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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68강-복과 저주(신11;26-28) 1601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2. 5. 08:24
2016-01-31 15:09:32조회 : 89         
   복과 저주 160131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복과 저주(신명기 1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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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b_fIWnbvh5Q, Hit:7

 이근호 16-01-31 15:54 
복과 저주

2016년 1월 31일                         본문 말씀: 신명기 11:26-28

(11:26)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11: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11: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복과 저주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기준을 정하셔서 우리들에게 내밀었다는 것은 일체 우리 인간의 견해를 묵살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본인들이 복과 저주의 기준을 정하게 되면 자신을 필히 축복쪽에서 일단 넣고서 시작을 하게 되면, 자신을 해꼬지 한 사람을 기어이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으로 내쫓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개인적으로 축복과 저주에 대한 기준들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자신에 대해서 어쨌든 잘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자신을 반대하는 쪽으로 어쨌든 저주받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결정된 것처럼 전개되기를 고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인적 의견을 고려치 않습니다.

인간들이 축복과 저주 결정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축복과 저주는 인간들을 배제한 채 인간 말고 다른 분을 겨냥해서 출발시킨 축복과 저주입니다. 구약에서는 ‘그분’이 구체화적이지 않고 먼저 ‘너희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를 ‘너희’라고 지칭하는 자들에게 제시합니다. 이 ‘너희’ 안에서 개인적인 몸부림의 허사입니다. 결코 ‘집단’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개인적으로 갖게 되는 자기에 대한 이미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주변 환경의 힘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성공에 대한 환상도 이미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탐이 나서 자기 마음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부럽다’는 것은 이 세대를 일찍부터 본받고 지내왔음을 말해줍니다. 즉 이 세대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겁니다. 이 세대를 벗어나서 어디를 간단 말입니까?

갈 데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세상 끝에 가도 이 세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스럽다고 간주되는 수도원 속에서도 강렬한 이 세대 풍조가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피한다는 것은 일단 피할 곳이 따로 있을 경우에만 성립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적인 눈으로 아무리 사방을 둘려봐도 모든 곳이 다 이 세대의 연장입니다.

그 이유는 ‘개인적 안목’ 자체가 이 세대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는 쪽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세대가 심어진 세상을 보는 안목입니다. 그 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대가 부정되려면 이 세대에 의 밀려서 다른 세계로 가버린 분이 다시 나타나셔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집단화되어서 나타납니다. 그 집단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으면서 애굽에서부터 분리되는 여정을 시작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회의하고 의견을 종합해서 나선 길이 아닙니다. 그들 내부에 낯선 분의 투입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에 의하면, 기존 세대 말고 또다른 세대가 있습니다. 그곳은 기존 세대들이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구경도 못합니다. 애굽의 군대들이 홍해 속에서 몰살당한 것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단체로 바다에 빠지는 것이 희한한 일이 아니라 그  바다 속에서 살아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이한 일입니다.

지금 이 기이한 집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를 그 앞에 나열하십니다. 이는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세대를 마련되었음을 알려주시고, 이스라엘은 바로 그 세대의 효과와 혜택을 입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즉 전혀 다른 관점의 축복과 저주를 언급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집단에서만 다른 집단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개인주의적 인식으로 살아감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어떤 기준의 축복과 저주가 오더라도 자신이 결정한 바에 의해서 저주를 벗어나 축복쪽에 포함되기를 기도하고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개인적 결정’이라는 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개인은 없습니다. 집단의 속성을 같이 보여주고 있는 요원일 뿐입니다. 창세기 35:10-11에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무수한 새로운 백성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이미 언약되어 있습니다. 계열화입니다. 따라서 언약이란 개인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그저 이미 언약이 벌어진 그 현상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만나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마치 모든 인간들이 죄악된 세대를 본받고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지상에 등장하는 집단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언약백성들은 속에서 자꾸만 언약의 본질을 끄집어내어 놓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백성’을 약속하셨지만 정작 그 약속을 이루는 주인공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속에서 끄집어내어놓고 정계 은퇴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이삭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보여줍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자기 속의 이질적인 것,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해서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속에 담고 있는 자들은 그 기준을 내놓으면서 자신은 현역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 속에서 예수님의 영이 계십니다.

