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강-신 10장 20-22절(하나님의 이름)1512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0장 20-22절입니다. 구약성경 279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를 끄집어내라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니까 눈에 보이는 우리가 있고 그 다음에 눈에 보일 때에 이름을 지어서 그 보이는 사람을 이름으로 불러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 보이지 않는 분에게 이름 붙인다는 것은 어떤 이름을 붙여도 그것은 허사가 되는 겁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은 강아지라도 이름을 붙이면, 강아지라도 처음에 붙인 이름을 자꾸 부르게 되면 쪼르르 주인에게 달려오게 되어 있어요.
근데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이라고, 쉽다 싶어서 불러봤자 쪼르르 달려오지 않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부르는 자와 이름을 붙인 자와 연결 고리가 무사히 성립이 되어야 해요. 안정되게 성립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불안정해요. 불안정한 이름을 불러봤자 이게 구원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어려우니까 그것 빼고 성경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빼고 성경 보게 되면, 그렇게 되면 뭐냐 하면 성경이라 하는 것은 성경을 보는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 명언 책, 또는 유교의 공자 맹자 책, 불교의 법전밖에 안돼요.
주일학교 애들한테 이렇게 설교했거든요. 사람들한테 십계명을 딱 주니까, 십계명을 이스라엘한테 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계명을 지키면 구원되는 줄 알았어요. 이게 바로 인간의 허점인 것을.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준 것은 바로 우리 본색이 기껏 그거밖에 안 되는 거예요. 십계명 주고 여러 가지 계명을 주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타협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몇 퍼센트 지키면 합격이고, 몇 퍼센트 못 지키면 떨어지고 불합격이고,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마태복음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지키겠다고 나대는,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되는 인간의 그 죄를 아버지여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거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자들도 주님을 이해 못하고 떠나고 말았죠. 그러나 성령이 오니까 비로소 자기 주제파악이 된 겁니다. ‘아, 못 지키는 존재로 태어난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 두꺼운 성경 말씀을 줬는데, 우리는 철딱서니가 없어가지고 이것을 지켜서 내 욕심을 보장받겠다고, 행운을 따내겠다고 봤던 이것이 바로 내가 몰랐던 죄였구나!’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의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 하나님이 원하던 것은 상한심령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 줄 몰랐죠. 광주 강의하면서 제가 귤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동영상 보면 나옵니다. 현장에서 귤을 하나 깠어요. 까니까 그 안에 물컹물컹한 오렌지조직이 나왔죠. 상한 심령입니다. 이런 상한 심령을 그럴싸한 껍데기로 이렇게 포장을 한 거죠. 주님께서 이걸 벗기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 못 벗기고 성령이 오셔서 껍질을 벗기니까 거기서 물컹한 상한 심령이 나오게 된 겁니다.
상한 심령에서 나왔을 때 주님께서는 상한 심령부터 이미 작업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을 우리가 되게 하시는 그 작업이 구원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제가 함부로 말을 안 하는데 오늘 이야기 하겠어요. 본인이 아무리 해도 “주여, 몇 퍼센트 지키면 구원받습니까?” 요따구 식으로 사고방식이 돌아가는 것은, 이거는 상했어요. 이거는 상한 심령입니다. 그거 있으면 십자가 질 필요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면 내가 십자가지지 않았다고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옵니다.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죠. 사람들은 자꾸 지키려고 덤벼드니까.
지키지 말라고 하는데, 이거는 성경이 있으니까 자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키지 말라고 하니까 본인이 더 걱정이 돼요. “아무것도 안 하고 무슨 수로 구원받습니까?” 그럼 주님이 “뭐 해서 구원되는 줄 아나?” 한다고 구원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한다고.....,신학자들의 책을 보세요. 특징이 있어요. 뭐냐, 그들은 마귀를 말 안 합니다. 이게 보편적 특징이에요. 악마에 대해서 말을 안 해요.
왜냐하면 본인이 악마 편에 서서 그런 책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을 하기가 거북해서 그래요. 내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악마 짓이고, 신학을 한다는 것이 악마 짓이고, 노래하는 사람은 그 노래하는 것이 악마 짓이고, 그게 다 죄가 돼요. 목회하고 설교하고 강의하고 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신학자들은 그걸 받아들인다는 것이 참 힘들고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목회하기 싫어서 외국으로 내뺐거든요. 도망쳐서 학위 받아서 취직하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거기서 무슨 복음이 나오겠어요?
