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신 11장 29-32절(에발산과 그리심산)1602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29-32절입니다. 구약성경 280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편 곧 해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 하냐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얻으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할지라 내가 오늘날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것은 항상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를 주께서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원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은 것을 자꾸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기도해봤자 소용없는 이유가 그 기도내용이 하나님과 생각한 그 내용과 백이면 백, 다 다르게 마련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는데 인간은 익히 아는 곳을 자꾸 고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케 하시면서, 그 기도 내용을 가지고, 그 기도 내용에 부합되지 않는 쪽으로 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주도권을 죽기 전에, 이미 주도권을 주께서 성도 위에 작용하고자 하는 겁니다. 성도하고 협의하고 가는 길 같으면 성도가 주도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셈이지만, 성도가 하는 족족 뜻대로 안 된다면 주도권이 죽기 전에 이미 바뀌어져야 되죠. “까라면 까겠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이게 돼야 돼요.
“내 식대로 하나님 이루어주옵소서.” 이런 것은 지옥을 갈라고 아주 환장을 한 겁니다. 기도 응답은 마귀들이 들어줘요. 내 기도 응답은. 주님은 우리의 기도 응답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기도해서 뭔가 미흡하니까 그 다음에 열광적인 찬양에다가, 기타치고, 드럼치고, 서로 손잡고 울고,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자기 동정이고 자기 연민이고. 그리고 회개 눈물 흘리고. 정말 저는 외치고 싶어요. “눈물을 거두어라! 뭐 잘났다고 우느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이 있다는 거예요. 애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이 지울 수 없는 체험과 체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인생이에요. 여기서 형성된 것이 수평적 주체라는 겁니다. 수평적 주체라는 것은 자기가 과거에 했던 체험을 근거로 해서 현재의 자기 자아상을 다듬게 되고, 형성하게 되고, 그 형성된 자아의 미흡함을 보정해서, 그걸 개선해서 미래의 자아상의 이미지로서, 그걸 미리 쥐려고 하는 그러한 심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을 뭉쳐서 거기서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골라 잡아 탁탁 쳐서 마치 시장에서 시금치 다듬듯이 고걸로 이쁜 자기 만들어서 요걸 고대로 유지하면서 거기다가 간 치고 토핑하고 이쁘게 꾸면서 그걸 미래에 자기가 흠모할 만한 자기 자아의 미래상을 보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겁니다. 그게 수평적 주체라면, 주님께서는 그 수평적 주체를, 다른 인간들이 체험한 것이 전부 다 거기에 집약되어 있거든요. 그 체험 말고 낯선 체험을 주께서는 제공해버립니다.
그 낯선 체험이 들어오면서 생겨버린 주체가 수직적 주체라는 겁니다. 수평적 주체 위에 수직적 주체. 평평한 종이 위에, 위에서 내리 꽂아서 찢어버리는. 과거의 체험이 단절되어 버리고 끊어짐. 다리가 끊어지듯이 뭔가 흐름이 끊어지는 거예요. 사실은 매일같이 끊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매일같이. 매일같이 끊어지고 주께서 집어넣고, 매일같이 끊어지고 또 주께서 집어넣고 하는 그것을 나의 일상적 체험으로 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께서 이끌어주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겸손해요. 참 겸손하고 소박하고 그게 대단치 않아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거기다가 인간의 욕심으로, 자기 욕망의 체험을 갖다 덮쳐버리니까, 기껏 돌아서서, 은혜 준 것 뭐가 있습니까? 뭐 해줬다고? 맨날 하나님한테 뭐 해준 것이 없대요. 숨을 쉬면서도, 뭐 해줬다는 말입니까? 병원에 갈 정도로 숨을 못 쉬어봐야 그동안 주께서 살려줬다는 것을 그제야 알죠. 그제야 알아도 그건 잠시뿐이고, 병원 갔다가 오면 다시 ‘아이고 돈이 아까워라. 아팠으면 돈이 안 들어갈 건데.’ 하고 또 돈 걱정하죠.
오늘 본문은 신명기 이야기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신명기 이야기는 특수한 집단, 특수한 민족,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는 말씀이에요. 제가 특수한 집단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걸 우리 힘으로 보편화시킬 수는 없어요. 우리 아주 특별한 나라입니다. 없는데서 생겨난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특별한 나라는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냐하면, 하나님의 수직적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집어넣은, 하나님이 앞으로 체험시켜야 할 그 체험과 위에서, 하늘에서 주어지는 체험과 그리고 인간들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수평적 주체, 자기 죄에 대해 타고난 DNA를 갖고 있는, 그 수평적 주체가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으로써, 움직이는 지점으로써 만들어진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다른 민족은 무슨 죄를 지었던 뭐를 했던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냥 니 맘대로 살아라.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럴 수 없어요.
