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신 12장 8-10절(요단을 건너)1602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2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낼 때에 어떤 장치 같은 것이 있어요. 이 장치는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장치와 동일한 장치인데, 그 장치가 지형적으로, 지리적으로 이미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땅에서 위로, 수직적으로 올라갈 때에는 그냥 대기층만, 공기만 있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설치를 한다는 것이 곤란하지만, 수직으로 있는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걸 밀어서 수평으로 묘사했다, 굉장히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지상에서 하늘로 어떻게 올라갑니까?” 주께서는 “지평을 봐라!” 이렇게 되죠. “위를 어떻게 봅니까? 위로 어떻게 올라갑니까? 폴짝 뜁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지형도를 봐라!” 이렇게 바꾸어주시는 거예요. 뭐, 지형도가 어떤데 그걸로 구원에 대해서 압니까? 라고 물으면 이스라엘 지형 자체가,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이게 없는 나라에요.
지금 오늘날 사람들에게 천국은 보이지 않는 나라고,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과학적 관찰에 있어서 보는 것이 돼요. 보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 그것을 가지고 검토함으로써 또 하나의 진리를 이렇게 뽑아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걸 귀납적 방법이라고 하는데, 미리 가설을 던지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일어난 현상을 조사해서 그것을 가지고 모아서 또 하나의 약간 진전된 진리 값을 얻어내고, 그렇게 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인류는 더 발전과 발전을 도모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생각 굉장히 상식에 상식을 합한 생각이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생각이 서양에서 17세기에 처음 나옵니다. 16세기~17세기에 처음 나옵니다. 이걸 계몽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처음 나온다 하니까 이상하죠. 그만큼 우리가 오늘날 다른 분위기 속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 몸에 익숙하다보니까 그걸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어디 쌍놈이 양반한테 대들어?” 오늘날 시대에 이렇게 하면 미쳤다고 할 겁니다. 요새 무슨 쌍놈이 있고 양반이 있습니까? 하지만 몇 백 년 전만 해도 감히 양반하게 그렇게 대들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상, 주체라는 것은 주위에 주어진 상황에서 적응하려고 살아남다보니까 그렇게 거기에 맞추어서 목숨을 연명하려고 하다보니까, 시대가 요구하는 주체상으로 그렇게 정립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이 말씀도 마찬가지인데 다시 이야기 이어나가겠습니다. 수직적으로 하늘에 어떻게 올라갑니까? 쳐다본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사다리 내려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수평적으로 어떻게 이스라엘이 어떠한 장애물들을 통과했는가 보아라. 그 장애물들을 바로 세워버리면 오늘날 하늘나라의 가는 길이 되는 거예요. 그 장애물들이 주어졌는데 그 장애물을 요단강, 홍해라고 하고, 첫 번째 장애물이 홍해라고 하고 두 번째 장애물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단강입니다. 두 개의 강이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걸 다르게 이야기하면 “천국에 가고자 하느냐? 두 개의 강을 지나면 된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뭐, 두 개의 강쯤이야 공병부대 동원해서 다리 놓으면 후딱 넘어가지만, 인간이 설치한 다리는 강을 건널 수가 없어요. 강을 건너면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을 제시할 때에 비밀로 작용합니다. 이제부터 슬슬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강을 건너간다는 말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우리는 강 이전에 있고 강을 건너가면 저쪽 세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강 건너기 전에 미리 상상하게 되죠. 상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상상하느냐, ‘강 건너가면 천국이고 강 건너기 이전에는 이 세상이고 지옥이다.’ 라고 생각하기 마련인 그러한 인간의 주체가 그렇게 장착되어 있습니다. 요거 가짜입니다. 가짜에요. 교회서 장례 치를 때 뭐라고 합니까? 하늘나라에 맨션아파트 있다, 따라서 맨션아파트에 갔습니다. 고거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강은, 강 건너가 성립이 안 되어 있어요. 강 같으면 강 이전과 강 이후가 강을 보는 순간, 딱 그 순간에 다가오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설치한 그 요단강은 강 이후가 없어요.
