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신 12장 1-3절(우상을 멸하라)1602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2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 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하나님이 주신 이 공간, 이 땅이라 하는 것은, 이 땅은 인간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땅이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가 사는 땅을 고향이라고 여깁니다. 보통 묻지요. “당신 고향이 어딥니까?” 뭐 한국사람 같으면 전라도입니까? 경상도입니까? 아니면 강원도입니까? 이렇게 묻는데, 전라도라고 하면 경상도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고 경상도라고 하면 전라도 사람들이 별로 또 안 좋아해요.
제가 옛날에 대학 졸업하고 부산에 삼화신발, 그때 큰 회사에 면접을 하러 갔는데, 그때는 제가 상당히 정의와 함께 살았거든요. 속일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너 어디 사람이야?” 라고 물었습니다. 삼화 공장이 부산공장이었거든요. “저, 출생은 전라도 광주 출생인데, 성장 과정, 본적은 달성군입니다.” 이랬더니만 똑 떨어져버렸어요. 그 시대는 응답하라 77시대였거든요. 그래서 그 시대는 경상도, 전라도가 굉장했던 겁니다.
이미 땅 자체, 공간이라는 것은 그걸 접수하고 점령하고 있는 본인들의 것이에요. 근데 오늘 본문의 땅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신명기 12장을 보면서 땅이라고 하지만 그 땅은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땅,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에 있는 땅만 그런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땅도 기이한 현상들이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오늘 본문 우상과 관련해서 연관된 그런 사건이 하나 있어요. 그게 누가복음 5장 8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뽑을 때에 그때 베드로가 뭐하고 있었느냐 하면 자기 직업이 있었습니다. 고기 잡는 것이 자기 직업이었어요. 고기를 잡고 있는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뭐냐 하면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거예요. 자기가 고기 잡는 전문가인데, 분명이 이 장소에 그물을 던지면 많이 잡든, 적게 잡든 고기는 잡히게 마련인데, 한 마리도 고기가 잡히지 않는 거예요. 분명히 누가 고기를 다 훑어냈어요. 이거 기이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면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이렇게 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만 한 마리도 안 잡히던 고기가 그물에 가득 잡혔는데 어느 정도로 잡혔느냐면, 배가 기울어서 빠질 정도로 많이 잡혔어요. 고기가 적게 잡힌 것도 이상하지만 많이 잡힌 것도 이상한 거예요. 기이한 현상입니다. 어부로서 고기 많이 잡혔으면 성공 할만도 한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대번에 이렇게 합니다.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말을 했어요. “내가 죄인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한테 주님께서 고기를 많이 잡아줬으면 뭐, “고맙습니다. 동업합시다.” 이렇게 나오면 정상인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한 거예요. 고기의 숫자를 계산한 것이 아니에요. 물고기는 다 제쳐두고, “주님 당신 앞에서 나는 죄인으로 발각 당했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뭐가 기이 하냐, 고기 잡히고 안 잡힌 것만 기이한 것이 아니에요. 그 누구 앞에서도 내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하지를 않습니다. “뭐 니만 젠틀맨이냐? 나도 젠틀맨이다. 니만 잘났나? 나도 잘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죠. 왜? 인간은 살아가면서 청소년부터 자아도취에 빠진 거예요.
자아도취라 하는 것은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계속해서 상상하는 겁니다. 어떻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본인이 본인에게 사기꾼입니다. 처음부터 부모들이 자식들을 사기꾼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니 어디 나가도 멋있게 보여라.” 이거는 사기 치는 거예요. 공부 못해도 공부 잘한 것처럼 보이고. 노래 못해도 노래 잘한 것처럼 보이고. 친구 없더라도 친구 많은 것처럼 보이고. 싸움 못해도 싸움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전부 다 이 사기를 배우고 사기를 익히는 그런 세상에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부 사기꾼입니다.
