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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59강-레위인의 역할(신10;6-8) 1511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30. 07:14

2015-11-29 15:05:23 조회 : 32         
   레위인의 역할 151129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레위인의 역할(신명기 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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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1-29 15:53 
레위인의 역할

2015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신명기 10: 6-8

(10: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 아론이 거기서 죽고 거기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10:7) 또 거기서 발행하여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에서 발행하여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었으며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레위지파의 특이성은 하나님의 지파 숫자 관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분명 13지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12지파로 유지되고 있다고 보십니다. 이러한 관점 변화의 핵에 레위지파의 특이성이 놓여 있습니다. 그 어느 지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지파에 무관하게 따로 독립해서 따로 존재하거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지파 속에 파고들어 있는 지파입니다. 이 레위지파가 그들 내부에 장착하려는 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레위지파가 보여주는 역할이 바로 이 거룩, 곧 ‘구별됨’입니다. 다른 이방민족의 정치체제와 다른 점이 단지 이스라엘의 12지파 자체를 지켜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기존의 12지파를 늘 가짜로 만들고 늘 새롭게 12지파를 조성해내는 원동력이 ‘초월적 지파’라고 할 수 있는 레위지파의 그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존에 이미 있는 이스라엘을 ‘없는 민족’으로 전환하면서 그 현장에서 비로소 새로운 영글어내는 역할이 레위지파 담당입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 살게하는 기능이 작동되는 지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기존의 12지파와 다른 방식의 생존방식을 레위지파는 함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앙에서 반복시키시는 그 죽음의 장치를 유지, 관리, 보수, 가동케 하는 기능과 관련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언약궤’를 가장 근거리에서 사수하는 지파입니다. 거룩을 발생시키는 것이 언약궤입니다. 다른 지파들이 언약궤 가까이 하면 그들은 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대변해주는 지파입니다.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이 중앙에 차지해서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없는 곳에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되면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왜 분노하시느냐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힘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자기만의 나라의 세상의 중심이다 고 믿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바로 이스라엘 다른 지파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제단에 내리시는 분노의 뜻을 다른 백성들에게 전달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길을 잡은 셈입니다. 이는 인간쪽으로 개발해나가는 천국가는 길을 모두 거짓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들만 천국가는 길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는데 유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인들은 매뉴얼대로 제사를 돕고, 제사장들은 매뉴얼대로 제사를 치르지만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 멸망하는 코스를 접어들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친히 세운 제도와 형식을 갖추어놓고서는 그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겁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모든 나라는 마땅히 멸망해야 될 자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분노와 멸망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이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길을 개척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지은 죄의 진수를 밝히시려고 하십니다.

즉 매뉴얼대로 하는 바로 그 점이 인간들이 근원적인 죄와 연계되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노선 바꾸기’는 새로운 노선을 따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완벽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그 와중에서 그동안 묻혀던 죄가 발췌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할 때에, 사적 기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정된 장소에 가서, 지정된 사람을 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지정된 장소가 바로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는 제단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의 취지와 만나게 됩니다. ‘죄용서 노선’ 위에서 비로소 기도가 성사됩니다.

그런데 죄용서는 ‘용서하신 행위’가 죄지는 행위보다 먼저 발생하게 됩니다. 마치 말 뒤에 수레가 있는 식이 아니라 말 앞에 수레가 있는 식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방식에는 이런 논리가 수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이해되는 것은 오직 하나, 주신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그 결과로 복을 받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방식으로 본인의 근원적 죄가 들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리어 자신의 실행한 법지키기가 자신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오해를 유발하게 합니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노선을 꾸준히 뻗어가게 하는 일을 뿐입니다. 12지파를 대표해서 레위지파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분노가 그것을 삭히 방식과 동반해서 어떤 식으로 해소되는지를 다른 지파에서 알려주라는 취지에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 자체적으로 레위지파마저 분노의 대상이 됨을 알리는 신호가 떠올라야 합니다. 바로 그런 분이 선지자들이요 신약에는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사무엘이나 에스라나 에스겔이나 모두 레위지파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레위지파와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길이 다르면 풍경도 다르게 마련입니다.

성도는 본인조차 예상못한 낯선 길 유발자로 사용되어집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곧 죄의 반복임을 알게 되는 현장이 이어지는 노선입니다. 이 노선은 예수님께서 하늘 쪽에서 터놓은 구원의 길입니다. 이로서 인간 자체가 범죄 현장에 널려있는 증거물로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즉 인간이 가짜입니다. 이 가짜로 알려지는 그 현장에 숨어계신 구원자가 등장합니다. 그냥 등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치 않는 사태를 강요하시면서 나타나십니다. 이런 상황이 곧 구원된 상황입니다.

