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강-신 11장 18-21절(말씀의 표)160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18-21절입니다. 구약성경 280페이지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오늘 방금 읽었던 말씀을 보게 되면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게 되면 네가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산다. 마치 공식 같아서 하나님의 시키신 일을 우리가 할 용의가 되어 있을 겁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성경책을 말할 것이고, 그 성경책을 너희의 손목에 매고, 손목에 매니까 성경책을 가죽 같은데 새겨가지고, 단단하게 잘 끊어지지 않는 거기다가 폭을 좁게 해가지고 마치 팔찌처럼 해서 손목에 감으면 우리가 약속의 땅, 천국 간다. 얼마나 쉬워요? 가죽에다 말씀 톡톡 새겨가지고 손목에 감으면 되잖아요. 감고, 표 삼고, 그리고 미간에도 말씀을 갖다 붙이고. 물론 목욕이나 샤워할 때는 좀 놔두고. 잠 잘 때는 좀 빼놓고. 늘 차고 다니면 불편하니까 일 할 때는 놔두고 가끔 갖다 붙이고.
그렇게 해가지고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하고. 그리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다가 성경 말씀을 기록하라. 한국 사람은 부적도 붙이는데 이거 뭐 못할 거 뭐 있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 음력 3월 되면 “입춘대길” 이라고 붙이잖아요. 그리고 또 개업한 집에 가면 부적 하나 붙여놓고 한다 이 말이죠. 얼마나 쉬워요. 천국 가기 참 쉽네. 이거 하면 되잖아요. 좀 귀찮지만 이거 해놓으면 오래가고, 낡으면 갈면 되니까.
이래 놓고 사람들은 믿어야 된다. 행해야 된다. 시키는 대로 순종해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성경 전체를 몰라서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뭘 오해했느냐, 경상도 말로 “단디, 들으이소!” 나훈나 말, 멘트인데, “단디, 들으이소!” 단단히 들어야 됩니다. 벌을 주신 분은 아버지고 벌을 받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걸 단디 들어야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고 법을 실천하신 분은 예수님이에요.
그걸 인터셉트intercept, 가로채기. 주님이 중간에 가로채버립니다. 가로채서 완성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믿습니다.”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가로채신 분이 말씀의 완성을 가로채서 완성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니는 안 믿지? 나는 믿는다. 왜? 나는 못났으니까.” 어느 정도로 못 났느냐, 미간에다가, 손목에다가, 문설주에다가 말씀으로 아주 도배를 해도 이게 구원이 안 돼요.
오백 원짜리 크게 해가지고 뭐 이게 나오는데, 새로운 상품아이템 하나 했으면 좋겠어요. 성경말씀을 아예 도배를 했으면 좋겠어요. 도배지를 그렇게 좀 안 만드나? 창세기부터 해가지고 온 집을 성경말씀으로 도배하는 거죠. 그래도 안돼요. 그래도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그러면 생각합니다. 그러면 문설주에 말씀으로 도배 안하고, 손목에다 말씀 안 해도 그럼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나?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근데 그게 굉장히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뭘 알고 믿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에 절망을 하고 예수를 믿어야 될 텐데, 말씀에 절망도 하지도 않고 괜찮은 물건 나왔다고, 신상 나왔다고 물건 사듯 덥석 사버려요. 말씀이 우리에게 뭐하고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그러면 성경말씀을 주면, 성경말씀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을 우리 힘으로 알 수 있느냐, 우리 힘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 하느냐, 여기 미싱이 필요합니다. 브라더미싱. 미싱에다가 천을 깔지 말고 우리 신체 자체를 깔아놓아요. 깔아놓고 우리 60개조의 세포에다가 뭘 박느냐 하면 말씀으로 박아버려요. 두두두두둑 박아버리면 완전히 평화시장 봉제 공장처럼 스물 네 시간 박아버리면 우리의 온 천지가 빈 곳이 없이 말씀으로 이게 배열되게 됩니다. 뭐 미간 정도가 아니에요. 손모가지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온 전체가 미싱으로 말씀을 박아버리면 우리는 피나겠죠. 아야! 하겠죠.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주는 저주의 무게입니다. 진노의 무게에요. 우리 인간은 말씀에 의해서, 특히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은 말씀에 대해서 미싱으로 박히라고 이스라엘을 주신 겁니다.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근데 이스라엘은 말씀을 미간에, 손목에, 뭐 문설주에 바르면 자기는 약속의 땅에 간다고, 약속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약속을 주신 분이 뭐 어길 일이 없다. 따라서 문설주에다 아예 도배를 해놓으면 이제 천국 간다. 이방나라 쳐들어와도 우리는 승리한다. 이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여, 다른 민족은 말씀을 안 지켰었지만 우리는 이 신명기 11장 18~21절 말씀을 우리는 지켰으니까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옵소서.” 이러다가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러다가 망했어요. 남들이 하지 못한 착한 일을 하나 더 얹은 거예요. 말씀에 순종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기다가 더 얹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근본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것도 단디 들으셔야 합니다. 아까 단디 들으라고 한 것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법을 만드신 분은 아버지고, 그 실행자는 인터셉트, 중간에 가로채듯이 예수님이 가로챘다는 것. 단디 들으셔야 돼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휙 하고, 우리가 지키려고 하면 뭔가 싹 개입해가지고, 낚아채가지고 주님이 다 이루셨어요. 우리가 낚아채서 가신 그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되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 단디이고. 두 번째 단디는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과오 없이, 잘못 없이 살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 없이. 또는 잘못을 줄이듯이.
