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신 11장 22-25절(속이시는 하나님)1601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22-25절입니다. 구약성경 280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 밟는 모든 땅 사람들로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이 나타나신 자리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냥 나타나지 않고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근데 그 중보자가 우리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중보자가 아니고, 우리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고,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여도 거부감이 일어나는 그러한 중보자를 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평소에 하나님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을, 가짜이면서도 니가 진짜야! 진짜야! 하면서 내가 나를 속이는 어떤 원인적인 요인이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가요? 거짓말 못하면 정신병자라고. 거짓말 못하면 정신병자입니다. 세상에서 못 삽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속지 않는 자는 천국 못 갑니다. 속지 않는 자는....., 속지 않으면 지옥 가요.
왜냐하면 속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되는 것만 골라잡는데, 그 골라잡아서 다니게 되면 현재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 입장을 그대로 천국까지 밀어붙이려고 하는 억지를 부리는 셈이 돼요. 근데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고, 나는 지금 나의 공화국이고. 나만을 위한 세계에 있으니까. 이 도중에서 내가 나를 지금 속이고 있음을 내 바깥에서 그것을 지적해줄 요소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한테는 충격입니다. 말만해도 우리가 졸졸 따라 갈 건데, 왜 예수님이 스스로 자학하듯이 아버지로부터 스스로 매를 맞느냐 이 말이죠. 매를 맞는데, 그것은 니가 맞아야 할 매를 내가 대신 맞는다고 하니까 우리 쪽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착한데? 때릴 때가 어디 있다고? 왜 이렇게 뭔가 교정, 개정, 수정, 이것이 왜 필요한지가 우리로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에서는 이게 정립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을 선한 쪽으로,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가려고 하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이 착하디착한 나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해도 잘 들을 나를,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고 참혹한 중보자를 통해서 내가 너를 건진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들 정도가 되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속이지 않는 사람을 따라가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를 속이는 목회자를 만나야...그게 이미 구약 이스라엘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오늘 본문이야기 하면서, 오늘 본문에 핵심이 있어요. ‘유브라데’라는 것이 고 핵심이에요. ‘유브라데’ 이게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에덴동산에만 나오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겠는데, 이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브라데 중심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벌어지니까, 이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9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유브라데가 세상의 중심을 잡았고, 에덴동산도 유브라데 강에 있었고,그 에덴동산에서, 표면적인 에덴동산 말고 그 지하실에, 벙커에 세상의 운명, 인류의 운명, 지구의 운명의 정보가 저장되어 있었던 겁니다. 위만 건드리면 아래도 같이 딸려 와서 그 정보가 바깥으로 퍼져버리면 그게 요한계시록이 나온 세상 끝이에요. 이번 수련회 때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궁금한 것을 다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수련회 다 끝나고 나서 궁금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정답을 이야기했는데 그 정답이 오히려 더 봉인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정답은 맞는데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돼버려 그러한 처절한 결과가 나와 버렸죠.
매일같이 나의 소박한 역사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요한계시록은 그걸 일체 뒤돌아보지 않고 관심두지 않으니까, 혼자 나는 뭐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우리 인생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분투노력 하는,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유브라데는 따로 있는데, 우리는 유브라데와 관계없이 세상에 옴파로스 Omphalos, 배꼽, 세상의 중심에 관계없이 나를 중심으로 새로운 중심을 엮고자하니까 이게 나의 공화국이 되고 내가 스스로 나에게 갑질 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에게 주께서 오늘 신명기의 말씀을 하게 되면 “니가 약속에 땅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그 오해가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원망으로 바뀝니다. “이러기에요? 주님 이러기에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 더 아가서는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이 친근하다는 겁니다. 애굽이 좋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점점 더 낯선 곳으로 주께서 이끌어가니까 낯선 곳이 몸에 맞지가 않는 거예요.
어제 결혼식에 가서 양장로님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던지. 특히 그 재밌던 구절이 “뭐 하러 왔노~?” 하는 그 구절이 아주 맘에 들어요.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큰 귀신이 내리는 점을 치러 갔는데, 집사인데, 왜 이렇게 남편의 사업이 안 되는지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집사지만 갔답니다. 딱 들어가자마자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싹 돌아서면서 “뭐 하러 왔노~?” 하더랍니다.
왜 점을 치러갑니까? 내가 납득이 안 되는 그것에 내가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합치하고 일치시키려고 점 보러 간 거예요. 억지라도 좋으니까 내 소망, 내 뜻과 내가 가는 길이 일치된다고, 누가 됐던지, 점쟁이라도 제발 좀 나한테 그런 식으로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그걸 박수를 쳐주고 동의해달라는 겁니다. 근데 그 점쟁이가 고맙게도 “뭐 하러 왔노? 니는 니대로 살지~” 이런 식으로. 그렇게 했으면 그냥 나오면 되는데 또 억지로 “어떻게 해서 남편의 일이 안 됩니까?” “큰 신이 임했다.” 이야기가 이상한 이야기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차마 말을 못하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순종하라고, 복종하라고 해놓고는, 사실은 순종이 안 되는 자를 순종되게 하시는 작업이 계속해서 투입되어야 해요. 순종 안 되는 인간을, 순종 안 했는데 결과적으로 뒤돌아보면 순종한 것으로 주께서 작업을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실컷 죄졌는데 의인아 오라! 스토리가 이렇게 짜여 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주제였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못했는데 천사를 보내서 마치 우리가 모든 말씀을 순종하고 이긴 자로 만들어버리는 작업, 지금 그 현실이 이 현실이에요.
