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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63강-이적과 기사(신11'1-7) 1512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 23. 08:04
2015-12-27 15:03:12조회 : 105         
   이적과 기사 15122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이적과 기사(신명기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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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2-27 15:59 
이적과 기사

2015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신명기 11:1-7


(1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11:2)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

(11:3)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11:4)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따를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11:5) 또 너희가 이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11:6)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11:7) 너희가 여호와의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목도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움직임은 단순한 일개 나라의 움직임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시’가 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참 하나님을 나타내는 중간 위치에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이방나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곧 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받아들여라 는 말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며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 처리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아도 “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일로 마감되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친히 동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운전대를 인간들의 족장이 쥐고 있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동행하시면서 이스라엘에 내리시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이적과 기사’라고 했습니다. 줄이면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말씀드려서, 참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에 대해서 사람들은 구미가 당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고 나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기적의 모습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기피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기적을 베풀기는 베푸시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피하시고 반대로 인간이 원치 않는 것을 기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원칙처럼 작용해서 계속해서 실시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기에게 모자라고 미흡한 것을 마저 채워주시는 그런 신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 근본적인 사항을 놓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효과는 바로 ‘분류작업’입니다. 천국 갈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사이를 분류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이 자진해서 지옥가겠다고 나설 위인은 없는 입장에서 “저를 지옥보내도 제가 감수할 용의가 있으니 저에 대해서 신경쓰지 마시고 원대로 행하시옵소서. 저는 그래도 기적이라고 여기겠습니다.”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냐 너의 뜻대로 지옥보내주마”라고 나오시면 “그런 결정에 감사합니다”라고 반응을 나타내기가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결국 본인이 지옥갈 것 같으면 처음부터 그런 기적을 하나님께서 본인에게 내려달라고 요구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갈 자가 억지로 지옥가게 해달라고 매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분류작업은 필히 인간의 요구조건을 피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실시하시는 두 가지 기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에 살던 히브리들이 애굽에서 분류되어 그 권세에서 벗어나는 기적이요, 다른 하나는 이렇게 벗어난 이스라엘 내부에서 또 다른 분류작업이 실시되는 기적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분류작업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분류작업은 신약에 들어와서 종결됩니다.

이 종결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분류작업의 종결이 아니라 차라리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의 버림으로서 분류작업을 마무리 지어십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 되고 죽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기적은 작용하십니다. 이런 작업에 담겨있는 원칙은 ‘어린양 드러내기’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들은 애굽 왕 바로왕의 강퍅과 병행해서 진행됩니다. 바로왕이 새로이 강팩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주저없이 새로운 재앙을 애굽에 퍼붓곤 했습니다. 이는 곧 바로 왕 빼놓고 다른 이들과는 하나님께서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시더라도 대표적와의 다툼의 형식을 통해서 시행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의 결단이나 선택에 의해서 좋은 쪽으로 운명을 바꿀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4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문제삼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근원적인 기적을 놓치게 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을 형성하는 주인공들이 본인들임을 감지한다면 날씨 예보 정도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기적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의 기반과 관련되어서 등장한 기적은, 예수라는 낯선 분의 죽음입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왕이 보여주는 강퍅은 그의 아들이 졸지에 간밤에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 정체가 들통날 때까지 근원적인 기적이 아닌 다른 기적을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 바탕에서 자신의 집요한 생존욕구가 작용하게 됩니다.

