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신 10장 12-13절(하나님 사랑)1512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10장 12-13절입니다. 구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방금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근데, 명령을 들었는데 우리는 이걸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경고로 듣게 돼요. 경고와 명령의 차이점은 이겁니다. 경고한다는 것은 “내가 분명히 언급했지? 니가 만약에 못 지키면 니 아마 각오해야 될 걸?” 이거는 경고입니다. 근데 명령은 그게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입장에서 주는 명령인데, 내가 그걸 행함에 따라서 결과가 결정된다는 하나의 경고용으로 듣고 있을 정도로 우리 자체가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에요. 문제가 굉장히 많아요.
그러면 명령은 뭐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는 왜 그리 사랑스럽지? 왜 그리 예뻐?” 그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뭔가 내가 해야 할 게 없어져버려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명령은 뭐냐, 명령에 합당한 결과물을 명령하는 쪽에서 책임지고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모든 명령은 우리한테 오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오지 않고 주님이 자기의 것으로 돌려버려요.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을 누가 지키느냐, 내가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에 인터셉트(intercept상대편의 패스를 중간에서 가로챔. 또는 그런 일)해서 주님이 가져가서 주님이 다 이루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는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처지였어.” 라고 그걸 공짜로 은혜로 주셔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 하면, 내 나라가 아니고 주 아들의 나라에 은혜로 그냥 들어가기만 했던 백성으로 사는 겁니다. 자신의 면류관을 반납하죠. “이거는 제가 쓸 입장이 아니고 주님이 쓰셔야 합당한데 제가 쓴다는 것이 주제 넘는 짓입니다. 주여!”라고 하면서 천국 가서 면류관을 반납해버립니다.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우리가 피조물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처음부터 죄 짓고 난 뒤에 피조물의 자리를 떠났는데, 피조물의 자리가 뭐냐 하면 창조주의 원칙과 창조주의 의견만 남아있어야 될 자리가 피조물인데 우리는 그 피조물을 걷어차 버리고 나름대로의 새로 시작한 것들로 나를 채워 넣고 말았어요. 나는 옛날에 이만큼 잘 나갔다. 나는 공부 잘했다. 이런 것들.
내가 생각하기에는 괜찮다 하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서 꽉꽉 채워 넣고 그것가지고 주님 앞에 자랑질 하고 싶은 거예요. 뭐 신앙생활 10년 했다. 이런 것들도 포함되죠. 가장 기본적으로 피조물조차도 되지 못하면서 감히 주를 섬긴다고 나선다는 것, 지 주제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는 이야기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신명기와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한 가지만 끄집어내면 돼요. 내가 어떻게 지킵니까? 가 아니라 내가 못한 것을 주님이 어떻게 해내십니까? 그것만 발견하면 돼요. 성경해석하기 참 쉽죠. 참 쉽고 즐겁죠.
애초부터 아무것도 안 되는 인간을 되게 하는 겁니다. 아까 예를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가 기뻐하는 자로부터 영광 받는다고 할 때, 크리스마스 때 누가복음 2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 평화로다” 할 때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 평화, “니는 내가 볼 때 참 예쁜데, 새삼스럽게 재롱잔치를 벌이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 이쁜 나를 니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이쁜 존재로 내가 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뭘 해도, 진짜 자장면 먹다가 이빨사이에 고춧가루 껴도 그래도 예뻐요. 칠칠치 못하다고 하겠지만 연애할 때는 어쨌든 간에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이쁨이 상대방의 행동여하와 관계없이 내가 제공한 이쁨이 그쪽에 도달해서 그걸 다시 회수하면서, 본인이 던진 사랑을 회수하면서 본인이 감격하고 감동하는 겁니다. 그게 아가서에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근데 이 세상에는 불량스럽게도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유포되는 거짓 사랑으로 꽉 차 있어요. 그러니까 설교하기가 이제부터 힘들어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준비한 사랑은 따로 있습니다. 자, 거짓된 사랑을 주님이 준비한 사랑으로 그걸 주께서 어떻게 옮기시는지 한번 시작해볼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사랑을 가지고 들이미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은 그걸 떼 내는데 이게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아는 사랑, 여기에 그들은 목을 매는 겁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나는 평생을 몸 바쳐 왔기 때문에.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받기를 원하거든요. 사랑받기 원하는데 그 사랑을 떼 내어버리면 누가 나를 사랑해줘요. 그러니까 그게 겁나서 자기 사랑을 못 떼 내는 겁니다. 남들이 욕을 하건, 남들이 어떤 비난을 해도 준영에 대한 내 사랑은 변함이 없어요. 준영이 하면 모르죠. 드라마 이야기예요. 황금복 이야기입니다. 뭐 차로 들이밀고 온갖 것을 다해도 나는 준영이만 잘 되면 어떤 것을 다 해도 상관없다. 뭐 차화연인가? 자식이 철창 갇혀도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엄마라는 드라마에 그런 게 있어요. 볼 필요는 없어요. 그 드라마가 의미 있는 것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악해도 자식 사랑이 그렇게 지독하다면 그러면 나는 별거냐 이 말이죠. 나는 자식 사랑 안 해요? 나는 나 사랑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 더 좋아합니까? 더 사랑합니까?