죄를 의로 바꾸는 그 투입의 중보자가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들락거리면서 계속 투입하는 겁니다. 죄는 우리가 죄졌는데 그 죄를 의로 바꾸는 그 작업. 그 작업을 할 때 우리가 그 작업에 동의하거나 거기에 대해서 고맙다고 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민수기 21장 9절에도 나옵니다만, 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 3장 14절에도 나옵니다. 그 대목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대목 정말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 십자가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자, 이 대목 설명하기 전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속의 땅에는 우주의 중심이 거기에 있어요. 유브라데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유브라데는 에덴동산부터 이미 중앙에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유브라데를 강으로만 봤지만, 그 유브라데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중심이 되어서 유브라데 강에서 기능들이 나오는데 그 기능으로 인하여 옛 하늘과 옛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뀝니다.
그 유브라데 강은 뭐하는 강이냐,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근데 이 전쟁터는 인간 대 인간이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자행되어야 될, 천사도 투입하고 인간도 투입하고 마귀도 들어오고 온갖 영적, 육적 모든 종류의 요소들이 거기 유브라데 강 중심에 퍼지게 되는 겁니다. 왜? 그곳에 인간이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이 살았기 때문에. 다른 인간으로 바꾸어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살게 하는 겁니다. 유브라데 강에서 예수님이 그 강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면 천국은 예수님 나라가 되고, 그 유브라데 강은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유브라데 강이 생명의 능력이 나오는 강이라면,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그 생명의 강이 그대로 흐르고 있죠. 에덴동산을 원형으로 삼아서 그것의 완성이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와중에서 인간은 그 좋은데 그냥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인간은 속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본인한테 문제가 있는데 본인은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매일같이 자기를 속이고 있어요. ‘나는 문제없어. 나는 문제없어. 나는 정상적이야. 정상적이야.’ 그러니까 이 정상적이라는 이 착각을, 이 오해를 뭔가 중보자께서 어떤 요소를 들이대서 이걸 바꿀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바꿉니다. “니가 이걸 아니? 이걸 알아?”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모세가 놋뱀을 든 겁니다. 모세가 놋뱀을 든 게 민수기 21장에 보면 그들이 광야에 가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힘들기 때문에 그들은 수시로 이야기를 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참, 그들에게는 애굽이 에덴동산이죠. 친근하죠. 애굽으로 돌아가자.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돌아가자고 하다가 원망으로 이어지니까, 모세가 기도해도 되지도 않고, 오히려 모세한테 달려들고 하나님한테 달려드니까, 하나님께서 민수기 21장 6절에 보면 광야에 어디서 몰려왔는지 불뱀들이 소집되어 한꺼번에 그 원망했던 사람들을 죽여 버립니다. 죽이고 달려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뱀들이 와락 달려들었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의 적이 과연 인간이 무서워서 달려들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내부가 착해서 달려들지 않은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악한 환경 속에 오니까 그들의 내부가 외부로 바뀌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적인 요소가 왔고 그것에 대해서 준비된 불뱀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진즉에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니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즉에 죽어야 할 것을 계속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왜, 순종치 못한 자를 기어이 순종하게 만들어서, 그것도 본인들이 순종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개입해서 순종했다는 말이 나와 줘야 그들이 합격선을 통과할 수 있어요. 천국에 합격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잘했습니다.” 라고 하면 그건 불합격이에요. 내가 열심히 수 십 년 동안 교회 봉사하고...이거는 불합격입니다. “저는 방해만 했지, 주님 일에 도와준 거 없고 훼방만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언제쯤 나올까요? 정말 이게 나와야 돼요. 뭐 교회 유리창 깬다고 훼방이 되는 게 아니고, 주에 대한 무관심 뭐 그런 것들이 훼방인데, 무관심하면서도 그걸 자인할 생각을 안 해요. “언젠가는, 나는 착하니까 내가 주께 돌아가겠습니다.” 주님은 “니가 알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거예요. 알아서 돌아오게 되면 지 잘난 척 하기 때문에 주님은 싫어해요. “회개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회개하지 마! 그냥 돌아와!”
탕자가 돌아올 때 그냥 뭐 보고 돌아왔습니까? 어디 아버지와 좋은 관계 맺으려고 돌아온 게 아니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탕자 입에서 이런 소리합니다. “제가 아버지한테 가기는 가지만 저한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용서하면 안 돼요. 아버지!”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아버지. 저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옵소서. 저는 아버지께 용서받을 잽이 못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이 어딨다고 용서를 합니까? 제가 아는 아버지는 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했겠어요?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속아 넘어갔지.”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면 안 될 정도로 나는 악한 존재입니다.” 하는 그걸로 니가 착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착함 덕분에 니가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용서하고 안 하고는, 니가 착하냐, 착하지 않느냐 하고는 관계없이 일방적인 사랑의 퍼부음이거든요.
