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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64강-약속의 땅(신11;8-12) 1601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 23. 08:07
2016-01-03 15:04:55조회 : 137         
   약속의 땅 160103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약속의 땅(신명기 11:8-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MUeRWrm9oE, Hit:15

 이근호 16-01-03 15:46 
약속의 땅

2016년 1월 3일                            본문 말씀: 신명기 11:8-12

(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11: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1: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법이란 사람이 단독적으로 있을 때에도 수행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내부에 이미 법적인 장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법에 대해서는 법을 행사하는 본인의 결과를 본인들이 판정이 가능하다고 믿게 됩니다. 그것은 본인이 그 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해했다는 단정 하에 의식하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명령이란, 명령주시는 분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새롭게 짜게 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내려가기 때문에, 기존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그 취지에 대해서 항상 불일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이런 뜻대로 주신 명령이 맞지요?”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실천해봤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알았느냐? 그런 취지가 아니었던 것을 말이야”하고 나오십니다.

즉 명령은 명령을 나름대로 수행했다고 난 그 후에, 새삼스럽게 취지가 밝혀지면서 기존의 뜻과 차이남을 알게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미리 할 재간이 없습니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내세운 모든 행위가 어설프고 무리한 일로 드러나면서 새롭게 뜻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있습니다. 이 관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멈춰지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눈’이 항상 머리 위에 떠있게 되면 부담을 안 느끼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늘 감시당하고 관찰받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 선악과 따먹고 자존적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퍽 부담되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과 헤어지고 싶어합니다. 숨을만한 곳이 있으면 숨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모든 것을 예측하시고 판단하시니, 인간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주눅들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늘 계시다는 의식에 대해서 법적으로 대처합니다. 즉 명령을 법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명령을 법 형식으로 변환하는 것만이 숨통이 터이기 때문입니다. 즉 준수할 수 있는 규칙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래서 그 규칙만 벗어나면 거기에 자신의 소박한 자유가 따로 마련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 예배 시간은 몇 분전에 와서 마음준비해야 합니까?”라고 하면 목사는 정해진 시간을 제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행할 수 있는 법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전 30분 전에 오셔서 부교역자가 인도하는 찬양에 참여하여 미리 예배 드릴 마음밭을 가꾸어놓아야 합니다”라는 종류를 답변 말입니다.

그러면 교인은 10시 30분에 참석으로 것으로 이미 예배로 인한 명령의 일부는 준수하고 있다고 자부하게 되면 이 자부심으로 인해 다소나마 정당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즉 법이란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극한의 순수한 선을 대신해서 본인을 선하고 의로운 자라고 자처할 만한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정당한 위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된 것처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는 사무엘상 13장에서도 나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던 시기에 블레셋 군대가 턱까지 치고 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의 동요하고 있는 다급한 상황인데 전쟁에 나서기 전에 드릴 제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아직 오지 않아서 못드리고 있습니다.

도저히 참다 못해 사울왕이 본인이 제사를 집전합니다. 그 제사가 마칠 때 마침 선지자 사무엘이 나타나서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전해줍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13절-14절)

사울왕의 입장에서 매일 억울한 일을 당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사울에게 법을 준 것이 아니라 명령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무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이처럼 법이란 본인들을 정당화하고 잘나게 하고 의롭게 하는 용도로 동원되지만 명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패한 자로 돌려세우고, 죄인으로 삼아버립니다. 명령은 주변 상황과 그 대상의 변화를 유발하십니다. 바뀌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태도와 의식을 가지고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기존의 사상과 사고방식이 왜 실패적인 것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사사기 19장에 보면, 레위인의 첩이 밤새도록 윤간당해서 새벽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레위인을 그것을 12토막 내어 전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다 택배로 보내었습니다. 이는 공동의 책임이라는 점을 일깨어주기 위함입니다.