이스라엘은 그 안에 하나님의 수직적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어떤 낯선 체험들을 허락합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짜증도 내면서, “하나님은 그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이럴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가 아직도 멀었다. 니가 그것 가지고 죽겠다고 난리냐? 그거는 약과다. 아직도 멀었다. 더 두고 봐라.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더는 못삽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진작 그래야지. 그래,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니 맘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야. 계속 갈 거야.” 이게 지금 기도하고 있는 건지, 앙탈부리고 있는 건지, 싸우고 있는 건지, 지금 분간이 안돼요.
그들이 보여 준 신앙생활은 그겁니다. 이거는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요. 곱게 종교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수도원에서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싸워요. 내 청춘 돌려달라고. 내 청춘 돌리 도! 내 인생 돌려달라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누구보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싸우고 있어요.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야곱이 마치 하나님의 사자와 붙들고 싸우듯이. 인간적인 상대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상대할 수 없는 분이 시비 걸었어요.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우리는 그냥 곱게 살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너무 가까이 가는 것도 싫어요. 저만치 약간 떨어져 가지고 우리가 몇 번 드리는 제사나 받으시고, 돈이나 몇 푼 받으시고, 우리에게나 복이나 주고. 우리는 그러기를 원해요. 주님은 너무 나한테 터치하지 않고. 다만 아쉬울 때마다, 새벽제단 쌓으면 그때나 우리한테 들어가지고 우리를 후원해주고. 고정도. 고정도 선에서 우리는 신앙생활 하고 싶은데, 가까이 왔어도 너무 가까이 왔어요. 우리 앞에까지 온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까지 휘젓고 다니십니다. 내부까지.
바르게 살라고 한 것을 바르게 못 살게 의도적으로 만들었어요. 착한 성질로 살라고 한 것을 성질 더럽게 만들었어요. 주님이 성질 더럽게 만들어놨습니다. 가만두질 않습니다. 우리 내부에 들어와서 우리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어요. 엉망진창으로. 뭐 미래에 대한 설계? 백날 설계해도 소용없어요. 보험 다섯 개 들어놔도 소용없어요. 보험회사 망할 거예요. 한 푼도 못 받을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재탕입니다. 낯선 체험의 침투, 침범.
기어이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숨겨놓은,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알지 못하는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한 강력한 이끄심입니다. 뭐 맴매하고 때리고 난리 났어요. 내 자식이기 때문에 가만두지 않고, 몸부림을 아무리 치든 간에, 니가 좋아하는 것과 니가 원해야 할 것을 분간 못해. 니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닌 거예요. 정작 니가 원하는 것을 모른 거예요.
왜 그러느냐, 그거는 안과 밖 때문에. 안과 밖. 인간은, 인간의 보이는 세계는 그저 이것이 자기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게 자기 세계의 전부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 밖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서 추방되었던, 추방된, 배제된, 하늘로부터 끊어진, 그걸 죽음이라고 하거든요. 죽음의 세계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계에 맞닥뜨린 거예요. 저와 여러분,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질문을 하게 되면 질문한 사람은 상당히 심각하지만 그걸 보는 우리 교인들은, ‘옛날에 내가 15년 전에 했던 질문이 또 나오네. 과거 질문 좀 살피지.’ 근데 그 분은 심각한 문제죠. “죽기 전에 천국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질문 내용이 그거에요. 답변했죠. “이미 다 죽은 자입니다. 숨 쉰다고 산 것이 아닙니다. 숨 쉬나, 숨을 거두나 하나님께 관계 끊어지면 다 죽은 자입니다.” 내가 이미 숨 쉬어도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진정한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그 중심을 발견한 자만이 발견되는 안목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중심을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중심을 만들면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 되죠. 그게 아니에요. 나는 중심에서 바깥에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 밖, 언약 밖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 약속의 바깥에 있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개입니다. 개 같은 이방인들. 개니까 사람취급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데 뭘 보고 사람이라고 해요. 그거는 사람 아니에요.
몸부림쳐봐야,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여전히 추락하는 중이고 망하는 중이에요. 이건희 회장, 지금 망하고 있습니다. 이재용, 덩달아서 망하고 있고. 세현그룹 재벌 아들도 지금 망하고 있고. 리멤버에서 다들 망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 치고 안 망하는 인간이 없어요. 다 망해요. 금사월인지 은사월인지 다 망하고. 제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추락중이에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어요. 날개 퍼득거려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추락중이에요.