사무엘, 에스겔, 에스라 등등의 선지자들은 레위지파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공통점으로 제시하는 예언의 내용은 ‘미래에 오실 어떤 분’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거룩을 유발하는 현장은 미리 죄의 현장이라고 통보가 간다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란, 언약의 완성도를 드러냅니다. 곧 거룩이란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상 못한 거룩에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1-30 06:16 
59강-신 10장 6-8절(레위인의 역할)151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10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 아론이 거기서 죽고 거기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또 거기서 발행하여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에서 발행하여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었으며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레위인들이 있거든요. 열 두 지파는 실은 열 세 지파에요. 열 세 지파인데, 두 지파로 묶어내면서 한 지파가 초월적 지파가 되는 겁니다. 초월적 지파라 하는 것은 모든 지파 속에 분산되어서 다 들어가요. 한 지파가 열 두 지파 속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이 말은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레위 지파가 쥐는 겁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가 주도권을 쥐게 되면 다른 지파가 좀 불평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죠. 다른 지파가 불평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에 레위 지파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레위 언약, 모세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과 땅에 유일하게 연결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다른 이스라엘 지파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 안 됩니다. 레위 지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와 관련되어 있는 것과 우리가 단독적으로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기도가 안 돼요. 레위 지파가 대신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 응답이 안 됩니다. 아이, 지금 교회가요, 나도 한 기도 한다고 나선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교회에. 그래서 뭐 “아버지!”라고 부르고 “주여!”라고 부르면 응답이 되는 줄 알지만 이 성경은 신이 있다고 상정하고 나는 지상에 있으니까 그냥 댓다 부르면 되고, 그것도 효과 있으려면 그 뒤에 주술처럼 ‘예수’ 이름이라는 고 멘트만 갖다 붙이면 응답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려면 그 기도가 통하는 유일한 그 지점에 있어야 돼요. 그러나 그 지점은 아무나 갈 수가 없고 그 지점까지 다른 지파가 오게 되면 “당신이 기도할 것이 뭡니까?” 라고 누가 받느냐 하면 레위 지파가 딱 입구에서 받습니다. “저는 이런, 이런 기도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제가 대신 기도할 테니까 당신은 여기 성소 바깥에서 머물고 있고 우리가 성소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레위 지파는 제사장에게 일임을 하죠.

일임할 때, 그냥 일임을 하면 안 돼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근데 그 제물을 그냥 들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냥 뇌물 받듯이 받는 것이 아니니까.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거기에다 인정하고, 제사장이 안수를 하고 그래서 제물을 받고 그 제물을 가지고 제단에 태울 때에 그때 그 사람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에이, 목사님 옛날에는 그랬겠죠.” 옛날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마치 향로처럼 역할을 해서 성도의 기도만 흠향하시고 받으십니다.

이게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왜 그리 복잡합니까?” 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아쉬운 것을 주께서 아신다면, 우리가 아쉽다고 이야기하면 주께서 들어주셔야 되지. 왜 그리 복잡합니까?”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정답은 이겁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기도만 주께서 응답하시는 식으로 기도케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으로써 니 입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게 했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이미 추방된 존재에요. 추방된 존재와는 의논하지 않습니다. 상대하지 않아요. 상종하지 않습니다. “이게 어디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이 “레위인이 뭡니까?” “제사장이 뭡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 하라고 하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라고.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뭐, 민주화 운동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 그런 것 아닙니다. 정치적인 문제 아니에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 언제, 언제부터인가, 창세기 3장부터 지금까지 계속, 줄곧 분노하고 있어요. 그래야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추방시킨 취지가 세상 끝날까지 계속 갑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옛날 구닥다리입니다. 노아 언약 때에 임시적으로 유지됐던 그 하늘과 그 땅인데, 노아 언약이 완성이 되고 새 언약이 돼버리면 이걸 갈아치우게 해요. 갈아치웁니다. 이제는 계절이 있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치기 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물론 성경에는 그거 나와 있는 것은 알지만은, 그게 실제로 그렇게 됩니까?” 라고 물어보신다면 실제로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많이 있어요.

