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신 10장 16-19절(마음의 할례)1512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10장 16-19절입니다. 구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보통 일반 사람들이 보는 하나님하고 우리 성령 받은 성도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일반 사람에게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사건이 들어있지 않아요. 그냥 하늘에 뭔가 어르신네처럼 턱하니 앉아서 명절날 절 받으시는, 안방 차지하고 있는 그런 하나님 인상이고, 그냥 산타클로스 같은 그런 하나님인데, 여기에 진짜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계속 반복을 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사건을.
끄집어내는 것을 전에 있는 사건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가 처한 사건에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를 이 땅에서 구출해내는 분입니다. 구출을 우리가 알아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가 이 세상이 좋아도 너무 좋아요.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좋아하느냐 하면 ‘나다움’이라는 그 평가를 바로 그동안 줄곧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느껴왔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나 어때?” “너 괜찮아!” 그걸 누가 이야기해주냐 하면 이 세상이 나한테 그렇게 인정을 해줬어요.
남들로부터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이 땅에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요, 목적이 된 겁니다.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 테니. 이게 존재의 이유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 테니. 헤어진 시간만큼 너를 행복하게 해주겠어. 나를 주목하고 주시하고 있는 사람에게 실망시키지 않는 것. 실망시키지 않으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때는 서로 상호 인정하는 그러한 이상적인 모임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상호인정이라고 보는 겁니다.
‘상호인정’ 철학에서 헤겔이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상호 인정한다는 것은, 사회는 왜 혼자 살지, 왜 서로 모여 사는 겁니까? 나는 너에게 인정받고 싶고 너가 나를 버리지 않는 것은 바로 나로 인하여 너를 인정케 하라고 너가 나한테 강요하니까, 너는 나한테 이렇게 투자를 했잖아. 그걸 두자로 부부라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재미로 안 헤어지고 붙어사는 겁니다. “내 아니면 누가 니를 알아 주겠노?” “글쎄 말이다. 당신 아니면 누가 나를 알아 주겠노?” 하나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자기를 인정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 따라 갈래.’ 님아 요단강 건너가지 마라고 따라 붙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떠나 버리면 자기편이 없잖아요. 자기 후원자가 없으니까 그걸 가지고 외롭다고 하는 겁니다. 혼자 있다고 외로운 것이 아니에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옆에 같이 없을 때 외로운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같은 장병들 많아도 외로워요. 왜? 평소에 자기한테 오냐, 오냐 해주는 사람은 그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고참은 이거는 못돼먹었어요. 나를 죽여 버려요. 그러니까 빨리 제대해가지고 다시 옛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그렇게 원하잖아요.
인간이 생겨먹은 것이 태어나면서 항상 내 중심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러한 입장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 저 어때요? 이렇게 내가 하나님을 인정해 줄 테니까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주세요.” “성의를 다하여 하나님 앞에 바칠 테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이 내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이방나라의 이방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이한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 아니면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보통 이방인인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 하는 것은 붙어봐야 아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90퍼센트가 서로 다른 신을 가진 나라끼리 붙은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에 90퍼센트가 전쟁역사이야기에요. 붙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쪽이 졌어요. 최종적으로. 10회전 뛰고 난 뒤에 완전히 KO패 했습니다. 완전히 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요. 심지어 선지자들도 수치로 여겼어요. “하나님이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만드신 백성이 저 우상에게 져버리면 다른 백성들이 여호와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여, 우리 민족을 살려주세요.” 라고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저 후반 쪽으로 가면 굉장히 기도를 해요.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마옵소서. 유대나라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70년 겪어보고!”
“70년 겪어보고!” 그 70년을 가지고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성도의 인생과 이 세상의 인생과, 그냥 일반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과 정말 성령이, 십자가 영이 임한 사람과 어떻게 구원 받는가를 아느냐면 붙어보면 알아요. 붙어보면 아는데 일반적으로 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이렇게 했더니만 복이 왔더라. 이렇게 기도를 했더니만, 이렇게 찬양을 했더니만, 뭐 어떻게 했더니만 이렇게 하시더라. 항상 내가 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애가 좋은 대학에 갔다든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순적이 일이 잘 풀렸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반해서 진짜 성령 받은 성도는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인줄 몰랐는데 아, 주께서 근원적으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셨다. 나는 내 행위로 의를 만들어서 그 의로 천국 간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나의 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함을 끊어 비리고 나의 행함을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행하심 가지고만 하나님께 원서접수가 되고 벌써 합격통지서가, 주님의 의로만 합격통지서가 날라 온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너무 황당해서 묻지요. “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천국을 갔어? 왜 그래?” 라고 물을 때에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내 속에 삽입시켜서 내가 하는 내 인생을 하나님의 언약의 장으로 필드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내가 그런 희한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저쪽에서 말하기를 “그러면 그 언약을 나도 알고 싶다.”고 하거든요.