이게 아담, 우리 조상이 큰 실수한 것인데, 과오가 있는 그 양에 비례해서 벌과 저주가 주어진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이거 참 못 고치죠. 고치기 힘듭니다. 뭐 신앙생활 좀 하고, 뭐 복음 알고, 수련회 갔다 오고, 뭐 은혜 받아도, 항상 저 문만, 저 문이 이상한 문이야. 문만 열고 나가면 ‘과오를 줄여야지. 실수를 줄여야 요번 한 주는 복 받는 거야. 내가 소원한 것 뻔뻔스럽게 그냥 내밀 수는 없고, 내가 나쁜 짓을 줄여 가면 고 줄인 만큼 행운이 찾아올 거다.’ 라는 이런 생각을 우리가 갖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갈 무거운 짐인데, 진짜 기도해야 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이런 귀신이 좀 떨어져나가도록. 은퇴한 노인네들, 남자들 하루 종일 집에서 뭐하는 줄 알아요? tv켜놓고 욕만 합니다. 하루 종일 tv켜놓고 욕만 해요. “저거 뭐야! 저 김종인 뭐하는 거야?” 김종인, 대전에 있는 김종인 아닙니다. “저 배신자!” 하루 종일 tv켜놓고 할 짓이 없어. 씹는 재미가 사는 재미라고. 하루 종일 욕하는 재미로.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목사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지저분한 말은, 음담패설보다 더 지저분한 말은 “정의실천구현”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떠니, 미가가 어떠니, 아모스가 어떠니, 선지자 뜻도 몰라요. 그들은.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기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하수가에다 집어넣고 싶어요.
니가 왜 그래야 되는데? 니가 왜 이 땅에 정의를 구현해야 되는데? 백날 그럴싸한 핑계를 대도 결국은 그거잖아요. 복 받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복 받기 위해서 산다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씀을 우리에게 미싱으로 박아버린 거예요. 말씀에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크게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말씀에서 복이 온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하나 놓치고 있어요. 말씀에서 저주도 따라온다는 것을 자꾸 놓치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이걸 놓친 것이 아니죠. 뭔가 뒤에서 저주가 따라오니까 얼른 도망쳐 복 있는 쪽으로 달아나는데 방법은 뭐냐, 보다 많이, 남보다 더 착한 일 많이 해서 벌주는 사람이 미안해서라도 벌 못 주게 만드는 거예요. 미안해서라도. 그런데 인간은 죽는 게 무섭다고요? 아니에요. 죽음 이상을 무서워합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 죽음보다 더한 그 무엇을 무서워합니다. 왜 그런지 본인들이 몰라요. 왜? 인간은 영적 존재고 귀신들렸기 때문에. 얼마나 죽음 뒤에가 무서웠는지 죽잖아요. 그래서 자살하잖아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서워서 자살한다고요.
죽음보다 더 이상인 것이 자꾸 따라와요. 대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저 착하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시키는 대로 살게 되면 덜 따라오겠지. 그 죽음보다 이상의 무서운 것이, 공포가 덜 따라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수련회 한 것을 잠깐 해볼게요. 인간은 뒤에서 따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었죠. 법을 내가 준수하면 준수할수록 죽음의 공포는 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정도로 착한데. 이정도 착한데 벌이 올 리가 없죠. 왜냐하면 옆에는 나보다 못한 인간이 오니까 나를 때리더라도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이것이 정의구현이잖아요.
곰이 온다. 도망쳐서 사는 방법은 곰보다 더 빨리 가는 게 사는 방법이 아니고 같이 옆에 있는 짝꿍보다 더 빠르면 살 수가 있어요. 왜? 곰은 뒤에 있는 인간을 먹어서 배부르면 따라오지를 않으니까. 마귀도 마찬가지에요. 나보다 더 나쁜 놈을 잡아먹고 그 다음에 차차 나한테 올 거니까 하여튼 빨리 도망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과오를, 잘못을 줄이고, 죄를 줄임으로써 복을 받겠다는 이 딜레마를 인간은 가면 갈수록, 이게 선악과 독소가 빠져나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마귀 짓을 하게 되죠.