왜냐하면 강 자체가 보이지 않는 강으로 우리 앞에 딱 대령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강이에요. 보이지 않는 강이 왔다는 말은 교회에서 말하는 홍해와 요단강이라는 말은 전부 다 가짜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대학교 때 선교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해봤습니다 만은 그 선교 단체에서 캠퍼스에 있는 같은 학생들에게 전도를 해요. 전도할 때 바로 땅을 그리고 하늘나라 그리고 그 중간에 십자가 그리고 해서 “지상에서 십자가를 건너게 되면 천국 갑니다. 하늘나라 갑니다.” 라는 식으로 전도를 많이 했어요. 그것도 물론 못난 아가씨들한테는 안 하고 이쁜 아가씨에게만 접근해서 그렇게 전도를 해요. 전도를 핑계로 뭔가 썸, 작업을 거는 거예요. 전도를 앞장세워서.
그러면 저쪽에서 전도를 받아들일 때, 받아들인 쪽도 전도를 핑계해서 이성하고 썸 타려고 받아들인 거예요. 둘 다 똑같아요. 전부 다 똑같아요. 근데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왜냐하면 인간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인간의 주체 자체가 과학적 주체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뜨이지 아니하면 존재하지 않는, 삑(☓) 존재하지 않는 동네에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관심 둘 필요도 없는 거예요.
요단강이라는 것은 누구한테만 의미 있는가, 이미 땅도 없고 절도 없고 밭도 없고 그냥 죽을 지경에 있는, 그냥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갖고 있는 그 이스라엘 사람한테만 요단강과 홍해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기존에 가질 것 가지고 누릴 것 누리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요단강, 홍해는 유람하는 그냥 바다요, 강일뿐이에요. 동촌유원지 놀러가잖아요? 그냥 동촌유원지에 불과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가끔 강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세상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이제는 맥이 빠져가지고, 맥도 잘 안 잡히고 곡물도 끊고 밥도 안 먹고, “야야 먹기 싫다.” 이래가지고 진짜 최악의 상태, 더 이상 살기 싫을 때, 그럴 경우에만 “목사님 사람은 죽어서 어디 갑니까?” 진짜 급해가지고 전화 걸어서 “내 죽으면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 하고 묻지요. 그러면 저는 답변합니다. “성도면 천국가고 성도 아니면 지옥 갑니다.” 라고 하지요. 그 말은 뭐냐, “본인이 성도인지, 아닌지는 제 관할이 아닙니다. 제 소관이 아니네요. 제가 아는 것은 성도는 천국가고 성도 아닌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것뿐이다 말이죠.
근데 본인이 성도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인데, 그게 허락이 나고 안 나고는 내 관할이 아닙니다. 다만 성도라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제가 이야기 할 수 있죠. 그걸 오늘 본문과 더불어 설명해드리는 겁니다. 성도는 이렇습니다. 주체가 바뀐 사람이 성도에요. 주체가 바뀐 사람. 주체가 바뀌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런 주체가 바뀐 사람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감 잡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요단강과 이 홍해는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중요해요. 그 사람들은 땅도 없고 백성들이 죽어가는 중이에요. 원래 살던 애굽에서 탈출하다보니까 가진 것도 별로 없어요. 농사지을 수 없습니다. 최악의 상태에요. 그 최악의 상태에서 믿을 것은 이제 모세밖에 없어요. 모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 그것 외에는 아무 의지할 데가 없는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 부동산 갖고 있고 재산 갖고 있는데 뭣 때문에 모세 말 듣겠습니까? “나는 니 없어도 산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나는 니 없어도 살아.”