유치원에서 달리기하다가 남의 자식 일등하면 기분이 막 좋아져요? 지 자식 엎어지게 되면 그날 운동회 다 망쳤어요. 기분 나빠서. 옆에 치면서 반칙을 해보세요. 남자가 되어서 반칙 한 번 할 수 있지? 라면서 막 넘어가요. 무조건 일등하면 얼마나 기쁩니까? 이러한 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집착과 집념, 이걸 자기 힘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못해요. 못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감안해줘야 해요. 못하기에 주께서 해내십니다. 못하기에. 목사님 성경에서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님 말씀은 떨치는 말씀을 하셨어요. 떨치는 말씀을.
어떤 부자가 와서 예수님한테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할 때에 주께서는 모든 걸 팔라고 하니까 삐져서 가버렸잖아요. 그걸 보고 제자들이 더 놀랬어요. 그러면 부자가 어떻게 됩니까? 부자는 천국 가는데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제자들이 점점 더 마음이 주눅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사람은 못한다. 여기 와서 제자들은 할 말을 잃었죠. 사람은 자기 구원을 못한다. 그 뒤에 준비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이 제대로 들리려면 내가 못한다가 확정된 위치에서만 하나님은 하신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님의 모든 설교라 하는 것은 이미 인간의 잘못 형성된 것 속에 둘러싸인 인간의 선입관과 잘못된 개념들을 떨쳐버리는 작업을 하면서 동일한 언어,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오해할만하죠.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의 아쉬운 것을 한이 맺혀서 주님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현재 사회에서 가장 이슈 되는 문제가 뭐냐 하면 유산 문제잖아요. 유산문제. 애 하나만 낳았으면 되는데 둘 셋씩 낳아서 죽고 난 뒤에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유산을 형이 다 가져 간 겁니다. 동생이 가만있을 동생이 아니죠. 왜 n의1로 나누지 않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되는 분에게 찾아왔죠. 정의라는 개념도 잘못된 개념입니다. 어쨌든 관계없어요. 하여튼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 “예수님은 현명한 재판장이니까 제 소원을 들어주실 줄 압니다. 내 형이 유산을 다 가져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형한테 제 몫을 좀 달라고 이야기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니까 이르시되 누가복음 12장 14절,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희들의 재판장으로 이 땅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말한 정의실현? 그거는 정의실현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동생, 니가 나한테 자문구할 때 니가 탐심이 있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니가 탐심이 있는 이상, 탐심에서 비롯한 개념은 다 엉터리 개념입니다. 형이 가져간 유산을 나한테 돌려주옵소서. 남들 보기에는 정의로운 것 같죠. n분의1로 나누라는 것이 정의롭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속에서 뭘 보느냐, 탐심을 보는 겁니다. 분명히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달려들어라. 정당방위다. 이게 아니고 왼뺨을 대줘라. 어떤 사람이 오리를 가자하거든, 2키로를 가자하거든 4키로를 가줘라. 어떤 사람이 겉옷을 달라하거든, 점퍼 같은 것을 달라하는 거예요. 신상 나온 거 달라고 할 때, 내복까지 벗어주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내가 행할 수 있는 법을 내가 준수함으로써 천국가도 당당하게 가겠다는 우리의 심보 자체를 탐심으로 보는 겁니다. 우상숭배로 보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건전한 법을 만들어서 그걸 지켰다는 것을 담보로 해서 천국에 넣어달라고 들이미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탐심이 되는 겁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이 법을 니가 뭔데 만드느냐? 니가 만든 법은 항상 너의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성화론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화론에 있어서 거룩하다, 거룩 안 하다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 본인이 행동 한 만큼 정하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행동한 만큼.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성만찬 행했다. 성만찬 행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주일에 교인들이 오는데 멀쩡한 사람도 있고 멀쩡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때에, 말은 안 해도 ‘그러니까 자기를 돌아보고 성만찬을 행해야지. 그래. 왜 그걸 함부로 먹었대.’ 말은 안 해도 비웃는데, 문제는 목사가 감기 들렸다면 이럴 경우에 문제가 돼요. 그럴 때 이게 인과관계가 규명돼야 하고 자기를 안 돌아보고 성만찬을 받아서 아픈지, 아니면 기운이 빠져서 아픈지, 인과관계를 정립할 사람이 누가 등장합니까? 아무도 등장할 사람 없어요.