그게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행적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물 위를 걸어왔습니다. 신기한 게 아닙니다.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니가 아는 범위에서 내 해석과 내 행동과 내 말이 해석이 안 되지? 너 문제 있어.” 그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가장 그 시대에 말씀에 대해서 최고로 잘 준수했던 집단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일거에 쳐버립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플러스, 알파,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요만큼 모자란다가 아니라 노선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이 납득이 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수집한 것, 그게 실수고 잘못이라는 겁니다. 니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끌어 모아 봤자, 니가 끌어 모은 것은 니 스스로 니를 정죄하지 못해요. 역시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지 자랑밖에는 안 나오지, 나 문제 있다는 그 생각은, 그 모아놓은 자료에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게 안 나오면 내가 왜 죽는지를 몰라요. 늙어죽겠지. 늙어죽는 것이 아니거든요. 로마서 6장에 보면 죄 값으로 죽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죄 값으로 죽는다면 죄를 안 지으면 될 거 아니냐? 이래 나와요. 문제는 인간은 자기 죄를 모른다는 이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위적으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만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저 교도소에 가있는 사형수가 아무리 극한 죄를 지어도 여전히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어요. 이거는 사회가 나를 버렸다든지,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났다든지, 반드시 마지막 남아 있는 자기 의로움 같은 것이 있어요. 반드시. 내가 나쁜 인간이지만 전적으로는 나쁜 인간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칼빈이 “인간은 전적 죄인이다.” 라고 하는 그것은 사실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 이래 나와야 돼요. 인간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죄를 짓게 되면 바르게 살자는 운동이 돼버립니다. 새마을 운동 할 일 없거든요. 그래 나오면 안 되고, 죄인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은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플러스해야 해요. 내가 내 행동은 아무리 싸잡고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절제한다 할지라도 거기서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의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은 구원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더, 더, 더 나아가면 구원 안 받아야 된다. 구원 안 받으면 돼요. 그럼 답답할 것 없잖아요. 실력 안 되면 떨어지면 그만이잖아요.

이걸 사도 바울이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고자 노력할 때 주께서는 그것을 너는 죄인이라고 지적이 왔을 때, 사도 바울에게 너는 죄인이라고 지적한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너로 인하여 내가 상처받을 때, 그 상처를 도로 나한테 줄 때에만, 비로소 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셨구나! 아는 순간만 죄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근데 그 죄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의가 동반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그래서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더 새로운 죄를 개발시켜서 알게 하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새로운 죄를. 기도하는 것도 죄, 헌금하는 것도 죄, 예배참석 하는 것도 죄, 피아노 반주도 죄, 모든 것이 죄가 되야되는 거죠. 좀 더 정확한 터치, 뭐 이런 것까지, 조성진처럼 되지 못하는 것, 죄. 노선을 바꿔야 되는데, 지금 문제는 이거에요.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가는 것밖에는 몰라요. 오신 길을 모릅니다. 오신 길로 가야 갈 수 있어요. 오신 길로. 근데 그 길은 이방인들은 모르고 하나님께서는 열 두 지파 위에다가 초월적 지파, 열세 번째 지파, 레위 지파를 두셔 가지고, 레위 지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 속속 내부에 들어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레위 지파 따로 있고 그들 지파 따로 있으면, 이게 다른 지파들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상대자가 돼버려요. 사실 이스라엘이 그것 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레위지파조차도 이해를 못한 거죠. 근데 그 레위지파가 그들의 지역에 있는 것뿐 아니고, 그것은 상징이고요. 그들의 마음속까지 레위지파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사사기에 와서는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사사기에 와서 거부했어요. “내 땅은 내 땅이지. 니가 뭔데?” 그래서 레위지파들이 살 곳이 없어가지고 이거 뭐 온 동네에 다 돌아다녔어요. 삯을 복비로 주겠다고 해서 삯을 받기 위해서 점쟁이질 하면서 온 동네에 다 돌아다녔어요. 그래서 사사기가 그렇게 개판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레위지파가 있는데 우리는 지역만 같이 섞여 산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 돼요. 그렇게 끝나지 않고 레위지파 완성이 새 언약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새 언약 가는 통로가운데서 레위지파가 어떤 식으로 개인의 영혼과 마음까지 파고 들어왔느냐 하는 그 흔적과 경로를 추적해가는 겁니다. 그걸 추적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추적하는가, 레위지파 출신들이 하는 기능들이 있어요. 그 기능들이, 이번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했는데, 에스라가 레위지파에 속합니다. 그 전보다 중요한 기능은 에스겔이에요. 에스겔이 레위지파에 속합니다. 제사장이에요.

그리고 레위지파에 속한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가 하나님의 분노를 가지고 우리의 영혼까지 들어가려면, 그러면 그들은 어떤 자세,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낯설게 나타나는데, 이게 낯설다는 말은 기존의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게 습관화되어서 그게 현실로 굳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이나 선지자급의 제사장들은 그들이 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가버려요. 예를 들어서 엘리제사장 맞은편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사무엘이 있어요. 사무엘은 역시 레위지파에요.

