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신 11장 13-17절(이른 비, 늦은 비)1601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신과의 차이점은 자기 백성이 여호와에게 눈 돌릴 때는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 룻기라는 것이 있거든요. 그 룻기에 보게 되면 하나님 믿는 백성이 자기의, 이 신명기 오늘 본문에 나왔던 약속을 가차 없이 버리게 됩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사는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니까 좀 더 좋은 땅이 없을까 하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갔는데, 간 땅에서 약속의 땅에 있을 때보다 더 망했어요. 하여튼 남자란 남자가 다 죽었어요. 남편 죽었죠. 아들 둘 있는 것 다 죽었죠.
남는 것은 나오미라는 그 여인과 그리고 모압 땅에서 결혼한 모압 여인인 이방 여인하고 두 사람밖에 없어요. 근데 그 모압 여인은 사실은 하나님을 믿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에게 복을 준다고 할 때에는 혈육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복이 돌아가야 되거든요. 근데 모압 여인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호와하고는 상관이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내놓은 자식이죠.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이 점을 알고 그 며느리한테 이야기했죠. 니가 팔자가 참 사납구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했는데 근데 아들 죽고 나니까 시어머니로서 참 미안하고. 이제 애도 없겠다. 젊겠다. 요새 젊은 이혼녀 인기 있습니다. 드라마 이야기지만. 다시 결혼해서 니 살고. 나는 하나님이 직접 때리시기 때문에 벌 받은 시가(媤家) 때문에 미련두지 말고 새로 인생 찾아서 가거라. 충분히 시어미로서는 그런 소리 할 수 있거든요. 요즘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죽고 말았어요. 남편이 죽고 나니까 그래. 니는 새로 결혼해라. 이렇게 하면 참 고맙겠는데, 그게 아니고 남편이 차사고로 죽었으니까 보상금은 시어머니가 다 가져가버렸어요. 그냥 빈손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그런 상식 없는 시어머니도 있기는 있다 만은,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는데 그 망한 집안에 구태여 니가 끼어 들 필요가 없잖아. 니 팔자 니가 새로 고쳐서 가거라.” 괜찮은 배려, 충분하게 해줄 수 있는 배려를 다 해준 거예요.
그래서 며느리 하나는 “예. 어머니 짧은 인연이었지만, 별로 좋지도 않은 인연, 여기서 갈라섭시다.” 하고 가버리고 룻이라는 그 모압 여인은 무엇을 알았느냐 하면
약속의 땅을 떠났다고 해서 그 집안에 폭탄을 터트리는 하나님이라면 정말로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말 뿐이 아니라 제대로 정말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인데, 그냥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고 약속대로 실현시키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만나도록 이렇게 길을 줬는데 어찌 그 절호의 찬스를 놓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시가집을 망하게 했다는 그것이 룻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살아있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거예요. 피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살아 계시구나! 왜 어떻게 살아 있느냐, 주께서 약속의 땅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말 뿐이 아니라 선지자가 이야기한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 선지자의 개인 사견이 아니라 선지자를 그렇게 말하게 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 뜻이었군요.
룻은 그 땅으로 오히려 기어들어갑니다. 나오미와 함께 들어가죠. 땅이라 하는 것이 땅을 줘놓고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보통 이렇게 부동산을 주든지 하면 그 소유권을 사는 사람에게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땅을 준다고 해놓고는 여전히 등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은 너희를 살게 하는 땅이 아니고 이 땅은 너희들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속이 살아 있는 거예요. 너희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살아있는 땅.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 주는 땅이 아니고.