그러면 사기꾼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느냐? 사기꾼이 안 되면 자살해요. 이게 딜레마입니다. 이게 이상한 일이에요. 사람은 사기 치지 않으면 못 살게 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허풍스럽게 과도하게 포장하지 아니하면 숨을 못 쉬는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오늘 아침에 양 집사님이 오셔서 우리 동네 이 삼거리가 TV에 나왔다는 거예요. 뭐 우리교회 관련해서 TV에 나온 줄 알았더니만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을 이야기해요. 요 앞에서 젊은 대학생이 자살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뉴스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터가 안 좋은가? 왜 자살했을까?
자기를 속일만한 건수가 다 떨어진 거예요. 자기를 멋있게 보여 줄 수 있는 건수가 자기한테 다 없어진 거예요. 자기를 위장해야 되는데. 이제는 뭐든 동원해서 자기를 꾸미고 위장하고 잘난 체 해야 하는데 그 건수가, 자료가 다 떨어진 거예요. 돈이 떨어졌다든지, 친구가 떨어졌다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부모가 떠나버렸다든지, 멋있게 보일 수 있는 재료들이 다 떨어져나가니까 남은 것은 자기밖에 없거든요. 이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자기 껴안고, ‘그래, 나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겠어.’ 하고 죽는 겁니다.
사기 치는 것도 사기 칠만한 건수가 있어야 되는데 건수가 없으니까 미쳐버린 겁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야 되고, 만나면 거짓말, 전부 다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니라 만나면 거짓말해야 돼요. 모든 광고들이 다 거짓말입니다. 뭐 무슨 면에 짬뽕 국물이 들어 있어가지고 갓짬뽕이라고. 진짬뽕, 불짬뽕. 맛짬뽕. 제가 짬뽕 나온 것 다 먹어봤는데 진 짬뽕이 제일 맛있어요. 그런데 거기 나온 모습들을 보세요. 모습도 전부 다 멋있게 사진 찍은 이미지하고 실제하고 다 다르거든요.
꾸미고, 가장하고, 가짜인 내가 있기에 나는 살아갈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계속해서 가짜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상. 거짓 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짓 신들의 모임에서, 사람은 그 누구 앞에서도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습니다. 그건 지는 게 되는 거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돈을 갚아 줄 수는 있어요. 대리 운전하다가 싸워서 경찰서에 가가지고 오백만원 주고 합의 보는 경우는 있어요. 오백만원 주고. 금사월에 나옵니다. 합의 보는 경우는 있지만 절대로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경우는 없어요. 오백만원 주고 때우는 것이 낫지. 나는 누구 앞에 죄인이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다음부터 죄인에게 주어진 모든 징벌은 마땅히 감수해야 된다는 그러한 패배의식이 발생되기 때문에, 이거는 본인이 용서하지 않아요. 왜 용서하지 않는가,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쪽으로 평생을 살아왔거든요. 어릴 때부터 오냐, 오냐, 오냐, 최고 상전이에요. “내 젖 먹는다. 조용히 해!” 요새 많이 느껴요. 자기 젖 먹을 때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끄러우면 으앙~하고 울어요. 조용하면 젖 물고. 이거는 뭐 새벽 한 시든, 두시든 깨서 젖 달라고 울고. 엎어지면 또 일으켜 달라고 또 울고. 유세가 뭐 그런 유세도 없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세상 모든 게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우리는 양육 받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냐, 오냐 해 준 것. 이게 어디 갑니까? 중학교 돼도 마찬가지고 고등학교 돼도 마찬가지고. 지가 최고인 줄 알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자아도취라고 하는 겁니다. 맨날 요술 거울 찾아가지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나가느냐?” 물어봐요. 지가 잘나간다고 듣고 싶어서 그래요. 본인이 사기꾼이에요. 그 누구 앞에 죄인이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죄인이라는 소리를 어떻게 하게 하느냐, 물고기를 많이 안겨 주면서, “아나, 먹어라! 물고기 실컷 먹고, 물고기 팔아서 니가 나중에 수협 협회장 되라!” 그렇게 물고기를 실컷 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성공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한다는 사실. 뭐, 고난 받고 실패해서 돌아온다는 이것은 수상해요. 