근데 어떻게 같은 시대에 제사장이, 레위지파가 둘이 등장했습니다. 엘리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거는 망해야 되고, 망한 것과 동시에 이쪽 사무엘 쪽의 예언은 성취가 되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심판받아라. 심판받을 때 고마워할 줄 알아라. 심판 속에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 죄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거예요. 심판 속에, 심판주가 곧 구원주입니다. 너희에게 심판주려고 등장할 때 섭섭해 하지마라. 그게 구원의 방식이다. 다른 방식은 기대하지마라. 그게 구원의 방식이라는 거죠.

그러면 노선 바꾸기가 일어나는데, 어떻게 노선을 바꾸느냐, 제가 지난 금요일에 광주를 다녀왔는데, 광주 88고속도로 완공이 일 개월도 안 남았어요. 보통 광주에 갈 때는 세 시간 사십분 걸리고 올 때는 세 시간 내지 세 시간 십분 걸려요. 심야버스타고 오는데 버스 운전기사가 아주 놀라면서 자기도 두 시간 이 십 분 만에 왔다는 거예요. 자기도 신기록 세운 게 두 시간 이 십 분. 왜 그러냐 하면 새 길을 갔는데 이게 터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새 길. 아직 완공은 안 됐고 편도로 갔는데, 새 길을 가다보니까, 그냥 십 년 이상을 왔다 갔다 했거든요. 풍경이 바뀌어요. 길이 바뀌니까 풍경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레위지파가 이야기하고, 열 세 지파 족속들이 가면서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 풍경을 낯설게 다 바꾸어놓는 효과를 제공합니다. 그때 되면 그 전에 거짓 제사장들, 기존의 정치적 제사장들과 선지자적인 제사장들과 드디어 맞대결이 계속 일어나죠. 맞대결이 그냥 수월하게 노선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맞대결이 일어난다는 말은 거기서 순교와 고난과 핍박과 아픔이 동반하게 되는 겁니다. 기존에 굳어진 그 길, 그 길을 유지하는데 진짜 선지자들, 선지자들이 레위지파들이 많아요. 레위지파의 계열의 진짜 선지자들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사무엘상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사울 왕이 전쟁을 하게 되었어요. 전쟁을 하는데,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 매뉴얼이 뭐냐,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전쟁할 때는 하나님이 통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제사장이 와서 기도를 하고 그 기도의 제물을 받고 난 뒤에 응답이 있을 때 전쟁에 나가야 전쟁에서 승리가 되거든요. 그래서 백성들은 뭐냐 하면 ‘아,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 제사장이 필요하고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필요하고, 제사만 끝나면 이번 전쟁은, 이거는 뭐 가만히 있어도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전에부터 있었던 원래 절차다. 이거 반드시 승리한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게 문제였던 겁니다. 전쟁의 승리를 본인들이 왜 해야 하는지를, 이유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승리하고 싶어서,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케 해줘야 합니다.’ 라는 그들의 일방적인 생각이 어느새 굳어진 겁니다. ‘십년 예수 믿었으니까 십일 년째에도 아무 탈이 없어야 돼요.’ 이런 식으로 십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말이죠.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여러분들도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람이 뭔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게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이게 굳어지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과거가 누적이 되어서 현재를 만들면 안 돼요. 나타나지 않은 미래가 현재를 만들고 나가야 되는데, 우리 인간의 시간관념은 뭐냐, 과거를 참조해서 그게 현재로 굳어진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기억이 있거든요. 기억에서 현실을 보기 때문에. 성령 받은 그 사도들은요, 미래입장에서 살았어요. 미래입장에서.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은 과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이야기하기를, 예수님의 모습을 한 부분, 하나의 퍼즐조각들을 하나씩 쥐고 있어요. 자, 여러분들은 뭘 쥐고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퍼즐조각들을 하나씩 쥐고 있습니다.

근데, 그 퍼즐조각은 본인 원해서가 아니라, 이게 오늘 핵심인데, 절대로 본인이 원해서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거는 남한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 주님한테 따지고 싶어요. ‘주님, 이거 안 한다고 했잖아요? 오늘 김장 안 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주님. 이거 안 한다고 했잖아요? 제가 잘하는 것은 따로 있잖아요. 왜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이 길을, 왜 저보고 가게하십니까?’ 옆에 사람은 “니 뭐라는 거야? 미쳤어? 뭐라는 거야?” 이래 놀리죠. 놀리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에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것이라고 주께서 준비해놓은 것의 실상이니까. 우리는 떠돌이고 나그네 삶이죠. 김정호가 불렀던 <하얀 나비>라는 노래가 있어요. 이거는 찬송가에 안 나오지만. “어디로 갔을까 이 나그네야. 하지만 내가 하얀 나비가 되어서 니 찾아갈게.” 가사가 그렇게 나와요. 가사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어디로 갔는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그냥 남 뒤꽁무니 따라가죠. 바로 기존의 제사장들은 그저 아버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죽으면, 또 손자 하고, 이런 식으로 대를 이어갑니다.

