소든 관계없이, 의와 평강이 있으면 그쪽이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심지어 그게 불교, 절이라 할지라도. 이슬람교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게 북한이라 할지라도. 남한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이 어디든지 하늘나라입니다.

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어디서 주로 느끼느냐 하면 사우나에서 주로 느낍니다. 들어간지 7분쯤 됐을 때 느낍니다. 나오고 싶어요. 뜨거워서. 땀은 찔찔 나는데 만약에 누가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려 영원히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면 기가 막힐 거예요. 근데 문 열고 나가면 시원한 찬물이 기다리니까. 사우나가 그 맛이 나요. 사우나 하다가 찬물 풍덩 들어가는 그 맛이잖아요. 근데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어~ 시원하다! 하다가 나중에 뜨겁다 하다가 나중에는 의와 평강, 희락이 다 소멸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이게 생기려면 무엇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느냐 하면 지명에,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보장될 때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속했다고 돼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속한 겁니다. 돈이 없는데 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느냐, 이 하늘나라는 죄를 씻어주기 때문에, 돈이 억만금 있다고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근데 돈이 없어도, 어떤 노력이 없어도 내 죄를 누가 가져가서 죄가 없는 의인됐다면, 비록 돈이 없이 그냥 비참하게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의와 평강과 희락은 여전히 거기서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령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겁니다. 천국 안에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로마서 14장 17절의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이거는 백날 이야기해도 신약의 이야기고.

이 구약은 뭐냐 하면 이러한 모습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구약이라고 제가 분명히 오전 시간에 이야기했죠. 구약은 신약의 긴 그림자라고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구약과 연결된 것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이 땅에다가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주는 장치를 하나님께서 설치를 하게 됩니다. 설치한 그 곳이 앞당겨서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를 설치해야 되느냐, 설치하면서 죄 있는 인간이 죄 없는 인간으로 이게 생산돼요. 이게 바꾸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인간이 죄인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의인으로 나오는 장치를 친히 주님께서 장만해서 있다면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근데 그걸 왜, 하나님이 계신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다고 하느냐, 오늘 본문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요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지상에 두면서 그 두는 곳에 다른 인간들도, 자기 택한 백성들도 그 이름이 있는 곳에 합류가 가능한 장치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는 곳입니다.

말을 좀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와버리시면 인간이 감당을 못해요. 근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기에 두시면 인간은 감당하면서 얼마든지 거기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름을 두신다는 것은 명찰을 떼는 거예요. 자신의 명찰.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찰을 지상에 둔다는 의미는 뭐냐, 인간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볼 수 있도록, 인간들도 감당하고 인간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하면서, 그러면서 그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은 고스란히 그 안에 다 담겨있는 형식을 취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명찰을 두는데, 그 명찰이 하늘에 있는 속성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는 어떤 식으로 인간들의 만남이 가능한 속성이 될 수 있느냐, 고걸 하나님의 이름, 내 이름, 내 명찰, 내 소개, 나 이런 자야! 라고 소개하는 그 이름이 고렇게 장치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뭘 어떻게 설명을 해야 쉽게 설명이 되겠습니까?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러니까 애가 교복을 입었는데 명찰이 달려 있잖아요. 그 명찰을 방에다가 떼놓고 어디 잠시 놀러갔다 이 말이죠. 엄마가 와서 애가 어디 갔나 보니까 명찰은 있어요. 아! 집에 왔다 친구 집에 놀러 갔구나. 아! 이미 내 아들이 집에 왔다 갔구나. 왔다 갔다는 티가, 명찰이 거기에 있으면 왔다 갔다는 티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내려오시는 이유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나라에 스스로의 힘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 수가 없어요. 이미 죄 지은 입장에서는 생명나무 따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편리를 봐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올 수 없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 지상에 인간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주신 겁니다. 마련해 주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잖아요.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죽음을 담보로 해서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만날 때 산 채로 오라는 말이 아니고 니 목숨을 내가 미리 가져가서 내 이름 안에 니 목숨 두고 그 다음에 죄 지은 모습으로 그냥 오너라. 이미 니는 산 자로 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니를 볼 때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맘껏 오라 이 말입니다. 니 모든 행동에 대해서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까. 에이, 죽은 놈이, 뼉다구만 있는데, 죽었으면 인간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죽으면 중국, 태국, 어디든 다 갈 수 있다니까. 시체가 되어서. 비행기 탈 때 죽은 사람이 아이, 멀미난다는 이런 일은 없을 테니까.

죽은 자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가나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산 위에나 산 밑에나. 흔히 교회 앞자리 앉으면 은혜 받는다고 하는데, 교회 앞자리고 뒷자리고 죽은 자 같으면 옆자리고 뭐고 어느 자리고 간에 본인이 죽은 자라고 인정하면 다 은혜 받아요. 그런데 우상은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인데, 죽은 자로 간주해서 죽음을 통해서 관계 맺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인간은 가짜입니다. 사기입니다. 인간은 니가 살아있는 식으로, 니가 그동안 착한 짓 한 거, 니가 선한 일 한 거, 니가 회개한 거, 반성한 거, 교회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한 거, 이런 것 가지고 나를 만나라고 교회에서 사기를 쳐요. 교회에서. 이게 우상이라는 겁니다. 이 게 예수가 됐든, 뭐들 붙였든, 고상한 이름을 다 떼다가 붙여도 다 소용없습니다.