약속을 약속되게 구원하는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그래서 천국은 우리들 가는 땅이 아니고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줘야 하는, 예수님께서만 주인인 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아들의 나라라고 하죠. 사람들은 ‘죽어서 좋은 나라’ 라고 자꾸 이렇게 상상을 하는데, 그거는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세계는 없습니다. 그거는 상상의 유토피아에 불과하고 진짜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들어가는데 취해있는 것이 아니고 망하게 해서라도 주님만 돋보이는 나라, 나를 망하게 해서라도 주님만 돋보이게 한다면 합류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있는 것만 중요한 세계, 그것이 천국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비우고 그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의, 그런 재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세계는 무너집니다. 인간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법칙에 의해서 그들은 거절당하고 멸망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성지순례 하지 마세요. 하지 말라고 해놓고 얼른 가거든요. 여행 삼아 가기도 하고 이스라엘 관광수입만 늘어날 뿐인데. 성지순례라는 큰 기대를 하고 거기 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는 그냥 관광지입니다.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에 나옵니다. “이미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땅에서는 어떤 지점도 의미 있는 지점은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지순례를 자꾸 만들어요. 순례객을 모집합니다. 이게 돈이 되거든요. 천주교가 자꾸 성지순례를 만들어서 어떤 성인이 죽었고, 어떤 성인이 어떤 일을 했고, 그 딴 것들을 만들어서 그걸 돌아다니면 자동적으로 어떤 신앙심이 깊어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거는 반복된 우연은 필연이 된다고. 습관이고 버릇이에요. 자기 안에 자기 의가 담겨있죠. 마귀 짓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달라요. 다른 것은 누가 조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만 드러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고 있는 나를 믿지 않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약속만 믿어지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안 믿기 위해서, 내 신앙이 불신앙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신앙만이 신앙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주께서 이끄십니다.
그 방법이 여기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14절,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적절한 때에 주신다. 그렇다면 이 적절함은 땅에 있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아, 약속은 정말 변치 않는 약속이구나! 라는 것을 확인 차 내리시는 적절한 장소. 그걸 로마서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게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시간은 니 것이 아니고, 니가 기대한 시간이 아니고, 주님이 적절해서 타이밍 맞추어서 오직 약속되신 주님만 바라보기 위한 조치로써 허락된 상황이,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근데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는 사람 백이면 백, 이렇게 봅니다. 아, 이른 비주시고 늦은 비주시니까, 이거 축구에 투톱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스트라이커가 혼자 골 넣는 것이 아니고 장대 같은 두 사람을 공격수로 내세워서 공이 센터링할 때 내 키에 안 맞으면 니 키에 맞아서 골인시키라고 투톱 하듯이. 이른 비, 늦은 비를 투톱으로 약속의 땅에 깔아놓고 아무나 걸려라 슛 골인 되도록.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이걸 보면 이렇게 합니다. “이른 비는 구약이고 늦은 비는 신약이다.” 아니거든요. “이른 비는 율법이고 늦은 비는 성령이다.” 이게 그럴싸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런 소리 하는 목사가 잘못이 아니고 그걸 그럴싸하게 듣는 내 쪽에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 그게 그럴싸하게 들릴까요? 사람은 노린 것이 있어요.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됩니까?” 벌써 출발부터가 주님의 영광이고 뭐고 관계없어요.
제가 아까 룻 이야기 했잖아요. “나를 어떻게 망칩니까?” 이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앞으로 잘 됩니까?” 이런 의식을 가지고 교회 온다 말이죠. 꼭 절에 가듯이. “부처님. 망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서 절에 가는 사람 못 봤어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발 저를 망하게 하옵소서. 저는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죄 값을 다 저한테 퍼부어주옵소서.” 절에 안 갑니다. 가만히 있어도 망할 건데 절에 가서 빌 것이 뭐 있어요.