이건 어떤 의미에서 돌아오게 되면 보상받을까 싶어서 손해 받은 것 이상의 추가적인 보상을 기대하고 여전히 자기만 생각할 텐데. 그게 아니라 “고기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군요. 고기만 찾는 내가, 고기만 잡는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전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들이 오는데, 그 친구들이 병 고치려고 와요. 병 고치려고 왔는데 주님께서는 중풍 병을 고친 것이 아니고 “니 죄가 사해졌느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니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니 눈에는 내가 의사로 보이느냐? 병이나 고쳐주는 돌팔이로 보이느냐?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병이나 고쳐주고 너희들 소원을 들어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차마 못하는 것, 내가 나서야 아마 알 거야. 니가 죄인인 것을. 그 죄를 내가 용서하마.” 주님께서는 죄 용서하려고 오셨던 겁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인간이 자아도취에 빠지고, 본인이 사기꾼 되고, 거짓말하고, 자꾸 허풍을 떨고, 멋있는 척해야, 그래야 살맛이 나는 그러한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본인이 본인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설교 핵심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파악됩니까? 신명기 12장에 가야 파악됩니다.
신명기 12장에 보면 땅이 있어요. 그 땅이 뭐냐,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이 땅은 나의 생존을 위해서 내 땅이라고 우기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있는 반면에, “그 땅 내놔라! 그 땅은 니 땅도 아니고 네 땅도 아니고 우리 주님의 땅이야!” 라고 이 땅을 하나님 땅이라고 외치면서 쳐들어가는 낯선 이스라엘 민족이 여기에 합치됩니다. 여기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은 오늘날 우리 자신의 전쟁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60개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몸이 있는데, 이게 내 거냐? 나의 명예를 위해서, 나의 영광을 위한 몸이냐? 아니면 주님의 뜻을 위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있는 몸이냐? 이 전쟁이 우리의 몸을 가지고 싸우는 겁니다. 위선 그만 떨고 거짓 노릇 그만 하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결국 뭡니까? 제가 오늘 설교가 어렵기 때문에 결론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후회를 절단시킵니다. 후회가 아예 안 나오는 인생을 만들어버려요. 이 말은 뭐냐, 후회가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미련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아휴! 내가 그런 짓을 안 하는 건데...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는 거예요. 아직도 이게 뭐냐 하면 위선자고 본인이 본인한테 사기꾼 노릇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때 그런 실수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내가 이런 인생을 안 살 건데..’ 아직도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에 후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후회 자체를 성립이 안 되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요. “니 것도 아닌데 니가 건방지게 후회를 왜 하느냐? 니 것도 아닌데 니가 왜 후회하느냐?” 이 말이에요. 학교에서 시험 치는데, 열 문제 나왔는데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냥 가나다라 중에서 아무 거나 찍어서 냈더니만 전교 1등 했어요. 보니까 이름 자체가 바뀐 겁니다. 이 시험 문제 책임자와 시험 문제 작성한 학생은 따로 있다. 이름 자체가 바뀌니까 그 이름 보고 100점이 된 겁니다.
행함 보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걸쳐있는, 우리의 답안지 맨 위에 있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그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겁니다. 따라서 후회하지 말라는 거예요. 니 인생 같으면 내가 후회하라고 독촉을 하겠는데, 니 인생도 아닌데 니가 왜 건방지게 후회를 하느냐 이 말이죠. 후회를 절단시킵니다. 그럼 후회를 절단시키려면 처음부터 나라는 인생 속에 원래 주님께서 원래 내 것이라는 주님의 힘이 가미가 되잖아요. 이걸 가지고 저는 “태고적 힘”이라고 합니다. 태고적 힘이라는 그것이 이미 열 두 제자에게 주어졌습니다. 태고적 힘이. 태고적, 창세 이전에. 우리 속에는 태고적 힘이 다 있어요.