‘나’라고 인정받은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고 우리 성도들은 그 예수님에 의해서 양산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적인 견해’ 자체가 저주스러운 이 세대의 속성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 속성을 밖으로 내어놓고 주님이 사랑을 다시금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자만이 저주가 어떤 자들인가를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개인주의적 생각을 유지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결단과 신앙심’에 의해서 자신이 구원된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게 바로 저주입니다. 기도합시다.

『나 혼자 살겠다고 설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이미 구원되어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2-01 03:18 
68강-신 11장 26-28절(복과 저주)1601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26-28절입니다. 구약성경 280페이지입니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복과 저주를 우리에게 주께서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을 묵살하겠다는 강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시킨 대로 안 하면 저주를 받고 시킨 대로 하면 복 받는다는 이 말은 이미 주도권이 완전히 우리 개인의 주도권에서 주님한테 넘어갔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거든요. 니가 복 받고 안 받고를 니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다른 쪽에서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되고 싶은 대로 될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음을 너희들이 좀 알라는 겁니다.

특히 “내가”, 하나님이죠. “오늘날 복과 저주를”, 그 다음에 말이 상당히 중요해요. 사실은 이걸 대부분 사람들이 다 놓치죠. “너희”거든요. “나”가 아니고 “너희” 복과 저주를 나한테 주는 것이 아니에요. 니가 소속된 그 단체한테 주는 겁니다.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늘날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서 도대체 신명기에 나오는 이 말 조차도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접근 자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하는 것은 애초에 삑(×), 그런 방식의 복과 저주는 애초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어떤 단체,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주께서는 복과 저주를 가지고 캐나가고 있고 캐묻고 있는 겁니다. 소속이 어디에 있느냐는 거예요. 소속이. 주께서 이렇게 “너희”라는 말을 하는 것은, 니가 한창 나는 나다, 하면서 몸부림치면서 우겨도 니는 주변에 있는 힘에 의해서 휩쓸릴 수 있는 그러한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어떻게 바른 인간이 되고자 해도 주변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그런 환경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곧 이 세대를 본받고 사는 거예요. 이 세대를 만약에 본받지 아니하면 이 세대가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안 놀아주죠. 왕따 시키죠.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싶어도, 이 세대 말고 다른 세대가 뭔지 알아야, ‘그래, 이 세대는 아니야. 나는 다른 세대에 살겠어.’ 하겠는데,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온 그 모든 것이 이 세대이기 때문에 이 세대가 전부고 그 외에는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알려 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다른 것을 피할 다른 자리는 우리에게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미련하고 집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어차피 다른 것이 있으면 다른 것에 미련 두고 집착하겠는데, 그 다른 것이 없거든요. 도망쳐 봐야 도망 못가요. 우리의 현재 입장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너희”가 아니고 어떤 “너희”냐 하면 애굽에서 출애굽했던 그 대상자들의 집단을 가지고 “너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너희 속에 뭐가 살아 있느냐, 너희 속에는 출애굽 정신이 살아있고, 출애굽 그 원리가 살아있어요. 출애굽 원리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거예요. 전에는 너희가 애굽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너희가 거기에서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현대인에게 어떻게 적용시킵니까? “전에는 너희가 대한민국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아니면 어딘데? 미국인가? 캐나다인가? 뉴질랜드, 호주인가? 어딘데?” 갈 데가 있어야지. 갈 곳이 없어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이거 최백호 노래인데. 갈 곳이 없어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요. 가봤자 애굽인데, 가봤자 애굽이에요. 거기서 무슨 복과 저주를 논합니까? 출애굽이라는 것은, 주께서 출애굽 한 집단에게 복과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전에는 너희가 옴팡 저주를 뒤집어썼는데 이제는 저주에서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거룩한 내 백성으로서, 복 받는 내 백성으로서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빠져 나오면 뭐합니까? 그 애굽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모포 두르듯이 둘둘 감고 나왔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생각, 사고방식이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스타가 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이 땅에서 나는 살만큼 살았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그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기대한 거예요. 낙오자 되지 않고 앞서가는 사람, 우리는 누구보다 앞서간다,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런 소리 하지 마! 그건 저주야!”라고 불쑥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속에 준비된 사람 별로 없습니다. 사실은 좋으면서 “에이, 왜 이래? 뭐 다 주께서 은혜로 주신 거지.” 그래, 뭐 주께서 은혜로 주셔서 애굽에 살게 하셨습니까? 