토막 시체를 받아본 지파들은 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도저히 내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의 실현 차원에서 연합군을 조성해서, 죄인을 싸고 도는 베나민 지파의 징벌하기로 나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어디까지 명령적 차원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실현을 행사하는 본인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기정사실화 하기 위한 전쟁이 되기 때문입니다. 레위지파의 아픔은 과연 자신들의 아픔과 같은 것임을 알기까지 그들은 전쟁에서 대실패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분기탱천으로 인하여 하나의 지파가 사라져버리게 되었음을 알 때, 정작 이스라엘 구원은 미미한 이방여인 룻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진정 명령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는 자기 내부에 하나님의 주신 희생의 피로서 서로가 꿰어져야 하고 관통되어야 함을 이해할 경우 뿐입니다. 이를 위하여 가장 소중하다는 것에 구멍이 나야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의 인생이 구멍이 난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1-03 22:24 
64강-신 11장 8-12절(약속의 땅)1601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1장 8-12절입니다. 구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보통 어떤 땅에 이사를 가려면요, 지금 이 땅에서 하는 행세나 삶의 태도가 그대로 유지가 된 상태에서 그쪽에 가더라도 똑같이 살 수 있는 그런 땅에 보통 가는 거거든요. 이사하면서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면 그건 골치 아픈 겁니다. 안 바뀌어도 그냥 장소만 이동해서 살 수 있는 곳, 그냥 지금 살고 있는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충분하게 살 수 있는 그 곳,세상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타나신 이 민족은, 히브리 이스라엘 민족은 그냥 땅만 가서는 안 되고, 땅에 가는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인간 자체가 모든 게 달라져야 함을 하나의 조건으로 걸은 겁니다. 보통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좋은 땅이다, 그러면 지금 사는 삶의 태도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서, 땅만 좋으면 얼마든지 기거할 수 있는데, 그 땅은 희한한 땅이 되어서 하나님이 눈이 그 위에 항상 있고 하늘과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해서 비가 내리는 땅에 그들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냥 비만 날름 받고, “아이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앞으로는 우리 식대로 하자는 이것이 용납이 안 되는 땅이에요.

그거 누가 가고 싶겠어요? 참 힘들죠. 애굽에 있을 때는 물만 주고 뭔가 이렇게 조건만 되면 그다음부터는 본인이 노동해서 얼마든지 생산해낼 수 있는 땅이 애굽의 땅이라면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뭐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서 흡족한 결실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선재해서 먼저 전제되어 있는 것이 뭔가 하면, 주의 명령을 지킬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소득을 주고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땅에다 좋은 비를 내려도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고 땅도 이게 썩은 땅인지 좋은 땅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전혀 소산물을 내지 않고 오히려 엉겅퀴와 잡초와 가시만 들끓는 땅이 된다면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이게 산다는 보장이 없는 땅이 되어 버립니다.

애굽에서는 내가 하기만 하면 생존은 되는 땅인데, 약속의 땅에는 생존을 주는 땅이 아니고 생명을 주는 땅이거든요. 생존은 나만 있으면 돼요.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과 나 사이가 정상적인 관계가 될 때만 생명이 주어지는 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교회 나와서 천국에 간다고 했을 때 거의 백퍼센트 천국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오해 안 한다면 “나 이제 천국 갈래.” 라고 할 게 아니고 “하나님 내가 여기 지금 사는 곳이 지옥 맞군요.” 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그게 천국이 천국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아이고, 지금 사는 식대로 또 거기 가서 살지.” 이러면 전혀 지금 감을 못 잡는 거예요. 엉뚱한데 온 겁니다. 교회 온 것이 아니고 절에 온 거예요.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온 것이 아니고 조계사 교단 쪽으로 간 겁니다. 조계종 어떤 교단에 속한 거예요.

조계사 이야기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 집 근처에 절이 하나 있거든요. 아미사라는 절이 하나 있는데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니까 더 난리에요. 크리스마스트리를 해놓고 번쩍번쩍한 불 장식을 해놓고 ‘축 성탄’ 해서 플랜카드 걸고. 정작 우리 교회는 고요하고 어두운 밤인데. 저쪽은 되게 요란해요. 뭐 대승적 배려를 해주는 겁니까? 같은 종교끼리 같이 놀자는 거예요? 도무지 바뀔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여러분 길 가다가 종교가 없는 이웃 사람이든지 교회 안 다니는 사람 보세요. 도무지 바뀔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게 그들과 어느 정도 가다가는 대화가 안 됩니다. 대화 자체가 안돼요. 그 정도로 노는 차원이 너무나 다릅니다. 이 이스라엘은 달라요.