제가 주일학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인데, 성령이 바람같이 분다하니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자칭 성경박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성령이 뭡니까?” “바람같이 분다.” “바람이 어디 부는데요? 그 바람 어디가면 붑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죽고 하늘로 올라가면 성령의 바람이 분다. 니가 생각하는 니 장소가 아니고, 니가 어느 장소에 있든 간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장소를 주게 되면, 예수 안, 십자가 안에서 주게 되면 그곳에만 성령의 바람이 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육은 육이요. 영으로 난 사람만 하늘나라에 가게 되어 있다.” 지금 요한복음 3장에서 그걸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한테는 그걸 미리 앞당겨서 보여줘요. 그 태고적 힘이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그걸 제가 안양 공부에서 “선미래” 라고 했어요. pre future-선미래, 미래보다 앞선 것. 현재라 하지 마세요. 선미래, 미래 되기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와 있는 것. 미래가 내뱉는 혓바닥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 이래 보면 되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1절,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권능을 주셨다는 거예요. 권능.
이 권능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이 말이죠. 이 권능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의 힘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하는 겁니다. 국정교과서 사회책 26페이지에 들어있습니까? 아니죠. 어디서 나온 거예요? 어느 교과서에? 어느 조직 신학에? 기독교가 가짜라는 것이, 사기라는 것이 어느 교과서에 나오죠? 어느 신학교 교과서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신학은 쓰레기에요. 오랜만에 힘줍니다. 늘 힘 줬지만... 신학은 쓰레기에요.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학을 해야 해요. 왜? 우리도 쓰레기니까. 쓰레기가 쓰레기 공부를 해야 돼요. 그래서 본인이 쓰레기인 줄 알아야 돼요. 신학 많이 하고 “주여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신학 한 사람치고 자기 신학을 부정하는 사람을 아직도 제가 못 봤어요. 미치겠어요. “목사님. 저 신학 했거든요. 독일에서 신학 했지만 저는 쓰레기입니다.” 독일에서 신학박사가 애를 쥐어 패서 허벅지가 말처럼 부풀어 오르게 쥐어 패놓고, 그게 신학박사거든요. 신학은 우리를 쓰레기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지 더도 덜도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이 안돼요.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부는 성령의 바람만이 구원의 능력이지, 주님 앞에 설 때에만 우리가 죄인 되지, 스스로 반성한다고 죄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반성은 만날 후회에요. 후회.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해야지.’ 지금 니 몸이 누구 건데 니가 그렇게 건방지냐 이 말이죠. 다시 묻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열 두 제자가 누구 힘으로 귀신 쫓아냈습니까? 병 고쳤습니까? 본인들 힘입니까? 그들은 아니라고 해요.
그러면 아닌데, 왜, 어디서, 무슨 힘으로 귀신이 나갔습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예수님, 예수님, 귀신들이 우리말을 듣고 하늘에서 막 떨어집디다.” 좋다고 와서 이야기하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니가 태고적 원천을 잊고 있다. 귀신 떨어지는 것은 결과다. 중요한 것은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해라. 니 솜씨 부려서 자랑하는 것은 자랑질 하는 것밖엔 안 되니까 니 원천을 봐라. 원천은 어린양 생명책이 기록된 것이다. 그걸 기뻐해라.”