사람은 다급하면 누군가 붙들게 되어 있는데, 그 붙드는 것도 상당히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용해먹기 위해서 그 사람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서 아무것도 붙들만한 것이 없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더 당황하게 만드신 것은 모세가 주의 종인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것도 의지할만한 것도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천천히 다시 이야기할 거예요. 내가 믿을만한 것은 모세이야기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라는 현 주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세 말을, 하나님의 말을 이용할라치면, 이용할 건덕지가, 이용할 꺼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내가 복 받기 위해서 교회 나와 기도하면 복 받겠지.’ 라는 사고방식 가지고 나오는 사람,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 어떤 말씀도 아무것도 이용할 것이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복 받을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3월 28일이면 저 뒤에 청년, 오늘은 안 나왔는데, 군에 간답니다. 보통 군에 가기 전에, 신체 잘 유지하다가 오라고 목사를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예배드릴 때 흔히 하는 예배가 여호수아 1장, 니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바르게 살게 되면 후방으로 빠진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군에 가면 고생하는데 하나님께서 지켜 주사 편안한 후방, 좋은데, 마산통합병원 이런데. 맨날 일주일마다 외박 나오고 하는 편한 데. 그리 나오면 부모가 얼마나 귀찮다는 것을 몰라요. 전방에 가든지, 우르크(태양의 후예에 나오는)거기 보내버리든지, 그렇게 해야지 가까운데 가면 골치 아파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그런 것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에요. 모른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막에서 어떤 문자 책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해석이 안 됩니다. 해독이 안 돼요. 그게 성경이에요. 현재 내가 크면서 배워왔던 모든 교육적 환경과 양육 받은 것, 내가 아는 모든 상식을 총동원해도 이 성경은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된 그런 문자판이에요. 설명, 해석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운반체입니다. 운반체. 지난 수요일에 운반체 이야기했죠?
그리스 사람들이 중요한 정보를 누구한테 전달을 할 때는, 그때는 전화도 없었고, 중요한 전달을 할 때는 자기 종을 보내는데, 자기 종 이마에 글씨를 써서 보낸답니다. 그러면 종은 자기 이마에 어떤 글씨가 있는 줄 몰라요. 그러면 이 이마에 쓰여 있는 메시지는 누가 확인할 수 있느냐 하면 그쪽 주인이 “가만있어 보자. 니 이마 좀 보자. 저쪽에서 이런 걸 보냈구나.” 하고 나를 맞이한 그쪽 분이 내 이마에 쓰여 있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주체자가 돼요. 그리고 나는 그냥 정보 전달체에 불과한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나를 위한 성경 말씀은 어느 구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이마에 주께서 잠깐 일로 와보라고 해서 이마에다 말씀을 쓰신 거예요. 미싱으로 두두둑 박든지 하여튼 써가지고 주님이 하나님한테 전달하게 되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니는 주의 백성이구나.” 해서 받아들이면 그게 합격이 되고. 안 그러면, 그거 없으면 불합격이 되는 겁니다. 의외로 간단하죠. 근데 의외로 쉽지는 않죠. 왜 쉽지 않느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고 싶은 거예요.
내 구원, 내 미래, 내 운명, 내 팔자는 내가 중간에 개입하고 싶은 겁니다. 타로 점을 보든지, 굿을 하든지, 사주팔자를 보든지, 내 인생에 대해서 가장 궁금한 것은 내가 궁금한 거예요. 내 장래가 어떻게 될까? 미래가 어떻게 될까? 주께서는 보지마라고 하는 겁니다. 왜? 니는 그 정보가 결합될 수 있는 주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나름대로 쉽게 한다고 해도 표정 보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이게 뭐냐 하면 농구에서 패스할 때 우리는 공의 역할이에요. 저쪽에서 던지시고 주께서 받으시고, 주고받고 하면서 즐거워하기는 선수들이 즐거워하지, 공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온통 멍들어서 별로 즐겁지 않아요.
그런데 공의 운동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이미 천국에 와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우리하고 똑같아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은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만 기적이라고 습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 기적만. 사사기에 그런 것이 나오죠. 기드온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고 그냥 새벽에 나와서 양털에만 촉촉하고 양털 바깥에는 물기가 없으면 제가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는 줄을 믿겠습니다. 아이구 미안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들어줬거든요. “아이구 한 번만 더 부탁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한 번 바꿔봅시다.” 주님이 뭐 타짜도 아니고 이리 치나 저리 치나.