자, 이제부터 오늘 본문이 전개가 됩니다. 이제부터 좀 복잡하거든요. 오늘 본문 내용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면, 그럼 이 목사님 당신 주장에 의하면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니까 우리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아무것도 할 것도 없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서 이렇게 따지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 뭘 준비하느냐 하면 이걸 준비해요.
거기 18절에 보면, 16절에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고 18절에 준비된 것이 있어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그 다음에 19절에 뭐냐, “너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었음이라” 이래 되어 있어요. 머리 좋은 사람은 단번에 딱 떠오릅니다. 마음에 할례 행하라는 것이 내가 나한테 내리는 나의 처방이 아니라 주변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나를 포위하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당시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입니다. 이제는 이거만 외우세요. 마음에 할례 행함과 내 주변에 나타난 고아와 과부가 어떤 연결성을 갖고 있느냐, 이것만 따지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그렇죠? 근데 지금 이 고아와 과부가 나타난 것은 도와주라고 나타난 것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걸 도와주면 안 돼요. 제가 지금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도대체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지 않으면 누굴 도와줘? 제가 오전에 그런 이야기했죠.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땅에 있는 존재는 그 출처를 찾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죠.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후딱 지나가니까. 어떤 집사님은 말하기를 설교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다른 집사님은 듣는 중에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나를 구원하는 원인을 내 행함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없는 걸로 간주해요. 뭐든지 내가 뭘 행해야 그게 원인이 되는 것으로 우리가 납득이 되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믿으라 하는 것은 너무 우리한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너무 무리한 요구에요. 내가 이번 일이 잘 된 것은 내가 기도했든지, 헌금했든지 뭔가 꼼지락꼼지락 내 쪽에서 한 게 있어서 그것을 이쁘게 봐서 좋은 결과를 주셨다. 이게 정말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이거 없었는데 그냥 줬다면 그 원인을 딴 데서 찾아야 되거든요. 딴 데서 찾을 수가 없어요.
땅의 존재는 바다까지 기어갈 수가 없어요. 바다 가봐야 물결만 출렁이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언약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찾을 수 없는데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겨놓았기 때문에. 그걸 창세전부터 비밀이라고 하는데, 복음은 비밀이거든요. 숨겨놓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이게 바다에서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올라온다고요. 올라온 무리들이 난데없는 고아와 과부들이에요.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의 민족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의 민족이 되어야 될 이유는, 그 히브리인들은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들 중에 지도자라고 자청하는 모세가 지명수배범이 되어서 도망가잖아요.
도망가고 할 때, 그 모세가 태어난 곳이 어디냐 하면 물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에요. 모세가. 아들 다 죽일 때 모세 누나가 딱 지켜봐가지고 상자에 넣어서 물에 띄웠는데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다가 그 애를 보고 애완견 키우듯이 “아, 예쁜 아이다! 내가 키울게.” 해서 애를 키우게 된 거예요. 물에서 건져냈다고 해서 이름이 모세입니다. 근데 모세 혼자만 물에서 건져냈지 다른 민족들은 물하고 관계없어요. 그런데 모세가 다른 동네, 인간들의 원천, 이스라엘이 언약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상상도 못한 다른 원인 제공자에 의해서 모세가 히브리인에 합류가 되어버려요.