그렇다면, 그게 정말 그렇다면 결국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가라고 하는 말은 솔직히 말해서 “못 간다. 너희는 안 돼.” 이렇게 해야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내가 준비한 땅에 못 가는 거야. 아예 포기해.” 솔직하게 이렇게 나오면 편할 건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게 아니라 “내 명령을 지켜라.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이렇게 뭔가 유인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시는 것이 뭐냐, 그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에 마음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줬는데 받는 사람은 그걸 명령으로 주지 않고 법으로 받아요. 요게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은 분명히 명령을 줬는데 그 사람들은 법으로 이해해서 법으로 지켜버립니다. 그럼 명령과 법의 차이점이 뭐냐, 이게 중요하거든요. 인간 속에는 인간이 감히 범접하거나 감히 지킬 수 없는, 그런 너무나 초월적이고 극한적인 어떤 성스러움 같은 감을 잡고 있어요. 아무리 해도 나중에 못 지키는 너무나 거룩한 그게 있는데, 법을 줘버리면 무엇을 포기하느냐 하면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요 법만 지키면 되지요?” 라고 타협적으로 나와 버리는 겁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해버리면 교인들은 멍해요. 뭐, 뭐, 뭐 어쩌라고? 십자가 내가 다 아는데? 그게 다야? 그런데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하지 않고 법을 이야기해버리면 좋은 겁니다. “12월 31일 자정에는 예배참석하시고.~” “예. 참석하죠.” “꼭 뭘~하시고~” “뭘~하시고~” “예. 하죠.” “예, 예. 하죠.” 이게 법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는 정당한 위법이 되어버려요. 이게. “지켰잖아요?” 지킨 그것이 위반인줄 모르고 법으로 된 것을 지켰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거 맞죠? 선한 사람 맞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뱃살을 빼기 위해서는 정신을 이렇게 하고 운동을 이렇게 하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앞으로 그런 약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만, 요거 알약 하루에 두 알만 먹으면 아무리 밥을 먹고 뭘 먹어도 일주일만 지나면 뱃살이 빠집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얼마나 간단해요. 간단한 것을 원하는 거예요. 지금 내 자체가 안 달라져도 갈 수 있는 천국, 그걸 달라는 거죠. 사람들은. 그걸 원하고 있고. 그러니까 명령을 주시지 마시고 법으로 이렇게 캡슐을 만들어서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줬습니다. 이게 명령이거든요. 근데 법으로 이해해요. 십계명이라는 법으로 이해합니다.

십계명이 열 개니까 사람들이 계산하는 거예요. 열 개니까 1월 달에는 두 개 지키고 나머지기는 7월 달에 지키고 하는 이런 식으로 법은 자기 마음대로 조정이 되어 버립니다. 야고보서에 이래 되어 있어요. “한 가지 법을 어기면 다른 모든 법을 다 어기느니라” 이 야고보서에 숨어 있는 진리에 대해서 사람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명령은 뭐냐, 법은 우리가 지킴으로써 자기 정당화, 자기 수단껏 사용한 것이 법이라면, 명령은 뭐냐, 법을 지키려고 하는 너 자체를 스스로 변화시키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오늘이 2016년 1월 3일이잖아요. 1월 3일 날 하나님의 법을 지킨 것이 다음 1월 10일 날 쯤에 보면 그게 안 지킨 것으로 벌써 달라져 있는 것, 그게 1월 3일 날 주신 명령입니다.