이른 비, 늦은 비라고 하는 그것은, 구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비 자체에 구원이 합류되어 있고, 그 다음에 이 땅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른 비는 반드시 늦은 비를 겨냥해서 미리 땡겨서 비가 온 거고, 늦은 비는 이미 이른 비를 너희에게 심어놓았음을 기억하도록 늦은 비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른 비, 늦은 비를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비 내림을 니 구원받는 용도로 사용하는, 니 잘못된 약속관을 수정조치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애들아! 하나님께서 구원한다. 비 내릴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딱 한 번만 오면 돼요. “비 내릴게.” 또는 일 년에 비가 두 번 오더라도, 봄, 가을에 오고 뭐 겨울에 온다고 했는데, 오더라도 꼭 이렇게 이른 비, 늦은 비라고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이렇게 구분 짓는다는 말은 사람들이 이른 비도 나 잘되라고 오는 거고 늦은 비도 나 잘되라고 오는 거니까. 일단 이른 비를 얻어맞고 난 뒤에는, 그걸 부여하고 난 뒤에는, 그저 침착하게, 아주 인내심 있게 기다리면, 늦은 비가 바로 와서 나는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어디 집 계약 합니까? 중도금 내고 뭐 그런 거예요? 무슨 계약 할 때 현찰로 다 주고 말지 뭐 갈라서 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갈라서 내는 것. 이왕 줄 것 한꺼번에 값 치루면 되지. 아파트 살 때 뭐 계약금 걸고 시작 하는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게 인간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에요. 구원은, 너희들에게 돌아갈 구원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른 비, 늦은 비는 누구를 위한 건가? 이 땅에 약속된 사람을 위하여, 약속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이른 비, 늦은 비를 주시는 약속의 대상자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고 이렇게 착각을 했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아니면 누구냐, 이스라엘 속에 있는 남은 자가 있어요. 남은 자 있으니까, 남은 자들은 ‘아, 이스라엘 속에 남은 자를 위해서 이른 비, 늦은 비를 줬구나!’ 남았다는 말은 잘려나갔다는 뜻이거든요. 이사야 6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사야 6장 6절을 보면 웃시야가 죽던 해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시고 그 다음에 하는 13절을 보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후딱 빨리 읽으니까 뭔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나무 잘린다는 말입니다. 나무 몸통 다 잘린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이런 말씀 할 때에 우리가 굉장히 난처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잘리는 몸통을 왜 줬느냐 이 말입니다. 항상 우리는 이거잖아요. 아니 구원을 할 때, “아나, 이게 구원이다. 받아라!” 하면 깔끔하게 끝날 문제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찔끔찔끔 줄 이유가 없다니까요. 주님께서 어디 우리 약 올릴 일이 있습니까? “이게 구원이다. 받아라!” “고맙습니다.” 이러면 끝날 문제인데.
분명히 이스라엘을 몽땅 줬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몽땅 구원했어야죠. 처음에 약속에 너희는 내 백성이라 한다면, 자기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진짜 백성 만들어줘야죠. 그리고 백성 되었으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행하라.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다.” 그럼 말을 바꾸지 말아야지. 할례 행한다고 꼬추 한 번 보자. 어! 내놨네. 내 백성이다. 요걸로 깔끔하게 계약 끝났잖아요. 그게 아브라함 계약, 아브라함의 언약이라는 거예요. 할례 행한 자만 거룩한 백성이고 나머지기는 아니다. 그럼 꼬추 포경수술해서 할례 행했잖아요. 그럼 뒤에 군말이 없어야죠. 하나님 쪽에서 아무 소리 하지 말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뒤에 예레미야에 와서는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요. 마음의 할례가 할례다.”이제 와서 왜 딴소리합니까? 아주 헷갈리게. 하나님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믿음직해서 성실하게 믿겠습니까? 언제 또 말 바꿀지 모르는데. 오너가 그렇게 말 바꾸면 밑에 직원들이 일하기 참 힘들어요. “육신에 할례를 하면 내 백성이다.” 나는 뒤에 말 안 듣겠어요. “예. 고맙습니다.” 하고 빨리 도망쳐야지. 근데 뒤따라와서 “손님! 그게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돼요.”