내가 확인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내 소유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뭐가 달라지지 않느냐 하면 지금의 내가 안 달라진 채 그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 또 하나님 찾을 때는 또 눈에 보이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또 기적을 또 원하게 돼요. 그게 뭐냐 합리적 사고방식이고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오류가 있다. ‘종족의 우상’이다. 개인이 나서면 또 오류가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말 들으면 또 오류가 생긴다. ‘극장의 우상’이다. 서로서로를 의견 존중해야 진리에 가깝다. 이게 ‘시장의 우상’입니다. 내가 내 중심으로 하면 오류가 생긴다. 이걸 ‘동굴의 우상’이라고 했어요.
베이컨은 바로 경험론자의 창시자로서 네 가지의 우상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과학 기초고, 그 과학이 오늘날 인문과학까지 전부 다 합쳐진 거예요. 모든 것은 눈으로 확인될 때 그게 진리 값이 되지, 확인되지 않는 것은 그건 그냥 허구적 개념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양육 받은 주체입니다. 그게 수북이 스펀지처럼 들어있어요. 따라서 성경을 이야기하게 되면 꼭 따지는 분이 있어요. 명절이 되어 우리 처갓집에 가면 동서 형님이 꼭 따져요. 그분은 물리학 교사를 했던 분이거든요. 연세가 한 70이 되는데 꼭 따져요. “동방박사가 있었을 때 그 별은 어떤 별이었냐? 오스트랄로피테쿠네나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은 성경 어느 시대에 나오느냐? 7일 만에 창조했다는데 7일 만에 창조하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안드로메다만 해도 75광년 될 텐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느냐?”
저는 이야기하죠. 그게 바로 조작된 주체이십니다. 그 과학 하는 주체가. 왜냐, 그 질문을 나한테 하기 전에 ‘나는 왜 죽어야 하느냐?’를 한번 질문 해보시라고요. 그렇게 똑똑하신 분인데 왜 죽습니까? 더 살고 싶은데..왜 죽어요? 히틀러가 그렇게 나쁜 줄 알면서도 왜 굴복하는데요? 그리고 나는 건강하고 싶은데 내 몸이 왜 아픈데요? 이질적인 요소가 내 신체에 작용한다는 것을 감추고 괜찮은 것만 뽑아서 신체와 동떨어진 주체를 만드는 거예요. ‘나는 괜찮다. 나는 늘 건강해야 돼. 남은 죽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야.’ 따로 나의 주체상을, 나의 이미지를 따로 만든 거예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성경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인간에게 뇌관이 있어서 오른쪽, 왼쪽 교체가 되어 절대로 오른쪽이 한 것을 왼쪽이 모를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니 인생은 니가 다루는 것이 아니야! 너에서 너가 손을 떼는 그런 주체를 한번 생각을 해봐라!” 우리는 하나의 농구공이 되는 겁니다. 농구공이 될 때 요단강은 그냥 강이 아닙니다. 요단강의 장벽이 있어요. 그 장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에 보면 “(요단이 모맥牟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이 넘치더라)” 그게 요단강을 건너는데 물이 넘치는 시기를 맞춰서, 타이밍을 맞춰서 건너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물어보겠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는 거예요? 요단강에 쳐놓은 장벽을 건너가는 거예요? 이거는 장벽을 건너가는 거죠. 그냥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장벽을 건너는데, 그 장벽은 인간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입니다. 그 장벽을 여호수아 3장 15절에 보면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물이 갈라져 길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요단강이라는 말은 더 쉽게 해서 그냥 장벽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강이 아니라 장벽. 그 장벽은 “문아! 열려라 참깨!” 한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고 그 장벽은 하나님의 준비된 약속이 오게 되면 그 장벽은 열린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장벽이 열리는 장벽 문은 기다리는 우릴 보고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대신해서 의전儀典 하는 언약궤에 함께 계시는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는 겁니다. 우리 보고 천국 문이 열리지 않아요.