명령을 주게 되면 명령이 끝나고 난 뒤에 내가 위반자라는 것이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조치가 명령입니다. 근데 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내가 더 정당하다는 것으로 정리되는 것이 법입니다. 이제 법과 명령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위반자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명령이고 내가 잘난 존재로 드러나는 것은 법이에요. 근데 인간은 자진해서 자기가 못난 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잘나고 싶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명령은 우리에게 주어지면서 새로운 상황을 줘버립니다.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다시 하게 되면 사울 왕이 전쟁할 때 먼저 제사를 드려야 한다. 제사를 드려서 이번 전쟁 이길 겁니까? 질 겁니까? 물어야 되고 응답받은 대로 정면 공격할까요? 아니면 뒤에 숨어서 기습 공격할까요? 이런 것도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전쟁에서 승리하거든요. 이게 법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하기 전에 기다렸습니다.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를 드릴 선지자가 오지를 않는 거예요. 법을 지켜야 전쟁을 하는데, 오지를 않고, 적들은 지금 코앞까지 왔는데, 제사드릴 선지자가 약속 시간이 넘었는데도 안 오니까 본인이 제사를 드렸어요. 딱 드리고 난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 선지자가 딱 나타납니다. “왜 하나님 명령을 어겼습니까?” 그러니까 사울이 하는 말이 “저 법 지켰는데요? 법대로 했는데요?” 법대로 하면 안 되죠. 명령으로 해야 해요.

그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상황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든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가 죄인이고 부족하고 얼마나 고집스럽고 나의 영광만 시도하면서 지 잘난체하는 것을 죄로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어진 상황인데, 우리는 자기 잘난 맛에 살기 위해서 그걸 법으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완벽에 완벽을.....,“예배시간이 열한시인데 몇 분 전까지 오면 됩니까?” 이런 거요. 전에 있던 목사들은 법을 줬거든요. 열한시 같으면 열시 반에 와서 삼십분 동안 찬양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 다음에 하박국에 있는 말씀, 성전에서는 잠잠할지어다 하면 파이프오르간으로 밑에 깔리고..그러면 벌써부터 다 자기 시작해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삼십 분 전에 왔잖아요?” 이래되는 거예요. 이게 스케줄이 되어 버린 거예요. 스케줄은 구원해주시는 분이 짜지 본인이 짜는 것이 아니거든요.

본인 스케줄 아무리 짜봐야 본인이 지킬 수 있는 스케줄만 짜기 때문에 결국은 결과가 뭐냐 하면 “주님 저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라는 지 잘난체하는 결과만 나올 뿐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약속의 땅에 가야될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각도가 바뀌면서 지 잘났다 하는 그것이 천국인양 엉뚱한 천국으로 방향이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명령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대신’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대구신학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명령 안에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면서 더불어서 깊이 내려간 죄인에 대해서 더 깊이 내려간 하나님의 은혜. 깊이 내려가면 갈수록 더 많은 은혜로서 건져주시는 은혜가 명령을 위반한 그 현장에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 예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찬찬히 시간이 가더라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일단 그 본문을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28절,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시체 나옵니다. 29절,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칼 나옵니다. 마디를 찍습니다. 시체 나오고, 그 시체가 누군지 보니까 자기 아내의 시체였고, 그 시체를 그냥 매장하지 않고, 칼을 동원해서 열 두 토막을 내서 자기 냉장고에 보관한 것이 아니고, 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한 토막씩 택배로 보내는 사건. 열 두 토막 살인사건, 열 두 토막 택배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내용하고 명령과 법하고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열 두 지파의 이스라엘이 열 한 지파가 돼버립니다. 베냐민지파가 날라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열 세 지파라는 것을 알아두시고. 열 두 지파를 깔아놓고 그 위에 열 두 지파에 보편적으로 다 속해 있는 초월적인 지파, 레위지파가 딱 위에 뜹니다. 레위지파가 일종의 이스라엘을 운영하는 CD입니다. 컴퓨터에 들어가는 CD. 정보가 담겨있는 CD를 넣으면 딱 컴퓨터 화면에 뜨잖아요. 그거 뜨듯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파일을 담아놓은 그 CD를 레위지파가 갖고 있습니다.