근데 대를 이어가는데,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제사장은 그것을 지적하는 거예요. 그게 너무 상투적이고 관행적이고 형식화될 수밖에 없는,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제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죄 지으라고 이 일을 했겠느 냐?’ 하고 나온 거예요. 딩동! 바로 그거다. 이 말이죠. 죄를 지으라고 제사장 노릇을 한 거예요. 진짜 제사장 따로 있어요. 앞에 있는 제사장들은 제사 드린 죄 값으로 다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짜였어요. 가짜. 진짜가 아니고 가짜.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지가 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그 정당화가 죄가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우리가 못하는데,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맘 두는 쪽으로 주께서는 개입합니다.

살아가면서 이게 풍경이 바뀌는 거예요. 이십대, 삼십대만 해도 ‘이만한 든든한 직장에 이만한 돈만 있으면 나는 꿇리지 않고 살 것이다.’ 라고 보통 이십대, 삼십대에 하거든요. 흔히 그런 거 하잖아요. 결혼식 하기 전에 남자들이 술 약간 먹고 노래방에 가서 임재범의 <고해> 노래 부르면서 이 여자만 주신다면, 이 여자만 허락하신다면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허락했다. 뭐? 허락하면 땡인데요. 뭐. 허락했는데 그래 뭐 어쩌라고? 허락해서 살았다. 그게 다입니까? 애 낳아보세요. 어떻게 되는데? 아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아들 줬다. 뭐? 그 아들 말썽꾸러기이면 어떻게 할래?

우리가 항상 뭐든지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미래에 오실 분에 비춰서, 십자가에 비춰서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중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감추어진 중심은, 너희들이 중심이라고 오해하는 그 뒤편에 숨어있다는 거죠. 그 뒤편에. 제사장이 있는데 이 나라 왜 망하느냐? 제사장이 있는데 적들은 왜 쳐들어오느냐? 그게 바로 제대로 된 메시아를, 그 하나님 은혜를 알 수 있는, 순간순간이 실패한 순간입니다. 주께서 분노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일들이 뜻대로 잘 되죠? 주께서 분노하는 순간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거 급행 1번 추운데 빨리 와야 하는데. 빨리 왔잖아요. 그거 분노하신 거예요. 자 아나 왔다. 이런 것만 원했지? 급행 1번 빨리 타야하는데. 딱 오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주여 제가 기껏 이런 것 때문에 기도했나이까? 다음 것 타면 될 텐테. 도대체 그런 여유가 없어. 왜 그렇게 나는 초조한지. 도대체 하늘의 별 따겠다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인생을, 그렇고 그런 인생을 빨리 갈려고 초조하게 설치는지. 주여. 또 다시 나의 죄를 발견케 하시는군요. 하면서 앞자리에 앉아서 좋다고 가는 거죠.

레위지파는 일종에 가짜입니다. 제사 드리고, 준비하고, 제사장 있고,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죠. 그리고 제물 바치고. 얼마나 편리합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양 바치고, 교회 가주면 되고, 헌금 하면 되고. 얼마나 구원받기 쉬워요? 헌금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주일날엔 딴 데 있고, 주일날엔 가다마 입고 오면 되고. 뭐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게 바로 그 뒤편에 있는, 그 가짜임을 드러내는 뒤쪽에 진짜 구원이 있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고, 우리가 제사장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제사장은 독특한 사람이고, 특이한 사람이고, 외계인입니다.

우리는 외계인이에요. 남들이 다 예스라 할 때 우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게 아니야” 성당이 전부가 아니고 교회 큰 게 전부가 아니고 교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나는 교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속에서 정말 우리는 다른 세계를 봐야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러한 교제, 교류. 그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어리석은 방식으로, 낮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일러주는 겁니다. 길은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길에 들어서게 되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길을 알려줍니다. 새롭게 난 88고속도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면 행복이 전부요, 이러면 성공이라고 자부했을 때 그게 바로 주께서 준비해놓은 죄의 증거고, 범죄의 현장의 증거물인 것을 저희들 이제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제사장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메시아 아닌 것처럼, 멋진 사람, 훌륭한 사람 많이 있지만 그 누구도 그리스도가 아니고 주님 앞에 그저 죄인으로서 형제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