육신의 할례는 칼 대면 돼요. 마음의 할례는 칼 대도 소용없어요. 마음을 어떻게 끄집어내서 이걸 잘라요. 마음이 어디 돔배기에요? 상어고기에요? 제사 고기에요? 이게 어디 갈치에요? 잘라내게? 지금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는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언제 너희들 구원한다고 언제 했느냐?” 그럼 듣는 이스라엘 또 화냅니다. “우리를 하나님 백성이라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제 와서 왜 비겁하게 딴소리합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 말고 너희 속에 있는 남은 자. 너희 말고 니 속에 남은 자 말이야.”
그래서 여기 그대로 보겠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십분의 일도 잘린다는 거예요. 나가! 십분의 구가 잘려 나가버리고 십분의 일도 다 잘려 나가버려요. 그럼 남는 것은 뭐 밖에 없느냐, 그루터기 밖에 없어요. 그루터기. 시에서 겨울 되면 가로수 손질하잖아요. 불쌍해 죽겠어요. 여름에 풍성한 가지가 다 잘렸어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서울에서 누구하고 식사를 했는데, 삼성쉐르빌 그 아파트에 무화과나무가 있는데 그 무화과나무가 다 잘렸어요. 관리인 와서 다 잘랐어요. 발가벗겨졌어요. 저래 가지고 올 봄에 살 수 있을까? 산답니다. 가지를 쳐주는 거예요. 가지를 다 쳐주면 남아 있는 자는 좋은데 가지치기 당한 자는 뭡니까? 평생 동안 주여! 여호와여! 했는데 이제 와서 다 잘라버리면, 처음부터 다 잘라내지 이제 와서 구조조정 해버리면 어떻게 된다 말입니까? 그동안 공들인 것이 뭔데?
이게 뭐냐 하면, ‘잘라냄’ 추방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추방된 자도 다 구원받기를 원해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니 뜻이고. 내 뜻은 처음부터 니 구원의 목적이 아니고, 약속이 약속답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과정 속에 너희들이 지금 주님 앞에 이용당한 것이다.” “설마? 저를 잘라냅니까?” “니가 뭔데 못 잘라내나?” 하고 잘라 내버려요. 그래, 잘라내고 난 뒤에 남은 자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드디어 합격!” 하겠죠. 그거 합격 아닙니다. 불합격입니다. 남은 자 잘라내고, 남은 자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남은 자들이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우리가 남아 있는 이 지점이 바로 구원의 과정에서 마지막 내리는 비, 곧 이게 늦은 비구나!’ 라고 착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거 착각이었습니다. 남은 자 잘라냅니다. 그러면 먼저 잘려진 자들에게 자부심을 가졌던 그들이 이제 와서 또 이야기합니다. “주님이여! 저마저.....,” 이렇게 합니다. “니가 뭔데?” “그럼 처음부터 약속이 다르잖아요? 저들 잘라낼 때 같이 잘라내지 왜 우리는 뒤늦게 잘라냅니까?” “니 속에 남은 자를 구원하지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야.” 또 이래 나와요. 그래서 또 잘리고, 잘리고, 또 잘리고..그럼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감사한지. “주여, 저만 남았군요.” 하고 자랑 할 것 아닙니까? “너도 아니거든.”
어린애들이 바닷가에서 놀이할 때 모래를 쌓아 놓고 그 위에 막대기를 꽂아서 누가 모래를 파내면서 끝까지 막대기를 자빠트리지 않고 끝까지 남는지. 그거 시간 날 때, 학원 안 다닐 때 많이 해봤잖아요. 우리 어릴 때 많이 해봤습니다. 지금 애들을 그런 놀이도 없어요. 그렇게 하듯이 자빠트리지 않고 마지막 남은 자. 그 남은 자이기를 누구나 소원합니다. 왜, 남은 자가 되어야 구원받기 때문에. 근데 구약을 통해서 남은 자? Nobody,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땅에 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오직 주님만이 남은 자로 새로 심어지고 남은 자의 스타트,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남은 자가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른 비, 늦은 비는 이 약속의 땅에 내리는 것이지, 땅에 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사는 땅에 내리는 것은 이른 비도 늦은 비도 아니에요. 땅은 장차 주님이 오시기 위해서 이른 비, 늦은 비가 주어진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른 비, 늦은 비의 정체는 확정되었습니다. 약속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덩달아서 이른 비, 늦은 비 내리겠다는 약속도 함께 동반해서 이 땅에 펼쳐집니다. 펼쳐지게 되면 우리는 간단해요.