하나님의 이름은 이사야에서 그래서 감추어진 이름이다. 철저하게 감추어진 상태에서 능력만 바깥으로 삐져나와서 그 능력에 대해서 인간들은 강력하게 저지하고 저항하고 반항하는 그 충돌의 자리, 그 충돌의 자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실제로 일한다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애굽 땅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 할 때, “니가 신의 이름을 알려 주면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호응할게.”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애굽 땅부터 시작해요. 애굽 땅에서.
여기 22절에 보면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부터 시작돼요. 따라서 “애굽에서 니가 알아서 기어 나왔느냐? 누가 건져주었더냐?” 묻고 있는 거예요. “너가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던 너희들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을 벌려놓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인생길을 왜 이렇게 가게 하지? 아! 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의 의도가 내 의도를 능가했구나!’ 이게 하나님의 이름이 하신 몫입니다.
이걸 간단한 문장으로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라고 합니다.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 결과가 나왔는데 이 결과를 도출할 원인을 찾을 수가 없을 때, 그것은 주의 이름이 개입하신 겁니다. 이것을 간단한 다른 문장으로 하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서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것을 다른 분이 가져가서 나를 의인되게 했다면, 내가 의인되는 그 결과는, 내가 정신 차려서 말씀 지킨 원인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 말입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오려고 아무리 애를 써봐야 절대로 애굽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왜? 같은 패이기 때문이에요. 같은 패인데 누가 누구를 갈라내요? 거기서 뭐 선과 악을 해봐야 소용없는 거죠. 노동조합에서 노동조합 단체를 만들어서 국가에 대항하고 이렇게 시위를 하는데, 그 노동조합의 간부급들을 한번 보세요. 노동의 귀족들이에요.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저는 먼저 오늘 본문의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 내용이 어렵다는 말이죠. 결론부터 먼저 내드리면 요한복음 21장 18절 말씀을 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한다 하면서 흔들고 싶은 것이 우리의 청춘입니다. 나이 뭐 육십 넘었다고 청춘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청춘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바닥을 두드리면서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하면서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요게 성도의 입에서 나올 유일한 고백입니다. 이건 내 인생 내 원대로 안 되었습니다. 절대로 내 원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왜? 다른 외부의 어떤 분이 나를 간섭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은 뭐냐, 내 인생은 그 분 만나서 좌초된 시도들의 잔재, 이게 인생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본 것들이 뭔가 좌초되었어요. 실패로 끝났어요. 실패와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근데 그것을 버리지 마세요. 고것 주님이 개입했던 증거들입니다. 집에 있는 뭐 옛날 도자기 같은 것들이 바싹 깨져버리면 우리는 쓸어 담아서 버리잖아요. 우리 인생 왕창 깨지더라도 그거 버리지 마시고, 그 깨진 그대로 가시기 바랍니다. 괜히 가서 그거 스카치테이프 붙여서 조립하려고 하면 손만 베입니다. 그냥 깨진 상태로 그냥 드리면 주께서는 잘 보관했다고 칭찬이 늘어지십니다. “니가 죽도록 충성했구나. 하늘의 면류관이 있으리라” 이래 되는데, 지가 스카치테이프 갖다 붙이면, “이런 것은 내가 원치 않는다. 이거 손때가 묻었네.”
피로써 흰옷을 입어야 되는데, 피 말고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버리면 주께 원서접수가 안 됩니다. 합격이고 간에 원서접수가 안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 인생에 손대죠. 그래서 주의 이름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아까 낮에 이야기한 것처럼 왕복으로 오면서 우리에게 관여를 합니다. 손대지 말라고. 내가 니가 손을 대는 꼴을 못 보겠다고. 더러워서 못 보겠다. 그냥 손대지 말고, 매일 매일 숙제주면 그 숙제하다 보면 주께서 알아서 니 이름의 역사를 내가 깨트릴 테니까, 그 깨트린 그 작업을 보면서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셨구나!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뭐 다 아는 이야긴데 뭐가 어려운 이야기냐 하시지만, 이게 신명기 10장에 나오는 21절을 보세요.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뭐가 어렵다고 제가 다짐에 다짐을 하고 하느냐 하면 두려운 일을 너에게 행했다는 겁니다. 두려운 일을. 우리 교인들보니까 전혀 두려운 일이 닥치지 않고 있어요. 전혀. 뭐 관절이 아픈 것, 그것도 두려운 일인가요? 전부다 예상하는 일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것이라도 예상이 돼버리면 대비가 되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깜짝 놀랄 일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깜짝 놀랄 일은.....,
갑자기 로또 1등에 당첨된다, 이것은 놀랄 일이거든요. 깜짝 놀랄 일, 가슴이 갑자기 벌렁 내려않는 일, 이런 일이 두려운 일입니다. 근데 뭐가 어렵다고 자꾸 이야기하느냐, 신명기에 나오는 주께서 하신 두려운 일이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매일같이 두려운 일이 반복이 되어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 “애들아! 지금 두려운 일이 갔지?” “언제 두려운 일을 주셨습니까? 하루 종일 내가 예상한 대로 다 되었는데, 무슨 두려운 일이 왔습니까? 우리는 그런 두려운 일을 받은 적이 없네요.” 이렇게 돼버려요.