그 일방적인 퍼부음을 우리는 자꾸 트릭을 써서 내가 어떻게 했기에 이 사랑이 왔다는 쪽으로 자꾸 조작을 벌이는 거예요. 조작을. 그래서 제가 기도하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충동적으로 기도하겠지만. 기도를 해서 응답이 안 되는 사람은 천만다행인데, 이게 기도해서 응답이 되니까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거예요. ‘아, 내 기도 응답이 되는구나. 아, 그럼 나는 신자 맞구나.’ 신자 아니거든요. 기도 응답된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기도 응답 되어서 천당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모든 기도는 주님의 기도응답이라는 결과물로 가야되지 지 기도가 응답돼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마지막에는 내 이름이 안 들어가요. 주의 이름으로 하게 되지, 내 이름이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받으소서. 받으소서. 그런 것들은 제사할 때나, 음복할 때나 하는 거지. 그런 것들은 안 통합니다. 중보자가 오셔서 성전 전부다 날려버리고 부숴버리고 폭력적인 행사, 행동 한 것을 아시잖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그런 폭력적인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돼요. 주께서 우리의 잘 차려진 제사상을 엎어버려야 합니다.
불뱀을 보냈다 이 말이죠. 불뱀을 보냈는데,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모세보고 기도하라고 해서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조치를 취해달라는 거죠. “하나님 조치를 취해주세요.” 근데 하나님께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한 백성들이나 모세 입장에서는 하나님 입장과 같지를 않아요. 그냥 이 고통만 면제되고 목숨만 붙어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그게 깊이가 있어요. 어떤 깊이냐 하면, 유브라데 강이 중심이 된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깊이까지 그들의 마음이 와 닿아야, 그냥 그거만 모면하면 안 되거든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깊이 있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뱀을 의도적으로 준비해놨다가 보냈다는 그 사실까지 그들이 수용을 해줘야 합니다. 주께서는 안수하면서 “아이구, 불뱀 물렸어요? 퉁퉁 부었어요? 낫게 해줄게.” 그냥 낫게 해주면 돼요. 불뱀 물린 자를 그냥 낫게 해주면 뭐가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어떤 요소가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해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랑에 주께서는 호응해 준 게 돼요. 그거는 사랑이 아니거든요. 내가 몰랐던 사랑, 그 사랑이 들어와야 되지, 내가 익히 아는 사랑이 들어와 버리면 안 됩니다.
인간이 아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어제 대전에서 주례하면서도 차마 이 이야기는 못했는데요. 모든 사랑 이런 것은 버리고, 왜, 모든 사랑은 남녀 간에 사랑이기 때문에 그거는 아닙니다. 아내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그거는 차마 제가... 진짜 아내는 엄마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 용납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아내 뒤에는 여호와가 계시거든요. 그게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습을, 가정을 통해서 구현하는 겁니다.
뱀을 일부러 준비해 놓았다니까요. 불뱀을. 언젠가는 원망할 줄로 알고. 따라서 원망한 것을 주께서 기다렸던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그냥 낫기만 하면 그들은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불뱀한테 물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문 불뱀과 내가 동종이라는 것, 똑같은 종류라는 것, 내가 뱀하고 같은 레벨이고 같은 뱀의 일종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이 주님의 말씀의 효과고 그 효과로 구원받습니다. “쳐다봐라! 딴 거 하지 말고 쳐다봐라! 그게 너야! 놋뱀, 그 뱀 있지? 그게 너야! 니는 인간인 줄 알았지? 뱀이 인간을 문다? 그래서 억울했지? 아니야! 뱀이 뱀을 물어서 만난 거야!” 그리고 죽어 마땅함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니 모습 보고 싶어? 그럼 놋뱀을 봐! 그게 니 모습이야. 마땅히 물려야 되지. 마땅히 뱀에게 유혹받아가지고 선악과 따먹고, 그 짓 해놓고 니가 어디서 몸 성할 생각을 했느냐?”
뭐, 애굽에서 광야로 건져내놓으니까, 뭐 대단한 존재라서 건져낸 게 아니에요. 남들이 모르는 선악과의 비밀과 생명나무의 비밀을 너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불뱀까지 준비해서 물려주시는 그 친절하심, 그 배려하심, 그게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닙니다. 바로 원망이 터져 나오는 그 현장에서나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결론은 간단해요. “원망합시다!” 살아가면서 원망합시다. 원망하자고 해도 평소에 늘 원망하고 있으니까 그거는 아주 쉬워요. 늘 원망합시다. 그리고 뱀과 하나님께 저주받을 지옥 백성과 같은 동종, 종류인 것을 인정합시다.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영생 얻은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것으로, 십자가 죽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인지, 그게 어떻게 용서가 되고, 죄 씻음이 되는 것인지, 주님한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문제답게 끄집어내주시는 그 사랑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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