합류가 되면서 히브리인들의 운명이 졸지에 통째로 바뀌고 맙니다. 모세가 “나가자!” “나가기는 어딜 나가?” 우리는 나가자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의 압박이 심하니까 우리가 좀 이렇게 수월하게 이 땅에 살도록, 그냥 이 땅이에요. 이 세상에 살도록 원한거지, 나가기는 어딜 나가. 모세가 “나가자!” “아나, 니나 나가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그냥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다.” 참 오늘날 교인들 모습하고 똑같아요. “여러분 갑시다.” “아니, 아니 이 땅에서 살고 싶어.” 교회 나와도 그냥 이 땅에서 자식들 있고 상호인정 되는, 아까 상호인정 했죠? 나를 인정해주는 이 동네 있는데, 내가 딴 데 가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데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사랑 받는 재미로 살았는데.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언약이 개입했다는 말은, 내가 예상치도 못하는 다른 동네로 질질 끌려가는 팔자로 바뀌었다고 보시면 돼요. 마음의 할례는 좀 있다 이야기합시다. 지금 마음의 할례는 우리가 엄두도 못내요. 어떻게 할 줄도 몰라요. 그러나 미리 이야기할게요. 마음의 할례라 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 안에 집어넣는 것이 마음의 할례에요. “겸손 합시다.” 이게 마음의 할례 아니에요. “마음을 낮춥시다.” 이게 아니라니깐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사건, 사건이, 낯선 사건이 반복해서 터져 나오는 그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니 속에 누구 들어있는 거예요. 나 말고, 껍데기 나는 뭐냐, 내가 원인입니다. 내가 뭔가 꼼지락 해야 내가 뭔가 얻을 수 있는 그런 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걸 배워왔고 또 남들도 그걸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이랬거든요. 하나님 주권을 주님의 주권으로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은 뭐고, 주의 주권은 뭔지를 그걸 구분을 해드려야 하잖아요. 구분을 해줬어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찬양하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헌금해서 하나님 기쁘게 해드리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선교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하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예배참석해서 신령과 경건으로 예배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 이게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왜? 모든 원인은 내 행위로부터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어째서 그래요? 내가 헌금 안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고, 내가 기도 안 하면 영광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예배 참석 안 하면 하나님이 삐진다고 생각하고, 내가 전도 안 하면 하나님 나라가 축소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나하기 나름으로 영광이 거기서 조절된다고 생각하는 그 방식, 우상숭배입니다. 그게 우상숭배에요. 그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이만큼 산 것도 내가 악착같이 아껴서 쓸 거 안 쓰고 낭비 안 하고 아끼고 그저 저축, 저축, 저축, 그렇게 조심조심 살아서 이만큼이나 살았다.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자식들 남겨두고 엄마가 자식들과 그 고생고생하면서 자기 식당 하나 갖고 싶었는데, 후에 식당을 개업해서 손님 받고 했을 때 자식들이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아낄 때에 철없는 자식이 하는 말이 “엄마 맨날 밥만 먹지 말고 딴 거 먹고 싶어?” 하니까 어느 날 엄마가 지갑에서 돈 꺼내서 짜장면을 사줬는데 자식이 “나는 먹는데 엄마는 왜 안 먹어?” 하니까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고 했어요. 근데 개업식하다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손님 받다가 과로로 쓰려져서 뇌진탕으로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그만큼 사는 것이 누구냐, 어머니 은혜죠.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이런 것 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시대에 푹 잠겨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머리가 희어져 70, 80이 넘어도 한 발자국도 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줄을 몰라요. 그게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에요. All, 모든 것을 바로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무슨 출애굽? 어디 가기는? 이 세상이 전부인데. 사도 바울은 시작을 뭐냐, 누가 죽었는데 누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인 줄 알아요. 어떻게 하든지 조금이라도 노력해서 안 죽고 조금이라도 더 살라고 애를 쓰는데 사도 바울은 죽음 너머서 외쳐버립니다. “죽어도 괜찮다. 야들아!” 이래 된 거예요. “죽어도 상관없는 그런 세계가 기다리고 있단다.” 하고 외쳐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게 “당신이 그렇게 건방지게 이야기하는 근거를 대라!”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어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게 근거다. 실제로 죽었다가 실제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겁니다. 이게 핵심이 되어가지고 줄줄이 따라오면서 이 세상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연관을 시키는 겁니다.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거예요. 출애굽 사건 이전에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이야기가 없어요. 출애굽 사건이 먼저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알고 있던 애굽 사고방식에 구멍 내라! 찢어버려라! 째버려라!” 그 말입니다. “내가 잘해서 이만큼 살았다는 그것을 찢어버려라!” 거기에 구멍을 뚫어야 해요. 마음 같아서는 송곳 들고서 툭툭 찢고 싶어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는데요. 우리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노골적으로는 안 찾지만, 그래도 은행에 가면 여성주간지 뒤편에 있는 재미로 보는 운세를 보면서 선악과 시험 드는 것 같아요. 이걸 봐야 되느냐? 아니면 신자이기 때문에 안 봐야 하느냐? 안 보려고 하니까 뭔가 더 보고 싶고, 그래도 봤다 하면 본 내 행위의 잘못으로 인하여 요 번 주에 손님 여섯 명이 올 것을 다섯 명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또 걱정이 늘어지고.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손님이 적게 오면 우리는 또 밥 못 먹고 사는데, 또 이런 걱정이 생기고. 뭐 결국은 보죠. 선악과 따먹게 되어 있으니까. 결국 봅니다.