“무조건적으로 살아남아야 돼. 암 살아나야 말구”라는 의식을 지배에서 벗어날 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악마는 계속 인간을 통치할 수가 있었습니다. 돌이 떡이 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줄 신기한 능력을 원하고, 그로 인해 세상 부귀 영화를 소득으로 챙기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참된 기적, 즉 요나의 기적은 이런 생존욕구가 판치는 세상에 치여서 생소한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도 이 죽음에로의 참여를 반기거나 감사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받은 외에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천국백성으로 분류가 완료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을 주님의 십자가 기적의 현장으로 마음껏 활용토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2-27 20:40 
63강-신 11장 1-7절(이적과 기사)1512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따를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너희가 여호와의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목도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특수한 민족입니다. 특수한 민족이면서 우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단계 뒤쪽이죠. 그들은 하나님과 직접 동행했지만,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앞장세워놓고 우리는 뒤로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중간에 뭐가 있을까?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고 싶다.’ 기도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세요. 우리가 직접 기도하면 우리 상상력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지어낸, 죄가 투영되어서 나타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지만, 진짜 하나님은 진짜로 있는 이스라엘 그 역사를 일하시면서 구성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이스라엘 역사가 계시로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보통 역사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것이다. 지나가면 끝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 11장 2절에 보면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그냥 지나간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역사가 동일하게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 역사가 동일하게 반복이 되는 이유는 동일한 하나님이 함께 동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요. 하나님은 같은 분이지만 상황은 그들과 똑같은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이라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만드시기 때문에. 지금도 홍해가 지팡이 넣으면 갈라지고 하는, 이런 것 없습니다. 뭐 있다 할지라도 그거 의미 없고요. 뭐 광야에 가서 힘들게 어디 생존투쟁 훈련받는 것, 이런 것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지만 오늘날 방식으로 상황이 달라지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은 동일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신명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옛날이야기가 아닌, 다른 나라의 사적인 옛날이야기라고 밀치면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 계시가 되는데, 그 계시 속에서 무엇을 찾아야 되는가,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만 뽑아내면 되죠. 하나님의 원칙만 뽑아내면 됩니다. 그 원칙을 뽑아내면서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3절에 보면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이적과 기사.’ 같이 봅시다. 하나님의 기적을 이 지상에 퍼붓는 점에서는 일관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셨다. 왜 주셨는가, 하나님의 계시다. 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한다? 동행한다. 동행하면 뭐가 나타나는가, 기적이 나타난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기적이 나타나는데, 그 기적을 딱 깨보면 뭐가 있는가, 일관된 원리와 원칙이 담겨 있다. 지금 거기까지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일관된 원리와 원칙은 애굽이라는 과거 역사, 껍데기는 갖다 버려도 지금 이 자리에 일관된 원리와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왜, 지금도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표현을 기적이라고, 이적과 기사라고 되어 있지만 한데 뭉쳐서, 그냥 기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방금 한 것을 다 추리고, 추리고 추리면 딱 남는 것은 뭐냐, 기적의 하나님이에요. 아아하! 굉장히 듣기에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죠. 좋아지면 안 됩니다. 기적의 하나님입니다. 기적의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적을 베푸십니까? 베푸십니다. 그러면 나한테 아쉬운 것이 많은데, 기적을 베푸십니까? 동행하시면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면 그 아쉬운 것을 채워줍니까? 아니요. 이래 되는 겁니다. 내가 아쉬운 것을 채워주는 것이 기적이 아니에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 때,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베풀지 않는 그것이 원칙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주께서는 기적으로 베풀어주지를 않습니다. 제가 오늘 낮에 설교하면서 빨리 지나간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주지 않았다. 믿음도 주지 않았다.”라는 말을 제가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대목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사로 믿음을 주었고 그 믿음으로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되느냐 하면은 내가 원하는 믿음을 내 것으로 주어서 구원시키지를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믿음이 오는 순간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날아가 버리고 주의 백성의 입장으로 이게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나의 구원 챙기게 하기 위해서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신 믿음을 주시죠. 그게 대표적인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에게 주신 믿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에, 계시니까, 기적을 베풀 때 그들이 아쉬운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게 되면 그런 원칙이 있어요.

근데 하나님이 아니고 가짜 하나님, 우상적인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만 주시기로 협약이 되어 있고 이렇게 흥정이 되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아쉬운 것, 그래서 풍족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기도가 사그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답답하고 흔히 교회에서 하는 희한한 용어, 컬컬하다는 것, 참 오랜만에 써봅니다만. 심령이 답답하고 컬컬하다는 것,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하나님은 꼭 우상적 하나님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행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주십니다. 원치 않는 것을 주시는 그 이유가 뭐냐, 이제 오늘 핵심에 들어갑니다. 오늘 기적의 내용이 뭐냐, 분류작업이에요. 분류작업에 들어갑니다. 분류작업과 관련된 성경이 오늘 두 차례 나옵니다. 첫 번째 차례는 여기 2절에 보면 “강한 손과 펴신 팔과” 3절에 “애굽에서” 이래 되어 있어요. 애굽 사람과 애굽에 속하지 말아야 될 사람과 분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들어봤습니다만, 신학교에서 해방신학에 대해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총신에서는 반대하면서, 그들이 이렇게 잘못되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해방신학이라는 것을 많이 언급을 했어요. 남미, 남아메리카에서 있었던 해방신학이라는 것을 총신에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언급하고 조사해 놓은 것이 있어요. 넬라판타지아 노래가 나왔던 미션이라는 영화의 주제가 바로 해방신학에 근거한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분류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느냐, 어렵고 가난하고 힘들고 고아가 과부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분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종교도 문제될 것이 없고 남녀 성별도 관계없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서 어렵기만 하면 도와주시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고 억눌린 자의 하나님이다. 그걸 주장하는 것이 해방신학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해방신학자들이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 이상적인 사회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거예요. 사회주의.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받는 거예요. 능력대로 일하되 분배는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되는 사회. 이게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레닌이 혁명할 때 혁명의 구호였어요. 1948년 파리에서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선언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주장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해방신학이라는 거예요.