개 같은 이방인한테는 안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 바깥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서 난 사생아이기 때문에 안을 찾을 수 없고. 오직 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이게 허용이 돼요. 그러면 그 안이 어딥니까? 그 안은, 그 안을 중심으로 해서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은 어딨습니까?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은? 가나안 땅에 가봐야 그냥 보통 땅이에요. 가나안 제과점 가봐야 빵집에 가면 빵만 있듯이. 가나안 땅에 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켜서 가나안 땅에 의미를 부여해야 그게 안이 되는 겁니다. 혼자 덜렁덜렁 가봐야 그거는 소풍가듯이 놀러가는 것처럼 그거는 의미 없어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겁니다. 동행해서, 주님께서 그 땅에 똑같은 인간이 가봐야, 가봤자 이방인들은 이 땅이 우리가 사는 땅인데, 이래되죠. 그러나 약속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동행함으로써 벌어지는 사건과 더불어 들어가게 되면 그 땅은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사건과 사건들이 연결된, 사건의 망으로써의 땅, 약속의 땅입니다. 그 의미가 보여 지는 거예요.
지금 그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그들은 생존의 땅이지 생명의 땅이 아닙니다. 교회 들락날락해도 그거 의미 없어요. 그건 자기 교회 노래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집에 있든, 직장에 있든, 교회 오든, 해외에 놀러 가든, 이미 죽음의 땅이에요. 비-약속의 땅. 오히려 약속을 대적하고 약속을 공격하는, 약속 없는 땅을 그냥 부지런히 배낭여행하면서 돌아다니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평적 주체뿐이기 때문에.
과거 어느 드라마에서 봤는데 독일 땅이 좋더라. 거기에 가보자. 가보세요. 가봐 가지고 시리아 난민한테 걸려서 성추행이나 당하지. 가봐야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거기에 자기 본토 거주민들 다 있어요. 어디가나 사람들 사는 곳이 다 마찬가지고. 남극도 마찬가지고. 남극도 쓰레기장이라고 하는데. 어디가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다 속에 가봐야 물고기가 여기 내 땅이라고 합니다. 하는 가봐야 새들이 여기 내 땅인데 니가 어딜! 합니다. 어딜 가도 거기 주인들이 다 있어요. 약속의 땅! 없습니다. 지점, 지점 땅이에요. 자기 부동산들뿐이에요.
약속의 땅은 동행자가 있어야 돼요. 의미 있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갈 때, 그곳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든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곳이 바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라는,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니가 가나안 땅에 가거라. 하여튼 니가 어떤 특정 지점에 도착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하겠다는 거예요. 그 땅이 살기 좋아서가 아닙니다. 절대로 약속의 땅은 생존, 자기 생존에 필요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에 의해서 구성되는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그 사건을 구성하는데 두 개를 통해서 한 개를 보여주는 식으로. 2가 1이 되는 식으로 보여줍니다. 그 산이 두 개의 산이 있어요. 하나는 에발 산, 890미터. 그 다음에 그리심 산, 881미터. 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예루살렘에서 약 60킬로 위쪽에 있어요. 이스라엘 땅은 마치 그 랍스타처럼 불룩 튀어나왔어요. 그 불룩 튀어나온 정상들이 날씨가 시원하기 때문에 그 쪽에 사람들이 거주를 해요. 불룩 튀어나왔으니까, 이거는 산위니까, 산정-산꼭대기. 산 위에 길이 있어요. 길 따라서 주요지점이 나옵니다.
베들레헴, 예루살렘, 벧엘, 전부 다 고 위에 쫙 올라가 있어요. 산위에서 내려가면 이스라엘 계곡이 나와요. 제가 꼭 가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안 가 봐도 뭐. 이쪽에 올라가면 두 개의 산이 나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고원처럼, 거기에 두 개의 산이 나오는데, 산 위에 도착할 때, 니가 동행하는 하나님의 본질이 그 산에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등산가로 만들어놨어요. 그냥 막 산 위로 기어 올라가요. 올라가는데 산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그리심 산에서 축복 산이에요. 또 에발산은 뭐냐 하면 저주 산입니다. 그 저주 산과 축복 산에 이스라엘을 두 패로 나누어요. 어느 교회 가면 성가대가, 보통 성가대는 다 하나로 하잖아요. 근데 어떤 성가대는 뭐 음향 효과를 위해서 둘로 나눠서 이쪽은 알토, 소프라노, 이쪽은 바리톤, 테너, 이런 식으로 마주 보면서 찬양하는 그런 구조로 이렇게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안 가봤지만 아마 있을 거예요. 마주 보면서 찬양하는 것. 그럼 마주 보면서 있으면 중간에는 뭐가 있는가, 중간에는 당회장 목사가 설교하겠죠. 고 마주보면 중간에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언약 상자, 언약궤를 중간에 놓습니다. 중간에 놓지만, 사실은 어느 자락에 있느냐 하면 이게 축복 산이 아니고 저주 산자락에 거기다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놓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설비, 집기, 장치들이 필요한데요. 축복과 저주를 나누고, 둘로 마주보게 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피 묻은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두고, 서로 마주보면서 양쪽에 있는 상대를 향해서 뭔가 날립니다. 뭘 날리느냐 하면, 이쪽은 어떤 축복된 대목을 날려요. 구약의 축복된 구절이 365가지고, 저주의 구절이 243가지고, 합쳐서 608가지라고 하는데, 하여튼 축복과 저주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축복의 멘트를 날리고, 북한의 미사일 날리는 것처럼 축복된 멘트를 날리면 축복은 누가 받느냐 하면 날리기는 이쪽에서 날리는데 받기는 상대방이 받죠.