그러면 여기에 해결책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것.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에요. 본인이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이거는 하나님의 뜻으로, 가로챘던 예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내가 걱정하는 것들은 다 부질없는 걱정인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죄인인 것을 알려줬다는 말은 이미 니가 의인의 그룹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를 죄인으로 통보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통보를 해주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뭐냐 하면 내가 이미 구원받았는데, 어쩌다보니 구원받았어요. 뭐 이상히 구원받았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 할 일은 뭐냐 하면 이제 말씀을 보는 겁니다. 말씀을 보면서 ‘아, 이래서 내가 스스로 의인될 수 없구나!’ 라는 것을 확인해가는 겁니다. 근데 성경말씀에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의가 있는 곳에는 놀랍게도 복이 따라와요. 의인되는 것도 고맙고 미안한데 여기다가 감당할 수 없는 복까지 주시는 거예요. 아무리해도 이 복은 절대로 내가 해서 받을 수 없는 복인데, 복이 계속 쏟아집니다. 질식할 정도로 복이 쏟아져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너희들이 보석같이 된다고 하거든요. 그 보석이 어디에 있는 보석이냐 하면 우리가 행해서 얻는 보석이 아니에요. 누구의 복장에 붙어 있는 보석입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대제사장,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복장의 어깨와 앞에 12개의 보석이, 12지파 보석이 있다 말이죠. 이 보석은 그냥 같은 배를 탔다는 이유 때문에, 제사장이 얻었던 그 복에 무임승차한 것 때문에, 보석이 반짝반짝 빛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번에 수련회 때 시간관계상 다 말을 못했지만, 니는 나의 신부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에 대한 모든 혼수 그 모든 것은 아주 책임지고 신랑의 격에 맞도록 신부를 그렇게 꾸미는 겁니다.
신부는 무수리 출신이 아니거든요. 왕비에요. 얼떨결에 그렇게 되었어요. 얼떨결에. 예수 안에서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예수 안에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인간을 눕혀놓고 뭘 발라라, 미간에, 손목에 뭘 하라는 말은 이거는 초창기고, 스타트고 앞으로는 말씀이 계속 퍼부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몸에다 붙였는데 이제는 미간정도가 아니에요. 여기서는 뭐 누웠을 때에든지 앉았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하라고 하는데 이 말씀의 숙제가 늘어난다니까요. 그러니까 말씀이 옛날에 들었던 말씀 같으면 그걸 숙제하면 끝나는데 말씀에 끝이 없어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적들이 옵니다. 마귀가 올 때 우리는 뭐 마귀에게 대적하기 위해서 칼 들고 설칩니다. 베드로처럼. “이놈들아! 정의의 칼을 받아라! 예수님은 내가 지킨다.” 이렇게 하는데 마귀가 베드로하고 상대도 안 해. 그냥 타고 올라가버려요. 타고 가버려요. 자기는 도대체 마귀를 이기겠다고 하는데, “나는 목숨까지 내놓은 그런 사람이다. 마귀야. 나하고 한 판 붙자!” 안 붙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거 뭐 나하고 상대도 안 하고 그럼 나는 구원 안 된 거네.’ 이러는데, 베드로는 치워버리고 주님한테 가서 공격했던 마귀가 한 32분 뒤에 우르르 퇴보하거든요. 무슨 일 일어났나 보니까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셔가지고 이제 베드로를 밟고 퇴보하네.
그러니까 갈 때도, 올 때도 주님도 나하고 상대 안 하고 마귀도 나하고 상대 안 하고. 결국 싸움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싸움이에요. 주님이 알아서 약속을 하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주어진 말씀이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숙제를 해내면 되는데, 말씀이 계속 오는데 어디까지 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하기 까지 주께서는 말씀을 계속주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무화가 나무가 있었거든요.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그 무화과나무를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서 목이 말라 열매가 있는가 하고 보니까 열매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행위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무화과나무와 예수님 사이에 사전에 어떤 말씀의 협약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사실을 제자들은, 인간들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말씀이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무화과나무, 풍랑, 그리고 엘리뇨 현상, 북극의 빙하, 남극의 빙하, 그 모든 것이 말씀과 연계해서 연동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남극에 가서 아무리 캐도 말씀이 안 나와요. 남극에 가서 캐봐야 신명기 11장 21절 이런 거 안 나와요. 왜 안 나오느냐, 남극의 빙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형상대로 지은 것이 누군데? 인간을 밟고, 인간 속에, 인간으로 오신 분이 형상대로 지으신 바로 그 분입니다. 그래서 형상되시는 분이 형상대로 모든 말씀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인간을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같은 새 하늘과 새 땅도 덩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서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내용 간단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주셨고, 그 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인터셉트해서, 중간에 가로채서 해놓고, 그 예수님이 하신 성과를 빛내기 위해서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된다는 것. 방금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뗐습니다. 그걸 가지고 수련회 때 예수님 중심의 재편성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재편성.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정사들이나 주관들이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과오, 새롭게 늘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고, 계속 자기 잘못들이 새롭게, 새롭게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의와, 주님의 축복과, 주님의 용서와, 그리고 영생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그동안 몰랐던 과오를 계속 바깥으로 디밀어 냅니다. 그런 죄마저도 주께서는 인터셉트해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던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이스라엘만 상대했던 시대는 끝났다. 전에는 묵인했지만 이제는 묵인하지 않는다. 이방나라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심판이 있으리라”
온 천하가 그리스도의 중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상대할 적이 없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감사히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류가 없고 잘못이 없어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한 심령이기에 주께서 완성된 말씀의 조치를 해주신 결과로 우리가 주님을 주님답게 믿게 된 것을 감사케 해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몸에다가 십자가 피가 흐르고 있음을 증거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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