주의 은혜가 뭔데? 애굽에서 빠져나온 건데. 애굽에서 성공한 것이 주의 은혜입니까? 그게 축복이에요? 문제가, 오늘 본문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할 때, 첫 번째는 복과 저주를 일방적으로 이미 기준을 제시한다는 자체가 우리한테는 기분 나쁘고요. 복과 저주를. 복만 있고 저주를 빼면 기분이 약간 좋아지려고 해요. 근데 복과 저주를 줬다는 것이 기분 나쁘고. 저주 왜 뒤에 달고 나오는데? 그거 저주 빼면 안 됩니까? 복 주겠다는 이 말만 하면 되지, 저주는 왜 달고 나오는데? 그 달고 나온 저주의 기준이 이미 일방적으로 쳐들어왔다는 것이 문제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느 집에 가서 “아이고, 이 가정에 참 복이 옵니다. 만복이 올 겁니다.” 이러면 괜찮은데, “이 집안에 복과 저주가 임할 겁니다.” 이러면 상대방이 상당히 기분 나빠요. 첫째는 뭐냐, 복과 저주의 기준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왔다는 거고. 두 번째는, 내가 어떻게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 복과 저주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이거는 너희니까. 나에게 준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 준 거예요. 이 말은 너희 속에서 아무리 혼자 바르게 살아봤자 이거는 소용없는 거예요. 복을 받아도 너희가 복 받고 저주를 받아도 너희가 저주 받는 거예요.

실제로 에베레스트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난다든지, 뭐 여러 가지 갑자기 태풍이 온다고 할 때에 그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구분해서 눈 오고 비 오고 그렇게 안 하거든요. 지진이 일어날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빠져나가라는 계시가 와서, “니는 보따리 싸서 나가 있고 나머지기 사람은 몽땅 지진.” 뭐 우리 개인적인 사고방식 같으면 저주가 우리한테 임하지 않고 저주가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 다 주어지면 좋겠어요. 이게 잘못인데, 개인적인 사고방식이에요. ‘나 빼놓고’, ‘나 외에’, ‘나 외에’ 그거는 예수님한테만 해당되지 우리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빼놓고 다른 사람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근데 성경에 나라는 것, 애초에 나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계시와 말씀은 나한테 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한테 줍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쓸 수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만 ‘나’가 되지 다른 사람은 ‘나’가 되지 못합니다. 상당히 낯선 이야기처럼 들리겠는데, 그게 창세기 35장 1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허리에서 나온다. 미국에 크리스마스 행사에 보면 어린애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줄 때 큰 종이로 깔때기를 만들어요. 깔때기의 입구는 상당히 크고 깔때기 밑에는 하나의 점으로 집약되어 있죠. 깔때기 알잖아요? 밑에는 좁고 위에는 넓고. 병 같은데 물 부을 때 좁아야 들어갈 수 있잖아요. 어릴 때 보니까 미국의 크리스마스 행사에 선물을 줄 때 깔때기 같은 그런 색종이에다 선물을 담아가지고 계속해서 나오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아마 여러분들도 봤을 텐데, 안 봤으면 그냥 넘어가고요. 보니까 거기서 계속해서 뭐가 나오는 거예요. 블랙홀처럼 뭐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아까 읽었던 창세기 35장 내용입니다. 야곱이라는 허리에서 계속해서 왕들이 나오고 국민들이 나오는 겁니다. 나올 때 그 나온 사람을 가지고 너희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없어요. 나는 하나님께서 어느 쪽의 너희에 속했는가를 우리한테 지금 묻는 겁니다. 너희에게 축복과 저주를 둔다는 이 말은 너희가 개인적으로 반듯하게 산다고 복 받고 나쁘게 산다고 저주 받는 것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내가 어디에서, 나 말고 나와 함께한 이들이 도대체 어느 허리에서 나왔느냐, 어느 출구에서 나왔느냐, 그걸 봐야 된다고요.