축복 산에서 축복을 날리면 받는 쪽은 저주 산에 있는 쪽이 축복을 받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저주 받을 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고 자기가 복 받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게 바로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는 낯선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이에요. 그런 중심으로 들어섬으로 말미암아 거기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존의 아담의 죄로부터 물려받은 자기의 수평적 주체가 완전히 깨지면서 수직적 주체로서 여기 내용이 바뀌어져야 해요. 내용이 반대로 바뀌어져야 돼요. 요새 말하면 십자가에서 거꾸로 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야 돼요. 저주받아 마땅한 마음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저주받아.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백지영의 노래입니다. 그 강도가 바로 나예요. 이게 바뀌어져야 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뭐냐 하면, “나는 평생 동안 내가 원하는 식으로 살아왔었습니다. 근데 그게 주께서 원하는 식을 택도 없이 우리는 거부했었습니다.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조치를 취해 가지고 내 뜻대로 안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하신 그 결과가 바로 나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조치가 취해졌던 원천이, 그 원천적인 체험이 나의 죄악 된 체험을 이겼습니다.” 하고 그 체험이 샘솟는, 솟구쳐 나오는 그 지점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던집니다. 거기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은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완벽이 아닙니다. 아까 권사님이 기도한대로 이웃사랑은 절대 우리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물론 3년 만에 기도했지만. 기도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강제조치가 되어야 해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내 기도의 주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인생이 내 뜻대로 만들어진 인생이 아니라는 그것.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니 킹크랩 알맹이를 다 빼버릴 테니. 우리를 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우리 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것으로, 주님이 이루신 믿음, 소망, 사랑으로 우리를 완전히 꽉꽉 채워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고추씨 빼고 반으로 갈라서 고기 다진 것, 당면을 꽉 채워서 튀긴 것 있잖아요? 그게 갑자기 먹고 싶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리 주체, 내 뜻대로 하는 것을 맨날 확 빼버리고, 모습은 똑같아요. 모습은 뭐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내면은 내가 나를 끌고 가는 식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동방박사입니다. 세상에! 별 따라 간 인간, 별이 참 자기장이 쎘나 봐요. 지남철이 센 모양이라. 막 잡아 땡기니까. 별 따라 온 사람들이에요. 별 따라 가보니, 그냥 땡기는 것이 아니고 가보니까 별이 땡기는 것이 아니고 아기 예수가 땡기는 거예요.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을 자기 있는 곳으로 땡긴 겁니다. 내 다리 내놔라~ 전설의 고향처럼. 이리 오너라~ 하는 것처럼 아기 예수가 땡기는 거예요.
바로 나는, 나의 주체는 예수님의 주체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그런 존재군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에서 생성된 하나님의 백성, 성도입니다. 두 패로 나누어서 하나는 저주이야기 하고, 하나는 축복 멘트를 날리는 그 이벤트. 그 이벤트 속에서 우리는 정신 차려야 돼요. 복은 어디서 받는가, 산 밑에 내려와서 저주의 지대에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통과해서, 아! 저주받을 자와 함께 있는 그 피 묻은 어린양. 그쪽이 축복 쪽입니다.
사람에게 저주받은 예수님이 축복 나라를, 천국 나라를 만드실 바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고 모퉁이 돌이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올 설에도 일가친척 만나서 이야기해보세요. 전부 다 지 자식들 잘 키웠다고 지 자랑질 하는 것을 한번 보세요. 그 가운데 이렇게 하세요. “나의 자랑할 것은 죄 지은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아버지! 와 카십니까? 갑자기 미쳤습니까? 이런 분이 아니신데?” “아니야. 나는 내가 중심인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어. 나는 질질 끌려가는, 내 다리 내놔라 하면서 귀신한테 끌어 땡겨 가고 있는 그런 입장이다.”
내 인생, 내 원대로, 내 뜻대로 안 되는 인생, 성령의 뜻대로 될 그 인생,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하고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남들이 모르는 대화를 시작했듯이, 올 해도 남이 알지 못하는 대화를 우리 속에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이 알지 못하는 체험이 우리 속에서 작동을 할 때 우리는 이미 구원된 자임을 더불어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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