그래서 저는 두려운 일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매일같이 겪는 두려운 일, 이게 두려운 줄도 모르면서 그냥 넘어가는데, 실은 성경 찾아보면 다 두려운 일이 되는 겁니다. 그거 두려운 일을 설명하면서 제가 선택한, 제가 생각한 구절은 마태복음 25장 이야기입니다. 그 유명하고, 유명하고 묻고 또 묻는 구절,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가 신명기에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애굽 같은 이 세상에서 빼내는, 다른 사람은 못 빼내요. 하나님의 이름이 새롭게 개입해서 애굽 같은 이 세상에서 빼내어서 천국에 넣어주는 그 두려운 일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비유에서 집약된, 달란트 비유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달란트 비유에 어떤 점이 이 두려운 일과 관련되어 있는가, 여기 달란트 비유를 보면 14절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절에,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렇게 시작됩니다. 재능대로, 갖고 있는 재능대로죠. 그러면 그 재능대로는 남에게 없는, 너와 다른, 나만의 재능만 있고, 너만의 재능이 있고, 너만의 재능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서로 고유의 재능의 값으로 친다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재능대로니까, 이 재능에 대해서 본인들이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는 말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말이죠. ‘아, 나 재능 있네.’ 이게 두려운 일이 될 수 없어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재능대로 주께서 달란트를 주었다. 그런데 주인께서 다시 와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기고 한 달란트를 준 사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왜냐, 재주가 다섯 달란트면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재주 있는 사람은 두 달란트, 이거는 내가 알고 있는 재주를 내가 피워서 그만큼 남기는 게 뭐가 그렇게 두렵고 색다른 일이고 누가 개입할 일입니까? 누가 개입할 일이 아니죠. 내가 아는 실력껏 발휘했을 뿐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어떤 점이냐 하면, 이미 알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주의 이름이 개입될 수 없고, 그러면 신명기 10장에서 빠져나갈 이유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구태여 다른 세계로 갈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간다고 쳐봤자 그거는 내 이름을 내가 관리해서 내가 내 식대로 빼낸 식입니다. 그런데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한 달란트 남긴 이 사람에게 핵심이 있었습니다. 진짜 주인의 본심은 우리의 인생에 개입해서 내 이름이 만든, 내 역사가 있는, 내 인생에다 그걸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개입하는 것은 미쳐 내가 알지 못하는 요소가 여기 끼어들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한 달란트 받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돼요.
이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아놓고 하는 말이, 주인은 엄격한 사람이라서 내가 준 것을 내놓으라고 하기 때문에, 왜냐면 자기는 종이고 주인은 따로 있기 때문에, 분명히 달라 할 때 내가 주님 것을 그대로 유지해서 내드리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앞에 있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차이점이 뭐냐를 발견해야 돼요. 차이점이 뭐냐, 달란트 자체가 주인 됨을 현장에서 계속 유지시키는 경우는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동일한 자세로써 임할 경우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우리한테 알려주는 것은 놀라운 팁Tip은, 놀라운 정보는 뭐냐, 주인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제가 여기 있는데 주인이 “여기서 이거해라. 이거해.” 하고 이렇게 주어지는 것. “이제부터 너에게 숙제 줄게. 찬송가 다 외워라.” 이렇게 되는 것 하고. 평소에 찬송가를 다 알고 있는데 주인이 하는 말이 “너 나 올 때까지 찬송가 다 외워라.” 하는 것 하고. 이게 평소에 “찬송가 다 외우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부담이 없어요.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있을 때도 주의 은혜로 살기 때문에. 있을 때도 주의 은혜로 살아요. 내 힘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못 갖기 때문에. 주인이 천천히 오든, 가든 말든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늘 함께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한 달란트는 뭐냐 하면, 끝까지 내 것이고 싶은 거예요. 이것을. 내가 임의로 처분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묻든지, 땅에 묻든지, 남기든지,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나의 이름으로 벌렸던 나의 역사의 본질입니다. 주의 이름은 어떤 일을 하던 주의 은혜로, 주의 주신 은혜로, 내가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촉촉이 녹아 있는 가운데 살아가는 반면에, 처음에는 그게 주인이 있을 때는 표시가 안 나요. 주님이 먼 타국에 가게 되면 이게 들통이 나버린다니까요. 새삼스럽게 뭘 지시를 하게 되면 흉내는 냅니다. 하지만 지시할 때 뭘 한다는 말은 평소에 주인이 있을 때는 나는 그 짓 안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 거예요.