살아 있는 나를 산 채로 가겠다는 것은 개인주의입니다. 주님은 죽은 아담 속에서 택한 백성을 건지는데 자기만큼은 안 죽고 살아 있다고 버티니까 그 인간이 어떻게 제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어요? 한국에 사기가 일 년에 25만 건이 일어나고 2분 만에 사기가 한 번 꼴로 일어난다는 겁니다. 사기 중에 이런 사기가 있어요. 얼만 전에 뉴스를 보니까 관상용 앵무새를 잘 키우면 한 마리에 천만 원을 받는다고 사기를 쳤어요. 그래서 뭣도 모르고 노인네들이 은퇴해가지고 이제는 앵무새 키워서 한 마리에 천만 원씩 한다니까, 뭐 열 마리 같으면 일억이 되니까, 하겠다고 덜렁 했는데 나중에 부화를 해보니까, 알을 30개 받았는데 29개는 부화도 안 되고, 부화가 딱 한 개 됐는데 그 한 개에서 병아리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게 사기잖아요. 교회 30년 다니고 이게 부화하니까 지옥 갈 사람이 부화되어 나온 거예요. 교회 30년 다니고, 목사, 장로, 신학박사 됐는데, 나오는 거 보니까 앵무새가 나온 것이 아니고 병아리가 나온 거예요. 어디서 잘못됐습니까?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모든 인간의 행함은 사기입니다. 모든 행함은 사기에요. 행함 같으면 예수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행함 같으면 우리 이름을, 우리 명찰을 건질 거예요.

천국에는 우리 이름으로 갈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는 죽은 이름으로 들어가야 돼요.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가 뭐냐, 내 이름을 죽은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 거예요. 내 이름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사는 겁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남은 인생이, 70이 되든, 80이 되든, 뭘 하든, 뭐 80돼서 오라고 하거든 그냥 가든, 어떤 이름이 가던 간에 주의 이름으로 가야 돼요.

주님이 자기 이름 부른 거예요. 왜? 주님은 자기 이름 밖에 몰라요. 나머지는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니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옥경이처럼 살았든지 관계없이 주님께서 오직 죽은 이름으로 본다니까요. 그게 바로 우상 아닌 진짜 이름입니다. 그 죽은 이름을 만드는, 다시 말해서 신약에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죽여 버리지만 구약에서는 우리 이름을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어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찰을 바꾸어주는 장치가 그 뒤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신명기 12장에 보면 택하신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6절,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가져다가 드리고” 행함처럼 보이죠. 요게 구약입니다.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에는 율법에 의해서 그들에게 계속 지시와 명령이 주어집니다.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그 지시와 명령을 수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못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장치를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제사 드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낙헌제 드리고 십일조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그냥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왜 아니냐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은 그 일을 해봐야 하는 거예요. 그걸 해보면서 ‘아, 십일조 하고 낙헌제 드린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구나.’ 그걸 느껴야 돼요. 느끼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다. 그게 왜 십자가에서만이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주는가를 알 수 있게 되죠.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12장 요 대목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앞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출애굽기 20장이 있는데, 20장 22절을 제가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4절,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조건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니 이름을 위해서는 드리지 마라. 내 이름을 위해서 드리라. 다시 말해서 니가 있는 몸체와 신체와 너의 환경은 주의 이름을 쏙 집어넣기 위한 하나의 보자기 역할을 해야 하고 하나의 바탕 역할을 해야 되지, 너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과 너의 생존과 본능, 너의 욕망을 위해서 니 몸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위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망을 거기다가 보태게 되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교회 나왔으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니까 복 주겠지. 그게 복이 남한테 돌아갑니까? 결국은 나한테 들어오잖아요. 나한테. 나에게 돌아간다 이 말이죠. 교회 다닌다고 한다면 우리교회는 이렇게 하니까 우리 교회한테 복을 주겠지. 역시 자기 교회 이기주의에요. 마찬가지에요. 자기 교단 이기주의고.

그래서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요걸 이렇게 수정했어요. 이렇게 바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뭔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한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피를 발라야 해요. 이게 피가 추가해서 들어갑니다. 피. 피하니까 갑자기 선짓국 생각이 나죠. 피가 들어가야 해요. 피가 들어감으로써 이 피는 너를 위해서, 너가 너 자신만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는 그것은 잘못이라고 대신 희생해야 될 짐승의 피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만 하면 되느냐 하면 평생 동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면 됩니다. 이거 복음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를 몇 년 나왔든지 간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꼴리는 대로 하면서 살면 돼요. 아, 이거는 아무나 주는 복음이 아닌데. 평생 동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지 욕망대로, 지 욕구대로, 남이 죽든 말든 지만 살면 되고,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이거는 말씀을 백 번 완독하고 요한계시록을 만 번 봐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원래 그래요. 그런데 뭘 결합해야 되느냐, 이런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피와 어린양의 피와 결합하게 되면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작용하는 곳이 됩니다.

“죄인인데, 너 같은 꼴통인데, 꼴통, 너 같은 꼴통도 내가 이겼잖아. 의인 기어이 만들어냈잖아. 십자가 피로.” 그 사람은 예수님의 피만 자랑할 거예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 같은 죄밖에 없는 곳에서 의가 나왔다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바로 성령 안에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천국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 내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복을 받는 현장이 우리의 신체인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구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내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존심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자존심, 주님의 명예, 주님의 희생과 공로만 튀어나오는 곳, 그 곳이 우리의 자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