그러면 이게 야곱의 이야기인데, 야곱의 이야기는 그 전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 창세기 17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4절,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6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말을 하게 되면 “내가 지킬게요.” 이렇게 해요. 내가 지킬 언약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어요. 지키게 된, 본의 아니게 지키게 된 우리들만 나타날 뿐이지. 왜? 하나님이 언약을 들고 크리스마스 선물 주듯이 쏟아내니까. 막 쏟아내니까.

깔때기 하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설에 보면 뻥튀기 기계 있잖아요. 애들 귀 막고, 코 질질 흘리면서 뭐 강냉이 하나 날아오면 주울까 해서, 6.25 때 사진 보면 나와요. 6.25 때 사진뿐입니까? 우리 어릴 때 사진도 마찬가지인데. 핸들을 돌리면 기압기가 올라가고 그 뒤에 망 같은 것이 있잖아요. 그 망이라니까요. 하나의 기계에서 뻥이요! 하고 튀기면 그 뒤 망에 튀겨진 강냉이가 우르르 쏟아지는 거예요. 그게 우리에요. 우리. 그게 우리라니까요. 제가 뉴저지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에서 설교할 때 주기도문 했거든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애초에 없어요. 내가 주기도문 한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지 않아요. 우리를 구원하는 거거든요.

그럼 우리를 구원하니까 우리 모두 어깨동무하고 합세해서 지킵시다? 아니에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우리는요, 그거는 개인의 주체가 확대된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진정한 우리가 아니고 개개인의 삭막한 집합에 불과합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 열 명이 된다, 남들 보기에는 열 명이지만 본인들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냥 우연히 같은 버스 타려고 서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거는 하나의 인간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아요. 집합이지 우리라고 말 못합니다. 생각이 다른데 무슨 우리입니까? 출신이 다르고, 각자 집 평수가 다르고, 서로 조상이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됩니까?

만지면 하나, 하나 다 부서져요. 전부 다. 각자, 각자 다 튀어나갑니다. 뭐 일본하고 축구할 때만 밤새도록 대~한~민~국~하죠. 세금 많이 때려버리면 전부 다 이민 갈란다고 하면서 각자 개인으로 환원되어서 다 튕겨버리는데요. 집합하는 것과 우리는 다른 겁니다. 집합은 그냥 우연히 모였다 그냥 우연히 헤어지는 거예요. 참, 어려운 대목인데 제가 이걸 설명을 해야 될 그런 지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바꿔치기 들어가는 겁니다. 아브라함, 니 후손이 많다는 것은 니 후손이 많다는 것이 아니고 니 속에 있는 자의 후손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 니는 니 속에 있는 후손을 내보이고 니는 정치계에서 은퇴를 해야 돼요. 정치 은퇴, 언약에서 은퇴를 해줘야 해요.