내가 알던 이른 비, 늦은 비에서 탈피해서 주님 중심의 새로운 이른 비, 늦은 비에 합류를 해버리면 우리는 이른 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늦은 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이루어진 구원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구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 주체 변화가 일어나요. 내가 구원받겠다가 아니라 주께서 구원받은 결과로 일방적으로 내가 구원이 되어버렸구나! 새로운 주체를 제공받게 되는 겁니다. 이게 아침에 이야기한 지체가 되는 거예요.
새롭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으니까 아, 내 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좋은 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좋은 나라, 주님이 주가 되는 나라에 가는 구나! 를 느끼는 겁니다. 이른 비 왔다고 늦은 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늦은 비 왔다고 해서 이른 비를 잊지도 말아요. 이른 비든, 늦은 비든 내가 행할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 이룬 효과, 결과로 남긴 것이 뭐냐, 오늘날 우리가 남겨진 거예요.
그러면 신명기를 다시 보게 되면 뭐냐, 이른 비, 늦은 비를 이야기하는 그 약속의 백성이라 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의 손으로 만들어낸 그 백성이 그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잘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옆을 봐요. “주님이 다했죠? 주님 혼자 다 했죠? 내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혼자 다 하신 것 맞죠? 십자가 피로 다 이루셨다는 그 말이 그 말이죠? 주님은 포도나무요 나는 삐져나온 가지니.” 내가 ‘주님. 저 이 정도 했습니다.’ 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 다 하신 분이 옆에 계시는구나.’
이게 바로 약속이 약속답게 본래 약속의 취지에 부합되는 겁니다. 본래 약속답게 하는 생산물이에요. 우리가. 하나의 주님이 만들어낸 작품으로써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끝으로 구약 성도, 엘리야, 아브라함, 이삭...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땡겨 왔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이른 비, 늦은 비를 이해합니까? 이렇게 되죠.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룬 다음에서 왔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보니까 ‘다 이루어졌네.’가 되는데,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 낮에 이야기한 모세, 엘리야 이런 사람들은 한참 기다려야 되는데 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당시 주께 주신 약속, 언약이라고 하는데, 노아는 노아 언약, 모세는 모세 언약, 언약을 주게 되면 본인이 상한 심령인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 같은 경우에. 언약을 지키고 아, 이것만 지키고 기다리면 되겠다. 이것이 아니라 이미 그 언약 안에서 내가 구원이 될 대상자가 애초부터 아니었고 누군가가 오시면 나를 구원의 대상자로 미리 삼으려고 나로 하여금 상한 심령이 내 구원에 대해서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 벌써부터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두 개의 종류를 생각해요. 옛날 내가 생각했던 나와 주님이 찾아 온 내가 둘로 나란히 갈라져서 ‘아, 내가 이렇게 살았었지. 또 내가 이런 행동을 보였었지. 혼자 잘났다고, 혼자 착한 일 했다고 구원받는다고 착각 착각들을 했었지.’ 두 개의 자아를 늘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들을 때면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뭔가 했습니다. 뭔가 했습니다.” 라고 다 나옵니다. 그러나 어느 계기가 되어가지고 내 뜻대로 안 되게 되면, 사람이 구원받고 난 뒤에도, ‘내가 예수를 믿어줬으니까 내가 구원받았지.’ 라는 그 생각 자체가 또 내 중심의 구원관이 늘 나온다는 것. ‘아, 이게 바로 죄구나!’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것 자체가 약속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을 회상하듯이, 회고하듯이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멸망한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옛 생각도 마땅히 멸망당했음을, 이미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