이런 해방신학을 총신에서는 주의해야 한다. 그거 마귀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아무 근거도 없이 목회하는 목회자한테 먹혀드는 방법은, 소위 그들은 대중들한테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게 용어도 달라요. 대중이 아니고 민중이에요. 민중들에게 먹혀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채워주는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광주 사태 때 그들이 찾던, 천주교 신부들이 외쳤던 그 하나님은 바로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하나님이에요.

제가 왜 해방신학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성경 출애굽에 보면 그들이 원했던, 히브리인들이 힘들고 어렵게 살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해방된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요구했던 그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아니고 더불어 잘 사는 하나님이에요.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왜냐하면 애굽이라는 나라 외에 다른 나라를 그들은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이 책 1강에 그게 나와요. 출애굽이 되려면 애굽 말고 다른 나라가 있을 때는 나가겠다는 것은 마음에 드는데, 지금 애굽 말고 다른 나라가 없어요. 그 당시에 애굽이 제일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할 일이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남들처럼 사람대우 받으면서 그냥 사는 것, 같이 파묻혀서, 같이 한데 어울려서 그냥 사이좋게 사는 것, 그거에요. 그들 히브리인들이 그걸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찾아왔던 하나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아니고 나가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디로요? 가보면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버티겠죠. 못나간다. 모세, 아론아! 니들이나 나가라. 못나간다. 그럴 때 바로 이적과 기사가 투입됩니다.

안 나겠다는 사람을 기어이 내보내는 것, 뒤에서 떠밀 듯이 밀어내는 거예요. 니가 있을 곳은 내가 마련했으니 여기에 죽치고 앉아있지 말고 그냥 나가자는 거죠. 나가자. 이 출애굽을 오늘날 하나님이 동일한 기적으로 역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괴로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기도하는 내용을 한번 살펴보세요.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산 것이 30년, 40년인데 나가더라도 내 자존심은 챙기고, 위신은 챙기고, 내 값어치는 하고 난 뒤에 나가게 해 달라. 나가더라도 그렇게 나가게 해 달라. 또는 인정해 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 교인들이 가장 기도 많이 할 때가 언제냐 하면, 목사나 교회 문제 생겨서 패 갈라질 때 가장 기도를 많이 합니다. 목사 패 따로 있고, 그리고 장로 패 따로 있어요. 목사가 무슨 문제가 있든지 돈을 횡령했다고 하면 장로 쪽에서는 목사를 갈아치우려고 하는데, 목사가 손써가지고 돈 되는 유력한 집사들을 자기 편 만들어서 투표로 하자고 이렇게 나올 때, 평소에 전혀 교회 나오지도 않고 관심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갑자기 새벽기도에 나와서 주여! 주여! 주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주여! 촛대를 옮기지 마옵소서. 뭐 요한계시록은 어디서 본적이 있어가지고. 양쪽 다 무슨 고함지르기 대회하듯이 싸웁니다. 둘 다 목적은 하나인 거예요. 뭐냐 하면 내가 평생 헌금해서 만든 이 부동산 빼앗기기 싫다는 거예요. 이 부동산. 이 의자 하나. 마이크 하나. 전부 다 내 아까운 돈 내서 한 건데 아무것도 없이 아깝게 맨손으로, 돈도 없이 그냥 나가면 안 되잖아요. 결국은 기도해봤자 타협은 돈 문제로 끝납니다. 얼마 주고 얼마 내보내고 그러면 끝나요. 백날 기도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결국 그 기도는 나가지 않겠다는 기도에요. 안 나겠다는. 얼마나 자기 집착적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그래서 오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응답한 적이 없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 응답으로 이만큼 살아가고 있어요. 주님께서 애굽으로 내보낼 때에, 오늘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이래 되어 있잖아요. 이 점을 아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주셨잖아요. 그 재앙을 주신 것이 왜 재앙이 떨어졌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과 상대해서 재앙이 떨어진 게 아닙니다. 바로 왕하고 상대한 거예요. 바로 왕이 강퍅한 거예요.