근데 주인이 지시하는 그것이 평소에 내 속에, 평소에 주인이 지시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지시라는 것을 뻔히 안다면 새삼스럽게 뭔가 주를 위해서 뭘 더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뭔가 일을 하겠다는 것은 평소에 나는 주님 같은 것 인정하지 않고, 주님 안 믿는다는 자기 불신성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사세요. 유별 떨지 마시고. 종교 티내지 마시고. 하루하루 일상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나의 이름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리에게 은혜를 퍼붓고 있는 중이에요.
근데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의 은혜의 사항을 따로 상정해요. 내가 찬송하면 천사가 기뻐하고 내가 헌금하면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이거는 평소에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달란트가 은혜를 망치느냐, 결국 인간 손에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인간의 손에서 훼손되고 모독 받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해와 달과 빛과 그리고 공기를 주신 하나님이 왔건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기 직전에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거예요. “바로 너희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너희들은 니 뜻대로만 사는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의 그 본질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너희에게 밀쳐서 나는 죽어 줄게.” 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것은 행하라는 문제가 아니고, 니가 이미 니 속에 발동기처럼 주의 은혜가 행하고 있음을 니가 믿느냐? 하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에요. 행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새삼스럽게 뭐 종교 티내면서 열심, 봉사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사느냐? 묻는 겁니다. 유난 안 떨어도 되지? 라고 묻는 것은 이미 은혜 받고 있지? 라고 묻는 질문이다 이 말이죠.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면 될 것을.
내가 주님 앞에서 뭔가 잘 보이려고 설치는 것은, 바로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인간들이 그만큼 여기에, 우리 속에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현재 우리 속에 이 한 달란트 받은 그러한 성품도 분명히 있는 겁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주의 은혜입니다.” 말하지 말고 내 속에 있는 못돼먹은 한 달란트를 경유하시고 예수님을 다시금 이해해 주실 때, 이게 바로 두렵고 놀라운 일이에요. 왜, 나의 가치와 나의 자존심은 처음부터 주께서 일체 입 다물어라. 너의 존재 가치는 없다고 지적하는 그러한 현상들 속에 이게 인생이라고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게 뒤돌아보니까 두렵고 놀라운 일이었던 겁니다.
신명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인도하면서 두렵고 놀라운 길을 했다고 했을 때에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은 나 하나 살아보자. 밥 먹고 살고자 주여, 큰 능력 주시옵소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말씀을 마치면서 제가 꼭 이 예를 들고 싶어요.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보면 공중에서 줄 타는 광대가 있죠. 광대를 보고 참 재주 있다고 하는데, 딱 까놓고 이야기해봅시다. 줄 그렇게 타지 말고 그냥 걸어가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본질을 따지는 거예요. 교회 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 살면 안 됩니까? 가끔 갓바위에 가서 빌고. 왜 교회 나오는 이런 힘든 일을 합니까? 그냥 집에서 누워서 배부르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러면 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우리 속에 ‘그래, 내 편한 데로 사는 것이 최고다.’ 라는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뭐냐 안 해도 되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게 두렵고 놀라운 일이에요. “내가 상한 심령이었네요. 내가 말씀 안 보니까 나는 뭐 그렇고 그런 인간인 줄 알았는데, 말씀 보니까 이거는 인간도, 개보다 더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은혜 받아놓고 내 능력으로 내 잘남으로 자랑질 하는, 이게 정말 못된 인간이었네요. 진짜 상한 심령이었네요.” 이거 알려고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 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안 해도 될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기 싫으면 그냥 안 해도 돼요. 그냥 걸어가면 돼요. 하지만 가끔씩은, 가끔씩은 주께서 외줄타기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무심코 사는 것이, 이것이 지옥 갈 무섭고 두려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아슬아슬한 인생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 아니었으면 우리의 그 많고 많은 죄, 당연히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 잘남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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