그 CD는 뭐냐 하면 열 두 지파가 약속의 땅에 살고, 그 위에 오늘 본문 말씀처럼 여호와의 눈이 이스라엘 위에 있거든요. 그럼 여호와의 눈과 열 두 지파 사이에 존재하는 지파가 초월적인 지파, 레위지파에요. 근데 레위지파 첩이 베냐민지파에 의해서 강간을 당해서, 얼마나 강간을 당했는지 아내가 죽고 말았어요. 죽었어요. 레위지파의 아내를 죽인 것은 레위지파를 죽인 겁니다. 베냐민지파 불량자들이 자기를 건지고 구원할 초월적인 지파에 속한 레위지파의 아내를 건드린 거예요. 그냥 건드린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죽일 정도로 간음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은 열 두 지파를 묶는 일이니까 이것이 단순히 레위지파 하나만 잘못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열 두 지파 전체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열 두 덩어리를 택배로 다 보내므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갖고 있는 땅이 이 초월적인 레위지파 덕분이냐? 아니면 너희들이 땅을 노동하고 개간한 덕분이냐?”를 다시 한 번 추궁하고 묻고자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눈이 여러분 위에 있느냐? 아니면 여러분 위에 여호와의 눈이 없이 내 땅이다, 내 부동산이다, 여기면서 그냥 농사만 짓고 밥이나 먹고 살면 그게 과연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맞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약속의 백성 맞느냐를 묻는 겁니다.

베냐민지파의 불량자들이 기브아를 지나가는 레위지파의 아내를 윤간했을 때 그들은 그냥 자기들의 욕정을 퍼붓는 것뿐이에요. 퍼부은 것뿐인데, 이게 레위지파로만 끝날 그런 문제냐, 아니면 다른 지파 전체에게도 문제가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 열 두 지파에게 한 덩이씩 택배로 다 보낸 거예요. 보내니까 베냐민지파 빼놓고, 베냐민지파는 팔이 안으로 굽으니까 젊은 청년들이 그럴 수도 있다면서 감싸지만, 나머지기 열 한 지파는 지금 화가 난 거예요.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정의를 구현해야 된다는 거예요. 베냐민지파는 내부자고발도 없었고, 그냥 저그들 감싸기 바빴어요.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열 한 지파가 정의를 구현하자는 거예요. 정의구현은, 정의구현만큼 지저분한 이야기도 없어요. 가장 지저분한 이야기는 정의구현입니다. 이 땅에 정의구현은 없습니다.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법을 동원시키겠다는 겁니다. 법을 동원하게 되면 정의를 실천하는 쪽은 정의롭게 되고, 정의 실천에 반대되는 쪽은 이게 악인이 돼버려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다는 말씀이 날아가 버려요. 복음이 날아가 버린다고요. 근데 사람은 복음이 듣기 좋은 것이 아니고 복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정의로운 편에 섰다는 것, 내가 정의실천에 앞장섰다는 그걸 원하는 겁니다.

저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이 더 확실하게 자꾸 느껴져요. 정신대회담을 보고. 이 세상이 지옥 맞다는 겁니다. 일본이 사과를 그리해서는 안 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어요. 열 한 지파가 정의감에 충만해가지고 우리 이스라엘에 그런 지파가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정의의 사도가 되어 앞장서서 그 베냐민지파가 싸고도는 그 불량배와 싸고도는 그 베냐민지파를 우리가 정의의 힘으로 단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정의를 회복시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서다가 그 열 한 지파 왕창 당했습니다. 이게 뭐냐, 명령과 법을 혼동해서 그래요. 명령과 법을 혼동해서 그렇습니다. 베냐민지파가 날아간 게 아닙니다. 그들은 레위지파가 날라 간 것을 감 잡아야 해요. 레위지파가. 내가 정의를 외칠 때, 이 십자가는 날아가 버려요. 교회가 소금과 빛을 외칠 때 그 교회는 이단입니다. 어느 누구도 복수할 권한 없고 복수할 자격 없습니다. 복수는 오직 하나님만 하시고 심판은 오직 내게 있느니라. 로마서 15장 말씀.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만 하시지 어느 누구도 심판할 자격 없어요. 평소에 내 것, 내 소유,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이 손해 봤을 때, 뭔가 피해봤을 때,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으로 복수심이 발현됩니다. “니가 뭔데 내 인생 조지느냐? 니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순간 그 사람은 명령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 안에 세상을 법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명령으로 구원받았지 법으로 구원받은 사람 아니에요. 주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든 지파를 패배자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전체를 날마다 실패의 이스라엘로 바꿔주시는 그 명령 안에 비로소 거기서 준비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그 긍휼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천국에 가는 겁니다. 명령을 법으로 바꿔가지고 그 법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님! 왜 그래야 됩니까?”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천국이 너무 이상한 동네라서 그래요. 천국이 우리가 기대한 그 동네 아니에요. 천국에는 내가 가진 거 다 내놓는 동네에요. 내 장기, 달란트고, 전부 다 그 앞에서 무장해제당하는 겁니다. 어떤 것도.