강퍅하기 때문에, 강퍅이 끊어질 때까지, 강퍅이 사라질 때까지 재앙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근데 그 강퍅함이, 바로 왕의 교만함이, 자기도 강퍅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강퍅함을 집어넣어 놓고, 집어넣고 때리시고, 집어넣고 때리십니다.그것은 기어이 애굽의 맏아들이 죽을 때까지. 애굽의 맏아들이 죽을 때까지 때리십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맏아들이 죽는다는 말은 모든 애굽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애굽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바로의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바로 왕 입에서 “그래, 그래 나가라. 내가 잘못했다.” 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나올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의 권세 앞에 꽉 붙잡혀 있는 겁니다. 이게 신약시대에 보면 뭐냐 하면 우리가 뭔가 하고 싶어도 우리는 마귀 힘에 꼼짝 못하고 갇혀 있습니다. 마귀의 힘이 뭐냐 하면 경제적인,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이고, 사람은 인기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고, 세상의 모든 노림수는 세상의 부귀영화입니다. 백화점 쇼윈도에 있는 화려한 고급가구, 모든 좋은 옷, 그리고 세상의 넓은 아파트, 좋은 차, 거기에 대한 미련에서 인간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어요. 우리는 이 좋은 것을 놔두고 왜 나갑니까? 이 좋은 것 누리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보람이었는데, 이것을 버려버리면 사는 이유가 없는데요?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바로 왕과 한 통속이 되어 있고 애굽과 완전히 애굽화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계속 재앙을 주시는 것은 가고 싶지도 않는 우리를 강제로 분류시키기 위해서 기적이 주어지는 겁니다. 기적인데, 그러면 애굽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까? 우리는 이렇게 또 협상조로 나와요. 애굽의 이것 포기할 테니까 더 좋은 것 주시렵니까? 주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피를 페인트칠하게 만듭니다. 이게 좋은 거예요. 어린 양의 피를 페인트칠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니가 죽음 그 이후의 세계를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죽어도 영생 얻는, 죽어도 심판받지 않는, 그 세계를 준비해놓고, 죽기를 무서워서 벌벌 떠는 이 세상보다 그 세상이 훨씬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맨날 죽으면 안 된대. 그런 쪽으로 우리가 심성이 변화됐는데, 어린 양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과 만날게 함으로써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보다 더 최고의 가치는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서더라도 심판받지 않고 지옥가지 않는 것보다 더 좋고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것을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주겠다고 강제로 나오게 하는 겁니다.

애굽이 만만치 않죠. 따라왔죠. 근데 4절에 보면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따를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그들을 덮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화된 사람들을 여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끝까지 추적하는데 하나님께서 홍해를 통해서 이쪽은 천국 갈 자이고 이쪽은 지옥 갈 자라고 분명히 분류하는 작업을 기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러면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기적은 뭐냐,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티내게 투입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듣기에는 굉장히 알기 쉽죠? 참 쉬워라. 근데 쉬운지 안 쉬운지 제가 예를 들겠으니까 속으로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어떤 사람이 말기 암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끝났습니다. 기도원에 갑니다. 혼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기 싫습니다. 살게 해주세요. 금식기도한지 한 달 만에 병이 나았습니다. 자, 병이 나은 것이 기적일까요? 기적이 아닐까요? 라는 문제. 이 답변하기 전에 아까 쉽다는 것을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투입하는 기적은 천국 갈 사람이냐, 지옥 갈 사람이냐를 분류하는데 투입되는 기적만 기적이에요. 요거 방정식인데, 이제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말기 암인데 기도해서 나았습니다. 이게 기적일까요? 기적 아닐까요? 기적이냐 기적 아니냐는 말기 암 가지고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속에서 튀어나오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여, 빨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좋은데, 내가 미쳤다고 더 살겠다고 암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내가 정말 주님의 십자가 피를, 내 암이나 내가 몇 년 더 사는데 이걸 소모 한 것을 용서해주옵소서. 내가 그동안 몰랐던, 암 걸려서 알게 된 내 죄입니다.” 라고 고백 나온다면 천국 가는 사람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병 나은 것 가지고 간증이나 해서 푼돈이나 챙겨야지.” 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자, 응용문제 했으니까 두 번째 심화문제 하나 들어갑니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만 숟가락 두 개가 툭 떨어졌어요. 바닥을 다시 청소해야 돼요. 짜증납니다. 무엇이 기적이냐, 설거지를 통해서 내가 평소에 무엇이나 내 위주로 되어야 기분 좋다는 내 본성을 드러낼 때, 죄를 밝혀주는 것, 이게 신약적인 기적입니다. 구약은 홍해까지 동원시키지만 신약은 그거까지 동원할 필요 없어요. 신약은 뭐냐, 마태복음 16장에 주님께서 하신 기적은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한다. 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다. 이 천기를 분별하는 것, 이것조차도 기적에 해당됩니다. 3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이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이 바닥에 죽음을 집어넣고, 낯선 죽음의 의미가 뭐냐를 자기와 견주어서, 자기와 연결시켜서 다시 한 번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적, 요거 성령이 주는 기적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우연이 아니고 무슨 이유가 있다. 의미가 있다. 무슨 의미냐, 예수님 세계에, 예수님 나라에 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된, 최고로 준비된 보물인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라라면 이 세상은 뭐냐, 애굽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돌이켜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기적이에요. 분류 작업입니다.