인간은 얼마나 자기위주냐 하면 자기 잘남을 기본으로 빼돌리고 시작을 해요. 이야기할 때. 일단 나는 잘났다는 것을 빼돌리고 시작하니까, 주님은 그걸 바꾸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뒤에 어떤 부자가 창고를 짓고 여러 해 물건을 쌓아두고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 밤에 니 영혼을 데려가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호흡 주신 분이 호흡을 취해버리면 잘 살기 위해서 남겨둔 모든 것, 보람상조보험, 동부화재, 그런 것들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느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이미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못 벗어난 주제에 거기다가 주님의 사랑을 덧붙이려고 하지 마라. 이 두 개가 안 붙어져요. 본드로 안 붙어지게 되어 있다고요. 내 사랑이 이게 거짓되면, 사랑을 모독하는 그러한 괴물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해야 그 다음에 주의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나를 사랑하는 내 사랑이 버티고 있는 이상은 주님의 사랑이 이 사랑이라고 위장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떨쳐버리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 좀 들어주면 되는데 와 가지고 책망 받아요. 이거 뭐냐 하면 니 자신을 보라. 니 속을 보라는 겁니다.
미리 결론내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일은 예수님 내부에 있는 내부 환경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니가 속해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이 예수님이 담고 있는 환경과 이게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복음이에요. 자기는 멀쩡한 줄 알고 자꾸 주님만 믿는다고 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게 바꿔치기가 돼야 해요. 내 속에 있는 현실관가 주님 속에 있는 현실관을 주님 걸로 바꿔치기 해야 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바꿔치기는 안 되죠. 일단 바꿔치기가 안된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기쁜 소식입니다. 괜히 달라고 설쳐대면 골치 아파요. 또 한 가지 떨쳐버리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과 관련돼서 나오는 유명한 예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를 두고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 본문 가지고 설명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율법사가 하는 말이 지키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그걸 지킬 수 있도록 뭔가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뭐가 궁금한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이웃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님 보기에는 같잖죠. 내가 지킬 수 있는 법을 내가 지킴으로써 그걸 담보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그건 상상한 천국이고,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골로새서 1장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3절).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밝혀주셨을 때만 아들의 나라이지, 인간이 상상한 그 나라는 아니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밝히신 그 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면, 니 행함으로 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의지함으로써 갈 수 있는 것. 그 나라가,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바로 아들의 나라. 진짜 나타난 천국이거든요. 그러면 뭐만 바꾸면 되겠습니까? 행함의 원칙을 믿음의 원칙으로 이걸 바꾸시기만 하면 되는데 인간이 이걸 바꿀 능력이 없어요. 왜냐하면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기가 평소에 행한 것 중에 믿음이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행동, 밥 먹는다, 뭐 한다, 하는 것 중에도, 뭐 길을 간다, 차를 탄다, 그 중에 믿는다가 행함의 범주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걸 행함에서 믿음으로 따로 뽑아낼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반드시 인간이 믿게 되게 되면 앞에 내가 믿었다고 자랑질하기 때문에 이게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믿는다는 것도 행함이고 믿는다고 하는 것도 행함이고 인간은 자기 행함에서 탈피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사의 어리석음과 말도 안되는 망발을 두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이 이웃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이웃의 특징은 뭐냐,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에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책임질 필요도 없는데 나서서 책임지는 사람,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이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을 사마리아인 이야기하면서 그걸 바깥으로 끄집어내면서 그걸 다시 회수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이뻐하는 사람만 건질 거야.” 해놓고 우리한테 경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명령을 하신 거예요. 왜냐, 명령 내뱉는 자가 이 지상에 있을 수 없는 명령의 실현체를, 완전 실현체를 주님께서 다시 회수하면서 “니는 왜 그리 예뻐!”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립니다. 그 안에는 주님의 내부의 심성이 우리 심성으로 바꿔친 결과물이 우리 성도라는 겁니다.