그냥 은퇴를 하지 말고 아브라함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을 보이고 은퇴를 해야 돼요. 그 보인자가 누구냐 하면 이삭입니다. “내 안에 주께서 집어넣은 이런 분이 있잖아요?”라고 내민 게, 그게 바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잡은 거고요. 끄집어낼 때 하나님께서 “니가 참 믿음이 있구나!” 이런 겁니다. 내 속에 이질적인 것, 나만 있으면 나는 개인주의가 돼요. 세상이 뭐라고 해도 나만 잘 되면, 나만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축복하면 내가 지켜서, 내가 말씀 지켜서, 나 혼자의, 나의 복으로 오게 되는, 그런 입장으로 성경을 다 보게 돼요. 성경을 뭐 만 독, 천 독해도 소용없어요.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성경 보면서 나 위주입니다.

우리가 되려면 나를 양보를 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나 때문에 복이 온 것이 아니고 이 분 때문에 복이 왔다는 겁니다. 내 속에 있는 나의 이질적인 다른 분을 끄집어낼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육으로서는 아내가 애기를 못 낳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언약 안에 준비된 분이 있을 거고, 그 준비된 분을 위하여 나를 그냥 껍데기로 사용한 거예요. 이삭을 위하여 아버지, 어머니가 껍데기에요. 껍데기. 이삭을 준비해놓고, 이삭을 낳기 위해서, 이삭을 못 낳을 수밖에 없는 개인을 준비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우리, 예수님이라는 뻥이요! 하는 그 뻥튀기 기계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마리아라는 개인을 준비한 거예요. 그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 은퇴를 준비해야 돼요. 마리아가 나서서 설쳐가지고 성모마리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는가, 내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사적으로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는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니는 좀 빠져있어라 말이죠. 뭐 믿고 자시고 하지 말고 니는 좀 빠져 있으라. 빠져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언약을 이루어서 예수님에게서 나온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우리라는 단체가 형성이 됩니다. 단체가.

그럴 때 우리라는, 교회라는 단체의 특징이 뭐냐, 전부 다 꺼내놓기 바빠요. 마치 출국심사 하는 것처럼. 다 내놓잖아요. 자식도 주님 거고, 남편도 주님 거고, 아내도 주님 거고, 이것도 주님 거고, 저것도 주님 거고, 다 내놓는 거예요. 그냥 저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 말이 맞는다면 본문에 복을 준다고 해야지 왜?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 하면서 저주 이야기가 왜 튀어나와야 되는가, 우리가 저주에 대해서 몰라요. 우리가 왜 저주에 대해서 모르냐 하면 개인적인 축복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축복이 오게 되면, 저주도 나한테 해코지하는 것들은 전부 다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저주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돼요.

왜냐하면 내가 복 받는 사람이라고 일단 정해지게 되면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처럼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돼요. 임의로 내가 복과 저주를 내가 만들어 낸다니까요. 드라마 봐도, 거의 드라마 보지 않지만, 드라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뭐가 나오게 되면, 또는 TV에서 누가 나오게 되면, ‘저거 빨리 안 죽나? 빨리 없애야 돼!’ 괜히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하고 싶어 해요.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근데, 언약에 비하면 그게 바로 저주거든요. 쉽게 말해서 내가 사적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저주의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저주받을까 환장을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내 중심으로 생각해놓고 복과 저주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게 저주인 것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애굽에서 나오라는 말은 오늘날 신약 적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너 자신에서 나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너 중심으로 생각한데서 나오라. 그러면 나오게 되면, 나와서 복 받은 사람 같으면 어떤 고백과 어떤 마음 태도를 보이게 됩니까? 그게 궁금하거든요. 왜냐하면 자기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그게 제일 궁금하기 때문에.