자,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돌아봅시다. 그러면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면 다 구원 받았냐, 분류 작업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또 너희가 이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6절,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라고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구원받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분류 작업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내부를 또 분류해버립니다.

이게 민수기 16장 1절에서 3절에 나온 말씀인데, 다단과 아비람, 고라 자손이죠. 그들이 주동이 되어서 당을 짓고 그들이 하는 말이 이겁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모세야 니가 뭔데 우리 앞에 대장질 하느냐?”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상당히 민주적이고 정당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분류시켜버립니다. 5절,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이 나왔는데 다 구원받은 사람이냐? 다시 말하면 교회 등록했는데 다 구원받은 사람이냐? 이 말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교회조직에서는 뭐 이렇게 장로, 집사, 권사 하거든요. 며칠 전에 장로님께서 물었어요. “집사 새로 발표해야 됩니까?” 저한테 묻길래, 그때 전화로 이야기했습니까? 직접이야기 했습니까? 직접이야기 했어요. 권사나 장로는 개인의 자기 의사가 반영되어 있어요. 왜? 투표로 하기 때문에. 그런데 집사는, 특히 서리집사 같은 경우는 본인의 의사도, 본인의 직분에 대해서 본인의 의사가 직접 반영 안 되고 일방적으로 갑질 당한 셈이 돼버려요. 그래서 집사는 나이 들었으면 그냥 불러주시고, 나보고 집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 그냥 안 부르면 되고, 뭐 집사라고 하니까 듣기 좋다고 하면 불러주면 되고. 그래서 올해 우리 교회는 집사 임용되는 것 없게 합시다. 그렇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부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머리고 다른 사람이 머리 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목사가 머리자리에 가면 안 돼요. 근데 신약시대에는 그 빈자리가 하늘에서 주어지는데, 구약시대에는, 지금 모세에게 주어졌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니나 내나 똑같은 사람인데 왜 니가 대장질 하냐고 반발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분류 작업해버립니다. 니 눈에는 모세가 그냥 니하고 똑같은 인간으로 보이냐? 이거 구약 모세 이 대목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기름부음 받은 종을 함부로 건드리면 벌 받는다는 공식으로 들어가면 큰일 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모세는 뭘 본 사람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 없는, 정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할 지경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미리 알아챈 사람이에요.

다만 하나님께서 쓰시니까 쓰일 뿐이지. 독자적으로 하나님하고 이바구하고 뭐 할 입장이 못돼요. 마치 미리 땡긴 예수님처럼. 근데 다른 사람들은 같은 인간을 봐요. 같은 사람으로 본다고요. 아까 점심시간에 10대죠. 우리 청년들이 평소에 제 설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다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이제 언급을 해요. 오늘 설교 참 좋았습니다. 그 유아인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니나 내나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하나님을 직접 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있으면, 정말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다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내놓을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그리스도만 해야 됩니다. 이 말은 니와 내가 그냥 만나면 안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야 돼요.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기적이고 계시입니다. 설거지를 하던 뭘 하든 간에 주께서 또 이렇게 떨어뜨리게 하셨구나! 주께서 또 청소하게 하셨구나!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함께 있는 것, 그렇게 느낄 때, 그 사람은 천국으로 분류된, 하나님의 계속된 기적이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빼버리고 그저 인간 대 인간이 모이는 교회 집단이 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목사 말 들어야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그런 마귀적인 것이 나타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도 누구에게 갑질 할 수 없고 주님만 구세주인 것을, 아무도 십자가 진 적 없고 주님만 지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천국 사람으로 분류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