마태복음 10장에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이걸 읽어드리면서도 끔찍해요. 정말 이게 진짜입니까? 말할 정도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열 두 제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도망갔던 배신자요, 비겁자에요. 못난 자들이에요. 지 자랑밖에 할 줄 몰라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엄청난 선미래, 미래보다 앞서서, 미래에 되어질 그들이 구원을 미리 앞서서 그들에게 예수님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는 이걸 통해서 제자들이 하는 말이 다 성령의 말이라고 이해하시면 안 되고, 십자가와 관련되어서 본인이 죄인인 것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제가 그렇게 장담하고 확정을 짓는 이유는 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증거 하는데 어떻게 증거 하느냐, 어떻게 증거 하느냐 이게 중요해요. 이걸 했다, 헌금했다, 기도했다, 이걸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한다고 성령의 은혜로 한 것이 아니에요. 죄인입니다가 됩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자기가 죄인이고, 죄인이라는 말은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십자가 증거 하는 용도의 몸으로 다루어지지 따로 내 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관련성. 성령님이 그걸 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님이 임한 증거는 뭐냐,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미국의 어떤 분이 저한테 짧은 질문을 주셨는데, 그 질문이 너무 귀하고 정말 좋은 질문을 하셨어요. 얼마나 좋은 질문인지 제가 여러 군데서 했어요. “목사님. 자유가 뭡니까?” 제가 짧게 답변했죠. “자유란 자기 선택과 결정과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 몸이 내 게 아니구나! 아는 것이 자유입니다. 후회함을 절단시키세요. 후회하지 마세요. 건방지게. 반성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거 되게 착해 보이는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느냐, 어릴 때부터 건방떨었고, 어릴 때부터 자가기 자아도취에 빠져서 자기 것을 감추는 거짓말을 하다보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미흡하거든요. 그 미흡한 것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나님의 이미지 상을 가지고 채웁니다. 그 미흡함을 은유라 하고 그 채우는 것을 환유라고 합니다. 언어는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은유와 환유. 그 은유를 다른 말로 하면 상징. 상징과 환유. 이 말은 보통 안 쓰는 말인데, 저도 별로 쓰고 싶지 않아요. 이게 언어학, 기호학 전문용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미흡하면 비스무리 한 것 가지고 때운다 이 말입니다. 비슷한 것 가지고 때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 없으면 실내 골프 치는 것으로 때우는 거예요. 그래놓고 마치 그런 급(레벨)이 되는 것처럼 으스대고 싶은 겁니다. 이게 본인이 본인에 대한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 없으면 사람은 숨을 못 쉬어요. 자기를 꾸밀 것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 생을 자기가 그만두려고 합니다. 꾸며도, 꾸며도 계속 미흡한 것이 나오니까 감당이 안 되어가지고. ‘더는 못 속이겠네.’ 하고 죽어버려요. 인간 자체가 이게 우상이고 마귀적이죠.
그래서 주께서는 선미래, 그 미래가 오기 전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가지고, 문제는 간단한 거야. 니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야. 그것뿐이야. 죄인이면서 아닌 척 하니까 니가 힘들어. 니 인생이 괴롭다니까. 그게 고단한 인생인데. 니가 왜 인생을 고단하게 살아.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하나에도 감사하세요. 머리카락 하나, 옷 하나, 뭐든지. 뭐든지 감사하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집안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싫어! 싫어! 하지 말고.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지 말고. 그거는 본인이 본인한테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남들한테 멋있게 보이고, 친구들한테 기죽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꾸미면서, 허우대가 멀쩡하게 보이려고,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이게 주님한테 걸리면 이게 죄인 됩니다. 미리 걸리면 다행이고. 십자가 피 흘림 앞에서 진즉에 우리가 저렇게 피 흘려서 버림받아야 될 우리가 무슨 허풍으로 살아갑니까? ‘진즉에 죽을 인간, 또 이렇게 살려주시는군요.’ 이렇게 감사하는 것. 그게 바로 약속의 땅, 우상을 척결하라는, 우상을 멸하라는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을 여러분 뒤집어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아무리 둘러봐도 알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이한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돌았다고도 하고, 미쳤다고도 하고, 이상하다고도 하고, 온갖 소리 듣지만 이 현상을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이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