여기 갈라디아서 1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거기에 나와 있어요. 8절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서 바로 복음 전하는 나, 그리고 너희들이라도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복 받고, 그 다음에 내 복음 안 전하면 저주받는다가 아니라, 우리라 할지라도, 구원받은 우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뭐냐 하면 출발점이 너로부터냐, 너 구원부터냐, 아니면 예수님부터 구원이냐를 늘상 확인하는 그런 환경 속에 놓여있으면 그 사람은 복음 아는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봤잖아요. 그러면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의 빌딩이나 아파트나 그런 것은, 이거는 시답지도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영광 중에 햇빛처럼 훤하게 떴는데. 그 일곱 교회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회장하라고 오라고 하면 가도 되지만 안 가도 그만이고. 일곱 교회, 그 촛대 옮긴다는 거기 왜 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지, 교회 믿어서 구원 안 받거든요. 근데 그리스도가 안 보이게 되면 출발을 내가 어느 교회 가면 밥 먹고 살꼬? 내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됐고, 항상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잘 되면 복 받은 것이라고 여기고. 그리고 나를 내치면 저주받아라! 이것들아! 이래 되고.

항상 나로부터 내가 뭘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갖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내 것이 아니고 우리 것이라고, 자꾸 우리 것으로 바꾸세요. 주님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것입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집합이거든요. 그러면 미워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정말 내가 왜 미울 수밖에 없는가, 자꾸 들어오면 내거라. 들어오면 내 거. 바이올린도 들어오면 내 바이올린. 뭐든 들어오면 내 거 돼버려요. 내 거. 내 거 건드리면 다 저주해버리고. 옛날 코미디에 보니까 이런 코너가 있어요. 어떤 나이 많은 처녀가 젊은 총각하고 사귀는데 그 아줌마 같은 처녀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뭘 보려면 안경을 내려 눈을 깔고 볼 정도에요. 그래가지고 뭘 이렇게 말하니까, “그러면 내 마음 못 주네.” 이렇게 나와요. 왜 못 주냐, 그거 해서 다 죽었다는 거예요. 그 대목에서 제가 굉장히 즐거운 것은 “내 마음 못 주네.”라는 이 대목이죠. “내 마음 못 주네.” 줘도 받지 마세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마음 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의 받은 마음가지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거 주님 마음이잖아요. 내놓은 것이. 내 마음은 따로 있고. 내 마음은 뭐냐, ‘니가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게 내 마음이고. 주님 마음은 이런 것까지 용서하신 것이 주님 마음이고. 이럴 때 내 개인적인 축복과 저주가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축복과 저주라는 것이, 이게 계열적으로, 아까 허리, 계열체, 계열적으로 축복과 저주가 확정된 채로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주님 안에 속한 사람만이, 다른데서는 개인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개인이 아니고 전부 다 아담에 속하고, 마귀에 속한다는 사실. 두 가지 계열밖에 없었던 거예요. 두 사람의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두 계열. 아담의 계열과 마지막 아담의 계열. 계열적으로 볼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언약을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약은 개인가지고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계열에 속한 입장에서 언약을 바라봐야 해요. 나는 어느 소속이냐? 나는 어느 계열 소속이냐? 어느 노선이냐? 누구 때문에 내가 이 계열, 이 노선에 속했느냐?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 의인되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 이래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깥에서는 뭐냐, 마귀적인?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뭐냐,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본인이. 그러니까 개인이 나왔다는 말은 저주 아래 있다는 거예요. 언약 밖에 있으니까 계열을 모르고 자기가 언약 믿어서 구원받는다고, 아직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래가지고 강제로 어떤 집단을 만들어서, 우리 교회 서로 사랑합시다! 해가지고 말로써 세뇌시키고 또 반복적인 세뇌를 통해서 우리 교회 같은 이런 교회 없습니다. 우리 교회 같은 복음 아는 교회 없습니다. 이런 소리는 안하지만. 우리 교회 같은 축복 같은 교회 없습니다. 맨날 저주, 축복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는 맨날 저주라. 왜? 개인으로 시작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 것, 저주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주님 계열 안에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바꾸어서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적인 결단과 결심과 행함으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주인공 되신 주님 때문에 이미 복 받은 사람이기에 내 중심이 왜 저주인 것을 이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