방금 열 두 토막 살인사건이 사사기거든요. 사사기에 있는 이 개판 같은 이스라엘을 건진 것은 어디서 건졌는가, 그 다음에 나오는 룻기에서, 이방 여인, 요새 말로 하면 이슬람, 히잡 쓰고 있는 그 아줌마에요. 룻이 이스라엘을 살려요. 엉뚱한 외부인이 와서 자칭 성도라고 하는 자들을 건져내버립니다. 왜? 룻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실패한 것이 마땅함을 아는 유일한 여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사람을 통해서 건지는 겁니다. 어떻게? 엽전에 보면 구멍이 있죠. 구멍에 노끈이 지나갑니다. 노끈꾸러미가 레위지파의 완성자, 레위지파 언약의 예수님 메시아에요. 그 노끈에 꿰인 사람만 천국에 가서 그 상태로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노끈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여기 엽전이 있으면 엽전 중간에 노끈이 지나가고 노끈에 묶인 자들의 집합.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곳에 올 수 없었습니다.” 라는 것을 오기 전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살면서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지려면 우리 안에 십자가 피가 지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되고, 그것이 우리의 변두리가 아니고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중앙을 차지해야 돼요. 근데 지금 우리 중앙을 뭐가 차지하고 있느냐 하면, ‘나는 결코 의롭다. 나는 양심적으로 살아왔다.’ 자기 의가 그 하수구 구멍을 막아놨어요. 십자가가 지나가야 할 통로를 ‘역시 나는 잘났어. 나는 성경에 관심 있어. 나는 성도 맞아.’ 이런 식으로 자기 잘남으로 꽉차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명령을 법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시키는 대로 다했고, 교회가 하는 대로 하는 모범적인 사람이고 이게 있기 때문에 하수구 뚫듯이 뻥 뚫어버리는 겁니다.

그 뚫을 때 어떻게 뚫습니까?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 기존에 알고 있는 법으로 대체를 해요. 주님이여, 헌금도 제대로 하고 기도도 하고 이렇게 했으니까 이번 어려운 일이 후딱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는데, 후딱은 커녕 곱빼기로 찾아오죠. 그렇게 될 때, 아하 내가 지금 엉뚱한 상상과 망상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구나! 날마다 망상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구나! 잘 될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왜 자꾸 내가 잘 돼야 된다는 그것을 또 2016년도에 희망으로 삼는지.....,

희망은 실패한 곳에서, 주님이 준비한 희망과 천국은 내가 실패한 그 현장에서 비로소 발견됩니다.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명령을 주신 겁니다. 내가 지킬 수 없는 것,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것,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우리를 새사람으로 바꾸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가 약속과 연계해서, 지금 그 인간 가지고는 못 들어가니까, 바꾸어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능한 자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공짜로 주시는 것, 이게 옛날 이스라엘부터 쭉 역사 내부에서 노끈이 흐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 노끈이 신약에서 십자가 피 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 계신데, 우리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저 친하게 지내면 되고 교제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주께서 날마다 우리 속에 꽉 차 있는 자기 잘난 것을 드릴로 뚫는 작업을 하시는 그 고마운 일을 올해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