한 것도 없는데 구원받았습니다. 강도, 세리, 창녀, 뭐 그들이 뭐 했습니까? 강도질한다고 가스관 올라가느라고 애는 썼겠지만. 돈 비율을 높인다고 세리들이 얼마나, 나라에서 받은 책정된 액수보다 더 많이 받는 거예요. 여분의 것은 자기 것이 되는 거예요. 세리라 하는 것은 나라의 세금을 걷는 자들인데, 세금을 걷으면 수수료를 주는데, 세금 액수를 높여버리면 수수료로 간격이 많아지잖아요. 다 자기들 거예요. 그래서 세리들은 부자가 되었어요. 돈 밖에 모르는 자들이죠. 근데 세리 삭개오가 “니 집에 오늘 구원이 이르리라” 하니까 삭개오는 기절해버리는 겁니다. 왜? 구원받을 행위와 태도와 자세가 전혀 안 된 상태거든요.
구원은 뭐냐, 내 쪽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저쪽에서 침범하는 거예요. 침입하는 거예요. 졸지에 자기 영토는 주님의 영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내 안에 주님이 사는 방식이에요. 다른 방식이 아니에요. 기도 열심히 한다고 주님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있어! 내가 쳐들어갈게.” 이 방식입니다. “그냥 있어! 내가 쳐들어갈게.” 그래서 우리는 내빼고 주님은 쳐들어오고. 이런 겁니다. 아가서입니다. 솔로몬이 여자 하나에 꽂혀서 끈질기게 스토커하면서 따라가니까 여자는 도망가기 바빠요. 도망하니까 솔로몬이 그 여자를 위해서 감기약을 주니까 여자는 무서워서 문을 닫는데 손이 문에 끼였는데 여자는 “오지마라고 했잖아요.” 아저씨인지 오빠인지 하니까 “약은 먹어야지.” 하면서 몰약을 손에 쥐어주잖아요. “이게 바로 니가 모르는 내 사랑이다.” 하는 거예요.
끈질기게 도망가더라도, 니가 지옥에 가더라도 나는 지옥에서 끄집어낼 그 집요한 사랑, 그 사랑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자기 행함을 너절하게 내놓습니까? 기도 했니, 뭐 헌금 했니, 그런 것들 다 버리세요. 그게 인간의 자기 사랑에 불과합니다. 이웃이 뭐냐, 여기에 강도 만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가죠. 왜? 지가 강도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지나간 거예요. 지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근데 사마리아 여인은 지가 강도입니까? 아니잖아요. 강도도 아닌데 강도 당한 사람을 본인이 그걸 수용해버려요. 이게 뭐냐 대신 죽으심입니다.
죄는 인간인 짓고 책임은 하나님이 지고. 이 안에 성경 신구약66권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손대지 마! 내가 지킬 테니까. 니가 지키면 니 자랑해. 내가 지킬 때만 내 자랑만 할 거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이것이 간파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간파되어야 해요. 성령이 임한 사람 같으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처지가 그런 처지에서 일부러 찾아오신 거예요. 물론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우리 속에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려 함이죠. 이런 것이 어려운데,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내지도 말았어야 하는데, 우리를 죽게 하고 죽은 그것을 회수해서 그 해골을 가지고 예수님의 자기 사람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집어넣어서 그 완성된 작업물, 결과물을 회수해서 가지가 가져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기 때문에 제가 설교도 더 이상 못하죠. 들을 귀? 아마 들었다 치고 고만 두어야 되겠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본문 신명기이야기 해답이 놀랍게도 누가복음 10장에서 해결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말씀은 너한테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니 속에 있는, 이미 니 속에 장악하고 있는 나, 예수를 위해서 이 말씀을 줬다. 니는 그것을 쳐다보면서 니 속에 있는 주님만 자랑하라. 값없이 생명수 얻는 그 기쁨을 외부로 발산하라. 이게 외부로 발산될 때, 내 자랑하지 않을 때, 그것을 가지고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 자랑질 많이 했습니다. 남을 의식해서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도에 지나지 않고 철딱서니 없는, 내 유산 달라고, 탐심을 내면서 탐심인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서 주님 앞에 많이도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저를 사용해달라고, 주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