특히 젊은 애들이 야동을 보냐? 마냐? 할 때 결국은 보게 되어 있어요. 회식 자리에서 집사님인데 술을 먹느냐? 마느냐? 결국 먹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들은 버틴다는 그것이거든요. 근데 이 버팀에 큰 잘못이 있어요. 복음 나갑니다. 잘 들으세요. 돌아서면 잊어버렸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 인생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않아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책임져버리면 그거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없어서 그래요.
출애굽 사건은 책임질 능력이 없는 사람을 향하여 ‘대신 죽으심’, 대구 신학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죠. ‘대신 죽으심’이 복음으로써 우리 속에 담기게 하기 위해서 “니가 니 멋대로 한번 책임져봐라. 오히려 너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해결은 안 납니다. 갈등만 증폭될 뿐입니다. 여성지에 나와 있는 점을 보느냐, 마느냐, 맨날 이 갈등을 하는데, 이게 문제가 뭐냐, 책임질 필요도 없는데 아직도 습관이 앞으로의 삶은 오늘의 내 책임여하에, 행동여하에 딸렸다는 그 우상 숭배적 발상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입시 앞두고 갑자기 부모가 안하던 착한 짓들을 많이 하고 내가 하나라도 기도를 더해야 애가 좋은 점수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것은 자식을 내 책임 하에 둔다고 생각하는 발상이 아직도 녹녹하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아예 망했다고 생각을 해봐라. 어느 정도로? 더 이상 내가 내 인생을 책임 못 질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그러면 나는 나한테 내 할 도리를 다했는데, 더는 못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더는 더 못하는 그 순간이 바로 니가 가야 될 도착지점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손 못 대는 상황으로 자꾸 유발시켜요. 물을 먹고 싶은데 물이 없고 양식 떨어지고. 이제 출애굽 보이십니까? 신명기 이제 눈에 들어오십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하느냐, 내 힘으로 할 때는 절망적인 거예요. 그러면 매일 주어진 상황은 책임자가 따로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딪치게 하시는 상황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에 어떤 분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의사인데 치료하면서 그냥 치료하지 않고 물어보면서 치료하는 거예요. “하나님. 어떤 환자분 왔습니다. 어떤 약을 어떻게 치료해야 합니까?” 그럼 환자가 “의사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합니까?” “몰라도 돼요. 주님이 알아서 하니까.” 이 손님을 보내신 것은 주님이 보냈고, 치료하는 것은 전혀 내가 치료하지 못하고 주님이 나를 사용하시니까 이 환자에게 맞는 것은 어떤 것이 됩니까? 라고 하면서 치료했더니만 99퍼센트 완치. 이 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남들은 굉장히 뭐 자랑질 한다고 하지만 자랑질 하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은 진심이에요. 그 정도로 무능하다는 겁니다.
제발 무능하세요. 무능 합시다. 인정받을 생각 하지 말고. 무능함으로 받읍시다. “니 무능하지?” “그렇지! 아이고. 그거 최고의 칭찬이다.” 이렇게 살아갈 때 자기 마음이 찢어진 거, 마치 육체의 할례가 꼬추를 자른 것처럼, 내 마음의 중심부를 성령으로 자를 때, 내 마음의 할례가 그 할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변에 고아와 과부, 아무 뿌리 없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에 바로 내 모습이 그들의 모습인 것을 왜 우리는 알지 못하고 도와 줄 생각부터 먼저 했습니까? 우리가 진정 이 땅에서 고아와 과부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