캥거루 주머니 속에다가 우리를 집어넣게 되면 적들이 캥거루 주머니 속에 있는 새끼를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캥거루 등치보고 도망가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자기 안에 들어있는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고 우리 주체는 따로 있고, 우리는 그 주체에 의해서 양산된 하나의 종, 또는 결실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저한테 물어보게 되면 그 나라가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죽고 건너가면 돼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는 그 영화 있잖아요? 뭐, 지 맘대로 강 건너지 마오..우리는 강을 건너가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망각의 강을 건너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기껏 인간의 현재 주체가 오해해서, 곡해해서 천국이 마냥 그런 곳이라고 교회마다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거는 사기고 거짓말이에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강에서 저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갈 때, 착착 문이 열려질 때 비로소 ‘닫혀있구나! 어? 열려있네! 에이, 인생 끝났어! 또 열리네?’ 한발자국, 한 발자국 갈 때마다, 뗄 때마다 착착 열리는 거예요. DDR(댄스게임)처럼. 하나하나 뗄 때마다 착착 열리게 되어 있어요.
2월 29일은 없는 거예요. 2월 28일 되고 내일 눈 떠봐야 알아요. 그러면 또 하루가 열리면 주께서 하루치 인생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걸로 끝나요. 3월 1일 열리면 또 살아있구나! 하는 겁니다. 세상에 어떤 죽을 사람이 내일 산다고 상상 안 한 사람이 어딨습니까? 상상 했지만 그날 밤에 죽으면 그 날은 그 사람에게는 없는 날이에요. 무슨 죽는 날에 순서가 있습니까?
<톰과 제리> 라는 그 만화영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 만화영화 보면 제리가 도망가면 톰이 쫓아가잖아요. 쫓아갈 때, 어디로 쫓아가느냐 하면 고층 건물, 50층, 100층 공사판으로 도망을 치니까 거기로 쫓아가잖아요. 우리 같으면 저거 떨어지는데...하는데 안 떨어져요. 공사판에 그 철조 구조물에서 발 뗄 때마다, 분명히 떨어졌다 싶으면 크레인이 딱하고 오고, 이번에 진짜로 떨어졌다 싶으면 또 딱 크레인이 오듯이. 그냥 가면 교회도 올 필요 없이 그냥 살면 되는데, 천국 가려면 우리가 열 수 없는 곳으로 착착 징검다리를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제공해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의 염려는 오늘로 마감하라 이 말이죠. 모든 장부를 마감하세요. 내일까지 염려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만 달라하고 내일 양식도 달라하지 마세요. 내일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데. 그저 내일까지 가면 감사하고. 보험도 여러 개 들고 하는데 그거는 바로 우리의 주체가 내 인생은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최악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현재의 주체가 그렇게 걱정들을 하는 거예요. 할 수 없죠. 뭐 걱정들 하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근데 그 주체는 보험 들어서 기쁨보다도 보험 안 들었는데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쁨이 보험 들은 사이사이로 이게 삐져나오는 겁니다. 그럴 때 ‘아, 나는 농구공이구나. 나를 책임지는 분이 따로 있구나.’ 라는 것을 고 순간순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한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 이거는 주님께서 주님만 아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우리에게도, 우리의 주체를 째서, 찢어서 그 틈새 사이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요단은 장벽이라고 보시고, 요단을 건너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이 마중 나오는 거예요. 요단이 마주쳐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남녀가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여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우리 집은 딸 부잣집이다.” 근데 듣는 남자가 얼마나 부잣집 여자를 만나고 싶었으면 뭐로 착각을 했느냐 하면 부잣집 딸로 착각을 한 거예요. 여러분 글자는 비슷하고 조립하면 똑같이 됩니다 만은, 전혀 다릅니다. “딸 부잣집”하고 “부잣집 딸”하고 전혀 달라요. 내가 가는 천국은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아예 천국 자체가 없어요. 우리에게는 천국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사람, 이거는 주님 쪽에서 준비한 것이지 내가 준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가기 싫어요. 이 땅에서 잘 먹고 부자 되고 싶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고 가고자 하는 것은 천국은 주님 자기 소관이에요. 내 주체의 틈새를 주께서 말씀으로 요단강이 있다, 홍해가 있음을, 천국이 있음을, 의도하지 않는 그런 사이사이를 심어 줄 때, ‘아, 주님이 나의 진정한 주인이구나.’ 주님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내 인생의 짐은 가벼워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 가겠다고 온갖 교회봉사, 희생해봤자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돈 바치고 몸 바친다고 넣어가는 천국이 아니라 예상 밖으로 찾아오는 천국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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